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네이버 공화국

2009.04.07 20:4804.07

※ 소설 속에 묘사되는 포털 사이트 네이버는 검색 포털 네이버(http://www.naver.com)의 현재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독점적 지위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NHN과 대한민국 검찰에 대해 그 어떤 비판적 견해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나는 낙담하여 휴대전화기의 폴더를 닫았다. 그녀는 남자에게 목매는 부류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일방적으로 잠수를 타는 쪽도 아니었다. 그녀의 전화기는 언제나 열려 있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도 전화기를 손에 쥐어야 안심했다. 하지만 전화가 자주 오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리려 애썼으나 기억나지 않았다. 설사 화가 나 있다 하더라도 말을 해서 풀어버리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게 그녀였다.

그녀를 사랑했느냐고 묻는 다면 잘 모르겠다. 사랑이 한 사람만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일컫는 것이라면 분명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내 주위에 있는 건장한 친구들의 공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그녀는 정말 괜찮은 여자다. 한 마디로 죽여주는 여자다. 그녀의 직업은 알 길이 없고 머릿속에는 핸드백과 화장품 브랜드로 가득하지만, 쉬폰 드레스 옷감 속에 비치는 육감적인 굴곡과 허스키한 목소리는 수컷들의 아랫도리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운동을 그만 둔 이후로 인생의 지향점을 잃어버리고 무의미한 일상을 거듭하고 있던 나에게 그녀는 내가 무언가에 열심히 몰두하게 해준 유일한 존재였다. 옷을 벗고 침대 위를 뒹구는 일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한 쪽은 빈털터리 백수였고 한 쪽은 사생활이 수상한 여자였지만 아무도 기약 없는 앞 날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몸뚱어리를 너무나 사랑해서 서로의 가장 지저분한 곳까지 물고 빨고 핥았다. 우리 둘은 그 걸로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여자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눈물까지 흘리는 병신 같은 놈은 아니지만, 조은수와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끝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돈도 없고 차도 없는 거지같은 놈이라서 혹은 무식하고 힘만 세고 직업도 없는 한심한 놈이라서 정리했다는 솔직한 고백을 듣고 난 후에 ‘그래 그 더러운 구녕으로 돈 많은 놈 물어서 잘 먹고 잘 살아라’하는 욕을 퍼부어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녀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지하철 순환선을 타고 열 두 정거장을 가서 내리면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그녀와의 정사가 끝나면 항상 피곤한 몸을 순환선에 싣고 집까지 돌아오곤 했다. 그녀는 절대로 나를 재워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출입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약속을 정하지 않고 불시에 찾아가는 것은 둘 사이의 묵계를 깨는 것이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난 이미 그녀와 자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난 객차의 끝 쪽에 있는 노약자석 앞에 섰다. 선반에 붙어 있는 터치스크린 모니터에는 네이버 초기화면이 떠 있었다. 지하철 모니터가 처음 설치되었을 때는 구글이나 야후, 혹은 다음이나 디씨인사이드 같은 다양한 사이트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네트워크에 접속한다는 것은 네이버에 접속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네이버 뉴스에 ‘아고라 운영진 전격 구속’이라는 헤드라인이 굵은 글씨로 떠 있었다. 나는 진짜 무식한 놈이지만 저 뉴스가 무얼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남은 반정부 독립 사이트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이제 대한민국에는 단 한 개의 웹사이트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사이트는 네이버의 하위 메뉴에 불과했다. 나는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여고생이 네이버 단말기로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는 것을 구경하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칠 뻔 했다.

오피스텔 주차장에 순찰차가 세워져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그녀가 사는 방의 출입문은 활짝 열어젖혀져 있고, 제복 입은 경찰들과 사복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문을 통해 들락거렸다. 오피스텔 거주자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수군거렸고, 나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조은수가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태연하게 조은수의 방문 앞을 지나쳐 반대편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여기서 아는 척을 했다가는 분명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방문 앞을 지날 때 힐끗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경찰들의 다리 사이로 그녀의 손목과 바닥의 핏자국이 보였다.

나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의 출입문 폐쇄 단추를 눌렀다.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난 두려움과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그녀를 죽였을까. 경찰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상하게도 죽은 이에 대한 연민이나 슬픈 감정은 하나도 들지 않아 내 자신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술이 마시고 싶었다.

“오빠 체격이 정말 좋다. 운동 좀 했나보네?”

옆에 앉은 계집애가 내 셔츠 속에 손을 집어넣어 가슴근육을 만지작거렸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계집애가 만들어준 언더락 잔을 무시하고 맥주잔 여섯 개를 모아 폭탄주를 제조하고 있었다.

“어이- 민우 초반부터 너무 달린다. 파트너가 마음에 안 드나?”

