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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트라이앵글 러브

2009.04.15 15:1504.15


아침이 밝았을 때는 항상 일어나기가 싫다.
5분만 더. 아니, 3분만 더.
그러나 곧 일어나야 할 때를 깨닫고 나는 오직 나를 위해 준비된 개인 공간 안에서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이 불쾌한 감각은 정말 진절머리가 난다.
자, 오늘은 어느새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이 된지 23일 째에 접어든 날이다.
처음의 불안과 두근거림, 긴장은 어느새 사라진지 오래이다.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나 비슷비슷했다.
사실, 배우는 과목이 좀 더 어려워지고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끔찍한 제도만 아니었다면 여전히 중학생인 것 같은 데자뷰를 느꼈을 것이다.


식사를 마쳤을 때 어머니는 은근한 미소와 함께 안강이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파트 특유의 무지건조한 문을 열자 그 틈으로 눈부신 황금빛 아침 햇살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서있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서안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
키로 따지자면 177인 나와 거의 맞먹을 정도의 장신에 너무나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진 놀라운 아이.
그리고 이 아파트에 처음 이사 온 그 어렸을 때부터 알게 된 나의 소중한 친구였다.

“안녕!”

안강은 쾌활하게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마치 남자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간신히 귀까지 머리가 내려오는 정도?
사실 중학교 때부터 그녀가 고수하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 때문에 그녀의 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는 나를 직시하며 말했다.

“빨리 가자.”

그녀는 천천히 걸어갔다. 나 역시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갔고 어느새 나는 그녀 옆에 바로 선 채 발맞춰 걸어 나가고 있었다.
교복을 입을 때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어 멀리서도 묘한 모습을 풍기는 안강이는 언제나 그렇듯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항상 주의 깊게 듣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나의 의견을 제시하고 또 웃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녀 또한 나의 이야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놀라운 표정과 함께 기분 좋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수업은 지루했다. 잘하는 과목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너무 재미없게 설명하고 있어 지루했고 못하는 과목은 어려운 사실들을 역시 재미없고 이해 안 되게 설명하고 있어 지루했다.
나는 창밖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두 눈동자는 선생님을 향하고 있었지만 나의 모든 집중력과 관심은 공상하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종종 나는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이미 이 세계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푸른 지구는 천천히 멸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아니, 지구 자체는 굳건하게 존재할 것이다. 단지 인류 문명이라는 현재 상황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일 뿐.
자원은 이제 점차 위험 수준에 달하고 있다고 연일 온갖 매체에서 떠들고 있었다.
사실 완전한 석유는 이제 군대나 몇몇 핵심 시설에만 쓰일 뿐이고 불완전한 대체 에너지 장치, 그리고 대체 연료로 대체되어 있었다.
나의 이런 우울한 생각은 귀를 간질이는 경쾌한 전자 종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마침내 쉬는 시간이 온 것이다!


“아, 여자친구 만들고 싶다! 누구라도 좋으니 애인 만나서 알콩달콩한 커플의 삶을 누리고 싶어!”

나는 징징대는 내 친우를 어이없다는, 그리고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아, 물론 너무 못생기면 패스. 평균 정도만 되도 나는 오케이야!”

나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내 친우에게 주의를 주었다.

“야야, 주변 여자애들이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말 잘못하면 2학년 돼서 새 반 편성될 때까지 여자친구는커녕 여자애들에게 왕따 당할 수도 있어. 좀 조심해!”

동역은 그제서야 깨달은 듯 헉!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친구라. 있으면 좋겠지만...사실 있어도 감당할 노릇은 안 된다. 그리고 애인이라는 존재를, 사귄다는 개념을 너무나 쉽고 가볍게 경험하고 싶지도 않다.
책이나 영화를 보면 남녀 간의 사귐과 사랑은 뭐랄까, 좀 더 로맨틱하고 운명적이었다.
솔직히 난 그런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 처음 볼 때 한 눈에 반하는.

“그나저나....”

동역이는 궁금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2반의 안강이 하고는...음, 역시 사귀는 거 맞지? 애들 말 들어보니까...아니, 내가 보는 것만 해도 거의 사귀는 것 같던데?”

나는 정말 놀랐다. 이놈이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주말에 우리 둘은 영화를 보거나 그녀의 쇼핑을 도와주거나, 혹은 그녀가 내 쇼핑에 동행하거나 등등 여가 활동을 종종 같이 하곤 했다.
또한 등하교 때에도 뭐, 집이 같다보니 대부분 붙어 다니기도 했다.
학교 안에서도 서로 간의 친근감을 몇 번 드러낸 적도 있고 말이다.
흐음. 그러나 이게 그런 방향으로 오해가 될 줄이야. 사실 이 녀석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안강이랑? 나는 안강이를, 그녀를 다시 떠올리며 유쾌한 감각에 웃음 지었다.

“아,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랑 안강이는 그냥 절친한 친구야. 친구!”

“흐~음.”

동역이는 꽤나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불현듯 동역이가 나의 말을 전혀 믿지 않음을, 그리고 상당히 부러워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음, 화장실이나 가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는 뒷문을 향해 성큼 성큼 걸어갔다.
문을 형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자동적으로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의 눈앞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운명적인 여성이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작년 겨울의 첫 눈처럼 하얀 얼굴, 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붉은 빛을 발하는 입술과 볼.
반짝이는 눈동자는 은빛 안경과 조화를 이루며 그녀의 지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녀를 보는 순간 완벽하게 반해버리고 만 것이다!
내가 약간 기분이 묘한 상태로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잠시만.”

“어?”

“미안, 잠깐만 비켜줘.”

“아...아! 미..미안!”

