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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인어의 노래

2006.07.18 14:1107.18

  <인어의 노래>

  눈을 떠보니 모든 게 바뀌어 있었다.
  천장이 낯설었다. 내가 누워있는 자리가 낯설었다. 차가운 바람이 낯설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낯설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나는 팔다리를 쭉 편 채,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그럴 때 마다 잿빛 구름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거대한 잿빛 구름. 그것들이 도대체 왜, 막 잠에서 깨어난 내 눈에 보여야 한단 말인가. 화려하게 장식된 내 방 천장의 문양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울음소리가 들렸다. 낮게 흐느끼는 소리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왜 지끈거리는 거지. 어째서. 이유는 간단했다. 그 울음소리는 내가 처한 상황이 현실임을 각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인두보다도 뜨겁고 고통스러운 기억의 날카로움으로.
  그래, 나는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눈을 뜨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감미로운 꿈이 안개처럼 사르르 녹아가기 시작할 무렵부터, 꿈의 한조각이나마 잡아보려고 발버둥 칠 때부터. 제기랄.
  끊어질 듯한 아픔을 느끼며 상체를 일으켰다. 젖은 모래가 소리 없이 내 몸을 벗어나 흘러내린다. 해변이다. 웅장한 파도가 압도적인 소리와 함께 밀려왔다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아직 몸에 달라붙어 있는 모래를 손으로 털어내며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본다. 누가 울고 있는지, 그리고 누가 살아남았는지 확인해본다. 현실이란 것이, 귀한 집안에서 자란 철부지의 가늠보다 얼마나 더 냉혹하고 참담한지 내 두 눈으로 확인해본다.



  길게 자란 수풀을 거칠게 헤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여러모로 미숙한지라 팔에는 금세 잔 상처가 가득 생겼다. 그래도 나는 홀린 사람처럼 여전히 빠른 속도로 헤쳐 나갔다. 숨이 차고 땀이 흘렀다. 더 이상의 끈적한 느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웃옷을 벗어 제끼고 평평한 돌을 골라잡아 주저앉았다. 벗어버린 웃옷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자니 어디선가 작은 새소리가 들린다. 숲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숨소리가 잦아들면서 점차 숲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다. 나뭇잎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빛줄기가 너무나 눈부시고 매혹적이어서 잠시나마 내가 방금까지 원하던 게 무엇인지 잊게끔 만들었다. 나는 물을 얻기 위해 숲속을 헤집고 있었다.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시원한 물. 타는 목을 달콤하게 축여줄 싱그러운 물. 하지만 지친 나머지 잠시 쉬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숲의 평온함도 내 가라앉은 기분을 밝혀주지는 못한다.
  뭐랄까. 나는 운이 좋았던 걸까? 일단은 살아남았으니 그렇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그다지 기분이 좋진 않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절망으로 가득 차있다.
  낯선 환경에서 눈을 뜬지 3일이 지났다. 신의 분노였다고 여겨질 만큼 끔찍했던 폭풍우에 의해 배가 난파되고, 그 와중에 운 좋게 -나는 아직도 이 표현을 쓰는 게 옳은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살아남아 파도에 쓸려 이 섬으로 흘러들어 온 이는 나를 포함해 단 4명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들도 살아남아 이 섬 구석구석에, 혹은 또 다른 섬 어딘가로 내팽겨 쳐져서 목숨을 부지했을 런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지금 내 눈앞에 없으므로 내가 그들까지 신경써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4명이다. 한 명은 내 집안보다도 잘 사는 가문의 자제지만 나보다도 더 할 줄 아는 게 없는 도나티라는 겁쟁이였다. 나는 막 눈을 떠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그를 보자마자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의지할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머저리가 살아남다니. 신이시여. 당신은 어젯밤부터 짓궂기 그지없으십니다. 그는 팔다리를 오무린 채 벌벌 떨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병신.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시체는 건드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간 쓸모없는 머저리였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그는 마음이 놓인 듯 비굴한 웃음을 짓는다.
  다른 한 명은 폴리오였다. 파올로 폴리오. 그 역시 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머저리 도나티와는 다른 의미에서였다. 폴리오는 나보다 월등히 뛰어난 인간이었다. 체격도 건장하거니와, 머리도 뛰어났고, 말재주가 있어 늘 그의 주위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거기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었으므로 그를 흠모하는 여자들이 많았다. 여하간 그는 머리를 다쳤는지 헝겊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헝겊에는 붉은 자국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는 미소 지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미친놈. 이런 상황에서 잘도 웃음이 나오는 구나.
  마지막 한 명은 바로 흐느껴 울던 장본인이었다. 아! 그녀가 살아 있음에, 신에게 얼마나 큰 감사를 드렸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나는 잠시나마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로니카. 천만 다행으로 그녀는 별다른 상처 없이 고운 모습 그대로 -헝클어지고 더러워진 모습은 어찌할 수 없잖은가-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내 모든 걸 다 바쳐 그녀의 작고 여린 영혼을 치유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몫이 아니었다. 내가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을 동안, 폴리오가 천천히 다가가 우람한 팔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는 시원한 웃음으로 그녀를 달랬다. 그리고는 그녀의 귀에 소곤거렸다. 나는 차마 그 광경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이런 제기랄.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마저 물을 찾기 위해 일어섰다. 땀에 흠뻑 젖은 윗도리는 그냥 들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격식 따위는 필요 없는 곳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있어 유일한 세상이었던, 격식과 위선으로 똘똘 뭉친 곳과는 달리.
  우리는 지난 3일간 정신을 추스르고 현실을 직시하는 데 열중했다. 정신적으로나 아니면 실질적으로도 도망치려 해봤자 소용없었다. 이곳은 거친 바다로 둘러싸인 작은 섬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달리 표현하자면 작은 지옥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내가 눈을 뜨고 나서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빌어먹을 폴리오 자식이 나와 도나티를 끌고 가장 근처에 있는 높은 봉우리로 향했다. 그건 괴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길이 험해서 몇 번이나 미끌어졌고, 멍청한 도나티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한심한 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폴리오는 위로, 위로, 오직 위로만 향했다.
