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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타헬의 목

2009.04.29 19:5604.29




남부의 고란 사막 구석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떠돌며 근근이 살아나가던 시라이족이 사막을 넘었다. 시라이족을 낙타 키우는 노예 떼로 여기며, 식량과 물을 쥐고 시라이족을 핍박해왔던 라미안 국이 제일 먼저 짓밟혔다.
시라이족은 라미안을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문화의 중심지였던 수도 파산에서 시골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라미안이라는 이름에 속해 있는 모든 땅을 짓밟았다. 라미안과 피를 섞지 않으려 여자들을 찢어 죽이고 남자들을 강간해 죽였다. 늙은이는 구덩이에 밀어 넣어 불 태워 죽였고 아이들은 말 꼬랑지에 매어 장신구처럼 끌고 다니다 죽였다.
대륙이 시라이족의 진안한 복수에 놀라 허둥지둥 당황할 새, 시라이족은 말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나라도 라미안만큼 짓밟히진 않았지만, 순순히 성문을 열고 항복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피와 불길 속에 파묻혔다. 남부의 제국이라 불리는 칼란마저 맥없이 무너지자, 더 이상 남부의 어느 나라도 감히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시라이족은 남부를 모두 짓밟고도 쉬지 않고 달려 북부를 향했다. 수백 년, 사막에 갇혀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울분과 증오를 풍요로운 땅을 향해 내질렀다. 코를 간질이는 풍요로운 땅의 냄새에 메마른 사막을 세상의 전부로만 알았던 시라이 전사들은 마음껏 설렜다. 시라이족의 젊은 수장, 아티 아누르는 전사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호마대로의 끝마지에 멈춰섰다. 남부와 북부를 잇는 호마대로에 선 시라이족 팔천 용사들은 북부를 코앞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흥겨운 밤이 이어졌다. 아티 아누르는 술통을 깨고 낙타를 잡았다. 거친 전사들은 술과 고기에 풀어져 마음껏 노래 부르고 춤췄다. 시라이족을 지켜주시는 신께 감사드리며, 신께 북부의 가장 풍요로운 땅을 바치겠다고 한 입으로 외쳤다.
새벽에 되어서야 진지는 조용해졌다. 전사들은 최소한만 남고 모두 골아 떨어졌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는 아무도 눈 뜨지 못할 만치 술 냄새가 진득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 술 냄새 속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부스스 일어났다.
그는 여느 전사들과 달리 가벼운 차림새였다. 갑옷도 방패는커녕 칼이나 창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나비 날 듯 훨훨 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경계를 서느라 술과 고기를 바라만 봐야 했던 전사들은 눈을 번뜩였지만 장님마냥 그를 보지 못하고 번번이 돌아섰다. 그는 수월히 진지를 벗어났다.

‘내가 짰으니 어디를 조심해야 하는 지는 눈 감고도 훤하지.’

몸 놀리는 데 한 톨의 재능도 없어 보이는 사내는 어느 새 멀어진 시라이족의 진을 돌아보며 쓰게 웃었다.
전사들이 북부의 땅을 코앞에 두고 술을 퍼먹을 수 있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어서다. 누가 감히 뚫고 들어오고 벗어나랴. 그가 머리를 싸매고 구축한 일생의 역작이건만. 다만 그가 만들었기에 오직 그에게만 어수룩한 그물이 될 뿐이다.
시라이족 진지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북부에 가까워 가면 가까워 갈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시라이족 진지를 벗어나기 위해 훨훨 날던 걸음은 지금이라도 돌아가자고 주인의 머리와 심장을 재촉했다.

‘내 심장과 머리는 다 저기에 두고 왔으니 안달해 봤자 소용없다. 텅 빈 머리와 심장으로 어찌 발걸음을 돌리리?’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기어이 돌리지 않았다. 아니, 그는 다른 이유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타헬.”