나는 멍청하게 웃으며 서둘러 길을 비켜주었다.
그녀는 딱히 그럴 이유도 없는데 나에게 감사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흑단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으며 포니테일로 단정하게 정리된 그녀의 머리카락이 엉덩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다른 친구와 대화하는 척 하며 나는 줄곧 그녀만을 훔쳐보았다.(으음, 스토커 같군.)
그녀는 그녀의 친구로 추정되는 여성과(내 뒷자리의 여자애였는데 그녀와 나눈 대화라고는 어제 지우개를 빌려달라는 얘기가 전부였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상에,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 얼굴 전체에서 환하게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
나의 심장은 너무나 심하게 두근거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짝사랑의 열병에 취해있던 나의 정신을 일깨운 건 휴식 시간의 끝과 수업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를 가장한 전자 소음이었다.
교실 안을 꽉 채우는 그 요란한 소리에 그녀는 그녀의 친구와 대화를 마치고 자신의 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역시나 당당하면서도 사뿐한 걸음걸이로 내 앞을 스쳐지나가며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돌아갈 때 나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지나갔다.
나의 가슴과 머리는 기쁨으로 주체할 도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이 헛된 기쁨의 소용돌이에 한껏 취해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잠깐 바람을 쐬는 척하며 교실을 빠져나간 그녀가 어느 교실로 돌아가는지 확인했다.
1-3반이라. 3은 놀라울 정도로 기분 좋은 울림을 주는 숫자지.


수업 하는 내내 나의 온 정신은 조금 전 만난 운명적 그녀에게 팔려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수업 중 선생에게 지적받지는 않았으나 운이 나빴다면 아주 호된 꼴을 당할 정도로 나는 흐트러져 있었다.
마침내 내가 그렇게나 기다리던(아마 모든 학생들이 그러하겠지만) 쉬는 시간 종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수업이 끝이 났다.
나는 무작정 그녀를 기다리기 보다는 우선 내가 그녀를 향해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랑은 용감한 자만이 쟁취하는 것이라고 했지 아마?
나는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내 뒷자리의 여학생(이름은 분명....이런 젠장!)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아주 당연하게도 그녀는 뭔가 경계하는 눈빛과 수상쩍다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아니...음, 전에 쉬는 시간에 너한테 찾아온 애 말이야. 누구야?‘

그녀는 더더욱 의심스러운 기색을 띠며 약간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흠.....그건 왜 묻는 건데?”

이런 반격은 이미 예상해놓았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아는 사람 같아서. 초등학교 때 분명 친한 애였는데 연락이 끊긴....뭐, 너도 알잖아?”

“흠.”

그녀는 뜻 모를 표정으로 샤프에서 손을 떼었다. 연습장에는 내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녀가 휘갈긴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로 가득 차 있었다.

“뭐, 좋아. 걔 이름은 정미현.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야.”

정미현. 아주 아름다운 이름이다.
이름만 알아낸 것도 기뻤지만 좀 더 유용하고 소중한 정보가 필요했다.
나는 어떻게 그러한 말을 꺼낼 수 있게 대화의 시작점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책을 아주 좋아해. 중학교 때도 도서실 담당이었는데 고등학교 와서도 도서실 담당이 되다니. 아무리 책이 좋아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이름 모를 동급생에게 열렬한 키스를 퍼부어줄 지경이었다.(물론 정말로 그랬다가는 빛보다 빠른 싸대기와 함께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그녀가 전해준 정보는 실로 값진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아, 그렇구나. 그 정미현이라는 애랑 많이 친해?”

그녀는 나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런 제스처가 요즘 유행인가?) 하고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중학교 때는 그랬는데....지금은 고등학생이잖아. 반도 갈렸고 말이야. 자연적으로 멀어질 것 같아. 아무래도. 나도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고 다들 그렇지만...아무래도 걔는 아직 그러지는 못한 것 같아. 성격도 순진하다고 할까 소심하고 너무 내성적이어서 말이지.”

“흠....”

나는 맥 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도서실이라. 뭐라고 하는 것이 좋을까.
우선은.....

“안~뇽!”

깊은 고민에 빠진 채 걸어가던 나의 등을 누군가가 기운 넘치는 목소리로 내려쳤다.
이 목소리는.....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걷고 있어? 흐흐흐”

안강이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녀에게 도움을 청할까 하는 고민을 했지만.
그건 남자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뭐, 장래에 대한 이런저런 것들. 우리도 어느새 고등학생이니 장래에 대해서 나름 생각을 해야 되잖아. 안 그래?”

“아하하, 넌 종종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다니까.”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후후후. 근데 넌 왜 왔어?”

안강이는 멋쩍게 웃으며 내 오른팔을 잡고는 끌어 당겼다.
상당히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수업 정리하다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서 말이야. 좀 가르쳐 줘.”

“이 천재님의 수업 지도를 받으려면 좀 비싼데 말이야. 뭐, 별 수 없지! 특별히 공짜로 해주겠어!”

내가 무의식적으로 지은 근엄한 표정에 그녀는 입을 환하게 벌리며 웃었다.

“아하하, 바보 같아~”

귀여워라.


점심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려 퍼지자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학생들은 마치 고삐 풀린 미친 망아쇠처럼 거침없이 급식실을 향해 질주해나갔다.
급식 순서는 먼저 가서 먼저 받아먹는 사람이 1등이고 그리고 늦는 사람이 꼴등이었다.
선착순 경쟁 체제. 소중한 점심시간을 조금이라도 오래 향유하기 위해 오늘도 학생들은 달리고 또 달렸다.
물론 나 역시 그 경쟁의 참여자이자 승리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수업을 맡은 선생님이 인사를 끝낸 순간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으면 순식간에 나의 모습이 사라진 걸로 그 명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도서실에 볼일이 또한 있었다.
서둘러 밥을 먹어야 될 것이다.


도서실 분위기는 기묘할 정도로 조용하고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한 컴퓨터 시설에는 역시나 나처럼 밥을 후딱 먹고 온 몇몇 여학생들이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몇 번 구경삼아 와본 적이 있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똑같았다.
뭐, 지금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 정다운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독서 대출반납 카운터에 홀로, 그리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우선은 책을 빌려야 될 것이다. 나는 서가에서 적당한 책 한 권(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라. 제목이 묘한 울림을 주기에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안 읽을 거지만)을 골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책을 빌리는 절차를 밞는 동안 나는 뭐라고 말을 꺼내지? 인사? 아니면 곧바로 자기  소개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사랑은 미친 짓이라고 그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 가?
오늘 나는 사랑을 위해 미칠 것이다.

“안녕! 이거 빌리려고 왔어.”

우선 나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그녀는 약간 놀란 표정과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뭐, 이해는 가는 사실이었다. 보통 책을 빌리는 사람이라면 그냥 무감정적이며 기계적으로 책과 학생증만 말없이 건네주는 게 다였으니까.