  해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걸렸을 즈음, 커다란 바위가 나란히 놓여있는 험한 길을 기다시피해서 올라가자 마침내 언덕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정상에 도착하자 나와 도나티는 땀범벅이 되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풍경엔 신경도 쓰지 않고 널브러졌다. 강렬한 햇살이 버거워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나는 슬쩍 곁눈질로 폴리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소 굳은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굳었다기 보다는 강한 실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제서야 걱정이 된 나는 몸을 일으켜 제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폴리오가 어째서 저따위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사실 오히려 그는 훌륭하게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편이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고는 곧바로 울음을 터뜨릴 뻔 했으니까. 이곳은 섬이었다. 그것도 그다지 크지 않은 섬이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이틀 안에 전부 둘러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섬이었다. 나는 욕을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도나티가 상체만 살짝 일으키며 왜? 왜 그러는 거야, 발레리? 라고 지껄였다. 그에게 아가리 닥치는 편이 좋을 거라는 충고를 정말로 정말로 해주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그래봤자 절망적인 기분을 얼마나 달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구조선이 올 때 까지 이 섬에서 버텨내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만 했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폴리오의 제안에 의해 -사실 본심은 그에게 제안 따위는 엿이나 먹으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섬을 탐색하며 지형지물을 파악하기로 했다. 아직 멀리까지 갈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은 없었기 때문에, 우선 우리는 주변을 돌며 필요한 것들을 찾아 헤맸다. 식수와 식량이 우선은 가장 시급했다. 우리와 함께 해변에 버려진 것이라고는 배의 파편과 하등 쓸모없는 빈 나무 상자, 그리고 잡동사니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이틀간 뿔뿔이 흩어져 돌아다닌 결과, 나는 작은 열매들이 열리는 나무들을 발견했고 폴리오는 숲 안쪽에서 작은 샘을 찾아냈다. 도나티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소용없는 짓이다. 여하간 나는 깊은 자긍심을 느꼈다. 나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그 후 우리는 남자 셋이서 하루씩 번갈아가며 해변에서 건져낸 두 개의 병에 물을 떠오기로 했고, 오늘이 바로 내 차례였다.
  
  그런데 샘물을 뜨기 위해 숲 속을 걷고 있는 나의 기분은 지금 우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요소는 향수병이나 생존에 직결한 거창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나와 같이 섬에 버려진 3명에 관한 문제였다. 이 섬으로 쓸려온 것이 아로니카를 제외한 우리 세 명뿐이었다면 어땠을까. 혹은 아로니카 대신 다른 사람이어도 상관없다. 그가 남자라면 말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이 섬에서 구조선이 올 때까지, 이 절망적인 상황을 참고 이겨낼 수 있도록 똘똘 뭉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이유는 여자인 아로니카가 우리 사이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로니카가 죽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로니카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을 잊을 만큼 감사했을 정도다.
  다만 그녀를 두고 우리는 서로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드러냈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 우리에게 협력이란 요소는 애시당초 사라졌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의 눈에 포착된 사냥감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문명이 없는 이 세계에선 당연하게도 가장 강한 자가 사냥감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법이다. 결국 폴리오가 그녀를 차지했고 나와 도나티는 깊은 실망감을 애써 숨긴 채 주위를 맴돌 뿐이다. 사실 경쟁은 시작할 필요조차 없었다. 도나티와 나는 어느 모로 봐도 폴리오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느끼는 -혹은 나와 도나티가 느끼는- 상실감은 작지 않은 것이었다. 폴리오가 의기양양하게 아로니카를 품고 희희낙락거릴 때마다 나는 증오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밤에도 함께였다. 우리는 구조선이 올 경우를 대비해 해변가에 있는 -태양이 뜨는 방향으로 미루어보아 이곳은 남쪽해안인 것 같았다- 커다란 나무 밑에서 지냈고 잠도 거기서 잤지만, 밤이 깊어지고 하늘에 밝게 빛나는 작은 영혼들이 아로새겨지면 폴리오와 아로니카는 귓속말을 주고받다가 이내 키득거리며 숲으로 사라졌다. 물론 나는 그 소리에 여지없이 귀 기울이면서도 애써 자는 척 했다. 아마 도나티도 잠들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의 발소리가 사라지고 이내 침묵이 잦아들면, 나는 분노로 인해 몸을 떨다가 결국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결코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꿈의 세계로 향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아로니카를 제외한 우리 남자 세 명은 마주쳐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가 제 갈 길로 흩어졌다. 우리가 하루 동안 나누는 대화의 양은 극도로 적었다. 물론 폴리오와 아로니카의 사이에는 아니었지만 그것에 대해 길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여하간 우리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혹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불을 지필 노력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도할 생각조차 가지지 않았으며, 섬 생활을 조금이나 개선시키려는 노력도 없었다. 나는 낮 동안 아로니카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을 찾아 헤매는 비참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그녀가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밝게 웃는 모습은 상상으로도 하고 싶지 않았다.

  샘물은 한 모금만 마셔도 그 달콤함에 몸이 찌릿할 정도다. 마치 아로니카의 작은 입술에 살며시 키스하는 듯한 쾌감이 내 몸을 스쳐지나간다. 나는 빈 병들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샘물을 마음껏 들이키고는 옷을 벗고 천천히 몸을 씻었다. 내가 이 섬에서 유일하게 안식을 얻는 시간이었다. 나는 해가 높이 솟을 때까지 샘가에서 서성거리다가, 물을 찾으며 나를 욕하고 있을 다른 녀석들을 떠올리며 마지못해 해변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들이 욕하는 것 따위는 전혀 상관이 없었지만 아로니카가 갈증을 못 이겨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땀에 흠뻑 젖어 해변으로 돌아와 보니 똑같은 모습, 똑같은 기분 그대로,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폴리오와 아로니카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천박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도나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숲에서 나타나자 아로니카는 싱긋 웃으며 내게 달려왔다.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수고했어, 발레리. 그녀의 감미로운 음성이 내 귀를 간지럽혔다. 내 가슴은 급격한 운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곧 아로니카는 환한 얼굴로 내게서 물병을 받아 폴리오에게 달려간다. 들떴던 내 기분 역시 그녀가 멀어짐에 따라 다시 한없이 가라앉았다.
