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그들의 유토피아

2009.04.14 12:2804.14

서문.

율도국에서는 율도60년에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하지만 새로 총통에 오른 강총통은 율도국 역사상 최초로 임기 10년을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하야한 총통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하야한지 1년 밖에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도국의 많은 국민들은 그를 그리워한다. 과학자들은 더더욱 그렇다.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보아도 과학자들이 자국의 정치가를 존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강총통은 매우 특이한 정치 지도자였음에 틀림없다. 나는 강총통의 집권 초기 이야기를 하려 한다. 그 시기가 없었다면 한 달 전 율도국 사상 처음으로 율도국민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먼저 율도국을 간단히 소개하고 이야기에 들어간다.

국명 : 율도국
위치 : 대한민국, 러시아, 중국에 접경을 둔 시베리아 남부
인구 : 1천만명
인종 : 조선족 70%, 한족, 슬라브족 각각 10%, 그 외 소수민족 다수
국토 : 대한민국 면적과 비슷함
체제 : 총통중심제(임기 10년, 중임 불가), 민주주의, 자본주의
건국 : 69년 전 러시아연방에서 독립

1.

“당신 누구요? 왜 이러는 거요?”
“아, 잠시만 시간을 내주세요. 저희는 궁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뭐라구요? 궁?”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건장한 체격의 두 사내는 어찌할 줄 모르고 엉거주춤 서있는 윤사장의 양쪽에 들러붙어 팔짱을 끼더니 시청 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시청 앞 광장에 마련된 특별 무대에서는 달 탐사 우주선의 발사를 앞두고 축하 행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탓에 주변 거리가 사람들로 가득 찼고, 음악 소리 때문에 옆 사람과의 대화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자, 잘 따라와라. 앞 사람 놓치면 안 돼.”
젊은 여자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수 십 명의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행사장으로 들어가면서 길을 막는 바람에 속수무책 끌려가던 윤사장은 잠시 걸음을 멈추어야했다. 아이들은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우주소년단이라고 적혀있는 견장을 차고 있었다. 윤사장의 팔을 잡고 있던 왼쪽의 사내가 팔목에 찬 시계를 쳐다보았다. 7시15분이다.
“미안하다. 얘들아. 아저씨가 먼저 갈게.”
왼쪽의 사내가 아이들 줄을 끊고 가로 지르면서 갑자기 팔을 잡아끄는 통에 윤사장의 몸이 휘청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걸을 수 있었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이러는 거요?”
“아, 죄송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지금 만나실 분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시간이 없는 분 중의 한 분이실 겁니다. 양해해주세요.”
“도대체, 누굴 만나는데요?”
“다 왔습니다. 보시면 아실 겁니다.”
세 사람은 커다란 승용차 앞에 섰다. 검은색 승용차의 창은 짙게 코딩이 되어 있어 저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음악 소리 때문에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아 시동이 켜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승용차 주위에는 윤사장을 끌고 온 사내들과 같은 복장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아, 어서 오세요.”
어떤 여자가 다가와 윤사장에게 말을 건네었다.
“예? 아, 예”
“오시는데 불편하셨죠? 미안합니다. 차에 타시죠.”
윤사장은 이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를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승용차 뒷문을 열고는 슬며시 그의 등을 밀었다. 열린 차 문을 통해 몇 사람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뒷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곱상하게 생긴 손을 쓱 하고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오! 어서 오시오. 나 총통이요.”
정말로 총통이었다. 차에는 총통만 있지 않았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와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함께 있었다.
“놀라셨지요? 저 총통 맞습니다.”
윤사장은 얼떨결에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인사를 했다. 차 안이 아니었다면 기립해서 깊이 허리 숙여 인사를 했을 것이지만 좁은 차 안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총통은 서둘러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고 그의 자리를 윤사장에게 내주었다. 젊은 여자와 남자가 총통과 지금 새로 온 윤사장을 마주보는 형태로 자리가 잡혔다. 총통이 입을 열었다.
“오늘 행사에서 제가 카운트 다운을 같이 하기로 했는데, 15분 정도 시간이 남아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루하잖아요. 그래서 대변인에게 부탁했습니다. 근처의 시민 몇 분을 좀 모시고 오라구요. 우리 미녀 대변인 잘 아시죠? TV에 많이 나왔으니까요. 어쨌든 귀중한 시간을 제가 좀 빌리겠습니다. 허허.”
“아..” 윤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저도 사람입니다. 허허.”
총통은 윤사장의 손을 다시 잡더니 흔들어대었다.
“실례지만 선생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아, 저는 조그마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그러세요? 이거 애국자 한 분 만났네요. 감사합니다. 기업이 자꾸 생기고 그래야 우리나라가 더 발전을 하는 거잖아요. 정말 반갑습니다.”
총통은 다시 한 번 윤사장의 손을 잡더니 악수를 해대었다. 윤사장은 총통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의 손도 이렇게 잡고 흔들어대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 분들은 제가 소개해드리죠. 여기 미영씨라고 했나요? 이 분은 지금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인 예비 직장인이시고, 이 분 김과장님은 은행에 근무하신다고 합니다. 저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여러분들이 뽑아주신 이 나라의 총통이구요. 이제 1.5년차 신입이죠. 하하.”
총통의 거침없는 말투에 윤사장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먼저 와 있던 두 사람은 이미 적응이 되었는지 같이 따라 웃었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총통님. 아까 드리던 말씀 더 해도 될까요?”
“오, 그렇지. 말씀하세요.”
총통은 물병 뚜껑을 열더니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공무원 된다고 하면 젊은이가 꿈도 없네 뭐네 하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막상 되었다고 하면 좋겠다면서 부러움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죠. 그리고 말이에요, 국가는 어느 대기업보다도 큰 뜻을 품고 다닐 수 있는 직장이에요. 왜 그런 점은 부각시키지 않는지 억울해요. 아까 총통님은 이 나라 공무원의 수장이면서도 저의 꿈이 너무 작지 않느냐 하는 뉘앙스로 말씀하셨잖아요.”
“그건 제 이야기를 오해한 것 같군요. 공무원 정말 중요하지요. 저도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그런데 일부 젊은이들이 미영씨와 같은 각오 없이 다만 안정적인 측면만 생각하고 되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거지요. 그럼 너무 패기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총통은 손을 들어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해를 구하는 자세를 취하더니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그렇게 재미도 없고 그렇잖아요? 다른 이야기를 좀 하죠.”
“무슨 말씀을..”
가만히 있던 김과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지금 나이를 대충 보니 미영씨는 20대, 과장님은 30대, 그리고 사장님은 5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데 맞나요?”
“눈썰미가 있으시네요, 저는 맞습니다.”
윤사장이 대답하자 미영씨와 김과장도 맞다고 대답했다. 윤사장은 자신이 감히 총통에게 눈썰미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 것이었는지 걱정이 되었지만 일부러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자, 저는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총통입니다. 그리고 제 나이는 잘 아시다시피 이제 육십입니다. 자그마치 육십. 참 오래도 살았죠.”
총통은 혀를 내두르고는 이마를 슬슬 문질렀다. 어느 새 조수석에 앉아 있던 대변인이 총통에게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수신호를 보냈다.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여러분 중에 나와 바꿀 사람 있나요? 무슨 이야기냐구요? 총통 자리를 드릴 테니 몸뚱아리를 교환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세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윤사장이 입을 열었다.
“그게 가능한가요?”
혹시나 정부 비밀 프로젝트로 육체를 교환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나 하는 호기심이 눈에 담겨있었다. 그러나, 총통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요. 기술적으로 그것이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답변을 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당연히, 교환하지 않겠습니다.”
미영씨였다. 총통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김과장을 쳐다보았다.
“저는, 글쎄요. 저도, 음, 저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총통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였다.
“사장님은요? 이거 마치 제가 메피스토펠레스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군요. 허허.”
“그게 가능하다면 저라면 한 번 해보겠습니다.”
“빙고! 하하.”
총통의 웃음소리가 그치자마자 차문이 열렸다. 선글라스를 쓴 사내 한 명이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윤사장, 미영씨, 김과장은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 뵈어 즐거웠구요. 사장님, 가능만하다면 저는 사장님과 바꾸고 싶습니다. 진심이에요.”
총통이 세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승용차가 사내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서히 무대 뒤쪽으로 움직이자,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다 같이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사장은 양복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아내었다.
“참,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영미씨가 승용차의 꽁무니를 쳐다보며 내뱉었다.
“그러게요. 어안이 벙벙하네요.”
김과장은 어느 새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고 있었다.
“좀 어이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언제 총통의 차를 타고 그렇게 가까이 앉아서 이야기를 해 볼 수 있겠어요? 좋은 경험 했다 칩시다.”
연신 땀을 훔쳐내던 윤사장은 두 젊은이를 다독였다.
“아니, 그런데, 사장님이라고 하셨죠? 정말로 총통과 몸을 교환할 생각이 있으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시나. 저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당신들은 아직 모를거요. 그럼, 난 이만.”
윤사장은 내일 정부에 제출할 제안서를 최종 검토하기 위해 사무실로 향했다. 무대에서는 이제 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었다.
“열, 아홉, 여덟, 일곱....”

