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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였다. 여름더위가 잠시꺽이고, 비 내리는 우기는 매일 우중충하다.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폭우. 우산을 준비했을 때면 벌써 지나간 뒤다. 개구리가 근처에서 울어댄다.
나무배는 네그루 강을 따라 조용히 흘렀다. 숲의 나무들에 둘러싸인 강은 제법 빠르게 지나간다. 주위를 둘러싼 안개는 물이 머금은 하품이었다.
이 대로면 한 아르 후면 호수에 도착할 듯하다. 나는 노를 뱃전에 가만히 놓았다. 그리고 에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 아르정도면 도착할 거야."
"……."
"별로 불편한 건 없지?"
"……."
"밥 먹을까?"
"……."
시종일관 침묵이다.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에아를 다시 회복시키려는 여행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에아가 마을에 돌아온 것은 그저께였다. 돈을 벌겠다며 도시로 나간 지 2년이 되던 날이었다.
"어, 에아야. 돌아왔구나."
에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나무에서 버섯을 따던 하네 아주머니였다. 3년이 지나 꽤 많이 바뀐 모습이었지만 아주머니는 그녀를 바로 알아봤다.
"사람들, 이리 나와봐! 에아가 돌아왔어. 에아가 돌아왔다고."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손 놓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에아가 떠날 때 돈 많이 벌고 건강하게 지내라며 전송했던 정 많은 사람들. 그녀의 귀환은 그런 마을 사람들이 일을 그만둘 충분한 이유였다.
"아이고, 에아 돌아왔구나."
"애가 벌써 아가씨가 다 됐네."
"도시생활은 어쩌더냐? 재미있든?"
"챠카가 너 많이 가다렸었다."
우리는 그녀의 귀향을 기뻐했다. 애들 몇이 몰려들었다. 아주머니들은 질문을 있는 대로 물었다. 우리 모두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에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웃던 그녀의 얼굴은 시종일관 무표정에 침묵이었다. 그녀는 그저 한마디를 했었다. 단 한마디.
"저, 피곤해요. 돌아가서 쉴게요."
하고, 그녀는 마을사람들을 지나갔다. 우리는 떠들기를 멈추고 멍하니 에아를 쳐다봤을 뿐이었다.


그녀는 계속 무표정이었다. 언제나 짓던 웃음은 도시에서 잃어버렸을까? 나는 에아 집에 찾아갔었다.
"무슨 일 있었어?"
"……."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네. 어떤 일이었어?"
"……."
"너, 괜찮아? 많이 우울한 것 같애."
"……."
단짝친구인 나에게도 아무 애기 하나 하지 않았다. 오직 침묵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그저 부서질 듯한, 표정 없는 석상이었다.
결국 족장할머니가 에아 집에 간 것이 어제였다. 평소에 족장할머니를 잘 따라다니던 에아라면, 그녀에게는 털어놓을 것이라고 우리들은 판단했다. 족장할머니는 그녀의 집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밖에서 서성이며 기다렸다. 모두 초조했다. 반 아르 후, 족장할머니는 집에서 나왔다. 우리들의 물음에 그녀는 그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날 밤 족장할머니는 나를 불렀다. 그녀는 나에게 호수로 떠나라고 말했다.
"네? 무슨 말씀이에요?"
" 내일 에아를 데리고 배를 타라. 강을 내려가면 아라탄 호수가 나올 것이다. 그 호수를 횡단해라."
아라탄 호수는 대륙에서 가장 큰 호수였다. 배를 타고 횡단하려면 5일이나 걸리는 그곳. 곳곳에 섬까지 있는 그곳은 조그만 바다라고도 할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에아를 거기로 데려가라는 거예요?"
" 너는 어렸을 때부터 에아와 함께 지내온 친구였으니. 너라면 그 애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구나. 호수로 가거라. 호수가 너와 그녀를 도울 것이다."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무얼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호수가 도와준다는 건 무슨 뜻일까.
" 제가 거기서 뭘 하라는 거예요? 호수에서 어떻게 하라는 거지요?"
" 그냥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려라. 그리고……너도 호수에서 뭔가를 깨달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우리는 이른 새벽 뗏목에 먹을 것, 덮을 것들을 챙겨 넣었다. 그리고 길을 떠났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노 젓는 소리만 들려오는 여행이다. 지금까지고 그녀는 계속 침묵중이다.
쏴아..
스콜이다. 비가 내린다. 가랑비가 강으로 돌아간다. 하늘여행을 끝내고 고향이었던 강으로 간다.
