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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우주개척시대의 기원

2009.04.22 20:4704.22

“다음 분, 306호 환자분, 들어오세요.”

다음 환자의 서류 목록을 집었다. 다른 목록에 비해 서너 장 밖에 안 되는 목록은 이 환자 최근 들어왔음을 확신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환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국적인 황인 남성이었다.

“여기 앉으세요.”

그는 겁먹은 개처럼 목을 움츠리고 앉았다. 그리고 사방을 정신없이 둘러보며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부적응자인가. 사회 부적응자는 쉽게 볼 수 있기에 그렇게 추측했다. 그러나 서류에 적힌 증상은 예상 밖이었다.

-미친놈.

증상 란에 깔끔한 글씨체로 그리 적혀있었다. 필체를 찾아 호되게 꾸짖을까 싶었지만, 환자에게 보이기 전에 잽싸게 지웠다. 환자는 이제 방 내부에 적응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헛기침과 함께 물었다.

“고향이 어찌되십니까?”

대화 방법에는 상대의 경계심을 풀기위해 먼 곳부터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고향을 물어본 것은 서류에 적혀있는 증세에 대한 의문의 작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환자는 당연하게 대답했다.

“램프입니다.”

깍듯이 말하는 모양새는 좋았지만, 여기서 큰 오류가 생긴다. 램프가 어디인가, 램프란 곳이 있던가. 서류상에 램프는 분명

“네, 그 램프입니다.”

석유나 알코올 등을 연료로 하는 가열장치를 뜻한다. 시야가 캄캄해진다.

“이름이 ‘지니’ 맞습니까?”
“네.”

‘엄마,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 어린자식에 질문을 받은 부모의 심정이 바로 지금과 같다고 생각한다. 손을 뻗어 환자가 하려는 말을 저지하고 골을 어루만진다.
이름, 지니. 성별, 남자. 나이, 불명. 주소, 램프.
대체, 이런 사람이 우리 병원에 어떻게 온 것일까. 이간호사가 말하기를 지하창고에 쓰러져있기에 우리 환자가 아닌가 싶어 데려왔다는데, 아무래도 기억상실증인 것 같다.

‘가만, 지하창고에 램프라면….’

“이거 아십니까?”
“오, 오오오오!”

지니는 환호성을 터트리며 내가 꺼낸 ‘고향’을 추켜세웠다. 맙소사, 그는 정말로 미친 사람 같았다. 얼마 전 지하창고에서 괜찮아 보이는 골동품을 발견해서 가져왔다. 마치 디지니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법한 램프였다. 그리고 그게 지금 저 지니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고.
내 시선이 무안했는지, 그는 비실비실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물었다.

“소원 있으십니까? 세 가지만 들어드리겠습니다.”

외형에 걸맞지 않게 천진한 웃음을 띠고 물으니, 심각하게 답하기도 힘들었다. 이 사람 수준에 맞춰 대답했다.

“소원을 백 개로 늘려달라해도 됩니까.”
“안됩니다.”

이 사람에게도 안 먹히는 농담은 있는 것 같다.

“어, 음 그럼, 오늘 밤에 외계문명이 나타나 그 잘난 기술을 무상으로 전해줬으면 좋겠군요.”

지니는 끄덕였다.

“다음은요?”
“내일 아침이 되면 제 정신 차리시고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은 딱히 기억도 안나니, 그냥 넘기죠.”

지니는 다시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 두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생각보다 악력이 쌔서 몸까지 흔들렸다.

“소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대충대충 대답하며 그를 내쫓았고, 그는 순진하게 손을 흔들며 나갔다. 곧 나는 그가 그리워졌다. 다음 환자는 그보다 더 심각한 미치광이였다.


이튿날이 되었다. 평소처럼 대강차려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곳곳에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운전 중이라 볼 수 없었다. 뭔가 재미난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내가 그 재미난 일을 알게 되는 시기는 병원에 도착하고서였다.

- 속보, 외계문명 출현

나는 막 커피를 떨어뜨릴 뻔했다. 영화가 아닌 뉴스에 원형의 비행물체가 서울상공에 수직으로 떠있었다.

“정부의 발표로는 이들은 먼 은하계에서 온 것이며, 우리에게 무상으로 기술지원을 해주겠다고….”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내게 소원을 이루어주겠다고 했던 램프 출신의 황인, 기억을 잃고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램프의 요정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던 남자. 설마, 하는 마음에 가슴이 쿵쾅거릴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경종을 울렸다.

“306호 환자가 사라졌어요!”

결국, 커피를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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