2.

거꾸로 숫자를 세기는 쉽다. 하나 까지 다 세고 마지막으로 발사를 외칠 때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술술 풀릴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모든 것들이 리셋되고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순간은 황홀했다. 화려한 불꽃놀이로 막을 내리기 전까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과학부 대신은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거 참 사람도, 고개 들라니까 그러시네. 뭐 대신이 잘 못 한 것 아니잖소?”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작 내가 물러나야할 것 같은데요? 이 나라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바로 나 아니오?”
“아니, 총통님. 그런 뜻은 아니고.”
“아아, 되었어요. 그래도 제법 올라간 다음에 터지는 바람에 사람이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 아니오.”
“그건 천만다행이지만, 악화된 여론을 무마할 방법은 저의 조속한 사퇴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만있자, 이 프로젝트가 언제 시작된 거지요?”
“딱 10년 전에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권을 잡기 전이구만.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가 책임질 일도 아니네.”
“하지만..”
“알아요. 대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당대표가 한 시간 전에 보고를 했는데, 저쪽에서는 이 건에 대해 조용히 있어 줄 테니 10호 법안에 대해서는 자기네들 뜻대로 해달라고 제안을 해왔다는데요? 뻔뻔한 사람들이야, 자기네들이 저질러놓은 일인데 그걸 이용해 먹으려 들다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총통.”
대신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당초부터 대신에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생을 그래왔듯이 대학에서 학생들 가르치고 연구하다가 논문집 헌정 받고 사회생활을 접었다면 이런 험한 꼴도 안 당했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어떻게 되나?”
“국가연구소 우주본부의 김박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지, 김박사였죠. 참 양반이었는데.”
“아무래도..”
“대신도 물러나야하는 판인데 김박사도 못 버티겠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김박사에게 전화 좀 넣어줘요.”
“예?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통화를 해야겠습니다.”
대신 뒤에 서있던 우주개발실장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바로 전화를 했다.
“김박사? 나 강실장이요. 아아.. 그거 아니고 총통께서 통화를 원하시오. 곧 전화를 할테니 받아요. 알겠죠?”
“아니, 그럴 것 없어요. 그 전화기 좀 잠시 빌려주시오. 내 오래 안 쓸게요.”
총통은 빨리 핸드폰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실장은 잰 걸음으로 총통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건네었다.
“이거 하트가 선전하는 신 모델이네? 어, 여보세요? 나 총통입니다.”
대신과 실장은 총통의 눈과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금 김박사가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는 듣지 않아도 뻔히 짐작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죽여주십시오, 그런 말들을 내뱉고 있을 것이다.
“아아,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 들으려고 전화한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서 듣기로는 이런 프로젝트를 10년 만에 단번에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20%도 안 된다는 것 아닙니까? 맞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쏘아 올리기도 전에 당연히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죠? 집단 최면이라도 걸렸던 것인가요? 80% 이상의 실패 확률이었다면 실패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겁니까?”
대신이 실장에게 눈짓을 하자 실장이 대신에게 귓속말을 했다. 두 사람은 김박사가 총통에게 이제는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요. 그런 것이군요. 알겠습니다. 그 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혹시라도 김박사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내 뜻은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정치라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았소. 그럼 들어가십시다.”
침묵이 흘렀다. 총통은 두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창가로 갔다가 다시 집무 책상으로 돌아왔다.
“왜들 그렇게 서 계시나? 바쁘시잖아요? 돌아들 가세요.”
“총통, 어떻게..”
총통이 뚜벅뚜벅 대신 앞으로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과학부 대신. 그 동안 수고했소. 우주개발실장도 마찬가지고. 내일 점심 때 식사 합시다.”
총통은 대신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이어 실장과도 굳게 악수를 했다.
“총통, 죄송합니다.”
대신은 떨리는 목소리로 총통에게 말했다. 그의 눈은 빨갛게 물들었다. 총통이 뒷짐을 지고 창가에 가서 서자 비서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 대신과 실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문을 빠져나오던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총통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나가자 총통은 창가에 놓여 있는 미끈한 달 탐사선 모형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느새 비서실장이 총통 옆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치웠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런가? 이제 여기에 뭘 두지?”
비서실장은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 어색한 분위기를 그냥 둘 수도 없어 이야기를 꺼냈다.
“2조원입니다.”
“알고 있네. 큰돈이지.”
“여기저기서 야단입니다. 그렇게 큰돈으로 겨우 불꽃놀이를 했냐고 비아냥대고 있습니다.”
“벌써 우주로 날아가 버린 돈 아닌가. 어쩌자는 거야?”
“재발 방지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국가연구소도 정비를 해야겠습니다. 안 그래도 연구원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져 하는 일 없이 월급만 챙기고 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그렇던가. 대수술을 해야겠지. 과학부 대신은 잘 챙겨드리게. 말년에 고생만 하다가 불명예 퇴진하게 되었으니 충격이 클게야.”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사퇴 발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게. 자, 오늘은 이만 쉽시다. 실장도 거의 사흘째 집에 제대로 못 들어갔죠? 그러다 쓰러집니다. 가서 쉬세요.”
“알겠습니다. 총통. 내일 뵙겠습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나가는 실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총통은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의자에 앉았다. 모니터는 초록색 바탕에 흰색으로 궁이라는 글자가 쓰인 화면을 흘려보냈다.
“촌스럽기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들었다. 3번을 꾹 하고 눌렀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신호가 다섯 번은 울린 것 같았다. 총통의 전화를 이렇게 천천히 받는 사람은 이 사람 뿐일 것이다. 드디어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웬일이신가? 이 시각에?”
“오랜만에 전화했는데 인사도 안 하시나요?”
“그건 피차일반이구만.”
“하하. 형님 잘 지내시죠?”
“총통도 잘 있나? 아니 잘 못 지내겠구만. 날아간 2조원 때문에.”
“형님한테서까지 그 이야기를 듣게 되는군요.”
“그래, 잘 해결 될 것 같은가?”
“세상에 해결 안 될 일은 없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나저나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 어디죠?”
“뭐 갈 데가 있나. 연구실이지.”
“책 보고 있었어요? 눈도 잘 안 보이면서..”
“총통. 나도 이제 책 보기 싫어. 총통도 올리비아라고 알지?”
“아, 모를 리가 있어요? 우리들의 로망 아니었소? 여신이었지.”
“그 가수의 동영상을 보고 있었지.”
“예? 아직도 살아있나요?”
“이 사람이 왜 이러나. 2조원 때문에 정신이 나갔나. 수 십 년 전 젊었을 때 찍은 동영상이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알면서도 한 남자에게 헌신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읊은 노래인데 정말 가슴이 아파오네.”
“형님에게 아직도 그런 감정이 남아있었어요?”
“이 사람이 뭐 총통만 그런 줄 아나보지?”
“아,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지 말고 궁으로 좀 오세요.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합시다. 내가 직접 안주를 만들어 대접할게요.”
“왜, 제수씨가, 아니 영부인이 어디 가셨나?”
“정말, 정치에 관심 없으시네. 싱가포르에 갔잖아요. 국제 여성 지도자 대회에 참석하러요.”
“아, 그랬었나. 미안하이. 하여튼 20분 내로 떠나도록 하지. 출입조치나 잘 해주게.”
“거 참, 전번 일로 단단히 삐지셨구만. 이번엔 무사 통과 장담합니다. 얼른 오쇼.”
  