강물이 점차 빨라졌다. 비로 강물이 불어나니 속도가 올랐다. 나는 우비를 걸치고 뗏목 난간에 몸을 기댔다. 반대편에 우비를 걸친 에아가 보인다.
"……."
뗏목은 일곱 사람이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크기. 그녀와 나는 그 거리만큼 떨어져있다. 위치상으로도, 마음 상으로도.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누가 꿈에 부풀어 오르던 저 날개를 꺾어 버린 걸까.
침묵뿐이다. 침묵뿐이어서 고민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힘들다는 소리도, 도와달라는 소리도 하지 않는다. 도시에 오고 나서 더 강해진 것 같아도, 작은 충격에 부서질 듯하다.
유속이 빨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덜컹,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 들어 앞을 보았다. 보이는 건……나무 하나 없는 푸른 청바닥과 뿌연 물안개였다. 뒤를 돌아봤다. 나무 몇 그루를 끝으로 강 끝자락이 보인다. 그 끝에서 멀어지는 속도는 아주 느렸다. 이곳은 호수였다.
"첫째 날이네."
족장할머니가 호수를 횡단하는데 5일이 걸릴 거라고 했다. 여행은 시작됐다, 침묵과 함께. 다섯째 날이 되면 여행이 끝날 것이다.
나는 속도를 빨리하려 열 마데 동안 노를 저었다. 그리고 지처서 노를 놓아버렸다. 비에 젖은 몸이 으슬으슬 추었다.
"잘못하면 감기 걸리겠네."
몸 주위는 후끈했지만 체온이 떨어진다. 온 몸에 닭살처럼 돋는 소름. 이번 여행은 그렇게 편한 여행은 아닐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뗏목전체를 지붕으로 덮은 배를 구할 걸 그랬다. 내 뗏목은 중앙의 일부분만 지붕을 달아놓은 것이다. 지금은 짐들이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차지했기에 우리들은 우비를 쓴 채 비를 맞아야 했다.
노가 뱃전에 놓였다. 그리고 고요히, 앉았다. 들리는 건 빗소리 뿐. 바람 하나 없이 구름 같은 물안개를 스르르 지나갔다. 사방은 침묵이었다. 호수도, 안개도, 비도, 그리고 에아도.
한 아르정도 있었던 것 같다. 비는 멎어갔다. 여전히 조용했고 호수 하품소리만 들려왔다.
"오랜만의……느림이네."
너무 자연스러운, 이 호수에 맞는 소리. 나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깨달은 것은 잠시 뒤였다.
"어, 에아."
"도시는……항상 빨랐는데."
그리고 다시 입을 닫았다. 나는 그녀가 한 소리에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 소리는……에아가 쉬겠다고 한 소리이후 내가 3일 동안 에아에게서 들은 첫 소리였다. 아름다우면서도……슬픈 목소리.
빠름. 방금 도시에는 느림이 없다고 했지. 그럼 그 빠름. 그것이 에아의 웃음을 앗아간 것일까? 그것이 에아를 저렇게 만든 것일까?
갑자기 악취가 느껴졌다. 아까 전 졸졸졸 흐르던 강소리가 가까워 진 것을 느꼈다. 희미하게…강자락이 보였다. 그곳에서 푸른 호수 빛이 아닌 검은 잿빛 강이 번지고 있었다.
기억 속을 더듬어서 저곳이 에텐강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근처 대도시를 가로지르는 에텐강. 그 강은 죽은 강이었다.
"저…저게 뭐야?"
생명의 의미를 잃어버린 강. 본성을 잃고 부유하는 영들처럼, 그들은 호수로 나와 조금씩 다른 물을 전염시켰다. 잿빛물이 다가왔기에 노를 저었다.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도시, 공장. 그것이 생명을 빼가고 찌꺼기만 버려놔. 그 찌꺼기야."
에아가 꺼낸 세 번째 말이었다. 분노가 가늘게 들어서 목소리가 떨린다. 에아는 말을 내뱉고 다시 침묵했다.
그녀는 도시에 관해서만 말을 꺼냈다. 빠름, 찌꺼기. 지금은 그것이 전부다. 그것이 그녀를 찢어간 존재인가. 그 외에 또 어떤 것이 에아를 괴롭힌 걸까.
노를 그만 저었다. 이 찌꺼기들에게서 벗어나려면 호수의 느린 흐름을 거슬러 다시 출발지로 올라야 한다. 난 노를 팽개치고 팔을 늘어뜨렸다. 배는 흐름을 타고 찌꺼기와 섞여 들어갔다.
