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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흘, 한 달, 더 많은 시간
                                            더글라스 라이트



        "네가 열두 살이 되면," 마리아가 여동생 레나의 가슴을 눈으로 훑으며 말한다.
        "내 브래지어를 줄게." 사흘하고도 한 달. 마리아와 레나의 엄마는 떠나버렸다. 꽤 되는 시간들을 단 둘이 보냈다. 레나와 마리아.

        늦봄의 태양이 창문을 찌르고 들어와 더운 방은 타버린 양파와 상한 우유 냄새가 난다. "가려워?" 레나가 언니에게 묻는다. 마리아는 가렵다. 언젠가 라호가 그녀와 레나 가운데에서 하룻밤을 자고 간 이후부터 가려웠다. 회색 침대보가 깔린, 더러운 침대에서 셋은 함께 잤었다. 그 날밤, 라호와 마리아는 두 시간에 한 번씩 버둥거렸다.

        "원숭이한테 바지 입히는 게 뭐가 재밌다는 거지?" 레나에게라기 보다는 텔레비전 광고 자체에 대고 마리아가 묻는다. 텔레비전은 항상 켜져 있다. 사람들의 목소리이기도 하고 먼 친척 같기도 한 텔레비전은 거실에 놓인 채 하루종일 무언가들을 쏟아낸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레나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들은 만난 적도 없다.

        "바지 입은 원숭이가," 마리아가 말한다. "사람들은 재밌나 보네."

        레나는 자주 그들이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상상한다. 살구색 카펫이 깔린 깨끗한 아파트에서 돌아온 엄마와 함께 사는 상상. 그 아파트는 143번지 길 남쪽 어딘가에 있다. 서쪽 할렘이 아닌 어느 곳에.

        텔레비전은 목축되고 있는 사슴들, 바다에 떠다니는 커다란 얼음 조각들을 보여주더니 빨간 수트를 입은 여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여준다. "알래스카 굴착만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선택권입니다. 우리는 알래스카의 석유가 필요합니다."

        "젠장, 알래스카라니." 마리아가 말한다. "어째서 알래스카에서 온 사람은 한 명도 만날 수  없는 거지?" 그녀가 묻는다.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언제 어딜가나 여기 저기 널려 있잖아. 맨해탄은 꼭 푸에르토리코의 휴가철 같다고. 그치만 알래스카 사람들은 어디서도 볼 수가 없어."

        "가려워?" 레나가 다시금 묻는다. 마리아는 여동생이 엄마가 돌아왔다는 말이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라 쳐다본다.

        "아이스크림," 마리아가 일어서며 말한다. "사러 가자."

        레나는 엄마의 가출을, 그 날 밤 그녀를 깨웠던 소리를 기억한다. 무엇인가가 집안의 벽들을 가로지르는, 광기와 서두름, 공포의 소리였다. 옆 집에 사는 미친 여자가 요리하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그 여자는 요리할 때마다 늘 주위의 모든 것을 요란하게 꽝꽝 내리쳐대곤 했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었다.

        문이 닫히고 누군가가 복도에서 가볍게 기침을 했다. "이 침대보 말야," 레나가 마리아와 함께 쓰는 침대보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시간은 밤 11시거나 자정이거나 새벽 3시였다. "원래는 흰색이었는데."

        "엄마는 돌아오지 않아." 레나 옆에 누우며 마리아가 말했다.
        "어딜 갔는데?" 레나가 물었다.
        "그냥 가버린 거야."

        사흘하고도 한 달이 흘러갔다. "집세는 내지 마." 부엌을 거니는 마리아에게 시선을 둔 채 라호가 말한다. 열 다섯 살, 라호는 남자다. "가진 돈은 그냥 가지고 있어."

        싱크대는 레나가 언제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식사 때 쓰인 접시들로 수북하다. "아직 6개월이 있어." 탁자에 기대는 마리아를 쳐다보며 라호가 말한다.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6개월이 있다고." 그는 천천히 말한다.