3.

총통은 식용유를 냄비 바닥에 얇게 깔릴 정도만 살짝 부었다. 그리고 잘게 썬 신 김치를 쓸어 담고 숟가락으로 휘저으며 볶았다. 구수한 김치볶음 냄새가 코를 찌르자 총통은 다시 물을 한 바가지 쏟아 부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냄새가 잦아들었다.
“이제 5분 정도만 끓이면 됩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총통의 형은 가볍게 웃었다.
“겨우 김치찌개 대접하려고 날 오라고 하셨나?”
“겨우라뇨.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요. 보드카에는 김치찌개만큼 좋은 안주가 없어요.”
“난 뭐 중국의 불로주나 한국의 인삼주라도 내놓을 줄 알았는데 보드카에 김치찌개라.”
“하하. 실망하셨나요?”
보글보글 거리는 소리와 함께 찌개가 거의 다 끓었음을 알려주는 냄새가 부엌에 가득 찼다.
“앉으시죠.”
총통은 의자를 빼내고는 앉을 것을 권유했다.
“그럽시다.”
총통의 형이 자리에 앉자 총통은 냄비를 들고 와 식탁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던 받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자, 한잔 받으세요.”
총통과 총통의 형인 강교수는 금방 잔을 비웠다. 강교수가 술잔을 내려놓고 동생이 끓인 김치찌개를 숟가락에 가득 담아 입으로 집어넣고 꿀꺽 삼켰다.
“내가 궁에서 할머니가 끓인 김치찌개와 똑같은 맛을 보게 될지는 정말 몰랐다. 할머니도 이 맛을 보셨어야 했는데.”
“그러게요. 제가 좀 더 빨리 정치 생활을 시작할 걸 그랬나봅니다.”
“이보게 동생, 총통 하니까 좋으신가?”
“형님 같은 학자는 모르실겁니다. 이 맛을.”
“과연 그게 어떤 맛일까?”
피 맛이었다. 누구는 최고 권력의 맛을 꿀과 같이 달콤하다고 했지만 그건 겪어보지 못한 사람의 상상일뿐이다. 온갖 고초를 겪은 후 결국 맛보게 되는 피의 맛은 엄청난 중독성을 가졌다. 달짝지근한 꿀, 시큼한 식초, 비릿한 해초가 함께 버물어진 맛이다. 강교수가 비운 술잔에 총통은 다시 술을 따랐다. 술이란 피부만 벌겋게 만들지 않는다. 마음도 붉게 태운다.
“천천히 드세요. 아직 시간 많은데요.”
“총통, 술기운도 오르는데 노래나 한 곡조 하시게.”
“제가 노래 한 번 부르는데 얼마를 받는지 알면서 그런 요구를 하십니까?”
“들어본지 오래되어 그러네.”
강교수가 다리를 뻗어 총통의 발바닥을 건드리며 웃음을 지었다.
“이거 참, 별 수 없군요. 좋아요.”
총통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당신은 출렁이는 파도 같아요.
당신은 휘날리는 눈송이 같아요.
당신은 늘 같은 사람이 아니었죠.

