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왕의 죽음

2009.05.25 01:3805.25

제(制)는 고개를 들었다. 잿빛 하늘에서 유리파편이 떨어지고 있었다. 창백한 파편이 살갗에 닿자 그는 몸을 떨었다.

"눈 뜬 이들도 이리 추운데, 땅 아래 누우신 당신은 얼마나 추우십니까?"

갈라진 목소리로 제가 말했다.

발아래 축축하게 젖은 땅에는 검게 칠 된 나무상자가 있고, 그 속에는 작고 깡마른 노인이 깨지 않을 꿈을 꾸고 있었다. 이 땅의 아버지께서 오래된 껍데기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잠든 이를 깨울까, 눈도 말없이 내리는데, 계집들의 상스러운 울음소리가 고요함을 깨트렸다. 예(禮)의 칼로 눈물을 베던 중신들도 결국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움을 막지 못했다.

울음이 넘쳐, 하나의 서글픈 곡이 되었고, 바람이 불어 멀리, 널리 퍼져나갔다.

늙은 왕은 추했다. 수저 하나 들지 못해 어린 시녀의 시중을 받으면서도, 앙칼진 성격은 그대로였다. 독단, 독선, 아집이 왕의 눈과 귀를 빼앗아갔다. 제 입으로 한 명을 번복하기 일수였고, 그 때마다 궁 곳곳에서 혈화(血花)가 피어올랐다. 달콤한 혀를 가진 도둑들이 왕의 주위에 기립했고, 우직하고 말없는 충복들은 제 몸을 도화지 삼아 붉은 그림을 그리거나, 청산녹수가 좋아 머리는 산에 몸은 강에 뿌렸다.

제는 눈앞이 흐려지자 몹쓸 바람이 궂은 짓을 했다고 여겼다. 결코, 왕의 삶이 서글퍼서, 죽음이 안타까워서 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감히 왕을 동정하다니!

제는 눈을 감았다. 젊은 왕의 모습이 보였다. 마르고 왜소한 왕이었지만, 그 정열과 패기는 만인을 압도했다. 날름거리는 지옥의 불길을 향해 가장 먼저 달렸던 이도, 뒤에 선 제 자식들이 다칠까, 가슴으로 창칼을 받아내던 이도, 유리 같은 마음을 가졌지만 남 앞에서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던 이도, 제 가슴으로 모든 자들의 눈물을 대신 흘렸던 이도 모두 왕이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비천한 자의 발에 입맞추던, 하늘 앞에서도 당당한 남자가 왕이었다.

전장에 달이 뜬 날.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던 왕이 말했다.

"제, 짐의 바람은 죽어서도 넋만은 남아 가엾은 자식들을 돌보는 것이라네. 그대의 소원은 무엇인가?"

갑작스런 질문이라 제는 엉뚱한 말만 늘여놓았다. 시간은 놓은 화실이라, 왕은 제의 답을 듣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바람이 불어 제의 서리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삶으로 깊게 패인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왕의 붕어 이 후 사라졌던 미소였다.

제는 왕을 향해 깊게 절한 후 자리를 떴다. 오래전, 당신 질문의 답을 가슴에 품고서.

'폐하, 소인의 소원을 물으셨습니까? 제 소원은 당신께서 늘 당당할 수 있도록 당신 뒤를 받치는 것입니다.'

겨울이 조용하게 울던 날이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460 단편 로이드가의 피1 나는야외계인 2009.04.28 0
1459 단편 타헬의 목 초삭 2009.04.29 0
1458 단편 과부들1 몽상가 2009.05.06 0
1457 단편 달토끼제국의 최후 파디스-ㅅ- 2009.05.12 0
1456 단편 Be the Reds(빨갱이가 되자) 조약돌 2009.05.14 0
1455 단편 두 개의 눈 윤진영 2009.05.14 0
1454 단편 이것은 진화가 아니다 kristal 2009.05.14 0
1453 단편 Homo Satanicus를 찾아서 Kristal 2009.05.18 0
1452 단편 새로운 하늘 - 3차판 니그라토 2009.05.22 0
1451 단편 당신은 아마 모를 거예요 kristal 2009.05.23 0
단편 왕의 죽음 몰약 2009.05.25 0
1449 단편 크리티 박사의 슈피겔 프로젝트 kristal 2009.05.25 0
1448 단편 마지막 선물 1 몽상가 2009.05.26 0
1447 단편 lunatic juvenile SunOFHoriZon 2009.05.28 0
1446 단편 추적하는 과거4 세이지 2009.05.30 0
1445 단편 어느 소녀의 하루 니그라토 2009.06.03 0
1444 단편 경국지색 - 말희2 니그라토 2009.06.07 1
1443 단편 호수여정-배타고 다섯날(오타수정) 이오닉 2009.06.08 0
1442 단편 법령 오멜라스(수정판) 니그라토 2009.06.09 0
1441 단편 세금은 공정히 징수되어야 한다. 손지상 2009.06.10 0
Prev 1 ...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