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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lunatic juvenile

2009.05.28 14:4905.28

lunatic juvenile


  사막의 밤은 차갑다. 그 사막의 밤을 비추는 빛은 달뿐이다. 소년은 자신의 머리위로 가까이 내려앉은 달을 올려다본다. 깊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달은 이른 저녁의 모습처럼 소년의 머리 위에 떠있다. 그만큼 달은 자세히 보인다. 달의 바다의 모습이 선명하다. 달의 모습은 너무나 가까워서 징그럽다. 하지만 태양빛을 반사하는 달의 그 달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달의 바다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달의 대부분을 차지해, 조금씩 먹어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달, 그중에서도 보름달이, 저 달이 가장 예쁘지 않아? 저~기 떠있는 달이 뭐 같아? 진우야. 응? 저 달이 뭐냐고? 응 저 달은 보름달이라고 부르지. 아냐, 보룸달이 아니라, 보름달. 그래, 그래. 우리 진우, 말도 잘하네. 저 달에 있는 검은 점들 있지? 저걸 달의 바다라고 부른다더라. 그래, 달에는 바다가 없지. 우리 진우 그런 것도 알고 똑똑한데? 진우는 저 점들이 뭐로 보여? 응? 유진이? 헤~에. 그럼 우리 진우는 커서 유진이하고 결혼할거야? 누구와의 대화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어머니와의 대화라고 소년은 생각한다. 이 대화가 갑자기 떠오른 건 왜일까. 느닷없는 생각이다. 소년은 머리를 흔든다. 한자리에서 정체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바람이 차갑다. 소년은 걸친 윈드브레이커의 지퍼를 입까지 올린다. 하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는다. 소년은 끝없이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사막을 본다. 보름달에 반사된 서늘한 태양빛 때문에 밤이어도 그렇게까지는 어둡지 않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중간 중간에 사구처럼 보이지만 진짜 사구는 아닌 것들이 보인다.
  소년은 무너진 의류상점에서 장갑을 챙기지 않을 것을 후회한다. 사실 장갑이 필요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년은 사막의 밤이 이렇게까지 추울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더구나 이렇게 기후가 완전히 바뀌어버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소년이 챙긴 건 지금 입고 있는 윈드브레이커와 카고바지 두벌뿐이다. 더구나 그때 챙긴 카고바지는 누더기가 된지 오래여서 벗어버려도 느껴지는 추위는 똑같을 것 같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발자국만 나있다. 진흙창이 아닌, 사막이어서 그런지 계속해서 소년의 발자국이 남아있지는 않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소년의 발자국을 삼킨다. 소년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모래에 신발이 파묻혀 걷기가 힘들다. 하지만 걸어야 한다. 소녀의 발자국은 이미 모두 지워졌다. 소년은 더 이상 소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조차 없다. 소년은 언제부터 소녀의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는지 생각해본다. 하지만 기억은 별로 없다. 소년이 기억하는 것은 달이 보름달에서 모습을 전혀 바꾸지 않기 시작한 것, 그 것을 필두로 작게는 강물에서부터 크게는 바닷물까지 조금씩 사라지던 그날. 그날에 소녀가 떠났다는 것이다. 왜 소녀가 떠났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지금 그 이유를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 상황에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어머니의 자살처럼.
  목이 마르다. 소년은 어깨에 비스듬히 메고 있던 배낭에서 생수통을 하나 꺼낸다. 배낭 안에는 여러 개의 생수병과, 날이 서있지 않은 나이프가 들어있다. 소년은 입을 가린 손수건을 벗는다. 그러자 바람에 섞여 있는 모래가 갈라진 입술 사이에 박힌다. 소년은 쓰라림에 얼굴을 찡그린다. 물을 한 모금 마신다. 하지만 곧바로 후회가 된다. 물이 몸으로 들어오면서 더 추워진다. 소년은 생수병을 다시 배낭에 집어넣고 손수건으로 입을 막는다. 바람이 거세다. 소년은 다시 걷는다. 태양은 아직 뜰 시간이 아니다. 소년은 손목에 매고 있던 손목시계를 본다. 하지만 시계바늘은 움직이지 않는다. 소년은 아침에 시계태엽을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제기랄.
