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상견례

2009.04.08 22:2904.08

1.

식장에서 신랑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례는 무미건조하게 주례사를 웅얼거리고 있고, 하객들은 그저 결혼식 피로연만을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신랑은 신부를 부드럽게 응시하는 대신, 두 의자를 초조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신부의 입장도, 그 찬란하기 그지 없는 식장의 환한 분위기도(하객들의 분위기는 제쳐놓고) 신랑에게 기쁜 날이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못했다. 식이 끝났을 때 하객들의 요란한 환성 속에서 신랑은 이빨을 꽉 깨문채 사진기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하객들이 떠나갔을 때 신랑은 신부보다 더 먼저 눈물을 흘렸다...

2.

“유언장입니다.”

세월은 흘러, 신랑과 신부는 나이를 먹고 이제는 노인이 되었다. 남편은 부모가 없어서 인생을 험난하게 살았지만 그의 타고난 노력탓에 이제는 그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를 존경했다. 그 둘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한쌍 같아 서로의 모든 점을 다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인생에도 고비는 있었다. 사업을 하는 남편은 몇 번이나 실패의 위기를 겪었고 그때마다 아내와 남편은 합심하여 고비를 넘어갔다.
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아는 것처럼 아내는 남편을 알지 못했다.

“예? 뭐라고요?”

“고인께 유언에 대한 말씀을 들으신 적이 없으십니까?”

“네...말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항상 수수께끼같은 남편이었다고, 아내는 옛날에 어떤 친구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왜 그 사람이 눈물을 흘렸을까? 울어야 할 사람은 나였는데 말이야.]

아내의 친구는 그녀의 남편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친구가 한번도 그 남편을 보지 않았다면 다른 여자가 있어서 그랬을 거라고 이야기했을 터였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는 아내에게 항상 성실했으며, 그녀를 무척 사랑했다.
말이 없다는 걸 뺀다면 더욱 좋았을 터였다.

[아마 너와 결혼하는 것이 무척 기뻤나보지.]

그것이 정답이 아님을 알면서도 친구는 그렇게 이야기해줄 수 밖에 없었다.

“고인께서는 모든 재산을 부인께 상속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다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변호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모르시는걸로 보아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만...”

“......”

의아한 표정의 우아한 노부인에게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충격적인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고인에게는 혼외관계에서 태어난 자제분이 둘 있습니다. 그 두분을 만나시는 것이 조건입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함께 해오고, 사랑을 나누어왔던 부부관계에 대한 끔찍한 끝이었다.
노부인은 잠시 정신을 잃었다.

[아마 너와 결혼하는 것이 그렇게 끔찍했나보지.]

단 한번도 남편의 배신을 생각해 본적 없던 그녀였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3.

노부인이 유언에 대한 충격에서 깨어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그 자식들과 남편은 법적으로 전혀 연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유언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즉, 그녀는 그의 자식들을 만나지 않아도 무방했다.

“그 두 사람은 만나보셨나요?”

부인의 말에 변호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만나본 적은 없습니다. 이런 말 하시면 화내실지는 모르겠지만 전화상의 음성으로는 굉장히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 같았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란 것 같지는 않았어요. 남편분께서 재정적으로 상당한 뒷받침을 해 주신 모양입니다. 보자, 사업이 어려웠던 당시에도 생활비를 꼬박꼬박 부쳐줘서 고마웠다고 하더군요.”

그와의 45년이 넘는 결혼 생활동안 그 둘은 엄청난 재정난에 빠진 적도 있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충실했고, 그의 고통을 나눴다. 하지만 그 어려워서 이혼까지 고려했던 시기에 남편은 두 아이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그녀와 그와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일부러 아이를 낳지 말자고 이야기한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아이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아이를 맞이하고 키우고 싶었다.
물론 상속법상 전혀 거리낄게 없는 문제였지만, 그녀는 이런 상황이라면 자식이 있는 것이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상대는 남편의 자식들이다. 법적으로는 연관이 없어도 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내라는 끈이 남아있지만, 그가 죽은 후 그 어떤 것도 그녀의 손에 남아있지 않았다. 소유욕...? 그래, 그의 잔재라도 남아있는 자식이 있었더라면!
그녀는 빈 손으로 그 두 사람을 맞이할 자신이 없었다.