동찬은 파트너가 넣어주는 파인애플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부친에게 사업체를 물려받은 동찬은 친구들 중에서 가장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동찬이 아니라면 이런 비싼 술집에서 모일 일은 없었다. 녀석은 운동을 그만두고 몸 관리를 안 해서 거대한 비계 덩어리가 돼 버렸다.

“야 임마 달리게 생겼지. 민우 애인이 오늘 디졌대잖아. 그나저나 우리 민우 어떡해? 돈도 없고 차도 없고 직업도 없는 민우랑 어떤 여자애가 자겠어?”

소규는 원래 입을 함부로 놀리는 녀석이다. 아무리 섹스파트너에 불과한 여자였다고 해서 저런 식으로 말을 하면 안 되는 법이다.

“소규, 말조심 해.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내 친구들은 모두 국가대표가 되고 싶어 했지만 그 꿈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들 중 절반은 조폭이 됐다. 소규는 전국구로 커나가고 있는 서울 신흥조직의 간부였다. 나는 사업가도 조직원도 되지 못했지만 한때 주위에서는 모두 내가 국가대표 선수가 되리라 믿었다. 나의 엎어치기 기술은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나는 금메달이 기대되는 유망주였다. 무릎을 다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진짜야? 조은수가 죽었어?”
“시끄러. 술이나 마셔.”

나는 눈이 휘둥그레진 동찬이 녀석에게 폭탄주를 건넸다. 동찬이 잔을 비우는 동안 소규가 그녀의 죽음에 관해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규 녀석의 잔에는 양주를 더 독하게 풀었다. 폭탄주가 세 바퀴 정도 돌고 나자 조은수의 죽음 따위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게 되었다. 동찬은 혀가 꼬부라져서 사업을 확장하는 계획을 들려줬고 소규는 파트너의 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계집애가 이끄는 대로 룸을 나섰다. 복도에 나오자 서빙하던 웨이터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마담도 웃음을 건넸다. 계집애는 자기 몸무게의 두 배가 넘는 나를 부축하고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번들거리는 금속 문에 술에 취한 내 얼굴이 비쳤다. 엘리베이터가 5층에서 멈췄다. 어두운 복도에 조명이 늘어서 있다. 계집애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나는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방은 크지 않았지만 깨끗한 편이었다. 계집애가 샤워를 하는 동안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은수가 보고 싶어졌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나는 손바닥으로 눈 주위를 닦았지만 계속해서 눈물이 샘물처럼 솟아났다. 나는 엎드려서 침대 시트를 흥건하게 적시며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훌쩍거리는 나를 다급하게 두드린 건 수건으로 몸을 가린 계집애였다.

“오빠 오빠. 얼른 일어나. 얼른.”
“왜 그래?”
“밑에 짭새가 떴대. 오빠 친구들 잡혀있대.”

술이 확 깼다. 일상적인 유흥업소 단속일 수도 있다. 아니면 소규를 잡으러 왔는지도 모른다. 소규는 조폭이니까 형사들이 잡으러 왔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벌떡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엘리베이터는 위험했다. 나는 비상계단으로 2층까지 내려간 다음 복도 창문을 통해 뒷골목으로 뛰어내렸다. 술을 마신 상태였지만 무의식적으로 낙법을 이용해 착지 시의 충격을 줄였다.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자 정신이 더욱 번쩍 들었다. 과연 이렇게 도망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피의자가 아니라 참고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참고인이라면 이렇게 술집까지 잡으러왔겠는가. 나는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동찬의 별장은 전망이 좋았다.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먼 바다에 떠 있는 고깃배들이 보였다. 수면은 햇빛을 반사해 자글자글 끓어오르고 하얀 바닷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녔다.  동찬이 무인도의 깎아지른 벼랑 위에 별장을 세운 이유는 알 수 없다. 녀석의 말로는 복잡한 일이 있을 때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함이라지만, 내가 보기엔 애인과 밀애를 즐기기 위한 용도였다. 지금은 살인누명을 쓴 친구의 은신처로 쓰이고 있지만.

무인도는 별장에서 한 눈에 전경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선착장에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까지 다 볼 수 있었다. 오전에 뭍으로 나갔던 동찬의 요트가 천천히 접안 중이었다. 동찬은 사람을 한 명 데려오겠다고 했었다. 나는 잠시 녀석이 배신할 가능성을 생각해보았다. 동찬이는 서글서글한 성격에 잔정이 많았지만 코너에 몰리면 냉정하게 살 길을 찾아가는 놈이었다. 하지만 나를 경찰에 넘길 생각이라면 무인도까지 데려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사해라. 우리 회사 전산팀에서 일하는 박 과장이다. 박과장, 여기 내 친구 유민우.”