  소년은 작게 욕설을 중얼거린다.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 시계태엽을 돌린다. 하지만 시계는 제대로 시간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시계를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지금 시간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소녀가 떠난 곳으로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항상 북쪽에 떠있다는 북극성도 지나치게 거대해진 달에 막혀 보이지 않는다. 소녀를 뒤쫓는 것을 관두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도시로 들어가야 한다. 식량도 거의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고, 생수도 더 이상 깐다면 위험한 상태다. 소년은 다리에 힘을 준다. 하지만 힘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걸음을 멈춘다. 그리곤 이마의 땀을 훔친다. 아마 보이지는 않지만 윈드브레이커 안에 껴입은 티셔츠들도 땀으로 축축해 있을 것이 뻔하다. 계속 서있다가는 땀이 식어 금세 서늘해 질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자리에 주저앉는다. 더 이상 사막을 헤맬 힘이 없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본다. 수많은 사구들이 보인다. 사실 그 것들은 사구가 아니라 허물어진 건물 잔해들과, 산산조각난 시멘트 덩어리들이다. 그리고 이 모래들은 진짜 모래가 아니라 건물잔해들, 시멘트 덩어리들이 풍화되면서 생긴 것들이다. 소년은 손가락을 덮고 있는 모래를 쥐어본다. 자연스러운 색깔을 가진 모래가 아니다. 그 모래들은 보통의 모래들과 달리 가루가 묻는다.  
  기침이 시작된다. 피가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은 심한 기침이다. 소년은 이 사막을 해매는 동안 계속 결핵에 걸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기침은 한번 시작하면 거의 발작하는 것처럼 보일정도다. 소년의 손수건이 떨어진다. 소년은 왼편가슴을 움켜쥔다. 살이 전혀 없는 가슴은 갈비뼈가 튀어나와있어, 윈드브레이커로 몸을 감쌌음에도 불구하고 딱딱한 느낌이 그대로 느껴진다. 기침이 어느 정도 멈추자 심호흡을 한다. 입가에 침이 묻어있다. 침이 마치 거미줄처럼 소년의 입과 모래바닥을 잇고 있다. 소년은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내고 떨어진 손수건을 든다. 모래가 손수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소년은 손수건을 사구 밑으로 던진다. 그리곤 그대로 눕는다. 달이 차다. 바람 때문에 소년의 뺨은 금세 붉게 물든다. 아니, 그건 바람 때문이 아니다. 소년은 금세 차가워진 뺨을 만진다. 소년은 자신의 뺨을 차갑게 만드는 달을 노려본다. 차가운 달은 바람을 차갑게 만들고, 그 바람은 소년의 뺨을 차갑게 만든다. 소년은 생각한다. 왜 자신이 그런 소원을 빌었는지 생각한다. 왜 자신과 소녀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증발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었을까. 하지만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소년이 소원을 빌은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소년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이루어졌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소년은 너무나 뻔한 소원을 빈다.
  

  소년은 모래 속을 뒤진다. 새하얀 가루들이 바람을 타고 휘날린다.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 것이 소녀의 시체인지, 소녀의 버려진 짐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것이 소녀와 관련된 무엇이라는 것이다. 모래로 위장한 가루는 물을 부은 석고처럼 딱딱해져서 파내기가 껄끄럽다. 배낭에서 나이프를 꺼내 굳은 가루를 긁어낸다. 힘을 줘서 나이프를 쑤셔 넣는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소녀의 시체는 아니다. 발견한 것은 소녀의 구두다. 구두는 모래 속에서도 나란히 놓여있다. 소녀의 작은 노란색 구두. 소년이 소녀에게 선물해준 것이다. 씁쓸하지만, 이것으로 소녀도 이곳으로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년은 구두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박차고 달린다. 태양은 이글대고 있고, 한낮의 사막은 밤과 달리 달구어져 있다. 소년은 앞을 바라본다. 사막의 열기에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는 높은 건물들의 형체가 보인다. 분명 소년이 보고 있는 건물들은 신기루가 아니다. 소년이 며칠을 헤맨 끝에 발견한 도시다. 아니, 정확히 도시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저 곳에 도착하면 소녀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이 확실히 높아지는 이상 아무래도 상관없다. 더구나 저 정도 규모의 도시라면 식량은 넘치고도 남을 테니, 다시 소녀가 소년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소녀를 뒤쫓을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은 갑자기 뛰는 것을 멈춘다. 이렇게 계속 뛰다보면 금세 지친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저 정도면 몇 키로는 떨어져 있을 텐데. 병신같이. 소년은 천천히 걷는다. 아무튼 다행이다. 소년은 제대로 방향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오늘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끝장이었다. 생수는 더 이상 없다.
일종의 휴게소인가.
