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009.04.02 12:1904.02



  타는 듯한 갈증이다. 목구멍까지 바짝 말라 있다. 물기라곤 없는 입 안 가득, 모래 알이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몸을 굴리고 있는 듯하다. 물, 물, 물,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물, 뿐이다. 물이 풍기는 특유의 비릿한 냄새를 찾아 후각을 곤두세워 본다. 마른 기침조차 성난 갈증의 횡포에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혓바닥으로 잇몸과 잇새, 입천장을 훑어 본다. 입 안은 바싹 마른 아스팔트 같다. 절박하게 구걸하는 거지의 손처럼 혓바닥은 조금이라도 고여있는 침을 찾는다. 그러나 어디에도 물기는 없다. 온 몸이 침도 말라버린 입 안이 되어 물을 달라고 아우성친다. 성난 고양이 털처럼 곤두선 혀 돌기에 건조한 통증이 미세하게 인다.

  눈을 뜬다. 눈 앞에 있는 건 어둠뿐이다. 틈이 없는 암흑. 이토록 완벽한 어둠은 처음이다. 마치 세상의 시작 혹은 끝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 동안을 동공을 활짝 열고 있어 보아도 동공이 애타게 기다리는 바늘만큼의 가느다란 빛 줄기도 존재하지 않는, 암흑이다. 검은 붓이 검정에 검정을 입히고, 또 검정을 덧칠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 몸을 그 위에 완전히 포개어 버린 듯한 어둠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어둠이 가지는 특유의 묵직한 질량과 밀도에 압도되어 숨을 내쉬는 것마저 조심스럽다.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는 호흡은 단단한 물질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숨결이 딱딱한 암흑에 부딪쳐 튕겨 나와 나를 칠 것만 같다.

  나는 똑바로 누워 있는 상태로 아마도 허공일 공간을 향해 팔을 휘이, 내저어 본다. 팔에 걸리는 감촉은 당장이라도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서질 것 같은 육중한 어둠의 숨결뿐이다. 바닥은 차고 축축하다. 춥지는 않지만 몸은 오한이 나듯 떨린다.

손을 더듬어 바닥을 만진다. 흙이다. 밤이슬을 머금고 있는 흙 같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에게는 흙이 피부에 닿을 때의 감촉은 불쾌하면서도, 신기하고, 혐오스러우면서도, 신선하다. 흙은 도시의 아스팔트와는 달리 게걸스럽다. 무엇이든 먹어 치운다. 수분도, 소리도, 갖가지의 찌꺼기들도. 물방울도, 구두의 뒷굽 소리도 튕겨버리는 도시의 아스팔트는 견고하고 검소하다. 물기를 머금은, 탐욕스러운 흙을 손에 힘을 주고 쥔다. 아주 소량의 수분이라도 빨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나무 뿌리처럼 그러잡는다. 흙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고 싶을 만큼, 목이 탄다.

  내가 지금 어디에 누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중간하게 끝이 나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처럼 엉성한 영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잔업으로 보통 때보다 약간 늦은 퇴근은 하고 동료들과 술 한잔을 하러 늘 가던 주점에 갔다. 늘 하던 이야기, 늘 마시던 술, 늘 먹던 안주, 늘 앉던 자리. 이상한 점도, 특별한 사건도 없었다. 애인에게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나서 액정화면을 바라보다가 결혼식이 불과 두 달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늘 마시던 주량보다 조금 더 마신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늘 흐르던 대로 흘렀다.