나는 작은 체구에 무테안경을 쓰고 얼굴에 샐러리맨이라고 씌어있는 사람과 악수를 했다. 동찬은 박 과장이라는 사람을 꽤나 믿는 눈치였다.

“저 친구 저래 봬도 젊을 때 한가락 하던 해커였어. 독립 사이트가 무수히 많던 시절에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다고.”

박 과장은 식탁에 랩탑 컴퓨터를 올려놓고 케이블을 접속단자에 연결하고 있었다.

“회사 직원을 뭐 하러 데려왔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내 밑에서 일하는 놈들은 믿어도 돼. 박 과장! 설치 다 했으면 이 친구 알아듣게 설명 좀 해 줘.”

사실 동찬에게 조금 실망하고 있었다. 동찬이 정도면 위조여권과 유럽으로 가는 티켓 정도는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무인도에 가둬놓고 인터넷이나 하면서 시간 때우라는 것인가. 박 과장은 내가 무서운지 눈길을 슬슬 피했다. 덩치는 산만하고 인상은 더러운 데다 살인 혐의까지 받고 있으니 무섭기도 할 것이다.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유 선생님이 결백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결백하다는 증거? 난 결백합니다. 안 죽였다고요.”
“네 저도 유 선생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란 거 압니다. 그래서 알아보려는 거지요. 어떻게 해서 경찰이 유 선생님한테 혐의를 두게 된 건지, 진짜 범인은 누구인지 한 번 찾아보자는 거지요.”
“여기 무인도에서? 당신이? 뭐 하시는 분이세요? 박수무당이에요? 신점이라도 보시나?”

내가 윽박지르자 박 과장은 약간 겁먹은 듯 했다.

“아, 뭐 유 선생님의 절박한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만,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죠. 돌아다니지 않아도 네이버에 접속하면 필요한 정보는 다 얻을 수 있어요.”
“네이버? 네이버 검색창에 ‘조은수를 죽인 진범’이라고 치면 지식검색에 나오나?”
“아, 물론 믿음이 안 가시겠지만, 들어보세요. 얼마 전에 마지막 남은 독립 사이트 ‘아고라’가 폐쇄되면서 이제 대한민국의 웹 사이트는 네이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서버는 오직 네이버 운영업체 NHN만이 소유하고 운영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NHN 지분의 96%는 대한민국 정부가 갖고 있죠. 모든 민간기업의 인트라넷과 공공기관의 행정전산망은 네이버로 통폐합되었어요. 이제 회사로 출근해서 일을 한다는 것은 네이버에 접속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다시 말하면, 네이버의 서버를 뒤지면 유 선생님에게 유리한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네이버에서 정보를 뽑을 수 있다는 겁니까? 박 과장님이 아무리 유능한 해커라도 네이버의 그 뭣이냐, 강화벽을 뚫을 수 있겠어요?”
“네이버의 방화벽(firewall)을 뚫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검찰이 사용하는 VPN 프로그램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뭐요? VPN? 그 게 뭡니까?”
“가상사설망(Virtual private network)이라고, 인터넷 공중망을 사설망처럼 이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검찰은 VPN을 사용해서 네이버에 접속한 다음 NHN 내부자처럼 서버를 뒤질 수 있어요. 저도 검찰이 쓰는 VPN 프로그램으로 접속할 겁니다. 이 거 구하느라 사장님이 돈 좀 들었죠.”

박 과장이 랩탑 컴퓨터 앞에 앉아 검색을 시작하고 동찬은 로열 살루트 한 병과 유리잔을 꺼내왔다. 나는 테이블 밑에서 마른안주를 주섬주섬 꺼냈다. 별장에는 없는 게 없었다.

“민우야, 박 과장 한 번 믿어 봐라. 나도 사업하면서 도움 많이 받았다.”
“근데 뭘 어떻게 찾겠다는 거냐? 통화내역이라도 조회할 건가?”
“가능해. 통신사 데이터베이스도 네이버 서버 안에 있으니까. 하지만 우선 네이버 범죄정보시스템에서 검색조서부터 찾아야 돼.”
“검색조서? 그 게 뭐야?”
“경찰이 범죄수사 목적으로 검찰에 네이버 검색 신청을 하면, 검찰은 법원의 검색 영장을 발부 받아서 네이버 무제한 통합 검색을 하거든? 피의자들의 모든 정보를 검색해서 범죄 사실을 인정할만한 기록들만 뽑아서 조서를 꾸며. 그 게 바로 검색조서야. 검색조서는 수색영장이나 체포영장을 신청할 때 법원에 제출해야 하고, 오프라인 수사를 위한 기초 자료로도 쓰이지. 모든 형사사건의 수사는 검색 조서에서 출발하는 거야.”
“쉽게 말해서 검사가 온라인으로 뒷조사한 기록이라는 거구만.”
“그렇지. 아, 박 과장 찾았어?”