  소년은 갑자기 소녀가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소녀는 분명 소년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 같다. 소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소년은 그런 느낌을 받는다. 소년은 소녀의 모습을 떠오른다. 소년과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서로 알고 있었다. 소년은 이미 죽어버린 부모의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나 소녀의 모습은 전혀 잊어버리지 않았다. 약간 피부가 타서 까무잡잡한, 하지만 주근깨는 전혀 없는 깨끗한 피부, 항상 웃는 얼굴. 그리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이리저리 뻗친 긴 머리칼. 소녀의 모습은 아름답기보다는 건강했다. 소년은 점점 답답해지는 머리를 흔든다. 도대체 왜 소녀는 어머니처럼 갑자기 소년의 곁을 떠난 걸까. 도시가 붕괴해버려서? 소년은 자신과 소녀가 살던 도시를 떠올린다. 그 곳이 처음부터 잔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모조리 증발되어 버린 뒤에도 도시는 건재했다. 하지만 소년과 소녀가 성장하는 것처럼 도시도 점점 노후화 되었다. 처음 잔해가 되어버린 것은 도시의 가장 큰 마천루였다. 소년은 그 마천루가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천루를 감싸고 있던 강화 플라스틱으로 된 창들, 그리고 건물을 받치고 있는 철근콘크리트들. 그 것들은 하나의 철옹성이었다. 처음 빌딩의 붕괴조짐은 바깥에서부터 보였다. 빌딩이 서있는 지상, 즉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감싼 땅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 균열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균열은 순식간에 커졌다. 균열이 빌딩 가까이로, 마치 물위로 퍼지는 피처럼 닿자마자 빌딩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빌딩이 붕괴하는 것을 천천히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빌딩이 붕괴하면서 생기는 먼지들과, 철근이 구겨지면서 들리는 기괴한 소리들. 건물은 그대로 구겨지듯 붕괴했다. 붕괴의 모습은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었다. 와자작.
  소년은 그 곳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던 그 곳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에 대해서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소녀는 그런 소년의 모습이 답답했을지 모른다.    
빌어먹을.
  소년은 머리를 감싸 쥐고 모래위에 쭈그려 앉아 비명을 지른다. 흡사 만화에 나오는 장면을 따라하는 것 같다. 만약 소년이 답답하게 굴지 않았다면 소녀는 떠나지 않았을까.
  한참을 걸어 도시에 도착한다. 다행히 신기루는 아니다. 도시는 소년의 생각보다 훨씬 크다. 또한 부식이 시작되지 않은 것인지 대부분의 빌딩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소년은 풍화되지 않은 아스팔트에 주저앉았다 금세 다시 일어선다. 아스팔트가 계란을 떨어뜨리면 익을 정도로 달구어져 있다. 소년은 붉게 덴 손바닥을 바라본다. 쓰라리다. 소년은 쓰라린 손을 붙잡고 욕설을 작게 중얼거린다. 소년은 주변을 살펴본다. 생각 같아서는 먼저 소녀를 찾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현실적으로 가장 먼저 확인해야 되는 것은 식료품과 생수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도시는 조용하다. 차도와 인도는 엉망진창이다. 인도로 제대로 걸을 수 없다. 운전하는 사람이 없는 자동차들이 실타래가 꼬여있는 것처럼 엉켜있다. 벽과 충돌한 차, 전봇대에 부딪혀 바지모양으로 구겨진 차, 그리고 아스팔트위에 박혀버린 파편들. 소년은 차체위로 올라가 돌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뛰어서 주변을 돌아본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트가 있다. 비상 발전기가 돌고 있는 모양인지 마트에서 불빛이 새나오고 있다. 소년은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낮에 불을 키다니.  
  저 마트에서는 비상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저 마트 안에 소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년은 마트로 들어가기 전에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기침 때문에 숨이 가빠진다. 소년의 기침소리가 도시에 깊게 메아리친다. 기침을 마친 소년은 일말의 희망을 갖고 주변을 바라본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마트의 부서진 네온에서 들리는 전기가 흐르는 소리뿐이다. 소년은 마트의 유리문을 붙잡고 일어선다. 마트의 문은 잠겨있다. 소년은 차체에서 떨어진 차 범퍼를 든다. 그리곤 마트의 유리문에 던진다. 유리문은 그래도 잘 깨지지 않는다. 차에서 떨어진 오일이 묻은 파이프로 금이 간 유리문을 부순다. 화상 입은 피부에 파이프가 스쳐 아프다. 소년은 파이프를 내던지고 손목을 잡고 부들부들 떤다. 소년은 배낭에서 윈드브레이커를 꺼내 몸을 감싼 뛰 완전히 깨지지 않은 유리문에 부딪힌다. 그러자 유리가 금이 간 채로 문틀에서 떨어진다. 마트 안은 놀랍게도 시원하다. 정말로 누군가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느낌이다. 소년은 윈드브레이커와 배낭을 마트 문 옆에 기대어 놓고 주위를 둘러보며 걷기 시작한다. 소년은 계산대를 지나쳐 마트 안으로 들어간다. 생수가 있는 진열대를 찾아야 한다. 가장먼저 챙겨야 할 물건은 물이다. 만약에 물이 없다면 이곳은 아무 것도 없는 쓰레기장에 불과하다. 소년은 카트하나를 끌고 진열대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데어버린 손 때문에 카트를 제대로 운전하기 어려워 과자 진열대에 부딪힌다. 과자봉지가 카트바퀴에 밟히면서 터진다. 그 바람에 내용물이 떨어져 부스러진다. 소년이 진열대에 다섯 번 정도 부딪혔을 때에야 소년은 생수가 진열된 진열대를 발견한다. 물이 절실하다. 목과 손바닥이 따갑고, 몸은 모래 때문에 엉망이다.