  나는 그들의 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미리 따놓았던 과일 몇 개를 먹고, 모래밭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수평선을 바라본다. 내 기대와는 달리 언제나 그곳엔 하얀 파도뿐이다. 달라지는 건 없다.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도, 나에 대한 그녀의 마음도.
  다시 그녀의 웃음소리가 파도소리마저 묻어버릴 만큼 크게 들리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나는 숲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폴리오가 어디를 가냐며 큰 소리로 물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돌아서서 그들을 바라본다.
  섬에 안 가본 곳을 돌아다녀 볼 생각이야. 혹시 늦더라도 걱정하지마.
  나는 간신히 대꾸한다. 그러자 폴리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수고하라며 손을 들어 보인다. 다른 손은 아로니카의 어깨에 걸쳐있다. 잠시 그대로 서있어 보지만 그들은 이미 내게 신경을 끊은 지 오래였다.
  나는 뒤돌아서 숲으로 들어갔다. 이 빌어먹을 해변으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다. 섬 반대편에 지낼만한 곳을 찾아, 괴로운 광경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지낼 것이다. 거기서 아담한 보금자리도 만들고, 불을 지피고, 섬에 있는 동물을 사냥하며 구조선을 기다릴 것이다.
  첫 날 산봉우리에 올라갔을 때, 반대쪽에도 해안이 있었음을 나는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곳이 나의 안식처가 될 것이다. 숲을 가로지르면 오늘 안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과일과 식수를 챙겨둘 필요가 있었기에 나는 다시 샘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윗도리를 벗어 그걸로 보따리 삼아, 가는 동안 간간이 보이는 나무 열매를 따서 집어넣었다.
  내가 수풀을 통과하는데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냥하기에 좋은 -혹은 내가 사냥당하기에 좋은- 동물일까 싶어 재빨리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실망했다. 아니, 짜증이 솟구쳤다. 소리의 주인공이 도나티였기 때문이다.
  “여. 거기서 뭐하고 있어?” 나는 애써 실망감을 감추며 물었다.
  도나티는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별로 그와 오래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갈 길을 재촉하려 했다.
  “적합한 장소를 찾고 있었어….”
  내가 등을 보이자 그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뭐? 무슨 장소?” 다시 돌아서며 물었다.
  “있어, 그런 게. 어쨌든 너도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야.”
  도나티는 그렇게 말하며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알 수가 있나.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에게 수고하라고 말한 뒤 발을 돌렸다. 저런 머저리와는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등 뒤로 도나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고개 돌리지는 않았다.
  그와 헤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샘에 도착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작은 나무 병에 물을 담았다. 그때, 사방에서 어떤 작고 은은한 소리들이 잔잔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배가 난파되던 날 밤 이후로 처음 내리는 비였다. 하지만 그때처럼 강렬한 폭풍우가 아니라 살며시 대지를 적시는 소나기에 가까웠다. 나는 비를 피하기 위해 큰 고목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빗소리는 아늑하다. 빗방울이 샘에 떨어지는 소리가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비의 선율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생각보다 깊이 잠들었던 것 같다. 아마도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탓이리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만월에 가까웠고, 구름은 모두 사라졌으므로 움직이는데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밤의 숲에는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내가 걸으면서 풀들과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외로움이 전신을 휘감는다. 나는 어느새 아로니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만이 내 유일한 마음의 위안이자, 동시에 고통을 주는 대상이었다.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고, 하늘하늘한 몸매를 그려보고, 상냥한 말투를 생각했다. 그리고 난파되기 전의 평화로웠던 배 안에서 술에 취해 발그레진 얼굴로 내 귓가에 속삭이던 그녀의 숨결을 기억한다. 그녀의 향기를 기억한다. 문득 나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어 달을 향해 폴리오를 저주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너무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와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방향감각을 잃고 해매이고 있었다. 하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봤자 이곳이 작은 섬이라는 사실엔 변화가 없다. 해가 뜨는 방향을 확인하여 내가 어디 있는지를 파악한 다음 느긋이 움직여도 상관없다.
  하지만 오후 내내 잠을 잤기 때문에 멍하니 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수록 괴로운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찰 것이기에. 그래서 나는 희미하게나마 들리는 파도소리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나는 올바른 방향으로 계속 왔는지도 모른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파도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이윽고 작은 덤불을 빠져나오자 짙은 검정색으로 물든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모래사장이 있는 해안가는 아니었다. 이곳은 크고 거친 바위들이 가득했다. 파도는 쉼 없이 바위에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어렴풋이 여기가 어딘지 알 듯 했다. 아마도 섬의 동쪽해안일 것이다.
  나는 잠시 동안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바라봤다. 이곳에 온 뒤 하루도 파도가 잠잠했던 날이 없었다. 흉폭한 파도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배가 난파되던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쳐졌다. 끔찍한 기억이다.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도 끔찍하지만 그날에는 비하지 못한다. 자꾸만 바다로 곤두박질치던 기억이 떠올라 -혼란스러운데다가 술에 취했었기 때문에 그 기억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이곳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파도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내가 다시 몸을 돌려 숲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 가까운 곳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잘 못 들었나 싶어 조용히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가 확실히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노랫소리였다.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그 노래의 주인공이 아로니카가 아님을 확신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이곳에 있을리 없지 않은가.
