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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환타지 소설

2003.10.28 15:4210.28

"이것이 이번 여행 중에 구상하신 소설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제목이 싱글즈(singles)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제가 소설을 위해 만들어낸 '영어' 란 언어로 된 단어입니다. 이 '영어'
에 대해선 앞으로 제가 쓸 소설에서도 많이 나올 것이고, 영어사전
도 만들어서 여러분께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오, 이계의 언어까지 만드시다니, 정말 철두철미하시군요!"

"별말씀을. 그건 기본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구상하는데 있어서, 그 세계의 언어 하나 쯤은 만들어
둬야 하지 않을까요? 그 부분을 너무 간과하는 분들은 '설정'에
있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그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구요. 이 글은 참으로
환타지 소설의 역사상 특이하기 그지없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대한 설정집을 보며 읽지 않고는 하나의 단어도 그냥 넘길 수 없
으니 말이죠. 예를 들어 '시네코아' 라는 단어가 나오고 '영화'란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 대한 아무런 주석도 달려 있지 않고 그냥 넘
어가 버립니다. 이건 좀, 독자에 대한 배려의 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화자가 이계의 인물로 되어 있습니다.
전지적 시점에서 쓰여진 소설이 아니란 얘기죠. 그렇다면 당연히
이계의 인물인 화자가 자신의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쓸 말에 대해
부연설명을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주석을
다는 것 또한 구차한 일입니다. 거기에 대해 알고 싶다면 설정집을
보아야지요. 저는 다시 말하지만 '진정한' 환타지소설을 쓰고 싶은
겁니다. 대중들의 입맛에만 발맞추는 삼류소설을 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삼류소설이라.. 그건 너무 심한 표현이 아니신지요? 그렇게 말하
시지만, 소설 자체는 우리 언어로 쓰여졌지 않습니까? 화자가 이계
의 인물인데도요. 그런 논리로 따지면 이계의 인물이 대체 어떻게
우리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도 사실 그 부분에서 갈등을 많이 했습니다. 진정한 환타지 소설
을 쓰려고 하는 나로서 당연히 저 글은 내가 만든 언어인 영어로
기록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이죠. 최소한 화자들이 말하는
부분이라도요. 그리고 정말 내 글을 읽고 싶다면 독자들은 영어사전
을 보고 읽으라고 해야 할테고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저는 근본
적인 모순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직면했습니다. 그게 무언
고 하니, 어차피 이 소설은 나의 상상에서 나온 것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계'를 우리와는 분리된 무엇으로 보이도록
만들려고 애를 쓴다한들, 결국에는 우리와 완전히 분리된 무엇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그 부분에서는 타협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부분을 추궁하신다면, 저로서도
그다지 할 말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 그렇군요. 하긴 그것은 모든 환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딜레마 아니겠습니까? 아 물론, 선생님과 같은
종류의 환타지 소설을 쓰는 분들에 있어서요. 자, 아무튼, 이렇게
저희 잡지사의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은 잘 싣겠습
니다!"

  이들의 만남이 있은 후, 그 다음 날  환타지 소설 전문잡지
<세계를 가다> 6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단편과 함께 그들의 질의
응답이 실렸고 그를 둘러싼 찬반 논쟁은 환타지 소설계를 오랜만에
뜨겁게 달구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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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즈(Singles)