역시 낮에 사막을 걷는 건 미친 짓이었어.
  가까이 있는 생수뚜껑을 열고 머리위에 들이 붓는다. 시원하다. 그리곤 소년은 냉장진열대에 정렬되어 있는 생수들을 본다. 진열대에는 일반 생수뿐 아니라 탄산수, 빙하수, 해양심층수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물들이 진열 돼 있다. 소년은 가까이에 있는 탄산수를 들어 유통기한을 살펴본다.    
잠깐. 오늘이 며칠이더라.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소년은 서둘러 마트 문 옆으로 달려가 기대어져 있던 배낭을 뒤진다. 다행히 오늘이 며칠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소년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써둔 일기가 있는 것이 다행이다. 소년은 일기를 뒤진다. 오늘은 구월 십이일이다. 속이 쓰려온다. 소녀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다. 기분이 더럽다. 소년은 다시 물이 진열된 냉장진열대로 돌아간다. 소년은 가까이 있는 생수를 들어 진열대로 던진다. 덕분에 제대로 진열되어있던 생수병들이 쓰러지고, 엉킨다. 진정하자, 진정해. 숨을 몰아쉰다. 기침이 시작할 것 같은 느낌을 억지로 참아낸다.
후우.
  눈을 감았다 뜬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다. 소년은 생수를 집어 들어 유통기한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아직 유통기한을 넘어선 것은 별로 없다. 소년은 왼손바닥에 맨 손수건을 푼 뒤에 진열대에 놓여있던 생수 하나를 꺼내 뚜껑을 깐 다음 그 생수를 화상 입은 부위에 쏟아 붓는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하지만 생수가 화상 입은 부위에 쏟아지면서 느껴지는 차가움은 기분 좋다. 하지만 쓰라림은 제대로 사그라지지 않는다. 소년은 손수건에 물을 묻힌 다음 손에 감는다. 배가 고프다. 요깃거리가 될 만한 것을 찾아봐야겠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탄산수 하나를 들어 뚜껑은 따고 한 모금 마셔본다. 탄산이 입안에서 튄다.

  소년은 배낭을 메고, 주머니에 나이프를 넣고 도심을 배회한다. 도시는 적당한 수의 마천루와, 적당한 수의 아파트, 적당한 수의 가로등을 가지고 있다. 가로등은 밤이 되면 켜지지 않는다. 비상 발전기를 제외한 도시의 전력은 차단된 것 같다.
너무 갑작스러웠나.
  소년은 구겨진 차체를 만지면서 중얼거린다. 대부분의 차들은 시동이 걸린 채로 멈춘 것 같다. 소년은 인도로 튀어나와 상가 일층에 박아버린 무슨 차종인지 모르게 완벽하게 구겨진 차체를 바라본다. 종이처럼 구겨진 차체는 종이만큼 부드럽지 않아,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날이 서있다. 피는 없다. 사람이 다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역시 이것도 운전하던 사람이 증발해서 이렇게 된 건가. 소년은 비교적 평평한 벽에 기대서 앉아 한숨을 쉰다. 사막에서 발견한 소녀의 구두이외에 소년이 발견한 소녀의 흔적은 없다.
제길.
  소년의 욕설이 사막에서의 욕설보다 조금 더 크다. 소년은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움직여서 소녀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소녀의 구두같이 시시한 것이 아닌, 확실히 소녀를 붙잡아야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긴다. 적응이 되지 않은 도시의 모습은 혼자 보기에는 꽤나 무섭다. 가로등이 켜져 있지 않은 차도를 밝히는 것은 달과, 비상 발전기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는 마천루다. 달은 이제 마천루의 아래까지 내려온다. 조용히 침몰하는 배처럼, 달도 조금씩 침몰한다. 이대로 계속 침몰해서 종국에는 충돌하고 말 것이다. 달이 어쩔 때마다 낮게 뜰 때 있잖니. 엄만 그때마다 달의 바다에서 수영하고 싶어. 응? 진우가 우주비행사가 돼서 달에 데려다 주겠다고? 고맙네. 어머니는 항상 말했다.
자, 자. 잡생각은 그만하고 그 애가 어디고 갔을지나 생각하자고.