술자리가 파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강江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푸른색 조명이 환하게 켜진 다리를 택시는 시원스럽게 내달렸다. 검푸른 강은 우주고, 나는 우주선을 타고 외딴 어느 행성으로 날아가고 있는 거다, 라고 술에 취해 반쯤 몽롱해진 정신으로 혼잣말을 했던 것도 같다. 택시 안 룸미러에 비친 운전 기사의 얼굴이 유독 희었다. 무테 안경을 쓴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한적한 도로를 규정 속도보다 아주 약간 빨리 달리고 있을 뿐이라는, 피로 섞인 권태감만이 핸들을 잡은 운전 기사의 손등에 연약하게 올라온 푸른 혈관을 통해 느껴질 뿐이었다. 차 앞 유리창에 붙어 있던 네비게이션 네모난 화면에 새파란, 실은 검푸른 강물 위를 달리는 나와 운전기사의 위치가 삼각형  표시로 서서히 움직임을 그리고 있었다. 다리 위를 달리는 차를 지켜 보는 눈. 어디에도 숨을 수 없다는 자포에서 오는 희미한 혐오감을 느꼈던가. 윗부분이 일그러진 달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보였다. 손가락으로 꾸욱하고 누르면 터지는 젤리 같아 보였다. 그 달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페이드 아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손 아귀 안에 있는 흙이 순간 움찔 움직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렁이인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손 안의 흙을 털어버린다. 손바닥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본다. 손에 남아 있는 흙 내음이 왈칵 콧속으로 들어온다. 흙 위에 누워 있다면 여기는 실외인가. 피부 촉각을 곤두세워 바람의 움직임이 있는지를 살핀다. 어떠한 소리도, 움직임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 어둠의 명도는 변함이 없다. 이제 어둠은 반고체인 상태로 흐른다. 내쉬는 숨결이 공기를 장악하고 있는 어둠에 부딪치는 소리가 물컹, 들린다. 관 속에 누워있는 듯 답답하다.

몸을 조심스레 일으켜 본다. 내 몸 위에 걸쳐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맨발에 와 닿는 흙의 감촉에 몸의 잔털들이 오소소 일어난다.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음에도 춥지는 않다.

두 팔을 휘저어 본다. 걸리는 것은 없다. 천천히 걸어본다. 무언가 밟힐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두려움에 온 몸의 근육이 긴장한다. 열 두 발자국째 걸음을 떼자 발부리에 무언가 부딪친다. 벽이다. 벽일 것이다. 손을 뻗어 만지자 콘크리트 특유의 서늘함이 손끝에 전해진다. 손을 벽에 댄 채 벽을 따라가본다. 내 보폭으로 서른 발자국 정도 되는 길이의 벽이 사면으로 둘러져 있다. 도무지 파악되지 안 되는 상황.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공포, 그 자체가 엄습해 온다. 여기는 어디인가.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그 누군가를 죽지 않을 정도로만 흠씬 두들겨 패줄 테다. 혹 꿈이라면 언젠가는 깰 것이다. 나는 주먹으로 차갑고 단단한 콘크리트 벽을 두드렸다. 그리고 소리친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소리가 의외로 또렷해 꿈이 아니라는 절망스러운 자각이 또렷이 뇌 속에 각인된다. 그러자, 더욱 두려움이 짓누른다. 그럴수록 고함을 지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외마디의 고함. 바짝 마른 입을 찢고 나온 비명은 막 생모의 자궁에서 빠져 나온 아기의 울음소리처럼 질기고 날카롭다. 콘크리트 벽은 내 주먹도, 소리도 튕겨낸다. 이전에 갖고 있던 콘크리트에 대한 애정은 순식간에 증오로, 두려움으로, 절망으로 바뀐다. 그러다 텅 빈 암흑의 공간에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는 콘크리트의 감촉이라도 느낄 수 있음에 안도한다.

살갗이 까졌을, 그러나 어둠 때문에 보이지는 않는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매며 나는 흙 바닥에 털썩 주저 앉는다. 분명 꽤 심한 통증을 느껴야 할 터인데, 보이지 않아서인지 고통은 의외로 둔하게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 손으로 만져지는 벽에 몸을 기댄다.

  잠이 들었던 걸까. 모로 웅크리고 누운 채 눈을 가늘게 뜬다. 희붐한 빛이 보인다. 꿈에서 깨어난 건가, 순간 기쁨에 눈과 입이 활짝 열린다.