동찬은 수십 장에 달하는 프린터 출력물을 넘겨받았다. 나는 동찬의 옆 자리로 옮겨 앉았다. 첫 페이지 맨 위쪽에 <네이버 검색 조서 : 피의자 유민우>라고 쓴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조서를 읽는 동안 길거리 한 복판에서 발가벗은 느낌이었다. 그들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은행잔고와 신용카드 사용내역은 <네이버 금융>에서, 내 출신학교와 전 학년 성적표는 <네이버 스쿨>에서, 내가 구입한 생필품 목록은 <네이버 쇼핑>에서, 내가 가입한 그룹과 지인들은 <네이버 커뮤니티>에서, 최근에 내가 검색해서 읽어본 기사와 작성한 댓글은 <네이버 뉴스>에서, 나의 진료기록과 의약품 구매내역은 <네이버 건강>에서, 내가 방문했던 블로그와 작성한 방명록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나왔다.

“이 자식들 남의 빤스 속까지 다 훔쳐봤구나. 박 과장, 근데 왜 민우가 의심 받는 거야?”
“친구 분께서 용의선상에 오른 건 <네이버 통신>에서 피해자와 통화횟수가 많은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인 혐의를 받게 된 정황증거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어디?”
“여기.....여기......”
“아, 여기.”

<네이버 통신>

* 피의자 유민우의 이동통신기기 통화기록

송신 011-****-**** (조은수) : 13일 17시 3분 15초~17시 5분 26초
수신 011-****-**** (조은수) : 13일 18시 5분 4초~18시 5분 19초
송신 011-****-**** (조은수) : 14일 01시 37분 무응답

<네이버 교통>

* 8월 13일 피의자 유민우의 이동 내역.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개찰구(입) : 18시 4분
지하철 2호선 합정역 개찰구(출) : 18시 32분
지하철 2호선 합정역 개찰구(입) : 23시 03분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개찰구(출) : 23시 26분

* 피해자 조은수의 추정 사망시각은 13일 21시에서 23시 사이.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네이버 검색결과는 나처럼 무식한 놈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나는 오후 다섯 시 경에 전화를 걸어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철을 타고 그녀 집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21시에서 23시 사이에 그녀를 살해하고 태연히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온 것이다.

“민우야, 이 거 정말 어렵겠는데. 시간대가 애매하잖아? 장소도 그렇고.”

동찬은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고 나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자식아, 너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진짜 재수가 없다는 소리지. 박 과장, 이거 치워버려. 어서 내 친구 누명 좀 벗겨줘. 응?”

동찬은 내 어깨를 감싸서 소파에 주저앉히고 양주잔을 내밀었다. 로열 살루트가 쿨럭쿨럭 소리를 내며 빈 잔을 채웠다. 나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식도가 타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동찬이가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내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나는 동찬이 앞에 놓인 술병을 집어다 내 잔을 채웠다. 문득 조은수의 하얀 손목과 바닥에 굳어버린 핏자국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잔을 비웠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조은수와 나는 한강을 가로지르는 선유교 위에 있다. 그녀는 나무로 만들어지고 무지개모양으로 생긴 이 다리를 좋아했다. 다리 위를 오가는 남자들이 조은수를 훔쳐보는 게 느껴진다. 나는 은근히 뻐기고 싶어 그녀의 어깨를 당겨 왼쪽 뺨에 입술을 찍었다. 그녀는 킥 하고 웃는다.

“민우야 넌 어떻게 살고 싶어?”
“질문이 뭐 그래. 당연히 잘 사는 거지.”
“잘 산다는 게 뭔데?”
“폼 나게 사는 거지. 지질하지 않고 통 크게 말이야. 누나는?”
“난 그냥.......사라지고 싶어.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고 조용히,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어.”
“안 돼. 난 누나가 좋아.”

난 조은수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풍만한 육체가 푸석-하고 부서졌다. 나는 회색빛 재로 부서지는 그녀의 머리와 가슴과 팔 다리를 마구 끌어안았다.

나는 나의 신음소리에 잠이 깨었다. 세상이 모로 누웠다. 바닥에는 술잔과 안주가 어지럽게 뒹굴고 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여의치 않음을 깨닫는다. 실내에 햇빛이 가득한 걸 보니 해가 뜬 지 오래다. 동찬의 다리와 발이 보였다.

“동찬아, 나 좀 일으켜줘.”

동찬은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목이 꽉 죄이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됐다.

“이 자식아! 이거 풀어! 친구끼리 무슨 짓이야!”