        길가 모퉁이의 한 식품점 겸 술집에서는 초콜릿, 바닐라 그리고 코코넛 맛의 아이스크림을 판다. 마리아는 가게 냉장고에서 맥주 두 병을 꺼낸다.
        "이런 것 살 나이가 아닌데." 카운터에 살 물건들을 내려놓는 마리아를 먼저 보고 그 다음엔 레나를 보며 식품점 남자가 말한다.

        "우리 엄마 거예요."  마리아는 이렇게 말하고 25전과 10전짜리 동전으로 뉴포트 담배까지 산다.

        "느이 엄마한테 전해라." 식품점 남자가 말한다. "요즘 얼굴 보기 힘들다고."
남자는 레나에게 윙크하며 포장지가 찢겨진, 반 쯤 부러진 아이스 바를 내민다.
"이건 공짜로 주는 거다." 마리아는 이 식품점 남자에 대해 레나에게 주의를 준 적이 있었다. 남자 스스로 자신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꼭 뭔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굴어," 라고 마리아는 말했었다. "우릴 공격하기 좋을 뭔가를."

        "꼭 전해라, 응?" 반쯤 웃으며 남자가 마리아에게 말한다. "얘기 좀 하고 싶다, 느이 엄마랑."
        
        "아저씨가," 계산한 물건들을 집어들며 마리아가 말한다. "직접 하세요."
        
        식료품점에서 사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레나가 묻는다. "초콜릿은 어떻게 생겼지?" 인공 감미료, 설탕, 식용물감 5번, 이라고 아이스크림 통엔 씌여있다. 그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경제 위기, 산불, 하수구에서 구조된 새끼 고양이 이야기가 나오는 뉴스를 본다.

        "이렇게 생겼지," 아이스크림으로 범벅이 된 혀를 내밀어 보이며 마리아가 말한다.
        "아니, 아직 나무에 달렸을 때 말야. 나무든 어디든 아직 자라고 있을 때."

        마리아가 맥주를 따른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 그녀가 말한다. "왜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항상 자기네 국기를 펄럭이면서 설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엄마는 푸에르토리코 사람이야." 레나가 말한다. "우리도 푸에르토리코 사람이고." 그녀는 자주 그들이 안락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런 푸에르토리코 사람들 말고." 레나가 말한다. "깃발 같은 거 안 흔들어대는 푸에르토리코 사람." 텔레비전에서는 백인 여자가 그녀 옆에 앉은 흑인 남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에게 정말 솔직해지신다면, 우리 모두가 사실은 억압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있잖아," 마리아가 말한다. "알래스카 깃발은 어떻게 생겼지?"
        "한 번도 본 적 없어." 레나가 말한다.
        "왜 한 번도 본 적 없는 줄 알아?" 마리아가 묻는다. "알래스카 사람들은 자기네 깃발 따윌 들고 설치지 않기 때문이야."

        라호가 중국 음식과 맥주 몇 병을 들고 친구들과 찾아온다. "집세는 내지 마." 그가 다시금 말한다.
        "이 침대보는 안 빨아 쓰냐?" 라호의 친구들 중 한 명이 축축하고 구겨진 침대보를 보고 레나에게 묻는다. 레나는 엄마를 떠올리고, 침대보에 대해 묻는 이 소년이 자신의 방에 와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열두살이 되면 마리아에게 받을 브래지어에 대해 생각한다. "한 번도 흰색이었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소년이 가볍게 매트리스를 발로 차며 말한다.
        레나는 방을 나온다. 침착하게 스스로의 셔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레나의 손은 바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리고 긁는다. "젠장." 소년이 레나를 보고 말한다. "너도냐?"

