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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새가 날아가는 시간

2009.04.25 22:5704.25

1. 새의 시간
노오란 동그라미. 어둠 속에서 한껏 몸을 감추고 생명을 벗어 던진, 차라리 금빛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눈동자. 내가 잘못을 저지를 때 마다 나는 아버지의 굵은 손에 목덜미를 붙잡혀 기나긴 복도를 질질 끌려갔다. 최후의 종착점이 어딘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매끄러운 복도를 발로 붙잡으려고 바둥거리고 악을 쓰며 몸부림쳤다. 맨발이 복도를 쾅쾅 차고, 도망가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손톱으로 아버지의 손을 할퀴면 더욱 거칠게 붙잡는 손아귀의 힘에 숨이 막혀 윽윽거렸다. 마침내 지옥의 문 같은 서재의 문이 열리면, 나는 형편없이 내동댕이쳐졌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육중한 문이 쿵하고 닫히면 바깥에서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 나는 그때까지 반항하던 힘으로 문으로 내달려가 손으로 때리고 내가 아파서 비명을 지르면서도 문을 걷어찼다.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어요. 눈물마저 줄줄 흘리며 애원해 봐도 아버지는 자비의 끝자락도 비치지 않고 다시 자신의 일로 갔었다.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울다가, 울다가 마침내 목이 쉬어 겁에 질린 얼굴로 서재를 올려다보면. 수 십 개의 눈동자들이 내게로 쏟아졌다. 부리부리한 시선. 거기에 살아있는 생생함 대신 오래전에 얼어붙은 차가운 무기질만 남아 있었다.
생전 살아있었을 때는 자랑이었을 그것들의 부드러운 털과 우아한 몸, 매서운 부리들. 죽어서도 편히 쉴 수 없는 악령 같은 것들. 오로지 저런 가짜가 되기 위해 죽임을 당하고, 살아 있을 때는 겪지 못했을 긴 시간을 존재한다. 그리고 저들을 저런 미이라로 만들어 놓은 게 나의 할아버지였다. 복수를 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들의 시간에서 온기와 노래를 빼앗아간 남자에게 복수를? 이미 재로 사라진 남자에게 손자인 나를 해꼬지 함으로써 자신들의 억울함을 씻고 싶지는 않을까? 오래전에 죽은 시체들과 함께 남겨지는 것은, 내게 크나큰 공포였다. 그 죽은 눈동자.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결코 말할 수 없는 숨소리조차 없는 말라붙은 시선. 차라리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만 있다면 이토록 무서움에 허덕거리지 않아도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동그라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독하리 만큼 텅 빈 허공. 손을 뻗어 애써 붙잡으려 해 봐도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것도, 빠져나가는 것도 없는 존재하지 않는 것. 그럼에도 분명히 보이는 박제된 새들 사이에서 나는 겁에 질려 울었다.
나또한 박제되고 있다. 이, 세상에. 그리고 결국 존재하지 않을 거다. 진열장에 나열된 박제품들과 함께, 빈 자리를 차지한 채 저토록 드라이플라워 같은 눈동자를 하고는 날개짓조차 할 수 없을 거다. 누가 나를 꺼내줘요. 나도 저렇게 되어버릴 것 같아. 이 미친 세계를 박살내버려. 모두, 모두. 가짜 눈, 가짜 날개, 이미 예전에 죽어야 할 몸뚱아리도. 몸집도, 생김새도 모두 다른 저 가짜들이 똑같은 눈을 하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 그리고 더욱 두려운 건. 마침내 나조차 내 눈을 뽑아내고 똑같은 눈을 할 것이라는 것. 나는 엄마가 무서워. 내 진짜 엄마는 어딨어? 저 눈을 얻기 전의 엄마는. 예쁘게 가다듬은 화려한 깃털들이 너무너무 이상해. 엄마의 속살을 모두 파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을까? 나는 아빠가 두려워. 누가 아빠의 날개를 저렇게 고정시켜 놓은 거야? 반쯤 들어올려진 오른쪽 날개. 저 부자연스런 모습. 평생 동안 아빠는 날지 못해. 나는 형이 겁나. 그 뾰족한 부리는 너무너무 아픈데, 한번도 열리지 않아. 억지로 열려고 하면 부러져버릴 것 같아. 그 단단해 보이는 아름다운 부리가. 나는 누나가 싫어.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움켜쥘 것처럼 낚아 챌 준비를 모두 마친 누나는 당장이라도 먹잇감을 잡고 날아갈 것 같아. 하지만 한번도 난 적이 없어. 다만 그 있는 힘껏 펼친 날개로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뿐. 아무리 날개가 아파도, 팔이 아파도. 누나는 그런 걸 느낀 적도, 안 적도 없어.
녹색 숲은 언제 적 얘기일까? 아마도 그건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옛날 옛적의 이야기.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모두 가짜 눈으로 숲을 바라보는 거야. 이 숲은 원래부터 회색. 태양조차 가릴 만큼 우거질 대로 우거진 시멘트의 가지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는 건물들의 밀림. 이 숨 막히는 숲 속에 새들이 너무나 많아. 서로 닿으면 부서질 까봐, 망가질 까봐 ‘떨어져’라고 소리치는 게 지저귐. 새의 노랫소리. 떨어져, 떨어져, 떨어져. 이 기묘한 합창에 우연히 숲 속에 들어온 누군가가 새들을 놀라게 해도 푸드득거리는 움직임은 없어. 여기는 아름다운 숲. 다양한 빛깔들로 알록달록 칠해져 있지만 손톱으로 긁기만 해도 보이는 쇠의 번뜩임. 이 곳의 새들이 하늘을 날 때는, 부서질 때. 산산조각 나서 형체조차 없이 엉망이 될 때. 새가 날아가는 시간은 찰나. 이것은 당연한 사실. 그리고 뒤따르는 안식은 죽음. 새의 시간은 끝나 버렸어. 알아들어? 새의 시간은 끝나 버렸어.

2. 화목한, 더없이 화목한
“아씨, 짜증나 죽겠어. 엄마가 난 어리다면서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컴퓨터를 안 바꿔준다잖아!”
고수머리의 퍽 붙임성 있어 보이는 소년이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속이 타는 지 옆에 있는 물 컵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는 소리도 생생하게 들려왔다. 방의 한 쪽 벽 크기만 한 화면에서 실제 크기로 보이는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나또한 목이 말라왔다. 책상위에 있는 여러 개의 색색깔의 버튼 중에서 노란색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도브! 물 한 컵만 보내줘!”
그 버튼의 옆쪽에 내장된 마이크에서 네라는 대답이 들리기 무섭게 책상에 커다란 쟁반 하나 정도의 넓이가 열렸다. 그리고 얼음까지 띄운 유리잔에 물이 담겨 올라왔다. 내가 유리잔에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있던 닐이 얼핏 짓궂게 보이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도브는 언제 바꾼데? 기계형 로봇을 쓰는 집은 너희 집 밖에 없을 거다. 뭐, 그렇게 치자면 인간형 로봇 B형 모델을 쓰는 우리 집도 할 말은 없지만. 그거야 아버지가 실직해서 연금으로 살아가니까 그런 거고. 하지만 너희 집은 부자면서도 왜 그런데?”
