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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영원의 빛 (5) e.

2006.07.13 02:1507.13

5. 전설의 밤

<밤 중의 밤>이라고 불리는 이슬람의 어느 날 밤에는 천국의 비밀 문들이 활짝 열리고, 항아리들에 담겨 있는 물의 맛이 달콤해진다. 그러나 그처럼 천국의 문들이 열렸었다 할지라도 내가 그날 오후 느꼈던 그런 황홀감을 맛보지는 못했으리라.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by Borges

언제나 사건은 우연히 발생한다. 하지만 그 우연은 여러 가지 필연이 뒤에 도사리고 있다.  정말 신도 부당한 것이 그렇게 그걸 찾는 자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문고리조차 잡아본 적 없는 나에게 그 빛이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우주의 신비, 신의 머릿속을 지렁이 두뇌 같은 인간이 알려 하다니, 불경할지어다! 낮이 밤의 깊이를 알 게 뭐냐!
그것은 책에서 갑자기 나타난 발광체 같은 것이었다. 케이트 그리너웨이의 전설적인 그림책 <하멜룬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초판본을 조심스레 펼쳐 들었다. 오래되어 빛이 바랜 누런 종이에 이제는 색도 희미해져갔다. 천에 쌓인 겉표지에는 오래된 세월의 때가 입혀져 있고 금박은 희미해져 있었다.
옛날 하멜룬에는 쥐가 많이 살았다고 했다.
원래 이 피리 부는 사나이가 집시라는 얘기가 있다. 집시들이 양성 종두를 약하게 앓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약한 천연두를 전염시켜서 면역을 키워서 종두에서 사람들을 구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끌려 동굴로 끌려가는 그 장면을 펼쳤다. 그 순간 빛이 책 속에서 퍼져나오면서 하나의 일심점을 이루었고 거기에 영원의 빛, 알렙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태초의 <빛이 있으라>의 그 빛이기도 하고, 오컬티스트가 믿는 에메랄드 태블릿, 성배,철학자의 돌, 수많은 이름을 갖고 있는 그것. 그 빛은 아주 찰나에 머물렀지만 그 속에서 나는 모든 걸 보았다.
빛은 단 한순간 반짝이고 사라지고 말았지만, 나는 그 이전의 ‘나’가 아니었다.
알렙에는 많은 것들이 보였다. 면이 하나이되 하나가 아니며, 다양한 아는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혼자서 서성이는 백작, 병원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는 권 교수, 1960년대의 신문을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환희에 차 있는 책벌레, 우아하고 교양 있는 자세로 책에 은 빨대를 꽂고 빨아먹는 잉크드링커의 여왕, 현자의 돌을 찾아 꿈꾸는 연금술사, 수호할 성배가 없어 헤매는 성당기사단, 그들의 다양한 얼굴이 지나가며 알렙은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나의 과거, 나의 현재, 나의 미래, 그리고 나의 본질.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잊은 것, 잊고 싶었던 것 모두를.
빛은 모든 걸 바꿔놓는다. 세상의 밤에 빛이 도래할 때, 인간이 불을 사용하면서 진화는 좀더 촉발되었고, 에디슨이 전구를 발견해서 밤을 쫓아내는 그때 인류 문명은 또 한 번 전환기를 맞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의 우주도 알렙과 함께 완전히 변화하였다.
바람이 한 줄기 불 듯이 나를 둘러싼 공기가 미묘하게 바뀌면서 나를 둘러싼 입자가 오래된 프레스코화처럼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들어 균열이 간 얼굴을 만져보았다. 미세한 진조가 온몸을 통과했고 온몸에서 작은 입자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 작은 조각 하나하나 떨어지면서 그때마다 작은 기억조각들이 돌아왔다.
머릿속에 지식을 담는다는 것, 아니 지식과 바로 연결된다는 것은 수퍼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 것 이상이다. 많은 기억의 파편이 책장처럼 나에게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그 작은 기억 하나하나가 온몸에서 가짜 기억을 긁어내고 진실된 나로 만들면서 나는 점점 자라기 시작했다.
빛이 보르헤스에게서 제일 중요한 눈을 빼앗듯이, 나에게선 영원한 유년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영원히 소녀로 남아 있었고 거기서 과거를 소멸하고 도망갔다 다시 조우한 빛은 처음 주었던 그 영원을 소멸시켰다. 나의 정체성 그 자체였던 소녀가 고치를 벗어난 것이다.
처음 도서관에 들어왔던 순간, 도서관에 갇혀서 절망하던 시절, 도서관을 떠나 거짓 기억으로 위장하고 세상에 묻혔을 때, 마지막으로 다시 알렙이 나를 찾아와 찰나의 순간에 가짜 기억을 조각냈을 순간.
그렇게 나는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이면서 진짜 나를 찾았다.
내가 도서관에 가겠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건물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위치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대로 걸어 들어갔다. 이제 도서관 주변의 능소화니 장미니 하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무공간에 배치되어 있는 서가와 백작의 책상만 있을 뿐이다. 백작은 한 번도 그 책상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 장미와 능소화가 나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실체 없는 것이었음을 아는 순간, 서글픔이 몰려왔고 ‘지식’과 ‘영원불사’에 대한 회의가 밀려들었다. 나는 능소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바람에 아련하게 흔들거리는 그 작은 꽃에 대한 애처로움. 빗방울에 작은 꽃을 튀기는 수국.
그렇게 인간의 지식은 가련한 존재였던 것이다.
평소처럼 책상에 앉아 있던 백작이 그의 금테 안경을 들어올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백작은 나를 보자 나를 알아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그 순간부터 백작은 그 자리에서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모래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듯 시간의 입자에 날리어 조금씩 허물어져 가면서 그는 웃고 있었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에서 그는 입모양으로 작별을 고했다. 시간의 회오리 바람이 그를 덮쳐서 그의 기억 하나하나 작은 조각으로 분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소멸을 슬퍼하는 거 같지 않았다. 전혀 어떤 고통도 느끼는 거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맑은 눈에서 작은 눈물 한 방울이 반짝이는 것을 본 듯도 했다. 그게 나와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자신을 해체시켜 줄 도서관 소녀를 간절히 구해 왔고 나를 알아보았으나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라지는 그의 뒤로 오래된 지식의 잔해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지식이 분자 단위로 쪼개지면서 재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게 점점 더 무(無)를 넓혀 나가며 도서관을 날려 버렸다.
어차피 이것들은 인류 무의식에 보관돼 있다. 이렇게 물리적인 형태로 존재했을 뿐. 거대한 공룡이 쓰러지듯 점점 서가는 사라지고 사람도 사라졌다.
<바벨의 도서관>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Epilogue

