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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기생 (1)

2006.07.13 02:1807.13

저쪽 산 너머로 푸른 태양이 지고 있었다. 고온의 푸른빛을 띠고 작열하는 태양이 지평선 뒤 산 너머로 그 고혹적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빛의 산란 때문에 해가 지는 쪽의 산에는 구름 색이 변하고 있었다. 곧 어둠이 깔리면서 별이 하나둘 보일 테지. 그리고 네 개의 달이 차례로 뜰 것이다.
일몰을 보고 있던 쿠마라는 인기척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비나가 그의 옆에 와 서 있었다. 비나 역시 처음 보는 푸른 태양의 일몰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기이한 소녀였다.
막 사춘기로 넘어가고 있는 이 소녀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이질적인 조숙함을 띠고 있었다. 12살이라고 본인이 얘기하긴 했지만 신원도 불명이고 어느 자료에도 출생기록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넓고 광활한 우주를 떠도는 작은 우주선은 많았고 당연히 출생기록조차 없이 떠도는 유민도 많았다. 아마도 12년쯤 전의 혼란스런 시기에 태어나 출생신고를 할 계제가 없었을 것이다.  
12년 전에 은하 연맹이 붕괴될 정도로 큰 사고가 있었다. 그 덕에 많은 행성이 고립되고 전쟁터에서 도망친 유민 우주선이 우주 곳곳에 보였다. 비나는 그런 유민 우주선에 타고 있던 부부의 자식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12살 시절을 돌이켜보았다. 딱 그 나이에, 그는 사춘기를 거치지 못하고 강제로 어른의 세계로 들어 올려졌다. 사춘기의 잔인한 천사가 그에게 손댈 시간조차 없이. 그는 안락한 유년기의 땅을 떠나 불안정하고 막막한 어른의 세계로 올라섰다.
그때 비나가 그의 회상을 가로막듯 질문을 던졌다.
“쿠마라 선생님, 뭘 보고 계세요?”
“베가.”
“그게 지구에서 저 항성을 부르는 이름인가요?”
비나는 한 번도 지구에 가 본 적이 없었다. 떠돌이 우주선에서 태어나, 별 사이를 떠돌며 자라다 결국 식구들이 낯선 행성에서 유행병으로 다 죽는 바람에 고아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우연찮게 그 별에 들렀던 쿠마라에게 고아원장의 부탁으로 그녀를 떠맡게 되었다. 어린 시절 떠돌았던 기억이 자신의 우주선에 비나를 태우고 말았다. 같은 인종인 그녀를 지구로 데려다 줄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쿠마라는 약간 어두운 피부에 짙은 갈색의 머리와 눈인데 반해, 비나는 밝은 금발에 맑은 초록색 눈을 갖고 있었다. 맑은 청녹색 눈이 자기와 비슷한 색의 항성이 산 너머로 사라지는 걸 보고 있었다.
“지구의 태양은 붉은빛이지.”
“옛날엔 붉은색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죽어가고 있잖아요.”
샐쭉 웃는 비나를 곁눈질로 보았다. 이 아이는 지구를 본 적이 없고 가 본 적도 없다. 지구의 붉은 태양이 주는 묘한 감정 같은 건 전혀 모를 터였다. 이젠 대부분의 사람이 항성이란 말을 더 사용했다. 태양은 거의 고유명사화 되고 있었다. 지구의 항성을 가리키는 단어. 태양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고 지구에는 사람이 얼마 살지 않았다. 대부분 먼 우주로 나아가 다른 여러 행성에 터를 잡았다.
12살 때 처음으로 지구로 돌아가 커다란 붉은 태양을 보았다. 이제 사람들이 과거에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듯이 최초의 요람이었던 지구로 성지 순례를 떠나곤 했다. 어머니를 따라 지구로 갔다 알파 센타우리의 기숙학교로 떠났더랬지.
12살 이후로 그는 자기의 몸 어딘가 알 수 없는 기이한 존재감을 느끼곤 했다. 자기의 손을 볼 때 이 손이 과연 자기의 것인가 의심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내 몸은 과연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걸까? 내 머릿속의 뭔가가 나를 움직이는 건 아닐까? 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의심했다. 존재감이란 게 얼마나 약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은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그건 바로 지구 시간으로 300년 전에 바로 이 행성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기억은 강에서 바다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그 트라우마의 첫 현장으로 돌아갔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는 태어나서 연어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간다는 표현을 할 때 연어처럼 이런 표현을 쓰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인류는 아직 지구의 기억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12살 때의 사건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이나 어제 일처럼 또렷한 300년 전의 시간으로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듯 은빛 비늘을 번쩍이며 비릿한 냄새가 날 듯한 과거로 돌아갔다.