  자그마한 노랫소리가 거친 바람에 실려 흩어지고 있었다. 내 가슴은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이곳은 무인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노랫소리의 주인공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분명 집에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나는 희망으로 가득 차,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분명 내 의지로 노랫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지만 어느 샌가 나는 노래에 흠뻑 빠져버렸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발을 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노랫소리에 저절로 몸이 움직여졌고, 분명 노래는 나를 자연스레 끌어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대는 전부 큰 바위들 뿐이었으므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위에 올라탔다가 뛰어내리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에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노랫소리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을 염려한 까닭이다.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빠질 것을 두려워 않고 성급히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앞에 놓인 큰 바위를 밟고 올라서자 마침내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해냈다. 나는 당장이라도 기쁨의 괴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다가갔다. 파도소리가 큰 탓인지 그녀는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바위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점점 그녀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술에 취한 것 마냥 비틀거렸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몽롱한 기분을 떨쳐내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말을 걸기위해 좀 더 다가섰는데,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녀는 상의를 입고 있지 않는 듯했다. 매혹적인 우윳빛 살결이, 바람에 흩날리는 긴 황금빛 머리카락 아래로 비쳤다. 그녀가 앉아있는 바위가 지금 내가 서있는 곳보다 약간 낮은 위치여서 다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전라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어쨌거나 이곳은 외부인을 쉽게 볼 수 있는 섬은 아니지 않는가.
  잠시 고민하다가 뒤로 얼마간 물러났다. 이 정도면 그녀의 모습이 그늘져 보이기 때문에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다시 숨을 내쉬고는 목을 가다듬고 마침내 그녀를 불렀다.
  “이봐요!”
  순간 깜짝 놀란 듯 그녀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나서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바다로 뛰어들려 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필사적으로 막아야만 했다.
  “이봐요, 도망치지 말아요! 나는 조난자입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나는 그녀가 발가벗고 있건 말건 염치불구하고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었다.
  “제발 살려줘요! 우리의 배는 난파되었습니다! 이 섬의 주민이시라면 제발 도와주십시오!”
  발밑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녀에게 애원하며 달려가던 순간, 발이 바위 틈새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팔을 바둥거리다가, 이내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남국의 섬이라지만 밤바다는 말도 못할 만큼 차가웠다. 더군다나 나는 수영을 전혀 못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발버둥 치며 바다로 가라앉는 일뿐이었다. 물이 너무 차가워서 죽는다는 느낌마저도 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심연 깊숙이 가라앉으며 수면 위로 비치는 잔인하리만치 새파란 달의 실루엣을 바라볼 뿐.
  그때, 누군가의 손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한없이 부드럽지만 강한 손이었다.
  “진정하세요. 구해드릴 테니 발버둥치지마세요.”
  그 말에 어찌 감히 반항할 수 있겠는가. 물론 생존본능은 자꾸만 발버둥 치라고 내게 명령했지만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녀는 나를 끌어안고 능숙하게 헤엄쳐갔다. 실로 놀라운 수영 솜씨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저항을 안 한다지만 성인남자를 끌어안고, 마치 물속에서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수영을 하는 모습이라니. 마치 내가 물고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나는 바위 위에 널브러져 연신 기침을 해댔다. 눈물, 콧물 섞인 추한 몰골이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아 나를 지켜봤다.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진정할 수 있었고, 그제야 감사를 표할 경황이 생겼다.
  “고맙습니다. 꼼짝없이 죽을 뻔 했네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인사하려다가 언뜻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확실히 반라의 상태였던 것이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뒤에서 몰래 접근한 건 고의는 아니었어요.”
  “괜찮아요.”
  그녀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어쩐지 긴장하고 있는 듯한 음색이었다.
  “저를… 바라보셔도 상관없어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아니요, 결례를 범할 수는 없지요…. 저는 그저 도움을 청하려 했을 뿐입니다. 배가 난파되었거든요. 이 섬에는 저를 포함해서 4명이 살아있습니다. 정말 꼼짝없이 이곳에서 죽는가 싶었는데 사람이 사는 섬이었다니 기쁘기 이를 데가 없네요.”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하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코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사례는 돌아간 뒤 잊지 않고 해드…”
  “그건 힘들겠네요.”
  그녀가 내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녀의 대답에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순 없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해야만 했다.
  “저기 부탁입니다. 제발 저희를 도와…”
  “저를 보세요, 젊은 분.”
  그녀가 다시 내 말을 자르며 차가운 두 손을 내 손위에 포갰다. 손은 생각보다도 더 차가워서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옷을 안 입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어떻게 감히…”
  “제 모습을 보셔야 해요. 그래야 대화에 진전이 있답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니 도리가 없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럼 죄송하지만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이 어색한 상황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고, 때문에 내 시선은 그리로 향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곳에 그녀의 다리는 없었다. 대신에 비늘로 덮인 꼬리지느러미가 하늘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순간 할 말을 잊은 채, 그녀의 지느러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것이 제가 신사분을 도와드릴 수 없는 이유랍니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먼 옛날이야기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인어가 실존하고 있을 줄이야, 맙소사.
  어떡해서든 실례가 되지 않기 위해 놀란 내 얼굴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 시선이 자꾸만 그녀의 지느러미로 옮겨져서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어느 정도 충격에서 벗어난 나에게, 그녀에게서 또 다른 신경 쓰이는 점이 엿보였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바로 그녀의 얼굴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놀라우리만치 아로니카와 닮아있었다. 그렇다. 나의 사랑 아로니카와. 젖은 머리칼이 아로니카만큼 곱슬거리진 않았지만 -그리고 전체적으로 약간씩은 달랐으나- 그 점을 제외하고는 둘이 자매라고 해도 하나 놀라울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녀 역시 매우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반라의 몸이었지만, 나는 예의에 어긋남을 개의치 않고 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얼굴이 나를 향해 웃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 미소는 짙은 바다에 비친 보름달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부디…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시겠습니까, 아가씨.”
  나는 그녀의 차가운 두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한시도 그녀의 파란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레우코시아. 레우코시아라고 부르세요.”
  “레우코시아.”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이름을 되뇌었다.
  “젊은 분. 당신의 이름은요?”
  “발레리. 다비드 발레리입니다. 아름다운 아가씨여.”
  내가 대답하며 살며시 그녀의 손에 키스하자 그녀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아니,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나는 그 날 밤 이후로 그녀의 마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우리는 달이 뜨기 전 작은 별들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부터, 안개와 달이 밝은 빛 속으로 녹아 없어질 때까지 늘 함께였다. 우리는 파도의 잔잔한 선율에 맞춰 사랑을 나눴다. 놀라운 일이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밤이면 언제나 술을 마신 것처럼 몽롱한 기분에 한껏 취해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지만, 나는 어렴풋이 그녀의 매끄러운 다리를 어루만지는 내 손길의 감각을 기억한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그녀는 원래 인어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나는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를 사랑하는 데만 정신을 쏟아도 벅찰 지경이었다.