  소녀가 갈만한 곳이 어딜까. 생각해보니 소년은 그 것을 알 수 없다. 소녀의 생각을 전혀 알 수 없는 이상, 소녀가 어디로 갔으리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다. 힘이 쭉 빠져 소년은 팔을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떨어뜨린다. 소년은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갈라진 아스팔트를 긁는다. 아스팔트가 이렇게 눈에 들어올 정도로 갈라지기 시작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도시도 붕괴할 것이다. 소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소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소녀도 소년과 함께 도시가 붕괴되는 것을 보았고, 그 이후에 떠나 버렸으니까.
  소년이 둘러봐야 할 곳은 넘치고 넘친다. 도시는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소녀가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은 곳은 비상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마트내부나, 마천루다. 소녀는 어둠을 무서워한다. 하지만 달이 침몰해버려 거의 낮과 비슷하게 빛이 비추고 있는 이상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이런, 그럼 저 마천루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잖아.
  소년은 오십층이 넘는 마천루를 보며 중얼거린다. 주머니에 넣어둔 랜턴을 꺼내 스위치를 누른다. 달빛 때문에 랜턴불빛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어서 무작정 도심 쪽으로 들어간다. 도심 쪽으로 들어갈수록 달빛은 약해지고 마천루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그 것을 대신한다. 도심에서 올려다본 달의 모습은 마천루의 빛과 합쳐져 무엇이 달빛인지, 불빛인지 모를 정도다. 그리고 점점 엉킨 차들도 많아진다. 그 엉킨 차들 중에서는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감탄할 만한 외제차들도 있다. 하지만 소년은 그 차들을 보고 무심한 듯 지나친다. 소년은 아무 망설임 없이 먼지가 가라앉아 이젠 회색으로 보이는 무르시엘라고의 차체를 밟고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차체의 위에는 여지없이 먼지로 뒤덮여 있다. 소년도 그 것을 깨닫고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소녀의 발자국을 찾아본다. 있다. 소녀의 발자국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작은 발자국이 차체위에 나있다. 하지만 그 위에 먼지가 덮여지기 시작해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모래의 색깔과 비교가 잘 되지 않는 차체에서는 발자국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발자국은 어느 옷가게에서 끊긴다. 아마 소녀는 이 옷가게에서 신발을 신고 움직인 것 같다. 소년은 깨져 있는 쇼윈도의 유리조각을 들어서 자세히 살펴본다. 소녀의 머리카락인지, 옷의 털실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달라붙어 있다. 소년은 옷가게 안으로 들어가 랜턴으로 이리저리 비춰본다. 쇼윈도에 서있던 두 개의 마네킹은 쓰러져 있고, 옷들은 헝클어져 있다. 소녀가 이곳을 들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소년이 선물한 스웨터가 버려져 있다. 스웨터의 모양새는 말이 아니다. 스웨터의 털실은 올이 풀려 더 이상 스웨터가 아니다. 소년이 그 것이 자신이 선물한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것의 색깔과 같았기 때문이다. 소년은 스웨터를 버린다.
  소년은 쇼윈도를 통해 다시 밖으로 나온다. 소녀의 흔적을 발견했지만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는 단서는 하나도 없다. 소년은 차라리 소녀가 심하게 다쳐 피라도 흘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 소녀는 죽겠지만 소년은 소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소녀를 껴안고 울어줄 수는 있겠지.
  소년은 옷가게에서 벗어난다. 더 이상 소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는 흔적이 없는 이상 무식하게 하나하나 뒤져볼 수밖에 없다. 소년은 우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마천루를 뒤져보기로 한다. 그나마 층수가 가장 적어보이는 곳이다.    
자, 준비나 제대로 하자고.
  소년은 다시 배낭을 끌러 랜턴의 배터리가 충분한지, 생수가 있는지 살핀다. 소년의 배낭속에는 철물점에서 챙긴 크로우 바와 초콜릿 바 두 개, 가죽장갑, 배터리, 생수가 들어있다. 소년은 가죽장갑을 끼고 크로우 바를 오른손에 그리고 랜턴을 왼손에 나눠든다. 배낭을 메고 마천루의 입구에 선다. 소년은 자신이 마왕성의 입구에 선 용사 같다고 생각한다. 소년은 잠시 입가에 미소를 짓곤, 문을 밀어본다. 다행히 문을 닫혀있지 않다. 마천루 내부는 마트안과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조용하다. 소년의 걸음소리만 울린다. 서둘러 엘리베이터가 작동되는지 확인한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작동되고 있지 않다. 소년은 이곳에 대항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하기 위해서 안내라고 적혀 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사람은 당연히 없다. 이곳은 회사의 본사인 것 같다. 소년은 재빨리 보안과를 찾아본다.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이라면 보안도 철저했을 테니, CCTV도 당연히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작동되지 않는 마당에 다행히 보안과는 4층에 위치해 있다. 계단의 형광등으로는 전기가 들어오고 있지 않은 모양인지 어둡다. 소년은 랜턴을 켜서 조심스럽게 계단에 발을 올린다. 계단을 타고 소년의 발소리가 울린다. 마치 동굴에 있는 느낌이다. 소년은 4층에 도착해 문을 연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다. 어쩔 수 없이 크로우 바로 문을 비튼 뒤 문을 연다.
