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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Alice in Paraland

2006.06.18 00:0506.18

Alice in Paraland

푸른 하늘 저 멀리 섬광이 번뜩인다. 이쪽을 겨냥한 공격이 재개된다. 좀 전의 섬광은 분노한 불 덩어리로 변하여 내 주위로 떨어질 것이다. 운이 없다면, 정확히 내가 숨어 있는 곳으로 떨어질 것이다. 내 헬멧의 HUD로 미사일의 예측 탄착점이 전송되어 온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운이 남아 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대공병기가 일군의 동조된 광자들을 뿜어 내어 미사일을 파괴한다. 뒤를 이어 반중력 APC(Armored Personnel Carrier)들이 미사일 발사로 노출된 적의 거점을 공격하기 위해 전차부대와 함께 전진한다. 나 또한 그 무리에 섞여 앞으로 나아간다. 머리 위로 미쳐 버린 플라즈마 덩어리들이 적들에게 그 광기를 뿜어 내며 날아가고 있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전차의 굉음이 주변을 둘러싸고, 반중력 비행체들이 지나갈 때 흔히 느껴지는 아래 위가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테라포밍(Terraforming)으로 조성되었을 것이 분명한 울창한 숲들은 이제는 단지 장애물일 뿐이다.
대체 내가 왜 이 정체 모를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나를 살려 적을 공격하기 위한 정보는 모두 제공하지만, 정작 이 전쟁의 목적은 알려주지 않는다. 내 ‘동료’라고 볼 수 있는 자들 역시 모르고 있다. 아니, 최소한 입 밖으로 내 뱉지는 않는다.
하긴, 목적을 알고 있다 한들 무슨 차이가 있으랴. 어차피 이 곳은 나의 세계가 아닌 것을. 아니, 내 세계라는 게 나에게 의미가 있는 말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나는 그저 떠돌 뿐인 것을. 떠돌지 않은 때가 있는지조차 아득하다.
돌연 태양이 청록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래로 지나가는 플라즈마의 광기에 물든 듯이 맥동하기 시작한다. APC의 날개는 어느 새인가 깃털 달린 커다란 새의 날개로 변해 있다. 전차는 상아가 네 개 달린 금속성의 코끼리로 보인다. 다시 시작되고 있다......드디어.

오늘도 여전히 나는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헤매고 다닌다고 항상 엄마한테 혼이 나지만, 이상하게도 멈출 수 없다. 세상은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항상 새롭다. 저기 보이는 가게도 오늘 처음 본 곳이다. 와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알게 뭔가. 앞에 보이는 과자들이 나를 부르는데. 하나 먹어 볼까? 오늘의 새로운 과자는 수박 맛 아폴로다. 빨대를 쪽 빨아 올리니 시원한 수박 맛이 난다. 이거 괜찮은데. 빨리 가지 않으면 엄마한테 또 혼나겠지. 아폴로를 쪽쪽 빨면서 집에 돌아간다. 문득 하늘을 보니, 창백한 파란 빛이 가득하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본 것을 이야기하면 엄마, 아빠는 시큰둥하게 반응하거나 혼을 내신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내 이야기에 그다지 좋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기껏 해야 어린 애들이 흔히 지어내는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본 것을 남들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만의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다.

때때로 우리 부모님이 심한 변덕쟁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제는 괜찮았던 행동이 오늘 큰 잘못이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래 뭐, 우리 부모님도 사람이니까, 변덕이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정말 어떤 때는 마치 다른 사람 같다. 부모님뿐만이 아니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주변 사람 모두가 점점 변덕쟁이가 되어 간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친한 친구가 날 모른척하고 있으면 정말 당황스럽다. 가끔은 반 구석에 처음 보는 녀석이 태연스럽게 앉아있을 때도 있다. 옆 반 놈인가? 오늘도 교실 창 밖은 너무 푸르다. 푸르다 못해 눈이 부시다.