        돈이 있을 리가 없는데 마리아는 어찌된 일인지 돈이 있다. 레나는 엄마가 쓰던 낡은 면도칼을 꺼내 음부의 곤란한 부위에 돋아난 몇 가닥을 밀어버린다. 그렇게 했는데도 가렵다. 화장실의 거울 앞에 서서 레나는 마리아를 부른다. "브래지어 언제 줄 거야?"
        "집 좀 치우자," 마리아가 부엌에서 싱크대에 수북히 쌓인 접시들을 보며 말한다. 둘은 모든 것을 내다 버린다. 접시들, 침대보, 낡은 속옷들.
        "느이 엄마랑 얘기할 게 있다니까." 아이스크림과 맥주를 사러 다시 찾아갔을 때 식료품점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가게 밖에는 뚜껑이 열려버린 소화전이 더운 여름의 길가에, 땀을 흘리는 아이들에게, 지나가는 자동차들에게 가루를 뿌려대고 있다. "느이 엄마 얼굴 본 지 오래됐다." 남자는 웃지 않고 말한다. "엄마한테 필요한 게 나한테 있다고 전해라."
        "침대보도 있나요?" 마리아가 묻는다.
        "침대보?" 남자는 당황해 묻는다. "무슨 뜻이냐? 정말로 침대에 까는 그 침대보 말이냐?"

        "있잖아," 마리아가 레나에게 말한다. "엄마는 이제 없어. 넌 뭘 원하니?"
        둘은 아무것도 깔려있지 않은 매트리스에서, 밤새 긁어대며 잠을 잔다. 거실에서는 텔레비전 소리가 크게 울린다: "난 세상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어." 사흘, 한 달, 그리고 더 많은 시간. 레나는 자주 그들이 안락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상상한다.
        집주인이 들른다.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다." 주인이 레나와 마리아에게 말한다. 거의 열리지도 않은 문의 좁은 틈새로 마리아는 주인을 바라본다. "엄마는 언제 집에 계시냐?"
        "늦게요." 마리아가 주인에게 말한다. "엄만 항상 일해요. 투잡 뛰어요. 남들보다 두배로 오래 일해요."
        "그럼 집세를 내고도 남을 것 아니냐."
        "난 열세살이에요." 마리아가 주인에게 말한다. "내 동생은 열한살이고요." 주인은 이해하는 듯 하다. 이 아이들에게 얘기해 봤자 소용없는 것이다. 집세를 내야 하는 사람은 이 아이들이 아니다.
        "집주인한테 한 푼도 주지 마." 라호가 말한다. 라호는 점점 더 자주 찾아온다. 그는 늘 침착하고 항상 마리아를 훑어본다. 그는 짙은 파랑색의 새 침대보를 자매에게 사 준다.
        "더러워져도 잘 안 보일거야." 그가 말한다.
        "엄마는 이제 없어," 마리아가 레나에게 말한다. "넌 원하는 게 뭐지?"
        "의사가 되고 싶어," 레나가 말한다. "아니면 재봉사나... 아니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전화기에 대고 소곤거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치만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마리아가 말한다. "엄마는 이제 없는데."
        텔레비전엔 아스피린과 발냄새 제거제와 피자와 스타킹이 나온다. "매년 봄마다 대학생들이 입는 보라색 가운이랑 네모낳게 생긴 모자가 갖고 싶어." 레나가 마리아에게 말한다.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는다. "지금보다 나이가 많았으면 좋겠어," 레나가 말한다. "브래지어가 갖고 싶어."

