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망량

2015.08.01 22:3808.01

 

토란이 도사 집단에 들어가게 된 건 그가 꽤 어릴 때의 일이었다. 네 살, 다섯 살, 그 쯤 했던가. 그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도사 집단에서 돌보는 대부분의 아이들도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건 딱 하나, 토란에게는 남들 정도의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가 사는 지역은 귀신이 잘 나오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에 따라 무속 관련 문화도 발달했는데, 근래 들어서는 그 방식도 여러 갈래로 분화되어 있었다. 도교적인 요소가 많이 섞여 있는 도사 무리. 전통적인 무속인들. 마법진을 활용하는 사람들이나 타로, 심지어는 룬스톤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각 무리에는 국가에서 공인한 대표자가 한 명씩 있었다. 그 대표자를 뽑는 방식은 무리마다 달랐다. 룬스톤은 기존 대표가 차기 대표를 지목한 후 양성했다. 타로 쪽은 투표제를 사용하고 있었고 무속인들은 세습, 마법진을 쓰는 사람들은 일종의 계시 방식을 사용한다고 했다.

도사들이 쓰는 방식은, 하극상이었다.

토란은 여러 차례 일의 진행 방식에 의문을 품곤 했다. 그가 읽은 책에 의하면 도사가 산신이 되려면 오백 가지, 하늘의 신선이 되려면 천오백 가지 착한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중간에 한 번이라도 잘못된 일을 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과격이라는 걸로 좋은 업적을 얼마나 쌓았는가를 확인한다고도 했고, 약을 먹어서 신선이 되려고 해도 선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라고도 했다. 그걸로 따지고 보면 소위 도사라는 사람들은 진짜 도사라고 분류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위에 있는 사람들 깎아내리고 자신의 성과를 드러내야만 대표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도사’는 없었다. 그간 대표자 역할을 맡았던 사람 중에는 불구가 된 사람도 적지 않다고 했다. 그런 위험한 자리를 왜 맡고 싶을지 토란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바라는 것이라고는 당장 겪고 있는 문제에서 벗어나는 게 전부였다.

도사 집단의 아이들 사이에는 계층이라는 게 존재했다. 차기 지도자로 각광받는 소수 몇 명. 비록 당장은 아니지만 기회를 노리고 있는 하이에나들. 그 놈들을 우르르 쫓아다니는 우민들. 남을 괴롭히지도, 괴롭히지도 않는 몇 명. 그리고 맨 밑바닥엔 토란이 있었다.

도교에는 예전부터 상무 정신이라는 게 있었다고 했다. 무리의 모든 아이들은 똑같이 무술 연습을 하고 시험을 봤다. 토란이 그 중 잘 하는 거라고는 검술밖에 없었다. 칼은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평소에는 갖고 다닐 수도 없었으니까. 반면 다른 아이들에게는 더 은밀한 무기가 하나 있었다.

“오늘은 거미로 할까, 장구벌레로 할까?”

토란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사람들. 그를 앉혀 놓고 그들이 빙 둘러 설 때면 그는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도사들은 최면을 통해 아이들이 잡귀 퇴치를 연습하게 하곤 했다. 그 최면 기술을 몰래 익혀 둔 애들이 있었다. 토란으로서는 손도 못 대는 기술이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그렇게 능숙하게 사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최면을 걸 때마다 그의 코앞에서 태우는 풀이 도움을 주는 건지도 몰랐다. 뭔지는 몰라도 토란은 그게 마약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연기를 마시고 나면 기분이 굉장히 더러웠으니까.

“구더기 어때?”

올 게 오는구나. 그는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아이들이 팔을 잡았다. 누군가가 불을 붙였다. 한 사람이 불이 붙은 풀줄기를 그의 코앞에 들이댔다. 토란은 흐릿하게 눈앞에서 바글대는 하얀 살덩어리들을 보았다. 구더기들에게 먹히는 꿈을 꿀 모양이었다. 또다시.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 오고 나서 얼마 안 되어서부터 시작된 고문은 그가 열다섯이 될 때까지 계속 진행됐다. 대표적으로 진행하는 놈의 이름은 도라지. 시행 주기는 상당히 불규칙적이었다. 도움 요청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는 혼자였고 그가 아는 사회 전체가 그에게 입을 다물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어두운 숲이었다. 토란은 커다란 쇠말뚝에 묶여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나무가 흔들렸다. 그의 시야 끝을 무언가가 언뜻 언뜻 스쳤다. 몸이 시렸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뚜렷해지는 형상. 늘어나는 속삭임. 토란은 눈을 감고 기다렸다.

