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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디저트

2003.11.07 03:2311.07

0.
"이번엔 뭐야?"
나는 컵을 내려놓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뭐냐니?" K는 시침을 뚝 떼며 컵을 들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가리켰다. 언뜻 보기에도 새 것 티가 완연한 백금 반지에 일그러진 내 눈이 비쳤다.
"아, 아이스크림이야."
"그래? 지난 번 양갱은 어쩌고. 꽤 오래 가는 것 같더니."
"계속 있으니까 너무 달더라."
"흠. 벌써 일곱 번 째잖아. 달기는 다들 마찬가지 아냐?"
나는 비꼬지 않으려 애쓰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페 삼 층. 유리 너머로 보이는 번화가는 온갖 소음이 뒤섞여 울리는 실내보다 고요했다. K가 무심히 대답했다.
"그럴지도."

1.
그녀는 디저트와 사귄다.

처음 남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농반 진반으로 건넨 날 버리고 누구를 만나시냐는 말에 그녀는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치즈케익이라고. 실제로 소개받은 남자친구는 멀끔하고 무던한 인상의 과 동기였다.
"치즈케익이세요?"
"네?"
"아, K한테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대뜸 치즈케익이라고 했거든요. 별명인 줄 알았죠."
"케익은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는 난생 처음 듣는 말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당황하여 칭찬도 대답도 아닌 말로 얼버무렸다. "K는 치즈케익 좋아해요."
며칠 후 만난 K는 버스가 늦네-라고 하듯,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난, 치즈케익 싫어."

2.
수많은 음식 중에 왜 하필이면 디저트에 비유하는지 물었다. 디저트를 챙겨 먹는 편도 아니잖아. 치즈케익, 파르페, 와인. 한 두 번도 아니고,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레몬 셔벳과 헤어졌다며 멍하니 앉아 있던 K는 내 질문에 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유가 아냐. 정말 케익이고, 파르페고, 디저트 와인이었어. 셔벳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녹고 나니까 질척한 설탕물일 뿐이더라.  

고등학교 이 년 더하기 대학 이 년. 꼬박 만으로 네 해를 알아온 K의 기이함을 눈치챈 것은 그 때였다. 농으로 보아넘기던 사소한 일들이 한꺼번에 기억의 지표를 뚫고 솟아올랐다. 어설픈 로맨틱 코메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주인공들이 영화 내내 세 끼도 안 먹었어.'라던 말.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교실 창문을 열고 빗물을 받아 핥고는 '오늘은 오렌지 주스네'라고 중얼거리던 모습. 지난 여름에는 한 철이 다 가도록 두 번째 애인의 팔을 놓지 않으며, 파르페는 시원해서 좋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 했었다.

병원에는 가 보았냐고 하고 싶었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어깨를 쥐어 흔들고 싶었다. 심리학 개론 수업에서 주워들은 지식으로, 너는 낭만적인 연애에 대한 갈망을 비정상적으로 표출하는 게라고 조목조목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가장 궁금했던 것도 묻지 못했다.  

3.
치즈케익, 파르페, 와인, 레몬 셔벳, 푸딩. '걔 귀엽더라'가 '또 깨졌대?'로 바뀌더니, 언젠가부터 아무도 묻지 않게 되었다. 열 여섯 해 동안 달고 다닌 학생이라는 꼬리표를 떨구어 내고, 같은 수업을 듣고 라면 하나를 나누어 먹으며 레포트를 쓰던 시절을 한밤의 찬 공기를 함께 맞으며 교복을 추스리던 아득한 옛날과 함께 묻었다. 졸업식에 찾아온 푸딩의 네 번째 손가락에 가느다란 커플링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애써 불안과 흥분이 뒤섞인 학부 졸업생 흉내를 내며 인사하고 덕담을 나눈 후 K와 푸딩의 기념 사진을 찍어주었다. 인화되어 나온 사진에는 K의 어깨에 자랑하듯 걸쳐졌던 푸딩의 왼손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그래도 기념 사진인데 미안하다는 말에 K는 왼손을 흔들며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사진은 가짜인걸. 반지가 있던 자리는 그새 비어 있었다.

4.
치즈케익, 파르페, 와인, 레몬 셔벳, 푸딩, 양갱, 아이스크림. 나는 기껏 떼어냈던 꼬리표를 다시 챙겨 들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K는 어딘가 취직을 했단다. 일 주일에 한 번이 한 달에 한 번, 세 달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오랫만에 만난 K는 대뜸 아이스크림이 선물한 백금 반지를 진지하게 들어올렸다. 새 것일 때의 날카로움이 바랜 반지가 스물 일곱 살 직장 여성에게 잘 어울렸다.
"결혼할지도 몰라."
무심코 손에 들고 있던 포크로, 둘 다 손대지 않고 있던 탁자 위의 치즈케익을 푹 찔렀다.
"그래?"
"응. 그이는 스물 아홉이니까, 집에서도 은근히 물어 보는 눈치인가봐. 나도 뭐......."

포크를 든 손이 부르르 떨렸다. 시야가 함께 진동했다. 의자의 모퉁이가 접혔다. 탁자가 정사각형 상자 모양으로 움츠러들고 스피커가 건포도처럼 벽에 늘어붙었다. K의 뒤에 배경처럼 자리잡고 있던 아가씨 둘은 사과파이와 비스킷이 되었다. 커다란 어항에는 과일 화채가 둥둥 떠다녔다. 나는 처음으로 두 눈을 뜨고 세상을 보았다. 툭, 유리에 부딪히는 빗방울. 창을 열지 않아도 콜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치즈케익이 조심스레 얹혀 있는 커다란 케익 상자, 벽을 가득 덮은 건포도 쿠키, 조금 전까지 내가 위에 앉았던 체리타르트.

나는 앞에 선 초컬릿의 손을 잡았다. 반지를 조심스레 들어내고 물었다.
"난 뭐야?"
K가 달콤한 코코아 향을 사방에 뿜어내며 미소지었다. "롤 크레이프."
  
wick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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