"물에 손대지마. 손 씻을 곳도 없으니까."
첫째 날이 지나갔다.


둘째 날이었다.
여행은 단순했다. 노를 저을 필요 없이(그 물에 물들까봐 노는 배위에 올려놓았다.) 그저 자리에 앉아 느린 흐름에 모든 걸 맡겼다. 물안개 때문에 사방이 보이지 않아 구경할 경치도 없었다. 여행은 그저 나의 이야기로 진행됐다.
"그래서 그 여행자는 우리 마을에서 노래를 부르고 갔어. 역시 노래꾼이라는 존재는 신기한 것 같애…."
"……."
그녀는 어제의 세 마디 이외에 계속 침묵 중이었다. 나는 에아의 무표정을 보기 싫어 에아의 옆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간간이 에아의 입을 보면서.
에아는 아침, 우비를 잃어버렸다. 서로 젖은 옷을 갈아입기로 하였을 때다. 옷을 다 갈아입고 다시 뒤를 돌았을 때(내가 다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신호대로 어깨를 두드렸다.) 내 눈에는 검은 물 위에 떠다니는 물체가 하나 보였다. 푸른색에 수선화 끈이 자수된 우비. 에아의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그것을 보았다. 이 장마철에 우비 없이 어떻게 여행하려는 건지. 그녀도 실수로 떨어트린 것 같았다. 눈에는 아쉬운 기가 가득했으니 말이다. 썩은 물을 잔뜩 머금은 우비는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
호수는 언제나 고요히 잠을 자는 존재다. 그래서 안개라는 하품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 남는다. 에아. 그 애는 여전히 호수만 봤다. 오랜만의 느림이다. 도시에서 잃어버린 것. 여기서 다시 되찾을 것인 이 느낌. 에아, 마음껏 누려. 이제 그곳이 아니니 마음껏 누려.
"도시에서 노래하나 배운 거 있어?"
"……."
"심심한데 그 노래꾼에게 배웠다는 노래나 하나 해 볼까?"
"……."
언제나 노래를 부르면 자신도 흥얼거리는 에아였다. 노래를 들으면 좀 나아질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내 고향은 안개낀 호숫가
   개구리 가득하던 그 호숫가
   낮이면 물냄새 비릿나고
   밤이면 물안개들 맺히던
   꿈소망 띄어놓던 그 호숫가
   호숫가를 떠나 길로 향했네
   갈대 들꽃 잊으려 길 떠났네
   에메랄드 바다가 반짝였고
   굳건한 산 절벽 웅장했지만
   그래도 내마음은 그 호숫가
   언제나 그곳을 생각했다지
   찢기고 병들고 쓰러질대면
   힘겹게 기어서 돌아갔다네'


쏴..
노래는 빗소리에 그쳤다. 스콜이다. 오늘도 장마가 비를 내려붓는다. 아래의 썩은 냄새가 올라올까 걱정이다.
나는 에아를 보았다. 에아는 우비를 썩은 물에 빼앗겼다. 그녀는 무릎을 양팔로 감싸 안았다. 비가 그녀의 어깨에 쏟아 내렸다.
" 에아."
에아는 가만히 있었다. 나에게 우비를 같이 쓰자고 하지도 않고…그냥 앉았다. 몸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도시에 치이고 지쳐서 비를 맞는 그녀. 그 모습은 허물어질 듯 한 돌무더기 같다. 나는 에아에게 다가갔다. 같이 비를 피하려고. 그 몸에 떨어지는 비를 막아주려고. 난 우비를 펼쳐들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저리가!'
퍽.
그녀가 나를 밀처내었다. 매우 떨리는 목소리. 난 당황해서 멍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모습. 놀라고 겁먹은 모습. 눈은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린 에아. 갑작스런 상황에 말을 더듬거렸다.
"에아, 나는……니가 걱정돼서."
" 걱정하지 마! 그냥 가만히 내버려둬! 귀찮게 굴지 말고."
그녀가 낸 다섯 번째 말은 분노였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목소리. 그러고 그녀는 다시 멍한 눈으로 호수를 바라봤다.
난 일어섰다. 뗏목이 크고 물이 고요해서 흔들리지 않았다. 썩은 악취가 빗기에 풍겼다.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무언가에 화나 있다. 무언가에 상처받고 분노했다. 그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받을 수 있다. 그래도 저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에아, 너 자꾸 이럴 거야?"
