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그들만의 인연 이론 上

2009.04.20 23:3604.20

*
12월 18일 금요일.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남은 시점이다. 어느새 한해가 다 가고 이 시즌이 와 버렸다.

커플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이 날을 기다리며 연인을 위한 각종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행사를 맞이한 사랑하는 그이의 행복한 표정을 기대하며 말이다. 그래. 대부분의 커플이 그렇겠지.

하지만 세상에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와 같은 고등학교 2학년생이자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유명한 아이였다. 거기에 외모도 수준급이라 전교생 중 이 여자애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지금은 나에게 누군가에 대한 불평을 적나라하게 토로하고 있다.

"진정, 진정해. 천천히 말을 해 봐."

"이걸 어떻게 진정하라는 말이야?!"

감정이 격해진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 했지만 오히려 역효과. 신경이 바늘 끝보다도 날카로워진 그녀는 이미 내 얘기를 들을 단계가 아니었다. 조언을 위한 상담이 아닌, 상담을 위한 상담의 시간이다. 이럴 땐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자기를 얼마나 생각해 줬는데, 왜 내가 그 좋아하는 케이크도 마다하고 자기 만나러, 그것도 옷까지 갈아입으러 집에까지 들어갔는데!"

"그래, 그거 참 못됐네."

"못됐어? 겨우 그거야? 넌 네가 무시당한다고 하면 그러고 말겠니? 어휴, 미치겠어 진짜!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이미 목소리에는 눈물이 묻어나왔다. 수화기를 붙잡고 코끝을 누르며 애써 울지 않으려는 그녀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 광경을 생각하니 웃음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나는 입을 꼭 붙잡고 진지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해야 했다. 난 한동안 그녀의 푸념을 들어주었다.

"후우-"

삐리리리리릭
삐리리리리릭

"우악, 또야? -여보세요?"

"어, 난데."

간신히 그녀와의 전화를 끝내고 난 직후, 다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엔 그에게서 온 전화이다. 바로 그녀의 남자친구이자, 나의 친구인 그 놈. 성격 좋고 외모 출중한 그녀와 어울리는 활발한 성격의 나이스 가이.

진정 나이스 가이냐고 묻는다면 길디 긴 키와 몸매는 모델급이요, 외모는 아이돌의 뺨을 두 대 때리고도 거스름이 남을 정도라고 묘사해주마. 그러니까 성격 같은 사소한 사항은 넘어가자. 난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할 지 알고 있었지만 그냥 얌전히 전화를 받았다.

"야! 내 말 좀 들어봐라."

아까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고 살벌한 톱날 같다면 이 녀석의 목소리는 길고 검은 따발총 같다. 한 번 방아쇠를 당기면 끝없이 나가는 총탄들. 쉽게 말해 아까보다 목소리 톤만 조금 낮을 뿐 말 빠르고 많은 건 같다는 얘기다.

뭐- 내용도 그녀와 비슷하다. 그녀에 대한 불만. 불평.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 자신이 그녀를 위해 이룬 업적이 무엇이고 행한 행동이 얼마이며 희생은 또 얼마나 심했는가. 안 그러나, 친구? 나의 생각을 어떻게 평가하나?

내가 할 말이 뭐 있나.

"그건 걔가 잘못했네."

"그렇지-?!"

그렇긴 뭐가 그래? 두 시간 동안 수화기를 붙잡고 있으려니 귀에 화상 입을 것 같다. 이제 그만 하고 좀 쉬면 안 되겠니? 속으로 외쳐 보았지만 아쉽게도 나의 이 오랜 친구는 내 맘은 화염방사기로 완전 소각을 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를 계속했다. 썩을 커플들아, 그만 좀 해 줘. 나도 좀 쉬자고!

-찰칵.

핸드폰 슬라이드를 닫는다. 녀석의 말을 냉면 먹듯 대강 끊고는 통화를 서둘러 끝낸 참이다. 귀가 웰던으로 익어져서 육즙 한 방울 흘러나올 생각도 없는 것 같다. 몸이 후끈 후끈, 머리는 지끈 지끈. 어이쿠, 골치야.


"어휴, 처음부터 이렇게 커질 얘기가 아니었는데..."

양손으로 머리를 박박 긁는다.

내 상념들은 그 가벼운 이야기가 시작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원인은 그곳에 있을 테니까.









*

두 통의 전화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나의 이름은 오재혁.
18세. 고등학교 2학년이다.

그리고, 김정현과 윤진수.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두 명의 이름이다. 둘 다 나와 같은 고등학교 2학년이면서 또 나와 같은 반이기도 하다. 처음 이 녀석들을 알게 된 건 3년 전 중학교 2학년 때 부터였다. 그때 나, 김정현, 윤진수, 그리고 또 다른 친구인 기현서라는 여자애는 같은 반에 배속되었고, 그 이래로 우리 4명은 계속해서 같은 반이 되었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는지.

셋 다 좋은 친구들이다. 정현과 진수는 기운차고 즐거운 녀석들이고, 현서는 주변을 조율하는 스타일의 성격이었다. 나도 말이 없고 조용한 편이라 동료 의식을 느낄 뿐더러, 키 큰 정현과 진수 & 작은 신장의 나와 현서라는 조합으로도 제법 균형이 맞는다. 그런 여자애다. 그런데 그 녀석은 왜 아직도 애인이 없지? 객관적으로 봐도 예쁜 편인데.

아니, 지금은 그런 것보단..

"하아."

한숨이 나온다.

좋은 친구들. 그래, 분명 좋은 친구인 건 맞다. 근데 우습게도 둘이 한 곳에 모이면 피곤한 일이 무궁무진하게 생겨난다. 이번만 해도 그렇지. 서로 살쾡이마냥 험담을 하고 헤어진다고 소리 지르느라 바쁘다.

이것은, 12월 11일 금요일.

오늘로부터 딱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때는 12월 중순. 기말고사가 끝난 참이었다. 수능은 그것보다 더 전에 끝났고 중간고사는 더더더 전에 끝났으니 이제 남은 학교 행사라곤 행사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애매한 방학식 밖에 남지 않았던 때였다. 그러다보니 교내에는 학업에 소홀 하고픈 분위기가 마약처럼 퍼져 있었다.

그건 비단 학생뿐 아니라 선생님들도 마찬가지.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영화를 보자고 영화 DVD를 가져오거나 아예 떠들지 말고 잠이나 자라고 하곤 했다. 음, 확실히 선생님들도 1년 동안 내내 시달렸으니 좀 날로 먹고 싶은 날도 있는 거겠지. 우리가 학교 수업을 땡땡이치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되는 날로 먹기에 내 몸은 지루함으로 가득해졌다. 저건 봤던 영화고 저건 재미없고. 잠도 어느 정도 자야지 내가 무슨 겨울잠 자는 곰이야? 이렇게 놀고만 있느니 차라리 집에서 컴퓨터를 하는 게 낫겠어! 하지만 학교를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것 참. 고등학생이라는 나의 신분이 의심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 옆에 멍하니 앉아있던 정현에게서 한 가지 의견이 나왔다. 이렇게 무료하게 죽치고 있어봤자 딱히 할 것도 없으니, 하루 날을 잡아 어딘가로 놀러가자는 것이다. 마침 12월 14일 월요일은 개교기념일이었다. 학교를 가지 않는 몇 안 되는 축복받은 날. 그 날에, 주말에는 사람 구경밖에 할 수 없는 한국 최대의 유원지 노라월드에 가자고 말이다.

천재다운 생각이지 않냐며 콧대를 잔뜩 세우는 정현. 그 모습에 난 표정을 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년에는 고3이랍시고 바쁠 텐데 지금 학교 수업 시간을 땡땡이치면서까지 놀러가기는 좀 그렇고. 그렇다고 주말에 가자니 사람이 넘쳐나겠고. 그런 시점에 코앞에 개교기념일이 있다니, 확실히 좋은 타이밍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정현은 그 의견을 다른 이들에게도 제시했다. 그에 찬성한 사람은 둘이었다. 환호성을 지르는 쭉빵 포니테일 여성과 수줍게 기대감을 보이는 단발의 소녀. 전자가 정현과 사귀고 있는 윤진수이고 후자가 기현서였다. 사실 이 계획을 알려준 사람은 나와 정현을 빼고 그녀들뿐이었으니, 결국 만장일치라는 셈이다.

우린 준비에 들어갔다. 준비래 봤자 별 건 아니었다. 스케쥴을 세우고 용돈과 입을 옷을 준비하는 것 정도? 그것들을 하다 보니 시간은 알아서 흘러가 주었고, 어느덧 결전의 날 이 다가왔다.

12월 14일 월요일.

오전 11시.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웰컴 투 노라월드'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었다. 옆에 호랑이 마스코트 캐릭터가 앙증맞았지.

날씨도 화창하고 사람도 많지 않은, 그야말로 놀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우린 1분도 기다리지 않고 자유 이용권 4매를 끊을 수 있었다. 우리의 얼굴색은 제대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등병만큼이나 활짝 개었을 것이다.

매표소를 빠져나와 보았던 바다 같은 하늘과 싱그러운 구름이 기억난다. 자유분방한 청공의 분위기만큼이나 우리의 복장도 각양각색이었다. 멋 내기 좋아하는 정현은 고등학생 주제에 정장으로 빼 입었고 진수는 몸매가 돋보이는 성숙한 분위기의 샛노란 원피스 차림에 현서는 귀여운 분홍색의 코트와 스타킹을 착용했다. 통일성 제로라는 특성 덕에 뭘 하러 온 집단인지 짐작하기 애매한 옷차림이었다.