당신이 바다에 사는 줄 알았죠.
당신이 광야에 사는 줄 알았죠.
당신은 늘 같은 곳에 있진 않았죠.

당신은 파도인가요 눈송이인가요.
당신은 바다에 있나요 광야에 있나요.
난 그저 당신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뿐이에요./

노래를 부른 총통만이 아니라 강교수도 눈을 감고 있었다.
“1절만 하지요.”
짝짝짝 하고 강교수가 박수를 쳤다.
“여전히 아름답구만. 올리비아 보다 나은 것도 같아.”
“무슨 과찬의 말씀을. 요즘은 왜 올리비아처럼 여신 같은 가수가 안 나오나 몰라요. 참, 형님은 하트라는 가수 아세요?”
“하트? 뭐 이름이 그래?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여간 내가 뭔 말을 못해요. 우리나라 가수에요. 요즘 떠오르는 샛별인데 노래도 잘 하고 스타일이 아주 좋아요.”
“지금 그 가수가 올리비아와 같은 여신급이라는 이야긴가?”
“아니, 그 정도는 아니구요. 괜찮다는 이야기죠. 그만합시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하고 이야기해보았자..”
형제는 잔을 다시 부딪쳤다.
“형님, 제가 뭐 하나 여쭈어도 될까요?”
“무언가?”
“교수로서의 인생, 후회하지는 않으세요?”
강교수의 목젖이 크게 울렁였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제가 알기로 형님은 진짜 천재셨어요. 적어도 전 그렇게 알고 청소년기를 보냈죠. 형님이 이러쿵 저러쿵 설명해주시던 그 뭡니까, 양자역학이었나요. 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그런 어려운 이야기를 형님이 이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죠. 전 다른 사람 하나도 안 부러웠지만 정말 형님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고맙구만. 그런데?”
“형님은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공부하셨죠.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바로 귀국하여 국가연구소에 취직하셨죠. 거기까진 제가 예상하던 대로였어요.”
“점점 목을 죄어 오는 느낌인데?”
“제가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형님은 늘 교수보다는 연구자가 되고 싶다고 하셨어요. 남을 가르치는데 재질도 없을 뿐 더러 1초라도 아껴서 연구를 하고 싶다고 하시던 분이 연구소에 들어가서 몇 년 안 되어 학교로 옮기셨잖아요. 그 이유가 뭔가요?”
“그 이야기라면 언제 한 번 말한 것 같은데. 연구소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 아이러니하게도 연구소의 주 업무는 연구가 아니었어.”
“그러고 보니 들었던 것도 같네요. 형님. 돌리지 않고 이야기할테니 조금 기분이 나쁘더라도 동생이니까 봐주세요. 그러니까, 음, 말씀드리자면 형님은 대학에서 원래 가졌던 자질에 비해 큰 연구 성과를 거두지 못 한 것 같은데..”
총통은 말을 끝내자 슬그머니 강교수 앞에 머리를 내밀었다. 알밤이라도 달라는 시늉이었다. 총통의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교수가 입을 열었다.
“총통, 총통은 나랑 형제인데 어떻게 이리 머리숱이 많지? 너무 대비되잖아?”
“아, 젊을 때 이미지가 있는데 관리 좀 했죠. 유전자 탓만 하면서 자포자기할 수는 없었죠.”
“진작 나에게도 귀띔을 해주지. 그래, 대학도 연구를 할 시간이 없더군. 우려했던 대로 학생들 가르치고 뒤치다꺼리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들었어. 행정일도 만만치 않고 말이야. 대학은 연구하기에 별로 좋은 곳이 아니야. 시설이나 연구 인력으로 보면 연구소가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지. 아아.. 내가 지금 전부 환경 탓만 하고 있나? 그래, 그래, 다 내가 모자라서야. 나와는 달리 연구소에서도 대학에서도 연구 잘 하는 사람들 많으니까.”
“하지만, 우린 아직 노벨상 하나 못 탔잖아요.”
“상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상이 중요하지는 않지만, 상징성은 있죠. 형님은 그럼 상은 못 탔지만 우리 과학 수준이 선진국 수준이라는 이야기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강교수는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피곤하세요?”
“나이가 들어 그런가봐. 피곤하구만.”
“형님. 형님과 술 한잔 하니까 참 좋아요. 밤새서 이야기하고 싶지만 형님 나이를 생각해야 겠네요.”
“미안하이.”

4.

