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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로이드가의 피

2009.04.28 15:1504.28

내 이름은 카이도.
카이도 로이드. 건국 공신가인 로이드 공작가의 삼남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은 초대 공작님이신 보르칼 로이드 고조할머님 이래로 시골구석 영지에 몇 세대나 틀어박혀 있다. 그래서인지 드나드는 사람이라곤 우리 가족과 하인들밖에 없다. 거기다 하인들도 고작해야 50명 안팎으로 그나마도 저녁 시간 이후엔 돌아가 버린다. 그럼에도 건국 공신가의 위력은 그 권세가 남다른가 보다. 영지 밖으로 나가는 일은 드무나, 한번 나섰다 하면 우리 가솔이 머무는 곳에 머릴 조아리지 않는 자가 없다. 덕분에 여타 귀족자제들과 비교해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아무 걱정도, 계획도 없이 즐겁게만 살아왔다.

그런 내가 오늘, 매우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내 인생 최초의 결정이니만큼 섣불리 선택할 만한 일이 아니다. 3시간이 넘게 대륙전도를 펼쳐들고 끙끙 앓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유얼 툽 지방은 렌 형님께서 고르셨고, 에먼 캐스트 지방은 린 누님께서…,”

1년하고도 3개월 전, 난 성인식을 치르고 어엿한 성인으로서 로이드가의 의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바로 4년 주기로 찾아오는 출가의 달이 끝나기 전까지 집을 떠나는 것. 그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일종의 유배에 가깝다. 한번 떠나면 그곳에서 최소한 10년 이상을 살아야 한다. 자기가 정해둔 지방 외부의 가족이나 친구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다. 가혹하다면 가혹한 이 규칙이 로이드가 자손의 의무. 보르칼 로이드 고조할머님께서 못박아두셨고, 벌써 100년이 넘게 지켜져 왔기에 로이드가의 사람이라면 한 사람도 피해갈 수 없는 의무다. 그 낡은 의식을 행해야만 하는 출가의 달은 이미 15일 전에 시작되었고, 내가 출가 의식을 행하겠다고 공표한 날은 출가의 달의 16번째 날인, 바로 내일인 것이다.

렌 형님과 린 누님께서도 각각 8년 전의 그제와 어제 자신의 길을 떠나셨다. 향후 12년간은 서로 만나지 못할 테지. 그런 생각을 하면 속에서 열불이 뻗친다.

“하, 뭣 때문에 이딴 의무가 있는 거야? 짜증나는군. 보르칼 할멈, 젊은 나이에 치매라도 걸리셨던 거 아냐?”
“초대 공작님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시면 안 돼요.”

‘문 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이 사근사근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일까? 난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다. 내 연년생 누이 루카. 여느 때처럼 루카는 인기척도 없이 내 뒤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루카, 그 영감이 만든 구닥다리 의무 때문에 우리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야 한단 말야?”
“오라버님도 아시잖아요. 고조할머님께서 저희에게 그런 의무를 수여하신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첫째, 바깥세상에서 다양한 문물을 배울 수 있고, 둘째, 서민들과 살을 맞대고 살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고, 셋째,”

늘상 이렇다. 우리의 막내 여동생 루카는 늘 우리에게 훈계를 늘어놓았지. 정말 훌륭한 아가씨가 아닐 수 없다.

“알았어. 나도 아니깐 됐고. 그래, 우리 레이디께선 이 오라비에게 무슨 볼일이신가?”

우리의 여동생은 양손에 찻잔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루카는 말없이 그중 하나를 내밀었다. 코끝에 감도는 달짝지근한 향내.

“오라버님께서 좋아하시는 에밀레 티를 타왔어요.”
“어? 어떻게?”

어제 주방에서 마지막 한 스푼의 에밀레 찻잎을 떠내며 한숨을 쉬었는데? 게다가 찻잎을 주문한다 해도 저택까지 배달하는 데는 일주일이 더 걸린다.

“오늘 즈음해서 찻잎이 바닥날 줄 알고 미리 2주일 전에 주문을 해뒀죠.”
“루카는 정말 준비성이 철저하다니까. 어머님께서 안 계시니 네가 안주인이구나.”
“우후후후…, 카이도 오라버님도 참…….”

수줍게 웃는 루카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꽃핀다. 창문 근처의 의자에 앉아 고상하게 찻잔을 기울이는 루카. 그 아이는 완벽한 요조숙녀로 자라나 있었다. 어릴 적엔 서툴기만 하고 울음이 많아, 꼬마 하녀들과도 어울리지 못하던 아이, 친구 하나 없이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오라버님께선 내일 떠나시기로 하셨죠?”
“응.”
“어디로 가실 지는 정해두셨어요?”
“아니, 아직 정하지 못했어. 에휴.”

절로 한숨이 났다. 막상 내일이면 10년간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인데, 아직까지도 어디로 갈지 정하질 못했으니.

“정말 한심해. 하다못해 일주일 전부터라도 생각해뒀으면 좋았을걸.”
“그렇지 않아요. 렌 오라버님이나 린 형님께서도 딱히 어디라고 정해두고 떠나신 건 아니니까요. 거기다가 어디로 정하시든 큰 차이도 없을 거고요.”
“그럴까?”
“그럼요.”

루카는 날 위로하려는 듯 활짝 웃어보였다. 그 표정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다. 너무나도 점잖아진 루카였지만 웃는 표정만큼은 예전과 똑같았다.

‘루카, 그런 너의 미소가 어머님의 마음에 들었던 걸까?’

루카는 어릴 때부터 자주 웃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따금씩 어머님과 우리들에게 보인 그 해맑은 웃음엔 티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그런 탓일까? 렌 형님의 말씀에 의하면 루카가 태어난 후로 어머님은 우리 형제들을 자유로이 키우셨다고 한다. 공부도, 예절 교육도 루카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는 듯하다. 나이를 먹어서야 깨달았지만, 어머님께선 유독 루카를 편애하셨던 모양이다. 만약 아버님께서 살아계셨다 하더라도 어머님과 별반 다르진 않겠지. 대신 우리는 진종일 뛰놀 수 있었기에 절대로 불만은 없지만. 루카가 받았을 그 지독한 수업을 들으라면 한사코 사양하겠다.

“어쨌든 내일은 피곤할 하루가 될 테니 푹 쉬어두세요.”

루카는 빈 찻잔을 손에 들고 일어섰다. 역시 몸에 밴 습관 덕분인지 빈틈 하나 없는 우아한 폼이다. 움직이는 몸을 따라 구겨지기 마련인 드레스엔 구김살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래. 차 잘 마셨어. 찻잎 우리는 솜씨가 늘었더라.”
“오라버님을 위해 열심히 연습했으니까요. 그리고 내일은 특별한 날이니만큼, 정말로 특별한 에밀레 티를 대접할게요.”
“기대되는걸! 하지만 소금은 한 스푼만 넣는 걸 잊지 마세요, 아가씨?”
“염려 마세요, 오라버니. 저도 이제 소금과 설탕 정도는 구별할 줄 안답니다.”

옛날의 실수를 들먹이니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짓는 루카였지만, 목소리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루카가 나간 자리엔 발소리는커녕 문 여닫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루카가 다시금 방문을 두드렸을 즈음에야 비로소 나는 저녁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때까지 내가 무엇을 했냐면 역시 유배지를 찾는 일이었다. 불행하게도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을 뿐이고. 애초에 이해도 안 되는 구시대의 의무 따위를 위해 살고 싶은 곳을 찾으란 말 자체가 어리석다. 어머님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루카가 손수 운반해온 요리는 날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루카가 이런 음식을 준비해올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오늘의 요리는 루카 특제, 손수 만든 샌드위치에요.”

꽤 자신 있는 투로 내민 접시에 올라온 건 일단 샌드위치라고 한다. 속이 비칠 정도로 얇게 저민 빵 사이에 끼인 스테이크. 그 스테이크를 장식하는 소스란 다름 아닌 샐러드였다. 그것도 야채 한 조각 섞이지 않은 샐러드 소스.

“군침 도는걸! 잘 먹겠습니다.”

새콤한 샐러드 소스와 진한 고기구이의 미묘한 조합. 한 마디로 요약해 맛은 없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그리운 맛이었기에 씹어 삼킬 여력은 있었다.

“그 샌드위치,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계셨군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이 각별한 맛은 유배지에 가서도 잊지 못할 거야.”

지긋이 날린 윙크에 루카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핫! 저도 그 맛은 꿈에라도 잊을 수 없으니까요.”

루카는 자기가 12살 때, 처음으로 만들었다며 건넨 엉망진창 샌드위치를 완벽히 재현해냈다. 샌드위치를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먹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울어버리겠단 것처럼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는걸.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맛없는 샌드위치를 아무 내색도 않고 먹어주셨다는 점이 기뻤어요.”
“루카의 샌드위치라면 두 개 정도 더 먹어줄 정도로 오빠는 튼튼하단다.”

날 의지하는 동생이 주는 거라면 둘이 아니라 열이라도 먹어줄 수 있다. 그걸 어머님이 아니라 내게 주었다는 건 어머님보다도 날 더 의지하고 있었다는 뜻일 테니까. 어머님께선 자주 집을 비우곤 하셨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인지 루카는 온종일 날 따라다니곤 했다. 가물가물한 기억으론 8년 전, 렌 형님과 린 누님께서 집을 떠나실 때부터 그랬지 싶다. 항상 함께하던 형제들이 보이지 않아서 그랬던지 루카는 그때부터 더욱 내게 의지해왔던 듯하다. 때로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자길 믿고 따라주는 동생을 마다하는 오빠가 있을까? 난 루카가 이토록 내게 의지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쁘다.

“오라버님께선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시군요.”

루카는 주섬주섬 쟁반과 식기들을 주워 모았다. 간단한 음식이라 정리할만한 일은 별로 없었다.

“너도 예전이랑 그대로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루카?”

루카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림자 스며들듯 사라지며 남긴 한 마디는 모종의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루카….’