나? 나는 청바지를 입고 그 위에 잠바, 목도리, 모자, 장갑, 귀도리 등등 푸짐하게 방한 세트를 착용해 주었다. 키도 작은데 뭔 놈에 스타일이야? 게다가 '추우면 자기만 손해'가 우리 집 가훈이거등. 옛 어른의 가르침은 중요한 법이지.

물론 그 중요한 가르침은 유원지에 당도한 우리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당시 우리에겐 노는 것 보다 성스러운 의무는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시길. 광분한 예비 고 3들에게 과연 무엇이 더 간절하겠는가.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할아버지의 말씀? 아니면 가벼운 옷차림으로 즐겁게 놀자는 친구의 유혹? 결국 활동에 거치적거리는 것들이 보관물 센터 라커룸에 쳐 박히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후 몇 시간동안 우린 실험을 했다. 인간이 얼마나 놀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었다. 처음에는 우리의 한계를 측정해보고자 하는 의도였으나, 신비롭게도 실험을 거듭할수록 우리의 체력이 고갈되기는커녕 점점 강해지는 괴상망측한 감각이 온 몸을 타고 흘렀다.

이 실험을 주도하던 김정현 씨는 우리가 '롤러코스터는 자면서도 탈 수 있고, 범퍼카로 사륜 드리프트는 기본, 자이로드롭 위에서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고스트 스톰을 탈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 실험 과정과 결과의 인과 관계 및 알고리즘의 타당성 등 기타 요소들에 대한 진위 여부를 본인에게 직접 증명하도록 시켜 보았더니 어찌어찌 다 하기는 하더라. 마지막에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그걸 입으로 먹는 건지 얼굴로 먹는 건지 좀 헷갈리긴 했지만.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며 그 행동을 하게끔 종용한 건 물론 나였다. 덕분에 정현씨와 함께 살의의 애정이 넘치는 추격전을 겪어야 했지만 그것마저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우리는 즐거워서 웃고 박수를 치고 난리도 아니었다. 우리의 수다 소리와 놀이기구를 타면서 지르는 비명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누가 보면 재벌 2세 4인조가 노라월드를 하루 전세 낸 줄 알았을 것이다. 뭐, 그만큼 썰렁했으니까. 난 외려 그쪽이 좋았다.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가 없잖아. 그렇게 오늘도 적당히 실컷 놀고 돌아가면 될 줄 알았었다.

그리고 오후 3시쯤이었나.

웬만한 놀이기구는 다 타 본 후였다. 이제 남은 것은 여자들은 즐기기 부담스러울 정도의 스릴 넘치는 것들 뿐. 특히 결정적으로 한 가지 남은 것이 있었다.

그 이름하야 '헬 스윙'. 말 그대로 회전하는 놀이기구였다. 생긴 구조는 자이로드롭과 비슷하다. 하나의 큰 기둥이 있고 그 주위로 원탁처럼 사람들이 빙 돌려 앉을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은 그 기둥이 마치 그네처럼 하늘에 매달려 있다는 것과, 크기가 자이로드롭에 세 배는 된다.

처음에는 좌, 우로 천천히 왕복운동을 하다가 이윽고 바이킹을 능가할 정도로 높게 올라간다. 여기서 비명이 터진다.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무서운 기세로 날아가는데 소리를 안 지르고 배겨?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그렇게 좌우 운동을 반복하는 동안에 원탁은 자전 운동까지 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그렇게 한 바퀴를 빙 도는 동안 필연적으로 바람이 탑승자를 훑고 지나가게 되는데, 그 차가운 감각과 더불어 피부를 벗겨내려고 발악하는 폭풍 소리가 귀를 때리는 게... 간이 작은 사람들은 가사상태를 맛보게 될 정도로 환상적인 스릴감이 심장에 직격할 것이다. 여기서 2차 비명- 이라기보다는 보통 절명이지.

진수는 그것만은 차마 못 타겠다며 정현과 나에게 다른 것을 즐기자고 제안했었으나, 우린 가볍게 그 제안을 거절하고 룰루랄라 놀이기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신나게 죽음과 데이트를 하며 머리털 한 올 한 올이 무스 먹인 직모가 될 듯 한 스릴을 느꼈다. 비명도 얼마나 질렀는지. 목이 칼칼했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뇌내 엔돌핀이 너무 분비돼서 그런지 몇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재밌었지! 우리는 웃으면서 놀이기구에서 내렸다.

그때 이미 뭔가 이상했다.

우리는 몸에 간간히 남은 전율감을 음미하며 내려왔다. 그리고 천천히 벤치에 앉아있는 여자애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했다. 아까의 웃음이 가득한 얼굴은 어디 가고, 얼음여왕처럼 차가운 표정의 진수가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현서는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우리에게 진수가 대뜸 하는 얘기는 이거였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뭐?"

우리라기 보단 정현을 향한 말이었겠지. 당황한 그의 목소리. 얼빠진 것처럼 들리지만 나도 정작 당한다면 그 말이 먼저 나올 것 같다. 뭐? 뭐라고? 정현과 내가 당혹감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할 때, 그녀는 이미 빠른 걸음으로 출구 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상황 파악조차 되지 않지만 정현은 일단 그녀를 따라 뛰었다. 내 옆에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현서가 있었다.

울먹거리는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진수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여 화가 났다고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헬 스윙을 타러 간 정현에게 있어, 자신보단 그깟 놀이기구가 더 소중하냐면서-

야, 윤진수! 너 같으면 그런 게 더 소중하겠어?! 큰 소리로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따질 상대는 이미 저 멀리에 있으니, 우선 따라잡고 봐야겠지. 난 현서와 함께 서둘러 둘을 쫓아갔다.





*

그렇게 된 일이었다.

그리고 열심히 지하철역까지 쫓아갔건만 보이는 것은 갈라서는 둘의 모습이었다. 양 쪽 다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반대방향의 개찰구로 들어갔다. 집이 같은 방향인데 이게 대체 뭐하는 소모전이야! 가슴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머리로는 가능하다. 둘 다 어지간히 뿔이 난 모양이다.

난 나에게도 이 사건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서 피해자로 추정되는 진수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려 했으나, 그녀의 '건들면 죽인다'고 말하는 눈매에 굴복하여 조용히 꼬리를 내리고 정현을 따라서 집에서 반대방향의 지하철을 탔다. 나와 함께 있던 현서는 진수와 함께 그대로 집을 향해 갔고 말이다. 그때는 정현도 아무 말이 없어서 며칠 안 가 화가 풀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안이했었는지도.

그 이후로 둘은 아주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아니면 내 핸드폰 배터리를 닳게 하려고 안달이 났던가, 그것도 아니면 내 귀를 구워서 먹어버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가. 세 가지 중 하나겠지. 농담이 아니라고. 정말 심각한 것 같단 말이다. 둘이서 말을 나누는 걸 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평소에 서로를 무시하고 지내는 건 기본이다. 다 같이 도시락을 먹을 때도 절대 같은 자리에 앉지 않고, 매점을 갈 때에도 평소에는 넷이서 가던 길을 정현은 나와, 진수는 현서랑 단 둘이서만 간다. 상대방을 이산화탄소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몸에도 해롭고 환경에도 해롭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고, 없앨 수는 없고, 도움은 쥐꼬리 12등분한 것 중 하나만큼도 없는 그런- 이건 연인이 아니라 견원지간이라고 밖엔 얘기가 안 나온다.

그래도 학교에서 서로에게 욕질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높이 사 둘을 칭찬할 사람도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생각은 관둬 주길 바란다. 이 녀석들은 소리를 내지 않고 험담을 하는 스킬을 발명한 것 같다. 근처에 앉아만 있어도 둘이 싸우는 중이라는 걸 선생님들 까지 알아챌 정도이니 미국과 소련의 냉전 정도는 어린아이 장난이었다.

이 정도까지 전세가 험하면 그 사이에 껴서 피해보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게 나라는 건 설명 할 필요도 없겠지? 누구든 간에 얘네 들을 조속히 화해시켜 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 그 사람 평생 존경할 거다. 차라리 한글 만드는 게 더 쉬워 보인다. 세종대왕께서 돌아오신다고 해도 쉽게 정리하진 못할 걸.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은 킹 세종보다 위대한 사람이란 증거이니 죽을 때 까지 존경할 만하지. 물론, 나올 리는 없겠지만.

나도 모르게 한숨을 흘린다.

"에구우, 너희는 뭐 이렇게 뻑적지근하게 싸우냐..."

조용히 중얼거리는 혼잣말은 나만의 소유이다. 대신 골머리를 썩이는 것도 나 혼자만이지.

오늘은 12월 19일 토요일.

노라월드 사건 이후로 어느새 5일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였다.  

"나도 정도껏 참았다고! 그래도 이런 억지는 더 버텨주기 힘들어!"

"어어 그래, 그래. 그러시겠지..."