골동품 가게에서도 안 받을 걸. 그런 구식. 킬킬거리며 땅에 내려놓은 한쪽다리를 덜덜 떠는 닐에게 한탄조로 말했다.
“야야, 아픈 구석 찌르지 마라. 알잖아. 우리 아빠, 인간형 로봇은 질색하시는 거. 도브도 살 때 어머니가 거의 빌어서 샀다니까. 그것도 누나가 우리 집만 로봇도 없다고 자기가 따돌림 당한다고 울지 않았으면 도브도 안 사셨을 걸. 워낙 옛날 분이라 로봇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하시는 걸. 나도 인간형 로봇 쓰고 싶다고. 내 컴퓨터랑 네 컴퓨터, 우리 반에서 제일 고물일 걸. 입체 영상이 안 되는 컴퓨터라니, 정말.”
지난번의 일이 생각나자 더욱 억울해졌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검은 테 안경을 쓴, 은근히 좋아하고 있던 에밀리가 방긋방긋 웃으며 내게 영상대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C.S(Cyber school)에서 레이라만큼은 아니지만 남몰래 에밀리를 좋아하는 애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왠지 어깨에 조금 힘이 들어갔던 것 까지 기억하고 있다. 빨간색 머리띠를 한 에밀리는 내게 안드로메이드 약혼식을 올리지 않겠냐고 물어왔었다. 안드로메이드-인간형 로봇-들로 소꿉놀이를 하는 게 TV에서 방영된 이후로 유행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몇몇 아이들이 그렇게 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걸 에밀리가 내게 말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가슴이 뻐근했다. 보통 서로 사귀고 있는 아이들끼리 안드로메이드들을 약혼시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안드로메이드가 없으면 말짱 꽝. 고철이 되어도 놀라지 않을 기계형 로봇 도브 밖에 없는 나로서는 에밀리에게 그러자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에밀리는 조금 놀란 듯, 처음보다 쌀쌀해진 목소리로 내 거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계속 무시되고 있다. 스리슬쩍 스며드는 우울함에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닐이 말했다.
“앗, 나 이만 학원에 접속해야 해! 접속 끊을게!”
“아, 그래.”
순식간에 닐의 모습과 닐의 방의 풍경이 사라지고 배경화면으로 둔 가족사진이 보였다. 화면 오른쪽 구석에 있는 시계를 살피자 3:34. 학원은 8:00에 있으니 그 때 접속하면 그만이다. 무엇을 할까. C.S의 오전 수업시간이 끝나고 무엇을 하기로 생각했던 걸까. 게임은 하기 귀찮다. 향기도 촉각도 모두 생생히 느껴지는 어드벤처 게임 ‘ALICE’를 닐이 추천해 줬지만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새로운 세계, 색다른 모험이라고 너나 나나 떠들어대지만 모두 똑같았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닐과 함께 이야기 했던 시간은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다. 일단 상대방이 접속을 끊어버리면 여기서 내가 아무리 고함을 치고 데굴데굴 굴러도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상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피할 길도 없이 닥치는 허무함의 물결에 삼켜져 버렸다. 멍하니 시선을 돌리자 시선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빽빽하게 채우는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엄마는 패션 잡지의 모델처럼 웃고 계셨다. 밝고 화사한 옷차림의 엄마 옆에, 마치 엄마의 소녀 적 시절을 보여주는 듯 그녀를 똑 닮은 누나가 원피스를 입고 엄마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엄마의 어깨 위로 가볍게 손을 얹은 채, 아빠는 중후한 정장차림으로 깔끔한 모습으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형은 그런 아빠와 조금 거리를 두고 얼굴을 찡그리듯 웃고 있었다. 나는 아빠와 형 사이에서 어색하게 바보같이 서 있었다. 사진을 보고 있는 내 입에서 나도 알아차리지 못한 새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웃기고 있네.”
저 사진을 찍기 전에 누나는 엄마한테 굉장히 혼났다. 엄마는 누나가 너무나 ‘문란’하다고 비난했고 누나는 엄마가 구식이라고 소리쳤다. 사이버 섹스는 몸에 티도 안 난다고요! 임신 걱정도 없으니 걱정 마세요! 요즘 누가 엄마처럼 굴어요? 내 친구 엄마는 엄마처럼 고지식하게 안 해요! 엄마와 나는 달라요! 세대가 다르단 말이에요! 엄마도 매우 화가 났던 것 같았다. 나는 내 딸이 창녀처럼 이 남자, 저 남자랑 자는 꼴 볼 수 없어! 누나는 눈을 휙 치켜뜨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창녀라니요!! 엄마! 난 내 친구들보다 훨-씬 덜한 편이라구요! 내가 돈 받고 몸 파는 창녀에요? 우린 서로 즐기고 깔끔하게 끝낼 뿐이에요! 지금, 딸보고 창녀라고 하는 거 에요? 엄마 제정신이에요?! 엄만 왜 이렇게 멍청하게 굴어요!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거 에요?! 고루하게! 엄마와 누나의 말다툼을 지켜보고 있던 아빠가 한 마디 했다. 그만해라. 이든이 듣고 있잖느냐. 이브, 넌 엄마한테 공손하게 굴어라. 당신도 이브 하는 일에 너무 간섭하지 말고. 지금 이 모습을 남기고 싶은 건 아니겠지, 이브.
누나는 흥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보고 얄밉게 웃었다. 이든, 너 창녀라는 단어 아니? 누나의 말이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누나와 엄마가 싸우거나 말거나 딴청을 피우던 형이 말했다. 이브, 입 다물어. 이든한테 이상한 거 가르쳐 주지 마. 누나는 빼죽거리며 형에게 쏘아붙였다. 흐흥, 이런 꼬맹이도 알건 다 안다고. 그렇지, 이든? 누나와 형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자 나는 심한 갈등에 빠졌었다. 사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답하자니 형이 날 싫어할 것 같고, 아니라고 대답하자니 누나가 비웃을 것 같았다. 결국 울상이 되어 쩔쩔매고 있자, 아빠가 우리를 불렀다. 어서와라. 사진을 찍어야지. 엄마와 누나는 언제 싸웠냐는 듯 다정하게 팔짱을 꼈고, 아빠는 엄마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좀 더 웃도록 해라. 다른 사람들이 네 표정을 보면 뭐라고 그러겠니, 이든. 누나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예쁘게 찍힐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이리 저리 미소지어보면서 토를 달았다. 아, 촌스러워. 요즘 누가 가족사진을 찍는다구. 형은 앞만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 약속 있어, 빨리 끝내요. 엄마가 립스틱을 덧칠하는 것처럼 미소를 더욱 짙게 하며 말했다. 자, 찍는구나. 다들 웃어라. 찰칵.