루카가 돌아간 뒤, 머리나 식힐까 싶어 복도를 거닐기로 했다. 평소엔 산책을 한다면 저택 밖으로 나갈 생각이나 했겠지만, 한번 떠나면 10년은 돌아오지 못할 집이란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결정이었던 듯하다. 이 복도를 보라. 얼마나 황폐한가? 쓸데없이 기다랗고 넓은 주제에 비싸기만 한 카펫을 깐다고 없는 볼거리가 생기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이걸로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천천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간간이 걸린 외로운 등불을 벗 삼아 복도를 거닐자면 양옆에 드문드문 걸린 역대 공작님들의 초상화가 눈에 걸린다. 초대 국왕폐하를 호위하시는 고조할머님, 10년의 출가의무를 끝마치고 돌아와 작위를 계승하신 증조할머님, 창이라면 당할 자가 없으셨다던 할머님, 그리고 문무겸비로 명성이 드높으신 어머님까지. 어머님의 옆자리엔 누구의 초상화가 걸릴까?

한산한 저택의 복도를 뚜벅뚜벅 걸으며 여태껏 가져보지 않았던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왜 여기 걸린 초상화는 모두 여성들의 것뿐일까?’

이상하게도 남성의 초상화는 한 점도 없다. 항상 쌍둥이가 태어나는 우리 가문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문의 가주자리는 대대로 여성이 도맡아왔다. 그럼에도 작위 계승 문제로 집안이 갈라졌다는 기록은 없다. 그건 혹시 출가 의식의 덕분일까? 이런 답답한 저택에 갇혀서 권력을 쥐느니 소박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선택했던 걸지도 모르지. 나도 딱히 작위에 대한 욕심 따윈 없으니까. 아니면 우리 가문은 대대로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건 아닐까? 바로 린 누님처럼.

린 누님은 형제들은 물론이고 여느 장정들보다도 대단한 힘을 지니셨다. 그 힘이 어느 정도냐면 어릴 때만 해도 거북이만한 바윗돌을 가볍게 드시는가 하면, 굵은 고목을 잔가지마냥 뚝뚝 부러트리시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내겐 홀몸으로 1만 대군을 물리치셨다는 고조할머님의 업적이 단순한 전설로만 들리진 않는다. 대신 린 누님은 쌍둥이 오빠인 렌 형님처럼 명석한 머리를 타고나진 못했다. 우리 가문의 맏이는 반드시 쌍둥이로 태어난다 하는데, 신께서도 한 사람에게 그 모든 재능을 몰아주는 게 심히 위험하다 생각하신 탓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께서도 매사에 완벽하실 수는 없는 법이다. 건국 공신이신 동시에 무패의 기사로 이름 높았던 보르칼 로이드 고조할머님을 점지하실 때가 바로 그런 예이다. 보르칼 로이드 고조할머님께선 세상에 알려진 모습만 따지면 패배를 모르는 영웅일 뿐이지만, 저택의 도서관에 가본 사람이라면 그건 그분의 일면에 불과하단 걸 알 것이다. 고조할머님께서 저술하신 서적이나 자서전 등을 읽어본다면 그분의 학식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깨닫게 된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니까.”

나나 루카를 보라. 렌 형님처럼 건국사 및 과거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외울 정도로 똑똑하거나, 린 누님처럼 역사의 힘을 가지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가끔은 우리가 그런 대단한 분의 자손이 맞기나 한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근데 그렇게 잘나신 분이 왜 이런 시골구석까지 좌천되신 거지?”

아무리 건국 공신 귀족가라 해도 우리 가문인 누리는 이권은 과도하다고 본다. 정치적인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다지 재물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국왕일가를 제외하면 우리 가문에 감히 대적할만한 집안이 없다. 단지 건국 공신가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우리를 떠받드는 것인가? 서민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계산 빠른 상인들과 눈치로 먹고 사는 귀족들까지도? 거기엔 내가 모르는 모종의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다.

한번 머리에 맴돌기 시작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근거 없이는 추론도 없는 법. 그 이상의 자문자답은 시간 낭비 같아서 방에 돌아가기로 했다.


방에 돌아왔으나 아직 자기엔 이른 시간이다 싶어 고민을 계속하기로 했다. 바다 근처로 가서 낚시나 왕창 해볼까? 그렇잖음 학구열이 높은 개발도상도시에서 공부를 해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무꾼이 되는 수도 있겠지. 선택 범위가 너무 다양해서 고르기가 너무 어렵다. 워낙 격렬히 고민했던 탓에 누군가 다가오는 줄도 알지 못했다.

“웁!”

입을 가로막는 억센 손바닥. 노련한 반대편 손은 이미 내 손목을 억세게 붙들고 있다. 잔뜩 가라앉은 여인의 목소리가 내게 복종을 강요한다.

“조용히!”

도둑인가? 아니면 암살자인가? 감히 누가 로이드 공작가 저택에 침입한 거지? 붙들렸다간 사형에 준하는 엄벌을 받는다는 것도 모르는가? 그러나 일단 내 목숨은 이자에게 달렸기 때문에 그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소리 지르지 마라, 카이도.”

이 사람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그 의문의 답은 여인이 베일을 벗음으로써 해결되었다.

‘린 누님?’

그 얼굴 여기저기엔 세월의 흔적이 남았지만 분명 린 누님이었다. 8년 전과는 사뭇 다른 초췌한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손을 풀 테니 시끄럽게 굴지 마라, 알겠느냐?”

고개를 끄덕이자 린 누님께선 날 풀어주셨다. 자유를 되찾자마자 난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누님, 어떻게 되신 겁니까? 누님은 아직 여기에 돌아오시면 안 됩니다. 어머님께서 아셨다간 큰일 날 거라고요!”
“죽이기라도 하실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심한 벌을 내리실 거라고요!”
“그렇담 다행이군.”
“어머님의 분노를 사는 게 두렵지 않으십니까?”
“그보다 더한 일도 여럿 겪었다.”

대체 지난 8년간 린 누님께선 무슨 일을 겪으셨단 말인가? 비록 힘을 믿고 날뛰는 성격이야 쉽게 변할 리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막나가는 분은 아니셨거늘.

“그보다 카이도, 네 출가 의식은 언제 시행하기로 공표하였느냐?”
“내일입니다만…, 그것 때문에 오신 겁니까?”
“잘 맞췄다. 따라오너라.”

린 누님께선 억지로 내 손목을 잡아 이끄셨다.

“자, 잠깐만요. 절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내일 당장 집을 떠날 몸이니 멀리 갈 처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넌 지금 당장 떠나야만 한다.”

린 누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의무로 떠나 있어야만 하는 10년을 채 채우지 않고 돌아오시질 않나, 무작정 어딘가로 가자고만 하시질 않나?

“린 누님, 혹시…, 제가 출가 의식을 행하길 원치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다.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으니 간단히 말하마.”

린 누님께선 품에서 손바닥 길이의 단도를 꺼내셨다. 그걸 내 목에 겨누시곤 협박 아닌 협박을 하셨다.

“어차피 죽을 목숨, 정 따라오지 않겠다면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주마.”
“지, 진심이십니까?”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이느냐, 카이도?”

린 누님의 눈에 깃든 살기가 범상치 않다. 린 누님의 무력이라면 비수로도 금강석을 가를 수 있다. 하물며 비수를 드셨다면 나 같은 사람 하나 죽이시는 건 숨 쉬기보다 쉬운 일일 터.

“다른 선택지가 없군요. 허나 한 가지만 묻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하지만 서두르거라. 시간이 촉박하다.”
“누님, 8년 전의 출가 의식 때 무슨 일을 겪으신 겁니까?”

린 누님께선 잠시 말이 없으셨다. 아무래도 나를 구한다는 말과 의식 전까지 떠나야만 한다는 말에서 얻은 힌트가 제대로 맞아 떨어진 모양이다. 린 누님께선 깊은 탄식과 함께 짜내듯이 말을 내뱉으셨다.

“하아, 렌 오라버님께서 살해당하셨다.”
“렌 형님께서 말입니까?”
“그렇다. 당시의 난 어미를 상대할 정도로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머님께서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렌 형님께서 돌아가셨다. 어머님께서 렌 형님을 살해하셨다. 린 누님께선 10년의 출가 의무를 끝마치지 않으셨다. 이제 나를 데려가려 하신다. 과연 어디로? 린 누님을 믿을 수 있는가?’

“누님, 누님께선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출가 의무조차 끝마치지 않고 8년 만에 돌아오신 거지요.”
“무슨 소리냐, 카이도? 내가, 내가 미쳤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렌 형님께선 살아계신 거예요. 2년 후면 렌 형님께서도 돌아오실 겁니다. 어머님께서도 린 누님이 정신질환을 앓고 계신 걸 아신다면 큰 벌을 내리진 않으실 겁니다.”

그 말에 린 누님의 표정이 싸해졌다. 린 누님께선 내 목에 겨누었던 단도를 거두시곤 내게서 등을 돌리셨다.

“별다른 도리가 없구나. 내 형제의 정으로 목숨을 걸어 너를 구해주러 왔거늘, 네는 되레 나를 미친 사람 취급 하는구나. 잘 있어라, 카이도.”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셈이십니까, 누님?”
“너는 어쩔 수 없다 한들, 루카만이라도 구해내련다. 그 아이도 며칠 내로 출가 의식 날짜를 잡을 게 분명하다.”

린 누님께선 정말로 루카의 방을 향해 걷기 시작하셨다. 지금의 린 누님께선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시다. 루카를 데려가시게 놔뒀다간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래서 난 린 누님의 앞을 가로막았다.

“루카는 데려가실 수 없습니다.”
“정신 나간 모양이구나. 네 감히 이 린 로이드를 막겠다고?”

린 누님의 목소리는 가라앉은 그대로이나, 린 누님에게서 풍기는 위압감은 사람 하나 정돈 가볍게 눌러 죽일 정도로 날카로웠다.

“압니다. 저로선 린 누님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루카를 해치게 놔둘 순 없습니다.”
“비키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린 누님께서 단도를 꺼내 굳건히 쥐어 잡으셨다. 그 모습만 보고서도 오금이 저려오는 듯하다. 맨주먹으로도 장정 서넛은 족히 때려잡으실 분이 흉기까지 들었다는 건,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다. 린 누님께서 마음만 먹는다면 내 목을 떨어트리는데 5초도 걸리지 않는다.