쿠마라는 무의식적으로 1층의 동생 방의 불을 켜는 순간, 뭔가 형체를 보았다.
동생이 쓰러져 있었다. 깜짝 놀라서 달려간 쿠마라는 놀라고 말았다. 동생의 등에는 이상한 것이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 이상한 것은 물컹물컹해 보이는 불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인 타원형의 것으로 쿠마라가 보는 눈앞에서도 계속 조금씩 꿈틀꿈틀 움직이면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치 개구리나 도룡뇽의 알을 떼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불투명한 점액질 속에 뭔가 까만 것이 얼핏 보였다.
순간적으로 입에서 비명이 나오려 했으나 동생 등에 있는 이상한 것이 꼼지락꼼지락거리는 것을 보자, 비명도 목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락슈미는 미동도 않고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손끝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집중해야 돼. 어서, 어서.’
온몸을 손끝 하나에 움직여 겨우 검지의 끝마디를 살짝 꿈틀거렸다. 온몸에 전기처럼 충격이 퍼져 나갔다. 일단 충격에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쿠마라는 빨리 엄마랑 아빠한테 알려야겠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쿠마라는 다리를 움직이는 뇌에 신호를 보낸다는 생각을 했다. 왼발을 들고 앞으로 움직여 뒷발로 선다. 이런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으로 하였다. 겨우 한 발자국 걸음을 떼자 갑작스레 공포가 몰려들었다. 동생은 이제 겨우 6살이었다. 쿠마라 처음부터 이 별이 마음에 안 들었다.
쿠마라는 공포에 질려 거의 구르듯이 부모님의 서재로 뛰어 들어갔다. 역시 엄마는 서재에서 컴퓨터에 무언가 쓰고 있었다. 엄마는 갑작스레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쿠마라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쿠마라는 엄마의 비난하는 날카로운 듯한 눈빛을 바라보며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입에선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라, 락슈미 등에……."
1층의 동생 방에서 2층의 어머니 서재까지 뛰어왔기 때문에 숨을 헐떡이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정확하겐 공포로 혀가 얼어붙어서였다. 그 락슈미 등의 무언가가 혀를 마비시킨 것 같았다.
"락슈미 등에 뭐?"
어머니가 뭔가 묻자, 그새 숨을 고른 쿠마라가 입에서 나오려다가 만 말이 저절로 입이 혼자 벌려서 성대를 자극하듯 튀어나와 버렸다.
"이상한 게 달라붙어 있어요."
일단 말하자 뭔가 해줄 수 있는 어른에게 알렸다는 안도감인지 눈물을 흘러내렸다. 쿠마라는 난생 처음 그런 걸 보았다. 그런 게 있다는 걸 듣도 보지도 못했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경험이 많으시니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눈물을 항변이라도 하듯이 속으로 ‘나는 이제 겨우 12살 난 남자애야.’ 라고 읊조렸다.
"뭐라구? 이상한 거라니?"
어머니는 안색이 새파래지셨다. 장난이라고 하기에 쿠마라가 벌벌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창백한 안색의 아들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엔 못 미더워하는 눈초리였지만 일단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보자꾸나.”
언제나 침착했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직접 쿠마라를 이끌고 락슈미의 방으로 향했다. 쿠마라의 말이 걸리는지 빠른 발걸음이었다.
방은 쿠마라가 열고 뛰쳐나갔던 그대로 문은 활짝 열려 있고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락슈미가 등을 내놓은 채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락슈미의 고개가 문 반대편으로 엎어져 있어서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쿠마라와 같은 머리색의 작은 뒤통수가 보일 뿐이었다. 아침에 엄마가 묶어준 데이지꽃이 달린 머리끈이 있었다.