사고가 발생한 후 열흘이 지나 차기 과학부 대신 후보 명단이 궁에 올려졌다. 총통 비서실장은 다섯 명의 이력서를 들고 총통실로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막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오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야당의 서대표 전화였다. 서대표는 10호 법안 통과를 위해 여당이 협조해준데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비서실장은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정치 아니겠냐고 대답을 하고는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야당 대표가 과학부 대신으로 누가 선정될지 궁금하다고 물었다.
“대표님. 그건 저도 모릅니다. 총통께서 최종적으로 누굴 낙점하실지는.”
“허허, 비서실장. 그걸 누가 모르나. 다만 내가 이력을 보니 윤박사가 제일 적절한 것 같아서 말이지. 그 양반은 쓸데없이 텅텅 빈 공간에다 돈을 낭비할 사람으로는 안보이더라구. 전공부터가 우리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생명공학 아니오?”
“알겠습니다. 대표님의 뜻을 전해드리지요. 뭐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아니오. 바쁘신가본데, 되었습니다. 비서실장. 근자에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예. 그러시지요.”
비서실장은 개구리같이 생긴 야당대표의 얼굴을 떠올렸다. 20년 이상 정치계에서 총통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유지해 온 야당대표는 요즘 들어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의정 활동을 활발히 홍보했다. 달 탐사 프로젝트의 실패로 총통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틈을 타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이었다.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상대방이 실수를 했을 때 직접적으로 공격을 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대신 자신을 드러내었다. 그가 직접적으로 공격을 하는 때는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한 정말 마지막 순간일 것이다. 비서실장의 노크 소리에 총통은 잠깐만 기다리라는 대답을 해왔다. 10초 정도 지나서야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총통은 집무 책상 앞에 앉아있었는데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더우신가요? 총통?”
“아니, 아닙니다.”
“혹시..”
“혹시 뭐 말입니까? 실장.”
실장은 총통이 하트의 음악을 듣거나 동영상을 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아닙니다. 과학부 대신 후보자 5명의 이력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내일까지는 지명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 봅시다.”
총통은 실장이 건넨 서류를 빠르게 넘겨보기 시작했다. 사진과 이름을 동시에 보고 학력 및 경력을 보았다. 과학부 대신 후보답게 모두들 박사학위 소지자였는데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이 세 명, 영국에서 한 명, 그리고 일본에서 받은 사람이 한 명이다.
“국내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은 없나요? 실장?”
“한 명 있었습니다. 열 명의 후보 내에는 있었는데 다섯 명으로 압축되면서 제외되었습니다.”
“결격사유라도 있었나요?”
“특별한 사유는 없었지만, 지명도가 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 줘 보세요.”
총통은 손짓을 하며 이력서를 넘겨달라고 했다. 실장은 혹시나 하고 탈락한 다섯 명의 이력서를 가지고 온 자신의 준비성에 내심 만족해하면서 서류를 넘겼다.
“정말 잘 모르는 사람이군.”
“하지만, 나름 그 분야에서는 실력이 있는 과학자입니다. 재야 쪽에서 추천한 분이지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주류는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장, 이 사람까지 포함해서 여섯 명에게 자신이 어떻게 우리나라의 과학 정책을 이끌어나갈지 계획서를 받아오세요.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오늘 저녁까지 내라고 하십시오. 음, 두 장 정도 분량이면 되겠군요.”
“그렇게 까지 하실 필요가?”
“전번에 실장이 그러지 않았소. 확 뜯어고쳐야 한다고..”
“그건 국가연구소 이야기였지요.”
“국가연구소가 우리나라 과학 정책의 핵심 아닙니까. 말 나온 김에 잘 되었네. 그 계획서에 국가연구소 운영 방안을 꼭 집어넣으라고 하세요. 계획서를 보고 세 명 정도로 간추려서 최종 면접을 치른 후 지명하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또, 뭐 있나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죠?”
총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학교에서 체육 수업 전면 확충한다고 발표한 교육부 시행령에 대해 반발 여론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또 놀자판 정권답다는 말들이 돌아다니겠군.”
“국회에서 내일 교육부 대신을 불러 따지겠다고 야단입니다.”
“교육부 대신은 잘 준비하고 있겠죠?”
“물론입니다. 그러나 잘 돌파할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골치 아프군. 이번 기회에 과학부와 교육부를 확 합쳐버릴까요? 여기저기 문제꺼리들을 흩어놓을게 아니라 한꺼번에 처리해버릴 수 있게 말이지."
총통은 양 손의 엄지와 검지로 머리 옆을 꾹꾹 눌러대었다.
체육 수업의 전면 확대는 교육부가 아닌 총통 자신의 아이디어였다. 네 달 전 각료들을 모아 놓고 식사하던 자리였다. 교육부 대신이 앞에 앉아있었던 관계로 총통은 교육 정책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모든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현 교육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지 타파는 해야겠는데 대신은 무슨 아이디어가 있느냐는 것이 총통의 질문이었다. 교육부 대신은 총통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대충 일반적인 이야기해보았자 결국에는 득 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대신은 각료가 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대신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이 새로이 제시되었지만 성공작으로 평가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먼저 강조하고서 특별한 아이디어는 없다고 이실직고했다. 교육부 대신의 너무나도 솔직한 대답에 옆에 앉아있던, 지금은 집으로 간 과학부 대신은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달그락 달그락 숟가락과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만 넓은 식당에 울려 퍼지길 수십여 초, 말없이 밥알을 씹고 있던 총통이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수가 없다는 뜻이네요. 무척 실망스럽지만 저의 진단과 다르지 않아 기쁘군요. 수십 년을 교육 현장에 계신 분의 판단과 제 판단이 일치하다니 말이죠.”
교육부 대신의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과학부 대신은 연신 냉수를 들이켰다.
“교육부 대신. 이거 하나 확인합시다. 거두절미하고 학교가 학원에 비해 교육의 질이 많이 떨어지는 것 맞죠?”
“아쉽습니다만..”
“그렇다면, 학교가 학원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정말 없는 것이오? 아니면 못 찾는 것이요? 우리 그걸 한 번 진지하게 찾아봅시다.”
1주일 후, 총통은 다시 교육부 대신을 찾았다. 교육부 대신은 두 장짜리 보고서를 총통에게 내밀었다. 총통은 단숨에 보고서를 읽었다. 총통의 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보고서를 옆에 서 있던 비서실장에게 넘겼다.  
“대신, 그 쪽에서 이렇게 아이디어가 없다면 내 생각대로 한 번 해보겠소?”
“말씀하십시오.”
“학교 수업의 30%를 체육 수업으로 대체하시오.”
“예?”
비서실장이 큰 소리로 반문을 했다. 교육부 대신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좀 도와달라는 애원의 눈빛이었다. 총통의 수 십년지기 정치 동지인 비서실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총통.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쟁력도 없는 학교 수업하느라 선생도 학생도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에 체력 단련이나 시키란 말이오. 가뜩이나 우리는 서양인에 비해 덩치도 작고 체력이 약한데, 애들은 공부에 절어 밥맛이 없어지니까 밥도 잘 안 먹지, 아니 밥 먹을 시간도 없지, 운동시켜줄 수 있는 시간이 학교 체육 시간뿐인데 그 나마 있는 시간도 자습이나 다른 교과목 공부로 대체하고, 그게 우리 현실 아닙니까? 내 말이 틀렸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 있는 시간의 삼분의 일을 체육 시간으로 배정하라는 말씀은 공교육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대신, 말씀 잘 하셨소. 이미 공교육은 망했잖아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 아니오. 그걸 그냥 인정하자니까요.”
교육부 대신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쓰윽 하고 훔쳤다.
“우리에겐 인터넷 교육망이 있지 않소. 그것을 업그레이드 시킵시다. 인터넷 교육을 통해 대부분의 지식을 얻도록 하고, 학교의 교사들은 인터넷 교육만으로는 부족한 아이들의 보강 수업을 하는데 활용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는 시간에 애들 체력을 길러주자 이겁니다. 아니 그것도 좋겠네요. 음악, 미술 등 예술 관련 과목의 비중을 확 높이는 겁니다. 체육과 예술은 사교육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비용이 과하잖아요. 그걸 공교육에서 해주는 겁니다. 언어, 수학, 과학도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수준 차이에 따라 차별적으로 교육받는 것이 아니고 검증된 수준의 인터넷 교육으로 대체하자는 것이지요. 가진 돈이 많아서 사교육을 더 받겠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체제에서는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리에 모인 그 누구도 총통의 의견에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다른 방도가 없어 개선하는 흉내만 내 온 것이 지금까지의 교육 정책이었다. 총통은 되지 않을 것을 인정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다만, 이런 정책을 제시하고 추진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 동안의 위정자들은 입을 다물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총통은 그런 면에서 달랐다. 총통이 추구하는 인생관이나 국가관이 무엇인지 아무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안 되는 것은 인정하고 나가자는 주의였다. 그렇게 해서 발표된 체육 시간 확충 정책은 제도권 교육계는 물론 사교육계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은 야당이 중심이 되어 국회에서 교육부 대신을 출석시켜 따지겠다는 상황에 이르렀다.  
“비서실장. 내가 뭐 잘 못 했나요?”
“아니오, 너무 잘 하셔서 걱정입니다.”
비서실장이 오랜만에 웃음을 흘렸다. 총통은 이래서 실장을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은 멀쩡할 때도 혼자 심각하다가, 모두들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큰 일 났다고 아우성치기 시작하면 오히려 낙천적으로 변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바로 실장이었다.
“실장, 난 이 자리에 오른 후에 돈이든 권력이든 그 무엇이든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의 것을 빼앗고자 한 적이 없어요. 저쪽에서 만들어놓은 정책이라도 좋은 성과만 있다면 그냥 두었잖아요. 잘 돌아가고 있는데 뭐 하러 건드려요? 하지만 안 돌아가고 있는 것은 건드려야지. 그게 내가 할 일 아니오? 그것을 못 하겠으면 물러나던지. 내가 여기에 앉아 있을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이오? 난 이거 교육 건하고 과학 건은 내 뜻을 관철시키겠어요. 다른 것은 모르겠어요. 크게 문제없다는 판단이 드니까.”
한 차례 말 줄기를 쏟아 부은 총통은 컵을 들더니 단번에 냉수를 들이켰다. 실장은 총통이 과학 정책은 또 어떤 것을 내놓으려 저런 말씀을 하는지 불안해졌다. 그리고 총통이 안 되면 물러나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불안했다. 최고의 권력보다 더 그를 유혹하는 것이 무엇일까, 총통은 냇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였다.