이제 다시는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부름이 그를 세웠다. 뒤통수에서 들리지 않았다. 그가 기를 쓰고 걸어 나가려는 그 길 앞에서 들렸다.
열 걸음쯤 걸으면 닿을까. 길옆에 자라난 우리수 나무 아래, 말 한 마리가 푸드득 푸드득 고개를 비비고 있었다. 엉덩이에 검은 점이 있는 밤갈색 말은 그에겐 익숙한 말이었다. 고란 사막에서 호마 대로까지. 그를 등에 태우고 달려주었던 그 말이었다.
나무에 기대 앉아 있는 사람은 더욱 익숙했다. 무엇보다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던 이였다. 고란 사막의 뜨거운 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와 짧은 머리카락. 짙은 눈썹 아래, 하늘의 태양도 곧게 올려다보는 태양빛 눈동자. 언제나 그를 수다스럽게 만들던 일자 입술.
그는 마른 입술을 달싹여 그녀를 치장하는 모든 찬사를 되뇌었다. 남부를 짓밟은 정복자이자 북부를 노리는 사냥꾼. 고란 사막의 연인. 신께 오아시스를 선물 받은 흰 매. 시라이족 모든 전사들의 영웅이자 시라이족 모든 아이들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주인.
아티 아누르였다.
짤랑.
그녀가 일어섰다. 목에 건 뼈와 금강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울었다, 다시 짤랑.
타헬은 돌처럼 굳었다. 도망치지도 그 자리에 엎드려 빌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를 보았다.
아티 아누르는 따라 나서려는 말의 콧잔등을 쓸어주고, 타헬에게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아티 아누르가 가까워졌다. 타헬은 숨이 막혔다. 그녀가 코앞에 섰을 땐  숨 쉬는 법을 잊어 버렸다.
그녀는 숨 쉬듯 당연하게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 타헬의 목을 죄었다. 타헬은 목에 차가운 느낌이 닿아서야 그것을 알아차렸다.
몸이 떨렸다. 다행히 두렵거나 놀라서는 아니었다. 몸의 떨림은 이성이 어쩌지 못할 본능의 영역이었다. 칼이 목을 꿰뚫을 듯 차갑게 닿은 지금, 타헬은 놀랍도록 편안했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아티 아누르는 그런 그를 자신에게 익숙한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성큼, 손에 힘을 주었다. 실처럼 가느다란 상처가 타헬의 목을 둘렀다. 따끔했다. 상처는 금세 붉어져 피를 방울방울 흘렸다. 본능은 또다시 타헬을 다그쳤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허나 여전히 타헬은 본능을 비웃었다. 두렵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대신, 기뻤다.

“날 보내줘, 아티.”

어떻게 알았냐고 묻진 않았다. 바람결에 묻어나는  술 냄새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까만 눈동자만으로 충분했다. 오히려 감사했다. 이렇게라도 다시 한 번 볼 수 있도록 해주어서.

“돌아가기 위해서인가?”

어째서 탈영한 거냐고. 날 배신한 거냐고. 아티 아누르도 묻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등 뒤로 아릿한 성곽을 물었다.
성은 새벽안개에 쌓여 멀어 보이지만 반나절만 말을 달리면 닿을 거리였다. 시라이족이 북부에 닿아 처음으로 짓밟을, 혹은 복종의 백기를 만나게 될 첫 성, 첫 도시 모핀. 그곳은 타헬의 고향이었다.
아티 아누르는 타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늘 해가 뜨면, 빠른 말에 날랜 전사를 태워 나보다 앞세울 거다. 나보다 먼저 모핀에 도착해 항복하라 권할 거고, 모핀의 성벽에 흰 기가 걸릴 때까지 나는 가장 느린 말을 타고 매일 밤 술통을 깰 거다.”

목소리는 사막의 바람처럼 무뚝뚝하고 메말랐다. 타헬은 그 안에서 달콤한 꿈을, 맑은 샘물을 찾았다. 그것들은 끈적끈적하게 타헬을 휘감고 맑게 찰랑이며 타헬을 꾀였다.

“그러니 네가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

아티 아누르가 타헬을 잡았다.

“가지 마라.”

칼은 목을 노리고 있다. 그럼에도 아티 아누르는 타헬을 잡으려 하고, 타헬은 잡히고 싶은 마음에 휘청였다.
두 태양이 타헬을 보았다. 태양을 담은, 태양보다 빛나는 두 눈동자가 타헬을 담았다. 타헬은 그 볕은 견디지 못해 눈을 질끈 감았다.

“모핀은 예쁘지도 않으면서 콧대만 더럽게 높은 공주님이야.”

“힘으로 콧대를 꺽진 않을 거다.”

“힘만 센 남자에게 시집가느니 차라리 목매달아 죽겠다고 난리 칠 거야.”

‘자신보다 아름답고 빛나는 너를, 그들이 받아들일 리 없어.’