락슈미 등에 달라붙어 있던 알같이 생긴 뭔가의 것은 훨씬 더 커져 있었다. 반투명한 개구리알같이 생긴 점액질의 미끌미끌한 막 속에 무언가가가 계속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는 작은 골프공만 하던 것이 자그마한 락슈미의 등을 다 덮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엄마는 순간 휘청이더니 벽을 짚었다. 쿠마라는 엄마의 표정을 보았다. 역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린 엄마는 비명을 질렀다. 그때 집 어딘가에 있던 아빠가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엄마는 아무 말도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락슈미의 등만 가리켰다. 아빠 역시 락슈미의 등을 보는 순간 얼굴색이 파랗게 변했다. 그리고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쿠마라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잘 몰랐지만 이건 불길했다. 아빠랑 엄마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다만 파랗게 질려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더 이상한 건 뭔가 알고 있는 듯했다. 말없이 엄마랑 아빠는 쿠마라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결국 방 밖으로 끌려나온 쿠마라의 눈앞에서 천천히 문이 닫혔다. 이상한 점액질은 이제 락슈미의 등을 다 덮은 채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고, 통통한 엉덩이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곧 몸 전체를 다 쌀 것이다.
그 이상한 점액질이 락슈미의 온몸을 쌀 거란 생각을 하자 결국 속에서 뭔가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쿠마라는 잡고 있는 강한 손아귀를 뿌리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에 대고서 신 위액이 나올 때까지 토해 버렸다.
가능하다면 눈을 씻어내고 기억까지 토해 내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나오는 게 없건만 계속 헛구역질은 계속되었다. 무거운 공기에 공포와 기이함이 가득 느껴졌다.
짠 눈물과 쓰디쓴 위액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얼굴을 씻었다. 이 행성의 다른 주민들은 긴 건기에 들어간지라 물은 일정 분량만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얼굴을 씻을 물조차 없는데, 물론 쿠마라네 집에서는 물 생성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 그다지 부족함은 없었다.
쿠마라가 화장실 밖으로 나갔을 때, 더 놀랄 만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부를 파란색으로 칠한 이 별의 승려들이 쿠마라네 집에 들어 닥치고 있었다. 그들은 락슈미가 있는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입은 짙푸른 가운의 금줄이 신분을 말해 주고 있었고 그들은 아빠와 엄마에게 무언가 얘길 하고 있었다.
"아카브의 은총이 지구의 소녀에게 미치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일인지요."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엄마는 안색이 창백해지시더니 아무 말도 없으시다가 결국 쓰러지셨다. 그런 엄마를 아빠가 받쳐 안고서 침실로 갔다. 승려들은 계속 모여들었고, 쿠마라네 식구들이 살고 있는 집을 감쌌다. 한구석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는 쿠마라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창문으로 한참 건기인 이 별의 땅에 황사가 부는 게 보였다. 몇 년째 건기였다. 이렇게 긴 건기는 처음 본다고 이 별 -- 처녀자리 알파성 6번째 행성 -- 사람들도 얘기하곤 했다. 그러면서 아카브가 새로 태어나기 전엔 꼭 이런 건기가 오곤 하는데 이 건기도 그런 건기인 것 같다면서 수근대곤 하였다.
락슈미가 태어난 해에 쿠마라네 식구들은 이곳으로 이주했다. 아빠와 엄마는 인류학자였고, 이곳에 정착하기 전에는 여러 별로 떠돌아다니곤 했다. 락슈미는 평범한 6살배기 꼬마 여자아이였다. 떼도 잘 부리고, 고집도 세고, 단 걸 좋아해서 이가 몇 개 썩어 웃을 때마다 썩은 이가 보이던 작은 여자아이였다. 그런데 이런 락슈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도대체 아카브의 은총이란 뭔지 쿠마라는 몰랐다.
이 별의 주민들은 아카브란 신을 섬긴다고 전에 아빠랑 엄마는 얘기하시곤 하셨다.
“아카브는 몇백 년마다 환생을 한단다.”
“환생이 뭔가요?”
“다시 태어나는 거지.”
“다시 태어난다고요?”
“그래.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난단다.”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데요?”
“글쎄. 우린 그걸 연구하러 여기로 온 거란다.”
그건 말해 주시기 곤란한지 말꼬리를 흐리셨다.

어디서 몰려나왔는지 승려와 주민이 점점 집을 감싸는 게 창밖으로 보였다. 그들은 감히 여기에 들어올 수가 없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방에서 꼼짝 안 했다. 아마 쿠마라도 방에 박혀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듯했다. 아무도 쿠마라를 주의해서 보지 않았다.