우주 속의 별
지구 속의
파리
파리의 몽수리 공원에서
겨울 햇빛 속 어느 아침
네가 내게 입맞춘
내가 네게 입맞춘
그 영원의 한순간을
다 말하려면
모자라리라
수백만 년 또 수백만 년도
- 공원, 자크 프레베르

그와 다시 만난 건 3년째 계속되고 있는 작은 이벤트인 The Lord of the Rings 3편을 보려고 만났을 때였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모 국가기관에서 암호를 풀고 있다는 그는 한층 밝아진 표정이었다.
이번엔 메가박스 앞 스타벅스 대신 좀더 한산한 던킨이었다. 던킨의 달착지근한 커피 두 잔을 앞에 놓고 영화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 뒤, 나는 주저주저 하며 물었다.
“나한테 했던 그 보르헤스의 눈 얘기 기억나요?”
나는 그에게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물었다.
“보르헤스가 눈이 먼 까닭을 그래서 발견했나요?”
그는 언제나 나에게 수수께끼의 질문을 할 때처럼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었다.
보르헤스는 과연 왜 눈이 멀었을까. 그는 시력을 잃었고 딱 원하는 것을 얻었으며 영원을 추구하지 않았으니 과히 현명하다 할 만하다. ‘영원’은 우리 인간에게 적합한 단어가 아니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을 수 있는 법이다. 지식은 유한하며 그것을 담고 있는 책 역시 유한하다.
내 눈앞에 가루가 되어 시간의 바람에 날려간 백작의 얼굴이 아른아른 떠올랐다. 이제는 기억도 안 나게 오래된 일 같은, 시간을 잊은 공간에서의 나의 모험이 기억났다. 이제 나의 정신은 완전히 벗어났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다. 나에게 토끼굴에 뛰어들게 했던 백토끼 권 교수도 죽었고, 체셔 고양이 백작도 사라졌다. 하트퀸 카밀라는 언젠가 나의 목을 베려고 노릴 테고, 마이어 씨는 미친 모자장수처럼 웃고 있을 테고, 내 앞에 앉아 있는 이는 마치 캐터필라처럼 아편 연기를 피우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이상한 나라의 모험이 끝나고 나는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을 좀 맛보았다. 이제 맛없는 커피도 마실 수 있잖아. 하지만 어른이 되는 일은 아직도 어렵고 슬프다. 소녀라고 하는 가냘프면서도 뭔가 여지를 두는 단어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슬픈 듯싶다. 앞에 남아 있는 게 없는 것 같아서.