눈 앞에 하얀 연기가 가득 끼어있다. 눈병에라도 걸린 건가. 눈을 거칠게 비빈다. 여전히 눈 앞은 안개가 자욱하다. 살갗이 벗겨져 핏물이 든 오른 손등이 흰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인다. 바로 눈 앞에 손을 들이대지 않는 한 내 손조차 시야에서 숨겨버리는 두터운 안개가 사방에 깔려 있다. 목을 젖혀 위를 본다. 질리도록 흰색 말고는 아무 것도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하늘 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벽 같은 물질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일어나 앞을 향해 손을 내민다. 벽이다. 어둠 속에서 만졌던 그 벽, 벽은 안개와 같은 흰색이다. 만져보지 않으면 거기에 벽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안개와 같은 색이다. 어둠과 마찬가지로 안개 또한 흐른다. 그리고 역시 묵직한 질량을 가진다. 물을 잔뜩 먹은 솜 뭉치가 자기 몸을 찢어발기며 공기 중을 빡빡하게 채우고 있는 듯, 사방은 묵직한 습기에 잠겨 있다. 만져지지 않는 안개를 자꾸만 손으로 걷어내려는 시도가 되풀이된다. 그래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안개가, 겹겹이 드리워진 얇은 막이라도 되는 듯 머리채를 흔들고 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자꾸만 저어낸다. 그리고 천천히 벽의 반대 방향을 향해 발을 움직인다. 밀봉된 어둠이 우윳빛 흐드러진 안개가 된 이유가 벽으로 가로막힌 공간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끊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가죽처럼 질기디 질긴 안개 속에서 무언가 기척이 느껴진다. 착각일까, 순간 발걸음을 멈춘다. 안개 너머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놓여 있으리라는 추측에 두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거기, 누구 있어요?
  끝을 알 수 없는 안개가 내 목소리를 집어삼킨다. 소리는 무사히 안개를 뚫고 지나 갔을까. 안개는 소리마저 집어 삼켜 제 몸집을 더 부풀리는 건 아닐까. 불과 몇 초 동안의 시간 동안 갖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간다.

  기이익 기이익, 안개가 움직이는 소리만이 눈으로 읽히다, 분명 안개가 내는 소리가 아닌 소리가 다시 귀에 들린다. 사람의 발성, 그러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소리다. 심장이 가슴뼈를 뚫고 나올 듯, 세차게 뛴다. 변신에 능숙한 안개의 미세한 입자는 내 심장이 내는 요동에 맞추어 박자를 달리해 공중을 떠다니기 시작한다.

후들거리는 몸에 가까스로 힘을 주고 다시 입을 연다. 짙은 안개는 소리의 파동을 교묘하게 교란시켜 사방팔방에서 소리를 진동시킨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내는, 뜻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소리의 근원지라고 짐작되는 곳을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나간다.  

손에 걸리는 둔탁한 촉감. 상대방 또한 움직임을 멈칫, 한다. 우리 사이에 밀집되어 있는 안개 때문에 형체가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느낀다. 서로 천천히 앞을 향해 발을 내민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의 얼굴이 서서히 보인다.

커다란 눈은 두려움에 질려 퀭하고, 두툼한 입술은 새파랗다. 습기를 먹은 반 고수의 머리카락이 거칠게 부풀어 올라 있다. 그 또한 알몸이다. 다행히 그와 나의 알몸을 안개가 모자이크 처리라도 해주는 듯 위태하게 막아주고 있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 나는 그제서야 안개 속에서 들려오던 그의 말을 왜 알아들을 수 없는지 안다. 그와 나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너무도 낯선 언어다. 중앙 아시아인일까. 얼핏 나와 비슷하게 생긴 얼굴 윤곽 속에서 미세한 차이점이 보인다. 시원스러운 콧날, 풍성한 눈썹, 연한 갈색 눈동자, 완만하게 경사진 광대뼈,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 이루어진 뚜렷한 윤곽을 가진 얼굴이다. 그는 나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고, 나는 당신의 말을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곧 침묵에 휩싸인다. 그러나 침묵은 안개보다 두텁지도 않고 어둠보다 육중하지도 않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아주 약간은, 안심한다.