동찬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민우야, 경찰이 네 방 침대 밑에서 피 묻은 식칼을 찾았다더라. 지금 국과수에서 지문감식 하고 있어.”
“야, 너 내 친구 맞지? 네가 나한테 이래두 돼?”
“민우야, 난 네가 좋다. 정말 좋아한다. 근데 살인자를 비호할 생각은 없다.”
“야 임마! 나 안 죽였어. 내가 왜 죽여?”

동찬은 별장 출입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미안하다. 지금 모터 소리 들리니? 경찰이 온 모양인데.”
“동찬아, 한 번만 봐줘. 동찬아! 임마!”

녀석은 듣는 척 마는 척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팔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박스테이프로 옴짝달싹 못하게 친친 감아놓았다. 고치에 쌓인 누에 꼴이다. 나는 분해서 주먹을 꽉 쥔다.

“아!”

나는 찌르는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손바닥에 뜨거운 액체가 흘렀다. 나는 조심조심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았다. 칼날 조각처럼 날카로운 것이 손바닥을 찔렀다. 밖에서 저벅저벅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다. 이제 난 틀렸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익숙한 목소리다. 난 눈동자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아는 놈이다.

“소규!”
“민우야- 네 꼴이 정말 안 됐다. 제대로만 풀렸어도 지금쯤 금메달 연금 받으면서 편하게 지낼 건데. 사람팔자 알 수 없다. 그렇지?”
“소규 네가 여기서 도대체............”

소규의 등 뒤로 시커먼 재킷을 걸친 노타이 차림의 덩어리들이 하나 둘씩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놈은 사시미 칼끝에서 피가 흘렀다. 난 그 것이 누구의 피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개새끼! 너 동찬이한테 뭐 한 거야!”
“민우야- 네가 지금 동찬이 걱정 할 때가 아니다.”

동찬이를 찌른 사시미 칼이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칼끝이 내 목을 찌르기 전에 놈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나는 발목을 감은 테이프를 커터 칼날 조각으로 잘라냈다. 넘어진 놈이 다시 칼을 집어 들고 달려들었다. 나는 옆으로 슬쩍 피하면서 놈의 손목을 잡아챈 다음 그대로 메치기로 바닥에 꽂아버렸다. 놈은 죽은 돼지처럼 축 늘어졌다.

딱딱딱딱-

소규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역시 최강 민우! 한판승!”
“개새꺄! 넌 내손에 죽......”

무의식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옆구리를 살짝 찔렸다. 나는 의자를 들어 놈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부서진 의자 다리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싸웠는지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있고 소규는 팔이 부러져 끙끙대고 있었다. 나는 소규의 부러진 팔을 잡고 조금 비틀었다.

“아악! 미안해 민우야! 사 살려줘.......”
“말해. 이 거 어떻게 된 거야?”
“몰라. 난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어.”
“시켰어? 누가 시켰어? 네 오야붕이 시켰어?”
“아악! 그만해! 그만해!”

소규가 기절해버려서 고문은 그만두었다. 나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별장을 나섰다. 선착장까지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계단 중간쯤에 동찬과 박 과장이 쓰러져 있다. 가까이 가서야 박 과장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는 복부를 찔렸지만 정신을 잃지 않았다.

“박 과장님, 괜찮습니까?”
“괜찮지는 않죠. 아파 죽겠어요.”
“내 손에 커터 칼날 넣어준 거, 박 과장님 맞죠?”
“네. 전 사장님한테 국과수 감정결과가 나올 때 까지 기다려보자고 했어요. 검색조서가 자의적으로 편집한 티가 났거든요. 하지만 사장님은 피 묻은 흉기까지 발견됐으면 이미 끝난 일이라면서......”

죽은 동찬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동찬이는 잃을 것이 너무 많은 놈이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박 과장을 부축해서 보트까지 걸었다. 섬을 떠나기 전에 박 과장은 내 손에 조그만 메모리 스틱을 쥐어주었다.

“뭡니까 이게?”
“검찰용 VPN 프로그램입니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도 같이 들어있어요. 자신의 결백을 밝히세요.”
“박 과장님이 해주십시오.”
“그럴 필요 없어요. 접속만 하면 검색하는 건 쉬워요.”

나는 요트를 천천히 후진시켜 선착장에서 떼어 냈다. 선수를 오른쪽으로 돌리며 배를 앞으로 전진시켰다. 우정에 대한 배신감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큰 규모의 프랜차이즈 피씨방을 마다하고 건너편에 있는 작고 지저분한 건물의 피씨방을 골랐다. 입구에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 있는 점원은 나를 본체만체했고 손님은 학교를 빼먹은 고등학생 두 명이 전부였다. 나는 가장 구석자리에 앉아 박 과장이 건네준 메모리 스틱을 꺼냈다. USB 단자에 스틱을 삽입하자 대나무와 칼을 형상화한 검찰의 로고가 화면에 나타났다. 자동로그인 기능이 작동하자 경쟁자에 밀려 폐업위기에 처한 업소의 구닥다리 피씨가 네이버 서버에 관리자 권한으로 접속했다.