신문을 본다. 한쪽 구석에서 이상한 기사를 발견한다. 인류 최초로 달을 밟은 사나이, 암으로 사망. 닐 암스트롱. 그럴 리 없다. 나는 그 기사를 자세히 읽어본다. 닐 암스트롱, 달 착륙 35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하다. 고인의 유해는 달 탐사선인 루나 인스펙터에 실려 달로....... 말도 안 된다. 그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달에는 가 보지도 못하고.
혼란스러워진 나는 바깥으로 나간다. 그래, 설마 그럴 리가 없어. 확실하게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자. 하늘이 맑다. 그래, 하늘이 맑다. 나뭇잎은 그 어느 때보다도 푸르르다. 하늘이 청명(靑明)하게 빛나고, 태양은 창백해지며, 잎은 청백색으로 불타 오른다…… 문자 그대로. 마치 태양의 온도가 수만K는 올라간 듯 하다. 태양은 이제 더 이상 노랗지 않다. 빛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색은, 이전의 부드러운 노란 빛에서, 점점 차갑고 강렬한 백열광으로 변해간다. 하늘은 물론이고 지상의 모든 풍경이 마치 파란색 렌즈를 통해 보는 것처럼 파르스름하게 보인다. 나뭇잎 역시 창백해져 가고 잎 자체가 파랗게 불타 오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길가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일제히 파랗게 불타 오른다. 당황스럽지만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잎을 만져본다. 촉감 측면에서 잎은 이전과 전혀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잎을 떼어내 땅에 던져 보지만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떨어지면서 잎은 조금씩 커지는 듯 하다. 떨어지는 잎 옆으로 - 은행잎이었던 그것은 이제는 완전히 플라타너스 잎으로 변해 있다 - 필시 이전에는 개였음 직한 동물이 지나간다. 그 놈은 붉은색의 잉글리시 코카 스패니얼의 몸통에 회색과 검은 줄무늬의 아메리칸 숏헤어의 머리와 꼬리를 가지고 있는데, 어느 순간에 인가 몸통은 샴 고양이로 바뀌어 버린다. 돌연 놈은 체셔 고양이가 되더니, 예의 그 웃음을 지어 보이다가 사라지고, 웃음만이 그곳에 남는다. 옆을 지나가는 버스는 바퀴가 여섯 달린 그레이하운드와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늘에서는 태양이 수은등과 같은 빛을 뿌리기 시작한다. 길 건너편에서는 양복을 입은 토끼가 휴대전화를 들고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고 있다. 당황해서 집으로 뛰어간다. 돌아가는 길에 있는 모든 사물은 이제 미친 듯이 변화한다. 아파트는 마치 출렁이는 스펀지 같고, 갈수록 줄어들며 융합과 분리를 반복한다. 주차 된 자동차들의 도장은 네온사인처럼 반짝이면서 매번 그 색을 달리한다. 아스팔트는 끓어오르는 검은 용암이다. 나무들은 춤을 추며 녹아 내린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나 머리 스타일은 나타날 때 마다 조금씩 바뀐다. 날아가는 까치는 이미 까치가 아니다. 여전히 세상은 창백한 푸른 빛으로 가득하다.
순간, 빛이 원래대로 다시 돌아온다. 아스팔트는 아스팔트로, 나무는 나무로, 개는 개로, 사람은 사람으로. 나는 길가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나를 들여다본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나인 채로 있다. 하지만 저기 건너편에 체셔 고양이의 웃음은 아직 남아 있다.

나는 강을 건넌다. 모든 시간에 걸친 강, 모든 공간에 걸친 강, 세상의 모든 달들이 비치는 강을. 하지만 아무도 나를 위한 공무도하가를 불러 주지는 않는다. 나는 계속해서 물 속으로 물 속으로 무릎이 잠기고 허리가 잠기고 가슴이 잠기고 얼굴이 잠기고 마침내 머리에 쓴 모자만이 물 위에 남는다. 모자 주변으로 수천 개의 달들이 비친다. 하지만 하늘 어디에도 달은 없다.

책을 본다. 표지도 10쪽에도 50쪽도 150쪽에도 어디를 봐도 모두 닐 암스트롱 사진뿐이다. 255명의 암스트롱이 웃는다.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책을 덮는다. 덮인 책 사이로 255개의 웃는 암스트롱 얼굴이 흘러나온다. 그것들은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와 내 몸 전체를 덮는다. 귀로 코로 눈으로 입으로 파고든다. 들을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오직 주변 전체를 뒤덮은 웃는 얼굴만이 보인다. 순간 모든 것이 파랗게 녹아 내리기 시작한다. 나를 포함해서.