  우리의 대화는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보인다. 땅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맞대고, 손가락으로 흙 바닥에 그림을 그린다. 지면에까지 짙게 깔린 안개 때문에 나와 그는 머리를 바싹 맞대고 땅에 코를 박고 있다. 흙에 스며든 물기가 손가락에 끈끈하게 들러붙는다. 흙과 함께 묻는 습기는 어린 시절 연필을 손에 쥐고 오랜 시간 동안 글씨를 쓸 때면 손 안에 배어나던 땀과 같다. 사무실에서나 방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서류를 작성하거나 메신저로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가 생각 난다. 컴퓨터 화면에 뜨는 글씨는 건조하며 산뜻했다. 탁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싱싱한 물고기처럼 손가락을 움직이면 떠오르던 물기 없는 문자. 메마름이 주는 매력에 익숙해져 있는 손가락에 물기와 함께 들러붙는 흙을 털어내기를 이내 포기한다.

물음표를 그리며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뿐더러 여기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또한 마찬가지이다. 눈을 떠보니 여기였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내가 지르던 소리를 듣지 못했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렇다면 나보다 그가 나중에 이 곳에 왔다는 말이 된다. 그는 집을 짓는 일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차와 사람, 그리고 돈을 그리며 자동차 영업이 직업이었다는 설명을 한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들 또한 내가 완전히 이해를 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는 곳을 그가 사용하는 문자로 적었지만 난 읽을 수도 없다. 그가 그린 지도를 보아도 명확히 알 수가 없다. 그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또한 내가 겪었던 흠집 없는 어둠 속에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그저 가만히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고 했다.

두려움이, 그와 나의 공통언어이다. 그와 나는 손가락으로 흙 위에 그림을 그려대면서 간간히 서로 쳐다보았다. 혼자 격리되어 있다는 공포감은 옅어져 있다는 것을 서로의 눈 속에서 확인한다.

우리는 우선 이 곳을 탐색해보기로 한다. 그와 나의 공통된 견해에 의하면 밑은 흙 바닥에 사면이 콘크리트로 막힌 공간에 갇혀 있다. 그러므로 흙 위에 서 있다는 것이 실외에 세워진 벽 안에 우리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벽의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가늠해보고 싶다.

나는 벽에 바짝 붙어 그의 어깨를 타고 올라간다. 적어도 두 명의 어른의 신장과 팔 길이를 합쳐 놓은 길이보다, 벽은 높다. 그 끝이 어디쯤 있는지는 물고기 비늘처럼 촘촘하게 박혀 있는 안개의 방해 탓에 알 수가 없다. 이제 우리는 벽의 어느 한 모서리를 시작으로 직선으로 걸어보기로 한다. 한 사람이 걷고 다른 사람은 상체를 구부려 걸으며 손가락으로 땅에 선을 긋는다. 우리가 지나온 길의 자취를 남기기 위해서다.  

그렇게 묵묵히 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도중 안개 사이로 어떠한 물체의 윤곽이 시야에 잡힌다. 그것에 가까이 가자, 그것은 뚜껑이 달린 커다란 상자이다. 가던 길을 잠시 쉬기로 하고 상자를 열어본다. 안에는 통조림, 영양식 음료, 초콜릿, 생수 등 유통기한이 긴 가공 식료품들과 음료수 등이 담겨 있다. 그것들을 보자 잊고 있던 갈증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그도 그랬는지 우리는 어떠한 의사 표현도 생략한 채 페트병에 입을 대고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괴기스럽게 들릴 만큼 목마름을 채우는 일에 몰두한다.

어느 정도 갈증이 채워지자 그제서야, 나는 상자 안에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는 물건들을 보면서 우리가 밀폐된 공간에 의도적으로 갇힌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눈 안에 불안이 안개처럼 서서히 가득 차 오른다.

일단 우리는 배를 채우기로 한다. 그는 가공 우유와 함께 시리얼과 초콜릿 바를 먹고, 나는 참치캔와 스위트 콘을 따서 먹는다. 생각보다 허기가 져 있었는지 우리는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린다. 포만감에 팽팽히 당겨져 있던 근육이 풀린다. 그리고 우리는 잠이 든다.