“린 누님, 정신을 차리십시오. 루카는 당신의 여동생이기도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 건 네 쪽이다! 지금 네 행동이 너와 네 여동생을 죽음에 몰아넣는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모릅니다! 못 믿습니다! 렌 형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말, 어머님께서 형님을 살해하셨다는 말,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린 누님께선 제정신이 아니십니다!”
“방해하지 마라, 어리석은 녀석!”

누님의 성난 일갈을 들은 직후, 뒤통수에 묵직한 아픔이 잇따랐다. 피는 나지 않는 것 같다. 누님께서 손속을 두어 칼자루 부분으로 내리치신 모양이다. 다행이다. 그래도 누님께 그 정도의 판단력이 남아있다니.

“제정신인지 아닌지는 깨어난 뒤 네 눈으로 확인하도록 해라!”
“루카를, 해치지 마십시오…. 우리의 여동생을…….”
“내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부…, 탁입니다, 린 누님….”

말을 잇기가 어렵다. 생각은 회전하지만 말로써 정리되지 않는다. 그 흐름의 속도마저 조금씩 느려져간다. 그리고…,


“루카?!”

눈을 뜨니 바로 앞에 루카의 얼굴이 보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오라버님?”
“루카, 무사한 거야?”
“네, 다행히도.”

루카의 차분한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밋밋한 흑색 천장. 여긴 루카의 방이군. 나는 루카의 침대에 누워 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린 누님께선 루카는 물론 나 또한 납치하지 못하신 모양이다. 하지만 어머님께서 집을 비우신 지금, 누가 린 누님을 말릴 수 있었을까?

“루카, 린 누님께선 어떻게, 아야야….”

급격히 몸을 일으키려다 머리에서 전해지는 싸한 아픔에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도 린 누님께 얻어맞은 부분이 아직까지도 띵하다. 뒤통수에 손을 대보니 역시 혹이 나있다.

“괜찮으세요, 오라버님?”
“걱정 마, 살짝 얻어맞았을 뿐이야.”
“린 형님도 너무하세요. 어떻게 저희에게 이러실 수 있죠?”
“린 누님께선 제정신이 아니신 모양이야. 향수병이 악화되신 거 같다. 8년이나 집을 떠나 계셨으니 그만큼 걱정이 되셨겠지. 우리가 이해해드려야 해.”

루카는 여전히 못미덥다는 표정이었다. 그야 루카에겐 렌 형님이나 린 누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겠다만. 8년 전의 다정하셨던 린 누님을 기억하는 나와는 사정이 다를 터이다.

“루카, 내가 기절한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린 누님께선 어떻게 되셨어? 설마 어머님께서 돌아오신 거야?”

루카는 고개를 젓는다.

“어머님께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저도 하마터면 린 형님께 납치당할 뻔했죠.”
“그럼 하인들 중에 그렇게 대단한 무술가가 있던가? 대체 누가 린 누님을 막아낸 거지?”
“아무도 막을 수 없었어요. 형님께선 제풀에 지쳐 쓰러지셨죠. 사정을 알아보니 형님의 유배지부터 여기까지 한숨도 쉬지 않고 달려오셨다는 듯해요.”
“천하의 린 누님도 피로 앞엔 어쩔 수 없으셨구나….”

정말 잘 된 일이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착잡함이 자리하고 있다.

“린 누님께선 지금 어디에 계시지?”
“린 형님은 내일, 오라버님과 함께 저택을 떠나시게 될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계셔?”
“지금은 린 형님께서도 피곤하실 테니 찾아가지 않으시는 편이 좋아요.”

글렀다. 루카에겐 린 형님의 거처를 알려줄 생각이 전혀 없다.

“좋아, 그럼 내일 이른 아침에 린 누님을 찾아뵙겠어. 그건 괜찮겠지?”
“물론이죠. 린 형님께서도 한숨 주무시고 개운하게 깨어나시면 제정신을 되찾으실 거예요. 그러니 오라버님도 오늘은 아무 걱정 마시고 주무세요.”
“그래. 으싸….”

침대에서 일어났을 뿐인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루카가 옆에서 내 팔을 꽈악 붙잡는다. 그 여린 손가락에서 나오는 미력한 압착감엔 루카의 염려가 듬뿍 깃들어 있다.

“괜찮으세요?”
“응, 얼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린 누님, 조금만 더 살살 때려주실 수는 없었나요?’

누님의 힘을 감안하자면 이 정도도 최대한 살살 건드리셨던 건지도 모르겠다만. 맞는 입장에서야 공감하기 힘들다.

“오라버님, 너무 무리하실 거 없어요. 오늘 하루 정도는 제 방을 내드려도 상관없는데…….”
“여동생의 방을 뺏다니, 그럴 수야 있나. 그리고 마지막 날은 내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어.”

루카는 그제야 나를 풀어주었다.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루카도 늦지 않게 자도록 해. 날 배웅하려면 눈물을 펑펑 흘려야 할 텐데 피곤한 몸으론 그럴 수도 없잖아?”
“그러네요. 편히 주무세요, 오라버님.”
“루카도 좋은 꿈 꿔.”

루카의 눈치를 살피며 등불을 껐다. 날 말리지 않는 걸 보아 지금 바로 잘 생각인 듯하다. 하지만 난 만일을 대비해 보험을 들어두기로 했다. 루카 몰래 낡은 주머니를 꺼냈다. 정성들인 솜씨로 내 이름이 수놓인 주머니. 8년간 고이 간직해온 그 주머니에서 콩알만 한 흑색 알갱이를 몰래 루카의 방바닥에 떨어트렸다. 이걸 받을 때 들은 렌 형님의 목소리가 아직껏 생생히 들려오는 듯하다.

-이건 멀리 북방에서 들여온 수면제인데, 린과 카이도에게 줄게. 이 특별한 주머니에서 꺼내면 1분 안에 기화해서 수면향이 흘러나오니까 조심해서 쓰도록 해. 언젠가 너희에게 도움 되는 날이 있을 거야.

렌 형님과 린 누님께서 떠나신 후 이 수면제로 날 감시하던 하녀를 잠재우고, 마을 밖으로도 자주 놀러 다니곤 했다. 그러다 나이를 먹고 차츰 수면제를 쓸 필요성이 사라짐에 따라 마지막 한 알은 남겨둘 수 있었는데, 그게 이렇게 도움 될 줄이야. 이로써 루카는 3시간가량은 쥐도 새도 모르게 곤히 잠들겠지.

‘미안해, 루카.’

루카를 속이긴 싫지만 린 누님과는 얘기를 더 해보고 싶다. 어째서 친형제인 우릴 납치하려 하시는지 이유를 알아야 되겠으니까.


루카의 방을 나온 나는 벌써 30분째 저택을 헤매고 있다. 내 방까지 가는 길을 몰라서가 아니다. 린 누님이 계신 방을 찾기 위해서였다. 린 누님의 방은 물론이고, 다른 가족들의 방, 객실들, 거실, 서재까지 다 들쑤시고 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린 누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설마 루카가 날 속인 건 아닐까?’

어쩌면 린 누님께선 이미 저택을 떠나신 후일지도 모른다. 애당초 출가 의무를 끝마치지 않고 돌아온다는 자체가 대단히 불명예스러운 일이니까. 아무도 모르게 덮어버리려 했던 걸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굳이 내게 내일 볼 수 있다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을까? 물론 그 린 누님께서 얌전히 계실만한 분이 아니니까 적합한 조치일 지도 모르지. 지금 누님의 상태를 감안하면 정신을 차리셨을 때, 온 집안을 풍비박산 낸다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린 누님도, 루카도 내 친형제이기에 나는 그 점이 못내 슬퍼져 견딜 수 없었다. 어째서 로이드가는 자기 형제자매를 이렇게 갈라놓아야만 하는가?

벌써 8년째 뵙지 못한 렌 형님이 그립다. 린 누님께선 향수병으로 머리가 이상해져서 8년 만에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돌아오셨다. 그리고 여동생 루카는 오라비인 내게 거짓말을 했다.

‘보르칼 로이드 초대 공작님이시여, 당신은 진정 이런 비극을 원하셨던 것입니까? 당신이 보았던 로이드가의 미래가 정녕 이런 것이냔 말입니다.’

복도에 걸린 고조할머님의 초상화에 대고 깊게 물음을 던지나, 그 질문은 끝없는 나락으로 가라앉을 뿐 떠오르는 대답이 없다. 그분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돌아가신 역사 속의 인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자손들에게 씌운 굴레는 지금까지 남아 살아있는 우리를 이토록 슬프게 하는 겁니까? 고조할머님 당신께서 저희에게 이런 의무를 부여하신 이유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정녕 모르겠습니다.’

고조할머님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미 돌아가신 분의 잔재 따위가 우릴 속박할 수 있는가? 아니, 그건 불합리하다. 죽은 자의 초상 따윌 믿고 살아있는 우리들 스스로를 채찍질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까짓 것!”

주먹을 들어 벽에 걸린 초상화에 갖다 박았다.

“어윽!”

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과 함께 따가운 고통이 전해진다. 그림을 떠받치는 벽 때문인 듯하다. 이번엔 벽에서 그림을 떼어내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림을 감은 나무막대가 살짝 둔탁한 소리를 낸다. 그걸로 분이 풀리지 않아 그림을 짓밟았다.

질 좋은 종이로 만들어진 탓일까? 고조할머님의 초상화는 쉽사리 찢어지지 않았다. 대신 신발 밑창의 흙이 묻어 지저분해졌다. 엉망이 된 초상화를 보니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온다.

“하하하하! 고조할머님, 당신은 이미 죽었다고요. 봐요, 이렇게 엉망이 된 모습의 초상화를.”

너른 복도에 듣는 이는 하나도 없다. 안다. 하지만 그건 누군가에게 들리길 원하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의 한심했던 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이다.