나는 박 과장이 일러준 대로 네이버 개인정보 통합검색 메뉴로 이동했다. 조은수의 주민등록번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아 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전화번호 하나에 그녀의 모든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조은수의 블로그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밋밋한 기본 스킨에 몇 개의 게시물 밖에 없었다. 대부분 자신이 읽은 책이나 영화에 대한 짧은 평이었는데, 딱 하나 넋두리 같은 게 있었다.

- 나는 왕에게 바치는 선물인가 아니면 개밥그릇에 담긴 음식 찌꺼기인가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녀는 생전에 종종 사는 게 뭐 같다고 욕을 했으니까. 그러면 난  호강에 겨웠다며 핀잔을 주곤 했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명품으로 휘감고 사는 그녀의 삶은 분명 대단히 편리하고 안락해보였다.

조은수의 이메일에는 별로 참고할만한 것이 없었다. 받은 편지함에는 스팸메일들만 잔뜩 쌓여 있었고 보낸 편지함은 텅 비어 있었다. 적어도 온라인에서는 친구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진료기록에는 정신과 상담이력이 남아 있었다. 주치의 소견에는 우울증 초기증상이라고 적혀 있었고, 항우울제가 처방되었다. 그녀는 약을 구매하지 않았다.  

조은수의 통장에는 의외로 현금이 별로 없었다. 이번 달 카드대금이 빠져나간 뒤에 남은 잔액은 채 십만 원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매달 엄청난 금액이 들어오고 나갔다. 이상한 것은 매달 15일 께 천만 원이 넘게 입금되던 것이 두 달 전부터 돈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입금자는 매번 신은영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입금자의 신원을 추적했다. 나이는 스물여섯 살이었고,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세무회계 2급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직장은 구세실업이라는 부동산개발회사였다. 조은수에게 매달 돈을 준 사람은 신은영이 아니라 구세실업일 것이다. 계좌이체가 아니라 매 번 무통장 입금으로 들어왔으니 정상적인 상거래나 고용관계는 아닐 것이다.

구세실업은 부동산개발회사라고 했는데, 사업수행실적이나 재무제표 같은 건 찾을 수가 없었다. 등기임원들의 개인정보를 검색해보았다. 하나같이 수상쩍은 인물들이었다. 나는 대표이사로 등재되어 있는 최돈수의 재산 상태를 조회했다. 은행잔고는 비어있고 살고 있는 집은 전세였는데 그나마 전세계약자도 다른 사람이었다.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였다.

“흥, 바지사장이로군.”

나는 구세실업의 지분소유내역을 살폈다. 가장 많은 지분을 갖고 있는 사람은 40대 여성과 열 두 살짜리 남자아이였는데, 구세실업의 실제 주인은 그녀의 남편, 꼬마의 아버지일 것이다. 나는 <네이버 동사무소>에서 두 사람의 가족관계를 확인했다. 내 추측대로 두 사람은 가족이었다. 그리고 구세실업의 실질적인 소유주는 성운국이라는 사람이었다.

“이런, 개새끼!”

그는 신흥 폭력조직 청록파의 보스, 소규가 큰형님으로 모시는 자였다.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매달 큰 용돈을 줘왔던 걸 보면 성운국은 아마도 조은수의 스폰서였을 것이다. 조은수는 모든 남자들이 좋아할만한 여자다. 그렇다면, 조은수를 죽인 건 성운국일까? 나는 소규의 개인정보를 검색했다. 만일 소규를 섬에 보낸 사람이 성운국이라면 그가 조은수를 살해한 진범일 가능성이 높았다. 내 시체는 야산에 묻히고 조은수 살인사건은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는 거다.

나는 <네이버 통신>에서 소규가 나를 죽이러 오기 전에 통화한 내역을 훑었다. 이상하게도 성운국과 통화한 기록은 없었다. 성운국이 시키지 않았다면 부두목이나 조직 내 다른 간부가 시켰을 것이다. 나는 소규가 섬에 오기 전에 통화한 사람들의 이름들을 살펴보았다.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다.

‘강지만? 어디서 본 이름인데.........’

나는 강지만의 전화번호를 넣어서 개인정보 통합검색을 돌렸다. 직업란에 ‘검사’라고 되어 있고 소속은 서울서부지검이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강지만은 나에 대한 검색조서를 작성한 검사였다.

‘설마, 이 사람이?’