  다행이다. 라고 소년은 숨을 내쉰다. CCTV는 녹화되고 있다. 소년은 녹화를 멈추고 이전에 녹화된 것들을 찾아본다.
엄청난데.
  녹화된 것을 살펴보려면 하루 이틀이 문제가 아니다. 소녀가 이곳에 들어왔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에 녹화된 것을 일일이 살펴보는 건 시간낭비다. 하지만 들어온 수고가 아까워서라도 조금이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아무도 녹화되지 않은 비디오를 두 시간 연속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목이 뻐근하다. 빨리 재생시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하다. 아무도 녹화되어 있지 않다.

  며칠을 걸려 녹화된 비디오를 모두 살펴봐도 소녀가 녹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얻은 것이라고는 소년의 눈가에 진 그림자뿐이다. 소년은 진하게 탄 인스턴트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셔도 졸음이 가시지는 않는다. 자신이 여태껏 한 생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민다. 소년은 비디오파일이 들어있는 하드디스크를 억지로 컴퓨터에서 빼내 크로우 바로 내리쳐버렸다.
  소년은 마천루보다 훨씬 작은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는 아파트를 둘러보기로 한다. 그나마 아파트가 오십층이 훨씬 넘는 마천루보다는 훨씬 났다. 소년은 자신이 소녀였다면 식료품들을 훨씬 쉽게 얻을 수 있는 마트 가까이에 있는 아파트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신이 왜 먼저 아파트를 둘러보지 않았는지 소년으로서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달은 도심과 다르게 그 영향력이 훨씬 크다. 마천루처럼 비상발전기가 없어 전력공급이 전혀 되고 있지 않은지 아파트는 어둡다. 소년이 의지할 것은 달빛과 마트에서 가지고 온 랜턴이다. 달빛이 비춰지지 않는 공간은 지독하게 어둡다. 소년은 뭔가 뛰쳐나올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불안함을 감출 수는 없다. 랜턴을 켜서 주변을 살핀다. 아파트 단지의 입구는 도심과 달리 어지럽지 않다. 하지만 지하주차장의 입구는 나오려던 차가 그대로 뒤로 밀려, 그 차 뒤를 따라오던 다른 차와 함께 충돌해 어지럽게 변해 있다. 개중에는 유리창이 그을리고, 차체가 터져 차체 밑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흘러나온 차들도 있다. 그리고 휘발했음에 분명한, 하지만 이상하게 진동하는 기름 냄새는 코가 시릴 정도로 자극적이다. 소년은 다른 곳으로 랜턴을 돌린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 심어져있는 정원수들은 모두 말라죽어있다. 소년은 아파트를 둘러보면서 나뭇가지들을 뚝뚝 부러뜨려본다. 아파트단지의 아스팔트 위와 인도위에는 말라죽은 정원수들의 나뭇잎들이 떨어져 소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린다.    
어디부터 둘러봐야할까.
  마천루보다 작지만 아파트는 아파트다. 소년은 어느 곳부터 둘러봐야할지 알 수 없다. 인도위에 걸터앉는다. 아스팔트위로 조금씩 금이 가 있었다. 이곳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모두 붕괴되어버릴 징조다. 소녀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년은 아파트를 올려다본다. 만약 소녀가 이곳에 있다면 촛불을 이용해 불을 켜고 있을 것이다. 베란다창문을 통해 그 불빛이 비춰지겠지. 하지만 불이 비춰진 집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우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파트로 들어간다. 도심의 마천루와 달리 십 층짜리 작은 아파트다. 일자형으로 된 복도사이로 모두 한 층당 여섯 호가 있다. 소년은 우선 가까이 있는 문을 열어본다. 문은 잠겨있다. 소년은 잠시 생각하다가 창문을 깨고 들어가기로 한다. 크로우 바와 장갑을 배낭에서 꺼내어 장갑을 낀다. 크로우 바로 방범창을 떼어낸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조악한 방범창이 우그러지는 소리를 낸다. 시멘트 가루가 흩날려 달 쪽으로 날아간다. 방범창을 떼어내고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뒤 유리창을 깬다. 유리창은 단번에 부서지지 않고 작은 유리조각이 날려 소년의 장갑에 박힌다. 달빛이 유리조각에 비쳐 반짝인다. 깨진 유리조각을 대충 한곳으로 치우고 창틀을 붙잡고 방으로 들어간다. 안에선 무엇인가 부패한 냄새가 난다. 귀를 기울여 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역시 없나. 소년은 랜턴을 켜 주위를 비춰본다. 가장먼저 두 개의 방과 화장실이 눈에 들어온다. 두 개의 방 구조는 거의 일치한다. 침대와 그 위에 엉켜있는 이불, 그리고 어지러운 책상 위. 아마 이 방의 주인은 어린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두 개의 방을 지나 안방과 거실을 본다. 안방도 앞서 두 개의 방과 구조는 별반 다르지 않다. 책상대신 화장대와 가구가 있을 뿐이다. 거실에는 커다란 어항이 있다. 물을 전혀 갈지 않아 어항 속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썩은 냄새는 어항의 물이 썩어서 나는 냄새다. 소년은 크로우 바로 어항을 깨뜨린다. 하지만 깨진 어항에서 떨어지는 건 썩어버린 물과 이끼도 끼지 않은 자갈뿐이다. 이끼도 물고기도 보이지 않는다.  