“으...응.”

그녀는 나의 억측인지도 몰랐으나 묘하게 떨리는 듯한 음성으로 대답해주었다.

“우리 조금 전에 만났었지? 1반에서? 이렇게 또 만나게 됐네? 하하하”

마지막 웃음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어색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굴하지 않고 계속 망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지금 도서실 안에서는 책을 빌리려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5, 6분 쯤 후하면 모를까. 이렇게 도서 대출 위원인 그녀와 오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내 이름은....아, 알지? 학생증에 있으니까.”

그녀는 약간 멍한 눈초리로 나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소음이 이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7일간 나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끝이란 말인가?

“내 이름은 정미현....”

“어?”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이름은 정미현이야. 3반의.”

흥분에 가득 찬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침착해야 된다.

“그래?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보자.”

이런 젠장. 내가 지금 무슨 말을!
그녀는 자칫 잘 못하면 심각하게 뒤틀릴 수 있는 나의 말을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주었다.
마지막에는 너무나 상냥하고 친절한 말투로.

“책 재밌게 잘 봐. 연체하지 말고.”

은빛 안경테가 형광등에 반사되면서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멍한 눈길로 남학생들이 축구라는 이름의 거칠고 야만적 운동시합에 열중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5교시 체육 시간이었다.
체육 수업이 예상 외로 일찍 끝나면서 남은 시간은 자유 시간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남자들은 심심하면 축구를 해댔다.
그깟 공을 움직이는 일에, 그리고 또 왜 그렇게 힘 빠지게 뛰어다니는 것인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은 1, 2, 3반 합동으로 1학년들 모두가 같이 체육 수업을 한 지라 남학생들의 축구는 더더욱 격렬한 전투 양상이었다.
여학생들은 앉아서 구경하고 있거나 자기들만의 대화에 열중하거나, 몰래 휴대폰으로 채팅을 하거나 TV를 보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몇몇 남학생들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축구라는 아수라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 여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너 또 축구 빠졌구나? 이런 꾀병쟁이~”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안강이가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꾀병이라. 사실이니 뭐라 반박할 도리는 없었다.

“으음, 사실 마음이 아프거든.”

“뭐야 그게? 아하하”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사실 키가 상당히 크다는 점과 눈매가 날카롭다는 점만 빼면 안강이는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남자 친구 하나 없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면 자기가 만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일까? 대체 왜?
뭐, 애인 사귀는 건 단순히 잘생기고 예쁘고에 달린 게 아닌 문제였지만.
이 나 또한 이렇게 핸섬하고 매너 좋으며 성적도 우수한, 뭐 하나 빠질 인간이 아니건만 애인 없이 산 지 대체 몇 년인지.
그러나 나는 만나고 말았다. 첫 눈에 반하는 사랑을! 운명적인 사랑을!
나는 다시 한번 멍하게 운동장에 시선을 향하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다시 봐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안강이는 자신의 휴대폰에 온 불법 광고 영상을 나에게 보여주다가 내 시선을 딴 데 가있음을 눈치 채고는 불만 어린 얼굴로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외마디 신음성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어디 보는 거야? 나보다 예쁜 여자애라도 발견한 모양이지?”

크윽, 안강이는 내 여자 친구도 아니면서 자신이 나의 옆에 있을 때 다른 여자에 시선을 돌리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지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지만.

“아...아무 것도 아니야. 와, 저것 좀 봐! 저기 저 공격수가 무지막지한 강슛을!”

관중석을 향해 차버렸다!?
이런 빌어먹을 놈! 강렬한 소음과 함께 단단한 축구공은 여학생 무리를 향해 쇄도해오고 있었다.
비명 소리. 그리고 그 공은 내가 오늘 만나 한 눈에 반해버린 운명적 짝사랑, 정미현이라는  이름의 가녀린 안경 쓴 여학생에게 거칠게 울부짖으며 달려들고 있었다.
순간 모든 것이 너무나 느린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나는 나의 이성이 뭐라 외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 나갔다.
미현이와 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의아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로 말하고 있었다.
너는? 여기는 대체 왜?
나는 그 무언의 질문에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아주 강력한 충격을 마지막으로 나는 깊고 깊은 어둠 저 편으로 정신을 잃어갔다.


눈을 떴을 때는 낯선 천장이, 무미건조한 회색빛 하늘이 나를 반겨 주었다.
아마 양호실이겠지.

“끄응....”

나는 신음성을 토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이제 정신이 들어?”

안강이었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피로한 표정이었다.
나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혹을 살짝 만지며 중얼거렸다.

“내가...어...대체 얼마나....”

그녀는 손목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이제 6교시 끝난 마당이야. 아직 아프다 싶으면 그냥 조퇴해도 된다고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음...그...여자애는?”

안강이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불현듯 깨달은 듯 약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네가 몸을 날려 구해준 그 장본인? 네가 화려하게 공에 얻어맞고 역시나 멋지게 뒹굴 때 아주 난리도 아니더라. 119를 불러야 된다는 둥 양호실까지 같이 가겠다는 둥. 호들갑도 보통 호들갑이 아니었지. 내가 오기 전에도 너 보러 와있었더라”

“아...그렇구나.”

그녀가 오늘 처음 만난 남학생을 그렇게까지 걱정해주었다는 사실...이거 기뻐해도 되는 거겠지?
안강이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의자를 끌며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여자애, 대체 누구야?”

날카로운 눈매 사이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고양이처럼 그녀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냥 오늘 처음 만난 아이. 책 빌리면서 같이 이야기했을 뿐이야.”

“그것 뿐?”

얘 대체 왜 이래?

“그래, 그것 뿐.”

안강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예전부터 안강이는 초조하다 싶으면 입술을 깨물었지.

“그래, 알았어. 이제 난 수업 때문에...이만 들어 가볼게. 좀 더 쉬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안강의 말투가 묘하게 우울하다고 느꼈지만 이내 기우라고 치부하고는 씩 웃었다.
어쨌거나 나를 걱정해서 와줬으니 고마워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고마워. 언제 밥 한 번 쏠게!”

그녀는 마지막으로 지긋이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이내 문을 닫고 사라졌다.