“으하하하하하! 당신은 고조할머님이 아냐. 넌 그분의 그림자에 불과해. 고작해야 그림쪼가리 주제에!”

마구 짓밟힌 초상화가 드디어 흉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내 눈물과, 흙과 분노가 마구 섞여 이제는 누구의 그림인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망가져버렸다.

“고작해야 그림쪼가리일 뿐인데…….”

우리 일가는 이런 한심한 일을 수십 년간이나 지속해왔던가? 거기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가?

“젠자앙!”

분을 이기지 못하고 또 한 차례 벽에 주먹을 때려 넣었다. 두 차례나 벽과 부딪힌 손이 고통을 호소하지만, 그보다는 가슴이 호소한 분노가 배나 뜨겁게 불타고 있다.

“됐어.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집안의 권력은 루카에게 일임되었지만, 그 아이를 설득한다는 건 무리다. 집을 떠난다 한들 어머님이 보낸 사람들에게 붙잡힐 게 뻔하다. 유배지에서 탈출한다면 그건 좀 낫겠지만, 세상에는 내가 자신의 의무도 다하지 않는 못난 놈으로 비치겠지. 정말이지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없다. 내 방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그래도, 앞으로 10년간은 초상화를 찢은 일로 혼날 리는 없으니까.”

그대로 방으로나 돌아가려고 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내 숙명에 따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덕분에 하마터면 벽에 뚫린 구멍을 눈치 채지 못할 뻔했다.

내가 주먹을 날린 그 자리, 초상화가 걸려 있던 그 자리에 있던 벽돌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내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벽에 구멍이 생겼다. 사람 하나 정도는 들어가고도 남을 제법 커다란 구멍. 내게도 린 누님과 같은 힘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구멍 안쪽을 만져보기 전까진 그런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뭔가를 건드렸단 느낌과 동시에 구멍 안이 확 밝아지는 광경을 목격하기 전까지 말이다.

“비밀 통로?”

보통 복도나 방의 천정에 다는 전등이란 그 값이 매우 비싸기 마련이다. 일반적인 서민들은 3대를 뼈 빠지게 일해도 구경조차 하기 힘들거니와, 나조차도 국왕 폐하의 왕성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런 물건이 우리 저택의 통로 천정에 쫙 깔려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토록 엄청난 비용을 이 비밀통로에 투자한 이유가 뭘까? 여기엔 상당한 비밀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그 비밀 때문에 우리 로이드가가 대접받는 건 아닐까?

결국 난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그 통로에 발을 들여놓고야 말았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나는 이 일로 엄벌에 처해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답답한 심정엔 무엇이든 좋으니 아무거나 파헤쳐보고 싶었다.


통로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저택에서 자라난 나조차도 방향감각을 잊은 지 오래다. 저택의 주위를 둘러 어딘가로 아래로 내려간다는 느낌이긴 한데 정확히 어디인가는 알아챌 수 없다. 통로는 방음시설이 되어 있는지 걷는 내내 내 발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10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지긋지긋한 복도가 끝나고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한참을 좁은 공간에 갇혀 걸어온 탓인지 일말의 해방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벌써…, 새벽이 끝났는가? 그렇다면 오너라. 또 한 번 내 피를 뜯어가거라. 저주받은 로이드의 피를…….”

기운 없는 목소리가 어두운 방안에 울린다. 방안에 진동하는 비릿한 냄새와 더불어 음산한 느낌을 조장한다.

“당신은 누굽니까?”

어머님과 관계된 사람일까? 아니면 루카와?

“그 목소리, 카이도인가?”
“나를,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어머니와 관계된 사람입니까?”
“당연하다. 방금 만났던 누이의 목소리도 잊었느냐?”

이럴 수가? 반신반의하며 다가가보니 그 사람은 정말 린 누님이었다. 벽에 고정된 세 가닥의 굵은 쇠사슬은 린 누님의 손발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고 있었다. 나머지 한 가닥의 사슬이 묶여야 할 누님의 왼쪽 팔은 온데 간데 보이지 않았다.

“누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누님이 이런 곳에 묶여 계신 겁니까? 거기다가 그 팔, 대체 누가 누님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아무리 어머님이라도 이렇게까지 심한 짓을 하진 않으실 겁니다! 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하지만 어머님이 아니라면 누님을 제압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시끄럽다. 정신 사나우니 하나씩만 물어라. 그리고 사슬은 그대로 두어라. 이 사슬은 내 힘으로도 풀지 못한다. 네게 열쇠가 없다면 시간 낭비일 뿐이다.”

린 누님의 상처는 지혈되어 있었기에 출혈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루카의 말처럼 긴 여정으로 쌓인 여독에, 팔이 잘렸다는 정신적 상처 때문인지 무척 쇠약해 보였다. 드문드문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누님의 피로감이 절실히 녹아들어 있었다.

“누님, 어머님께서 돌아오셨습니까?”
“그럴 리 없다.”
“아니면 이 저택에 누님보다 강한 사람이 있습니까?”
“절대로 없다.”
“그럼 누가 누님께 이런 상처를 입힐 수 있단 말입니까?”

린 누님께선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흔드시고는 한심하단 듯 말을 내뱉으셨다.

“네 아직도 모르겠더냐? 주위를 둘러보아라.”

린 누님께서 묶여 계신 벽 옆으론 수갑, 칼 등 죄인을 구속할 도구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여긴, 로이드가의 비밀 감옥입니까?”
“그래. 저 건너편을 보아라.”

린 누님의 시선을 따라간 반대편 구석엔 어느 짐승의 것인지 모를 뼈다귀가 한 무더기나 쌓여 있었다. 그 근처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옷가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인사 올려라. 렌 오라버님이시다.”

당황스러워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 누님께선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시는 걸까? 무슨 의도인가 떠보기 위해 누님과 눈을 마주쳤다.

“저쪽 바닥에 있는 주머니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느냐?”

공교롭게도 내 것과 꼭 닮은 주머니. 다만 거기에 새겨진 이름은 내 것이 아니었다.

‘렌 로이드’

“렌 형님의 주머니……. 이것이 어째서 여기에….”

“근처에서 오라버님의 상의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난 반신반의하며 누더기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두는 지난 세기에나 입었을 법한 촌스런 누더기들뿐이었다. 다만 개중에 그나마도 입을 만은 한 누더기엔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렌 로이드….”

렌 형님께선 평소 옷가지 등에 이름을 수놓길 좋아하셨다. 그래서 우리들의 주머니에도 이름을 넣어주셨지.

“저, 저것이 인간의 뼈란 말입니까?”
“그렇다. 6년간 전장 근처를 맴돌며 살았던 내겐 그것이 누군가의 유골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긴 손가락과 짧은 발가락. 혹시 원숭이의 뼈는 아닐까했지만 여태껏 자세가 반듯한 원숭이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다.

“카이도, 날 감옥에 가둔 자가 누군지 모르겠느냐?”
“그럴 리, 없습니다.”

저녁 시간대 이후론 저택에 근무하는 하인이 없다. 루카를 믿는 만큼 린 누님도 믿고 싶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어떻게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을까?

“누, 누님께서 잘못 보셨을 겁니다….”
“멍청한 놈!”

버럭 소리를 지르시는 마당에 놀라 자빠질 뻔했다.

“현실을 직시해라, 카이도!”
“루카는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
“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느냐?!”
“저, 전….”

8년 전, 형님과 누님께서 사라진 이후로 유독 나를 따랐던 루카. 너무나 심약한 성격이라 눈물이 많았던 그 아이가, 이런 일을 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정황이 루카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해도, 난 차마 루카를 배신할 수 없다.

“흥! 불여우 같은 년이 잘도 널 구워삶았구나! 정 믿지 못하겠다면 당장 루카의 방을 뒤져보아라!”
“루카의…, 방을요?”
“평상시라면 그 루카가 네가 여기 있음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다. 필시 네 루카에게 무슨 수작을 부렸으렷다?”

거기까지 꿰뚫고 계시다니 지금의 린 누님에게선 노련미가 물씬 풍긴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지금, 난 누님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다시 구불텅한 복도에 발을 딛는 내 뒤로 린 누님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가 따라왔다.

“네, 루카의 방에서 네가 썼던 것과 같은 물건을 발견할 터이다.”


다시 되돌아간 루카의 방은 여전히 불이 꺼져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들어가 보니 아직 약효가 돌고 있는 듯, 루카는 쌔근거리며 자는 중이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그 모습을 보면 절로 마음이 포근해진다. 이 아이가 정말 린 누님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벌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그 순진무구함은 이제 과거의 기억에 불과한 것인가? 무엇이 루카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오빠인 나는 왜 여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는가….

루카를 더 지켜보자니 눈물이 나올 거 같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루카에 대한 의심과, 루카에 대한 미안함과, 루카에 대한 동정을 뒤로 하고, 일단은 내 임무에 충실하기로 했다.

린 누님께서 언급하신 물건은 의외로 눈에 띄는 곳에 있었다. 보란 듯이 탁자 위에 있는 주머니. 그것은 린 누님의 것도, 렌 형님의 것도 아니었다. 누구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은 주머니. 그 안엔 내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수면제가 한 알 들어 있었다. 루카는 이걸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그리고 누구에게 쓰려고 준비한 걸까? 루카에게 수면제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튼 이로써 린 누님의 말을 믿어볼 이유가 생겼다는 건 확실하다.

주머니를 찾았다고 바로 돌아갈 순 없다. 정말로 루카의 짓이라면 린 누님의 사슬을 풀 열쇠도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랍장이며 화장대 등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열쇠를 찾을 수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옷장까지도 뒤져보려는 찰나, 바로 뒤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님, 미안해요….”

하지만 돌아보니 루카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잠꼬대를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왜 내게 사과하는 거야? 날 속였기 때문에? 루카가 정작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린 누님이 아닌가? 이래저래 착잡한 마음으로 루카의 침대 맡에 다가섰다.

‘루카, 네겐 무슨 사정이 있는 걸까? 미안한 걸 알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루카의 잠꼬대는 잔뜩 고조된 마음을 무너뜨리는 불씨가 되었다. 카펫 위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난 그저 하염없이 바지 끝자락만을 구겨 쥘 뿐이었다.