때는 저녁이었다. 종로 시네코아에서 지인들을 만나 영화 싱글즈를 보고
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가볍지만은 않았다. 싱글즈라는 영화가 심각했던 건
아니다. 영화는 재밌었고 한편 유쾌하기도 했다. 두 30대 여성인 친구를
중심으로, 아니 그 둘 중에서도 특히 '나난'(뒤집어보니까 '난 나'이다)이
란 이름의 여성을 중심으로 짜여진 스토리도 좋았고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점도 좋았다. 오랜만에 괜찮은 영화를 보았다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리 멀
지도 않은 옛날, 내가 만났던 사람이 그 영화의 주인공 나난과 오버랩되면
서 나는 그녀의 기억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녀와 만날 때, 나는
상당히 예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녀와 비슷한 외모의 연예인이 누가 있을
까 생각해보곤 했지만 마땅히 딱 맞는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난을 보면서 그녀를 떠올렸다. 이제야 딱 그녀와
닮은 사람이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 그녀가 누구와 닮았는지 말해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내 곁에 없다. 이미 많은 시간
이 흘렀고 그녀가 지금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을지, 혼자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다시 그녀에게 돌아갈 수는 없다. 나와 그녀를 잇는 인연의
끈은 이제 끊겼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때가 생각난다. 아직 인터넷이 그다지 대중적인 위치
를 차지하지 못하고 PC통신이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절, 나는 평소
잘 가지 않던 채팅방으로 들어가 방제도 보지 않은 채 아무 번호나 쳐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냥 아무 곳이나 이야기를 할 수 있
는 곳을 원했던 나는 세번인가 네번째 시도만에 어느 방에 머무를 수 있었
다.
그곳엔 나를 빼고 두 명의 사람이 있었고 조금 뒤에 한 사람이 더 들어와
4명이 되었다. 원래 있던 여자 둘에 나중에 들어온 남자 둘. '비목'이란
닉네임으로 채팅을 하던 그녀와의 첫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우리 넷은
얘기를 하다가 말이 잘 통하는 걸 느꼈고 곧장 번개를 하기로 했고 그 주의
토요일이었던가, 우리는 신림역 몇 번 출구에선가 만날 수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이 뭐였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저 그녀
의 모습은 눈에 확 들어왔고 예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외모였다.
그런 그녀의 외모에 시선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난 그녀에게 별 감정이 없었다. 그런데 서로 사는 곳을 말했을 때, 나는
그녀가 나와 참 가까운 곳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번개로 만난
사람들 중에 내 근처에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에 신기하면서도 무척
반가웠다. 거기에 더해서 그녀와 나는 나이도 같았다. 나는 휴학중인 대학생
이었고 그녀는 직장을 다니는 직장인이라는 차이점은 있었지만 위와 같은
공통점으로 우리는 좀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리들 패거리는 그 뒤
에도 채팅으로, 번개로, 자주 만났고 거기에 몇 사람이 더 추가되기도 하
고 빠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가까운 탓에 모임이 끝나고 그녀
가 얹혀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바래다 주고 헤어지곤 했다. 만남은 오래 이
어졌다. 그녀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 직장을 구할 때까지 쉬고 있는
동안에는 같이 pc방에서 24시간 넘게 밤을 새며 채팅을 하기도 하고 그녀가
핸드폰으로 문자를 날리면 난 새벽 3시에도 자전거를 타고 그녀가 있는 아파
트로 달려가 벤치에 함께 앉아 그녀가 꺼내온 캔맥주를 같이 마시기도 했다.
그녀가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나는 그녀와 보내는 그런 시
간들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했다. 난 딱히 친한 친구가 없었고 친구와 단둘이
많은 시간을 보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성친구는 물론 말할 필요도 없
었다. 몇개월이 그렇게 흘렀고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주로 나는 듣고
그녀는 말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그녀에 대해 깊이 알아갔다.