5.

국회는 연일 난리법석이었다. 교육분과위원회와 과학분과위원회 의원들과 교육부와 과학부의 고위공무원, 그리고 궁의 비서실 직원들은 매일 국회로 출근하는 형국이었다. 이미 몇 개월 전부터 공방이 시작된 교육 정책에 대한 논란도 끝나지 않았는데 새로이 과학 정책이 이슈가 되면서 두 사안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어 정국을 혼란으로 몰고 갔다. 오늘은 과학부 대신이 국회에 와서 새로운 정책에 대해 질의 응답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상 최대의 치열한 경쟁과 면접을 거쳐 임명된 과학부 대신은 업무를 시작한지 이제 겨우 한 달여 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최악의 인사라는 평가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온갖 악평에도 꿈쩍하지 않고 연일 국가연구소의 새로운 운영 전략에 대해 홍보를 하고 다녔다.
“과학부 대신입니다. 이렇게 의원들을 만나 뵙고 정책을 설명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 구의원인데.. 먼저 사실 확인부터 합시다. 대신은 학위를 어디에서 받았나요?”
“아..”
“되었어요. 여기 이력서에 다 적혀 있구만요. 가만 보자, 포스닥이라도 외국에서 받았나 모르겠네..”
“예, 박사 후 과정은 한국에서 했습니다.”
“한국? 음, 에, 거기도 외국은 외국이군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국가연구소 운영 전략 이거 대신이 승인한 것 맞아요?”
“아, 잘 안 보이는데..”
“안 보인다구요? 이봐요. 서기. 이 것 좀 저 양반에게 갖다 주시게.”
앞에 앉아 있던 서기가 벌떡 일어나 서류를 건네받아 대신에게 전달했다. 대신은 서류를 몇 장 넘겨보더니 틀림없다고 대답했다.
“이게 도대체 놀고 먹겠다는 거 아닙니까? 이런 전략을 한 나라의 과학 정책을 주관하는 대신이 국민을 상대로 발표해도 되는 겁니까?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그야말로 별을 보고 나와서 별을 보며 집에 들어가는 수많은 국민들이, 피 같은 세금을 내는 국민들이 이걸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겠어요? 입이 있으면 말을 좀 해봐요. 해 봐!”
“의원께서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놀고 먹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의 과학 수준을 한 층 올리기 위해서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일 뿐입니다.”
“놀고 먹는 것이 아니라구요? 자, 여기. 그래 이 문구를 한 번 보자구요. 국가연구소의 과학자들에게는 특별 예산을 편성하여 매년 지급하되, 그 사용처에 대해서는 별도로 심사, 정산 또는 감사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궤변이오? 세금을 어디다 썼는지 확실하게 규명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정부의 의무란 말이오.”
“과학은 유희적 측면이 강합니다. 특히 기초과학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간섭할 대상이 아닙니다. 국가는 과학자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지원만 하면 됩니다. 백 개 중의 하나만 결실을 맺어도 엄청난 국가 경쟁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정책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과학자들이 연구는 하지 않고 연구비를 따러 다니느라 기력을 소진해야 했지요, 그리고 따 온 돈의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다음에 돈을 또 따올 수 없으니까 늘 성공만을 하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이라는 것이 어디 쉽습니까? 성공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통계를 보면 나라에서 투자한 과학기술개발 과제의 95%가 성공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성공으로 조작을 했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실패할 수 없는 과제만 했든지 뭐 그런 이야기 아닙니까. 이런 현실을 바꾸어보자는 뜻..”
“닥치시오. 대신. 그 무슨 막 말이오? 그래서 고작 유희를 즐기려는 과학자들에게 국민들은 돈을 갖다 퍼 주어야 한다 그 말 이오? 어휴.. 저런 걸 대신이라고..”
“어허.. 구의원. 품위를 지키세요.”
듣다 못한 국회의장이 끼어들었다.
“의장님.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좀 헛 나왔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대신! 총통의 재가도 받은 것이지요?”
“물론입니다.”
“학교에서 냅다 뛰어 놀게만 하자는 것도 총통이 재가한 것이었지요. 그리고, 과학자들 역시 놀고 먹게 하자는 것도요. 이거 원,, 과연 놀자판 정권답구만.”
마지막 말은 마이크에서 떨어져 거의 들리지 않게 내뱉었지만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던 여당의 5선 의원인 최의원은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는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라고? 저 새끼가? 야, 구의원! 너 말 다했어?”
“뭐? 새끼? 최의원! 당신이야말로 신성한 국회의사당에서 무슨 쌍소리요?”
“말을 인간답게 해야 사람대접을 해주는 거 아니야?”
“일을 일답게 해야 지도자 대접을 하지.”
그 때 땅땅땅 하고 의장이 봉을 내리쳤다.
“30분간 쉬겠어요.”