아름다운 엄마는 패션 잡지의 모델처럼 웃고 계셨다. 밝고 화사한 옷차림의 엄마 옆에, 마치 엄마의 소녀 적 시절을 보여주는 듯 그녀를 똑 닮은 누나가 원피스를 입고 엄마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엄마의 어깨 위로 가볍게 손을 얹은 채, 아빠는 중후한 정장차림으로 깔끔한 모습으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형은 그런 아빠와 조금 거리를 두고 얼굴을 찡그리듯 웃고 있었다. 나는 아빠와 형 사이에서 어색하게 바보같이 서 있었다. 우스꽝스러워서 헛웃음조차 나지 않는 가족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마침내 의자에서 일어났다. 문 밖으로 나가면서 가만히 읊조렸다.
“종료.”
팟. 등 뒤에서 나는 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모든 화면이 블랙아웃. 검게 칠해져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수 없겠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저기는 누나 방, 여기는 형의 방. 저 쪽은 부모님방. 어느 것 하나 열린 게 없는 문들을 흘끔흘끔 훔쳐보면서 집 밖으로 걸음을 밀었다. 나를 위해 열린 방은 내 방 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내 방 말고도 하나 정도는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3. 하늘에서 내려온
그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향기였다. 약간 꺼칠꺼칠한가 하면 더없이 포근해서 그냥 그 향에 묻혀버리고 싶기도 했다. 비가 올 때면 물기마저 깃들어 진해진 내음으로 내 몸을 가득 채우려고 깊게 깊게 숨을 쉰다. 엄마의 수많은 향수들 중에서도 이처럼 상쾌한 향기는 없었다. 우리 집에서 가장 특별한 게 뭐라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이 향기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나 말고는 아무도 이 정원에 관심이 없었다. 아빠는 날이 새도 다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정보들을 가리고 선택하느라 바빴고, 엄마는 너무 할 일이 많아서 가끔 엄마 컴퓨터로 내 컴퓨터에 숙제 하란 말을 건넬 때는 말고는, 중요한 사람들이랑 이야기해야 했다. 형은 언제나 방문을 꼭꼭 닫아둔 채 혼자 무얼 하거나, 약속이 있다며 집밖으로 나가버렸다. 누나는 가끔 정원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건 언제나 ‘저 흉물스러운 걸 언제쯤 없앨 수 있을까.’로 끝나버렸다.
난 곧 잘 잊혀진 아이가 되곤 했다. 하지만 이 집에서 잊혀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분명 아빠가 월급을 지불하면서도, 있는지도 잊어버렸을 정원사 할아버지야 말로 진정한 잊혀진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고용주가 이처럼 무관심하면 조금쯤 쉬어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텐데, 내가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울 때마다 정원에 내려오면 나무를 다듬는 정원사 할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얼굴에 굵게 굵게 주름진 곡선. 주름이 생길 때 마다 쓰러질 듯 호들갑을 피우며 주름을 없애러 가는 엄마와 달리 정원사 할아버지는 자신의 얼굴을 가득 메우는 자글자글한 주름들이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번은 내가 할아버지가 괴물처럼 보인다고 하니, 자신이 살아온 세월들이 모두 주름에 스며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었다.
“정원사 할아버지.”
아니니 다를까. 키 작은 관상용 나무들에게 가위질을 하고 있던 정원사 할아버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찌그러진 공 같은 못생긴 얼굴로 히죽 웃었다. 그렇게 이상한 얼굴에도 나는 마냥 그 웃음이 좋아서 덩달아 활짝 웃곤 했다. 걷어 올린 자신의 소매를 더욱 올리며 기다렸다는 듯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꼬마 도련님 아니십니까. 요새 한동안 안 나온다고 했더니 무얼 하고 있었나요?”
사실, 아무것도 제대로 한 게 없었지만 괜히 허리를 펴며 으쓱거렸다.
“공부.”
다 안다는 듯 다시금 씨익 웃는 큰 곡선에 머리를 긁적거리고 말았다. 부끄러워진 마음을 감추려고 진한 분홍빛을 띤 꽃을 가리켰다.
“아, 또 꽃 피었네.”
마치 스스로가 그 꽃을 피운 나무라도 되는 것처럼, 정원사 할아버지는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목련이라는 꽃입니다. 아주 탐스럽죠? 요새는 나무를 원체 보기 힘들어서, 이 도시를 통틀어서 목련을 볼 수 있는 곳은 여기 밖에 없을 겁니다. 며칠만 더 있으면 목련 향기가 가득 찰 걸요.”
흙투성이 손등. 그 손등마저 쭈글쭈글하다. 정원사 할아버지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너무 열심히 안 가꿔도 돼. 어차피 이 집에서 정원을 보러오는 건 나 밖에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까요. 이 정원이 푸르게 유지되는 게 보기 좋지 않나요?”
잔잔한 울림마저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감탄해버렸다. 정원사 할아버지는 정말 이 정원을 좋아하고 있구나. 정작 우리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이 정원을 이토록 사랑할 수 있다니. 내가 좋아하는 건 나무가 품은 독특한 그 향기뿐이었다. 사실, 그 향기를 통해서 생각되는 정원사 할아버지를 더 좋아하는 거니까. 왠지 쑥스러워져서 목련을 올려다보았다. 진한 자주를 곱게 차려 입은 앙다문 꽃송이.
“잘 모르겠어. 누나는 정원은 너무 유치하다고 홀로그램 공중 정원으로 바꿔 달라던데.”
홀로그램 공중 정원이라면 나도 보고 싶었다. 홀로그램 공중 정원을 가지고 있는 디트리히는 없는 게 없는 정원이라며, 진짜 정원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홀로그램 공중 정원만큼은 되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했었다. 나는 허풍이라며 약을 올렸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는 그 공중 정원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 삐친 디트리히에게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홀로그램 공중 정원을 보여 달라고 해도 보여주지 않을 성 싶어 포기해버렸으니까. 하지만 정원사 할아버지는 이 정원이야 말로 자기가 만들어낸 정원들 중 가장 멋진 정원이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아가씨도 이 초록 친구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너그러운지, 얼마나 새로움으로 가득 차있는 지 아신다면. 아마 놀라실 겁니다.”
그 자신만만함에 매혹되어 정원을 살폈다. 색깔로 표현하면 얼마나 싱거울까. 초록. 그게 끝 일 테니까. 하지만 같은 초록이라고 말할 수 있어도 같은 나무에서 난 잎사귀들마저 똑같은 잎사귀가 없는 걸. 각자가 안고 있는 색의 감정과, 이슬의 숫자도. 모두 달랐다. 그리고 목련. 우아한 자주로 활짝 인사하기 위해 고개를 내민 선명함. 화면으로는 볼 수 없는 눈물 날 만큼 선명한. 저 존재.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정원사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어깨를 붙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에?”