‘이게 뭐지?’

그 소리를 듣고 손을 더듬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웠다. 그것은 열쇠였다. 루카가 열쇠를 손에 쥐고 자다 떨어트린 듯하다. 열쇠를 주워보니 린 누님의 족쇄구멍에 알맞은 크기로 보였다.

‘루카, 정말 네 손으로 누님을 묶어둔 거니?’

생애 처음으로 루카에게 절망 섞인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린 누님께선 무고하게 묶여 계실 테니까. 오만가지 감정을 떠안고 루카의 방을 나섰다. 방문을 닫기 전, 아까처럼 한 알의 수면제를 바닥에 떨어트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린 누님께선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 주머니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맞춰보마. 네 것과 똑같은 수면제일 거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알다마다. 내가 실력만으로 루카를 이기지 못할 성 싶더냐?”

루카는 수면제를 써서 방심하신 린 누님을 사로잡았던가 보다. 난 같이 챙겨온 열쇠로 린 누님의 족쇄를 풀기 시작했다.

“열쇠를 가져왔단 건 이제 내 말을 믿는단 뜻이더냐?”
“믿든 안 믿든 열쇠는 갖다드렸을 겁니다.”
“여전히 정이 많은 녀석이구나.”
“예전의 누님이라면 제게 똑같이 대해주셨을 겁니다.”
“그렇구나….”

린 누님께선 씁쓸히 마지막 쇠사슬을 집어 던지셨다. 린 누님을 옭아맸던 사슬이 쇳소리를 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하지만 누님, 루카는 왜 누님에게 이런 심한 짓을 했을까요? 묶어두는 것도 너무한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필요했다.”
“필요했다고요?”

린 누님께선 고개를 끄덕이시며 자신의 주머니를 꺼내 보이셨다.

“루카는 어떻게 그 주머니를 얻었을까? 수면제야 저택의 창고에서 구하면 된다 한들, 렌 오라버님만이 제작법을 아는 주머니는 어떻게 구했을까?”
“이 주머니, 린 누님의 것도 아니었군요.”
“그래, 루카가 직접 만든 거다. 흡수한 오라버님의 지식을 이용해서.”
“흡수라니요?”
“카이도, 넌 우리의 출가 의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출가 의무라. 보르칼 고조할머님께서 만드신 의무로 성인식을 치른 이후…. 이런 내용을 원하시는 건 아니겠지.

“모릅니다. 다만 후계자 문제를 막기 위해 그런 건 아닌가하는 가설은 세워봤습니다.”
“어느 정도는 맞다. 이 출가 의무 덕분에 우리 가문 사람들은 자식을 몇이나 낳든지 간에 작위 계승 문제로 곤란을 겪진 않지. 하지만 이것도 알고 있느냐, 카이도?”
“무엇을 말입니까?”
“우리 가문의 작위는 반드시 그 세대의 막내딸이 잇는다는 것을.”
“그럼 이번 세대엔 루카가…….”
“그래.”
“하지만 그건 린 누님의 팔을 자른 것에 대한 답은 되지 못합니다.”

린 누님께선 짐짓 고민하시는 듯하다 이내 그 충격적인 한 마디를 털어놓으셨다.

“그 답은 먹기 위해서다.”

루카가 린 누님의 팔을 먹었다는 말인가? 린 누님의 팔을 먹기 위해 잘라냈단 말인가? 하지만 어째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거 안다. 하지만 그것만이 내 모든 의문의 고릴 푸는 유일한 열쇠다. 출가 의식 따윈 겉치장에 지나지 않아. 타지에서 10년간 고립되라는 의무, 그건 대중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일 뿐이다, 카이도.”
“10년이나 세월이 지나면 돌아오던 돌아오지 않든 신경 쓰는 사람이 없을 거란 뜻입니까?”
“맞다. 실제로 초대부터 지금까지 출가 의무를 떠났다는 사람은 수십에 달할 터이나, 외부의 어떤 지방에서도 로이드가의 인사가 10년을 살았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말은, 그들 모두가….”
“막내딸을 제외하곤 살해당했겠지. 저 뼈의 잔해는 로이드가의 치욕의 역사다. 아니, 이 방의 존재 자체가 그렇다.”

감옥 한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인 유골들. 그들은 로이드가의 후계경쟁을 막기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누님, 그렇다면 굳이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 가운덴 작위 따위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었을 거 아닙니까?”
“나도 오늘 낮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었다. 내가 지난 8년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느냐?”
“에먼 캐스트에 살고 계실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럴 테지. 하지만 아니다. 처음 3년간은 현상수배를 피해 전국을 떠돌았고, 그 후의 3년간은 판도라 지방에서 정보를 모았으며, 최근의 2년간은 주로 전쟁지역 후방을 돌아다니며 네 어미를 감시했다. 하지만 좀처럼 저택으로 돌아갈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오늘 널 붙잡을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운이 좋아서일 뿐이다.”

잠시 말을 멈추신 린 누님께선 내게 손을 내미셨다.

“루카의 주머니를 다오.”

난 군말 없이 주머니를 넘겨드렸다.

“카이도, 안에 있던 수면제는 어떻게 했느냐?”
“루카의 방에 던져두었습니다.”
“두 알의 수면제라면 새벽까진 안전하겠구나. 잘했다. 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따라 오너라, 카이도.”

하지만 난 주저 없이 앞장서시는 린 누님의 뒤를, 쉽게 따를 수가 없었다.

“누님, 전 아직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루카도 우리와 같은 피해자일지 모르지 않습니까?”
“네 눈에 비친 루카는 내가 본 루카와는 다른 인물인가 보구나.”

‘내가 본 루카와 린 누님의 눈에 비친 루카가 다르다?’

린 누님께선 어쩔 수 없으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이으셨다.

“들어라, 카이도. 난 3년간 판도라 지방에서 정보를 모았다. 왜냐면 거기엔 우리의 먼 친척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지. 그들의 조상도 한때 대단히 뛰어난 힘과 능력을 지녔으며, 우리 집안처럼 끔찍한 악습을 지니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그들이 악습을 행했던 이유는 들으셨습니까?”
“안타깝게도 먼 과거의 일이며, 악습에 종지부를 찍은 당사자 또한 언급하길 꺼려했다 한다. 단지 그 전설의 흔적을 좇아 전설에 언급된 무기만을 구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요 누님, 그 후손의 후대에서 또다시 같은 악습이 되풀이되진 않았던가요?”

린 누님의 입 꼬리가 살포시 올라갔다.

“바로 그 점이 핵심이다. 악습이 사라진 결과 그들의 자손은 대를 거듭할수록 능력이 쇠약해져 결국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도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누님의 결론은 우리 집안의 악습 또한 비슷한 이유란 겁니까?”
“그래. 오늘 낮까진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루카가 날 살려둔 채 내 팔만을 잘라 통째로 뜯어 먹을 때, 비로소 확신했다. 루카는 내 힘을 흡수하려는 거란 걸.”

듣고 싶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바람이 솔솔 새들어오는 것처럼, 속이 시려왔다.

“루카가, 자기 의지로 누님을…,”
“네가 본 루카가 어떤 애인지는 모르나, 적어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동생이었겠지. 하지만 지금의 루카는 로이드가주에 걸맞은 인물, 힘에 굶주린 악마일 뿐이란 걸 알아둬라.”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린 누님의 팔을 먹어버린 게 루카라는 건 거짓이 아닌 듯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 손으로 루카를 죽여야만 할까?

“누님, 지금이라면 루카도 우릴 뒤쫓지 못할 겁니다. 아니면 이 나라를 떠나서라도….”
“국경을 넘는 일이 그리 만만하게 보이더냐?”
“누님의 힘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허무맹랑한 말을 꺼낸 것일까? 린 누님께선 가당치도 않으시다는 듯 혀를 내두르셨다.

“지금 네 어미가 최전선에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전쟁에 참여하는 건 기사로서 영광된 일이니까요.”
“정말 그게 다일까? 공작이나 되는 사람이 그깟 명성을 위해 직접 전투에 참가한다고? 그 시간에 정치에나 신경 쓰는 게 정상적인 공작의 역할이다.”
“그럼 어머님께선 무엇을 위해 전쟁에 참여하시는 겁니까?”
“의무다. 전쟁에 참가할 의무. 초대 공작으로부터 비롯된 계약에 의해 우린 왕실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만 한다. 말하자면 국가에 귀속된 용병 가문인 것이다. 정확히는 왕실 직속 노예가라 보면 된다.”

어머님께서도 다른 로이드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무를 떠안고 살아오셨던가? 왜 그런 것들에 묶여 살아야만 했을까?

“하지만 누님,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렇다고 국가에서 저흴 체포하기라도 한단 말씀이십니까?”
“잘도 아는구나. 출가 의식을 치른 이후, 처음 3년간 지명수배 당했더란 말을 하지 않았더냐? 수배당한 몸으론 멀리 이동하기가 힘들다. 일반 병사들이라면 나도 감당해낼 수 있다만, 네 어미라면 얘기가 다르다.”
“루카가 있건 없건 어머님께선 저흴 뒤쫓으실 텐데요?”
“아니, 그러지 못할 거다.”

그리 말씀하시는 린 누님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하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신 걸까?

“카이도, 올해로 네 어미의 나이가 몇이 되더냐?”
“50세가 되십니다.”
“딱 좋을 시기다. 좋을 시기야. 네, 보르칼 로이드 초대공작의 부임기간이 얼마인지 아느냐? 2대 공작은? 그리고 3대 공작은?”

내가 그런 걸 다 외울 리가 있는가? 돌아가신 렌 형님이라면 몰라도 나에겐 완전히 무리다. 하지만 린 누님께선 그 정보만큼은 확실히 외워두신 듯하다.