        오늘은 일요일, 혹은 목요일, 혹은 월요일이다. 라호가 이사를 온다. 여전히 레나는 가렵다. "얘기 좀 들어봐," 라고 라호는 자주 말하고, 그 때마다 레나와 마리아는 듣기를 멈춘다.
        마리아는 새 침대보를 깐 침대를 라호와 둘이서만 차지하기 위해 레나를 예전에 엄마가 쓰던 방으로 보낸다. 텅 빈 공기와 발가벗겨진 침대, 여기 저기 상처가 난 화장대가 있는 엄마에 방엔 그 누구도 전에 살았을 것 같지 않다. 창문과 창문 선반은 비둘기 똥들로 보기 흉하다. 레나는 서랍을 열고 양말 한 벌, 티셔츠 한 장, 갈색 블라우스 한 장, 빨간 반바지 등을 찾아낸다. 그 모든 것에서는 밀폐된 곳의 냄새가 난다. 레나는 엄마가 이 옷가지들을 입었을 때의 모습을 기억해 낼 수 없다. 이 옷들을 입은 엄마의 모습도 상상할 수 없다. 엄마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다.

        "돈이 얼마 정도 필요할 것 같아?" 마리아가 레나에게 묻는다.
        텔레비전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쓰는 석유의 70%는 중동에서 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석유는 있습니다. 우리 석유를 쓰지 않는 것은 냉장고에 가득 찬 음식을 썩게 내버려 두고 외식을 나가는 것 과도 같습니다."
        집주인은 집세를 달라고 사나흘에 한 번씩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나 정말 이러기 싫다." 그가 말한다. 텔레비전은 공허한 목소리들, 멀리 있는 세상의 소리들을 내보낸다. 소음은 그들이 사는 아파트의 음악, 그들 삶의 음악이다. "정말 이러기 싫지만 우리 얘기 좀 하자." 집주인은 잠겨진 문 밖에서 말한다. "집세 받아야겠다." 마리아와 라호, 레나는 잠긴 문 안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치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내가 돈이 왜 필요해?" 레나가 마리아에게 묻는다. "나한텐 언니가 있잖아."
        "그러니까 만약에 말야. 만약에 돈이 필요하게 된다면." 마리아가 묻는다. "만약에 너 혼자 살아야 한다면 돈이 얼마 필요할 것 같냐고."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레나는 마리아에게 말한다. "난 돈 필요 없어." 레나가 말한다. "난 엄마가 필요해. 언니가 필요해."

         사흘. 한 달. 그들은 거의 아파트를 떠나지 않는다. 라호는 아파트 안을 돌아다닌다. 옷장들 문을 열었다가 세게 닫아버린다. "이건 왜 매일 켜져 있는 거야?" 라호가 텔레비전을 꺼 버리며 묻는다. "얘기해 봐. 이건 왜 매일 틀어 놓느냐고." "그냥 다시 틀어 놔." 마리아가 침착하게 말한다. "엄마가 항상 틀어놨었어. 텔레비전은 집이고, 소리야." 마리아가 말한다. "내가 편안하지 않을 때 날 편안하게 해 줘." 라호는 레나가 자기 편을 들어주길 바라며 그녀 쪽을 쳐다보지만, 레나에게선 라호를 향한 어떤 동조의 빛도 찾을 수 없다. 라호는 어쩔 수 없이 텔레비전을 다시 튼다. 텔레비전 소리는 텅 빈 공간들을 메우며 방에서 방으로 흘러 다닌다.

        늦여름의 시원해 질 줄 모르는 바람과 더운 무감각 속에서 오후들은 지나간다. "돈이 얼마 정도 필요 할 것 같아?" 맥주를 마시며 마리아가 레나에게 묻는다. 보리, 홉, 이스트, 라고 맥주병엔 씌여 있다. "응? 얼마 필요 할 것 같아?" 마리아가 다시 묻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낯설다. 마치 그들을 공격하기 좋을 만한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식료품점 남자의 목소리처럼, 마리아의 목소리는 긴장돼 있다.
        "이십 달러 아니면 백 달러 아니면 오천 달러." 레나가 마리아에게 말한다. "아이스크림은 얼마 하는데?"
        "아이스크림 값." 마리아가 천천히 생각하며 말한다. "그래. 아이스크림 값."