꿀꺽 꿀꺽 꿀꺽

이곳은 정현의 방이다. 꿀꺽꿀꺽. CF에서나 들릴법한 리얼한 목넘김 소리를 내면서 트레이닝복 차림의 정현이 맥주를 마신다. 안주는 과자였다. 혼자서 이마에 손을 대고 현기증을 느끼고 계시는 저분은 기현서씨 되시겠습니다. 맥주 한 캔을 마셨던가 했는데 벌써 저 모양이니 얼마나 술에 약한지 대강 알 만 하다.

편한 옷차림의 정현과는 정 반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현서는 조금 짧은 체크무늬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덕분에 난 시선 처리에 살짝 곤혹을 느꼈다. 좀 가려, 임마. 자꾸 눈이 그쪽으로 가잖아. 난 맥주를 홀짝거리며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지만 정현은 우리가 그러던 말던 자기가 할 말을 다 하고 있다.

"야, 오재혁. 알고 있냐?"

"알긴 뭘 알아..."

"윤진수, 걔가 이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아!!"

그는 이미 흥분한 상태였다. 목소리는 방 안과 내 머리를 울렸고 더불어 현서의 위 내부도 진동시켰을 것이다. 판단 능력이 부분적으로 상실되었는지 개념이 사라졌는지 그의 주정은 계속된다. 난 계속 맞장구와 비아냥의 중간 경계에 서 있는 대답을 해 준다. 나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취했나?

"말다툼 소재가 전혀 되지 않을 것들을 가지고 분란을 나게 만들잖아. 이해가 갈 맥락이 전혀 없어. 이번만 해도 그렇지. 대체 왜 놀이기구를 타러 간 게 자신을 무시한 게 되는 거냐?!"

"몰라."

"그래. 그 전에도 그렇다고. 내가 왜 아이돌이 입는 옷을 입어야 하고, 약속 시간을 한 시간이나 늦은 진수한테 야단을 맞아야 하고, 잘 하지도 못하겠는 십자수를 해야만 하는 거냐고. 대체 왜? 재혁이 너는 하냐?"

"그런 걸 왜 해."

"...시끄러!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끝까지 들으라고 자식아! 크흠, 좋아. 십자수고 나발이고 다 좋아. 좋단 말이야! 세세한 것들은 대충 버려두자고. 이건 애초에 그 녀석이 너무..."

그야말로 열변이다. 청산유수. 줄줄 새어나오는 정현의 취중진담 불평불만에 난 기가 질렸다. 술이 들어가니까 정말 끝도 없이 나온다. 지금까지 마음속에 묵혀뒀던 것들을 술이라는 국자를 통해 죄다 퍼내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 얼마나 참고 살았으면 저렇게 일장 연설이 끝날 생각도 하지 않을까. 쯧쯧 혀를 찬다.

하지만 정현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그에게 동정심이 간다. 노라월드에서 헤어진 날 지하철에서 진수에게 뺨까지 맞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입에 머금고 있던 맥주를 뿜을 뻔 했다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맞을 정도 까지는 아니잖아!

지금은 신나서 주절거리고 있지만, 저 녀석의 고충은 생각보다 훨씬 클지도 모르겠다. 오늘따라 녀석의 얼굴이 더욱 초췌해 보인다.

'울적하다, 오늘 부모님 안 계신다, 내 방으로 와 다오.'

방과 후 정현이 내게 했던 말이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따져보면 정현은 독하지 못한 녀석이었니까. 처음에는 버티고 버텨 보겠지만 그것이 한계에 도달하면 위로해 줄 상대가 필요할 것이라는 건 12월 14일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처음 노라월드에서 싸웠던 바로 그 날 말이다. 그래서 그가 갑작스레 불렀을 때에도 담담하게 방문할 수 있었던 게다.

그렇게 당도한 그의 방에 술이 있었던 건 조금 놀랐지만 그렇게 특별한 물건도 아니었다. 난 그저 친구의 집에 놀러왔을 뿐이다. 그것에 특이사항 따위는 벼룩 눈물만큼도 없다. 다만 지금 그의 곁엔 진수가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신경 쓰였다.

"현서야, 괜찮아?"

"으응..."

내 물음에 답하는 것은 현서의 말이 아닌 신음이었다. 붉게 충혈된 현서의 눈이 가엾어 보인다.

"걔는 그만 먹여야겠네. 그러다가 몸 상하겠다."

따악

꿀꺽 꿀꺽 꿀꺽

그런 세월 좋은 소리나 하면서 자신은 캔을 하나 더 따 다시금 원 샷.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다. 술 넘어가는 소리가 넉아웃 상태인 현서의 신음소리, 그리고 시계 움직이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꿀꺽 꿀꺽

째깍 째깍

으으음...

오자마자 술 마시고. 주정 들어주고. 친구의 여자친구이자 나의 친구인 진수의 험담을 다 듣고. 그리고 그 광경을 멀거니 지켜본다. 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이제 어쩌실 거야?"

"응? 뭐야, 또 뭐가 궁금해? 십자수? 아니아니, 그건 버리자고 했지. 암튼 형한테 뭐든지 물어봐! 다 대답해 줄 테니까!"

-개소리도 이 정도면 신의 영역이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뭐긴 뭐야 이 멍청아! 윤진수 말이야!"

"엥, 진수?"

"그래! 진수!"

그는 '진수면 아까부터 계속 욕하고 있는데'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놀고 있네. 난 술에 취해 흔들리는 발음으로 계속 말을 지껄였다.

"이제는 어쩔 거야? 걔랑 싸우고 며칠이나 지났는데, 슬슬 화해할 때가 된 거 아니야? 언제까지고 이런 어정쩡한 상태를 유지할 생각은 아니지?"

"..."

내 질문을 받은 정현은 갑자기 무언의 공간을 만든다. 아까까지 신명나게 게워내던 그 많던 욕설과 비방이 거짓말 같다. 숙연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캔을 내려놓고는 이윽고 한숨을 뱉는다.

"후우, 모르겠다."

"하아?"

"이젠... 내가 진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좋다, 싫다가 아니었다. 의외의 대답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익숙해지는 듯 했던 맥주의 맛이 다시 생소하다. 안 그래도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메스꺼운데, 왜 그런 애매한 질문을 지금에서야 하는 걸까. 술로 데워진 몸은 식을 줄을 모르고 그의 말 역시 끊어질 줄을 모른다.

"우리 넷은 오랫동안 친구였잖냐. 그러던 중에 나와 진수가 작년 초부터 갑자기 사귀기 시작했고."

"그건 그랬지."

정확히는 작년 1월부터였다. 하지만 저 둘은 만났을 때부터 왠지 언젠가는 사귀는 사이가 될 것 같은 샤방샤방한 분위기를 풍기고 다녔기 때문에 그닥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이렇게 싸우기만 하면 이상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헤치고 다녀. 과연 우리가 서로 좋아해서 사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편하다 보니까 사귄다고 얘기를 하고 다니는 건지."

이게 사랑싸움인지, 우정싸움인지.

"......"

"크으....."

정현이 쓴 소리를 내며 맥주를 한 번 더 마신다.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황금빛 거품을 대충 털어내고는 말을 이어간다.

"가면을 쓴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진수와 사귀는 게 모두 꾸며진 일 같고, 난 그냥 진수의 남자친구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것 같아.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극본은 아닐까... 내가 정말 그 아이를 좋아할까.... 그녀가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심이 가. 모두 내 망상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은 아닐까, 진짜 진수는 친구로 남아있고 내 옆의 진수는 가짜가 아닐까 하고. 머릿속에 지네를 한 마리 풀어놓은 것 같은 역겨운 기분이야. 모든 게 엉망진창이란 말이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진수는 내 애인이고 항상 내 곁에 있다고 우겨대곤 해. 그래야지만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말 서로를 사랑한다면 이런 의혹이 생길 수 있을까?"

"....글쎄."

난 더 이상 내 오지랖 넓음을 자랑하고 싶지는 않아서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너희는 헤어지면 후회할 거라는 거.

의심이라는 것을 이성으로 우겨서 없앨 정도의 일이, 결코 쉽게 생각할 물건은 아니니까.

"그래도.... 너희는 1년 동안이나 사귀고 있잖아?"

"무려 2년 동안이나 친구였고, 이제 겨우 1년간 사귀었을 뿐이지."

"그래도 1년이 짧은 기간은 아니지. 이때까지 쌓아놓은 정이라는 게 있는데..."

정? 그가 피식 웃는다.

"그런 얄팍한 게 무슨 소용이냐?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 한지 오래야. 그런 새마을 운동 때의 물건은 고물상에 팔려고 해도 안 팔린단 말이지. 에이이, 됐어! 필요 없어! 그만 하자고! 생각 할수록 머리만 아플 뿐이야. 마시던 술이나 계속 마시자."

그는 다시 맥주 캔을 든다. 적막한 방 안에는 그가 술을 억지로 삼키는 소리밖에 없었다. 시계침 움직이는 소리조차 그의 눈물 섞인 음주에 밀려 자신을 어필하지 못한다. 생각하기 싫어서 마시는 술이 아니라 목이 메어서 그 기운을 숨기려고 퍼붓는 알콜이다.

꿀꺽 꿀꺽 꿀꺽

난 계속 정현의 자작하는 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마셔대면 머리가 아플 때도 되었건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반면에 난 골이 지끈거린다.