이 이야기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세 개의 점에서 시작했다. 기하학적으로 선이란 점의 연결을 뜻한다고 한다. 그런 것처럼 세 개의 점에서 시작된 무한의 점들이 연결되어 선이 되고, 그 만날 것 같지 않은 선이 어느 순간 만나면서 이야기는 완성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세 가지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번 점은 나는 북극성을 혼자서 찾은 적이 없었다.
철새의 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철새가 길을 잃지 않고 매년 똑같은 길을 왕복할 수 있는 이유를 발견했다. 철새는 북극성의 위치로 방향을 잡는다고 한다. 철새처럼 떠도는 나는 북극성을 찾은 적이 한 번도 없는 만큼 방향을 찾을 수 없었다. 지리적인 방향 감각만 없는 것만 아니라 인생의 방향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시간과 공간 사이를 떠도는 세계의 부유물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저기 유랑하는 정신적인 철새였으나 어디로 이동해야 할지 모르는 방향을 잃은 방랑하는 새였다. 실제로 규칙적으로 옮겨 다니는 철새도 못 되는, 별도 찾지 못하는 방황하는 영혼에 불과했다는 게 사실이다.
두번째 점은 나는 도서관에서 길을 잃었다.
도서관은 참 이상한 곳이다. 방 속에 또 다른 방이 있고 거기서 또 다른 방으로 연결된다. 마치 미노아 지방에 있었다는 지하 미궁과도 같은, 저 어두컴컴한 서가 어디선가 미노타우루스가 튀어나올 것도 같다. 한 번도 북극성을 찾지 못했던, 방향감각이 없는 나에게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간절히 필요한 곳이기도 했다. 인류 지식의 보고와도 같은 지식의 미로 속에 거대한 암흑이 도사리고, 그 암흑 속에서 인간과 소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미노타우루스처럼 기괴한 무언가가 나타나 나를 잡아먹을런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도서관의 서가 사이를 헤매고 다녔다.
어느 도서관을 가도, 줄지어 서 있는 서가, 먼지가 뿌옇게 앉혀 있는 제목도 알아볼 수 없게 바랜 책, 알 수 없는 번호가 붙어 있는 책등까지 모두 비슷하다. 나는 그런 인적 없는 도서관에서 책에서 책으로 떠돌며, 서가에서 서가로 이동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전혀 의도하지 않던 서가에 와 있으며, 처음 찾고자 했던 책은 어느새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가끔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거대했다는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도서관에 대한 꿈을 꾸곤 했다. 그 서가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나 아틀란티스에 대한 문서들을 발견했다.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책들을 책장에서 뽑아들고 책장을 넘기는 바로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세번째 점은 유년기의 끝이었다.
마치 루이제 린저가 <유리반지>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춘기라는 잔혹한 천사에 의해서 안락한 유년의 땅에서 강제로 들어올려진 것 같았다. 사람은 모두 성장하고 늙는다. 예전에 오이디푸스가 풀었던 수수께끼처럼 네 발로 걷다, 두 발로 걷다 마지막엔 세 발로 걷는 게 인간이다.
이 세 가지 점이 중요한 삼각형을 그렸다. 삼각형은 재미있는 도형이다. 수학에서 우주의 신비를 읽었던 피타고라스의 원리가 있는. 나는 거대한 숲의 나무 사이를 헤매듯이 도서관의 서가 사이를 헤매다 책의 숲 사이에서 영원을 보았다. 아니, 영원이 나를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성장했다.
영원은 순간이었다. 순간이 영원이기도 했다. 어떤 순간의 감정은 영원하다. 그 홀림의 순간은 영원하다. 내가 죽어서 우주의 먼지 한 톨이 되어도 그때의 감정이 내 기억 속에서 존재하든지 간에 영원한 것이다.
영원의 빛은 그런 영원함이 기억되는 그런 순간이었다.
알렙, 모든 지식의 보고.
인간이 궁극에 추구하는 모든 것의 원형.
인간 무의식의 원천.
언제나 결핍된 것을 추구하고 달려가는 인간의 끝.
그 끝에서 영원을 보았으되 거기서 신선이 되거나 다른 존재가 되어 불사를 얻지 못한 이 유한한 몸. 나는 그 미성숙하고 파멸적인 이 몸이 좋았다.
끝으로 달려간다는 그 짜릿함이.



덧말. AA님과 권 교수님께.
inkdrin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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