  소년은 다른 집으로 가본다. 대부분의 집들은 문이 잠겨 있지만, 개중에는 잠겨있지 않아 소년이 손쉽게 뒤져볼 수 있는 곳도 있다. 하지만 당연히 아무도 없다.
  달은 여전히 떠있다. 아파트의 가장 높은 곳에서 달을 바라보니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이것은 소년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다. 달이 커졌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사라진 걸까. 달한테 소원을 빌어서? 소년은 달을 노려본다. 달을 반으로 부숴버리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까라는 어이없는 생각을 한다. 소녀는 어렸을 적부터 달을 좋아했다. 소녀는 항상 달이, 보름달이 가장 강한 마력을 내뿜는다고 말했다. 진우야, 저 달 있잖아. 달한텐 마력이 있데. 달을 봐봐. 정말 예쁘지 않아? 저기 봐봐. 보름달의 바다가 일렁이는 게 보이잖아. 응? 예쁘다고? 그럼, 내가 예뻐 아님 달이 예뻐? 소년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소녀가 그 말을 소년의 어머니한테 들었다는 것을. 결국엔 소녀도 어머니처럼 자신이 죽기위한 장소를 찾고 있는지 모른다. 소년은 바닥에 던져둔 크로우 바를 들어서 문을 내리찍는다. 철제문은 소년이 크로우 바를 내리칠 때마다 조금씩 구겨진다. 그리고 소년의 손 또한 피투성이가 된다. 소년은 금세 지쳐 크로우 바를 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댄다. 크로우 바는 문에 찍힌 채 그대로 박혀있다.
  달은 지상으로 가라앉고 있다. 덕분에 지금은 이른 아침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지경이다. 소년은 배낭과 크로우 바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파트를 더 이상 뒤져보아도 소녀를 찾기엔 글렀다. 달이 완전히 지고,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도시는 금세 달구어질 것이다. 낮이 되면 더 이상 도시를 돌아다닐 수 없다. 다시 달이 뜨고 날씨가 서늘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소년은 벽을 짚고 일어나 아래를 처다 본다. 이제 어둠은 사그라지고 있다. 아래를 훑던 소년의 눈이 멈춘 것은 그때다. 소녀다. 정확히 소녀인지는 알 수 없다. 소년은 분명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존재와 눈을 마주쳤다. 소년은 순간 계단을 향해 달린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간다. 소년의 발소리만 콘크리트에 반사되어 울린다. 속이 뜨거워진다. 마치 복부를 누군가 한 대 갈긴 느낌이다.
  소년은 아파트에서 나온다. 주변을 서둘러 둘러본다. 소년의 눈에 무언가 움직이는 점이 포착된다. 소년은 매고 있던 배낭을 내동댕이치고 그 것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린다. 뭔가 외쳐서 달려가는 걸 멈출 여유 따윈 없다. 소년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 금방이라도 기침이 터져 나올 것 같이 목이 간질거린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꼬꾸라질 듯 소년의 뛰는 모습은 불안정하다. 차도엔 엉킨 차가 점점 많아진다. 차체에 누군가 올라간다. 소년이 달려갈수록 모습이 뚜렷해진다. 긴 머리칼이 흩날리는 모습이 확실하다. 소녀다. 소녀는 힘겹게 차체위로 올라서서 잠시 뒤를 돌아본다. 확실히 얼굴이 보인다. 소녀는 차위를 뛴다. 소년도 곧 소녀를 따라 차체에 올라선다. 조금만 더 속도를 내면 소녀를 따라잡을 수 있다. 하지만 폐와 다리가 머리를 뒤따르지 않는다. 소년은 차체위에 무릎 꿇고 주저앉아 점점 사라지는 소녀의 모습을 바라본다.