이제는 내가 화를 낼 차례다.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지만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뭐가 잘났다고 침묵하는 거야! 왜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거야!"
모두가 너를 걱정하는 줄 아는 걸가? 마을사람들도, 족장할머니도, 나도 모두 걱정해주고 도와주려하는데……. 넌 그 잘난 침묵의 가면을 쓴 채 있는 거지.
"너만 괴로운지 알아? 보는 사람도 괴로워.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 때문에 걱정한다고. 니가 그렇게 도도해? 너의 고통이 무슨 너의 원죄 같은 거냐?"
그저 생각 없이 지껄인다. 화나서, 분노해서, 슬퍼서. 아니, 나에게는 털어놓지 않았다는데서 오는 괴로움인가? 한동안 난 소리 질렀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골랐다.
에아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가만히 호수를 보고 있을 뿐이다.
"사해라는 바다가 있어."
목소리를 낮추었다. 안 그러면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를 것 같다.
"그곳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짠 바다라고 해. 사실은 호수이기는 하지만……. 너 왜 그 호수가 가장 짠지 알아?"
예전에 마을을 찾아왔던 노래꾼은 사해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짠 호수. 그것이 에아의 모습과 겹쳐진다.
"사해로는 물이 들어오는 물줄기가 두 곳이 있어. 하지만 물이 나가는 물줄기는 단 하나도 없어."
비가 계속 내렸다. 물방울들이 검은 물에 틔어 잠시 호수 물을 보여준다. 그것은 순간이다.
"언제나 짠 소금이 들어오지만, 사해는 그것을 내보내지 못하고 계속 호수에 담아놓지. 그 염류는 계속 쌓이고 결국 아무도 살지 못하는 바다가 되. 죽음의 바다. 생명을 담지 못하는 호수……."
에아가 고개를 돌려버렸기에 마지막 말을 흐렸다.
더 할 말이 있었지만 그만두었다. 나도 화나지만 녀석도 괴로울 거다. 난 어깨에 걸쳐진 우비를 내렸다. 그리고 에아를 덮어주었다.
고개를 돌렸다. 악취는 아직 강하다. 난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갔다. 비가 내린다. 마음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셋째 날이었다.
오늘도 안개가 찼다. 배는 변함없이 고요히 흘러갔다. 근처 섬의 개구리, 풀벌레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나는 그냥 가만히 난간에 기댔다. 어제 에아에게 소리 지른 이후 나도 말을 멈추었다. 더 하기도 껄끄러웠지만, 말을 안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에아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동안 생각할 느림과 고요다. 혼자 마음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의 시간, 그것이 필요할 것이다. 족장 할머니가 조용한 호수로 여행을 보낸 것도 그런 이유일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나는 왜 보낸 것일까. 어제처럼 화를 내는 나를. 어제에 비해서는 악취가 덜 난다. 코가 마비되고 있나 보다. 난 먹을 것을 챙기려 짐칸으로 향했다. 거기서 빵나무 열매를 두개 꺼내들었다.
쏴..
다시 스콜이었다. 장마가 된지 벌써 4일째. 이제는 시시때때로 오는 비가 익숙하다. 나는 우비를 들고 일어섰다. 에아에게 걸어갔다.
"……."
호수를 보던 그녀가 나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에아는 멍하고 방어적인 눈으로 나를 보았다. 여차하면 숨어버릴 것만 같은 기색. 나는 에아를 잠시 보았다. 그리고
스르르
우비를 덮어주었다. 어제처럼. 그리고 빵나무 열매도 한 덩이 주었다. 에아는 빤히 날 쳐다보았다.
"비를 맞아야 한다면, 지금 몸 약한 너보다는 강한 내가 맞아야지."
언제나 쌩쌩하고 빠르던 그녀. 도시에서 돌아온 에아는 축쳐저 힘없어 보였다. 옛날에는 나보다 나무도 잘 탔으면서. 산길에서는 나보다 잘 달렸으면서.
에아의 표정은 계속 무표정이다. 눈에는 의문기가 보인다. 한숨이 나왔다. 비는 계속 쏟아진다.
"널 계속 걱정해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씁쓸하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기로 했다. 궁금했지만 침묵하기로 했다.
가뭄 끝의 비는 반갑다. 장마의 비는 별로 반갑지 않다. 좋은 것도 계속 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비는 계속 내린다. 장마 끝까지 계속 내릴 거다.
몸이 으슬으슬 춥다. 3일은 연속으로 비를 맞으니 몸이 드디어 한계에 도달했나보다. 겨울 때 입는 긴팔 옷도 옷에 짝 들러붙어서 도움이 안 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친척이 선물했던 그 소가죽 외투를 가져오는 거였는데…….