“흠....”

뒤통수는 여전히 아파왔지만 그렇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퇴라. 마음이 복잡하기도 했고 선생님 쪽에서 빼준다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마다할 내가 아니었다.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이제 집은 다 와가고 있었다. 지금 학교에서는 저녁 식사 시간이겠지.
그리고 나는 오늘 아침에는 상상조차 못하던 일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걷고 있었다.
사랑은 정말 불가사의한 감정이군. 그런 생각을 품던 중 누군가가 나의 등을 탁 쳤다.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걷고 있어?”

김제민 형이었다.
제민 형은 몇 년 전까지 해외에서 거주하다가 최근에 고향에서 살게 된 형으로 그런 탓인지 억양이 꽤나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또 분명 20대 중후반의 젊은 나이에 준수한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늙어 보인다는 이미지를 종종 풍긴다는 점이다.
제민 형과는 한 달 전 겨울 방학 때 제민 형이 친구로부터 잠시 맡아두고 있던 애완고양이를 잃어버렸다가 그걸 내가 찾아준 걸 시작으로 알게 된 사이였다.
의외로 성격도 잘 맞고 집도 가까운 곳에 살아 어느새 친해진 케이스였다.
나는 제민 형이라면 이러한 복잡 미묘한 연애 문제에 잘 알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러면 한번 조언을 구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자, 들어와.”

제민 형은 보안 시스템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제민 형은 1주일 전까지는 빙설동의 어느 빌라에서 거주하다가 직업 사정상 이 곳으로 이사 왔다고 한다.
그 전의 집에는 나도 종종 놀러가 봤지만(꽤나 특이하고 유쾌한 입주자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난다) 제민 형의 새 집에 들어와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저절로 중얼거렸다.

“실례합니다~”

물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민 형의 외모와 성격 정도를 보면 분명 애인이 있을 것 같은데.

“자자, 아직은 좀 어수선할지 모르지만 편하게 들어와서 앉아있어.”


그렇게 말한 형은 냉장고에서 뭔가 마실 것을 찾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것치고는 상당히 넓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음?”

TV 옆의 책장 한 구석에 뭔가 눈에 띠는 게 있었다.
장난감?
10cm 정도 크기의 장난감 로봇이 위풍당당한 포즈로 책장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프로모션 자체는 매우 뛰어났고 세부적 묘사라던가 그 모습이 상당히 멋졌기 때문에 나는 순간적으로 탄성을 지르며 가까이 다가갔다.

“멋지네요. 이게...그 프라모델이 라는 거죠?”

“음?”

마실 것과 간단한 과자를 챙겨오던 제민 형의 얼굴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는 이상하게도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형에게 너무나 소중한 물건을 함부로 만질까봐 걱정이구나.
나는 안심하라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냥 근처에서 구경만 할 테니까요.”

“아...뭐, 그래.”

나는 그 프라모델의 모습을 이리저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눈 부분은 붉은 유리 같은 것이었는데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또한 인간으로 따지자면 귀에 해당하는 부분에 좌우 대칭으로 뿔이 나있었고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얼굴 부분이 수직선으로 쭉쭉 그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나저나...이게 그 건담이라는 건가요? 제가 언뜻 본 이미지하고 많이 다른데...아, 자작 개조군요! 과연....”

“아...응, 뭐....”

재민 형은 여전히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얼버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폐가 된 게 아닌가 싶어 나는 서둘러 그 프라모델 로봇(나의 시선은 어느새 등 뒤에 달린 X자형 날개에 향해 있었다)에서 관심을 거두었다.
역시나 이상하게도 제민 형은 내가 그 프라모델에서 시선을 떼자 아주 미미하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흠.
나는 차가운 오렌지 음료로 입을 약간 축이고 오늘 겪은 짝사랑의 열병, 그리고 이렇게 일찍 조퇴하게 된 사건을 말했다.
물론 끝에는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그리고 주의 깊게 듣던 제민 형은 한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사랑, 진실로 달콤하여라....”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꽤나 멋진 말이었다. 언젠가 한 번 써먹어봐야지.

“결론적으로 넌 지금 아주 운이 좋은 상황이야. 지금 그....미현이라고 했나? 하여간 그 여학생은 너에 대한 호감도는 아주 상당할 걸? 오늘 처음 만난 것치고는 운이 겹쳐서 아주 잘 된 거야. 너의 뒤통수에 감사하도록 해. 하하하!”

“오호!”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까요? 알다시피 저는 이런 쪽으로는 숙맥이라서.”

“쯧쯧쯧, 이 형님이 불우한 아우에게 한 수 가르쳐주마. 고맙게 생각해라!”

그렇게 장난스럽게 일갈한 제민 형의 말은 이러했다.
일단 먼저 그녀를 찾아가 자기는 괜찮다고, 오히려 너가 놀라지 않았냐고 물어보도록 하며 서로 간에 친해지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독서실 위원이며 조용한 성격이라는 말에 제민 형은 민혜가 아침부터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릴 가능성도 꽤 있다고 했다.

“에이, 설마요!”

“글쎄다. 여자라는 존재는 나 역시 아직 잘 몰라서 말이야. 뭐, 사랑에 빠지면 남자고 여자가 종종 비논리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마련이지.”

제민 형의 말에 나는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난 사랑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일순간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꿈꾸고 열망하던 사랑이란 감각은 영화나 책에서나 보던 너무나 눈부시고 빛나는 순수한 것이었다.
현실의 사랑은 내가 감당조차 못할 정도로 무거운 감정일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제민 형은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정말 감사할 일이었다.
어느새 꽤나 늦은 시간이 되어 나는 이만 집에 돌아가 봐야겠다고 했고 제민 형은 약간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행운을 빈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나를 격려해주었다.
언제 봐도 참 유쾌하고 멋진 형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학교에서 연락받은 사실에 대해 맹렬히 추궁했고 나는 괜찮다고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또한 일찍 마쳤는데도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에 대한 질문은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을 때 나는 오늘 일어난 그 모든 사건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불안과 함께 떠오르는 내일에 대한 궁금증.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그냥 포기해버렸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안강이는 나와 함께 학교를 걸어갔다.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 없이 평범한 대화를 나누던 나였지만 속은 울렁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사랑이라는 문제 하나로 평범한 하루를 이렇게 긴장감 넘치게 보낼 줄은 정말 상상조차 못했다.