이마를 손바닥으로 감싸니 머리카락이 슬그머니 내 손등에 몸을 올려놓는다. 머리가 뜨겁다. 답답하다. 너무 답답해서 옷이라도 벗고 싶다. 하지만 정신적인 열기이기에 그 정도론 해소 되지 않을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난 그저 그 뜨거움을 느끼고만 있었다.

....에라이 답답한 자식아!

설마 저 인간에게서 저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네. 권태기야, 권태기. 저건 그냥 권태기라고! 상대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도, 자신이 사랑을 주는 것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뭐가 뭔지를 모르게 되어버린 거다. 고작 4년이란 인연에 매너리즘마저 느끼는 그들의 모습이 재밌다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어이없을 뿐이다.

고작 그런 것 따위에 술이나 먹고 있는 거냐! 네가 그렇게 나약한 녀석이었어?!

꼬마아이가 사고를 쳤을 때의 분위기를 떠올려보면 쉬울 것이다. 본인은 정말 큰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어른들에게는 별 것 아닌 거. 오백 원짜리 동전을 주웠는데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써버렸다던가 하는 규모의 작은 사건들 말이다.

그 꼬마아이는 자신이 벌인 죄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반성할 것이다. 어른들은 그걸 보며 귀엽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저렇게 자학할 정도의 일은 아닌데'하며 혀를 차겠지. 특히 그 아이가 '난 쓰레기야! 죽어야 해!'라며 자책한다면 그 씁쓸함은 수십 배가 될 거다.

이건 그런 경우다. 내가 어른이고, 정현과 진수가 꼬마이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정현이 어린이라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그렇다고 치자.

그들은 서로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권태기? 매너리즘? 잘 모르겠어? 웃기고 있네. 답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다. 애초에 그렇게 커다랗게 생각할 일이 아니란 말이야. 너희의 만남이 고작 그런 의미밖에 갖고 있지 않았나? 너희들의 인연이 그렇게 얄팍한 거였냐고!? 화난 입을 연다. 이젠 내 차례다.

"그래서 진수를 어떻게 생각한다는 거야?"

하지만 의외의 곳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현서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시체에 가까웠던 그녀가 다시 살아나 정현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현은 그녀를 멍하니 보다가 당황한 듯 대답한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아까 말했잖아. 모르겠다고."

"그건 대답이 안 돼."

"아니, 하지만 정말."

"다시 잘 생각해 봐. 정말. 정말로 모르는 거니? 가슴에 손을 얹고 그렇게 단언할 수 있어?"

"......"

정현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떨궈진다. 현서는 그런 그를 잠자코 지켜본다. 술에 취한 눈빛이 아니다. 그렇다고 평소의 현서와도 다르다. 차분하게 식은 눈빛이 잘 벼려진 칼날을 보는 것 같다.

"너는... 진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난..."

눈빛만이 아니다. 발음되는 음 하나, 내뱉는 공기의 맛 하나. 현서의 모든 것들은 정현에게 그 날을 세우고 있었다. 평소와 말투가 다른 것도 아니다. 여전히 느긋하고 조심스러운 음성일 뿐인데, 압박감이 전혀 달랐다.

그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찬 현서와 눈이 마주치자 마법에 걸린 듯 하나의 말을 뱉어내고 만다.

"난... 진수가 좋아."

현서가 노리던 대답이 그의 입에서 조심스레 걸어 나온다. 서툴게 고백한 꼬마아이처럼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인 그에게 현서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좋아해?"

"잘 모르겠다."

정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다.

"하지만 걔를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아파. 심장이, 이 심장이 자꾸 뛰어."

그는 토하듯 말을 뱉어버리고 다시금 술을 마신다. 꿀꺽거리는 소리가 좀 긴가 싶더니, 딴 지 얼마 안 된 새 맥주 캔을 그대로 한 번에 입속으로 들이붓는다. 그리고 심장을 움켜쥐는 퍼포먼스까지- 개폼이지만, 애절하다.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의 얘기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 불어버리다니, 말은 많아도 자기한테 약점 잡힐 일은 하지 않는 녀석인데.

역시 정현도 술에는 이길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그 정도로 진수가 이 남자에게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걸까.

"그런데도... 헤어질 거야?"

"모르겠다니까....."

"확실하게 말해.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진수에게 헤어지라고 할 거야."

"....기현서. 거긴 네가 낄 부분이 아니야."

"아니... 낄 부분이야. 우유부단한 남자한테 내 친구를 맡길 수는 없어."

"뭐?"

취해서 풀렸던 정현의 눈빛이 급격하게 사나워진다. 영하의 바람이 피부에 맞닿는 듯한 싸늘한 분위기에 난 침을 꿀꺽 삼켰다. 금방이라도 현서에게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다. 그를 말려야 할까.

"내 말에 틀린 부분이라도 있니?"

하지만 현서는 주눅 드는 부분이 없다. 당당하다. 주먹이 날아오든 발이 날아오든, 다치는 쪽은 정현이 될 것 같다. 말도 안 되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솔직히 이번에도 네가 잘못 한 거잖아. 진수 마음은 헤아려 주지도 않고 무작정 놀이기구를 타러 간 거니까."

"윽...."

맞는 말이긴 한데, 왜 내가 뜨끔하냐.

"지금이라도 똑바로 말해.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

맹수처럼 사나웠던 정현의 눈매에 고민의 빛이 눌러앉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났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수와.. 화해하고 싶어."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정현. 현서는 그것을 보고 함께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럼 결론이 났네."

현서는 조용히 물러나 자신이 먹다 남긴 맥주 캔을 든다.

"솔직히 이번엔 네가 잘못한 점이 있잖아. 진수가 그렇게 가기 싫다고 했는데 멋대로 가버리고... 그러니까 네가 먼저 한 발 앞으로 디뎌. 그래야 진수도-..."

풀썩

이윽고 현서는 무엇인가가 침몰하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기절했다. 볼을 때려봐도 반응이 없는 걸 봐선 이젠 정말 사망한 거다. 조금 당황스럽다. 무슨 무당이 신내림 받은 것도 아니고....

땡그렁

빈 깡통 울리는 소리에 정현을 보니 그는 빈 캔을 멀리 던지고 새 캔을 따는 참이었다. 조용히 그 곁에 널브러진 캔의 수를 세어본다. 하나, 둘, 셋, 넷.... 열하나?! 너 그걸 다 혼자서 마신 거야?

"후우..."

정현의 한숨은 중얼거림 같았다. 그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계속해서 술을 기울인다. 안주는 바닥 난 지 오래. 공기가 니 안주냐? 술만 퍼먹는 그에게 한마디 쏘아주고 싶었지만 마지막으로 참는다. 눈가에서 빛나는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봐 버렸기 때문이다.

"미안해... 내가 다시는 안 그럴게.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할게. 반성하고 있어. 정말이야, 믿어줘. 나 약속은 잘 하지 않지만 한번 하면 꼭 지키잖아. 그렇잖아..."

"......"

"보고 싶다 진수야..."

그리고 풀썩 넘어간다. 요란스럽던 방이 침묵의 커튼으로 감싸진다. 난 멍하니 앉아있다.

공중에 붕 뜬 기분이다. 정현의 푸념은 다 들었으니 이제는 내가 달랠 차례였는데 그 부분을 현서가 맡아서 끝내버렸으니. 계획은 하늘로 사라지고 난 한 게 없다. 하긴 뭐든 좋다. 결과적으로 내가 직접 했을 때의 것과 다른 점이 거의 없는 거 같으니까.

자, 그럼 이제 뒷정리를 해야 할 판인데-

셋 중 둘은 죽었네~ 하나는 살았네~ 근데 그게 나네~? 뒷정리를 하는 건~

에이 C....

현서의 치마 속을 애써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그녀를 정현의 침대 위로 올린다. 정현은 땅바닥에 대충 엎어놓는 것으로 충분. 맥주 캔의 내용물은 버리고 알루미늄만 모아서 분리수거를 한다. 과자 부스러기는 구석에 박혀있는 빗자루로 대강 처리했다.

후우, 이 정도면 되겠지.

중요한 건 방을 정리하는 게 아니고, 정현의 마음을 정리하는 거니까.

그리고 나도 정현의 옆에 누웠다. 왠지 침대 위가 신경 쓰였지만 조용히 잠을 청했다. 내일부터 그들의 관계가 조금이나마 진전되길 기대하며, 그들의 갈등이 사분사분히 스러지길 바라면서.

Pib.





*

12월 21일 월요일.

정현을 만나고 2일, 그리고 노라월드 사건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여전히 둘의 관계는 소원하고, 울듯이 우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정현의 태도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머리 아프도록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건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니. 풀려던 실들의 매듭은 더욱 더 엉켜버렸다. 생각만으로도 인상이 찌푸려진다.

우리에게 변화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할 만큼 정현은 진솔한 모습이었건만 그걸로는 부족했다는 것인가. 최후의 보루로 남은 자존심 탓인지 살기등등한 진수의 모습에 도발 받은 탓인지 그들의 작은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이젠 장기전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골치가 아프다. 이로서 '정현이 스스로의 마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진수에게 사과하게 한다'는 화해 작전은 실패한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용히 물러날 수도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우리는 갈등의 또 다른 주체인 진수와 얘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밀어서 열리지 않는 문이라면 당겨보는 것도 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오늘밤 날 찾지 말아줘
나의 슬픔 가려줘
저 구름 뒤에 너를 숨겨 빛을 닫아줘
그를 아는 이 길이 내 눈물 모르게~』

조금 옛날 노래가 귀를 자극한다. 우리가 꼬꼬마 시절부터 유행하던 노래이다. 하지만 지금 들어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웬만한 요즘 노래들보다 훨씬 좋다. 지금 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현서다.