마치 비밀스런 장난을 저지르는 악동처럼 정원사 할아버지는 눈을 찡긋하며-실상 내겐 할아버지의 얼굴이 더 구겨져 보였지만-과장스럽게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정원사 할아버지의 남겨진 걸음을 밟으며 따라갔다. 노인과 아이가 멈춘 곳은 잎이 무성한 나무 앞이었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비치는 햇살과의 키스란. 참으로 달콤한 것이었다. 정원사 할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설명도 해주지 않고 나무를 타오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할아버지가 떨어질 것 같아 겁에 질린 나는 새된 소리를 뽑아냈다.
“위험해! 할아버지! 내려 와! 할아버지!”
지상에 남겨진 나와 달리, 오히려 여유로워 보이는 느긋한 태도로 정원사 할아버지는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나는 기가 막혀서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 정원사 할아버지가 내려오길 바랬지만 무엇을 하는지 할아버지는 조금씩 더 올라갈 뿐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막막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뭇잎에 가려, 눈부시게 부서지는 햇빛에 가려 할아버지를 보기 어려웠다. 저대로 하늘까지 가버리는 걸까. 나를 두고, 이 정원마저 내버려 두고. 어쩌면 할아버지라면 하늘마저 구름 정원으로 바꿔버릴 지도 몰라. 정말 그러면 어쩌지. 나는 어쩌지. 마음이 다급해지자 목소리가 끽끽거렸다.
“할아버지! 정원사 할아버지!”
내 목소리가 닿았는지, 아니면 하려던 바를 이루었는지 할아버지가 천천히 나무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내 속이 바짝 탈정도로 아주 느린 속도였지만 혹시라도 할아버지가 떨어지실 까봐 차마 재촉도 하지 못하고 목이 빠져라 나무만 올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정원사 할아버지의 발이 땅과 감격적인 재회를 하자 안도감에 가슴이 덜컹 했다.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설명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할아버지가 손에 소중하게 쥐고 있던 것을 보여주었다. 하늘기운이 채 사라지지 않은 넓은 웃음과, 뺙뺙 가늘지만 또박또박하게 우는 보드라운 어떤 것.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눈동자를 들어 덜 자란 날개를 파닥파닥. 할아버지가 살그머니 어느새 내민 내 두 손에 하늘에서 내려 온 ‘봄’을 건네주었다. 코끝이 먹먹할 정도의 온기를 가진 ‘봄’과 눈을 마주쳤다.
밤의 호수처럼 일렁이는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촉촉한 눈동자는 따스하게, 한가득 부드럽게, 깊이를 가지고 검게. 검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애정이 솟아나 견딜 수 없을 만큼 맑은 눈동자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죽은 사람조차 살릴 수 있다는 생명수도 이 눈동자가 주는 생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눈물이 났다. 두 손에 가득 담긴 온기가, 부드러운 솜털의 간지러움이, 작고 아름다운 생명의 열기에. 난생 처음으로 느껴 보는 것 같은 심장을 녹일 듯한 따뜻함에 목이 메여서. 평생을 겨울에서만 살다가 우연히, 아주 우연히 봄을 만난 사람처럼 당황하고, 놀라고, 응,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커다란 손이 머리를 어루만졌다.
“새라고 부르면 됩니다. 아기 새.”
아아. 나는 내 손보다 작은 새와 함께 ‘첫 봄’을 맞이했다.

4. 네가 있어서
집안은 분주했다. 평소에는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둥지를 틀고 있느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기도 힘들 텐데 가족들 모두가 바빠서 행동을 서두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웬만한 일이면 컴퓨터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그칠 것이지만 일년에 몇 번 없는 온 가족이 참석해야 하는 가족단위의 파티였다. 새 것처럼 깨끗한 소년용 정장을 꺼내 대충대충 입고 있으려니 언젠가 닐이 내게 한 말이 생각났다. 넌 상류층이잖아. 상류층? 나는 의아해서 반문했다. 상류층, 중류층 그런 걸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그리고 닐은 아주 훌륭하게 날 이해시켰다. 닐의 부모님의 벌어오는 한달 생활비를 내 한달 교육비로 모두 쓰는 게, 상류층이라고 했다. 엄마가 꼭 하라고 건네준 빨간 리본넥타이는 정말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 걸 누가 하고 싶어 하냐고. 개그프로그램에 나오는 개그맨도 아니고, 이 시뻘건 리본을 목에 달고 다른 사람들 앞에 설 생각을 하니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잠시 고민하다가 끔찍한 리본넥타이를 침대 아래에 쑤셔 넣었다.
똑똑. 이미 열린 문인데도, 형은 비스듬히 문에 기대어 가볍게 문짝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나는 씨익 웃고 말았다. 형도 내 미소를 이해했는지 멋쩍게 입술 끝을 슬쩍 들어올렸다가 놨다. 형도 엄마가 건네 준 나비넥타이를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답답하다고 셔츠의 윗단추를 마저 잠그지 않은 채였다. 분명 엄마가 보면 난리법석을 떨겠지만 형은 그것조차 아무렇지 않은지 정장을 입어도 가장 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웃을 때 이상하게 찡그리듯 웃는 형이지만 멋진 형이었다. 하지만 형과의 거리도 쉽게 좁혀지지 않는 건. 조금 답답해서 나도 단추 하나를 풀어버렸다. 형은 언제나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일까.
형제는 아무런 말도 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침묵. 침묵. 침묵. 이제는 익숙해 질만도 하건만 미처 다 뱉어내지 못한 불쾌함이 드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벨형.”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겨우 깨어났는지 형은 한 템포 늦게 대답했다.
“응?”
무슨 말을 하지? 형과 나 사이에서 무슨 대화를 나눌 수 있지? 말을 꺼내 놓고 나니,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미친 듯이 뇌를 혹사시켜 간신히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이번에 우리 집에서 파티를 열면, 다음에는 누구 집에서 열어?”
“글쎄다. 어머니한테 물어보렴.”
먼저 갈게. 짤막한 대화를 끝내고 형은 이미 파티장 저 구석에 모여 앉아 형을 향해 손짓하는 친구들에게로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형의 뒷모습을 보면서 속이 메슥거렸다. 뭘 바란 거야. 형에게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찬 새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을 만큼 새는 굉장히 드문 동물이 되어버렸으니까. 바보. 멍청이 같으니. 병신같이 어느 집에서 파티를 열지를 묻다니. 누구 집에서 열던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이든, 너 뭐하니? 문 가로 막고 서서?”
애써 얼굴을 펴며 돌아서자 리본넥타이를 한 디트리히가 있었다. 오, 맙소사. 정말 리본넥타이를 한 친구가 있다니. 내 얼굴이 겨우 겨우 웃음을 참느라 기묘하게 변해가자 디트리히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웃지마! 나라고 좋아서 한거 아냐!”
“푸하하하!! 뭐야! 정말 꼴 죽인-”
“그래, 그럼 디트리히. 넌 이든이랑 놀고 있도록 해라.”
디트리히의 뒤에 갑자기 나타난 디트리히 아버지의 등장에 내가 황급히 말을 삼켰지만 그걸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밝게 웃으며 인사를 드렸지만 디트리히 아버지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어른들끼리 모인 곳으로 가버렸다. 왠지 억울한 기분에 내가 물었다.