쿠마라는 락슈미의 방 쪽으로 움직였다. 도대체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했다. 락슈미의 등에 생긴 그 이상한 알도, 부모님을 무기력하게 하는 그 이유도, 이 승려들이 우리집에 와 있는 이유도 모두 다 알고 싶었다.
쿠마라는 당당하게 경을 읊는 승려들의 뒤를 따라 락슈미의 방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앞을 지키고 있는 승려가 제지했다. 그들은 푸른 옷 대신 붉은 옷을 걸침으로써 그들이 최고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음을 나타냈다.
"소년이여, 너는 여기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엄숙하게 말했다. 자아가 하나로 합쳐진 듯한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왜 안 되는데요?"
그는 막 사춘기에 들어선 소년답게 반항했다.
"아카브가 환생하시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란다."
"아카브가 왜 내 동생 방에서 환생을 한대요? 여긴 우리집이고 나는 들어갈 권리가 있어요. 오빠가 여동생 방도 못 들어간단 말인가요?"
쿠마라는 고집을 부렸고 들어가려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그들은 쿠마라를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결코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강한 힘으로 그를 결박했다.
그때 방에서는 경을 읊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카브아데메니아르부카데사르네리아스리아무느카……."
처음엔 한 소리로 시작되더니 곧 연창이 이어졌다. 묘하게 음악적인 리드미컬한 소리가 곧 집을 가득 메웠다. 쿠마라를 잡고 있던 승려조차도 손을 모으더니 눈을 감고 그 경을 외우는 것이었다.
그때를 기해서 쿠마라는 동생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기에 있는 모든 승려들이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기도 중이었다. 오직 제일 최고급 승려인 쭈글쭈글한 시퍼런 얼굴만이 눈을 뜨고서 계속 경을 읊고 있었다. 그는 쿠마라를 보고서 잠시 놀란 듯하더니 고요한 미소를 보내주는 거였다. 그러나 쿠마라는 마주 웃어줄 수 없었다.
방에 들어간 쿠마라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과거에는 동생이었으나 이제는 다른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그 개체였던 것이다.
동생 등에 붙어 있던 그것은 없어졌고, 아니 오히려 처음보다 훨씬 커져서 동생의 몸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락슈미는 커다란 고치 같은 것 속에 들어가 있었다. 아니, 불투명한 번데기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동생의 몸인 것 같았다.
쿠마라는 그 번데기 속에 들은 게 동생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속에 있던 것의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이 커지면서 이제는 점액질이라고 하기 어려운 뭔가 퍼석퍼석해진 고치가 된 것이 투두둑 떨어졌다. 그 움직임은 계속 역동적으로 변해 갔고, 그 움직임에 따라서 구멍이 넓어지면서 속에 들어 있는 점액질의 물질이 바닥에 깔려 있는 붉은 융단에 흘렀다.
찢긴 고치 사이로 길쭉한 손처럼 보이는 것이 맨 처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손이 고치를 찢으면서 액을 흠뻑 뒤집어쓴 사람 얼굴이 나타나고 몸 전체가 나왔다. 그때 쿠마라는 그 녀석이 동생과 흡사한 다른 존재란 걸 알았다.
묘한 웃음을 띠고 있는 그것은 동생처럼 연하게 햇빛에 탄 얼굴에 동생처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왔지만 이마 한가운데에 또 하나의 눈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존재는 동생이 성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 몇 시간 사이에 시간의 흐름이 동생을 집어삼켜 어린 동생은 어디로 가고 성인이 된 동생 모습이 엿보였다. 아니 동생 모습의 괴물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었다.
그의 몸 주변에 뜨거운 김이 서리고 몸에 달라붙었던 점액질이 파삭하게 말라 떨어졌다. 그 늙은 사제가 동생의 모습을 한 괴물에게 옷을 걸쳐주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동생은 더 이상 여자도 남자도 아니었다. 나체인 락슈미 몸에서는 생식기 자체가 사라진 상태였고, 포유동물의 증거라 할 수 있는 배꼽조차 없었다. 인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호미니드의 특징이 있는 몸의 증거를 완전히 없애버린 것이었다. 아마도 여자로 자라났을 그 몸의 자궁이나 난소 같은 것도 없애 버렸을 것이었다.
늘씬하고 길쭉한 그 몸은 처음에는 좀 낯선지 움직임이 느릿하고 어색했지만 점점 길이 들어가는 옷처럼 그 움직임이 편해지고 우아해졌다.