"꺄아아아아~~~~~~! 현서 귀여워어어어어어~~~~~~~!!"

마이크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보다 현란한 바이브레이션을 넣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진수라 불리는 여자였다. 현서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꿋꿋하게 노래를 계속한다. 저 오버스러운 반응이 싫지만은 않나 보다.

색색가지 조명과 함께 깔리는 배경음악, 그리고 탬버린과 마이크와 노래 반주를 위한 각종 기계들까지 있는 이곳. 우리가 있는 이 장소는 다름 아닌 노래방이었다. 왜 하필 노래방이냐면- 나도 모르겠다.

『보름이 지나면~
작아지는 슬픈 빛
날 대신해서 그의 길을 배웅 해줄래
못다 전한 내 사랑
You still my No.1-』

"현서 짱! 현서 짱! 꺄아아아아아!"

신났다, 신났어. 진수는 현서가 노래 부르는 모습에 넋이 나가 버린것 같다. 여자 중에서는 상당히 장신인 진수가 조그맣고 귀여운 걸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건 전교에서 유명한 얘기이다. 그리고 현서는 조그맣고 귀여운 스타일의 여자아이다. 그 뒤는 뻔할 뻔자지. 현서의 행동 하나하나가 진수에게 있어 광분거리인 셈이다. 괜히 기현서 팬클럽의 회장이자 유일한 회원인 게 아니다.

현서가 노래를 끝내고 마이크를 나에게 넘겼다. 그와 동시에 진수가 그녀를 잽싸게 데려가 자기 옆에 놓는다. 무슨 액세서리냐? 아무튼 이제는 내 차례. 내 노래에 맞춰 반주가 흐르기 시작한다.

『음, 음. 하나 둘. 하나 둘.』

"멋지다! 가라 오재혁!!"

마이크를 시험해보는 나에게 진수가 함성을 지른다. 저 녀석은 항상 저런 식으로 신이 나 있다. 개념 없는 녀석들은 자기만 흥분해서 주변 사람들을 귀찮게 하지만, 진수의 경우에는 흥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준다.

그래. 그녀에겐 모두를 즐겁게 만드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 사람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이 텐션의 도가니탕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그 천부적인 재능 덕분에 장기자랑 같은 때엔 사회자, 학급 회의에서는 회장 역할을 기본으로 먹고 들어간다. 하기는, 원래 성격이 활발하고 적극적인 탓도 있겠지만. 그런 점에서 비슷한 성향을 가진 정현과 죽이 잘 맞았다.

『어쩜 살아가다 보면 한번은 날 찾을지 몰라
나 그 기대 하나로 오늘도 힘겹게 버틴걸―』

"오오~~! 연습 좀 했는데~~! 멋있다~~!!"

"멋있다~!"

진수가 내 노래에 환호성을 지르자 옆에서 현서가 후렴을 넣는다. 한창 물오른 그들의 기분은 콘서트에 참가한 관객과 다를 게 없다.

근데 얘들아. 난 노래방 오는 건 한 달 만이란다. 연습은 개뿔이.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 진수의 활기참은 진짜가 아니다. 그건 저녁마다 나에게 걸려오는 전화의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정현은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그녀의 불평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불평이라기 보단 그냥 욕질이라고 해야겠다. 개, 소, 말, 닭, 날이 갈수록 그녀의 입에서는 동물 농장이 확장되고 있었다. 덕분에 다툼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난 그야말로 가시방석이었다.

이 엉망이 된 관계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 봐야지. 그러려고 이렇게 모인 거니까.

무난하게 노래를 마친다. 뒷부분에 '워어어~ 우으음~'이라는, 가수가 하면 감미롭고 내가 하면 소 같은 그 부분도 무난했는지는 모르겠다. 이래서 여자들이랑 오는 노래방은 조금 민망하다. 실수를 하면 그대로 민망함으로 직결되잖아.

"요 맨! 잘하는데! 이젠 내 차례인가~!!"

"와아~!"

말 그대로 이번에는 진수의 순서였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그녀는 당당히 앞으로 나선다. 현서는 그녀를 보며 박수를 쳤다. 나도 박수를 쳤다.

다시 머릿속에 잡념이 둥지를 튼다. 전자기기보다 복잡하게 설계된 이 갈등 관계를 어떻게 조정해야 명쾌하게 풀 수 있을까?

그리고

난 대체 왜 노래방에 온 거야?

현서를 바라본다. 그녀는 교복 차림이었다. 학교에서 종례가 끝나자마자 달려온 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수 역시 교복을 입었다. 저 성숙한 몸에 교복은 어울리지 않는달까, 뭐랄까. 아무래도 현서처럼 귀여운 쪽이 더 어울리지. 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며 자신이 부를 곡을 뒤적거리며 찾고 있는 현서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 노래방은 그녀가 제안한 것이었다. 나에겐 전후사정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고, '진수의 마음을 알아내기 위한 작전이야!' 이 한마디로 날 꼬드겼다. 난 져주는 척 하면서 이곳에 오긴 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녀는 단순히 놀러 온 걸까? 마음 고생하는 정현을 두고, 춘추전국시대보다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는 우리들의 관계를 무시하고, 그저 놀러 온 걸까? 걱정이 되고, 잡생각이 샘솟는다. 무슨 의도로 나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노래방에 쳐들어 온 거야? 아니면 아예 둘의 관계를 깨뜨려 놓을 생각인가? 대체 현서 너는, 너는-

『난 너를 사랑해~!』

"와아!"

오, 깜짝이야. 진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 그룹의 노래였다. 옛날 노래를 리메이크했다고는 하는데 절반 이상이 랩이라 난 도저히 따라 부를 수 없는 노래다. 그런데도 진수는 랩퍼 귀신이 달라붙기라도 했는지 좔좔 정신없는 리듬의 언어들을 음에 맞춰 정렬한다. 놀라서 그런지 얼굴이 후끈거렸다.

『혹시 그대가 미안해한다면
내 얼굴 보기 두렵다면
girl 그런 걱정 하덜덜덜 마
너라면 힘이 펄펄펄 나-!』

아까는 관중이더니 이번엔 가수가 된 진수. 우리가 카메라라도 되는지 윙크를 하고 각종 웨이브를 하고 난리 부르스다. 대단하다니까.

난 다시 힐끔 현서를 보았다. 세상을 처음 보는 소녀처럼 환한 눈을 하고 있다. 이미 설득이니 마음을 알아보니 하는 복잡한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운 것 같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결국 내가 총대를 매고 저 괴수의 속을 해 뒤집어야 할 양이다.

'진수야, 요즘도 김정현이랑 싸우냐?'

첫마디를 생각해 보았지만 너무 직설적인 게 나왔다. 상황 타파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게 디비디보다 선명하게 보인다. 그럼 2안을 생각해보자.

'야, 윤진수. 너 김정현 그만 괴롭혀!'

...개닭살 나네. 내가 김정현을 짝사랑 하기라도 하는 거 같잖아!! 싸대기 맞겠다!! 나였으면 주먹을 날릴 거야!! 궁핍한 나의 문장적 상상력을 저주하고 싶다. 대체 뭘 어찌해야 하는 걸까....!

"뭐해?"

"으, 으응?"

머리를 감싸고 있던 나에게 불쑥 마이크를 들이댄다. 진수였다. 내가 혼자만의 계산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동안 벌써 노래가 끝난 모양이다. 그런데 왜 나에게 마이크를 건네는 거지? 난 노래를 예약하지 않았는데.

"나 아닌데?"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저거 네 18번이잖아."

"어어- 정말이네."

익숙한 멜로디가 16비트 음원으로 줄줄이 들려온다. 분명히 이건 내 애창곡이 맞긴 한데, 내가 한 게 아니라니까? 난 네가 마이크를 붙잡고 나서 생각에 골몰하느라 아무런 짓도 못했단 말이야. 그럼 대체 누가 선곡을 했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 노래 재혁이가 자주 부르던 곡이었지?"

"어, 그래, 맞아. 맞기는 한데-"

내가 입력한 게 아니라고 하려는 순간 현서의 눈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인다. 한쪽 눈만 눈꺼풀을 맞닿았다가 다시 원상태로 복귀시키는 그 모습을 사람들은 윙크라고 부른다. 난 곧 눈치를 챘다.

네가 고른 거였냐?

보일 듯 말듯 끄덕이는 그녀. 역시 뭔가 수를 생각하고 온 모양이었다. 난 진수에게서 얌전히 마이크를 건네받고 앞으로 나갔다. 좋아, 네가 나를 믿고 역할을 맡긴다면, 난 그 믿음에 열창으로 보답하겠어! 다시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러재꼈다.

『니 손짓하나 보는 게 난 좋은데
니 목소리를 듣는 것도 좋은-데에-』

가사를 비추는 스크린에 집중하면서도 곁눈질로 둘의 상황을 살핀다. 손에 다시 탬버린을 쥔 진수. 내 노래 박자에 맞춰 찰랑 소리를 내면서도 눈으로는 노래방 책자를 보고 있고 옆구리에는 현서를 끼고 있다. 사람을 악세사리처럼 다루다니, 참 재주도 좋다.