눈을 뜨자 다시 어둠이 육중한 제 몸 위에 제 몸을 짓누르고 있다. 그 무게가, 조금은 익숙해진 걸까.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온다. 어둠을 깨울까 염려라도 되는 듯, 곁에서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아직 모른다. 상관은 없다. 어차피 그와 나, 둘뿐이니까. 난 여기 있어요, 대답을 해준다. 어떠한 말이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당신은 참 목소리가 근사하군요 라든지, 지랄 맞게 어둡군요 라든지, 아까 먹었던 스위트 콘은 맛있었어요 라든지 간에. 그저 그와 나는 서로의 기척에, 목소리에, 안도한다.

  과거에 얽힌 장면들이, 어둠이, 내 머릿속에 알을 까듯 부화한다. 열 평 원룸, 나의 자취방. 피곤에 절은 몸을 부드럽게 받아주던 침대. 쉴 새 없이 울리던 휴대폰. 은근한 유혹을 던지던 고객, 유달리 좋아하는 초밥을 볼이 불룩하도록 먹던 애인, 술에 취하면 늘 같은 곡을 부르는 직장 동료, 바쁘기만 한 아침 허전한 뱃속을 채우기 위해 들르던 샌드위치 집, 꽉 막힌 도로 위에 접착제로 붙여 놓은 마냥 움직이지 못하던 차들, 생활비가 들어있는 은행 계좌 번호. 모든 것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생하게 움직이던 현실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직장 동료가 취할 때마다 부르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가사를 끝까지 외는 노래가 없기도 할뿐더러, 딱히 노래를 부르려고 작정하고 입을 연 것은 아니다. 내 옆에 누워 있는 그가 말없이 나의 노래를 듣는다. 우리를 짓누르는 잔인한 어둠도 이때만큼은 살짝 몸을 푼다. 내 노래가 끝나자 그가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슬펐고, 감미로웠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이국의 사람이, 이때만큼은 벽 밖에 있을 애인보다 훨씬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의 노래 소리가 퍼지고 있는 동안에도 어떻게 이 곳을 빠져나갈지, 시도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 어둠은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다.

얼마 간을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순식간에 어둠의 공기가 변신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암흑 속에서도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우리는 교대로 지칠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나 보다.
다시 눈을 뜨자 다시, 안개 속이다. 곁에서 잠들어 있는 그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솟구치는 분노에 이가 갈린다. 왜 나는 잠이 들었던 건가. 왜 그는 잠이 들었던 건가. 그라도 잠을 자지 말아야 했다.

나는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에 주저 앉는다. 그때 땅 위에 몸집이 작은 검은 개미 한 마리가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는 게 보인다. 흙은, 살아 있거나 혹은 죽어 있는 것이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콘크리트와는 다르다. 생물이 태어난 과거이자, 살아 가는 현재이자, 소멸할 미래. 흙 위에 놓여 있는 그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개미를 짓누른다. 작고 날쌘 개미는 갑자기 튀어나온 공격을 이리저리 피한다. 개미를 짓이기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엄지와 집게 손가락을 이용해 개미를 집어 두 손가락 사이에 끼어 죽인다. 개미는 소리도 내지 않고 죽는다. 번진 까만 먹물 가루처럼, 개미의 사체가 손가락에 묻는다. 흙 위에 그것을 털어버린다.

그가 깨어나면서 끙, 신음 소리를 낸다. 곧 이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흐느끼면서 그는 무어라 말을 한다. 벽 뒤에 있을 누군가에게 항의라도 하는 걸까. 애원과 협박이 섞인 듯한 그의 어조는 절박하다. 그와 나 사이에 부유하는 안개에 가려 웅크린 그의 형체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가냘픈 곡선처럼 흐르는 그의 울음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다. 두 번의 암흑과 두 번째 맞는 안개 속에서 우리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다. 배가 고프면 상자 안에 음식들을 먹었다. 가능한 한 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우리는 거의 동시에 골아 떨어졌다. 일정한 시간에 맞춰 누군가가 수면 가스 같은 것을 벽 안으로 뿌려대는 건가. 시간은 자신의 속도를 우리에게 들키지 않은 채 가고 있다. 속이 빈 통조림과 음료수 페트병만이 조금씩 쌓여 가고 있고, 우리는 안개와 어둠 속에서도 네 개의 벽과 그것이 둘러싼 공간을 샅샅이 훑는다. 깨어 있는 시간 동안은 어떻게 하면 이 곳을 탈출할 수 있는지 궁리한다. 그러나 매끈한 벽이 웅장한 절벽처럼 느껴질 때마다 우리는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그와 나는 꼭 필요할 때만 흙 위에 그림을 그려 의사 소통을 한다. 그와 나 사이에 군더더기 말은 필요가 없다. 서로의 눈빛과 표정, 목소리에 실린 경중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느끼고 있는지 대개 알 수 있었다.