그 오만이 싫어, 저도 모르게 그 오만의 일부가 되어 버릴까봐, 도망치듯 모핀을 떠났다. 북부 제일의 아카데미로 갔으나 거기도 다를 바 없었다. 오만 아닌 다른 무엇도 볼 수 없었다.
차라리 죽어 버리자. 오만마저 태워 버릴 뜨거운 태양 아래서, 오직 태양만 이글거리는 적막 속에서 나를 끝내 버리자. 나라는 오만만이라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자. 그리하여 남부의 끝, 고란 사막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뜨거운 태양 아래 홀로 쓰러져 죽어갔다. 얄궂게도, 그때서야 타헬은 처음으로 삶에의 뜨거운 욕구를 마주했다. 본능보다 거칠고 절실한 열망은 오아시스 신기루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오만한 심장이, 모래로 찬 목구멍이, 살벌한 모래 폭풍으로 덮인 두 눈과 귀가, 삶을 바랐다. 태양 가장 가까이서 죽겠다는 마지막 자존심마저 오만이었을 뿐이라는 걸 깨닫고야, 죽음 앞에서 삶을 찾았다. 살고 싶어졌다. 살아야만 했다.
살고 싶으나 죽어가던 타헬을 발견한 건 아-누르, 흰 매였다. 타헬은 태양이 보낸 비웃음이라 생각했다. 오만으로 똘똘 뭉쳐 다가와서는 도망가지도 못한 채 다시 살고 싶다 발버둥치는 자신을 비웃기 위해 흰 매를 보냈다고.
타헬은 아직 살아 있냐며 내민 손을 붙잡았다. 모래에 파묻혀 있던 그의 손이 잡은 구명줄은 작은 손이었다. 모래 폭풍에 갈라지고 사냥감의 이빨에 찢기고 굳은살로 가득한 거친 손은, 그렇기에 생의 기로 넘쳐흘렀다.
태양 아래 활짝 웃는 그녀는 기적이었고 구원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타헬의 삶이었고 생을 향한 집착이었다. 그녀의 곁에 머물기 위해 오만 속에서 흘겨 본 지식을 짜냈다. 그녀의 천막에 누워, 사막을 넘어 풍요로운 땅을 시라이족에게 줄 거라 울던, 참 작고 여린 아티 아누르를 껴안고 입 맞추었다. 항상 너의 곁에서 너의 꿈을 위해 살겠다고 맹세했다. 너의 꿈이 나의 꿈이라고 약속했다. 어찌할 바 모르고 나무토막처럼 굳어 부끄러하는 그녀의 검은 머리를 쓸어주고, 그 짧은 올올이 마저도 사랑스러워 행복해지고…….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차라리 그냥, 이대로…….’

문득, 설익은 유혹이 찾아들었다. 아티 아누르를 떠나지 않고, 그럼에도 아티 아누르를 떠날 수 있다면? 다행히 아티 아누르의 단검은 충분히 날카롭다. 주인을 닮아 주저 없이 아름답다. 타헬은 여러 번, 아티 아누르가 이 단검으로 적의 심장을 가르고 목을 따는 걸 봤다.
순간의 충동으로 타헬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었다. 단검은 기다렸다는 듯 타헬의 목을 껴안았다. 목이 핏빛 목걸이가 둘러졌다.
놀라 물러선 것은 아티 아누르였다. 아티 아누르는 뒤로 물러나 칼을 떨궜다. 뚝, 칼끝에서 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바닥에 작은 자국으로 번졌다.
바위처럼 굳고 강한 시라이 최고의 전사, 아티 아누르의 잔잔하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아티 아누르는 무언가 말하려 애썼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독히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티 아누르는 타헬을 구하기 위해 대신 얼룩 전갈에게 물리고도,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상처를 째고 독을 발라냈다. 그녀는 상처에 익숙하고 두려움과 아픔이 당연한 삶을 살아 왔다. 그런 그녀에게 타헬은 이 순간, 얼룩 전갈보다 지독한 독물이 되었다.

“가겠다는 거군.”

아티 아누르는 일그러진 얼굴로 여전히 굳게 말했다. 타헬은 대답하지 않았다.

“삼 일. 세 번의 해와 달이 뜬 후, 우리는 모핀에 도착할 거다.”

반나절 달리면 닿을 거리를 삼일이나 두어 기어 오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타헬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아티 아누르는 타헬을 스쳐, 타헬이 그간 걸어온 길을 밟았다. 그녀는 그대로 타헬과 등을 마주했다.
푸르릉, 나무에 매인 말이 뚜벅뚜벅 타헬에게 걸어왔다. 말은 아티 아누르를 따르지 않았다. 타헬에게 머물렀다. 고개를 숙여 타헬의 얼굴에 코를 비볐다.
엉덩이에 검은 점이 있는 밤갈색 말은 아티 아누르가 타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시라이 전사들만큼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은 그가 항상 아티 아누르의 곁에서 달릴 수 있도록, 아티 아누르는 자신의 말을 타헬에게 주었다.
아티 아누르는 그 말을 타고 자신을 떠나라고 기꺼이 내준 것이다. 이 흰 새벽, 한 걸음 앞서 달려 나와 기다리며.
왈칵, 울음이 솟구쳤다. 타헬은 얼른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티 아누르는 고란 사막의 아-누르[흰매], 시라이족 최고의 전사. 사막 한가운데서도 물소리를 듣고 오아이스를 찾아내는 이. 속없는 울음소리 따위는 쉽게 들을 것이다. 혹여나 뒤돌아보아 오열을 삼켜 떨리는 어깨 따위를 보았다간… 입가에 흐르는 피를 보였다간… 안 된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타헬은 말의 등에 올라타 죽은 듯 엎드렸다. 말의 갈기에 얼굴을 묻고 말의 궁둥이를 차게 쳤다. 말이 푸르릉, 콧김을 내며 달렸다. 아티 아누르가 앉아 있던 나무는 한 달음에 지나쳤다.
나무가 멀어졌다.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