  나는 달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든 그녀의 귀에 끊임없이 사랑의 말을 속삭인다.
  
  다시. 다시 한 번 당신의 노래를 들려줘. 천사의 음성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그럴 순 없어요.
  어째서? 당신의 노래가 내 지친 두 발을 이끌었거늘.
  우리의 노래는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어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니요. 우리가 인간을 의식해서 노래를 부른다면 무서운 일이 벌어져요. 내 노래는 그만 잊어요, 내 사랑.  

  낮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짙고 그늘진 바다 속에서 사는 레우코시아는 천성적으로 태양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녀는 해가 뜨면 내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바다로 돌아갔다. 그녀의 모습이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나는 극심한 상실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그녀가 사라진 지점을 응시하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내게도 휴식은 필요했다. 나는 최소한의 먹을 것과 물을 마시고 숲으로 돌아가 깊은 잠에 빠졌다.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귐은 그녀를 잃은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산들바람이 나를 꿈속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꿈을 꾼다. 그러나 나는 내 꿈속에 나오는 이가 레우코시아인지, 아로니카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그녀와 지낸 밤이 계속되었다. 날짜는 잊은 지 오래다. 문득 다른 세 명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오늘은 남쪽 해안을 다녀올까 해.”
  나는 수평선 너머부터 밝아오는 광경을 마땅치 않게 느끼며, 내 품에 안긴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나른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물었다.
  “왜죠?”
  “너무 오랫동안 친구들을 보지 못했어. 아마 걱정하고 있을 거야. 아니면 까맣게 잊고 자기들끼리 구조되서 돌아갔을지도 모르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만일… 구조선이 온다면 당신은 돌아갈 건가요?”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 대답은 애초에 하나뿐이었다.
  “아니. 나는 영원히,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야.”
  그녀는 내 대답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볼에 키스했다. 그녀에게서 꽃향기가 묻어났다.
  이윽고 저주받은 태양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어 그녀는 바다로 돌아갔다. 나는 여느 때처럼 한참이나 바다를 응시하다가 숲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조난당했던 해안은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오전 중으로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숲을 헤매던 날 밤, 나는 생각보다 더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도중에 샘에 들러 물을 마시고, 몸을 씻었다. 맑은 물에 비치는 내 모습은 다소 초췌해 보였다. 필경 매일매일 끔찍한 이별의 고통을 맛봐야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샘에서 남쪽 해안가까지는 금방이었다. 해안에 가까워질수록 근래 들어 보기 드물게 정신이 맑아지고 식욕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나는 나무열매를 몇 개씩 따먹느라 다소 시간을 지체했다.
  해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걸렸을 무렵 -이것은 레우코시아를 만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해안가에 도착했다. 이곳의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파도가 실어온 부셔진 배의 파편들, 여기저기 널려있는 잡동사니들, 그리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공간하나 만들어있지 않은 해변.
  해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물이나 식량을 찾으러 갔거나, 구조되어 집으로 돌아갔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이 구조되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잠시 나무그늘에 기대 그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이 물을 담아가려 했다면 샘에서부터 걸어온 나와 마주쳤을 것이다. 내가 없는 사이 다른 곳에 생활터전을 마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슬슬 움직여야 레우코시아가 돌아올 때까지 나도 동쪽 해안으로 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어느샌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잠을 자지 않은데다가 이곳까지 걸어오느라 피곤해진 탓이리라.
  평소와는 다른 꿈을 꾼다. 바다 한 가운데 레우코시아가 떠있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너무 멀어 나는 듣지 못한다. 나는 그녀의 노래를 듣기위해 바다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점차 내 몸은 물에 잠겨 가지만 그녀의 노랫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수영을 못하는 나는 발버둥 치면서도 그녀에게 다가가려 애쓴다. 하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몸은 점차 가라앉는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기만할 뿐 계속 노래를 부는 데 열중한다. 나 역시 구해달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그저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가까이 가고자, 노래 듣고자 할 뿐이다….
  뺨을 적시는 차가운 감촉에 나는 눈을 떴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날은 저물어가는 중이었고, 먹구름마저 몰려들어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 나는 당황하며 서둘러 돌아가기로 했다. 이곳에 뭔가 내가 다녀갔었다는 표시라도 해놓고 싶었지만, 이 난잡스러운 공간에 표식을 남겨 봤자 소용없는 짓에 불과할 것이다.
  엉덩이의 모래를 털어내고 숲으로 들어섰다. 비가 올 때 숲에서 헤매었던 전례가 있었기에 -그 때문에 레우코시아를 만나게 되었지만- 나는 주의를 기울이며 동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곧 멈추고 말았다. 숲에서 걸어 나오는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껏 지치고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아로니카와 도나티였다.
  “어디들 갔다 오는 거야? 한참 기다렸잖아.”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반가운 마음이 앞서 나는 웃으며 다가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웃지 않았다. 아니, 울상에 가까웠다. 나는 뭔가가 잘못 됐나 싶어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작스레 아로니카가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왜 그러는 거야?”
  나는 그녀를 안으며 도나티를 바라봤다. 그는 나를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로니카,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등을 토닥이자 아로니카는 더욱 세게 나를 끌어안았다.
  “발레리, 폴리오가… 폴리오가 죽었어!”

  비는 그쳤다. 지나가는 소나기였을 뿐이다. 다시 밤이 찾아온 하늘엔 별들이 가득했다. 하도 많아서 밝다거나 아름답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단지 내가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이곳의 모래 같다는 느낌이었다.
  아로니카는 울다 지쳐 내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눈물자국이 새겨진 그녀의 얼굴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얼굴이 한없이 초췌해 보인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녀의 낮은 숨소리는 마치 신음소리 같았다.
  도나티는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까지만 해도 우리의 곁에서 골이 난 표정을 하고는 서성거렸는데 지금은 또다시 모습을 감췄다.