“30년이다, 30년. 20살에 작위를 계승해서 50살에 퇴위했단 뜻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어머님께서도 머잖아, 올해 내로 퇴위하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뿐만 아니다. 그들은 모두 퇴위한 이후 한결같이 영지로 되돌아와 여생을 보냈지.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이 저택으로 되돌아온 이래 한 발짝도 나온 적이 없다는 거다.”
“힘을 얻으려 자신의 몸을 딸에게 물려주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토록 화려했다던 장례식은 어찌된 일입니까? 가문의 공동묘지에 있는 무덤들은요?”
“국가규모의 대대적인 은폐작업이 있었을 거다. 로이드가의 묘지엔 빈 관들만 잔뜩 매장되었다에 내 오른팔을 거마.”

씨익 웃으시며 건넨 린 누님의 농담이 내겐 너무나도 섬뜩하게 다가왔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지금 우리가 루카를 죽인다면 네 어미는 후계를 찾지 못할 터이다. 그럼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적어도 우리에게 손해될 일은 아니겠지. 노쇠한 몸으론 큰 힘을 내지 못할 거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아닌 어머님입니다. 무패의 기사이신 보르칼 로이드 고조할머님의 피를 이은 분이 아닙니까?”
“카이도, 나 또한 로이드의 후손이다. 힘으로라면 네 어미에게 크게 뒤지지 않는다. 거기에 판도라 지방에서 찾은 무기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조할머님께선 일반적인 무기엔 상처입지 않으셨다 한다. 물론 전설이니만큼 과장된 면이 있겠지만, 대체 어떤 무기기에 린 누님께서 이토록 자신만만해 하시는 걸까?

“내 아까 판도라 지방의 악습을 끝낸 자를 언급했지. 그 사람은 무슨 수로 자신의 어미를 살해했을까? 자기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강력한 괴물을 맨손으로 때려잡았을 거라 생각하느냐?”
“그렇진 않겠죠. 그럼 전설에 등장했다던 무기의 힘을 빌었단 말입니까?”
“맞다. 그 무기엔 고대로부터의 저주가 걸려 있어, 특정 혈통의 사람들에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지. 나 또한 실험한답시고 손끝을 살짝 베었을 뿐인데 1시간이나 피가 멈추지 않았다.”
“그런 저주가 걸릴 정도라면, 우리 집안의 기원은 상당히 오래된 모양이군요. 렌 형님처럼 살해당한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겠죠.”

그 무수한 세월에 걸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을까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걱정 마라, 카이도. 우리도 이번 세대에서 오래된 악습을 끝내고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
“그러나…….”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렇게 심한 일을 저지르고, 날 감쪽같이 속인 악마라고 해도, 금방이라도 뒤에 나타나 매달릴 듯한 여동생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직도 미련이 남느냐?”

그런 내가 부끄러워 린 누님께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쯧쯔, 나약한 녀석. 넌 저택 후문에서 날 기다리도록 해라. 어차피 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터이니….”
“누님….”

지난 8년,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아오셨을까? 린 누님께선 칼로 베어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강한 분이 되어 있으셨다.

“만약 내가 20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뒷산에 올라가 우리들의 나무 밑자락을 파보도록 해라. 그게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다.”

그 말을 끝으로 린 누님께선 감옥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곧이어 만날 누님의 손엔 여동생의 피가 흥건하겠지.

‘이로써 국가 공신가라는 로이드 공작가의 역사도 마지막인가…….’


로이드 저택은 다른 귀족가 저택과 매한가지로 정문 반대편에 작은 후문이 있다. 후문 창살 너머로 멀리의 야산이 보인다. 야윈 초승달을 머리에 인 산자락을 보고 있노라면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어째서 우린 판도라 지방의 일족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했을까? 그깟 힘이 무슨 대수라고 자기 형제자매들을 헤쳐야만 했을까? 루카는 왜…, 그렇게나 착하던 우리의 막내 여동생이 왜……, 이렇게까지 변해버린 걸까?

린 누님께서 돌아오신 이후,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내 삶의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차라리 비밀통로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난 아무 것도 모른 채, 골아 떨어졌겠지. 그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난 언제나처럼 렌 형님과 린 누님을 그리며, 루카와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합리한 현실에 분노할지언정,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구멍나버린 초라한 달의 모습이 남의 것 같지가 않다. 고요한 저택의 뒤뜰에 홀로 서서 쓸쓸한 물음을 던져본다.

“린 누님, 만약 당신께서 돌아오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요?”

이 속내를 어떻게든 털어보고 싶었을 뿐, 대답을 원했던 건 아니다.

“저는 형님께서 돌아오셔서 기쁜걸요.”

그럼에도 내겐 대답이 들렸다. 내 귓가에 맞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한 목소리. 예상치 못한 그 대답에 소름이 돋는다.

“루카!”
“약속한 에밀레 티를 타왔어요, 오라버님.”

방긋 웃으며 내민 찻잔을 거칠게 밀쳐냈다. 루카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반응해 찻잔을 되잡았다. 그 와중에 차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주시면 안 되나요?”
“너, 너……. 어떻게? 아직 약효가 남았을 텐데?!”

루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주머니에서 주머니를 꺼내보였다. 가는 손가락에 걸린 주머니엔 또렷한 글씨로 루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건 내가 루카의 방에서 가져온 주머니가 아니었다.

“주머니를 하나 더 갖고 있었어?”
“렌 오라버님께선 저만 쏙 빼놓고 이런 걸 만들어주셨더군요. 저도 샘이 나서 만들어봤는데 생각지도 못한 쓸모가 생겼지 뭐에요? 이 주머니가 있으면 수면제를 특수 가공된 항아리에 보관할 필요가 없어요. 렌 오라버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평하게 말을 꺼내는 루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난 루카의 방에 두 알의 수면제를 떨어트렸고, 루카에겐 수면제의 기화를 막을 주머니가 있었다. 루카는 잠들어 있지 않았다.

“주머니는 일부러 보여줬던 거군.”

자기가 잠들어 있다고 믿게끔 우릴 속인 것이다. 루카는 이제 쓸모없다는 듯 주머니에 든 수면제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건 수 초 지나지 않아 기화해 날아가 버렸다. 난 한 알의 수면제를 두 번 떨어트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린 누님을 어떻게 했지?”
“원래 계셔야 할 곳에 모셔 드렸으니 걱정 마세요. 그보다 이 에밀레 티, 드시지 않으면 식어버릴 거예요. 차는 뜨거울 때 마셔야 제 맛이잖아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미소를 내비치며 다가서는 루카. 언제나 보아왔던 그 모습이 오늘만은 더할 나위 없이 꺼림칙했다.

“차 따윈 집어쳐!”

또 한 번 밀쳐내려 했지만 이번엔 예상했다는 듯, 한발 앞서 물러나 있는 루카였다. 그리고는 여유롭게 한 걸음 다가서는 모습에, 겁이 나 돌멩이를 주워 던졌다.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께서 왜 이러세요? 오라버님은 돌팔매질이나 하실 나이가 아니잖아요?”

온힘을 다해 던진 돌멩이건만, 루카는 고무공마냥 가볍게 잡아버린다. 돌멩이는 그 손바닥 안에 부서져 흙가루를 날렸다. 루카의 힘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하다.

“이 괴물!”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괴물이라니 너무해요. 아직 린 형님께 비하면 새 발의 피인 걸요.”

지금 난 루카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이번엔 돌멩이가 아니라 흙을 한 줌 쥐어다 뿌리고는, 그대로 문 밖으로 도망쳤다. 뒤돌아보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전력으로 산을 향해 달렸다. 린 누님께서 붙잡히신 지금, 어머님과 루카를 막을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누님께서 묻어두셨다는 그 전설의 무기를 찾기 위해, 잡초 무성한 풀숲으로 겁도 없이 뛰어들었다. 그런 나를 보고서도 루카의 목소리엔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이걸 찾으러 가시는 건가요, 오라버님?”

‘뭐?’

한참이나 떨어진 거리였음에도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돌아본 순간, 어깨가 화끈거렸다.

“아아아악!”

속살을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날카로운 칼이 내 어깨를 완전히 관통한 상태였다. 다리에서 힘이 풀린다.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주저앉아 버릴 거 같다.

루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오라버님껜 아무런 능력도 전해지지 않았군요.”
“사람을 찔러놓고, 무슨…, 헛소리야?”
“우리 혈통에 이어지는 재능 말이에요. 렌 오라버님께서는 고대의 지식을, 린 형님께선 끝없는 힘을 물려받으셨죠. 저는 자유자재로 기색을 숨길 수 있고요. 하지만 오라버님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저나 린 형님의 경우엔 어떤지 아세요?”

루카는 내 어깨에 꽂힌 칼의 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손가락 끝을 내게 들이밀었다. 손가락의 상처는 살짝 긁혀 핏방울이 맺힐 정도의 가벼운 절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상처에선 손가락 하나가 통째로 잘려나간 것처럼 피가 콸콸 쏟아졌다.

“보셨죠? 이 칼은 우리 가문의 사람들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반응한답니다.”

확인할 필요도 없다. 그 칼은 누님께서 발견하셨다는 무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게 칼이 묻힌 장소를 알고 있었지? 나무의 위치야 형님의 기억을 읽었다손 치더라도, 우리들의 나무 밑에 묻혔다는 건, 8년 전의 형님께서 알고 계셨을 리 없다. 그도 아니면 린 누님의 기억을 흡수한 걸까? 아니다. 린 누님의 기억을 읽어낸 시점에서 루카는 우릴 살려둘 이유가 없다. 손발이 묶인 누님이라면 루카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을 터.

‘그렇다면 누님의 수갑이 풀리기 전까지도 몰랐다는 건데……. 잠깐!’

방금 들은 루카 본인의 말처럼 난 루카의 접근을 눈치 챈 적이 없다. 언제나 루카가 날 부른 뒤에야 뒤에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지. 그렇다는 건…, 설마?

“너어…, 우릴, 엿듣고 있었구나….”
“덕분에 이 칼을 손에 넣을 수 있었죠.”
“린 누님을, 어떻게 했느냐, 루카!”

저런 마귀 붙은 칼에 베이셨다면 제아무리 린 누님이라 해도 도리가 없다. 손가락 끝을 베어도 저 정도로 피가 흐르는데, 혹시나 큰 상처라도 입으셨다면?