타헬은 꼭 반나절 만에 모핀에 도착했다. 해는 머리에 떠 있었다. 쿨럭쿨럭 기침이나 토해내는 주인을 업고, 말은 용케 길을 잃지 않고 잘 달려 주었다. 배고프고 목도 말랐으련만. 타헬은 여물을 넉넉히 챙겨줄 틈도 없이, 성문 앞에서 바로 말과 헤어졌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타헬을 보자마자 말에서 끌어내 결박했다. 질질 끌고 성 안으로 들고 갔다.
시라이족 복장을 한 말 탄 사내를 북부 어디에서건 평범한 여행자 취급하랴. 타헬은 당황하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
시장 앞에 서니, 타헬의 신분은 금세 밝혀졌다. 시장은 타헬이 모핀을 떠날 때도 시장이었던 시장이었다. 시장은 자신의 손자이자 모핀이 싫다 뛰쳐나간 불량 시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더불어 아직도 시장으로서의 오만과 집안 어른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타펠리프 무트, 빈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네가 어찌하여 시라이 야만족들의 복장을 하고 돌아온 것이냐.”

시장은 피투성이 손자에게 반갑다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그동안 시라이인들과 함께 있었으니까요. 그들의 옷을 입은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손자는 배가 더 뿔룩해지고, 머리가 다 까진 할아버지를 보며 피식 피식 웃었다.

“시라이 야만족들과 함께였다고? 그렇다면 너는 변절자로구나. 그들이 너를 보냈느냐? 너는 그들의 첩자인 게냐?”

“시라이인들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습니다.”

쿨럭, 기침이 났다. 목에서 피가 줄줄 흘렸다.

“시라이 야만족의 편을 드는가?”

“나는 내 발로, 스스로 돌아온 것입니다.”

“어찌하여? 다시 모핀의 아들이고자 한 것이냐.”

“모핀이 멸망하는 것만은 면하게 하고 싶어 항복을 권유하러 온 겁니다.”

“닥쳐라!”

홀 안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시라이 복장을 한, 빈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시장의 망나니 손자를 보러온 시민들은 모두 분노했다. 젊은이들은 허리에 찬 녹슨 검을 빼들었다. 늙은이들은 서 있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갑옷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시장이 소리쳐도 소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합지졸.
오만덩이들.
풍요에 늙어 칼이 녹슨 지도 모르는 태만자들.
콧대만 높아 현실을 보지 못하고 과거의 영화만을 그리는 가련자들.
모핀은 모핀이었다.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 녹슨 칼과 구겨진 방패, 실용성이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갑옷 꾸러미가 어색할 만큼. 그래서 타헬은 마음 놓고 감사할 수 있었다.
시장은 자신의 권위를 되찾길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고함이 닿는 젊은 병사 둘을 시켜 타헬을 감옥에 가두었다. 매년 홍수가 나면 여지없이 강물에 잠기나 청소는 단 한 번도 하지 않는 지하 감옥은 그 악명답게 더럽고 음습했다. 악취도 심했다. 감옥은 텅텅 비어 있었고, 자물쇠는 녹슬어 열쇠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타헬은 심심한 감옥의 유일한 죄수가 되었다. 다행히 하루 삼시 세끼를 챙겨주어, 손바닥만한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과 함께 날짜를 가늠할 수 있었다.
타헬은 지하 감옥에서 꼬박 열흘을 지냈다. 그동안 열다섯 번 피를 토하고, 열일곱 번 물을 마시고 다섯 번 똥을 쌌다. 피딱지 난 목이 근지러워 긁다가, 성이 난 지 오래였다. 잠을 자다 쥐에 물린 발은 탱탱 부었다.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 턱이 까끌해졌다. 열흘째까지도 식사는 삼시 세끼였으나 양은 점점 줄어 뱃가죽이 쑥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팔다리-쥐에게 물려 부은 발가락을 빼고는-가 얇아진 것 같기도 했다.
열흘.
정확히 열흘이었다.
열흘째의 저녁놀이 창문을 통해 한 뼘 감옥 안을 비추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타헬은 멍하니 주홍빛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어째서? 어째서 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모핀은 어떻게 나에게 여전히 삼시 세끼를 주는 거지?’