『그런 내 맘까지 아프라는건지
왜 가기 싫은 날 떠미는지 ~e~ah~』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나를 탬버린으로 응원하던 진수는 잠시 악기를 놓고 노래방 기기의 리모콘을 찾는다. 그리고 자신이 원한 숫자를 꾹 꾹 눌러 노래를 예약한다.

그 뒤를 이어 현서가 자신의 노래를 예약한다. 그리고 계속 찰랑 소리를 내는 탬버린을 들고 있는 진수에게 뭐라고 속삭인다. 진수는 잘 안 들리는지 고개를 숙이며 귀를 현서에게 가져간다. 그에 대고 현서가 다시 말한다.

"진수야... 요즘 정현이 무슨 일 있어?"

수업시간에 샤프심 있냐고 묻는 것과 같은 조곤조곤한 말투였다.

"잘 웃지도 않고, 나가서 놀지도 않고. 어디 아픈 애 같아."

현서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면서 손가락을 입술 아래에 댄다. 그녀의 궁금해 하는 표정은 천진난만했지만 나의 소심한 가슴은 폭발직전이었다. 안 그래도 작두 위에서 테크토닉 추는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인데 도발해서 어쩌자는 거야!!

"걔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

"응, 그냥... 갑자기 떠올라서...."

"몰라. 그 바보 얘기는."

흥, 콧소리를 내며 진수는 다시 노래방 책에 코를 박는다. 그럼 그렇지. 너무 성급했다니까.  하지만 현서는 여유작작. 책자를 넘기며 혼잣말 하듯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까 생각난다. 예전에 진수 네가 몸살 걸렸을 때는 정현이가 전복죽 끓여다가 집 앞에서 기다렸었지? 그때 비도 굉장히 많이 왔었는데...."

그 말과 함께 진수의 표정은 싹 굳어버렸다. '그 얘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현서는 못 본 척 말을 끝내지 않는다.

"그래도 참 재밌었어.... 넌 귀찮아서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정현이는 밖에서 계속 나오라고 전화기에 대고 소리치고. 화내면서 밖으로 나왔다가 너 울었잖아. 미안하다면서. 정현이는 소리치면서 죽 받았으면 그만 들어가라고. 춥다고 빨리 들어가라고 계속 그러고..."

그녀의 과거 회상은 계속되었다. 정현이 수련회가 있었던 야산에서 길을 잃은 진수를 찾아 그 누구보다도 빨리 나섰던 일(결국 조난자는 두 명이 되었다), 준비물을 잊고 온 진수에게 자신의 준비물을 넘겨주고 대신 벌을 섰던 일,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진수와 함께 있었던 일.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처럼 따스한 그 목소리는 마치 기억을 물려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길고 긴 현서의 이야기는 끝자락까지 펼쳐졌다.

"...."

"....."

『...워우워어.』

노래방에서 침묵시위가 벌어지는 끔찍한 일만은 막아주던 나의 노래가 끝났다. 마이크의 에크가 멎을 새도 없이 취소와 시작 버튼을 번갈아 눌러 다음 곡을 시작하는 분주한 손의 주인은 진수였다. 그녀는 조용히 마이크를 넘겨받아 노래 부를 준비를 한다.

그리고 연주되는 간주를 들으며 슬그머니 옆을 바라보니, 빙판처럼 냉기가 피어오르는 얼굴을 한 진수가 보였다. 그야말로 독한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으로 가사가 나오는 브라운관을 쳐다보며 기계적으로 노래하는 진수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노래를 찾고 있는 현서를 보면 둘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온 몸에서 땀이 마그마처럼 솟아오를 정도로 끔찍한 몇 분이었다.

진수는 한 움큼의 박수도 없이 조용히 노래를 마쳤다. 그리고 침묵을 일관하며 다시 나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이상하게도 나의 또 다른 애창곡이 예약되어있었던 것이다. 진수는 열창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 결국 용의자는 한 명 뿐이다. 내가 바라보는 동안 정말 열심히 윙크를 날리는 현서를 보며 안구에 습기찬다는 용어가 어떤 의미인지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 노래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울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순간. 그때서야 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현서야. 그 얘기를 하는 의도가 뭐야?"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모나게 굳어있는 말투였다. 순간 실수로 노래를 멈춰버릴 뻔도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둘의 이야기를 엿듣는다는 걸 진수가 알아채면 좋을 게 하나 없으니. 젠장, 힘드네 이거. 억지로 다음 소절의 가사를 뱉어냈다.

"나, 난 그저..."

"너도 걔가 얼마나 나를 무시하는지 알고 있잖아? 그렇게 잘 해주는 거 다 가짜야. 걔는 그냥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만 해.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경우에만 한단 말이야. 자신이 해주는 건 무조건 다 받아야 하고, 내가 하자고 하는 건 죽어도 안한다고."

그녀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인 듯 들리는 건 나의 착각일까. 진수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낸다. 그리고 한 박자 크게 심호흡을 한다. 후, 하.

"그때도 그랬어...."

고요하니 잠적해 들어가는 그녀의 목소리가 시끄러운 노래방 배경음악 사이에서도 생생하게 들린다. 동시에 생경하게 들린다. 저게 정녕 빛나듯 활발하던 진수의 모습인가? 물음표가 뇌세포에 새겨짐을 느끼며 간신히 오감만은 노래에 집중한다. 측은함이 목소리를 떨리게 만들었다.

난 노래를 계속 불렀다. 우울했지만, 어색해서 제대로 음이 올라가지도 않았지만 꾸역꾸역 불러댔다. 그게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는 그녀를 위한 유일한 배려였으니까. 그리고 진수는,

"그래, 그때도 그랬다고!!!!"

폭발했다.

..응?

"어머나,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지가 오고 싶으니까 혼자 쳐 오고. 지가 구해주고 싶으니까 쳐 오다가 길이나 잃고 자빠지고. 미쳤냐, 그 자식? 왜 혼자 난리질이야?"

『야, 윤진수....?』

"닥쳐! 오재혁 넌 노래나 쳐 하고 있어!! 너나 그놈이나 똑같아! 으깨서 샐러드에 무쳐 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예엡.』

약간의 소란스러움을 보이는 나에게, 정숙하지 않으면 회칼로 얼굴에 그림을 그려주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화살처럼 박혀왔다. 난 그저 놀라서 말을 걸었을 뿐이라고 항의 하고팠던 마음은 오래 살려는 내 생존 본능에게 먹혀버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냐, 아냐. 그것뿐이 아니지. 옷 좀 한번 아이돌처럼 입어 보라니까 싫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발광을 하질 않나, 내가 십자수 하고 있는 걸 안 어울린다고 하도 놀려서 그렇게 잘났으면 니가 해 보랬더니 또 안한다고 쳐 지랄.....! 그게 그렇게 힘드냐 새끼야?!"

"....."

"지랄도 그런 상지랄이 없지. 광우병에 걸려 게거품을 물지 않고도 사람이 그렇게 완벽한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걸 걔 덕분에 알았어! 그것도 그냥 이기주의로 끝나면 말을 안 해. 주제에 지 좋다는 일에도 귀찮다면서 안 한다니까? 대단해. 아주 대단해! 그래도 생김새가 영장류로 보이니까 살려뒀지 아니었으면 이미 플라나리아처럼 반으로 잘라도 재생이 되나 시험해 봤을 걸!!! 믹서기에 넣고 통째로 갈아버려도 시원찮을....!!"

콰드드득

그녀가 홀로 주먹을 강하게 쥐자 손 안의 탬버린이 뿌득 소리를 내며 금이 갔다. 난 동시에 내 심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 완전 무섭다.

빌어먹을. 목소리가 울먹이는 거 같다고? 고개를 숙이고 훌쩍여? 분노로 떨리는 저 목소리를 착각한 내가 뇌성마비 환자지. 난 내 옆에서 핵융합로보다 은은하고 강력한 열기를 품은 이 여성 곁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가 신비롭다. 서태후 옆에 서 있는 게 더 편하겠네.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

"허억, 허억...."

"......."

"뭘 봐?!"

"...아냐."

돌도끼와 함께 전장을 쓸고 다니는 원시인 여성의 모습이 떠올라 버렸다. 그녀가 휘두르는 흉기에 쓰러지는 한 남자. 그의 이름은 정현이라 했다. 이 정도로 불만이 가득한 여자를 어떻게 화해시키나. 답이 없네. 캐리어라도 갈까?

"미안해, 진수야..."

그때였다. 맘껏 분노를 표출하는 진수와는 반대 분위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서였다.

"엉? 뭐라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에? 뭐가?"

뭐, 나한테 노래 부르게 시킨 거?

현서가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 뜬금없는 말이었다.

"가장 못된 건 나야.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람이 아무것도 못해주고 그냥 힘들어 하는 모습만 바라 볼 뿐, 해준 게 없잖아. 그런 나쁜 자식을 네 곁에 방치해두고."

"흐, 흠. 그래, 그랬던가?"

당황해하던 진수는 재빨리 자신을 추스른다. 반면에 현서는 울먹임이 갈수록 심해졌다.

"너무 미안해. 죽고 싶어... 정말 정현이가 그렇게 나쁜 아이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그런 줄도 모르고 난... 난....."

"혀, 현서야?"

"야, 너 울어?"