그녀는 참 많은 남자들과 사귀었지만 항상 사귐이 오래가지는 못하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녀와 만나면서 그녀에 대해 좋아하는 마음이 많이
생긴 나였지만 그런 그녀의 특성(?)을 알게 되면서 나는 내가 그녀와 단지
친구라는 것이 참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만나는 동
안에도 새로운 남자를 사귀었다가 헤어지는 모습을 실황중계로 보여주었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그리고 그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그녀와 함께 있
었고 그 모든 과정을 직접 지켜보았기에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뒤에도 절대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긴, 내가 그런 데에는 '정말 좋아한다면
좋아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고 안 하는 게 좋다'는 개인적인 생각 때
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그덕분에 남자로서는 그녀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밖에도, 그녀는 참 부자가 되고 싶어했고 그렇게 되어 자
기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항상
그런 소망에 비해  자신의 현재 모습은 미래조차 불투명한 상고 졸업생이
라는 것에 안타까워 하며 소위 명문대라는 곳을 들어가 놓고도 휴학만 하고
있는 나를 보며 항상 '내가 너 같으면 정말 이렇겐 안 살거다' 라며 핀잔을
주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너랑 나랑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고 말하곤 했다. 대학에 가보고 싶어 하면서도 공부
하는 건 참 힘들어 하며 결국 포기하고 하루 하루를 그저 흘러보내듯 보내던
그녀는 스스로를 항상 '바보'라고 부르곤 했다. 대학까진 다 들어가 놓고
공부가 하기 싫어 휴학만 하고 있던 나와 함께 우리는 두 명의 작은 '바보'
였고 우리의 만남은 바보들의 행진이었다.


그런 그녀와 첫번째로 만남이 끊어지게 된 계기는 처음 번개 멤버였던
여자 둘, 남자 둘 중 남자 둘에서 나를 뺀 다른 한 사람, '좋은앙마'라는
닉네임을 쓰던 그 사람이 그녀를 좋아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는 우리보다
나이가 네 살 많았고 그녀를 만나기 시작한 뒤 어느 시점부터 그녀의 집
앞까지 찾아가 그녀를 찾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그녀는 그를 오빠로서
는 좋아했지만 사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고 결국 그가 계속 집 앞으로
찾아오자 연락을 끊게 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 그녀가 처음 살
던 집에서 나와, 친구 한 명과 함께 돈을 모아 얻은 월세집에서 집들이가
있던 그날, 그는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다. 술에 취해 그녀에게 왜 나를
피하냐고 소리지르고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주위의 다른 집에서도 소리를
치며 난리가 난 것이었다. 그녀는 이젠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나는 그
곳에서 일종의 갈림길에 섰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서 한 명을 편들어 주는
일. 나는 그 갈림길에서 그의 편을 들어주며 '다 이해하니까 그만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그 때 그녀가 한 말.

'이해한다니 뭘 이해한다는 거지?'

그 때 그녀의 분노로 가득한 섬뜩한 눈빛에 나는 아직 내가 그녀를 다 알
고 있는 게 아니었음을 확인하며 그저 돌아서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1년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나는 우리의 만남이 그것으로 그렇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 내가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서 통화를 했을 때 그녀는 내
게 '왜 전화 안했냐'며 화를 냈다. 나는 '왠지 내가 전화하는 걸 니가 싫어
할 것 같아서' 라고 말했고 그녀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녀의
그런 반응에 '그럼 넌 왜 안했는데?'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그만 두었
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1년만에 다시 만났고, 1년만에 만났는데도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을 만난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참 자주
연락을 끊었다가 다시 만나곤 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면 그동안 있었
던 일을 서로 말하곤 했다. 그녀는 그동안 또 누구를 사귀었다가 헤어진
얘기며, 자기의 여자친구들 얘기-그녀가 나를 그녀의 여자친구들에게도 많
이 소개시켜주었었다-와 일 얘기들을 푸념하듯 말하곤 했다. 나는 여전히 주
로 듣는 쪽이었고 그녀는 말하는 쪽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어찌보면
참 희안하게도 계속 이어졌다. 그녀는 항상 내가 당연히 그녀에 대한 모든
일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여겼고, 나도 왠지 내가 그녀에 관한 모
든 일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화이트데이날
생애 최초로 누군가에게 한 상자에 20만원 하는 꽃상자를 보낸 대상도 그
녀였고, 그녀가 같이 일출 보자며 표를 예매하게 해서 단 둘이 일출 보러
동해안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말이 모든 만남의 끝을 의미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리고 사실 난 그녀가 날 좋아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녀가 행복하게 살게 되는데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기를, 키다리 아저
씨 같은 존재로서 내가 될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이다. 우리 두 바보는 종종
이런 얘기를 하며 놀곤 했다.