“남자와 여자 쌍둥이입니다.”

“나이는요.”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으니까요...대충 45세 정도 될 겁니다...”

그렇게 젊지 않았다는게 그녀에게는 희망이었다. 결혼생활 년수와도 얼추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편의 눈물은 버린 아이들에 대한 속죄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만나보시겠습니까?“

“......”

부인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25년전 남편이 소개하겠다던 시부모와의 만남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상견례 자리는 지금도 유명한 모 호텔의 커피숍.

[친부모님은 아닙니다.]

너무나도 성실하고 과묵했던 그는 상견례 전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는 전쟁 고아에요. 부모가 없이 떠돌고 있는 걸 지금의 부모님이 거둬주셨습니다. 까다롭고 엄한 분들이지만 그 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자리에 없습니다. 지예씨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이라도 답변해 주세요.]

혈혈단신 고아인 나를 받아줄 수 있나요?

지예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분들은 어쩌면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모르는 분들일거에요. 세간의 상식을 벗어난 분들일지도...]

그때 호텔 커피숍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지금도 그 때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결혼식때의 눈물만큼이나 인상적인 남편의 얼굴을. 어쩌면 그 얼굴 때문에 결혼을 결심했는지도 몰랐다. 남편은 전화기 너머의 부모에게 필사적으로 그녀와의 결혼에 대한 의지를 전달했지만 전화는 무정하게 끊겨버렸다.
남편은 돌아와 그녀에게 말했다.

[부모님은 이 결혼을 반대하시는군요. 하지만 나는 꼭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때 이후로 남편은 그녀에게 부모와 절연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법적으로는 그 어떤 관계도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친밀했던 그 관계를 단절했다는 그 말을 한 남편은 크게 상심한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것이 마치 자신때문인 것 같아 더욱 그에게 헌신했다.

“나는 남편을 사랑했답니다.”

그녀는 조용하게 변호사에게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이 부모와 절연한 것이 나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처럼 내세울 것 없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마땅찮아서라고 생각했답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그들이 옳아서였을 수도 있어요...
이미 다른 여자가 낳은 자식들을 키울 여자가 어디에 있답니까. 나는 그때 결혼을 그만두었어야 했어요...
노부인은 눈물을 흘렸다. 나이가 들어서 눈물샘이 말라버린 건지,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것들이 다 터져나와 주지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답니다...”

변호사는 그저 손수건을 그녀에게 건넸을 뿐이었다.

4.

그녀는 며칠 후 남편의 자식들과 만날 수 있었다. 분칠한 것처럼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을 한 그 남매는 무척이나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자식들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들과 남편의 연결점을 전혀 찾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과 차를 마시는 동안 비슷한 점을 몇가지 찾아낼 수 있었다.
남편이 초조하면 다리를 미미하게 떠는 것처럼 쌍둥이 중 남자도 약간 다리를 떨고 있었다.
쌍둥이 여자는 최대한 웃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 웃음끝에는 신경질적인 경련이 있었다. 그건 남편이 사업을 확장하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흘리던 웃음과도 닮아 있었다.
물론 좋은 점도 닮았다. 볼이 쏘옥 들어갈 정도로 파이는 볼우물과, 마치 몇세기 전의 한국어같은 말 속에 통통 튀었던 남편 특유의 억양이라던지...

“그 사람, 아니 아버지에게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 억양속에 배인 사랑스러운 이야기들.
보통 버림받은 자식들이 하는 이야기같지는 않았다. 다른 여자의 자식들에게서 그런 칭찬같은건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버림받았는데도 사랑하는군요.”