어둠과 안개만이 끝없이 반복되는 밀폐된 공간에 혼자만 있었더라면 나는 이미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동반자, 라는 게 이런 걸까. 단단한 벽에 스스로가 내 머리를 깨지도록 박지 않게 막아 주는 자. 우리를 몇 번이고 덮쳐 심드렁해진 어둠 속에서, 왼쪽 어깨에 닿아있는 그의 등이 품고 있는 온기를 느끼며, 그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벽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애인과 결혼을 했었어도 불필요한 것들에 감정을 소비하지 않고 날렵하고 고요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을까.

  그가 다 먹은 통조림 깡통을 들고 벽에 바싹 닿은 부분의 땅을 파기 시작한다. 물론 나도 거든다. 바닥이 흙이라면 어딘가에 다른 지면과의 연속성 상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그와 나는 뒤늦게야 한다. 땅굴을 파는 거다. 얼마나 깊게 파야 할지는 모르지만, 벽 바깥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굴을 만들 때 일어날 수 있는 흙 사태를 대비해 성인 목 정도 높이로 파고 옆으로 방향을 틀어 파면 될 것이다.

우리는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 일에 몰두했다. 흙은 습기를 흠뻑 머금은 안개 탓인지 부드럽다. 금세 흙투성이가 된 그와 나는, 점점 닮아간다. 제법 여유가 생겼는지 가끔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장난스럽게 낄낄 거리기도 한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올라오는 밀물처럼, 어둠과 안개는 여전히 급작스레 덮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괜찮다, 고 느껴지면 근육에 서서히 열이 오르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여기서 나가게 되면 모두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야기를 해주리라.

  허파 속까지 숨어 든 어둠 속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울린다. 벼락을 맞은 듯 우리는 움찔하며 몸을 일으킨다. 소리를 튕겨내는 벽 때문에 소리의 발신지가 어디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부둥켜 안는다. 한동안 소리는 멎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그 소리가 인간에게서 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욕설, 나는 그 말들의 의미를 안다. 순간 나는 소리친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그러자 울부짖던 소리가 뚝 끊긴다.

여긴 어디야, 왜 날 여기다 데리고 온 거야.
새로 들어 온 자는 으르렁거린다.

나는 새로 들어 온 자에게 우리도 영문을 알 수가 없으며 또한 같은 처지라는 설명을 한다. 어둠 뒤에는 반드시 끔찍한 안개가 낄 것이니 그때 보자고 침착하게 말한다. 새로 들어온 자는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듣는다. 이어 벽에 무언가를 찧는 소리가 난다. 주먹, 아니면 머리통으로 벽을 치는 것이리라. 나는 새로 들어 온 자가 어둠을 잘 견디기를 바란다.

처음으로 눈을 뜬 채, 안개가 몰려 오는 광경을 본다. 아니. 몰려오는 안개는 보지 못했다. 갑자기 어둠이 사라졌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옹송그린 여인처럼 안개는 이미, 있었다.

가파른 하관, 갸름한 눈매, 호리호리한 몸집을 한, 새로 들어온 자는 간간히 욕을 섞어가며 말을 한다.

분명 집으로 돌아와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이 들었었다고. 그런데 깨어보니 이 곳이라고.

