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Nobody

2006.07.15 02:40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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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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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떠졌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목을 힘겹게 움직여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희뿌연 담배연기로 가득차 있는 익숙한 공간, 자신의 방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뭉쳐있는 허리과 어깨의 근육이 신음
하는 듯 했다. 방안에 찌든 담배냄새와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그 외의 것들이 섞인 악취에 얼굴을 찡그리며 그는 머리맡에 손을
뻗어 담배갑을 집어들었다.
빈 담배갑이 꾸겨져서 다시 그 자리에 놓였다. 그는 눌린 뒷머리
를 긁적이며 재떨이를 보았다. 필터까지 태워버린 꽁초들 사이로
고르고 골라서 찾아낸 그나마 장초를 입에 물고 이번에는 라이터
를 찾기 시작했다.
검은 얼룩이 생긴 장판 위에 흩어져 있는 거울의 깨진 조각 사이
를 뒤져서 라이터를 집어들고 비어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라이터를 집어던지고 아쉬운 듯
입에 문 꽁초를 오물거리며 씹던 그는 동공이 풀린 눈으로 방에
퍼져있는 담배연기와 날아다니고 있는 파리들과 천장 아래 조그
맣게 붙어있는 창문을 번갈아보았다.
창문을 열기 위해 책상을 까치발로 밟고 손을 뻗었다. 거미줄이
손에 먼저 쥐어진다. 힘겹게 창문을 열고 나자 더운 바람이 들어
와서 얼굴 위를 덮었다.
인상을 쓰며 떨어지듯 창문에서 내려온 그는 비틀거리며 방 주위
를 둘러보았다. 담요 위에 묻어있는 검붉은 얼룩을 멍하니 응시
하다가 힘없는 손길로 대강 둘둘 말아놓은 그는 책상 밑에 누워
있는 생수병을 집어들었다. 검은 먼지가 침전된 텁텁한 물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입안에 털어넣고 나서 그는 주저앉았다.
깨져있는 거울을 허망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 점점 앉은 자리가
불편하다는 느낌이 든다. 대여점에서 빌린지 두달된 만화책이
깔려 있었다. 대여점에서는 그의 집을 모르고 그의 전화는 이미
정지되었다. 그래서 만화책은 원래 방에 있던 물품처럼 놓여서
그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손을 뻗어서, 동네 할인점 이름이 인쇄된 노란 봉투 속을 뒤졌다.
비어있는 라면과 과자봉지들 사이를 누비던 허망한 손을 빼낸
그는 뻐근한 느낌이 드는 목 뒷덜미에 손을 얹고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튀어오르는 듯 일어나서는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천원짜리 두장이 손가락 끝에 따라 나왔다.
2천원으로 라면 하나와 담배 하나를 구입할 수 있는 적정선을
머릿속으로 조율하던 그는 갑자기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바지에서
손을 뗐다. 창문을 보는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생겼다.
벌써 며칠이 흘렀지만 때때로 잊게 된다. 너무 차이가 없어서일까.
채광이 제대로 되지 않지만 어스름하게 붉은 빛이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아직 낮인 듯 하다. 지금 대문을 열고 나가면 1층에 사는
집주인 아줌마가 현관 계단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머리나 감아야겠다는 생각에 화장실 문으로 다가가다가 발
앞에 흩어진 거울 조각들을 보고는 손끝으로 집어 옆으로 툭툭
던졌다. 반달 모양으로 깨진 유리 끝에 굳어있는 붉은 얼룩을
보던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발바닥을 살폈다. 상처는 없다.
그 조각을 무심한 표정으로 보다가 옆으로 힘없이 던진 뒤 문을
열고 화장실로 들어섰다.
수도를 틀어 대야에 물을 받으면서 그는 화장실 거울을 보았다.
별다른 점은 없다. 피부가 군데군데 얼룩처럼 색이 변하기 시작
했고 목에 헤벌어져 있는 상처는 검게 썩어 들어가고 있지만
시체로서 이 정도면 양호한 것 같다. 아직 경직 증상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최상급은 아니어도 상급은 된다고 자평 중이다.
상처로 자꾸만 달려드는 파리를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저어
쫓으며 대야에 받은 물로 세수하고 상처 주위에 굳어있는 핏망울
들을 씼어냈다. 어제도 피가 약간 흘러나와서 놀랐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멈춘 것 같다.
흰색인지 회색인지 구분 안되는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닦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시끄럽게 날아다니는 파리 소리 외에는 적막감 뿐인 방안을 보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어진 목의 기도에서 소리가 샌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주저앉았다.
삶이 끝났음에도 고독은 계속된다..여느 때와 다름없이.
창문으로 들어온 하늘이 보라빛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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