그녀의 목소리가 물기로 잦아든다. 우리는 어쩔 줄 몰라하며 현서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정말 정현이가 그렇게 나쁜 애인줄은 몰랐어..."

"혀, 현서야. 울지 마. 너 때문이 아니잖아."

"아냐, 내 탓이야. 내가 정현이가 나쁜 앤 줄 알았다면.. 진작 말렸을 텐데... 결국 나 때문에 네가 힘들어하는 거잖아..."

"야, 아니라니까!"

"으흑흑..."

"...."

황당. 당황. 순서를 바꾸면 미묘하게 뜻이 변하는 단어이지만 지금 같은 경우엔 둘 다 사용해야 할 것 같다. 그만큼 복잡한 기분이라는 것이다. 현서가 운다는 이유 사실 자체는 당황스럽고, 우는 이유는 더할 나위 없이 황당하다. 살다보니 이런 경우도 있구나.

진수는 나보다 몇 배는 더 당황했을 것이다. 뭐든 간에 자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현서가 울기 시작했으니까, 아무래도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겠지. 그 덕분인지 진수는 발등에 직경 320KM 초거대 운석이 떨어진 것 마냥 화급히 현서를 달래려 들었다.

"혀, 현서야. 울지말고 내 말 들어봐~~!"

"흑...흑...."

"현서야, 까꿍! 여기봐, 여기봐~!"

"으으으웅..."

근데 제대로 달래는 것 같지가 않다. 유치원생도 아닌데 저거 효과가 있을까. 아무리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부자연스럽지 않을 정도의 동안이지만 정신 연령이 외모 따라가는 건 아니던데. 정현 어린이나 진수 어린이처럼-

"흐아아아앙-!"

"어? 어어? 현서야? 어머?"

역시나 효율은 제로. 진수의 노력은 한줄기 땀이 되어 사라지고 눈물바다가 되어버린 노래방만이 남았다. 마이크 덕분에 우는 소리가 두배 세배가 되어서 골이 띵했다. 억지로 웃으며 현서를 어르고 달래는 진수를 보니 고소하다는 생각도 든다.

퍼억!

"커흑.....?!"

사건의 향방을 3자의 입장에서 냉철히 관찰하던 내 옆구리에 누군가의 주먹이 한 줄기 유성이 되어 꽂혔다. 진수의 강렬한 바디 블로우였다.

'너도 빨리 도와!'

'내, 내가 왜?!'

'씁!'

'알았어! 알았다고!'

그녀는 항의하는 내 코앞에 손으로 이루어진 흉기를 들이댔다. 억울함에 눈물이 눈앞을 가렸고 결국 난 현서 달래기에 매진하게 되었다. 이건 결코 진수의 주먹이 무서워서가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으하하아아아아앙!"

빠악!

'똑바로 못 해 짜샤!'

'헉, 내, 내가 뭘 했다고?!'

하지만 현서의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달래고, 어르고, 급히 나가서 과자나 음료수도 사 와 보고 별 보모 짓을 다 해 봤지만 아무래도 이 고단수의 울보는 하염없이 눈물 호수를 퐁퐁 퍼내고만 있었다. 그 와중에도 진수는 현서를 제대로 달래지 못하는 나에게 가볍지 않은 폭력을 행사했다. 젠장, 이젠 내가 울고 싶구만. 현서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흑....흑.... 끅... 끄흑... 흐에엥..."

지친다, 지쳐. 삼십분 동안이나 울고 있다니 체력도 좋다. 의외의 일면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걸핏하면 울기는 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흐느낄 수 있었던가? 웬만하면 제풀에 지쳐 중간에 그치는 게 보통이었는데.

그래도 그녀가 우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될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그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근데 이렇게나 지치니까 현서가 우는 게 이제껏 보다 곱절은 기분 좋지 않은 일로 변해간다. 앞으로 현서가 울면 측은함보단 공포를 느끼겠군.  

진수는 애를 하나 낳은 표정이었다. 질리다 못해 피곤이란 이름의 찜통에 넣고 수시간 동안 푹 삶은 모양새다. 비틀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양손을 허리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여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그래,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고!! 안할게!!!"

"우에....?"

안할게! 안할게! 안할게! 안할게!

곧 울음소리가 묻힐 정도로 거대한 목청이 귓속의 반고리관을 뒤흔들었다. 소리가 너무 크다 보니 메아리가 길게 퍼졌다.

"그냥 투정 한 번 해본거야! 짜증 내본 거라고! 그래, 정현이 그렇게 나쁜 애 아냐! 착해, 착해! 그러니까 좀 그만 울어~!"

"훌쩍.... 그럼 싫어하는 거 아닌 거야?"

"그래. 안 싫어해. 아까 말 한 건 진심이 아니야. 현서야, 눈물 좀 닦고, 응?"

"그럼 좋아하는 거구나?"

"엥?"

"..."

"..."

"...흐아앙...!"

"어, 어어 그래! 맞아! 좋아해! 좋아한다고!"

풉!

실수로 웃음소리가 새어나갔다. 이를 악물고 대답하는 진수의 얼굴엔 '이게 아닌데'라고 쓰여 있었다. 불쌍해서 눈물이 다 난다.

"어떤 점이 좋아?"

"어? 그, 그게...."

"으흑..흐그윽.."

".....말 할게. 말 한다고. 말 하면 되잖아 이 망할 것아!"

"큭...푸훗!"

"넌 조용히 해! 이걸 확!"

"푸하하하하하하!"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듯이 폭주하는 진수의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기껏 협박까지 하는데 미안하다, 그래도 웃긴 건 웃긴 거야!

Pib.






*

"무슨 생각 해?"

"그냥, 날씨가 좀 쌀쌀하구나 해서."

현서가 날 바라보았다. 난 괜히 날씨를 트집 잡았다.

우린 지금 노래방을 나와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진수와는 방금 헤어진 참이었다. 그녀는 우리와 집이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현서는 나와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아서 종종 이렇게 같이 가곤 한다. 교복을 입은 우리는 학생답게 가방을 매고 천천히 길을 걷는다.

아까의 얘기를 계속 하자면, 비명 후 진수의 입에서는 한동안 (억지로) 튀어나온 정현의 칭찬 릴레이가 이어졌다. 기왕 칭찬 하는 거 웃으면서 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가 아까 박살난 탬버린 꼴이 날 뻔 했다. 결국 현서는 눈물을 거두었고, 난 생명이 거두어질 뻔한 상황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나름 해피엔딩이다.

생각 외로 허무하게 끝났다고? 아니, 현서의 주장에 따르면, 이건 '여자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노래방에서 나왔습니다'가 결말인 게 아니다. 정현의 경우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 이것은 현서가 정현을 용서할 단서를 주는 것.....이라고 한다.

...과연?

대통령의 선거 공약만큼이나 믿을 만 한 주장은 아니었다. 진수 본인이 몰입할 생각이 없었는데 뭘. 대강 몇 개 불러주고 빨리 끝내자는 표정이었거든.

헌데 대충 하면 할수록 현서의 눈가에는 물이 장마철 한강처럼 서서히 올라오니, 입이 오리 주댕이보다도 길게 늘어지려고 해도 억지로 웃을 수밖에. 푸하하, 떠올릴수록 가관이다.

"에, 에, 그리고, 그리고- 아! 예전에 파르페를 사줬던 적도 있었어. 굉장히 맛있었어. 응, '의외로 맛집을 많이 안다.' 이것도 장점이 되지 현서야? 말고 또 뭐가 있더라..."

"흑, 으흑... 그런건 칭찬이 아니잖아...."

"악! 아아아아아악! 그, 그럼 다른거! 다른걸로!!!!"

"끄윽....윽..."

"......넌 또 뭘 웃고 있어!! 당장 나가지 못해!"

"푸핫, 아 알았어, 알았다고!"

우물쭈물 허락을 받아가며 칭찬이랍시고 정리해 나가는 모습이 너무 웃기는 바람에 난 중간부터는 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대로 있었다면 진수에게 맞아 죽던가 웃다가 죽던가 둘 중 하나의 현상이 벌어졌을 거야. 어쨌든 그렇게 튀어나온 칭찬인지 반찬인지의 분량은 A4 용지 한 장을 앞뒤로 꽉꽉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40분 동안 정현 칭찬 캠페인이 벌어졌는데 그 정도는 간단하게 넘어가지 않겠어?

컵라면은 13번이나 끓일 수 있지만 갈비찜은 재료나 간신히 다듬을 타이밍. 그 애매한 시간동안 몇 가지의 칭찬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는지는 모른다. 수십 가지, 아니면 수백 가지?

현서는 그것들이 진수의 진정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헤어지는 진수의 얼굴은 요 근래에 본 것 중에 가장 미묘한 표정이었다. 화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던 그녀의 표정은 나에게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대체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머릿속에 쓸데없는 망상이 스쳐지나간다.

설마, 일부러 화를 냈다던가.

화가 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화를 냈다. 그래서 정현이 더더욱 자신에게 매달리도록 한 거라면? 보통 그런 상황에서 여자가 화를 낸다면, 당황한 남자는 여자에게 매달리게 될 거고, 그럼 결국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서는 여자가 주도권을 가지게 될 확률이 높다. 그걸 노린 건가?