욕설이 귀에 거슬려 양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나를 보고,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나와 새로 들어온 자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그는 눈만 껌벅거리고 있을 뿐이다. 아직 그가 외국인임을 알아채지 못한, 새로 들어온 자는 그에게 말을 건넨다. 곧 그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임을 알게 되고는 불쾌한 표정이 된다.
설마 우리가 외국에라도 와 있는 건 아니겠지, 이 새끼가 외국에 있는 거겠지,
새로 들어온 자는 못마땅한 듯 중얼거린다.


셋은 조촐한 식사를 한다. 상자 안에 가득 차 있던 식료품들이 줄어있다.
최대한 아껴 먹어야 한다,
나는 그와 새로 들어온 자에게 각각 말을 한다.

새로 들어온 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그래 봤자 내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 또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새로 들어온 자는 입을 다문다. 그리고 나의 질문에도 입을 열지 않는다. 새로 들어온 자는 나에게 직업도, 가족도, 거주지도, 나이도, 어떠한 정보도 알려 주지 않는다. 하긴 이런 정보 따위는 이 곳에서 아무 쓸모도 없다. 게다가 그는 나 혹은 외국인인 그, 혹은 둘 다를 의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자 새로 들어 온 자는 나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한다. 거의 일방적으로 새로 들어 온 자가 말을 하고 나는 듣는다. 외국인 그는 내가 바닥에 그림을 그려 새로 들어온 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려주기를, 어깨를 움츠린 채 기다린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통역 해줄 말은 많지 않다. 새로 들어온 자는 언제나 외국인 그에 대해 불평을 하고 있다. 늘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눈에서 비굴을, 두터운 윗입술에서 무식을, 길다란 손가락에서는 게으름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외국인인 그는 자신을 꺼려하는 자의 눈과 입술의 움직임을 읽었는지 홀로 콘크리트 벽에 기대 앉아 텅 비어 보이나 어둠 혹은 안개로 늘 가득 차 있는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며 시간을 보낸다.

새로 들어온 자는 영화감독이었다고 한다. 단편을 포함해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평상시에 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는 새로 들어온 자가 은근한 자부심을 실어 말한 영화 제목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만들었던, 좋은 평판을 얻은 단편 영화에 대해서 새로 들어온 자는 이야기한다. 불법체류 외국인에 대한 영화이다. 내용은 어디선가 본 듯한, 혹은 읽은 듯한, 혹은 들은 듯한 이야기이다. 서러운 차별과 부당함 속에서 묵묵히 일을 하는 불법체류 외국 노동자가 겪는 현실. 촬영 내내 스텝들과 감독이었던 그의 지갑들에서 간간히 소액의 돈이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아주 적지도 크지도 않은 액수라 찜찜하지만 다들 입 밖에는 내지 못한 채 촬영을 끝내고 난 후, 우연히 술자리에서 도난 사건이 화제에 올랐다고 한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주인공이었던 외국인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새로 들어온 자는 벽에 기대앉아 있는 외국인 그를 향해 눈을 흘깃거린다. 외국인인 그의 주위에 유독, 짙은 안개가 끼어 있는 듯하다. 마치 벽 같다. 그는 사막 위에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처럼 보인다.

   상자 안에 식료품들이 서서히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새로 들어온 자는 천천히 음식을 씹고 있는 외국인의 두툼한 입술을 경멸에 찬 눈으로 쏘아본다. 그래서인가, 외국인은 아주 소량을 가지고, 맛을 음미하듯 오래 저작질을 한다. 외국인인 그는 어느새 등을 조금이라도 구부리면 갈비뼈가 선명하게 드러날 만큼 야위어 있다. 혈색도 안개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창백하다. 나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식사를 계속한다. 눈에 띄게 마르고 불안해 보이는 그를 위해 눈을 맞추고 흙 위에 그림을 그려 안심시켜 주는 것보다 새로 들어온 자의 말을 듣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투박하고 견고한 콘크리트 벽 안에서, 갖가지 생물의 사체로 만들어진 흙 위에서, 나는 되도록 정신적인 압박을 느끼지 않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듣고, 그는 앉아 있고, 새로 들어온 자는 말을 한다. 그리고 어둠과 안개가 번갈아 가며 우리를 찾아온다.