그 시각, 총통은 집무실에 앉아 국회의사당 현장을 중계로 지켜보고 있었다.
“실장.”
“예, 총통.”
“저리 갑시다.”
총통은 턱으로 TV를 가리켰다.
“총통. 안 됩니다. 불 난 집에 기름 부으러 가시려는 겁니까?”
“어차피, 대신 힘만으로는 어렵겠습니다.”
“그래도 지금 나서시면 우리 패가 초반에 다 소진되는 겁니다.”
“하하. 실장. 도박도 못 하는 사람이 무슨 패요? 하하.”
“그렇게 쉽게 생각할 사안이 아닙니다.”
“아, 되었어요. 나도 생각이 있어요. 갑시다. 국회에도 연락을 해놓으세요.”
“예?”
“실장, 저것도 들고 와요.”
“총통.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거 시청률 좀 봐요. 무려 25%잖아. 이건 대단한 쇼에요. 이런 쇼에 내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 옛날 분위기 한 번 내봅시다.”
총통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6.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총통께서 입장하십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자 총통이 걸어 나왔다. 총통은 전면에 걸려있는 국기에 경례를 한 후 국회의장에게 목례를 하였다. 그리고 30분 전에 과학부 대신이 서 있던 자리로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들. 구의원님! 열정적인 질의 잘 들었습니다.”
어느 새 야당 대표 옆으로 가 앉아 있던 구의원은 총통의 인사에 어쩔 수 없다는 투로 고개를 까딱했다.
“서대표님도 나오셨군요. 저희 정책 설명회에 이렇게 많이 나와 주시고 관심 쏟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과학부 대신께서 열심히 설명을 해주셨는데, 아무래도 오해가 잘 안 풀리는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많은 양해바랍니다.”
국회의장이 또 끼어들었다.
“잘 오셨습니다. 총통. 이 사안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논란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니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속 시원하게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존경하는 의장님. 제가 말입니다.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름은 잘 기억 안 나는데 유명한 학자 이야기입니다. 이 분이 어린 시절에 그다지 풍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고향이 섬이었는데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동산에 올라 드러누워 하늘과 바다를 쳐다보며 이것 저것 공상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고 합니다. 그 시각에 도시 아이들은 열심히 학원에 다니면서 선생님들이 하는 말씀을 차곡차곡 머리에 쌓고 있었겠죠. 여기 계신 대부분의 분들이 아마도 그런 교육의 수혜자이실테죠.”
약간의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회의장은 곧 조용해졌다. 도대체 총통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음을 비서실장은 느낄 수 있었다. 실장은 손에 들고 있던 포터블 TV를 쳐다보았다. 시청률이 30%로 높아졌다.
“우리나라 인구가 몇 입니까? 그렇죠. 천만입니다. 그럼, 실례지만 과학부 대신! 국가연구소의 연구원 수는 몇이죠? 몇이라구요? 그렇죠. 오천 명입니다. 그럼 전 국민 대비 몇 퍼센트입니까? 0.05%입니다. 물론 기업 연구소에서 일하시는 분들까지 생각한다면 훨씬 많겠지만 오늘 논란이 되고 있는 정책은 우리 국민의 0.05%인 국가연구소 과학자들과 관련된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에게 우리나라는 얼마의 돈을 투자하고 있을까요? 과학부 대신, 다시 한 번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아, 그렇죠. 일인당 1억 원. 그러니까 5천억 원입니다. 잠깐만요. 오랜만에 연설을 하니 목이 벌써 마르군요. 옛날에는 몇 시간을 해도 괜찮았는데 역시 나이는 속이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총통은 넥타이를 약간 느슨하게 풀더니 물을 마셨다.
“중요한 것은 이 5천억 원이란 돈은 어차피 국가연구소의 과학자들에게 지급될 돈이라는 점입니다. 지금도 월급으로 다 지급되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개발 과제에 인건비가 태워져있어야 하지요. 그리고 그 어떤 개발 과제를 지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해마다 과학자들과 담당 부서 공무원, 그리고 예산을 짜는 공무원, 그리고 국회의원들이 한바탕 전쟁을 치룹니다. 맞지요?”
총통은 구의원을 쳐다보았지만 구의원은 자신의 노트에 필기를 하는 시늉을 내고 있었다.
“이걸 없애자는 겁니다. 어떤 과제를 제안하고 심사하고 돈을 할당하는 과정을 생략하자는 거에요. 연 5천억 원의 돈은 어떤 식으로든 분배되어 나가니까 이런 비효율적인 요식 행위를 없애고 과학자들에게는 그냥 월급 줄 테니 마음껏 하고 싶은 연구하시라, 이것이 이번 정책의 핵심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공무원처럼 그냥 월급을 주자는 것입니다.”
총통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연구원들이 그냥 월급 받으니까 놀고 먹을 것이다 하고 우려하시는 것 잘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체제에서도 열심히 안 하는 분들 있어요. 예, 인정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하시는 분들도 많지요. 이번 정책이 채택되면 아마 신나서 연구하실 과학자들 더 많아지리라 생각합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제 형님이 과학자입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 대학에 계신데, 제가 어렸을 때부터 봐와서 잘 압니다. 이런 분들은 아무 걱정거리 없이 연구만 할 수 있게 해주면 그걸로 끝입니다. 월급 좀 작고 권력 없다고 해서 투덜거릴 분들이 아니지요. 대신 이렇게 되면 담당 공무원과 국회의원들, 일부 기자분들은 좀 심심해지시겠지요. 하지만 그런 분들은 다른 만날 사람들 많잖아요. 저도 있고 여기 서대표님도 계시고 여러 대신들도 계시니 과학자들은 그냥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연구할 수 있게 합시다.”
다시 물을 마신 총통이 말을 이었다.
“물론 보완책은 있습니다. 나라에서 집중적으로, 전략적으로 키워야 할 과학 분야를 크게 세 분야 정도 선정해서 10년간 장기적으로 투자를 할 예정입니다. 이런 분야는 과학자 개개인에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연구하라고 해서 종합적인 성과가 나오기 힘들다고 판단되므로 사업단을 꾸려 원하는 과학자들을 모아 연구해나갈 것입니다.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 과학자들은 원하는 연구 마음껏 하시면 됩니다. 아까 과학부 대신도 말씀하셨지만 백 사람이 연구하다 한 사람만 성공해도 그 부가가치는 이루 말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천억 원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자, 비서실장. 그것 좀 부탁해요.”
총통이 비서실장에게 손짓을 했다. 시청률이 35%로 뛰어오르는 것을 확인하면서 실장은 들고 있던 기타를 총통에게 갖다드렸다. 그 장면을 본 구의원이 서대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니, 저 자들이 선거 때 써먹었던 것을 또 써먹으려고 하는데요?”
“하여간, 광대들은 어쩔 수 없어. 이번에도 노래 부르는 모습에 국민들이 속을 줄 아나?”
의사당 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놀라셨죠? 또 놀자판 정권이라고 말씀하시려구요? 하하. 존경하는 의장님. 신성한 의사당에서 제가 노래 한 곡조를 부르려고 합니다. 부디 허락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국회의장은 두리번거리며 여당과 야당 대표를 쳐다보았다. 그 누구도 의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 때, 이미 총통은 기타 줄을 뜯기 시작했다. 청아한 기타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무려 35년 전, 율도국의 국민가요라고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그 노래가 시작되었다.  
  