  소녀의 모습을 떠올린다. 잠시 바라보았던 소녀의 얼굴은 밝았다. 가슴속을 담담하게 채웠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소되었다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그건 죽은 어머니와 같은 표정이다. 모든 게 이렇게 해소되는 걸까. 소년의 아버지도 이런 감정을 가졌을까. 소년은 떠난 어머니를 찾으려고 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자살을 막았을까. 소년은 그럴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아버지는 어머니의 자살을 눈앞에서 볼 수밖에 없었겠지.    
  달의 모습은 점점 뚜렷해진다. 달이 점점 가까워짐과 동시에, 도시의 아스팔트에는 균열이 점점 심해진다. 소년은 하늘 위로 처 들었던 고개를 내리고 숨을 몰아쉰다. 달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은 어딜까. 달의 검은 바다가 확실히 보이는 곳, 달의 바다에 삼켜질 수 있을 만한 곳이. 마천루. 소년은 마천루를 떠올린다. 가장 높은 곳.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면 달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곳이다. 소년은 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스팔트의 균열이 점점 심해져 도시는 금방이라도 붕괴해버릴 것 같다. 차체를 뛰어넘고, 파편을 짓밟는다. 날카롭게 날선 파편에 손이 긁혀 피가 새어나온다.
  가장 높은 마천루의 유리문은 깨져있다. 소녀가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이다. 소년은 깨진 틈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간다. 깨진 유리조각에 윈드브레이커가 찢겨진다. 거추장스러운 윈드브레이커를 벗고 엘리베이터로 다가간다. 역시 이곳도 마찬가지다. 서둘러 계단을 찾아 올라간다. 얼마 달리지 않았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를 악문다. 입가에 피가 맺혀 침을 뱉는다. 이런 일로 지체할 시간은 없다. 손잡이를 붙잡고 손으로 다리를 끈다. 신발도 거추장스럽다. 거의 벗겨진 신발을 던져버리고 뛴다. 다리에 힘이 풀려 뛰는 건 거의 기는 것과 같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소녀가 죽도록 놔둘 수는 없다. 소년은 소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자신이 원망스럽다. 소년은 입만 움직이면서 욕설을 내뱉는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땀이 흘러 눈앞이 흐리다. 침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온몸이 뻐근하다.
  소년은 닫힌 문을 연다. 문을 열자마자 침몰하는 달이 모습을 보인다. 침몰하는 달의 검은 바다는 진짜 바다처럼 일렁인다. 소년은 주변을 둘러본다. 지나치게 밝은 달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눈이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달을 등지고 서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소녀는 아무 것도 입고 입지 않다. 소녀도 소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미소 짓고 있다. 소년은 소녀의 모습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다. 다가가면 금방이라도 몸을 틀어 떨어져 버릴 것 같다.
어서와.
  소녀가 말한다. 소녀의 얼굴은 조금 붉게 달아올라있다. 그 것이 달 때문에 그런지, 소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아름답지? 달이 침몰하고 있어.
  소년은 대답하지 않는다. 소년은 소녀의 눈을 바라본다. 눈동자의 조그마한 움직임도 없다. 소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은 말하고 있는 입뿐이다.
진우야, 저 달 있잖아. 달한텐 마력이 있데. 달을 봐봐. 정말 예쁘지 않아?
예쁘지 않아.
  소년은 소녀의 입을 바라본다. 소녀는 미소를 잃지 않는다.
잘 봐봐. 저 검은 바다가 일렁이고 있잖아. 여기에는 없는 바다가.
  소녀는 황홀한 듯 몸을 돌려 달을 바라본다. 소녀의 얼굴은 더욱 붉게 달아오른다. 겨우 그것 때문인가. 달이 아름다워서 자신에게서 떠난 것인지 소년은 묻고 싶다.
예쁘지?
아니, 네가 예뻐. 유진아, 네가 훨씬 아름다워. 그러니까 죽지마.
  소녀는 소년의 말의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곤 곧 웃음을 터뜨린다.
뭐? 죽어? 내가 왜 죽는데. 난 안 죽어. 난 단지 그냥 달에서 수영하고 싶을 뿐이야.
  달은 정말로 침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태양은 뜨지 않는다. 마천루가 붕괴하고 있다. 지진이 난 듯 마천루가 흔들린다. 소녀는 소년을 바라보고 웃는다. 그리곤 몸을 돌려 뛰어내린다. 소년은 떨어지는 소녀를 붙잡지 못한다. 소녀는 달 속으로, 풍덩, 빠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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