  거의 맨손으로 판 흙 구덩이는 어느 새 성인 키를 훌쩍 넘기고 있다. 이제 벽 바깥으로 향해 파기만 하면 된다. 새로 들어온 자도 구멍을 팔 때만큼은 입을 다문다. 그러나 외국인 그의 손길이 조금이라도 둔해지면 가차없이 욕설을 뱉는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지만, 채찍질이 등에 매섭게 박히기라도 하는 듯 외국인은 구덩이에 고개를 처박는다. 상자 안의 식품은 셋이서 아껴먹더라도 두, 세 번 먹을 양밖에는 남지 않았다.

   옆으로 향하는 구멍을 파다가 부딪친 것은, 벽이었다. 잔인할 정도로 정직한 콘크리트 벽. 어른 키를 넘게 구멍을 파 내려갔는데도 박혀 있는 벽이다. 나무 뿌리가 이토록 깊을까. 우리는 더 깊게 구멍을 파보기로 한다. 나와 외국인, 새로 들어온 자는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제각기 등을 돌린다. 터질듯한 긴장감에 안개가 진동한다.

   저 새끼 죽여버릴까,
  새로 들어온 자가 어둠 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말한다.

어둠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척하며 요동도 하지 않는다.

어둠이 걷히고 나면 상자 안에 식량이 조금씩 줄어 있는 거 눈치챘어?
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저 치 때문에 여길 나가기 전에 굶어 죽어버릴 거야.
새로 들어온 자의 증오에 찬 목소리를, 어둠은 이상하리만치 투명하고 선명하게 실어 나른다. 외국인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내 귀에는 들린다.

  다시 안개 속이다. 새로 들어온 자는 눈을 뜬 채 누워있다. 지쳐 보인다. 외국인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를 불러본다. 새로 들어온 자도 의아하다는 듯 몸을 일으킨다. 계속해서 그를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나와 새로 들어온 자는 외국인을 찾아보기로 한다. 새로 들어온 자의 눈에는 의혹이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누워 자던 벽과 마주보는 반대편 벽 앞에서 외국인은 곧 발견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인 부분은 그의 왼쪽 팔이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팔은 뱀이 막 빠져나간 허물처럼, 추레해 보인다. 왼쪽 손목을 통조림 뚜껑 날로 몇 번을 긁어댔는지 상처가 울퉁불퉁하다. 그가 누워 있는 흙 바닥이 벌겋다. 안개조차 붉은 핏빛이 두렵다는 듯 몸을 피한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왔는지 그의 팔 근처에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개미 몇 마리가 보인다. 손목을 가로지르는 상처에서 싱싱한 피가 쉬지 않고 나오고 있다.

외국인은 아직 살아 있다. 그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그의 눈 속에서 절망과 원망, 허무, 미련을 느낀다. 입고 있는 옷도 없으므로 마땅히 그의 팔을 지혈할 만한 것도 없다. 새로 들어온 자는 피를 보자 역겹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안개는 피난처로 도망치듯, 피비린내를 더욱 강하게 풍기며 허파 안으로 급하게 몰려든다. 흘린 피만큼 체온이 떨어진 외국인은 심하게 떨고 있다. 나에게는 그의 몸을 조금이라도 덥혀줄 천 조각 한 장도 없다. 새로 들어온 자가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간다. 그리고 땅을 파는 소리가 들린다. 외국인은 무어라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온전히 느끼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때 새로 들어온 자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새로 들어온 자는 울부짖고 있다.

바닥도 막혀 있어. 바닥도 콘크리트야. 씨발.
  한동안을 바닥에 박힌 듯 서 있다 마비에서 풀린 듯 허우적대며 새로 들어온 자에게 뛰어간다.

구덩이 안에 있어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구멍을 들여다 보자 벽과 같은 콘크리트 바닥이 무심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식품들이 들어 있을, 상자가 보인다.

누가 전기 스위치를 끄기라도 한 것처럼 어둠이 순식간에, 덮친다.
<끝>

hae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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