“에휴, 오늘도 지겨운 학교 수업의 시작이구만. 어?”

저 멀리서 교문을 보고 탄식을 하던 안강이가 미간을 찡그렸다.

“교문 옆에 기다리고 있는 애....어제 네가 구해준 그 여자애 아니야?”

“뭐?”

나는 놀라며 교문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었다. 교문 옆에서 한 여학생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학생은 잊혀질래야 잊혀질 수 없는 강렬한 짝사랑의 감각을 나에게 깨닫게 해준 정미현이였다.
세상에, 정말 나를 기다려주는 건가? 이 나를?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자,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사실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나는 안강이에게 간단히 작별 인사를 하고 서둘러 교문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 또한 나를 발견하고는 입을 살짝 벌리며 뭐라 말하기 힘든 아름다운 표정을 지었다.
음, 먼저 내가 인사를 시작해야겠지.

“안녕, 누구 기다리고 있나 봐?”

“아....사실은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만세!

“음, 왜?”

그녀는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공 맞은 거...괜찮은가 걱정이 되서 말이야. 괜찮아?”

“아, 괜찮아! 괜찮아! 내가 공부를 좀 잘해서 그런지 머리도 단단....미안, 잊어줘.”

나의 너무나 엉뚱한 말에 민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괜찮다니 다행이네. 많이 걱정했거든.”

“아, 걱정해줘서 정말 고마워.”

아, 정말 오늘은 너무나 운이 좋은 날이었다. 시작이 아주 좋아.


교문에서의 첫 만남처럼 오늘 하루는 정말 너무나 순조로운 나날이었다. 쉬는 시간에도 나는 미현이와 항상 마주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고 어제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를 몇 년 지기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한 것이다.
어제 축구공을 뻥 찬 그 놈에게 정말 감사할 따름일 뿐이다.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나와 그녀는 서로 간에 대한 모든 것을 같이 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책, 작가, 그리고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숫자.
그녀 또한 나에게 대해 상당히 궁금해 했으며 내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 대해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나만의 착각이 아니겠지?


“고백하겠어!”

나의 결심에 동역이는 이런 미친놈이라는 표정이 틀림없어 보이는 황당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열심히 음식을 씹는 입은 헤 하고 벌어져있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나의 친우는 그렇게 툭 내뱉고는 다시 저녁 급식을 먹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무리는 아니겠지.
어제 처음 만나고 오늘 친해진 여자애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너무 급한 게 사실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그녀를 보면 볼수록 활활 불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녀와 같이 있고 싶고 그녀와 같이 지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자 친구가 되고 싶었다.
오늘 야간 자율 학습 중간 휴식 시간에....그녀에게 찾아가 고백을.....
그녀의 눈동자를 직접 보고 그녀에게 말을 하고 싶었다.
예전부터 너를 좋아했다고 너의 하나 뿐인 남자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지만....그녀도 나도 어제 처음 만났을 뿐이며 오늘이 돼서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친해졌을 뿐이다.
이런 젠장,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건 정말 미친 짓 같은데?
어제 제민이 형의 말이 생각났다.
사랑에 빠지면 남자고 여자가 종종 비논리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마련이지.

“좋아, 결심했어!”

나는 아직 반 밖에 먹지 못한 식판을 들고 거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동역이가 다급하게 말하는 소리(자...잠깐, 그거 안 먹을 거면 주고 가!)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아, 안강아. 밥 맛있게 먹었냐?”

잔반통에 남은 밥을 몽땅 비울 때 내 앞에서 안강이가 모습을 갑자기 드러냈다.
왠지 모르게 표정이 어둡다고 생각했지만 입맛이 없어서 그런가 싶어 그렇게 인사말을 건넸다.

“저기...잠깐 나랑 얘기 좀 해.”

어라, 묘하게 말투가 건조하네?
나는 마시던 물 컵을 내려놓고 살짝 웃으며 뛸 준비를 했다.

“미안,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나중에 얘기하자!”

흠, 생각해보니 오늘 안강이랑 그렇게 자주 어울리지 못했군. 쉬는 시간 내내 3반에 찾아가거나 민혜를 만났으니.

“또 도서실 가는 거...맞지?”

“어. 내가 요즘 책이 좋아져서 말이야. 하하하!”

안강이의 날카로운 눈매가 나를 직시했다. 마치 째려보는 것 같았다.

“거짓말! 넌 예전부터 책은 읽지 않았잖아! 난 알고 있어!”

뭘 알고 있다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슬슬 가봐야 될 것 같았다.

“미안, 나중에 얘기하자!”

안강이는 약간 힘없는 듯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음, 왜 그런지는 몰라도 많이 미안하네.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은 정말 묘한 느낌을 주는 시간이었다.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조용한 교실 안에서 13명의 남녀 학생들이 학교에 의해 강제로 남겨져 공부를 해야 되는 이 부조리한 시스템이라니!
그래도 옛날 우리 선배들은 밤 11시까지 했다고 하니 지금은 꽤 나아진 것이다.
우리들에 들어서는 9시에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이 끝나니 정말 옛날이랑 비교하면 좀 나아진 셈이다.
나는 연습장에 쓰고 또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는 등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하나의 대화 시뮬레이션과 문장 작성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야간 자율 학습 시간 1교시가 끝나면 중간 휴식 시간 20분. 그 시간에 나는 그녀를 찾아가 고백을 할 것이다.
어제 처음 만나 오늘 친해진 그녀에게 고백을!

“아, 젠장!”

순간 나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친구들 모두가 나를 쳐다보더니 신나게 웃은 것이다.
공부할 때 음악을 들으며 하는 습관이 있는 나는 야자 시간에 항상 MP3를 귀에 꽂고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그만 목소리를 크게 말하고 만 것이다.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차례의 소란도 잠시, 교실은 어느새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오직 들리는 소리라고는 샤프가 움직이면서 내는 사각거리는 소음 뿐.


“젠장,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거지?”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후 3반 뒷문을 열었다. 교실 안은 왁자한 분위기로 가득했는데 맨 뒷자리의 한 여학생은 조용히 책을 읽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내가 찾는 바로 그녀였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아주 가볍게 두드렸다.