“혹시 그 리본넥타이, 네 아버지가 하라고 하신 거니.”
디트리히가 자신의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난 왜 이렇게 오늘 하루가 완벽한지 고민하고 싶었다.
“네 아버지도 우리 엄마랑 취향이 비슷하신 가 보다. 우리 엄마도 어찌나 그 리본넥타이를 하라고 강조하는지. 나 안하고 있는 거 들키면 무지 꼬집힐걸.”
“지금 내게 어머니가 있다는 걸 자랑하고 싶은 거니?”
삐딱한 디트리히의 가시 돋힌 말에 아차 싶었다. 디트리히에게는 어머니가 없었다. 그건 디트리히가 고아란 소리가 아니다. 디트리히 아버지는 결혼이나 배우자를 맞이하는 걸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여겼다. 그래도 자신의 뒤를 이어줄 아이가 필요해서, 거금을 주고 머리 좋고 아름다운 여성의 난자를 샀다고 했다. 디트리히 아버지는 어머니 대신에 최신형 안드로메이드를 사서 디트리히를 보살피게 했지만, 디트리히는 종종 내가 엄마 이야기를 하면 신경질을 부리고는 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디트리히의 콤플렉스를 건드린 것이었다. 솔직한 내 심정으로는 난 오히려 디트리히의 안드로메이드가 엄마보다 더 낫다고 생각되었다. 안드로메이드가 디트리히를 위해 해주는 것들을 들으면, 나야말로 어디서 버려진 걸 주워온 게 아닐까 생각되니까.
“아냐.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변명을 끝내기도 전에 억지로 올린 콧소리가 말을 가로막았다.
“디이이트으리이이히이이- 오랜만이야!”
어쩐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싶더니 그 주인공은 레이라였다. 쾌활하고 명랑하지만 어쩐지 난 도저히 좋아지지가 않았다. 물론 레이라가 왔으면- 에밀리도 같이 있을 것이다. 굳이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에밀리는 레이라의 옆에 서 있었다. 레이라가 디트리히를 껴안자 디트리히는 순간 움찔했다. 디트리히랑 레이라가 뭘 하던,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에밀리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디트리히랑 레이라를 바라보면서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에밀리가 내 인사에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머쓱해진 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뒤에 숨겨버렸다. 레이라의 품에서 간신히 벗어난 디트리히가 에밀리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왔네.”
“매일 C.S(Cyber School)에서 보면서 새삼스럽게.”
그렇긴 하군. 디트리히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대화에서 자신이 소외된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갑자기 내게 화살을 돌려 레이라가 물었다.
“안녕, 이든. 네 귀여운 도브는 잘 있니.”
언제부터 도브가 내 귀여운 도브가 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대답을 재촉하는 레이라의 눈빛에 눌려 엉성하게 말했다.
“아, 뭐 항상 그렇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레이라가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디트리히가 끼어들었다.
“간만에 이든의 집에 온 거니까, 한번 보러 가는 건 어때? 그 구-식-정-원.”
예전에 내가 자기 집에 있는 홀로그램 정원에 대해 빈정거린 걸 기억해냈는지 디트리히는 구식정원이라는 단어만 유난히 똑똑한 발음으로 말을 마쳤다. 구식정원이란 말에 내 얼굴이 확 붉어졌다. 에밀리가 안드로메이드도 없고, 정원도 홀로그램 정원이 아니라 이제 아무도 잘 만들지 않는 구식 정원이 있는 애라고 더 싫어하면 어쩌지. 다행히도 레이라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당장 가보자고 계단을 내려갔고 에밀리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레이라를 뒤따랐다. 내가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에밀리가 내려간 계단을 보고 있자 디트리히가 병신이라고 중얼거리며 나를 스쳐 지나가 계단을 향해 갔다. 곧 그 병신이 나를 향한 말인 걸 알아채고 바쁘게 디트리히를 쫒아갔다. 이게 누구보고 병신이라는 거야!
디트리히를 향한 분노는 정원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에밀리를 보자 사라져버렸다. 물론 에밀리 곁에 레이라와 디트리히도 있었지만 별 문제 있나. 디트리히는 세상에 이런 멍청한 사람도 있구나 하는 투로 말했다.
“너네 집 정원이니까 네가 제일 잘 알지? 자, 안내해줘.”
명령조인 디트리히의 말이 평소에는 거슬렸을 법도 한데 우리 집 정원이니까 내가 제일 잘 안다는 그 말에 마음이 풀려 헤실거렸다. 정원사 할아버지를 만나러 정원에 자주 내려오길 잘했지. 나라면 이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에밀리에게 알려주고 선망의 눈길을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에밀리도 내가 안드로메이드가 없어도 이토록 멋진 정원이 있다는 걸 알고 다시 방긋 웃어주겠지. 기분 좋은 상상에 들떠 정원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밤을 더욱 사늘하게 해주는 나무들의 향이 내 기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냄새를 맡아봐. 내 말에 세 아이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어때?
“특이한데.”
디트리히도 나무 내음은 처음 맡아보는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데 집중했다. 레이라는 자기 향수보다 덜 진한 향이라며 향수로 만들어도 뿌리나 마나겠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에밀리는 레이라와 달리 나무가 마음에 들었는지 가만히 숨을 내쉬고, 마시고 있었다. 어두운 정원에 뿌려지는 달빛모래 아래의 에밀리는 가슴이 설레 일 만큼 예뻤다. 목련 꽃을 보여주고 나자, 문득 아기 새를 에밀리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잠깐, 정원사 아저씨가 어느 나무에서 아기 새를 데려왔더라. 괜히 전혀 다른 곳으로 가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먼저 가서 확인하고, 그 나무로 아이들을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잠깐만 여기 있어 봐! 내가 멋진 걸 보여줄 테니까!”
그리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마구 뛰었다. 빨리, 빨리 에밀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눈과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저절로 미소 지어지는 새를. 에밀리가 아기 새와 시선을 맞추고 함께 방긋이 웃는다면 얼마나 멋질까. 디트리히의 홀로그램 정원에도 아기 새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 어디였더라? 쌕쌕거리는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난 달 밖에 보지 않는 정원의 어둠 속에서 내 머리를 다시 한번 세게 쥐어박고 싶었다. 방향도 제대로 보지 않고 성급한 마음에 아예 정반대로 뛰어버린 것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찾으러 가야겠지.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려는데 가까운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원 탐험을 나선 우리들 외에 다른 사람들이 정원을 찾아 왔다는 게 놀라웠다. 누굴까. 호기심에 그 인기척을 찾아 몇 걸음 옮기기 무섭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미쳤구나.”
믿을 수 없다는 듯, 큰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진저리 치는 음색에 그만 꼼짝할 수 없었다. 생각 외로 목소리는 가까운데서 들려왔다. 뭔가 애매한 상황에 빠져든 것 같아 소리 없이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가만히 뒷걸음치자 무얼 밟았는지 가지 같은 것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서 기겁했다. 다행히 그 쪽에선 알아채지 못했는지 다른 이가 말을 받았다.