나는 동찬의 통화내역을 검색했다. 동찬은 무인도에서 세 곳에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전화번호는 자신의 사무실 번호였다. 두 번째는 번호는 동찬의 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번호는 서울서부지방검찰청이었다. 동찬은 경찰에 신고한 것이 아니라 내 담당검사에게 직접 알렸던 것이다. 동찬은 신고하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가 귀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검사는 경찰 대신 소규를 보냈다. 도대체 강지만 검사와 소규는 무슨 관계일까?

나는 강지만 검사의 인사기록을 검색했다. 강지만 검사는 서부지검으로 오기 전에 조직범죄를 전담했던 경력이 있었다. 아마 소규와는 그 때 인연을 맺었을 것이다. 강지만 검사가 기소한 자들을 살펴보았다. 갑자기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 자식들,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구세실업 성운국 회장은 탈세 및 폭력전과가 있었는데, 담당검사가 강지만이었다. 나는 <네이버 금융>으로 들어가서 구세실업의 계좌를 조회했다. 모두 서른아홉 개의 계좌가 있었는데, 입출내역을 조사해보니 매달 15일 정도에 일정한 액수의 현금을 인출하는 계좌가 있었다. 성운국 회장은 매달 보름께 공무원들에게 용돈을 주었던 것 같다.

나는 강지만 검사의 계좌를 조회했다. 계좌 이체된 내역은 없었고 급여가 아닌 돈이 입금된 흔적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용돈은 매달 현금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네이버 통신>에서 조회해보니 성운국 회장과 강지만 검사는 통회빈도가 높았다. 적어도 한 달에 두 세 번 씩은 십 분에서 삼십 분 가량 긴 대화를 나눴다. <네이버 금융>에서는 성 회장이 정기적으로 서부지검 근처 일식집이나 유흥업소에서 카드를 긁은 내역이 포착됐다.

“이 개새끼들.......흑.......”

나는 조은수가 불쌍해서 눈 주위가 뜨거워졌다. 아마 조은수는 성 회장이 강 검사에게 상납한 여자였을 것이다. 조은수가 성 회장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았겠지만, 성 회장이 다른 남자에게 ‘선물’로 그녀를 준 것은 용서할 수가 없다. 성 회장은 그 순간 스폰서가 아니라 포주가 된 것이었고, 조은수는 ‘형님의 여자’에서 매춘부로 전락한 것이다.

나는 조은수를 강남에 있는 나이트클럽에서 처음 만났다. 성 회장에 대한 배신감이 나를 만나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

나는 조은수의 블로그에 올라왔던 게시물을 다시 읽어보았다.

- 나는 왕에게 바치는 선물인가 아니면 개밥그릇에 담긴 음식 찌꺼기인가

블로그에 글이 올라온 날짜는 조은수에게 입금되던 용돈이 끊어진 시점과 비슷한 시기였다. 그녀가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아마 이 시점을 전후로 해서 조은수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성 회장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더 이상 강 검사의 노리개가 되기를 거부했을 수도 있고, 성 회장과 강 검사의 유착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을 수도 있다. 성 회장은 돈을 안 주면 그만이었지만 강 검사는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조은수의 입을 막지 않는다면 말이다.

나는 젊은 여자들로 바글거리는 길 건너편의 스타벅스 커피숍 대신 팔십 년대 다방분위기 풍기는 냄새나는 찻집에서 그를 기다렸다. 손님은 나 하나뿐이었고 달착지근한 싸구려 커피는 미지근하게 식어버렸다. 딸랑-하고 출입문에 매달린 초인종을 울리며 들어온 강지만 검사는 약속대로 혼자였다. 그는 머리가 살짝 벗겨지고 키 크고 깡마른 체구에 금테안경을 썼다. 약점을 잡힌 사람답지 않게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이었다. 날 보자마자 초면에 ‘유민우 너 이 새끼’하고 막말을 했다. 하긴 피의자를 앞에 둔 검사가 욕하지 못할 것도 없다.

“건방진 새끼, 죄를 지었으면 얌전히 값을 치러야지. 어디서 협박이야?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자수하면 형량을 한 번 조정해 볼께.”

나는 그의 뻔뻔함에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피씨방 프린터로 뽑은 문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뭐냐 이게? 진술서냐?”
“제가 만든 검색조서입니다. 검색대상은 강지만 검사입니다.”
“뭐? 이 거 미친놈일세. 야 임마, 검색조서는 검찰에 계신 분들이 작성하는......”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이 거........”
“네 검사님. <네이버 지식쇼핑>에서 뽑은 걸 첫 페이지에 올렸어요. 검사님은 조은수가 죽기 일주일 전에 도루코 식칼을 주문하셨습니다. 제 침대 밑에서 발견된 피 묻은 식칼과 똑같은 모델이죠.”
“흥! 그 게 뭐 어떻단 말이냐. 조은수를 찔렀던 흉기는 네 방에서 발견되었는데.”
“아뇨. 제 방에서 발견된 식칼은 조은수를 찌른 게 아니라 조은수의 피가 묻혀져 있던 겁니다.”
“그럼 내가 찔렀단 말이냐?”
“그렇죠. 검사님이 쇼핑몰에서 주문한 식칼로요. 같은 모델이니까 상처의 크기도 같을 것이고, 피만 묻혀놓으면 완벽한 증거라고 생각하셨겠죠.”
“내가 범인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한단 말이냐. 그냥 네 방에서 가져온 칼로 찌르면 되는 것을.”
“지문이 지워질까봐 걱정이 되셨나보죠. 흉기가 발견된 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인데 검사님은 더 확실히 하고 싶으셨던 거죠.”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나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뭐냐. 저 자신감은?