“아, 안녕.”

그녀가 인사했다. 자, 이제 뭘 어떻게 해야 될까.
나는 그녀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이 세계에서 나와 그녀,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오늘 친해졌다.
어제 그녀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평생 그녀와 완전한 타인으로, 그 존재 또한 알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함부로 사랑을 고백해도 되는 것인가?

“아무 것도 아니야. 아, 요즘 재밌는 영화 개봉했다고 하는데 너는 영화 자주 봐?”

결국 나는 고백을 포기해버렸다. 그 대신 그녀 또한 영화를 상당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며 이번 주말에 그녀와 같이 영화를 보기로 한 것 뿐.
나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가야 될 것 같다.
한 가지 마음 한 구석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생각은 나와 그녀가 아주 오랜 전부터, 그리고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만난 느낌이라는 것이다.
나의 착각이겠지만.


맥이 탁 풀렸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나는 힘없이 터덜터덜 집을 향해 걸어 나갔다.
원래대로라면 같이 갔을 안강이도 오늘은 보이지 않아 우울함이 더더욱 더해졌다.

“에휴, 좋게 생각하자. 어제 만난 애한테 오늘 고백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그래, 아직 시간은 넘친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장막 아래 외쳤다.
바로 옆에서 지나가던 사람이 미친 놈 보는 시선으로 쳐다봤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자, 이제 집에 가서 좀 놀아야지.”

꿀꿀한 기분을 푸는 데는 역시 노는 게 최고였다.
신나게 컴퓨터를 할 생각에 어느새 기분이 유쾌해져 나는 휘파람을 불며 아파트로 들어갔다.

“어?”

우리 집과 안강이 집 사이이의 공간에 안강이가 멍하게 앉아 있었다.

“너 언제 왔냐? 발 빠르네.”

내가 말을 걸자 안강이는 왜 그런지는 몰라도 멍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 뭐 기분 나쁜 일이라고 있었냐?”

씩씩하기로는 남자 못지않은 안강이가 이런 면모를 보이는 것은 분명 크나 큰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정신적으로 큰 고민을 하여 우울해 할 때뿐이었다.
나는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하고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그녀의 붉은 입술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딱딱한 목소리가 나의 귀로 들려왔다.

“우리, 잠깐 밖으로 나가자.”

안강이는 강제로 나의 손을 잡더니 어두운 하늘 아래 희미한 달빛만이 비추고 있는 주차장으로 나를 이끌었다.
손과 손이 맞닿으면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에 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안강이는 계단 근처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 역시 그녀 옆에 앉았다.
음,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꽤나 차가웠다.
우린 그렇게 몇 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뭐라 말하기 힘든 이상한 분위기.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안강이는 시선을 검은 하늘로 향한 채 중얼거렸다.
희미하게 빛나는 별 하나와 달만이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음?”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란 책. 읽어봤어?”

읽어봤을 리가 있나. 잘 알면서 얘가 왜 그러는지 도통 모를 노릇이었다.

“아니.”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슬픈 눈동자였다.

“뭐, 그렇겠지. 나는 최근에 그 책을 읽어봤어. 우리 아버지 서재에 있었지. 조금 오래된 책.”

“흐~음.”

“그 책은 멸망하는 인류의 모습과 그에 대한 필사적 발버둥, 그리고 대비책. 그리고 그에 대한 인류의 구원을 그리고 있어. 인류 멸망에 복제인간 이야기가 뒤섞인 거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몸이 차가운 듯 두 팔로 자신의 몸을 에워쌌다.
추우면 집에 들어가는 게 좋을 텐데.

“내가 사실 그 소설에서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게 뭔 줄 알아? 초반부의 인류 멸망 양상이야. 거기서 묘사된 인류가 조금씩 침몰해가는 모습은.....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너무 닮아있어.”

아, 안강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제야 좀 이해가 갈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내가 무언가 대신 말해줄 수 있을까?
인류는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난 너무 불안해. 앞으로 우리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헤에....”

나는 중얼거렸다.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 되고 있었다.

“우리들은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만....우리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아니 직장을 가지고, 또 어른들처럼 사랑에 빠져....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하고....그리고 나를 닮은 아이를 낳고....우리가 정말 그런 삶을, 우리 부모님들의 걸어온 인생을 향유할 수 있을까? 난 너무나 의문이야. 그리고 난 두려워. 정말 두려워.”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새하얀 입김. 너무나 차갑고 고독해보였다.
난 안강이가 정신적으로 꽤나 강인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뭘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 걸까.
어설픈 위로는 안 하느니만 못 했다.
그녀의 손이 내 손을 꽉 잡았다. 차갑고도 따뜻한 느낌.
날카로운 눈매에 가려져 있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공 속에 비친 나의 얼굴이 참 멍청하다고 느낀 순간 나는 너무 놀라 상황 파악에 어려움을 겪었다.
안강이의 입술과 나의 입술이 서로 맞닿아있었다!
몇 초가 역겁처럼 느껴졌다. 축축하면서도 갈라진 입술의 느낌.
이게 바로 그 첫 키스란 말인가?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뒤늦게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한 지를 깨닫고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밀쳐냈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된단 말인가?
안강이는 물기 어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널 좋아해. 이 멍청아!”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충격. 나는 신음성을 토해내며 그녀에게서 얻어맞은 곳을 감쌌다.
근데 안강이가 지금 뭐라고?

“처음에 같은 반이 되고. 같이 놀고. 그리고 같이 지내면서 좋아하게 됐어! 그런데 넌 나를 그저 친구로만 보더라? 이 바보 멍청아!”