“그래. 미쳤어. 미치지 않았다고 말 못하지. 하지만 그러면 너는? 너는! 그녀와 약혼을 한다고? 어떻게 감히 네가 그럴 수 있어! 날 사랑한다며! 날 좋아한다며!”
불안감이 심장을 감싸고 두근두근 거렸다. 조금이라도 놀라버리면 심장을 터뜨려버리겠다는 듯이. 어쩌지. 어떻게 하면 여기서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지. 몸이 까딱도 하지 않았다.
“이봐, 정신 차려! 우린 섹스프렌드였을 뿐이야! 아벨!”
투둑. 심장이 덜컹거렸다. 왜 저기서 우리 형 이름이 나오는 거지? 혼란에 빠져 어지러움마저 느낄 때, 형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온 몸을 울렸다.
“난 널 사랑해! 미쳤다고? 그래! 미쳤어! 다시 한번 말해줄까? 난 널 사랑해!”
처음으로 들어보는 형의 고함. 말 수가 적고 조용하던 형은 이렇게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이처럼 애타게, 애달프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더없이 크게, 커다랗게. 온 몸이 덜덜 떨리게. 나는 고막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지, 진정해. 아벨. 지금 너무 감정적이야, 너. 머리를 좀 식혀.”
“머리를 식히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형은 이런 걸 꾹꾹 누르고 있었던 걸까. 이렇게 화산처럼 폭발하는 뜨겁고 응어리진 것들을. 아주 힘겹게 악에 받혀 뱉어내는 형의 목소리가 다리에 힘마저 빼앗아 갔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가만가만 들려왔다. 상대는 차마 보기 어렵다는 듯 쥐어짜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벨, 제발. 이해해줘.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나와 결혼해. 그러면 되잖아? 아이가 필요한 거라면, 남자들끼리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잖아!”
할 수 있잖아. 형은 애원하고 있었다. 너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하지만 상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뼈 속까지 얼어버릴 정도로 싸늘하게 말을 뱉었다.
“후우. 아벨. 난 남자랑 결혼할 생각은 없어. 물론 넌 최고의 섹스파트너였지만, 난 내 아이에게 남자인 어머니를 줄 생각이 전혀 없어. 서로 즐거웠잖아? 좋게 끝내자고. 난 너와 여전히 좋은 친구로 남고 싶다.”
아하. 형이 알았다는 듯 킬킬거렸다.
“그러니까- 뭐야. 나와 즐기는 건 좋지만 결혼은 싫다는 거지? 하하하, 좋은 친구로 남고 싶다라. 서로 즐거웠다고? 응, 좋은 친구- 좋지-. 아내가 질리면 친구를 안고, 친구가 질리면 다시 아내를 안을 건가? 정말 좋은 친구가 되겠구나, 우리들.”
짜악.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에 형의 고개가 홱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시뻘건 손자국이 형의 얼굴에 남아 점점 붉게 번졌다.
“씨발, 꺼져버려. 좋은 친구? 하, 그 따위 엿 먹으라 그래. 개자식. 꺼져버려! 내 말 안 들려?!”
형이 벌건 한쪽 뺨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소리쳤다. 악을 썼다. 상대는, 달빛 아래 훤히 드러난 상대는 주춤주춤 하다가 황급히 도망쳤다. 마치 형이 뒤따라 와 그를 붙잡을 것처럼. 하지만 그의 망상과 달리 형은 주저앉아 꼼짝할 줄을 몰랐다. 거친 숨소리가 곧 눈물에 번져 뚝뚝 떨어졌다. 허전한 웃음소리가 들썩들썩 형의 몸을 울리더니 남은 힘을 모두 끌어 모아 형은 소리쳤다.
“엿보기가 취미인가 보지? 당장 나와!”
난 울고 싶었다. 형은 울음을 가까스로 억눌러가며 숨어있는 내게 나오라고 소리쳤다. 나와, 나와, 나와!!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나는 울면서, 숨넘어가게 울면서 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달이 냉정하게 내 모습을 비추자 형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굳어갔다. 지옥을 목격한 사람처럼, 끔찍하게 경직되어갔다. 형은 억지로 쉬어지지 않는 호흡을 내는 것처럼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물어왔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엉. 나는 대답도 못하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줘요. 형의 표정이 참혹하게 변해갔다. 일그러지는 그 얼굴에 울음이 더 났다.
“...돌아가.”
형이 머리를 감싸 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서, 난 형을 껴안아주고 싶었지만 내가 다가서자마자 형이 비명을 질렀다.
“돌아가!! 돌아가라고 하잖아!!!”
그 소리에 억지로 떠밀려 으허엉. 울면서, 울면서 나는 형을 두고 달렸다. 왜 울고 있는지, 왜 형이 우는 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나는 형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렸다가 발을 헛디뎌 굴렀다. 흙냄새. 좀처럼 맡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 냄새가 내 온몸을 감싸 안았다. 정원의 밤은 아직 겨울의 옷자락이 채 물러나지 않았는지 냉기어린 땅이 온 몸에 소름이 돋게 했다. 형은 어디로 갔을까.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을까. 나는 어디로 가야할까. 그제 서야 형의 눈물과 에밀리의 얼굴이 겹쳐졌다. 하지만 어디로도 갈 수가 없었다. 그래. 차라리 여기서 죽어버리자. 절망감에 사로잡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공 달의 환상적인 빛이 몸에 닿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형은 날 싫어할 거야. 에밀리도 날 싫어할 거야. 이미 모두 파티장으로 돌아갔겠지. 그토록 오래 기다리게 하고서는 난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모두가 날 싫어해. 날 숨겨줄 어둠이 필요해. 도망갈 곳이 필요해. 차라리 죽어버리기를 원해. 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아. 눈물이 흘러 부드러운 흙 사이로 떨어졌다. 마침내 손발이 꽁꽁 언 것처럼 제대로 펴지도 쥐지도 못할 때 공포에 질려 누군가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멈칫해버렸다. 누구를 부르지? 누구를? 엄마? 아빠? 형? 누나? 내가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나 많은 데, 그 누구도 차마 부를 수가 없었다. 별조차 보이지 않는 밤이 녹아내린 하늘에, 가짜 달이 박혀있었다. 죽어버린 저 눈동자. 불투명한 죽음의 그림자가 지쳐 말라붙은 무서운 시선.
“여기서 뭘 하고 계시나요? 취침시간이 넘었습니다, 이든님.”
가까스로 고개를 돌리자 도브가 달빛을 등지고 낮고 둔탁한 윙소리를 내며 있었다. 고물, 고철. 당장 쓰레기통에 내던져져도 아무렇지 않을 나의 로봇. 지긋지긋해. 언제쯤 나는 안드로메이드를 가질 수 있는 거지? 있잖아, 도브. 난 정말 네가 지겨워. 네가 있어서 엄마는 날 깨워주러 내 방에 오지 않는 거야. 네가 있어서 형은 나와 놀아주지 않은 거야. 네가 있어서 아빠는 날 신경 쓰지 않는 거야. 뭐든지 네가 해줄 거라고 생각하니까. 네가 있어서. 네가 있어서.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희부연 시체로 만들어진 달빛과, 끔찍하기 짝이 없는 꼴통 로봇. 도브.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도브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내게 다시 한번 말했다.