고정된 세계. 창백한 하늘은 벌써 몇 년째 보이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기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불편함과 불안함이 자라난다. 언젠가는 떠나야만 할 것을 알기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기에는 내 가족, 나와 혈연 관계로 얽힌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가족은 매우 불편한 존재이다. 모르는 사람은 지나치면 그만이지만, 가족은 그럴 수 없다. 당장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매번 다른 가족을 만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그들은 나에게 최초의 가족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애당초 그런 게 존재했는지조차 의문이긴 하지만.
가족으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괴롭다. 이제까지 별로 개의치 않던 감정이 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다. 어차피 누군가와 친해지기 전에 그와 헤어지게 되므로 외로움에 익숙하다 자부하지만, 이렇게 한 곳에 계속 머무르게 되니 상황이 달라진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 버린다.
‘그 아이’와 알게 된 지도 4년쯤 된 것 같다. 시간을 세지 않는, 아니 시간이란 흐름과 별개로 흘러가는 내가 시간을 헤아리는 것도 그 아이 때문이다. 처음에는 다만 친한 선후배 사이로,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나만 지니고 있는 듯 하다. 언제 헤어지게 될 지 몰라 차마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의 아픔. 때때로 은근슬쩍 표현하기도 하지만, 친한 사이에서 출발한 관계가 언제나 그렇듯이, 그 감정은 우정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내 스스로가 그 정도 이상은 표현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 아이가 이런 내 감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기도 한다. 때로는 알고 있을까 두렵고, 때로는 모르고 있을까 두렵다. 아픔은 나 혼자 간직하리라 생각하고 오늘도 꾹 참아 보지만,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그 말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것까지 참을 수는 없다. 나는 한편으로 창백한 태양을 기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두렵다. 가끔은 더 이상의 떠돎은 없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거나, 제발 그렇게 되기를 존재 자체가 불투명한 신에게 기도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깨닫는다. 나의 감정과는 상관 없이,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는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그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니, 이제는 떠돎 자체가 내 의지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전율한다.

이건 정말 역마살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떠돎은 나의 운명이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다. 자의든 타의든 나는 떠돌 수 밖에 없다. 만약 내가 떠돎을 즐기지 않는다면, 그것에 몸을 내맡기지 않는다면 나는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완전히 탈진해 껍질만 남은 좀비가 되어버릴 것이다.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이 역마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떠돌 수 밖에 없다. 떠도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거부한다 해도 살이 나의 인생을 가만히 놔 두지 않는다. 또한 나는 그 살 없이는 살아갈 수도 없다. 떠돎 없이는, 내가 어떻게 마야(maya)로 가득한 세상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내가 마이트레야가 아닌 이상.

이따금 그 아이가 생각난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오래 한 곳/한 때에 머무르면서 알게 된 사람. 지금은 나와 전혀 다른 세상의 강물을 타고 가는 그녀. 여전히 그녀는 내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으로 존재한다. 그녀가 생각날 때면, 한없이 떠돌아야 하는 내 운명이 저주스럽게 느껴진다. 때때로 그녀/그녀와 닮은 다른 존재를 찾아 보려 노력하고, 가끔 성공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그럴 때면 난 슬픔에 빠져 파란 태양을 기다리게 된다.

푸른 하늘 저 멀리 섬광이 번뜩인다. 이쪽을 겨냥한 공격이 재개된다. 좀 전의 섬광은 분노한 불 덩어리로 변하여 내 주위로 떨어질 것이다. 운이 없다면, 정확히 내가 숨어 있는 곳으로 떨어지겠지. 내 헬멧의 HUD로 미사일의 예측 탄착점이 전송되어 온다. 약간은 위험한 상태다. 대공병기가 달아오른 금속 파편들을 쏟아내어 미사일을 파괴한다. 뒤를 이어 8족 보행형 APC들이 미사일 발사로 노출된 적의 거점을 공격하기 위해 전차부대와 함께 전진한다. 나 또한 그 무리에 섞여 앞으로 나아간다. 머리 위로 미쳐 버린 플라즈마 덩어리들이 적들에게 그 광기를 뿜어 내며 날아가고 있다.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전차의 굉음이 주변을 둘러싼다. 테라포밍으로 조성되었을 것이 분명한 울창한 숲들은 이제는 단지 장애물일 뿐이다.
돌연 태양이 녹청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래로 지나가는 플라즈마의 광기에 물든 듯이 맥동하기 시작한다. APC의 다리는 거미의 그것으로 변해 있다. 전차는 상아가 네 개 달린 금속성의 코끼리로 보인다. 다시 시작되고 있다......드디어. 돌고 도는 원형의 강물로. 태고에서 발원하여 시공을 얽고 도는 끝없는 강물의 흐름이. 강물에 몸을 맡긴 이상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나루터에서도 머물 수 없는 나그네의 숙명이.
난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오제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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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6.27 22:00 댓글 수정 삭제
    "앨리스"의 모티브라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갈등구조를 가지는 중심 이야기라는 것마저 잘 안 잡혀서 독자도 앨리스처럼 혼란스러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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