나의 오랜 친구, 서안강은 그렇게 나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는 사라졌다.
옆구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나는 이상한 공간에 앉아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물어봐도 대답 하나 해주는 사람 없었다.
하하하하
하늘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은빛으로 빛나는 기묘한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기서 평상복 상태인 나와 미현이가 팔짱을 낀 채 웃고 있었다.
하늘 속의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미현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와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서점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나는 그녀를 도와주었고 또 그녀와 친해졌다.
그 후로 미현이와 나는 서로를 좋아함을 깨닫고 서로 사귀었다.
학교 내에서도 공인된 완벽한 커플. 동역이는 부러워서 나를 괴롭힌다.
미현이가 활짝 웃고 있다. 나의 모습을 보고 웃고 있다.
나는 그러한 나를 보고 있다. 그리고 하늘의 끝에서 푸른 번개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푸른 번개는 또 다른 나와 또 다른 미현이, 그리고 또 다른 세계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려 했지만 감을 수가 없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두운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하하하
땅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렌지빛 석양으로 물든 놀이터에서 두 아이가 놀고 있었다.
한 아이는 소녀, 그리고 다른 아이는 소년.
소녀가 그네를 타다가 넘어진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소년은 당황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어린아이다운 해결책이다. 소녀의 두 볼이 붉게 물든다.
석양빛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소녀의 이름은 서안강. 그녀는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지금까지 소년과 함께 해왔다.
그리고 나는 곧 깨닫는다. 그 소년이 나임을.
나 역시 안강이를 옛날부터 특별하게 생각해왔음을.
안강이는 언제나 나의 옆에 있어주었다. 왜 나는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항상 나의 옆에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늘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번개가 다시 휘몰아치면서 미현이의 얼굴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기괴한 모습. 그녀가 점차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없는 추락.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공간에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으악!”

나는 외마디 비명성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온 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있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원래 일어나는 시간대보다 30분이나 일찍 깨어난 상황.
그렇다고 잠을 다시 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주물렀다.
샤워나 해야겠다.


어머니는 해가 동쪽에서 뜨겠다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멋쩍게 웃으며 식탁에 앉았다.
입맛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는 상황에서 아침이나마 맛있는 음식으로 먹어야 버틸 수 있었다.
나는 억지로나마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교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불안감은 더더욱 증폭되었다.
과연 안강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앞으로 안강이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 거지?
아니, 이제 나는 안강이와 친구가 맞는 걸까?
긴장된 마음으로 문을 열어보니 안강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도와 불안, 두 감정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인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와중에 그녀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 좋은 아침이야!”

언제나처럼 기운 넘치면서 건강한 말투. 그녀는 어제 일에 대해서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난 그녀를 어떻게 생각해야 될 것인가?
나는 안강이와 함께 걸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몇 번이고 훔쳐보았다.
건강미 넘치는 외모. 당당한 아름다움.
나는...그녀를 좋아하는 걸까?
지금까지 그녀와 항상 있어왔다. 쭈욱 그러리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 시간은 흐른다. 세상은 변해간다.
사람도 변해간다.
나는...나는 그녀와 함께 하고 싶다.
이렇게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운 그녀와 같이 지내고 싶다.
이것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아아, 그렇구나. 나는 너무 당연해서 지금까지 몰랐지만 서안강, 그녀를 사랑한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손을 잡았다.
안강이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마주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녀 역시 웃으며

“이제....우리 서로 사귀는 사이가 된 건가?”

안강이의 묘하게 쾌활한 질문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지. 난 너를 나의 여자 친구라고 생각할거야. 지금부터.”

“부...부끄러워!”

그렇게 말한 안강이는 나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
말과 행동이 완전히 틀리군,
어느새 교문이 보였다.
어제는 쓸쓸한 솔로로 등교했지만 오늘은 당당한 커플로 등교하게 되었다.
이 얼마나 즐거운.....어?

“아....”

안강이는 신음성과 함께 얼굴을 찡그렸다.
교문 옆에서는 안경 쓴 아름다운 여학생, 미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나는 아침 자습 시간인 1교시에 머리를 푹 숙인 채 속으로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한 유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자기혐오지!


점심도 안 먹고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도서실로 찾아갔다.
이제 매듭을 지어야 하는 문제였다. 누군가를 선택해야 된다.
그리고 그 곳에 그녀가 있었다.
책을 읽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운 미현이가.

“아, 저기 말이야...”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다가 미현이의 두 볼이 발갛게 물든 것을 뒤늦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무럭무럭 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나 이런 말 하긴 정말 태어나서 처음인데.....하하, 여자가 먼저 이러면 문제가 있는 건가?”

제...제발! 신이시여, 제발! 전 그녀를 포기하기로 기껏 마음을 먹었단 말입니다!

“나 말이야....너 좋아하는 것 같아.....처음에 교실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이런 감정은 정말 처음이야.”

나는 강렬한 두통과 함께 다리가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이 흐릿해지면서 또 다른 기억이 나를 덮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말. 흥겨운 주말의 저녁이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 미현이는 기쁜 듯이 웃으며 나의 마음을 받아준다.
그 날은 우리 모두 교복 차림이 아닌 한껏 멋을 낸 평상복. 그리고 사람을 왁자지껄한 시내의 저녁.
우리 둘은 그 날 서로 간의 감정을 확인하고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큭.....”

이마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두통이 수그러들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조금 전 나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그 생생한 영상.
그건 대체?
나의 눈앞에 안경 쓴 한 소녀가 나에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나는....”

나는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결국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해버리고 말았다.

“나도 너를 좋아해.”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었다. 아니, 조금 전 내가 본 그 환각. 그건 대체?
데자뷰. 아니, 나의 상상?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바라는 사랑 고백과 사귐을 나의 망할 두뇌가 멋대로 상상해서 또 멋대로 보여주는 것인가?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된다.
미현이는 기쁜 얼굴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으로 여자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나중에...보자!”

나는 도망치듯이 도서실을 빠져나왔다.
나의 육체는 복도를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아!”

안강이었다. 안강이와 나는 또 마주쳤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그녀를 외면하고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텅 빈 운동장과 교문을 지나 나는 인생 처음으로 땡땡이를 쳤다.


“제민이 형! 있어요? 저 지금 아주 급해요! 제발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생각나는 사람이라고는 제민이 형 뿐이었다.
형이라면 무언가 해결책을 나에게 제시해 줄 것이라는 자그마한 희망 하나만으로 나는 달리고 달려 왔다.
그렇게 몇 분을 초인종을 누른가 싶더니 문이 열렸다.