  슬픔에 잠긴 아로니카의 얼굴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그녀는 그토록 폴리오를 사랑한 것일까. 도대체 언제부터? 확실한 건 이 섬에 오기 전까진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다.
  폴리오는 벼랑에서 발을 잘 못 디뎌 굴러 떨어졌다고 했다. 한없이 울고 있는 아로니카를 진정시키고 나서 도나티와 같이 시체를 확인하러 갔을 때, 나는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답지 않은 죽음이었다. 언제나 의기양양하고 자신감 넘치던 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사지가 뒤틀리고 머리가 깨져 피에 흥건하게 젖은 시체만이 존재했다.
  누구라도 죽게 되면 이렇게 추해질 뿐이야. 도나티가 심약한 자신의 심성답지 않게 조소 섞인 말투로 지껄였다. 나는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내 시선을 무시했다.
  우리는 폴리오의 시체를 끌어다 비교적 잘 파이는 곳에 묻어주었다. 변변한 도구 하나 없어 우리는 부서진 나무 조각으로 땅을 파야했다. 거친 나뭇결에 손이 벗겨져 피가 났지만 금세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 붉은 빗방울이 그의 무덤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를 묻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우리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도나티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눈을 부릅뜨고 빠른 속도로 땅을 팠다. 마치 조금이라도 더 빨리 폴리오의 존재를 없애버리고 싶다는 듯이. 손이 피로 물들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작은 묘비하나 세워주지 못하고 젊은 폴리오를 땅에 묻었을 때, 빗줄기는 가늘어져 있었다.

  나는 달을 바라봤다. 오늘 밤의 달은 어둠 속에 묻혀 극히 일부의 모습만 드러내고 있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레우코시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나타날 때까지 안절부절 못하며, 우리가 사랑을 나누던 바위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아니,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내가 친구들과 함께 구조선을 타고 돌아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녀가 나를 잊고 다시 깊고 차가운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일어 더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도나티가 있었다면 슬픔에 잠긴 아로니카를 맡기고 진작에 동쪽해안으로 갔을 테지만 이미 늦었다. 하지만 달이 사라지기 전에 그곳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지금부터 서둘러간다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법했다. 다소 늦는 것은 그녀라면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다.
  나는 내 무릎을 베고 있는 아로니카의 머리를 살며시 땅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숨소리는 일정했다. 오랜 시간동안 같은 자세로 있었기 때문에 발이 저려왔지만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잠시 아로니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나는 기도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땐, 이미 모든 슬픔이 파도에 쓸려 사라졌기를.
  나는 뛰기로 마음먹었다. 어떡해서든 빨리 동쪽해안으로 가고 싶었다. 우울함이 가득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비록 나의 행동이 무책임하다 할지라도.
  “발레리?”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가냘픈 목소리에 나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어디 가는 거야, 발레리?”
  “…깼어?”
  나는 차마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오, 발레리.”
  아로니카는 울상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나는 두 손을 뻗으며 안정시키려 했지만 그녀는 기어코 일어나 내게로 걸어왔다. 한발 한발 내딛는 게 불안정해 보였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아 나는 그녀 앞으로 향했다. 내가 부축하려하자 그녀는 두 팔로 나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의 몸은 격렬히 떨리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여 그녀의 몸을 꽉 붙들었다.
  “설마 나를 두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응? 나는 네가 필요해. 네가 필요해, 발레리….”
  그녀의 눈물이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후로 나는 동쪽해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도저히 아로니카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나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두운 밤, 그녀를 품고 있을 때마다 이제야 비로소 그녀가 내 것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녀는 먼 길을 돌아 집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레우코시아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그리고 죄책감은 거의 생겨나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서 점차 흐려져만 갔다. 나는 생각해 본다. 애초에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녀가 아로니카를 빼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로니카를 빼앗긴 상실감에 그녀를 선택하고 만 것이다. 그래, 그렇다고 해두자. 지금 아로니카는 나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런데 굳이 내가 아로니카의 곁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아로니카는 천성이 여린 여성이다. 애시당초 이런 아무도 살지 않는 섬에서 살아가기엔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책임감에 불타 그녀를 보살폈다. 그녀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얼어붙은 채로 남아있는 슬픔의 조각들을 전부 녹여 없애버리고 싶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같이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간이,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 필요한 존재로 거듭났다는 사실이. 어쨌든 나는 아로니카에게 아무 일도 시키지 않고 그저 편안히 바다만 바라보고 있게 했다. 식량과 물은 모두 내가 알아서 처리했다. 그녀가 부족해하지 않도록 언제나 넉넉히 준비하기 까지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서툰 솜씨로나마 작은 안식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나무 밑에 누워 바닷바람을 맞으며 잠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찬바람은 필경 아로니카의 몸을 상하게 만들 것이다. 그녀처럼 슬픔에 잠겨 있는 이가 병에 걸린 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돼버리고 만다.
  날이 밝자 나는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오전에는 내내 집을 만드는데 몰두해야만 했다. 이럴 때 아쉬운 데로 도나티라도 옆에 있었다면 일은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필요한 자재라도 날라다 줄 것 아닌가. 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우리와 함께 이 섬에 남아있다는 사실조차 날 짜증나게 만들었다.
  배가 오면 너 혼자 입 닥치고 꺼져버려! 나는 이 섬에서 아로니카와 함께 둘만의 낙원을 건설할 테니까! 도나티의 멱살을 잡고 윽박지르는 상상을 하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날이 오후로 접어들었을 무렵, 나는 작업을 멈춰야만 했다. 식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과일도 부족한 듯 싶었다. 며칠째 똑같은 과일만 먹고 있자니 신물이 났다. 지금하고 있는 작업이 끝나면 물고기를 잡아보기로 하자. 덫을 만들어 숲속에 사는 작은 동물들을 잡는 것도 좋겠지. 나는 중얼거리며 물병 두 개를 챙겨들었다. 내 상의로 만든 보따리도 잊지 않았다. 어느새 내 몸은 보기 좋게 그을려 건강한 섬 사나이 같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나는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든 아로니카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녀의 얼굴은 나무 그늘아래서도 환하게 빛났다.