        
        라호는 레나와 마리아에게 새 옷들을 사 준다. 남들이 다 입는 로카웨어(Rocawear), 션 존 (Sean John) 같은 브랜드다. "이것들 다 진짜야." 상표를 보여주며 라호가 말한다.
        "저번 주에 학교 시작했대." 마리아가 레나에게 말한다.
        "방학은 언제 했더라?" 그녀가 묻고, 자매는 둘 다 웃어버린다.
        뜨거운 물로 하는 목욕과 알코올 소독은 가려움을 좀 덜어준다.
        "레나. 너 생일이 언제지?" 문간에 서서 꽤 오랫동안 레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마침내 라호가 묻는다.
        레나는 라호가 마리아를 쳐다보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걸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오늘이 며칠이지?"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려고 손을 들어올리며 레나가 묻는다. 가끔씩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어떤 느낌인지 잊어버린다.  "오늘이 며칠이지?" 욕조안에 침착하게 누워 레나가 묻는다. 물은 따뜻하고 그녀의 음부는 말끔하게 제모되어 있다. "지금이 무슨 달이지?"
        "그래." 뒤로 한발짝 물러서며, 단념했다는 듯 두 손을 들어올리며 라호가 말한다. "그래."

          사흘, 한 달, 그리고 더 많은 시간. 그들은 밝은 노란색 봉투에 붉은 색 글씨로 "최종 통지" 라고 씌여진 우편물들을 내다 버린다.  저녁 시간은 좀 더 일찍 찾아오고, 해는 빨리 진다. 지금은 오후 한 시 아니면 오후 두 시 아니면 오후 다섯 시다. 마리아는 더러워진 타일 바닥에 앉아 셔츠를 벗는다. "젠장. 자기 몸에 불 지르려는 중국인 남자 얘기는 대체 뭐야," 마리아가 말한다. "정부는 별의 별 얘기를 다 하고, 사람들은 그걸  믿어."
        "뭐라고?" 라호가 묻는다.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고, 곧 문고리가 마구 흔들린다. 레나는 살며시 부엌에서 현관문 앞으로 가서 선다. 그녀의 한 쪽 발은 젖어 있고 바지 단추는 풀어져 있다. 문고리가 다시 마구 흔들린다. 레나가 조용히 문틀에 몸을 기댈 때 걱정스러움과 공포가 그녀를 갈라 놓는다. 레나는 차갑고 때투성이인 문에 볼을 갖다대고 그녀에게 익숙한 숨소리, 혹은 기침 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린다. 엄마의 숨소리, 엄마의 기침소리.
        문 밖의 복도에서는 멀리 화난 목소리가 들려온다. "금요일까지다. 집세 금요일까지 내야 된다고 엄마한테 전해라."

        레나는 자신이 목욕하는 걸 라호가 보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라호의 입술과 그 입술이 그녀의 것에 닿았을 때 어떤 맛이 날지 생각한다.
        "얘기 좀 들어 봐." 어느 오후에 라호가 레나에게 말한다. 날은 쌀쌀하고 나뭇잎들은 일년 중 그들이 죽어갈 때의 빛깔로 변해가고 있다. 텔레비전은 시끄럽게 켜져 있다. 마리아는 아이스크림이나 맥주를 사러 갔거나, 아니면 침실에서 자고 있다. 소파 위에서, 그들은 서로의 양 옆에 앉는다. 라호와 레나. "얘기 좀 들어 봐." 라호가 말한다. 그의 눈길이 레나를 만진다.
        천천히, 레나는 스커트를 들어 올린다.
        그들을 둘러 싼 공기는 흐르다가 멈추고, 라호의 힘 세고 젖은 손이 레나의 허벅지에 닿는다.
        레나는 자주 그녀가 안락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상상한다.

처음에는 아프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아프지 않다.