“멍청한 놈. 누가 그런 이야기를 믿어주겠냐. 모든 정황증거가 네가 범인이란 걸 말해주고 있고, 네 방에서 피해자의 피가 묻은 흉기가 발견됐어. 그냥 자수했으면 좋았을 것을........”

찻집 안으로 제복 입은 경찰들과 사복형사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형사 한 명이 번쩍거리는 수갑을 꺼내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강지만 검사는 이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조용히 가자. 다 끝났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검사님. 저는 유도를 했습니다. 금메달을 따서 편하게 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헛된 꿈이었습니다. 같이 운동했던 친구들도 다 실패했어요. 제 친구들 중 절반은 조폭이 됐습니다. 그리고 절반은.......”

철커덕.

은빛 수갑이 강지만 검사의 손목을 감았다.

“절반은 형사가 됐습니다.”

강지만 검사는 멍하니 형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야 박 형사!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강지만 씨, 조은수의 살인혐의로 체포합니다.”
“야 이 새끼야. 너 이 거 안 풀어?”
“검사님, 식칼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리셨죠? 그 거 찾느라고 형사 네 명이 이틀 동안 고철더미 속을 뒤졌습니다. 손잡이에 검사님 지문이 있더군요.”
“박 형사, 그 거 불량품이라 내가 그냥 버린 거야.”
“피는 깨끗이 씻어내셨더군요. 하지만 칼날과 손잡이 접합부위에 약간의 혈흔이 남아 있었습니다. 조은수의 피가요......”
“이 사람이 정말! 체포해야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유민유 저 놈이야! 방에서 피 묻은 흉기가 나왔잖아! 지문감식 결과 아직 안 나왔어?”
“나왔습니다. 근데 지문이 민우 것이 아니었습니다.”
“뭐야? 그럴 리가......”
“민우 침대 밑에서 나온 칼에는 민우 모친의 지문이 묻어 있었습니다. 시골의 노모는 한 달에 한 번씩 상경해서 혼자 사는 아들에게 밥을 해주었거든요. 하지만 사건 당일에 노모는 시골에 있었습니다. 누군가 칼을 가져다가 피를 묻혀놓은 것이죠. 민우의 방에서 발견된 흉기는 오히려 민우의 결백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
“정말 안 됐습니다. 완전범죄가 될 뻔 했습니다. 민우가 스스로 요리를 해먹는 놈이었다면 말이죠.”
“....................”

강 검사가 정말로 대단한 것은 그 상황에서도 전혀 위축되거나 부끄러운 기색이 없이 너무나 당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수갑 찬 손으로 내게 악수를 청하기까지 했다.

“애꿎은 자네가 고생해서 미안하게 됐군. 나중에 한 번 찾아와. 법무부 계약직 자리라도 한 번 알아봐주지.”
“아 예........수고하십쇼.”

나는 왜 그 때 강 검사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거나 바닥에 메다꽂는 대신 고개까지 숙이며 공손히 인사를 했을까. 아마도 나쁜 짓을 하고도 태연히 체면을 차리는 그에게서 나 같은 놈들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백옥으로 만든 원통형 납골함을 선유교 난간에 받쳤다. 조은수와 나는 밖에서 데이트를 한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 선유도 공원은 그녀가 좋아해서 두 번이나 같이 왔었다. 조은수의 유일한 혈육은 의정부에 살고 있는 그의 오빠였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결혼 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누이가 한 줌 재가 되어 나타난 것을 반기지 않았다. 장례절차가 끝난 뒤에도 시누이를 납골당에 모시지 않고 벽장 속에 생필품과 함께 처박아두었다가 옛날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나타나자 얼씨구나 하고 줘버렸다.

나는 뚜껑을 열어 보았다. 다행히도 굵은 뼛조각 하나 없이 곱게 갈아져 있었다. 나는 납골함을 거꾸로 들어서 유골을 한강 물 위에 쏟아버렸다. 바람이 불어서 가루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가슴이 뻐근해져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에이쒸, 이런 데서 울면 창피하잖아.

- 끝 -
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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