  숲은 따가운 햇살을 차단하고 있어 시원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걸었다. 분명 이 숲에는 동물이 존재했다. 덫만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다면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전에 먼저 불을 피울 필요가 있지만.
  나는 서둘러 나무 열매를 따고 샘으로 가서 병에 물을 채워 넣었다. 그런 뒤에 차가운 샘물로 목을 축이고 잠시 쉬다가 일어섰다. 하루가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다. 주어진 시간은 많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시간을 너무 헛되이 보냈다. 죽은 이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건 전적으로 폴리오의 잘못이었다. 성급히 아로니카를 우리에게서 앗아간 행동은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샘가에서 몇 발짝 벗어나지 못했을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도나티가 나타났다. 그는 축 늘어진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도대체 어디 쳐박혀 있던 거야?”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섬을… 둘러 봤어.”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대답했다.
  대답을 하는 그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유약하고 머저리같던 옛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섬은 남자를 강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뭐 특이한 거라도 발견했어?”
  “…아니. 아무 것도.”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와는 별로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해안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지금쯤 아로니카는 단잠에서 깨어났을 것이다. 문득 그녀의 미소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 그래, 어쨌든 수고해. 난 먼저 가야겠어.”
  “저기….”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왜?”
  “먹을 것 좀 있어? 배가 고픈데.”
  그가 내 보따리를 보며 눈을 번뜩였다. 한심한 놈. 설마 나무 위도 올라가지 못해 지금까지 굶은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아무 내색하지 않고 보따리를 내밀었다.
  “그래, 마침 따놓은 게 있어서 말야.”
  “미안해.”
  “뭘. 가는 길에 또 따면 되는데.”
  도나티는 보따리를 풀어 과일을 벌려놓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다. 나는 물병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먹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우리가 서있는 곳에서 뒤쪽으로 난 수풀너머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동물이 틀림없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위험할 정도의 난폭한 녀석은 아니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들었어, 도나티? 동물이야.”
  “그래. 그런 것 같은데.”
  그는 과일을 입 안 가득 집어넣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덤불이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마치 야수의 그것과도 닮아, 내가 먹잇감이라도 되는 양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까지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내 신경은 온통 작은 동물에 쏠려 있었다.
  “저걸 잡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렇게만 되면 어떻게든 불을 피워서 맛있게 구워 먹자구, 도나티. 너도 불을 피우는 것쯤은 돕도록 해.”
  나는 흥분해서 되는대로 지껄이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녀석은 아직 수풀 너머에 있다. 순간적으로 덥치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셋까지 센 후에 뛰어들기로 했다.
  하나… 둘… 셋!
  순간 나는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느꼈다. 뭔가 잘 못되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비틀거렸을 뿐, 재빨리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모든 상황이 명백해졌다.
  “도나…티!”
  도나티는 약간 큰 돌을 두 손으로 든 채,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는 적의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노려봤고, 그가 들고 있는 돌의 아랫부분에는 붉은 액체가 묻어있었다. 나는 머리 뒤로 손을 가져가 확인했다. 내 손바닥은 새빨간 피로 물들었다.
  “너….”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도나티는 품안에서 작은 칼을 꺼내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런 일이었기에 나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곧 격렬한 충격과 함께, 칼이 내 왼쪽 아랫배에 꽂혔다.
  “뭐…야… 이 칼은….”
  나는 배를 움켜쥐며 무릎 꿇었다. 고통이 너무 심해 제대로 말하기가 힘들었다.
  “하, 우연히 해변으로 흘러온 걸 주었지.”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의 몸에도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그것은 내 피였다. 나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너, 너까지 해치고 싶지는 않았어. 이건… 전부 네 탓이야!”
  그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폴리오만 해치워 버리면 될 줄 알았어. 그, 그러면 아로니카가 내 것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넌 뭐야? 어디서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아로니카를 낚아채가? 모든 건 전부 내가 했는데! 내 힘으로 해냈는데! 응? 뭐라고 말 좀 해보시지!”
  “니… 새끼가… 폴리오를….”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래, 내가 그랬어. 실수로 가장하기 쉬울만한 좋은 장소를 찾아내 폴리오를 데려갔지. 그를 속이는 건 쉬웠어. 바다너머에 신경 쓰이는 게 있다고 했거든. 나는 눈이 나쁘니까 네가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야. 그는 당장 나를 따라와서 벼랑위로 올라갔어. 그리곤 목을 빼 바다를 바라보며 나를 칭찬하던데. ‘잘했어! 정말 잘했어, 도나티! 네가 본 게 배가 맞다면 우린 네 덕에 돌아가게 되는 거야!’ …병신.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거리며 그를 벼랑 아래로 밀어버렸어. 그 새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작살났지. 너도 그가 땅에 떨어졌을 때 난 소리를 들었어야 하는데…. 어쨌든 그걸로 충분했어. 모든 건 끝난 거였어. 폴리오를 처리한 건 나니까 내가 아로니카를 차지하면 되는 거였는데. 근데 뭐야. 어디서 불쑥 나타나 그녀를 가로채가? 응?”
  나는 배를 부여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정신이 아득해져 그가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뭐라 뭐라 악을 써대고 있긴 한데, 내 귀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뭐, 이젠 됐어. 정말로 끝이야. 너는 처음처럼 다시 사라지는 거야. 그러면 아로니카의 곁에는 나만 남게 되지. 영원히. 많이 늦어지긴 했지만 그 정도는 이해해주지. 잘 가, 발레리. 난 너를 그다지 싫어하진 않았어. 이건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야.”
  그는 물병에 있던 물로 손을 씻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 피가 묻은 옷을 벗어서 던져버렸다. 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빠짐없이 지켜봤지만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쳤다. 잠시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안정을 되찾고 그는 숲 너머로 사라져갔다….