“제민....아....”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외국인 남자였다.
장신에 남자다우면서도 조각 같은 완벽한 외모를 지닌 청년.
어두운 청색을 띠는 장발 머리(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울프 헤어스타일에 가까운)는 너무나 아름다웠으며 긴 앞머리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자세히 드러나지 않는 눈동자조차도 신비한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난 우스운 일이지만 한순간 그가 신(그리스 로마 신화의)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내 옆을 지나갔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매력을 물씬 풍기는 푸른 눈동자가 아름답게 반짝였다.
세상에, 모델인가?
역시나 완벽한 뒷모습과 완벽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가는 그 청년을 나는 멍하게 쳐다보았다.

“아, 너 왔구나. 들어와. 들어와. 조금 전까지 손님이 와 있어서.”

“와, 아주 잘생긴 외국인이네요? 그 사람 대체 누구래요?”

제민 형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해외에 있을 때 같은 회사에 있던 사람. 이름은 제라드라고.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야. 이번에 관광차 온 김에 나 보러 온 거지. 그나저나 이 시간에 대체 무슨 일이야?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야?”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고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몽땅 설명했다.
제민 형은 특히 내가 어제 꾼 꿈의 내용과 오늘 도서실에서 겪은 기묘한 환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꼬치꼬치 깨물었다.
이 형 혹시....내가 정신이 좀 나갔다고 생각하는 건가?
제민 형은 이야기를 막 끝낸 나를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좋아! 넌 지금 비타민이 부족해서 체력이 많이 허해진 모양이군.”

그렇게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제민 형은 냉장고에서 형의 집에 놀러올 때마다 항상, 예외 없이 마신 오렌지 쥬스를 꺼냈다.
아무래도 제민 형은 오렌지 쥬스 열광자인 모양이었다.
노란 액체를 가득 채운 큰 컵 두 잔을 가지고 온 제민 형은 마시라고 나에게 권했다.
목이 말랐는데 잘 됐군. 시원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온 몸에 흡수되는 짜릿한 기분이 느껴졌다.

“다 마셔. 그리고 저것도 마시고.”

엥? 나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형을 쳐다보았지만 형의 눈초리는 장난이 아니라 매우 진지했다.
그리고 나의 손과 입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어라라, 왜 이래?
결국 점심도 안 먹은 배를 오렌지 쥬스 큰 컵 두 잔으로 채운 나는 트림을 내뱉으며 배를 문질렀다.

“아주 잘했어. 이제 별 문제없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형은 나의 사랑 문제에 대해 아직 아무런 조언도 해주지 않았는데?
나의 강력한 항의에 제민 형은 매우 무심한 얼굴로 한 마디 할 뿐이었다.

“아, 그건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니야.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야.”
더군다나 하품까지!
세상에, 나는 두 명의 여자 중에 누구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숙명적, 그리고 인생에 걸린 청춘의 고민에 빠져있는데 그 진지한 상담에 대한 대답이 고작!?
나는 계속 질문하고 또 얘기했지만 형은 씨익 웃으며 “곧 좋은 소식이 있다니까! 집에나 가봐. 하하하” 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집으로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형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흐흐흐” 하며 배웅할 뿐이었다.
망할!
난데없는 땡땡이(집에까지 연락이 갔다고 한다. 당연한 거겠지만)에 대한 해명과 꾸지람 등 복잡한 절차 후 나는 샤워를 했다.
물론 샤워하는 내내 안강이와 민혜, 두 여인에 대한 고민으로 내 머리는 복잡하기 그지없었지만.
거울 속에 비춰진 내 얼굴. 평범해 보이면서도 조금 잘생겼다는 느낌을 주는 얼굴....인가?
에휴.
나는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거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를 기다리며 TV를 보던 어머니는 다급히 손을 흔들어댔다.

“세상에, 저 뉴스 좀 봐라. 대통령 긴급 발표야!”

흠. 대통령이라.
TV로 시선을 돌린 나는 정신이 멍해질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대통령은 TV 안에서 말하고 있었다.
제한적 일부다처제의 시행을.
인구의 고령화와 몇 년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출산율의 악화. 무출산율에 수렴하고 있는 인구 감소에 대한 특단의 대책으로 제한적 일부다처제를 시행하겠다고 대통령은 발표하고 있었다.
세상에나? 지금 제정신인가?
좀 더 구체적인 제도 안이 설명되고 있었다.
지금부터 긴급 시행되는 제한적 일부다처제는 연령에 제한을 둘 것이며 미혼자에만 한하여 허용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엄격한 조건 심사와 자격 심사가 뒤따를 것이므로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조금 침통해하는 표정으로 이러한 제도는 이미 선진국 일부에서도 시행되거나 검토하고 있는 제도로 결국에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 인류가 늙어 죽는 것을 막기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는 이 방법에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우선 남자 한 명에 부인 2명을 두는 것을 기준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날벼락과도 같은 발표를 멍하게 쳐다보는 나의 귀로 어머니의 혀를 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정말 말세다. 말세. 나라가 미쳐 돌아가는구나!”

그렇게 말한 어머니는 채널을 돌렸다. 다른 방송에서는 이 발표 직후의 각계 반응을 종합, 편집해 방송하고 있었다.
여성계는 당연하게도 정부가 미쳤다고 성토하며 즉각 반발했고 종교계 또한 나라가 망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어느 전문가가 인터뷰하는 모습이, 국내외 논문에서 언급된 몇몇 글이 나왔다.
이러한 정책 또한 결국 미봉책에 불과하며 획기적인 해결책이 없다면 결국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는 고령화로 사라질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형에 말하던 곧 좋은 소식이 이것이란 말인가?
나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지경이었다.
오오오,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눈물마저 흘릴 지경이었다.
안강이와 미현이의 두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오직 한 명만을 선택하는 숙명적 슬픔은 없었다. 둘 다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하하하하하!”

나는 기분 좋게 웃기 시작했다.
기쁨과 환희, 즐거움으로 나의 마음은 가득 차있었다.
아 근데. 나는 문득 깨달았다.
생각해보니....어떻게 그 두 명에게 같이 살자고 고백하고 같이 결혼하자고 얘기를 꺼내 설득할 것인가 하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예상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너희 둘 다 사랑해. 그러니 같이 살자고 하면......
두 명 모두에게 늘씬하게 얻어맞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젠장! 이런 젠장!
결국 나는 오늘도 사랑의 열병에 고민, 또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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