/당신은 출렁이는 파도 같아요.
당신은 휘날리는 눈송이 같아요.
당신은 늘 같은 사람이 아니었죠.

당신이 바다에 사는 줄 알았죠.
당신이 광야에 사는 줄 알았죠.
당신은 늘 같은 곳에 있진 않았죠.

당신은 파도인가요 눈송이인가요.
당신은 바다에 있나요 광야에 있나요.
난 그저 당신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뿐이에요./

비서실장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시청률 42%. 러시아와의 축구 경기에서도 기록하지 못했던 경이적인 시청률이다.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는 총통은 나이 육십의 늙은 정치가가 아니라 아이돌 스타로 시작해 국민가수로 추앙받던 젊은 시절의 총통 그 모습이었다.
노래가 끝났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박수를 쳤다.
박수는 또 다른 박수를 불러내어 의사당 안은 곧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총통. 끝까지 잘 하세요. 쇼라면 우리만큼 잘 하는 사람 없잖아요.’
매니저로 총통과 인연을 맺어 지금의 자리에 오른 비서실장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감사합니다. 신성한 의사당에서 감히 허락도 없이 노래를 부른데 대해서는 제가 어떤 식으로든지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노래를 그저 옛 추억에 빠져 부른 것은 아닙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가 쑥스럽지만 역대 최고의 인기곡인 이 노래는 제가 불렀을 뿐만 아니라 가사도 직접 썼습니다. 아마 25살 때였던가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사를 제가 어디에서 힌트를 얻어 썼는지 아세요? 바로 양자역학입니다. 저희 형님께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이해시키려 애썼던 양자역학이요.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지만 대략 이런 것 아닌가 하는 느낌으로 남녀사이의 연애에 갖다 붙인 것이 바로 이 노래입니다. 빛은 입자의 성질도 있고 파동성도 가지고 있다면서요? 그것을 눈송이와 파도에 비유를 했습니다. 전자라는 하나의 동일한 입자는 지금 이 방에도 있을 수 있고 옆방에도 있을 수 있다면서요? 한 마디로 예측이 어렵다는 건데 사실 여자 친구도 예측이 어렵잖아요. 그것을 바다와 광야에 비유했습니다. 그럴 듯 합니까?”
오, 하는 감탄사와 함께 일련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주로 과학자 출신의 정치인들이었다.
“과학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우리 생활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감사합니다.”
총통은 머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연설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퇴장했다.  

후기.

총통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나는 당시 TV를 통해 총통의 연설을 보고 너무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쏟아내었다. 이건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6개월 후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국가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약 7년 동안 놀고 먹었다. 솔직히 말해 컨디션이 안 좋을 때면 집에서 일주일 동안 꼼짝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내가 노는데 방해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무원도 국회의원도 기자도 만날 필요가 없었다. 제안서를 쓸 필요도 없었고 내가 월급을 받을 근거를 제출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로지 사고 실험만 되풀이했다. 그렇게 유희를 즐긴 결과 난 얼마 전 율도국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난 가장 완벽한 중력장 모델을 만들어냈다는 과분한 평가까지 받았다.    
노벨상 수상이 확정되자마자 이제는 자연인인 강총통에게 전화를 했다. 강총통은 임기를 2년여 앞두고 당대 최고의 가수로 성장한 하트와 연애를 했고 야당은 그것을 빌미삼아 결국 총통직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하야 후 올리비아를 벤치마킹하여 온천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사업을 하고 있던 총통은 정말 기뻐해주었다. 심지어 얏호 하는 소리까지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을 정도다. 형님의 한을 풀어주어 고맙다고 했다. 난 제가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진심으로. 그리고는 감히 지금 생활이 행복하시냐고 물었다. 총통은 하트와 함께 여생을 마칠 수 있게 되어 정말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총통다운 대답이었다.
총통은 나 같은 일개 과학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일을 하신 분이다. 바로 총통의 노래 덕분에 양자역학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전 국민에게 너무나도 친근한 학문이 되었다. 양자역학을 다룬 베스트셀러인 ‘아무리 모른 척 하려해도 알 수밖에 없는 양자역학’의 서문에는 총통의 노래가 실려 있다. 파동과 입자의 이중설과 상태의 공존으로 대표되는 양자역학 이론을 그 보다 더 잘 설명한 문구가 있을까.
이제 내가 걱정스러운 것은 요즘도 아침 출근 때마다 영부인과 가벼운 키스를 한다는, 자녀 넷의 행복한 가장으로 보이는 서총통이 이끄는 현 정권이 이번 노벨상 수상을 기점으로 과학 분야에 대대적인 투자를 천명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제 내가 다시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야할 시점이 도래한 것 같아 씁쓸하다.  
강총통의 이야기를 하면서 하트와의 열정적 연애와 그에 따른 하야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 말이 안 되지만, 그 일만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언젠가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 그 대단한 로맨스에 대해 내가 뭔가를 쓸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끝으로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총통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준 정사장님께 감사드린다. 눈치챘겠지만 그 분은 전 총통 비서실장으로서 현재 온천 개발회사의 사장을 맡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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