  나는 어떡해서든 움직여야만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음뿐이다. 상처가 깊은지 어떤지는 나로선 알 수가 없다. 그저 끔찍하게 아프다는 것 밖에는 아는 게 없었다. 그래도 희망은 남아있었다. 그녀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아로니카는 아니다. 지금 필사적으로 돌아 가봤자 도나티에게 확실히 죽여 달라고 보채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설령 도나티가 없더라도 아로니카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오히려 내 모습을 보고 기절이나 안 하면 다행이리라.
  하지만 레우코시아라면, 그녀라면 충분히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동쪽해안으로 갈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너무 아파 허리를 세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구부정하게 선 상태로 주위를 살폈다. 도나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통으로 온 몸이 떨려왔다. 전신으로 고통이 뻗어나갔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발을 내딛었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고통에 차츰 익숙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아픔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정신을 잃고 고꾸라질 걱정은 없었다. 나는 걸어가면서 자꾸만 뒤를 확인했다. 얼마만큼이나 걸어왔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오래전에 지나쳐 온 나무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바로 내 등 뒤에 있었다.
  얼마나 걸어왔을까. 나는 결국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걸 포기하는 대신 기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한결 움직이기가 수월했다. 여전히 내 배에 꽂혀있는 칼이 신경 쓰였지만 나는 앞만을 바라보며 몸을 질질 끌며 나아갔다.
  날이 어두워졌다. 숲속에선 어둠이 훨씬 일찍 찾아든다. 나는 계속 나아가면서도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필사적으로 대항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졸음은 참아내기 힘들었다. 깨어날 때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나약한 자신을 꾸짖었다.
  손바닥과 무릎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아픔은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갈수록 배의 통증이 극심해졌다.
  끝이다. 더 나아갈 기력을 완전히 소실하고 말았다. 이내 몸을 뒤집어 하늘을 향해 드러눕자 말로 표현 못할 아늑함이 내 몸을 감쌌다. 이젠 됐다. 이제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내 눈을 통해 보이던 모든 것이 사라져가고, 주위의 소리도 차츰 그 빛을 잃어갔다. 모든 게 사라지고 나면 영원한 안식이 찾아올 것이다….
  그런데 귀에서부터 다시 소리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분명 익숙하고 그리운 파도소리가 바람을 타고 숲으로 흘러 들어왔다. 내가 원하던 그곳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떴고, 조금만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이 숲 너머에는 레우코시아가 있다. 그녀는 분명, 여느 때처럼 우리가 사랑을 나누던 바위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 바람은 곧 현실이 되었다. 힘들게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커다란 바위에 앉아있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해냈다. 그림자의 형태는 분명 내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가 밤하늘 아래 놓여있었다. 그녀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매정하게 떠나가지만 곧 다시 돌아오고 마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다.
  “레우코시아!”
  나는 모든 힘을 짜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레우코시아!”
  내 필사적인 외침에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분명 나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와줘, 레우코시아! 나는 다쳤어!”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대꾸가 없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바다로 뛰어들었다. 마치 그녀를 만난 처음 그 순간이 생각난다. 나는 애타게 그녀를 부르고, 그녀는 나에게서 달아나던….
  “레우코시아!”
  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그녀가 앉아있던 바위까지 기어갔다. 여기서 그녀를 놓치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레우코시아! 어디 있어?”
  나는 절규했다.
  잠시 후 잔물결이 일더니 그녀가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거친 파도 안에서도 그녀는 능숙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나는 창백한 손을 내밀었다.
  “도와줘. 이것 봐. 나는 피투성이야.”
  내 간절한 호소조차 그녀는 무시했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당신이….”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돌아오지 않던 날 밤 이후….”
  차가웠다. 너무나도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걱정이 돼서 남쪽 바다로 갔었어요. 그리고… 보고 말았어요.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당신의 모습을. 나를 바라볼 때보다 더 황홀한 표정으로 그녀를 어루만지던 당신을!”
  “레, 레우코시아. 그건…”
  나는 변명하려 했으나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떤 말로도 나를 정당화하진 못한다. 그리고 그녀를 위로하지 못한다.
  레우코시아는 눈물 흘렸다.
  “너무 슬펐어요. 당신에게서 내가 한 순간의 꿈보다도 빨리 잊혀 졌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어요. 믿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나는… 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래, 모두 내 잘 못이야. 변명할 마음은 없어. 미안해. 그러니 제발…”
  굳이 거울을 통해 보지 않더라도 나는 내 얼굴을 상상할 수 있다. 비굴함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눈물이 방울져 바다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니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내 사랑. 우리 바다로 가요. 내가 사는 깊은 바다 속에서 함께 지내요. 바다는 육지보다 훨씬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에요. 그곳에서 당신의 상처를 낫게 해줄게요.”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안될 말이야. 아로니… 아로니카가 나를 기다리고 있어. 빌어먹을 도나티에게서 그녀를 구해내야 돼!”
  나는 고개 저었다. 나는 레우코시아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내 진실한 사랑은 오직 아로니카 뿐이다.
  나는 절실히 도움을 바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발 도와줘. 나는 애원한다.  
  레우코시아는 매몰차게 고개 젓더니, 잠시 후 눈물 흘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작고 부드러운 입에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 나왔다. 나는 죽어가고 있거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 부르고 있다.
  나는 남쪽해안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의 도움은 포기해야 한다. 차라리 어서 빨리 아로니카의 곁으로 달려가는 편이 더 나앗다. 도나티의 손에서 그녀를 되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기분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일어섰다.
  “안 돼. …안 돼, 레우코시아.” 나는 의미 없이 지껄인다.
  어느새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그녀의 황홀한 노랫소리에, 내 얼굴엔 미소가 피어난다. 레우코시아는 내게 손짓하며 계속 노래한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기 위해, 다시 한 번 그녀를 안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바다로 들어간다. 무릎까지 물에 잠겼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차가운 줄로만 알았던 바닷물이 따스하게 내 몸을 감싼다. 그녀의 노래는 너무나도 감미로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녀는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로 가기 위해 계속 걸어갈 뿐이다.
  몸은 점점 물속으로 잠겨갔지만 나는 미소 지으며, 노래하고 있는 레우코시아를 향해 손을 뻗는다.

...
ro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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