        "넌 뭘 원하지?" 방 안을 돌아다니며 마리아가 묻는다. "이제 엄마는 없는데." 마리아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생생하고 벽 같다. 이제 무엇인가가 달라졌다. 마리아는 뭘 어찌 했는지 라호에 대해서, 레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 날 아침엔 고성이 오갔고, 문이 쾅 닫혔고, 마리아는 울었다. "라호는 돌아오지 않아," 빨갛고 부어오른 눈을 하고 마리아가 레나에게 말했다.

        "어딜 갔는데?" 레나가 물었다.
        "그냥 가버린 거야."

        그들은 더 이상 자매가 아니다. 레나와 마리아. 그들은 더 이상 같은 엄마에게서 나온 두 아이들이 아니라, 다른 아버지들을 가진 두 아이들이다.
        "뭘 원하니?" 마리아가 다시금 묻는다.
        "외교관이 되고 싶어." 레나가 자신의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말한다. "아니면 모델이나... 아니면 손님들이 가게에 들어왔을 때 "어서오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레나는 스스로가 달라진 것 같지도, 나이가 더 든 것 같지도 않다. 레나는 여전히 가렵다. "지금보다 나이가 많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말한다.
        "그러니까 뭘 원하냐고." 짜증이 오른 마리아가 묻는다.
        텔레비전에서 인터뷰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일반적인 생각, 그리고 미국이 믿지 않아도 진실인 뿐인 진실을 말하는 대가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말콤 엑스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말씀해 주시죠, 누가 말콤 엑스를 죽였습니까?"
        "아이스크림." 레나가 말한다.
        "아이스크림." 마리아가 대답한다. 그리고 지폐 뭉치에서 20달러 짜리 지폐 한장을 꺼내 레나에게 쥐어준다. "그래, 아이스크림."

        레나가 아이스크림과 맥주, 그리고 마리아에게서 받은 20달러 짜리 지폐를 카운터에 내려놓자 식료품점 남자는 그녀를 지친 눈으로 바라본다. 유아용 휴지, 반창고, 쿨 에이드, 콩 통조림. 선반에 놓인 물건들은 먼지로 뒤덮혀 있고, 푸에르토리코 국기가 계산대 앞에 걸려 있다. 사흘. 한 달. 그리고 더 많은 시간. "느이 엄마 날 피하냐?" 식료품점 남자가 난처한 듯 묻는다. "만약 피하는 거라면," 남자가 물건들을 봉지에 넣어주며 말한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라." 남자는 레나에게 거스름돈을 건네 준다. "다 잊혀진 일이라고 말이다."
        "알래스카 깃발 파나요?" 레나가 묻는다.
        "알래스키 깃발?"  남자는 당황해 묻는다. "무슨 뜻이냐? 정말로 알래스카 주(州) 깃발 말이냐?"

        집에 돌아왔을 때, 어색한 정적이 아파트 안을 흐려놓는다. 텔레비전은 꺼져 있고, 침묵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무서워진 레나는 언니를 부른다. "언니," 방에서 방으로 돌아다니며 레나는 마리아를 부른다. 연약한 가을 태양은 더러운 창문 사이로 약해져가는 빛을 토해낸다. 서쪽 할렘은 맨해탄의 섬에 있다. 침대는 파란 침대보로부터 벗겨져 있다.
        "언니?" 레나가 말한다. "언니?" 혼자라는 사실에 겁이 나서 그녀가 외친다.
        현관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공허하게 울려퍼진다.
조용히 그녀는 숨이 멎은 채 복도를 따라 걸어간다.
        누군가 현관문을 다시 두드린다. 그리고 문고리가 마구 흔들린다.
        "언니?" 천천히 차갑고 때투성이인 문틀에 볼을 갖다대며 레나가 속삭인다. 오늘 레나는 열두살이 된다. 여전히, 레나는 가렵다. "언니?" 익숙한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며 그녀가 속삭인다. "엄마?" 편안하지 않을 때 편안하게 해 줄 소리가 들리길 기다리며 레나가 말한다.


안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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