"……."
우비가 아쉽나? 아니, 그냥 에아에게 준것이 나았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보통사람보다 감기에 쉽게 걸린다. 쟤가 비 맞으면 여기서 바로 드러누울 것이다. 내가 맞는 것이 더 낫다.
쏴..쏴..
물안개가 피고 옛 생각도 뭉게뭉게 피어난다. 비를 보니 갑자기 그 생각이 난다. 옛날 그 비가 달콤하던 때가.
예전에 에아의 구슬을 갖고 간적이 있었다. 에아는 날 쫓아왔고 난 산으로 달음박질 했었다. 산을 달리기 시작할 때쯤 그때도 지금처럼 소나기가 내렸었다.
"……."
우리 모습을 물에 젖은 야수였었다. 그렇게 서로 산을 이리저리 쏘다녔다. 산에서의 속도는 에아가 빠르긴 했지만 방향을 잘 전환하는 건 내가 더 잘했다. 도망자로써는 딱 좋은 재주였다. 나는 갑자기 바위를 휘감고, 나무를 지나치는 등으로 에아를 따돌리며 도망가고는 했다. 정말 긴 추격전이었다.
스슥
빗속의 침묵. 그랬기에 조그만 소리도 크게 들렸다. 난 에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우비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릎을 감싼 채 비를 맞고 있었다. 그 몸으로. 나는 놀라 펄쩍 소리쳤다.
"야, 너 무슨 짓이야!"
"……."
이런 상황에서도 침묵을 일관하는 에아. 그게 짜증났지만 걱정이 우선이었다. 저러다가 어쩌려고. 그 상태에서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왜 갑자기 우비를 벗고 난리야. 빨리 다시…"
"옛날 생각이 났어."
난 멈췄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시 닫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달콤했던 비가 생각났어. 이제까지 쭉 잊고 있었었는데."
"……."
아직도……기억하고 있었구나.
내가 그때 아무리 잘 도망갔어도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추격자도 체력소모가 컸지만 아무래도 움직임이 컸던 내가 먼저 지쳐버렸다. 쓰러지려고 비틀거리는 나에게 에아가 마지막 힘으로 달려와서 내 손에서 구슬을 낚아챘다. 보복하려던 에아는 힘이 빠져버렸는지 그냥 누워버렸다. 나도 긴장이 풀려서 그대로 누워버렸다. 다리로 버티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
그때도 비가 내렸다. 물에 꼴불견이 된 우리는 땅바닥에 그대로 대자로 누워 있었다. 다리 움직일 힘 하나 없이 그냥 있었다. 숨이 차서 입을 벌렸고, 빗물 때문에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시 동안 비를 맞으며 누웠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미친놈들이라고 손가락질 할 모습이었지만 산에는 우리 둘만 있었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계속 누웠었다.
그 누운 입안에 들어오던 빗물. 그것들이 얼마나 달콤했는지……어떤 음료수나, 술보다도 달콤한 천상의 음료였다. 비를 맞는 몸은 춥지 않고 오히려 따뜻했다. 포근한 이불이 우리를 덮은 듯 했었다. 우리는 그때 장난스럽게 말을 했다.
' 야, 이거 그 족장할머니가 말해주던 신화속의 생명수라고 생각되지 않아?'
'참나, 그 신비의 생명수가 이렇게 흔한 곳에 있겠냐?'
'아니, 오히려 이렇게 흔한데 있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걸? 옛 이야기들의 결말을 보면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주위에 있다고 하잖아.'
" ……."
그 생명수는 어디로 갔을까. 왜 지금의 비는 그저 짜고, 춥기만 할까. 전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것이 우리를 버린 걸까, 우리가 그것을 버린 걸까.
"냄새가 많이 약해졌어."
에아의 얘기였다. 에아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도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물안개들 사이로 보이는 썩은 물……. 어, 이상했다. 어제와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많이 옅어졌네?"
"제법 푸른기가 도는걸."
첫째 날 들어왔던 썩은 물은 옅어졌다. 아직 악취가 나고 기분 나쁜 어둔 기운을 띄었지만 첫째 날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생각해보니 둘째 날의 호수도 첫째 날보다 조금 옅었던 것 같다. 단지 어제는 화가 나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일 거다. 호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물에 점점 생명력을 불어주는 거였다.
"……."


넷째 날이다.
간간이 콜록거리는 것이 감기에 걸린 듯하다.