갑자기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모핀의 시장이 갑자기 치매에 걸려 오만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으로 소설이 시작 되는데, 시장은 시민들을 설득해 그들의 오만마저 잠재우는 성자로 거듭나고, 기꺼이 제 손으로 모핀의 성벽에 백기를 건다. 이에 삼일을 기다려 주겠다고 했으나 사실 반나절 만에 도착한 아티 아누르는 조용히 모핀을 접수하고. 약속대로 피를 보지 않으나, 대신 타헬을 괴롭히기 위해 계속 지하 감옥에 삼시 세끼를 챙겨 보내는 내용의 로맨스실화에세이 소설. 배드씬을 군데군데 적당히 박아 넣으면 북부의 귀부인들이 재미나게 읽지 않을까? 어차피 그녀들에게 중요한 건 한 권의 책에 배드씬이 몇 번이나, 얼마나 다양한 체위로, 적나라하게 쓰였나니까. 배드씬만 적당히 전문 작가를 사서 써 덧붙이면 베스트셀러가 될 지도 모른다. 그 돈을 시라이족의 군자금으로 모두 내놓겠다고 하면 아티 아누르의 심술이 풀릴까? 타헬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팬들의 성원에 못 이겨 제목 미정의 로맨스실화소설의 속편을 다섯 개 더 쓰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렸다.
때맞추어, 당번병이 저녁 식사를 들고 왔다. 타헬은 거의 죽어갈 것처럼 헐떡이며 밖의 상황을 물었다. 과묵하게 생겨 먹지는 않은,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당번병은 기다렸다는 듯 수다를 떨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타헬이 듣기에 우습지도 않은 오만이 묻어났다.
타헬은 시라이족이 일주일 째 모핀 주위를 뱅뱅 돌며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더불어 모핀의 시민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철저한 방어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시라이족이 자신들의 공격력을 꿰뚫어 보고 감히 공격하지 않으니, 야만족 치고는 제법 눈썰미가 있다고 떠들어 댄다는 것과 북부의 평화를 지키고 남부를 구원하기 위해 내일 해뜨기 전, 성문을 열고 나가 시라이 야만족들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결정한 것도.
당번병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이 빈 아카데미 지망 삼수생이라는 것을 밝히고, 빈 아카데미 입학시험 경향을 물어왔다. 타헬은 생각나는 대로 지껄여 주었다. 만일 당번병의 말대로라면, 당번병에게는 빈 아카데미 입학시험 경향이 필요 없을 테니까.
타헬은 정말 가빠진 숨에 가슴을 들썩이며,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답답하던 속이 시원해졌다. 당번병이 가져온 딱딱한 빵과 식은 수프는 건들지 않았다. 더 이상 억지로 먹고 생을 연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열하루 째.
아침, 혹은 새벽.
타헬은 손바닥만한 창문을 올려다보며 기다렸다. 노을이 가시고 별빛이 제 멋대로 반짝이고, 다시금 희끄므레한 날이 밝아올 때까지.
잠을 잘 수 없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놀랍게도 설레었다.
그리고 모핀은, 타헬을 배신하지 않았다. 새벽이라기 뭐한 아침에 떠들썩한 행진곡이 울렸다. 타헬은 창문에 매달려 배꼼이 밖을 보았다. 사람들은 발목 밖에 안 보였지만 심상찮은 분위기는 보였다.
새벽이라고 해놓고 아침에, 습격이라면서 활기찬 행진곡을 울려대며. 모핀은 제 스스로 성문을 열고 시라이족의 아가리에 걸어들어 갔다. 오래 전 등 돌린 고향이라 할지라도 이런 모습을 보는 건 기쁜 일이 될 수 없다. 타헬은 손톱으로 벽을 긁으며 피를 토했다. 손톱이 부러져 손가락마다 피가 흘렀다. 타헬은 꺽꺽 숨을 쉬며, 감옥 벽에 혈서라도 써 볼까 고민했지만 로맨스실화에세이를 쓰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일 같아 포기했다.
저 멀리서부터 탄내가 진동하고서야 타헬은 일어섰다. 귀걸이처럼 귀에 감고 있던 철사를 바닥에 내려놓고 꾹꾹 눌렀다. 구부러진 철사를 반듯이 펴고, 그것을 감옥 자물쇠 구멍에 넣었다. 찰칵, 찰칵, 착. 자물쇠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렸다. 타헬은 휘청휘청 탈옥했다.
행진곡을 부르며 후진했을까. 전쟁을 성 안으로 초대하기 위해 행진했던 걸까. 성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 싸우겠다던 모핀의 시민들은 성 안에서 전투를 열고 있었다. 아니, 성 안으로 전쟁을 끌고 들어오려는 시라이족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과거의 유물로 빛바랜 모핀은 피와 비명으로 덮였다. 아무도 휘청휘청 걷는 타헬을 신경 쓰지 않았다. 타헬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히려 도와 달라 매달리는 소녀나 늙은이를 떼어내기 위해 수고하며 성벽에 올랐다. 성벽엔 뭉툭한 화살을 쏘고 돌을 떨어뜨리는 아줌마들로 빼곡했다. 남자들이 뛰쳐나간 모핀을 지키는 건 그녀들의 몫이었다. 딸과 부모를 지키기 위해, 남편과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기 위해, 그녀들은 기꺼이 성벽에 섰다. 그들은 시라이족의 화살에 옆집 아줌마, 뒷집 수다쟁이, 건넛집 빵집 주인을 잃어갔다.
타헬은 그들 사이를 지나 다 부서진 성벽에 기대어 쓰러졌다. 몸이 밖으로 기울었다. 여차하면 떨어져, 돌 대신 시라이 전사의 머리와 입 맞출 듯 위태로웠으나 두려워할 기운이 남지 않았다. 다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성벽 밖을 보았다. 흐릿한 눈으로 보기에도 오합지졸인 모핀의 시민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지고 부서졌다. 말 탄 시라이 전사들은 추수하듯 그들의 목을 쳤다. 긴 창은 단번에 세 목을 뚫었고, 옆에서 남편과 아들 이름을 부르는 아줌마들의 절규가 고막을 찢었다.
시라이 전사들은 허술하게 닫힌 성문을 부수려 했다. 아줌마들이 던진 돌을 요리조리 피하며 절벽을 오르듯 벽을 기어올랐다. 밖에서 싸우겠다고 달려 나간 모핀의 시민들의 목을 추수했다.
그 속에 그녀가 있었다. 아티 아누르.
생과 사의 전투에서 누구보다 빛나는 아-누르.
그를 위해 기꺼이 열흘을 기다려주었던,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기다려주었을지 모르는 작은 전사. 고란 사막에게 그토록 사랑받으면서 고란 사막을 벗어나려 하는 고란 사막의 딸. 남부의 잔인한 학살자, 북부의 거침없는 정복자. 태양처럼 타오르는 생명으로 살아가고 달리는 타헬의 주인.
그녀가 보였다. 눈이 시리도록 선명하게.
비쩍 곯아 시커멓게 썩은 몸뚱이는 당장 숨이 끊어질 듯 할딱대면서도, 용케 그녀만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그 찬란한 생명을 부러워하듯. 찬양하듯.
쿨럭.
타헬은 뱃속의 불덩이를 토해냈다. 시꺼멓게 죽은 피였다. 감옥에서의 열흘이 붉은 피마저 썩게 만든 듯 했다.