“여기는 침대가 아닙니다, 이든님. 침대로 가서 주무세요. 이든님. 침대로 가서 주무세요.”
정말.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5. 사과하자
여기가 어디지. 내가 있는 곳에 대한 의문이 미약하게 싹을 피웠을 때, 겨우 실눈을 뜰 수 있었다.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것도 힘이 들어 간신히 눈을 뜨자 익숙한 내 방의 모습이 들어왔다. 도브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플 때 마다 간호를 해주던 도브를 부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자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식식거리는 바짝 메마른 호흡만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타오르는 갈증에 괴로웠다. 물이 간절히 마시고 싶었다.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이 무거운 족쇄처럼 느껴졌다. 더워. 더워. 난 죽을 거야. 이렇게 죽어버릴 거야. 그렇게 생각되자 눈물이 배어나왔다.
“어? 깼어?”
사람의 목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서 들려오는 거지. 그러자 장난스런 눈매를 가진 친구의 얼굴이 불쑥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닐. 아아, 맙소사. 닐. 닐은 안심했다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짓고서는 재잘거렸다.
“오늘 아침에 네가 C.S에 안 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접속은 안 되지, 결국 네 엄마가 날 싫어하는 데도 찾아 올 수밖에 없게 만들다니. 이 미련퉁이야. 감기에 걸려 죽으려고 땅 위에 드러눕냐? 열이 39도 7부라니까, 괜히 일어나려 하지 말고 누워 있어. 응? 뭐 할 말 있어?”
점점이 말을 이었다.
“므-므-”
닐은 내 말을 해독하기 위해 잠시 고심하다가 물 한잔을 들고 왔다. 그리고 손끝으로 물 컵을 가리키기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은 베게 위로 흘리고, 반은 입 안에 넣어진 물. 어깨가 목덜미가 축축해져도 너무나 달게 느껴지는 물에 살아있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도브는 자암깐 할 일이 있어서 불려나갔어. 에밀리랑 레이라가 네 안부 묻더라. 빨리 나으라고 전해 달래. 짜식, 좋겠다.”
키득키득거리던 닐은 멍한 내 표정이 마음에 안 드는지 자기 허리에 손을 얹었다.
“저기, 피곤해? 좀 더 잘래?”
둔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에밀리랑 레이라가 화를 내지 않아? 빨리 나으라고? 정말 진심이야? 엄마는 어딨어? 형은 어떻게 됐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닐은 내 눈으로 보낸 질문을 읽지 못하고 누군가를 불렀다.
“어이- 어이- 들어와. 이든 깼어.”
또 내 방으로 들어올 사람이 있단 말인가? 내 방에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모이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방문을 열고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들어온 디트리히의 모습은 예상을 넘어서 황당하기까지 했다. 내가 아플 때면 무슨 친목 도모회라도 열린단 말이야? 온 몸에 들어선 열에 조금 멍해져 디트리히를 바라보자 대뜸 시선을 침대 다리에다 꽂고는 궁시렁거렸다.
“바보 아냐? 자기 정원에서 길을 잃어 감기 걸리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길을 잃다니. 내가 그 정원에서 길을 잃을 리가 없잖아. 조금 발끈해져서 무어라 말해주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고작 저 말을 하기 위해서 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니 어이가 없어서 디트리히와 닐을 번갈아 바라보자 닐이 한심하다는 듯 디트리히에게 말했다.
“거참, 병문안 한 번 다정하게 한다. 혹시 그거 새로운 도련님식 병문안법이냐?”
“너 자꾸 시비 걸지 마.”
“내가 뭘. 계집애처럼 예민하게 굴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으르렁거리는 친구들의 작태에 그냥 다시 자고 싶어졌다. 머리가 아팠다. 뇌의 어느 한쪽을 마구 파헤친 것처럼 지끈지끈했다. 온 몸에 힘이 없고 축축 늘어졌다. 아아. 목소리를 내자, 아주 가늘게 뽑아져 나왔다.
“-아벨 형은?”
그 가느다란 목소리를 용케도 들었는지 툭닥거리던 디트리히의 안색이 변했다. 닐은 영문을 모르겠는 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아. 아무 일도 없구나. 안심을 하자 긴장이 풀려 잠이 쏟아져 내렸다. 잠의 폭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내게 디트리히가 말했다.
“아벨 형- 오늘 당장 유학 갔어.”
유학? 유학을? 제멋대로 선명해졌다 희미해졌다하는 시선에 닿는 디트리히와 닐을 스윽 바라보자 그 광경 사이로 형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돌아가, 돌아가! 가버려! 울면서 날 밀어내던 형의 모습. 형, 난 그저 형을 꼭 껴안아 주고 싶을 뿐이었어. 그것도 견딜 수가 없었어? 난 왜 그렇게 미안했을까. 잘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던 걸 까.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눠보지 못한 형이 그렇게 무너지는 광경에. 마음이 아팠던 걸까. 형의 그런 모습에서 아파서 제대로 울지조차 못하는 그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낀 걸까. 왜 우린 서로 대화도 나눠 보지 못한 거야. 왜 한번도 제대로 서로를 이해해 보려 하지도 않은 거야. 형에게 사과할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나버리네. 응. 괜찮겠지. 유학을 간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화상 대화는 가능해. 사과하자. 무엇을 사과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깨어나면 바로 컴퓨터를 켜서 사과하자. 아득해져 가는 천장. 디트리히와 닐의 말소리도 멀어졌다.
응, 사과하자.

6. 날아갈 때
콰앙. 나는 머리를 장악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발로 컴퓨터를 걷어차 버렸다. 물론 아픈 발을 쥐어 잡고 팔짝팔짝 뛰어야 했던 건 나였다. 얼얼한 통증에 이가 저절로 악 물어졌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접속이 불가합니다.’라는 회색 상자만 뜨는 화면을 노려보았다. 몇 달 째 형의 컴퓨터로 접속 신청을 하는데도 도저히 화답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짜증이 북받쳐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나보다 더 신경질적으로 누나가 문을 버럭 열고 들어왔다.
“조용히 못해! 친구들이랑 화상 대화하는 데 너 때문에 계속 끊기잖아!”
“이브누나! 누나도 좀 연락 해봐! 아벨 형이랑 전혀 접속이 안 돼!”
기죽지 않고 내가 다시 소리를 지르자 이브 누나는 묘한 표정을 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지만 차마 말해서 안 된다는 걸 알기에 도저히 말 할 수 없다는 것처럼 머뭇머뭇거리다가 평소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다 던져버리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너 브라더콤플렉스라도 걸린 거 아냐? 갑자기 왜 아벨은 찾고 그래?”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그 때 본 광경을 이 수다스런 누나에게 말해 줄 생각은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내가 말문이 막혀 가만히 서 있자, 누나는 홱 몸을 돌려 나가면서 주의를 주는 걸 잊지 않았다.