하지만 우습게도 정현은 진수를 따라 화를 내는 방향을 선택했고, 그러다보니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거다. 그래도 우리가 나서서 그 둘은 다시 이어준다면, 그 결과는 위의 계획과 비슷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잘못한 건 진수를 버리고 간 정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먼저 굽히고 들어가도록 녀석에게 조언하겠지... 그래서 일부러 까칠하게 군 걸까.

....후우.

하긴 그런 건 내가 신경 쓸 영역이 아니지. 확실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반대로 녀석과 헤어질 순간을 기대하고 있을 지도 몰라.

칫, 이젠 기대고 뭐건 간에 녀석들 화해 좀 했으면 좋겠네. 생각하기도 싫다. 몇 번 째인지 모를 한숨이 또 나왔다. 어휴. 그 정도로 나는 녀석들의 등쌀에 휩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기랄, 나도 참 힘들게 산다.

"와, 저거 귀엽다~"

"?"

현서가 종종걸음으로 길가 노점상에 널려있는 할아버지 인형을 향해 달려간다. 나도 잡생각을 버리고 그녀를 따라가 시야를 공유한다. 여러 종류의 인형들이 투명한 겨울 공기를 빨강 초록 하양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활기차고 즐거운 음악과 종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동시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오늘은 12월 21일 월요일.

"엑- 4일 뒤가 크리스마스야?!"

"으응, 잊고 있었어?"

현서가 인형을 보던 시선을 돌려 나를 향한다. 잊다 뿐이냐. 완전히 새까맣게 태워먹은 밥솥을 한 시간 뒤에나 알아챈 기분이다. 상상만으로도 밥 탄 냄새가 코를 죽창으로 찔러댄다.

어쩐지 이상하더라. 그러고 보니 저 익숙한 인형은 산타클로스고,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저건 캐럴 송과 구세군 냄비의 종소리였다. 별 걱정을 다 안고 있다 보니 주변이 바뀌는 것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다.

"제대로 까먹고 있었어. 내 참, 며칠이나 남았다고... 이게 다 사랑과 전투에나 출연할 어느 두 명 때문이라니까."

"사랑과 전투?"

"그거 있잖아.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투'. 맨날 바람 피우고 싸워서 무슨 조정 위원회 가서 정구 아저씨가 '세달 뒤에 또 오세요' 이러는거."

"아, 그거~!"

'사랑과 전투'. 부부간 이혼의 소지가 될 만한 문제 상황을 드라마 형식으로 찍은 심야 인기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이혼 전, 조정위원회에서 부부의 갈등을 조정한다는 것을 내용의 기본적인 틀로 삼기 때문에 항상 조정위원장 역할의 원로배우 정구가 3개월의 조정시간을 갖겠다는 대사로서 말미를 장식한다.

청소년 교육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19세 미만 시청 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굉장히 자주 본다지. 나나 현서도 그 중 일부고.

꺄르르, 현서는 내 말을 듣고 즐거운 듯 밝은 웃음을 지었다. 나도 웃었다. 아까까지 갓난쟁이처럼 울던 그녀가 뽀얗게 웃고 있다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우윳빛 피부와 분홍 입술, 눈의 부드러운 웃음이 포근한 색감을 연출한다. 평소에도 몇 번이나 보는 것인데 오늘따라 낯설다.

괜히 뒷머리를 긁적인다. 요즘 따라 현서가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던 일면을 계속 발견해서 그런가. 조용하기만 한 스타일인 줄 알았더니 예전에 정현을 압도하던 것도 그렇고, 오늘 갑자기 울어버리는 것도 그렇고. 내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에 몇 번이나 놀랐는지.

그녀가 노점상에서 물러나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천천히 가라고 외쳤다. 현서는 알았다고 대답하며 일부러 걸음을 늦춘다. 난 얼마가지 않아 그녀를 따라잡고, 다시 동등한 선상에서 걷는 모습이 된다. 몇 분간 걸으면서 서로 시시한 농담이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웃는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난 진수처럼 멜랑꼴리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심드렁한 바람이 심장을 훑고 간다. 께름칙한 부분이 떠올라 버린 덕이다.

깊은 호흡을 한다.

흐읍, 하아.

그래도 개운하지 않았다.

이제 곧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된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기쁨을 즐기는 그 날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갈등을 겪고 있는 한 커플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내 소중한 친구들, 서로에게 소중한 연인들.

만약 그들이 헤어지게 된다면 우리들의 관계는 대체 어떻게 변하는 걸까?

진수가 정현을 버릴 가능성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다. 낮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로지 감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확신 따위는 못하겠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헤어지게 된다면.

그렇다면 녀석들은 서로의 인연을 완전히 끊게 될 것이다. 이 판국에 다른 건 모르겠다고 쳐도, 그것 하나만은 알 수 있다. 어설프게 아는 척 하느니 깔끔하게 상처 부위를 도려내는 것이 보다 완벽한 치료법이 될 테니까.

난 그런 결말은 싫다. 지금까지 키워왔던 서로의 기억과 추억을 가슴에 묻고 지내자고? 영원히 잊어버리자고? 한때의 불장난? 웃기지 마, 너무 허망하잖아.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지내온 건 이런 끝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그래서 방금 전까지 둘을 화해시키려고 버둥거렸다. 그 버둥거림은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어 둘이 화해를 하게 되면 그게 가장 좋은 결말이겠지.

하지만

'이건 결국 그들의 일이다.'

란,

그런 당연한 생각이 뒤늦게 나의 정신을 죄어온다.

결자해지. 분란의 원인은 서로에게 있음을 자각하고 둘이서 풀어야 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 그러면서도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이 애매모호한 사건에서 우리에게 그들의 화해를 중재하는 권한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나의 자유만큼이나, 그들의 선택도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외로 약했던 정현의 모습, 의외로 고집스러웠던 진수의 모습, 의외로 활발했던 현서의 모습. 그들의 낯선 면에서 난 아직도 그들에 대해 아는 게 부족하고, 또 깊은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애초에 나에게 허락 된 자리는, 심판석이 아니라 관람석이었던 거다.

그래. 정현의 집에 갔을 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오늘 진수를 만났던 것도 그렇지. 얌전히 노래나 부르고 나왔으면 상황이 더 호전되지 않았을까? 정말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난 둘의 관계를 돌려놔야 한다는 생각으로 뛰어다녔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단순한 뻘짓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다 그저 그 하찮은 것들을 함부로 남의 인생에 들이댔다고 생각하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훌리건이 경기에 난입해서 깽판치는 것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든다.

씁쓸하다. 의욕은 사라지고 사고는 굳어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으응?"

"정현이랑 진수... 걔네 둘을 꼭 화해시켜야 하는 건가?"

현서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난 그 정직한 눈빛을 당해낼 자신이 없어 앞만을 보며 말을 잇는다.

"두 녀석 다 서로에게 불만이 있는 것 같고, 그것도 나름 이유가 타당하고. 이 정도까지 오면 우리가 간섭 할 영역이 아니잖아? 그냥 헤어지게 두는 것도 괜찮을 텐데... 어차피 자기네 인생이니까-..."

말끝을 명확하게 할 수가 없다. 민망해서였다. 실컷 일을 벌여 놓기 전에 고려했어야 하는 사항을 지금에서야 떠올리고 꼬리를 내리려 하다니.

자괴감을 한껏 느낀다. 내가 정현에게 했던 생각이 다시금 떠올라 기가 찬다. 뭐? 그에게 화가 난다고? 오히려 주제도 모르고 여기 저기 설레발치던 내가 더 가증스럽다. 아무리 살펴봐도 내가, 우리가 참견할 권한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끼어들고 싶다.

그들의 인연을 끊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

이 한 가지 고집만을 남겨둔 난, 어떻게 생각하냐고, 현서에게 묻고 있었다.

"이제 결과가 어떻게 되던, 녀석들을 내버려 둬야 하지 않을까."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포장으로 나의 맘을 감싸서.

"우리 이제, 그만 하자."

"...."

현서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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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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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9 단편 투명거북이 가리새 2009.04.04 0
1478 단편 건방진 와트슨과 흰 벚꽃 잎 해파리 2009.04.06 0
1477 단편 모네그(Moneg) - 1부(형제:Brother) 나길글길 2009.04.06 0
1476 단편 네이버 공화국 김몽 2009.04.07 0
1475 단편 상견례 세이지 2009.04.08 0
1474 단편 유령들 몽상가 2009.04.10 0
1473 단편 귀신이 사는 정원 가리새 2009.04.11 0
1472 단편 공상과학판타지 히로웽 2009.04.14 0
1471 단편 그들의 유토피아 유진 2009.04.14 0
1470 단편 그 여름의 흉가1 몽상가 2009.04.15 0
1469 단편 트라이앵글 러브 Mothman 2009.04.15 0
1468 단편 모네그(Moneg) - 2부(질투:Jealousy) 나길글길 2009.04.16 0
단편 그들만의 인연 이론 上 루사 2009.04.20 0
1466 단편 그들만의 인연 이론 下 루사 2009.04.20 0
1465 단편 우주개척시대의 기원 파디스-ㅅ- 2009.04.22 0
1464 단편 나귀 한 마리 제서 2009.04.23 0
1463 단편 드래곤이 사라지던 날 슈트룬테트 2009.04.25 0
1462 단편 새가 날아가는 시간 말랑 2009.04.25 0
1461 단편 따끈따끈 러브 앤 피스7 몽상가 2009.04.2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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