리드미컬한 노래는 점점 더 커지고 승려들은 이제 더 경쾌한 곡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곧 예쁘게 치장한 아가씨들이 몽롱한 향이 나는 항료를 들고서 노래를 부르며 왔고 동생을 감쌌다.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인것 같았다. 그들은 평생 아카브를 위해서만 봉사한다고 한다.
아빠와 엄마가 그들과 접촉을 해 보려 했지만 계속 실패하는 것을 쿠마라 보아왔다. 그런데 그들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제 발로 찾아와서 집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건장한 상체를 벗은 남자들이 주렴이 드리워진 가마를 갖고 와서 내려놓자 화려한 가운을 입은 그가 가볍게 올라갔다. 그러자 여사제가 둘러싸고 아름다운 노래와 함께 꽃을 뿌리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벽 한 귀퉁이에 서서 그걸 보고 있던 쿠마라의 눈과 가마 위의 락슈미의 몸을 빌린 괴물과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 자식은 모든 걸 다 이해한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 담긴 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이마의 제3의 눈이 윙크하듯 깜박거렸다.
그때 천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밖이 어두워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이 비다 하면서 신바람에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아카브가 탄생하면서 비를 가져왔다. 방금 쿠마라의 눈앞에서 새로운 아카브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비가 왔다.
누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가운을 건네주었던 바로 그 승려였다.
"소년이여 그대는 기쁘지 않은가? 그대의 동생의 몸에서 새로운 아카브가 환생했는데."
"왜 내가 기뻐해야 하는데요?"
쿠마라는 순간 너무나 격분해서 그에게 대들듯이 말했다.
"동생이 죽었는데 기뻐하는 사람이 누가 있던가요?"
"너의 동생이 죽다니 무슨 소리냐. 단지 너의 동생은 새로운 아카브로 다시 태어난 거다."
"그럼 동생 등에 달라붙어 있던 알은 어디로 갔는데요? 그 괴물이 내 동생을 먹어치우고 동생 흉내를 내고 있잖아요!"
그는 엄숙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알은 신이 잠시 머물고 있는 거처다. 너의 동생의 몸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이지. 그 알 속에 그의 모든 지식이 다 담겨져 있고, 그는 새로운 아카브로 탄생을 해도 전처럼 똑같은 아카브일 수 있는 거란다."
"왜 그 빌어먹을 아카브는 나의 동생을 먹어치운 거죠?"
"먹어치우다니! 그는 단순히 네 동생의 몸을 빌리고 있을 뿐이야."
"그럼 내 동생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락슈미… 내 꼬마 여동생 6살짜리 앞니가 흔들리는 그 동생은 어디로 간 거죠?"
"너의 동생 락슈미는 아카브를 받아들이는 은총을 입은 거야.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소년이여."
"빌어먹을, 젠장! 내 동생이 사라진 건 어떻게 해도 사실이잖아요! 내 동생 돌려줘요!"
그러나 사제는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쿠마라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순간 쿠마라는 모든 게 욕지거리가 나서 이제는 굵다란 빗줄기로 변해서 온정원 안에 물구덩이를 만들고 있는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밤과 비의 장막을 뚫고 꽃등 물결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 아련한 빛 사이로 사람들이 무언가를 중심으로 감싸고 사원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설의 밤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이 행성에서는 수십 수백 번 맞는 그런 밤이었으나, 쿠마라스와미 라다크리쉬나이야에게는 하루밖에 없는 그런 밤이었다.
락슈미가 존재하길 멈추고 다른 존재의 집으로 탈바꿈하던 그 밤, 행성에는 비가 내렸다. 락슈미의 껍질을 뒤집어 쓴 그 괴물 같은 녀석이 고치에서 나오자마자 오랜 가뭄이었던 행성에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빗속을 뛰쳐나가기 직전 쿠마라는 락슈미와 뛰어놀던 그 복도에서 가마 위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웃고 있는 입매와 냉정한 눈은 락슈미의 형체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지만, 이마 위의 눈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 제3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온몸의 땀구멍 하나하나가 느껴질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락슈미의 존재를 파고 들어가 대신하고 있는 저 기생자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직 어렸던 쿠마라의 머릿속에, 저 녀석은 기생충이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무섭다라는 공포도 같이 깃들었다. 락슈미를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지닌 두려운 존재였다. 진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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