“여기까지, 용케 버텼네.”

타헬은 스스로를 기특하다 칭찬했다. 혹시나 이르게 쓰러질까, 늦게 썩어버릴까 걱정했건만. 몸뚱이는 참으로 적절할 때 완전하게 썩어 주었다.
지하 감옥에서의 열흘은 마지막 고비였다. 시작은 고란 사막의 뜨거운 볕으로 열었다. 고란 사막의 태양은 시시각각, 타헬의 몸에 박혀 그를 망가뜨렸다. 사막에서 나고 자란 아티 아누르와 시라이 족에게는 당연한 사막 볕은 타헬에게만은 독이 되었다.

‘고란 사막의 볕도 널 까맣게 태우지는 못하는구나.’

아티 아누르는 창백해지는 타헬에게 그리 말했다.
오아시스마냥 시원하게 웃으며. 타헬이 그녀를 태양의 아-누르로 착각했듯. 그녀도 타헬을 태양이 버린 아-누르로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아-누르였던 셈이다. 허나 아티 아누르가 섬기는 태양은 타헬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볕이 뜨거울수록 속은 곪고 시커멓게 썩어갔다. 생명부지하기 위해선 고란 사막을 떠나야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루만 더……. 그렇게 아티 아누르의 곁에 머물렀다. 피를 한 움큼 토하고서야 덜컥 겁이 났다. 만일 이것이 전염병이라면 어쩐단 말인가. 아티 아누르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면 어쩐단 말인가.
아티 아누르가 먼 사냥을 나서고야 은밀히 라미안 국경으로 가 의원을 만났다. 의원은 전염병이 아니라,  태양이 넘치는 남부가 북부인들을 내치는 태양의 재앙이라 했다. 타헬은 안심했다. 그리고 계속 아티 아누르의 곁에 머물렀다. 간간히 피를 토하며.
그때부터였다. 타헬이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준비한 게. 다른 전사들처럼 그녀와 어깨를 마주하며 싸우지는 못하지만, 그녀의 연민과 동정을 받으며 비리비리하게 죽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맞이해야 할 죽음이라면 아티 아누르를 위해 쓰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상처가 되고 싶었다.
죽음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죽은피마저 전부 쏟아낸 몸뚱이는 흉하게 늘어져 흔들렸다. 두 눈은 흐려졌다. 아티 아누르마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두렵진 않았다. 태양 아래서 오만하게 죽으려 했던 그 때와는 다르다.

