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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소재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어찌보면 참 흔한 토픽이다. 죽음. 인간이라는 이름을 지고 태어난 이들은 결코 비껴갈 수 없는 하나의 저주이자 구원인 만큼, 결코 쉬이 관심 밖으로 내쳐버릴 단어가 아니잖는가.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면 모두가 읽을 수 밖에 없는 글을 쓸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굉장히 흥미로운 글이 될 것이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새로운 선택에 들떠 커피 한잔을 입속으로 털어넣었다. 정신이 든다. 이제 글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섹스를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내가 만으로 스물둘이 되던 해였다. 사진으로만, 영화로만 바라보던 소녀의 누런 알몸을 더듬고 탐했다.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신음 소리를 들으며 소녀를 범했다. 그것이 첫 섹스였다. 자위행위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섹스는 전혀 달랐다. 말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그 다채로운 행위에 가담하며 나는 섹스라는 단어를 배웠다. 섹스.

얼마 전 친구에게 종합 치즈세트를 선물 받았다. 치즈에 대해 아는 것 이라고는 샌드위치 사이에 껴있는 한장의 누런 체다 치즈 라던지, 피자 모서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모짜렐라, 그리고 파스타를 장식하는 파메산 뿐. 그 외의 것이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지라 그닥 달가운 선물은 아니었다. 와인과 같이 맛을 보라는 친구의 권유에 마지못해 꺼내 들은 치즈는 로마노라는 이름의 검디 검은 치즈였다. 톡 쏘는 향이 기분 좋았다. 치즈.

죽음에 대해 내가 아는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죽음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견디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구에 대한 글을 쓰려면 야구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붉은사과에 대한 글을 쓰려면 붉은사과의 맛과 향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아는 것 이라고는 내겐 없다. 아무런 방법이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 대해 쓰는 글은 분명히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은, 주절거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는 글을 쓸 방법이 없다. 그러나 직접 죽음을 경험하면 그때엔 글을 쓸 방도가 없잖는가. 당혹스러움과 맞닥뜨리자 정신이 혼란해졌다. 커피를 끓이러 부엌으로 나갔다.

곤충 수집에 한창 열을 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여름 방학을 알차게 보내라는 의미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지워주는 과제로서의 의미를 넘어, 나를 모조리 집어 삼킬 정도로 심취해 있던 나날이었다. 눈에 띄는 곤충이라고는 모조리 잡아 나무판자에 자그마한 핀셋으로 고정시키던 그 행위는, 곤충들이 탈출해 집안을 모조리 쑥밭으로 만들고 내 엉덩이가 터지도록 쳐맞는 일을 방지해주었다. 살아 꿈틀거리는 벌래들이 신기해 수집을 시작했던 나는, 곧 시들해졌다. 죽어있는 곤충들의 시체가 널려있는 모습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고이 모아두었던 곤충들은 곧 쓰레기통 속으로 쓸려들어갔다. 그들을 진정시켜 주었던 핀을 뽑으면 다시 움직여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배신하고 그들은 쓰레기통 속에서 잠자코 있었다. 파랑 검정 빨간색 시체. 쓰레기.

엄마 손에 끌려 억지로 다녔던 피아노 학원. 결국 그 것 외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하여 음대를 그럭저럭 졸업하고, 근처의 학원에서 피아노 교습을 하게되었다. 어느 날 피아노 학원을 찾은 사람은 한 귀머거리 소녀의 어머니였다. 원장의 계속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어머니는 딸아이에게 꼭 피아노를, 음악을 배우게 하고 싶다고 눈물까지 흘려가며 부탁했다. 초라하고 꼴사나운 광경이었다. 차마 눈 뜨고 바라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귀머거리에게 음악의 웅장함을 가르치라니. 눈먼자에게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부탁인가. 이내 시선을 돌리려던 중, 귀머거리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속눈썹이 참 예쁜 소녀였다. 귀머거리.

죽음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다. 이제서야 깨달은 사실은 아니겠지만, 죽음이란 소재에 대한 글을 직접 써보는 것은 처음이기에 그걸 이제야 실감했나보다.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벽이 앞을 가로막은 느낌이었다. 막막한 기분이다. 절망적이다. 글 쓰기를 멈추고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보았다. 죽음을 경험 할 수 없다면 죽음을 창조해 보는 것은 어떨까? 곤충이나 동물을 죽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살인이라는 행위가 죽음이라는 소재를 이해하는데 있어 어느정도의 도움이 될지 가늠해보았다. 커피가 요란하게 끓는다.

일곱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걸 처음으로 보았다.

열다섯살이 되던 해에 애완견 '꼬리'가 죽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강아지였다. 더이상 똥 오줌을 치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했다.

죽음이란 소재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 엄청난 일은 내게있어 처음부터 무리였다. 뭔가 잔뜩 벌려놓고 마무리를 하지 못하는 성격이 어딜 가겠나. 단지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종합 치즈세트와, 곤충 수집, 그리고 속눈썹이 아름다운 소녀와 한 섹스와, 기르던 강아지를 죽인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만으로도 만족하다. 커피가 식을 동안 따분한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한 행위였다.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은 주절거림에 지나지 않는 글이 되어버린 것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단지 죽음이란 소재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는 사실이면 충분하다. 나는 아직 살아있지 않은가?
mihab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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