어제 옅어졌던 물이 지금은 어쩐지 궁금했다. 담요를 덮고 뗏목 앞자리에 앉았다. 한밤자고 일어났더니 호숫물이 많이 옅어졌다. 점점 생명력을 찾고 있었다.
"……."
에아는 괜찮아 졌나 모르겠다. 호수에 와서의 수확은 에아가 처음으로 몇 마디 했다는 것. 자신의 속마음을 잠시 보여주었다는 것. 그것이 전부다. 진전이 있기는 해도 기대만큼은 아니다. 내일이면 여정이 끝날 것이다. 나무배가 호수의 반대편에 도달하고 이 치유 여행에 막을 내릴 것이다. 호수에 있은 지 3일이 지났다. 에아, 나아진건가?
" 왜 족장할머니는 에아를 호수로 보낸 거지? 그리고 내가 같이 가게 된 이유는 뭐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족장할머니는 자연히 알거라고 했지만 전혀 모르겠다. 내가 그 애랑 가까운 친구여서? 그 친구한테 털어놓을 생각이 없는 에아인데? 보호자를 구했다면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조용했다. 스콜이 내리기전의 전초전. 조용하니 예전 마을에 찾아왔던 떠돌이 노래꾼 아저씨가 생각났다. 두손가락 왼손으로 피리를 지탱하던 그 노래꾼 아저씨. 그 아저씨가 불렀던 노래가 계속 기억난다.


  '찢기고 멍들고 쓰러질대면
   힘겹게 기어서 들어갔다네
   나는 호수로 들어갔다네
   그 물빛 잘익은 청포도였고
   고개숙인 갈대숲 따스했었지
   피투성이 몸으로 돌아갔다네
   모든 껍질 버리고 들어갔다네'


"노래가 참 좋네."
에아가 입을 열었다. 난 노래를 잠시 끊고 에아를 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노래에 슬픔이 느껴져."
에아는 침묵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슬펐지만 계속 말했다.
" 그 노래꾼 이야기 좀 해줄래?"
에아가 나를 봤다. 나도 그녀의 입을 보았다. 드디어 침묵을 깼다. 그녀가 말하는 것이 어린아기가 말하는 것처럼 신기했다. 그 침묵을……스스로 한 꺼풀 벗겨낸 것이다.
"에……에아. 다시 말하는 거야?"
바보 같은 물음이다. 그래도… 왠지 확인하고 싶다. 계속 침묵하는 모습 보기 싫다. 침묵을 부수어 버릴 거라고 확인받고 싶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다고 했지."
담담한 목소리였다. 떨리면서도 무언가가 깃들어 있는 목소리. 오랜만에 계속 말하는 것이 힘겨워 보였다.
"그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에아는 뭔가 결심한 것 같았다.
" 나 침묵 그만할게. 그리고 다른 사람 걱정시키지 않을게."
그렇게 확인했다. 에아는…침묵을 깨겠다고 했다. 다시 마을 사람들이랑 잘 지내며 살겠다고 했다. 에아는 예전처럼 미소 지었다. 그렇게 회복되었다. 4일째 되는 날, 에아가 드디어 마음을 열었다. 이제 에아는 자신을 둘러싼 그 두려운 껍질을 벗은 것이다. 그리고 한 발짝 나갈 것이다. 치유된 것이다.
"……."
이상하다. 기뻐야 되는데. 즐거워야 되는데. 에아가 자신만의 우울증을 극복했다는 게 즐거워야 하는데. 뭐지. 이 느낌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아. 이건 아닌 것 같아. 중요한 것을 잊은 것 같아.
"……."
그래 무언가 잘못됐다. 무언가 꼬투리 같은 생각이 밀려온다. 뭐지? 그 꼬투리를 당긴다. 이 생각이다. 2주전 왔던 노래꾼 아저씨의 이야기다. 그 아저씨의 이야기가 다시 들려 오는 것 같다.
마을을 들른 노래꾼. 아저씨의 고향은 북쪽 어딘가의 한 마을이라고 했다. 논밭은 없어도 꽤 넓은 호수가 있었다는 마을. 철새들이 자주 오는 깨끗한 호수였다고 한다.
'살면서 힘들 때마다 제가 간곳은 호수였습니다. 그곳만이 저의 울분을 받아주던 장소였으니까요.'