그녀는 그들에 대한 역성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했다.

“네.”

쌍둥이 중 여자가 대답했다.

“우리는 그를 무척 사랑했답니다.”

아버지에 대한 말을 하는 것 치고는 무척 특이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변호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 물음에 대해 답변했다.

“여자분은 어린 시절 미국에 입양되었다가 파양된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 우리말이 좀 서투릅니다.”

“그래요?”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별관심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에게는 남편의 재산이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만나지 않았어도 되었을 일이었다.

“우리는 그가 죽기 전에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서투르게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그가 원하지 않더군요. 우리는 그토록 그를 만나고 싶었는데...”

그건 아마도 죄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남자가 그녀를 열렬하게 보면서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둘의 눈동자에는 뭐랄까, 가지고 싶은 걸 가지겠다는 눈빛이 가득했다. 그 눈동자들은 아버지의 새여자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 눈에는 애증도, 사랑도게 전혀 없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마치, 처음 보는 아기라는 생명체를 대하는 아버지의 눈빛과도 같았다. 그녀는 그 눈동자에서 당혹감을 느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당신들을 키워주지 않았다면, 남편은 당신들을 고아원에 보냈나요?”

그녀의 말에 남자 쌍둥이가 여자 쌍둥이를 손으로 쿡 밀었다. 마치 내가 대답할 분량이 아니니 네가 하라는 듯이.
그건 마치 남편이 그녀와 부부동반 모임에 갔을 때 그가 그녀에게 하던 행동을 떠올리게 했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나이가 많은 그녀이고, 이제는 남편이 없으니 그런 행동은 다시는 하지 못할 것이다.

“고아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 자랐습니다. 잠시 입양된 적이 있지만 얼마 후에 되돌아왔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하면 남편의 부모님?”

그녀와의 상견례를 거부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에 대한 미움이나 남편에 대한 미움이 아니었을 것이다.

“네.”

쌍둥이 남자가 대답했다.

“어떤 분들이었나요?”

말해 놓고 아차 싶었던지 그녀는 덧붙였다.

“난 한번도 뵌 적이 없어서...결혼한 이후 한번도...”

말해놓고 나니 조금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옆에서 그림자처럼 붙어 있던 변호사가 예전에 그랬던것처럼 다시 손수건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우리 입으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쌍둥이 중 남자가 대답했다.

“그 분들은 당신들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단 한번도 못 만났지만, 무척이나 사랑했지요. 우리들이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럼 어째서, 상견례때도! 결혼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죠?“

나이는 그녀가 더 많은데, 자식뻘인 사람들이 시부모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마치 따지듯이 그들에게 물었다.

“......"

그 둘은 대답하지 않고 서로의 눈치만 보았다.

‘아차.’

그들은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혼식 전에 태어났다손 치더라도 어린 나이였으니까.
시부모와 남편에게서 느꼈던 섭섭한 감정을 그들에게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두 쌍둥이의 손이 그녀의 양손을 꼬옥 잡았다.

“섭섭했다면 조부모와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과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그렇게 섭섭해하는지 몰랐어요. 다 오해일 뿐이에요. 미안합니다. 조부모들은 그저 자신들이 당신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걱정했을 뿐이에요. 그건 그들의 잘못이에요. 그리고 태어난 우리의 잘못이기도 하고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하지만 조부모와 우리는 당신들을 정말 사랑했어요. 라고 두 사람은 나직히 말하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5.

변호사는 노부인을 도와 고인의 유품을 정리했다. 안경을 끼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노부인을 대신해 그는 변호사의 의무 이상을 했다. 그러다가 그는 오래된 사진첩 속에 있는 한 사진을 보았다. 마치 대나무처럼 잘 자란 한 청년의 옆에 우아하게 앉아있는 두 쌍둥이의 모습을...

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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