“걱정 붙들어두세요. 린 형님께는 아직 용건이 남아 있으니까요.”
“린 누님은 살아 계시냐? 살아 계시냔 말이다!”
“소리 지르지 말아주세요. 피를 흘린 탓인지 현기증이 나거든요.”

그리 말하며, 루카는 벌건 손가락으로 내 코를 꽉 붙잡았다. 곧이어 아까부터 줄곧 들고 있었을 차를 내 입에 털어 넣었다. 달콤하고 향긋한 찻물이 목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동시에 정신이 풀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직 식어버리진 않았네요.”
“차에…, 무슨 짓을…….”

나른한 기분이 들고, 의식이 차차 가라앉는다. 예전에 겪어본 익숙한 느낌이다. 수면제를 잘못 쓰는 바람에 내가 잠들어버렸을 때와 같다.

‘수면제를 탄 차였나…….’

캄캄해진 시야 속에 어렴풋이 루카의 목소리가 흘러든다.

“말씀드렸잖아요. 오늘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차라고요.”



“헛!”

번쩍 정신이 든다. 눈뜨자마자 보이는 흑색 천정. 주위론 무늬 하나 없이 밋밋한 흑색 벽지. 여긴 루카의 방이다.

“정신이 드셨나 봐요?”

탁자에 앉아 있던 루카가 내 인기척을 듣고 슬금슬금 다가온다. 그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은 먹잇감을 갖고 노는 뱀의 형상이다.

“루카!”

다짜고짜 달려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일 뿐. 손발이 침대 다리에 묶인 상태론 움직일 수 없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피를 많이 흘리셨어요.”
“누님께선 무사하신가?!”
“보고 싶으세요? 안 보시는 편이 나을 텐데….”

내 뺨을 친근하게 쓰다듬으며 이죽대는 루카. 이걸로 다 끝났다는 듯한 여유로움이 얄밉다.

“누님을 어떻게 했느냐?”
“그렇게 보고 싶으시다면 보세요. 자아~”

농담하듯 가볍게 날아온 것은, 노릇하게 구워진 사람의 오른팔! 아직까지 온기가 남아 있는 그것을 보니 말문이 막혀버린다.

“그러니까, 안 보시는 게 나을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예상이야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허탈해진다. 린 누님께선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시겠지. 루카는 완전한 악마가 되어 있었다.

“루카, 넌 정말 인간의 도를 저버린 거냐? 네 형제자매도 몰라보니 개새끼나 다름없구나!”

나도 모르게 여동생에게 심한 욕을 뱉어버렸다. 하지만 루카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단지 싱글거리며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아 내게 얼굴을 들이댔을 뿐. 코가 맞닿을 듯한 거리에서 서로의 숨이 맞닿는다.

“맞아요, 오라버님. 전 눈먼 암캐에요. 그러니까 이런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죠.”

그건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후읍!”

내 입술을 덮어버린 루카의 입술 새에서 미끄덩한 것이 기어 들어온다. 물컹거리면서 덩어리진 그것은 혓바닥. 이 무슨 패륜적인 행위란 말인가? 홧김에 씹어버리려 했지만 루카의 혀는 고무처럼 질겨서 내 이를 튕겨냈다. 하지만 루카의 입맞춤을 떼어버리긴 충분했다.

“야성적이시군요…….”
“넌 인간으로서의 긍지마저 던져버렸구나.”

이로써 루카에 대한, 우리의 막내 여동생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식었다. 내 눈앞의 악녀는 내가 알던 여동생이 아니다. 우리 형제들을 잡아먹은 괴물이다.

“ㅌㅞㅅ.”

찝찝한 마음으로 뱉어버린 침은 운 좋게도 루카의 이마에 맞았다. 얼굴에 침이 묻었음에도 루카는 굳이 닦아내려 하지 않았다.

“넌 더 이상 내 여동생이 아니다. 렌 형님과 린 누님처럼 우리의 형제가 아니다.”
“잘 됐네요. 그럼 절 안으시는데 부담이 없으시겠죠?”

갑자기 내 배에 올라탄 루카는 내 셔츠를 종잇장처럼 찢어버렸다. 그 행동엔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친다. 얇은 천 너머로 루카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온다.

‘더러운…, 계집….’

“뭘 하려는 거냐?!”
“부끄러워하실 거 없어요. 우리 어머님도, 아버님도 하셨던 일을 되풀이할 뿐이에요.”

희뿌연 팔이 넝쿨처럼 내 목을 타오른다. 날 한껏 더듬어대는 그 손길이 짜증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루카, 이러지 마라!”
“반항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금방 끝날 테니까…….”

한사코 몸을 비틀어보지만 루카는 내 생각을 읽었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반응해 내 움직임을 뒤따라온다. 등줄기를 훑어가는 손가락의 감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다.

“안 돼! 넌, 너, 왜 이러는 거냐?!”

그에 대한 루카의 답은 한 마디 뿐이었다.

“일족의 피를 지키기 위해서예요.”

일족의 피, 힘. 그깟 것들이 다 무엇이기에 식인, 근친상간 등까지 행해야만 하는가?

“그런 일을 당하느니 죽는 게 낫다. 차라리 날 죽여라!”

바락바락 악을 써봄에도 루카의 애무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루카 자신 또한 즐거운 기색이 없는 의무적인 손놀림은 점점 더 격해져간다. 그에 따라 반응해버리고 마는 내 몸이 원망스럽다. 이러다간 정말 루카의 의도대로 되어버리고 말리라.

‘그러느니 내 스스로….’

들어온 루카의 손가락은 지나칠 정도로 단단했다. 내가 혀를 깨물려 마음먹은 즉시, 루카가 내 입에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었던 것이다.

“부디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하하하하하! 소중하다고?”

기가 막혀 웃음이 다 나왔다.

“린 누님을 잡아먹은 네가, 내게 칼을 꽂은 네가, 언제부터 목숨의 소중함을 알게 됐더냐?”
“오라버님의 목숨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오라버님께서 태어나셨기에 어머님께서 저를 낳으신 거예요.”
“거짓말 마! 언제까지 날 농락할 셈이냐?!”
“믿지 못하시겠어요? 할머님도, 어머님도, 저도 막내라는 걸 아시잖아요? 오라버님께서 태어나지 않으셨더라면, 렌 오라버님과 린 언니께서 지금의 오라버니와 제 역할을 맡으셨겠죠.”

모든 일의 원흉은 나란 말인가? 내가 태어났기에 린 누님께서 더 이상 막내가 아니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어머님께서 루카를 낳으셨다고? 정말 이 모든 참상들이 내 잘못일까? 잔인하게 살해당한 렌 형님과 린 누님은 날 원망하실까?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잘못된 건 이 집안이지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날 잡아먹지 않았느냐? 어째서 내가 아니라 렌 형님을 잡아먹고, 렌 형님 대신 날 살렸느냔 말이다!”
“당신께선 제 생명의 은인이시기에, 제가 렌 오라버님이 아니라 카이도 오라버님을 배필로 정한 거예요. 오라버님께서 절 살리셨기에, 제가 오라버니를 살렸기에 그 목숨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조금은,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시면 안 될까요?”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는 얼굴.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고, 그 목소리엔 절실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루카의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아니지. 그런 이유가 아냐. 렌 형님 대신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따로 있겠지. 출가 의식이 매 4년마다 있는 이유는 뭘까? 응? 성인식을 치른 지 4 년이 지나기 전에 렌 형님을 잡아먹어야만 했던 건 아니더냐? 내게 어떤 능력이 있는 지를 확인해야만 했던 건 아니더냐?!”

따져보면 8년 전의 그날 이후, 루카는 여러모로 변했다. 유독 내게 살갑게 군다던가, 루카의 기척을 읽기 어려워졌다던가…….

“그러네요.”

‘정곡을 찔렀나?’

루카는 너무도 쉽사리 긍정해버린다. 그 표정은 어디론가 숨어버렸고,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담담하기 그지없다.

“아읏!”

대신 루카의 손놀림은 한층 거칠어졌다. 붉은 입술이 머문 어깨엔 진한 키스마크가 새겨졌다.

“그, 그만!”

루카는 멈추지 않는다.

“이러지 마라, 루카! 그깟 힘 따위가 그토록 탐난단 말이냐?!”

루카는 대답하지 않는다.

뱀이 허물 벗듯, 옷 사이에서 루카의 몸이 스르륵 빠져나온다. 벗어낸 옷가지가 사방으로 나부낀다.

“이것만이 당신의 존재가치입니다.”

20년간 숨겨온 알몸을 친 오라비에게 내비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가…. 죄 많은 몸뚱이를 찰싹 붙여오면서도 창피한 줄은 모르는가….

“루카…, 루카아아아!!”

그렇게 루카는 무력한 나를 유린해갔다. 한 점 부끄럼 없이. 한 점 망설임 없이…….




네가 내게 이럴 수 있어? 날 속이다니. 네가 날 배신하다니? 네가 감히 나를!! 죽인다. 쳐 죽여 버리겠어. 가만두지 않겠어. 너의 모든 걸 부숴버리겠어!!!!!

“아!”

의도치 않게 오라버님의 기억을 읽어버렸다. 오라버님과 몸이 통한 탓에 정신적인 유대가 강해진 덕분이다. 하지만 즉시 정신의 연결을 끊어버렸기에 내 기억이 역으로 읽히는 일만은 막을 수 있었다. 내 기억이 전해진다면 오라버님께서 어떤 일을 벌이실지 알 수 없다. 아버님과 같은 과오를 저지르실 지도 모르지.

두 번 이상의 임신이라니?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난 어머님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 내 딸에게는 나와 같은 무게의 짐을 지우진 않겠다. 세 번이나 자신의 손으로 친형제의 피를 거둔다는 일, 제정신으로 할 일이 아니다. 늘어난 형제를 처리하는 건 어미가 아닌 막내의 역할이니까.

오라버님과의 정사가 끝났을 때, 침대 위는 우리 둘의 땀과 내가 흘린 피로 더럽혀져 있었다. 오라버님께선 피로감에 겨워 혼절하신 상태다. 그 틈에 침대보를 바꿔 갈고, 오라버님께는 미리 준비해둔 옷을 입혀드렸다.