‘그래, 아티. 네 말대로야. 죽는다는 건 두려운 게 아니야. 아무 의미 없이 죽는 게 두려운 것이지. 의미 있게 죽을 수 있다면, 널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최고겠지?’

멀게, 우르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흐릿한 아티 아누르마저도 마지막까지 쫓으려 애쓰는 그에게는 소음이었다.

“저기 있다. 타펠리트, 무트. 저 자가 분명 시라이족의 타헬이야!”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시라이 야만족 놈들이 북부에 올라와 우리부터 치는 건 다 저 녀석 때문이야. 저 녀석이 시라이 야만족 놈들을 배신하고 우리한테 돌아오니까, 시라이족이 분노한 거라고!”

“다 저 녀석 때문이야. 차라리 시라이족에 남아 우리 모핀을 시라이족이 공격하지 않도록 해주지는 못할망정!”

“시장님이 반대하시니까 야반도주해서 빈 아카데미로 도망갔을 때부터 알아봤어!”

시끌벅적한 소음이 점점 가까워왔지만, 타헬에게는 점점 멀리 들렸다. 그에겐 오직, 칼을 높이 들고 말달리며 잘 익은 머리통을 추수하는데 힘쓰는 아티 아누르만이 보였다.

‘오늘의 전투가 시작이야.’

그녀가 따는 머리통들마다 알차게 익었기를. 부디, 그녀가 추수의 풍요를 함뿍 맛보기를. 그녀는 너무나 북부의 풍요로운 밀밭을 바랐잖은가.

‘사람들은 너를 잔인한 정복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약탈자로 쓸 거야. 역사를 쓰는 샌님들은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네가 얼마나 시라이족을 사랑하는지. 사막의 볕을 감사하면서도 저주하는지. 풍요로운 이 남쪽 땅을 얼마나 갈망하는지. 그런 너를 이 땅이 얼마나 잔인하게 내쳐 왔는지. 아무도 모를 테니까, 제멋대로 떠들어 대겠지.’

타헬은 북부에 이르기 전, 아티 아누르에게 말하지 않고 질긴 양피지 다발을 북부 곳곳에 전했었다. 빈 아카데미와 라윰 현자의 탑에까지도. 그건 타헬의 마지막 오만이었다.


아티 아누르는 남부를 짓밟아, 물과 식량을 주겠다며 아티 아누르의 어린 여동생을 서른두 번째 첩으로 데리고 가 굶겨 죽이고, 시라이족에게 약속했던 물과 말조차 주지 않은 남부의 라미안에게 복수했다.
아티 아누르의 책사이자 연인이며 조언자이자 노예인 타헬을 북부의 도시 모핀이 죽였다. 그 핏값으로 기꺼이 북부를 짓밟을 터, 두렵거든 항복의 깃발로 아티 아누르의 분노를 잠재우라.


자기만 잘난 줄 알던 북부의 오만한 도시들이 아티 아누르를 두려워하며 단결하려 했다. 만일 북부의 도시들이 단결하여 아티 아누르에게 대항한다면 꽤나 골치 아파진다. 아티 아누르의 고란 사막은 북부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장기전은 승산이 없다.
그러니 분열시켜야 한다. 시라이 야만족 따위와 기꺼이 맞서 싸워야한다고 설레발치는 도시 모핀을 짓밟고, 항복하라 구슬려 세력을 갈라 놓아야한다.
…….
아니, 아니. 사실, 그런 게 아니다. 그런 숭고하고 위대한 마음 따윈 눈곱만큼도 없다. 변명일 뿐이다. 변명이다. 그래, 치졸한 변명이다.
그저, 대륙 전역에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죽어가는 이 내가, 저 찬란한 아-누르의 사내라고.

‘설사 아티, 네가 나를 잊어도 나는 영영 너와 함께 기록되기를. 나는 너의 영광의 한 줄이 되어 영원히 너를 따르고 싶을 뿐이야. 네 눈물이 되고 싶어. 네 상처가 되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네게 아팠으면 좋겠어. 다만 바랄 뿐이야. 이토록 치졸하게, 비겁하게…아프게.’

웃음이 났다.