“하여튼 조용히 하란 말이야! 알아들었어?”
쾅! 시끄럽게 닫히는 방문이 일으킨 바람에 얼굴은 맞은 나는 이질적인 느낌이 가시지 않아 누나가 사라진 문을 계속해서 살폈다. 어색하다. 뭐가? 뭐가 이렇게 어색한 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감에 손을 폈다 쥐었다. 공부도, 친구도 만나기 싫은 날이다. 정원을 가 볼까. 한달 가까이 가보지 않은 정원. 감기가 다 나은 후에도 밀린 공부를 하느라 정원을 갈 틈이 나지 않았다. 정원사 할아버지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망설임 없이 정원으로 나오자, 정원사 할아버지는 어느 구석에서 나무를 다듬고 있는지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아기 새가 있는 나무 아래에 앉아 계실지도. 즐거운 걸음은 마치 날아갈 듯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리가 무거워졌다. 정원을 이미 두 바퀴나 돌았는데도 정원사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생기신 걸까.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나뭇가지가 썩둑썩둑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사 할아버지! 얼마나 찾았다고요!”
내달리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자, 주름진 얼굴, 커다란 손등을 가진 정원사 할아버지의 넉넉한 웃음 대신 로봇이 정원사 할아버지가 쓰던 사다리위에 올라 서 있었다. 로봇은 내가 등장했음에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해서 나무의 형상을 다듬어갔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알기 위해 나는 로봇에게 말을 걸었다.
“뭐 하는 거야? 정원사 할아버지는 어디 갔어?”
로봇은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정원사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릅니다만. 삼주 전부터 정원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썩둑썩둑. 나뭇가지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에 내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삼주 전부터? 힘이 빠졌다. 나 왜 여기 있는 걸까. 뒤돌아서다가 나는 로봇에게 다시 물었다.
“아기 새는 못 봤어? 저기, 가장 큰 나무에 있었는데.”
썩둑썩둑. 나무가 아프다고 울 것만 같았다.
“죽었습니다.”
너무나 평온한 문장에 그 글자들의 나열을 다 뜯어 놓고 싶었다. 아기 새가 죽었어? 봄이 죽어버렸어? 왜? 왜? 왜 죽어버렸어?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로봇은 사다리를 내려오더니, 사다리를 들고 다른 나무를 향해 가버렸다. 정원사 할아버지는 저러지 않았어. 저렇게 무감각하게 나무들을 대하지 않았어. 저러지 않았단 말이야. 아빠한테 물어야겠어. 아빠가 안 계신다면 엄마라도 좋아. 나무들에게는 나무들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정원사 할아버지가 필요해. 저런 로봇 따위가 필요한 게 아니야.
마침내 엄마의 방 앞에 섰을 때,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브 누나와 엄마였다.
“아벨은 어쩔 거에요, 엄마.”
아벨? 형은 어쩌다니? 손잡이를 돌리려던 생각을 멈추고 방문에 귀를 가져갔다. 이브 누나의 말에 엄마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한숨처럼 말했다.
“유학 가서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기로 했잖니.”
뭐? 죽었다고 하기로 하다니? 누나가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빨리 죽었다고 발표해버려요! 이든이 계속 아벨이랑 접속이 안 된다고 난리 피운단 말이에요. 아벨이 죽은 걸 알면 그러진 않을 거잖아요. 이든이 감기에 걸렸을 때 이미 죽어버린 녀석을 계속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 봐야 피곤하기만 하다구요.”
“유학을 간 지 한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죽었다고 하면 이상하잖니. 한달만 더 기다리렴. 정말, 엄마도 지치는 구나. 네 오빠 때문에 주름이 또 생겨버렸지 뭐니.”
누나는 형이 마음에 들지 않아 미치겠다는 듯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정말! 그 멍청이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들어! 자살을 할 거면 곱게 자살 하고 끝내던가. 유서는 남겨 놓을 게 뭐람. 아빠가 그걸 먼저 보고 찢어버리지 않았다면 남들이 우릴 보고 뭐라고 했겠어요? 남자한테 버림 받은 게 뭐 자랑이라고. 그 유서가 만약 이든에게 제대로 전해졌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버렸을 걸요. 게이가 있는 집안이라고. 아우, 끔찍해.”
엄마가 누나를 진정시키려는 지 무어라고 말을 했지만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죽었어? 형이? 그것도 오래전에? 나와 헤어지고 나서? 내가 고열로 시달리고 있을 때? 이미 죽어버린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접속이 안 된 거야? 형의 죽음도 은폐해버리고 언제 죽었다고 발표할지 계산하고 있는 거야, 엄마? 누나? 창피하니까? 부끄러우니까? 형은 우리 가족인데? 엄마의 아들이고 누나의 오빠인데? 나의 형인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유서가 있었구나. 형이 나에게 유서를 남겼구나. 아빠가 그걸 찢어버렸어? 나에게 쓴 유서인데? 비틀거리며 몸을 추스르고 아빠의 방을 열자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방에 있는 쓰레기통을 열어 보았지만 유서의 조각조차 보이지 않았다. 형의 유서를 돌려줘, 아빠. 형의 죽음을 돌려줘, 엄마. 형의 존재를 부정하지 마, 누나. 역겨워서, 진득히 속에 들러붙은 역한 시체 썩는 냄새에 토해버리고 싶었다. 난 뭘 해야 하지. 형, 난 뭘 해야 하지. 아벨형, 난 어디로 가야 할까. 아벨형, 형은 어디로 간 거야.
나는 멋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던 새의 박제들이 늘어선 서재를 활짝 열었다. 수 십 개의 눈동자들이 내게로 쏟아졌다. 부리부리한 시선. 거기에 살아있는 생생함 대신 오래전에 얼어붙은 차가운 무기질만 남아 있었다. 무서워해서 미안. 나는 손조차 댈 수 없었던 새의 시체를 붙잡았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너를 붙들어 놔서 미안해. 오래전에 죽어버린 형을 붙들어서 미안해.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형, 날아가. 새는 잠깐 기쁘다는 듯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날개조차 펴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형, 날아가게 해줄게. 이제 붙잡지 않아. 빛바랜 깃털을 조금 떨어뜨리며 또 다시 새가 하늘을 날았다. 모두 모두 날려 보내줄게. 이건 아빠야. 추락해버리네. 이건 엄마야. 응, 역시 잠깐 밖에 날지 못하는 구나. 이건 누나야. 산산조각 났구나. 아직, 아직 많이 남았어. 하늘을 날 새들이 이렇게나 많아.
눈앞에 맺힌 물기가 이토록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걸 방해했다. 형, 날아가. 더 높이 날아가. 아무도 형을 박제 할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 더 높이 날아가. 새가 날아가는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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