지난밤에 쓴 침대보는 화로에 던져버렸다. 내 피가 묻어 있었으니까. 내 형제를 더럽힌 지저분한 피가. 그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아프다. 내 목적만을 위해, 오라버님을 타락시키고 말았다.

‘오라버님을 괴롭힐 마음은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습관처럼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고 말았다.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는 사과는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그러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나도 모르게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고 만다.

“이래선 안 돼. 강해져야지.”

어제 남긴 린 형님의 마지막 부분을 씹으며, 스스로를 다잡는다.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면 의무에 눌려 무너지고 말 것이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지금, 로이드가의 가주는 나, 루카 로이드다. 그런 내가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 어쩌겠다는 건가? 내겐 500년에 달하는 로이드가의 피와 역사를 수호할 의무가 있지 않던가? 나는 그 무게를 짊어질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만 한다.

8년 전, 렌 오라버님의 기억을 물려받은 뒤로, 내 인생은 180도 뒤집어졌다. 로이드가의 유구한 역사와, 핏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신 조상님들을 알게 되었으니까.


과거, 배척받은 로이드가의 피가 흘렀다.

로이드가의 사람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지혜, 힘, 판단력을 가졌다. 그렇기에 그들은 여타 집안들이 따를 수 없는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이를 시샘한 왕가와 귀족가들에게 나라 안팎으로 배척당했다.

그들은 연합하여 로이드가를 공격했고, 로이드가 사람들 또한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았기에 대규모의 전쟁이 벌어졌다. 당시, 휘하 가솔의 수가 수백에 달하던 로이드가였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마다 피바다 속에 시체더미가 굴러다녔고, 로이드가가 향하는 곳엔 까마귀가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전쟁 초기엔 로이드가가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는가 싶었다. 귀신같은 전략과 무한대의 전투력. 거기다가 속속들이 개발되는 신병기까지. 오합지졸의 군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제 아무리 용맹한 호랑이라도 수백 마리 쥐떼에겐 당하지 못하는 법.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세계 각국의 유수 가문들이 연합군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자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무기에 저주를 걸었다. 수십, 수백 명의 원혼이 깃든 무기들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인해전술과 저주기로 무장한 군대 앞에 로이드가는 무너지고야 말았다.

그 와중에 직계 혈통을 이은 후계자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당하거나, 사로잡혀 마녀재판에 회부되었다. 잔인한 학살극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로이드가의 사람은 단 두 명. 방계의 자손이자 우리의 시조이신 아담 로이드 님과, 그분의 여동생이셨던 이브 로이드 님 뿐이었다.

로이드가의 일이 세상으로부터 잊힐 때까지, 두 분께선 남들 눈을 피해 처참한 생활고를 겪으셔야만 했다. 10년이 넘는 망명 생활 끝에 조그만 판잣집을 얻어 사시게 된 두 분이었으나, 그분들에겐 한 가지 사명이 남아 있었다.

로이드가의 재건.

하지만 그건 두 분만으론 절대 이루지 못할, 허황된 사명이었다. 직계에서 바로 갈라진 분들이라 당 세대에선 직계의 사람들과 차이가 없는 분들이었다. 하지만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 재능이 약해지는 방계의 특성상, 그분들만으론 예전 로이드가의 권세를 되살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분들께선 극단적인 선택을 하시고야 말았다. 시대를 막론하고 금기시된 근친혼을 하셨던 것이다. 적어도 외부의 피가 섞여 재능이 약해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론 완벽하지 않았다. 근친을 통해 진한 피를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재능의 약화를 막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직계의 혈통은 자손에게 자신과 똑같은 재능을 물려줄 수 있었지만, 방계의 혈통에선 자신의 재능을 나눠주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심하시던 선조들께선 최후의 결단을 내리시고야 만다. 갈라진 재능을 받은 자식에게 자신이 물려받은 나머지 재능을 대물려 줌으로써, 대대손손 완전한 재능을 이어가도록 한 것이다. 그 경우, 자손의 수를 늘릴 수는 없지만, 재능이 손실되는 일도 없다.

다만 초기의 선조들에겐 마땅한 통제 수단이 없었기에, 희생을 거부하는 자에게 의무를 강요할 수 없었다. 그렇게 도망쳐간 비겁자들의 집단 중 하나가 판도라 지방에 사는 자들이다. 로이드가의 피와 역사를 계승해 먼 훗날 그 옛날의 위광을 되찾는 것이 모든 로이드가 자손들의 사명이 아닌가? 그런데도 자기 몸 하나 사리자고 도망친 자들은 로이드의 이름을 쓸 자격도 없는 비겁자들이다. 모든 로이드의 기억과 재능을 모두 잃어 더 이상 희생한들 의미가 없는 무가치한 자들.

하지만 우리 로이드 공작가는 다르다. 당시 약소 귀족가에 불과하던 초대 국왕과 계약을 맺고, 지금의 건국 공신가를 있게 하신 보르칼 로이드 초대 공작님의 철두철미한 지휘 아래, 모든 로이드 공작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물려받은 재능을 지켜왔다.


나, 루카 로이드는 억울하게 죽어간 로이드가의 사람들과, 스스로 몸 바친 숭고한 로이드가의 사람들의 시체 아래 태어난 몸. 다음 세대의 로이드 공작에게 내 모든 것을 물려줄 때까지, 이 한 몸 사릴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그렇다고 린 형님이나 카이도 오라버님을 탓하는 건 아니다. 이런 기억은 굳이 많은 사람에게 전할 필요가 없다. 그 경우 아버님처럼 계획적으로 새 자식을 낳게 하여 우리의 역사를 끊으려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고, 렌 오라버님처럼 자기 형제에 대한 연민을 이기지 못해 도망칠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하는 탓이다. 심지어 막내딸로서 철저히 교육받은 자가 사적인 감정에 휘말려 야반도주를 꾀하다 걸린 사례도 기억되고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위험 부담 때문에 기억을 전달받지 못한 그분들의 무지를 탓할 수만은 없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에는 선택받은 로이드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

렌 오라버님께 물려받은 고대로의 기억.
린 형님께 물려받은 역발산의 힘.
어머님께 물려받은 튼튼한 몸.
그리고 카이도 오라버님께 받은 다음 세대의 씨앗.

본래 어머님의 계획대로라면 린 형님께서 렌 오라버님과 어머님의 재능을 차례로 물려받는 걸로 이번 세대의 회수작업이 얼추 끝났을 터다. 만일 아버님께서 어머님의 빈틈을 노려 카이도 오라버님을 임신시키지 못했더라면 그렇게 되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로이드가 500년 역사엔 별별 경우가 다 기억되고 있다. 카이도 오라버님께서 태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어머님께서 역으로 아버님을 이용해 날 임신하시는데 성공하셨다. 내가 태어난 직후, 아버님께선 어머님께 재능을 회수당하셨다.

현재 로이드 공작가에 전해지는 재능의 회수 방법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재능을 회수하기 위해선 그 사람의 신체를 다 먹어치울 것. 둘째,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의 재능을 회수할 수 없다. 셋째, 당대의 가주는 50살이 되기 전까지 남편의 재능을 회수한 후, 다시 자신의 막내딸에게 모든 재능을 물려줄 것. 상황에 따라 약간의 편법이 등장할 때도 있었다고 기억되고 있지만 기본적인 사항은 그렇다.

내가 기억을 물려받은 것은 8년 전이지만, 그에 관련된 교육은 12년 전인 8살 때부터 받아왔다. 어머님께선 내가 딴 맘을 먹지 못하도록 취한 조치였을 테지만, 당사자인 나는 어린 마음에 겁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손을 내밀어주셨던 분이 카이도 오라버님이셨다. 그전까지 오라버님께 붙였던 아무런 능력도 없는 주제에 나보다 나이만 많은 사람이란 꼬리표를 뗀 것도 그때부터였다. 친구 하나 없던 나와 놀아주셨던 유일한 사람.

8년 전, 렌 오라버님의 성인식이 끝나자 어머님께선 내 배우자 문제로 고민하고 계셨다. 그때, 협박에 가까운 말로 어머님을 몰아붙여 렌 오라버님을 죽임 당하게 만든 건 바로 나였다. 본래라면 렌 오라버님께서 내 배우자가 되셨을 터. 그런 만큼 모처럼 구한 목숨을 소중히 다루셨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카이도 오라버님께선 이런 내 마음을 아실 리 없겠지.


어제는 내 배란주기에 맞춰 정해뒀던 날이다. 그렇기에 난 높은 확률로 카이도 오라버님의 아이를 얻을 것이고, 쌍둥이를 낳아 그 아이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지워줄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이후엔 오라버님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나이 스무 살, 쉰 살까진 30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의 일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그만한 시간을 자유로이 사시도록 풀어드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오라버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즉시, 나는 오라버님의 재능을 회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십 세대를 넘어 이어져온 로이드가의 역사가 훼손될 터. 오라버님에게 항시 감시자를 붙여둘 수밖에 없단 뜻이다.

‘그게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 오라버님께선 그걸로 만족하실까?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기억은 어떡하고?’

물론 기억상실증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결국에는 오라버님을 내 손으로 정리해야만 하는 때가 온다. 그분을 완벽히 풀어드릴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이러든 저러든 난 카이도 오라버님께 완벽한 자유를 드릴 수는 없단 결론이 나온다.

‘앞으로도 당신께 미움 받겠군요.’

그런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어버렸다. 진상을 모르시는 오라버님께선 주어진 생애가 끝날 때까지 나와 로이드가를 원망하시겠지. 앞으로도 영원히 이 마음을 알아주실 리는 없겠지.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것이 나의 선택이니까. 건국 공신가인 로이드가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의 의무이자, 공작위를 계승한 루카 로이드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니까.

앞으로도 영원히, 로이드가의 붉은 피는 흐를 것이다.
한 치의 변함도 없이, 한 방울의 낭비도 없이.
댓글 1
  • No Profile
    도라 09.05.06 19:37 댓글 수정 삭제
    보컬로이드............;;;;;;;;;;
    특이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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