난 아래의 강물을 보았다. 이제 제법 맑은 물색이었다. 악취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 드디어 알았다. 족장할머니가 자연히 알 것이라고 했던 어느 무엇. 그리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
에아는 결국 침묵을 부셔야 한다. 결국 그 닫힌 문을 열고 다시 세상에 나서야 된다. 하지만……그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 에아..."
이런 말을 하기 싫지만.
"뭐가 그렇게 너를 아프게 했던 거니."
"……무슨 말이야."
"너에게 상처 줬던 그 존재를 말해줘."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진다. 다시 문을 닫으려 한다. 그러나 괴로워도 해야 한다.
" 왜 그걸 들으려 하는 거야? 들을 필요 없어. 그냥 나 혼자 묻어내고 끝낼게. 이제 사람들 힘들게 안할 거야."
"니가 취하는 태도는 그저 상처를 옷으로 가리려 하는 행위일 뿐이야.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은 안심할지 몰라도, 너의 상처는 그 안에서 곪아 터질 뿐이야."
"……."
다시 방어적이다. 그날 온 날 같은 분위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하다. 하지만……이것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에아……그저 니 상처를 가리려 하지 마. 그건 너만 더 아프게 할 뿐이야. 널 사랑하는 사람들이 니가 그저 그 사람들을 위해 아파도 웃는다면 우리들이 그것에 고마워 할 것 같애?"
쏴.. 두둑두둑.
다시 비가 내린다. 이번 스콜은 처음부터 꽤나 거세다. 오래 지속될 것 같다.
"니가 왜 내 일에 간섭이야!"
" 그것이 널 위한 길이니까."
"전혀 하나도 안 반가워."
그녀가 쏘아본다. 그녀의 눈물이 빗물과 섞여든다. 내색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 왜 갑자기 또 그 이야기야. 이제는 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조용히 덮어둘 생각이었는데. 왜 괜히 다시 불러서 괴롭게 하는 거야."
에아는 강했다. 언제나 씩씩했고 어릴 때도 우는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했다. 그래도……그래도……누구나 사람은 아플 수 있는 거다. 건강한 사람도 한번은 누군가의 간호가 필요한 거다.
"너의 그 분노, 울음, 눈물……그냥 모두 쏟아 부어."
"싫어!"
" 그러면 넌 사해처럼…… 그저 썩을 뿐이야."
노래꾼 아저씨 고마워요. 당신이 해주던 이야기나 노래. 정말 도움이 많이 되네요. 역시 상처받았던 사람들만이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건가요?
"노래꾼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
비가 세차다. 물안개가 여전하다. 이제는 악취도 나지 않는다. 약간의 얼룩만 있을 뿐이다.
"그 아저씨도 참 힘든 삶을 살았던 아저씨야. 노래꾼 아저씨는 어렸을 적에 도시에 대한 동경을 갖고 그곳으로 올라갔어. 그렇게 도시생활을 시작했지."
서로의 얼굴에 비가 흐른다. 그 당시의 포근했던 생명수. 우리가 그것을 찾아다니려는 행위가 더 멀어지려는 행위가 아닐까?
"참 고생 많이 했대. 공사장도 돌아다니고, 공장일은 물론 이상한일도 다 해봤대. 동경은 사라지고 고통만 남았다고 하지. 그 아저씨의 도시생활은 종이공장에서 손가락 세 개가 압축기에 들어간 날, 끝이 났어."
에아가 잠시 움찔 거렸다. 무엇 때문에 움찔거렸을까. 에아도 그 아저씨처럼 비슷하게 살았을까.
"치료비 하나 못 받고 붕대만 감기고 아저씨는 쫓겨났어. 항의하려 해도 힘도 약하고 방법도 몰라서 무기력하게 당했어. 아저씨는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갔대.
고향에는 아저씨를 반겨주는 소중한 가족, 이웃들이 있었대. 아저씨는 손가락을 잃고서야 깨달았다는 거야. 진짜 소중한 것은 가까이 있다는 것을."
너는 어땠을까. 너에게 소중한 것은 도시에 있었을까, 이곳에 있었을까?
" 그래도 아저씨는 많이 달라졌었어. 떠난 후의 아저씨. 그 아저씨에게 있었던 우울. 상처받았던 일, 가슴 아팠던 일들. 아저씨는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슬픔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어. 예전처럼 해맑은 모습만 보여주려 했어."
그것이……얼마나 어리석은 배려인데두.
"어떻게 됐는지 알아? 언제나 겉으로는 활기차고 속으로는 병들었던 아저씨는……자살을 결심했어. 자기 자신을 못 이겨서. 그렇게 커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어쩔 수 없이 결심했다고."