‘아티.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네 영광이 되어 죽겠어. 의미 없이 죽고 싶지 않아. 네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고 싶지 않아. 네게 의미 있게 기억되고 싶어. 너에게 어떤 전사보다 더 소중한 무엇으로 기억 되고 싶어.’

울음이 났다.

‘너는 시라이족을 위해 죽겠다고 했지? 그럼 그 전에 먼저, 내가 널 위해 죽을게. 아티. 나는 오늘…이 순간을 위해 살아 왔어.’

그리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마지막 한 숨.
이상하게도, 귀가 트였다. 소음이라고만 생각했던 소란이 들렸다.

“저 녀석의 목을 잘라 시라이족에게 주자, 그러면 전투를 멈출 거야.”

“저 봐. 다 죽어가잖아. 어차피 죽을 놈이니, 제가 몰고 온 전쟁은 제 목으로 마무리 해야겠지.”

“어서 목을 잘라!”


**


시라이족과 북부 도시 모핀과의 전투는 시라이족의 일방적인 학살로 끝났다. 이른 아침의 나팔 소리는 노을 아래 뿌우우, 힘 아리 없이 울었다.
무너진 모핀의 성벽에 아비어미 찾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쌓였다. 노을보다 붉은 평야는 목을 추수하고 남은 몸뚱이들이 가득 쌓였다. 끈적한 피가 흐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고통과 절망에 울부짖었다. 아낙들은 남편과 아들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뛰어다녔다. 어디선가 까마귀 떼가 날아와 막 식어가는 싱싱한 시체들의 눈알을 뜯어 먹고 입술을 쪼았다. 까악, 까악.
피를 뒤집어 쓴 시라이 전사들은 허옇게 눈을 까고, 마지막 추수에 열을 올렸다. 아들의 시체를 찾고 피눈물을 흘리는 아낙의 등을 도끼로 찍었다. 아버지의 목을 안고 기절한 아들의 심장을 뜯었다. 남편의 시체 위에 엎드려 까마귀를 쫓는 젊은 여인의 목을 땄다.
그들을 고란 사막에서 꺼내 풍요로운 북부의 땅으로까지 이끈 아티 아누르는 도시 모핀의 완전한 적막과 죽음을 원했다. 시라이 전사들은 기꺼이 따랐다. 강간. 전리품.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시라이 전사들은 기꺼이 아티 아누르의 증오를 함께 하고자 했다.
다만, 아티 아누르의 슬픔은 오직 아티 아누르 혼자만의 것이었다. 시라이 전사들이 성벽에 매달려 우는 아이들마저 하나하나 목 졸라 죽일 동안 아티 아누르는 홀로 성 안에 섰다. 도시 모핀의 성 안에 살아 숨 쉬는 건 오직 아티 아누르 뿐. 사방엔 사지가 갈가리 찢기고 목이 꺾인 시체만이 가득했다.
아티 아누르는 모핀의 성 안으로 들어와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죽였다. 어린애, 노인, 여자, 소년. …무엇도 남기지 않았다. 아티 아누르가 발음하지 못한 타헬의 본 이름을 외며 살려달라고 비는 어떤 노인은, 가장 시간을 들여 꼼꼼히 피부를 벗기고 살을 떠 죽였다.
그녀의 단검이 피를 뚝뚝 흘렸다. 얼마 전 타헬의 피를 맛봤던 그 단검이었다.
아티 아누르는 모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혹시나 살아 숨 쉬는 뉘가 있나 살피다 목 없이 늘어진 몸뚱이를 보았다. 반쯤 무너진 성벽에 널부러진 그것은 아티 아누르가 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목이 없어도. 더러워도. 다른 시체들 사이에 끼여 있어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볼 수밖에. 진정, 알아볼 수밖에.
목 없는 시체는 차게 식어 있었다. 성벽에 기대 밖을 내다보는 채로. 떨어질듯 말듯 아슬아슬한 채로. 다른 시체에 양 다리를 짓눌린 채로.
아티 아누르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왼손에 쥔 그의 목을 붙여 주었다.
대굴.
목을 올려주니, 제 것이 아니라는 듯 굴러 떨어졌다.
대굴.
다시 올려주니, 왜 이러냐며 굴러 떨어졌다.
데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목을 붙여 주니, 아주 잠깐 버티고는 또 굴러 떨어졌다.
축 늘어진 몸뚱이는 원래부터 목이 없었다는 양 아쉬워하지 않았다.
아티 아누르는 가만, 목을 보았다. 감긴 눈. 창백한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이게, 네가 원한 죽음인가? 날 떠나….”

파르르, 어깨가 떨렸다.
아티 아누르는 단검을 돌 틈에 박아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고는 타헬의 목을 가만 끌어안았다.

도시 모핀은, 수없는 사람들의 시체로 쌓은 단 한 사람의 무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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