'내가 복권 1등 당첨되면 내가 얼마 가지고 나머진 다 너 줄게'

'내가 만일 100억이 생기면 50억을 널 줄게'


모두 꿈같은 얘기였고 이런 얘기 끝에는 항상 그녀의 이런 말이 나오곤
했다. '너나 나나 인생이 참 불쌍하다'고. 약간 낙오된. 그래서 약간 서
글픈. 혹은 약간은 황폐한. 그러나 꿈을 꿀 수는 있는 그런 두 사람이었
다. 나는 참 그녀에게 동지애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좋은 사
람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랬기에 항상 그녀에게 '넌 분명히 좋은 사람 만날
거야.' 하고 말해주곤 했다. 만일 내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다
면 모르지만 나는 그녀의 신세타령 상대가 되어 줄 순 있을 망정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나는 일단 돈이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믿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지 어언 5년이 흐른 어느날. 다시 오랜만에 그녀를 만
나기 시작했던 나는 그녀에게 입학 선물로 노트북 컴퓨터를 사주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녀는 마침내 어느 전문대학 야간부의 컴퓨터학과에 입학하
였고 등록금은 그녀 스스로 마련을 하였는데 막상 컴퓨터를 살 돈이 마련
되지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엔 그녀 집에서 주겠다고 하셨지만 나중에 돈
이 없다고 발뺌을 하셨다. 그녀의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니었고 그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던 그녀에게 내가 사
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감격해 했고 나도 그녀를 도울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뻤다. 그러나 막상 그 말을 해놓고 되돌아 보니 내가 몇백만원을 마련할
방법이라곤 자퇴하고 등록금을 되찾는 방법 뿐이었다. 나는 거기서 또 다시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만 했고, 나는 학교 교학부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돈을 그녀에게 건네주지는 못했다. 은행에 돈이 입금된다고 한 날이
되기 전, 집에서 그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자퇴를 취소시키셨고 나는 그녀를
만날 면목이 없어 그녀에게 돈을 건네주고 만나기로 한 그날, 졸리다는 핑
계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전화통화가 되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그간의 사정은 말하지 않은 채로, '생각해 봤는데 돈은 도저히 못
줄 것 같다'는 말만을 남겼다. 그녀는 '네가 얼마나 냉정한지 알겠어'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그날 나에게 너무나 고마워
한바탕 파티 준비까지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나에게 뽀뽀
라도 해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녀에게 이젠 더 이상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는 녀석이라고 느꼈고, 그렇다면 그녀 곁에 내가 있을
이유가 없다고 느꼈기에 그녀가 날 싫어하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어차피 또
누군가를 만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돈도 많고 그녀를 끔찍히 사랑해 주기도
하고 착하기도 한 동화속 왕자같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니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줄 수 없다
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게 연락이 끊어진 뒤로 2년이 흘렀다. 그녀의 전화번호는 여전히 내
핸드폰 저장번호 '1'번을 차지하고 있고, 돈이 생기면 넣어주기 위해 알아
두었던 그녀의 계좌번호는 아직도 수첩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그녀의 메일함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훔쳐보았을 때-우리는
서로의 메일 비번도 알았다-그녀가 또 다시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으로 정말 모든 것을 기억속에서 지워버렸다.


   *                            *                                    *


많은 상념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간 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여전
히 종로 거리 위에 서 있었다. 지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 속에 남겨진 것은 나 혼자 뿐이었다. 머리속에 어른거리는 나난의
얼굴에 겹쳐지는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뒤로 하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세상엔 많은 싱글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나와 같은 기억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겠지... 내 모습은 어느새 군중에 묻혀 버렸고, 내일이면
나는 새로운 모습으로 깨어날 것이고, 어느 날인가는 또 다시 오늘처럼 옛날
일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나는 문득 혼자

'어쩌면 나와 그녀의 인연은 아직 끝난 게 아닌지도 몰라'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떠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웃음이 언제 있기라도 했냐는 듯, 무표정한 모습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가로등이 거리를 아름답게 비추는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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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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