에아의 입이 바르르 떨렸다. 눈에도 빗물이 반짝였다.
"호수에 몸을 던져 죽을 생각이었대.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모른 채 죽으려고 했대. 아저씨는 여행을 떠난다면서 한명한명에게 작별인사를 했어. 모두 그 아저씨가 어떤 결심을 한지도 몰랐고 그 아저씨에게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지."
그 다음, 아저씨는 그저 수수깨끼 같은 말을 했었다.
"그때……아저씨가 이야기하다 울음을 터트려 버렸지. 슬픈 기억이어서일까? 상처 난 자국이 다시 터져서 그랬던 걸까? 아저씨는 이야기를 더 못하고 그냥 울먹임 두 마디로 이야기를 끝냈어. 그날 호수에 자살하지 않고 펑펑 울었다고. 호수가 자신을 살려줬었다고."
족장할머니. 이제 왜 그분이 날 보냈는지 알 것 같다.
"그냥 이야기는 그렇게 흐지부지하게 끝났어. 하지만 나에게 메아리치던 말은 계속 귀에 울렸지."
'호수가 나를 살렸다.'
예전의 기억이 하나있다. 호수에 조그만 나무모형배를 이 호수 끝에 띄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33달쯤 후, 우연히 그 끝의 반대편을 지날 때 난 그곳에서 내가 띄어놓았던 배를 보았었다.
"언제나 정신없이 흐르던 강은 호수에서 느려져. 그 빠른 세상에서 벗어나, 다른 물들과 천천히 흐르지."
나는 근처의 악취 섞였던 물을 보았다. 이제는 푸른 물 냄새가 더 강하다.
" 갑자기 느림을 체험하는 물들은 당황하지. 하지만 그들은 느림에 익숙해가. 느림에 동화되고, 긴장을 풀어. 천천히 온순한 물이 되. 물은 그렇게 천천히 흘러. 그러면서 짊어지었던 모든 짐들을 하나하나 놓아둬. 찌꺼기. 쓰레기, 부패물들. 모든 차근차근 바닥에 내려놓고……다시 생명력을 되찾아."
난 심호흡을 했다. 이제 이걸 말할 때다.
"에아, 너의 그 짐들을 이 호수에 던저버려."
"……."
"너의 유일했던 슬픔, 눈물. 모두 던져버리는 거야."
이게 족장할머니가 에아에게 바랐던 것일거다. 그리고 내가 깨닫기를 바랬던 것일 거고. 에아는 망설인다. 털어놓기 무서운 것이다. 그래도 괜찮아.
"말 그대로……나에게 말고, 이 호수에."
"!"
나는 너에게 아주 가까운 친구야. 하지만 나에게는 너의 은밀한 곳까지 들을 자격 같은 것은 없어. 단지 니가 너의 고통을 덜어내도록 도와줄 뿐이야. 나는 말 그대로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니까.
"나……조용히 귀 막을게."
에아가 입술을 꾹 깨문다.
"참지 마. 그냥 다 털어. 눈물을 흘려."
눈이 파르르 떨린다.
"에아, 너는 강해. 하지만 그 이전에 한명의 인간일 뿐이야. 상처받은 순수한 영혼일 뿐이야."
더 이상 에아는 날 보지 못한다. 고개를 돌려 버린다. 나도 고개를 돌린다.
큰소리가 들린다. 천둥소리일까, 에아의 고함 소리일까. 나는 귀를 막았다. 이 호수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에아다. 내가 해줄 일은 잠시 이 공간에서 퇴장하는 거다.
에아는 지금 너무 아플 것이다. 그녀의 슬픔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고통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이 지나면……에아는 괜찮아 질 것이다. 그녀는 나을 것이다. 그리고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더 씩씩하고, 더 강해질 것이다.
노래꾼 아저씨의 노래. 그 마지막이 떠올랐다.


  '내가 그 호수에 놓아둔것은
   작은 눈물 세방울 분노 한덩이
   그렇게 내려놓아 다시 떠났고
   언제나 탕아처럼 돌아왔었다
   세월은 흐르고 떠나가겠지
   몇백년이 흐르고도 남아있겠지
   그때는 내 고통이 사라졌어도
   호수에는 눈물들이 남아있겠지'


포근했다. 생명수였다.







다섯 째날
우리는 그렇게 육지에 도착했다. 5일간의 긴 여정은 그렇게 끝났다. 옆으로는 맑은 강물이 새 여정을 떠난다. 푸른 물냄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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