무언가가 목을 건드렸다. 차가웠다. 그가 움츠러드는 걸 보았는지 다른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찔렀다. 피가 났다. 조금 더 잦아지는 건드림.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 때처럼 간을 보고 있는 거였다. 곧 다 관두고 팔다리를 찢을지 살가죽을 벗길지 저들끼리 상의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사람 가죽을 벗겨 낸 어떤 귀신은 그 껍질을 풍선처럼 부풀려 뒤집어쓰고 다닌다고 했다.

손톱이 목을 파고들다가, 멈췄다.

눈을 떴을 때 토란은 어떤 소녀가 그를 등지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새파란 어스름 속에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귀신들은 이미 물러선 채였다. 소녀가 무언가를 높이 들었다. 토란은 주먹 쥔 손의 손가락 틈으로 쏟아져 나오는 빛을 보았다.

“멈추라고 했지!”

소녀는 소리치면서 돌을 던졌다. 돌멩이는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작은 창으로 변해 혼들을 꿰뚫었다. 소녀는 동시에 다른 손으로 다른 돌을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돌 근처에서 풀들이 더 밝은 초록빛으로 변하더니 사방이 부옇게 변했다.

소녀가 토란을 향해 돌아섰다. 주변에 남은 잡귀들은 없었다. 배경마저 흐릿해지더니 주변이 처음 시작했던 방 풍경으로 돌아왔다. 둘러선 아이들은 이제 없었다. 토란은 눈을 깜박였다. 바로 앞에 환각 속에서 보았던 소녀가 서 있었다.

“뭐 한 거야?”

토란은 대꾸하지 못했다. 소녀가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하늘을 향한 화살표.

“나는 티르야. 넌?”

“토란.”

그 때처럼 자신이 도사라는 걸 밝히기 싫었던 적이 있었던가.

티르, 룬의 이름. 반면 토란과 같은 식물 이름은 도사들만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토란은 뒤늦게야 티르가 대표자와 함께 잠깐 무속 부족에 들른 차기 지도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티르는 그에게 자신이 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바라냐고 했다. 토란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티르는 약속을 지켰지만 그 이후로도 토란은 몇 차례 찾아오는 티르를 볼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서야 토란은 티르라는 명칭을 책에서 찾아 볼 엄두를 냈다.

티르, 길잡이별, 왕이 될 자들의 믿음을 지키는 존재. 밤의 안개 위로 그 길을 따르나니 실패하지 않으리라.

티르, 한 손의 신, 늑대의 잔해, 신전들의 왕자.

아마 그 순간부터일 것이었다. 동경이라는 게 생기고 결국엔 거의 숭배처럼 변해 버린 것은.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따르고 싶은 이. 그리고 감정이라는 게, 원래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구석도 있는 법이었다.

티르와 말을 놓을 정도로 친해지는 데는 여러 달이 걸렸다. 그도 그 뒤를 쫓아다니면서 수차례 걸린 뒤에 말을 몇 번 붙여 보게 된 것이었다.

“어차피 자주 보는데 너도 편하게 말해.”

“응?”

“나만 반말 쓰는 건 이상하지 않아?”

티르의 매일 매일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앞장서서 무리 구성원들이 찾아갈 곳을 정하고, 자신은 주로 대외 활동을 했다.

토란이 본격적으로 검술 연습을 시작한 건 순전히 티르의 도움이 있어서였다.

“도술 안 쓸 거면 칼이라도 쓰는 건 어때?”

“칼질해서 뭐 해?”

“뭐든 배워라, 좀.”

시간이 흘렀다. 도사 우두머리가 바뀌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괴롭힘의 방식은 점차 기술적으로 변해 갔다. 간신히 도망친 날이면 토란은 티르를 찾아 들판을 헤맸다. 대부분의 경우 어떻게든 맞닥뜨리는 경우가 많았다.

“너 도사잖아.”

“뭐 어때.”

말은 그렇게 해도 토란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있으려고 노력했다. 나무 위에 있거나, 어둠 속에 숨어 있거나,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거나 해서. 물론 티르가 돌아갈 때면 그는 언제나 자기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너무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어쩌면, 사랑한단 말은 안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고백을 하고 나서 며칠이 더 흐른 뒤에 티르는 어떤 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근처에 문제가 많이 있어서 가 봐야 한다고 그랬다. 여러 지역에 걸쳐 있는 산인데, 유난히 이상한 기운이 많이 몰려 있다고 했다. 그 산의 망량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사람 고기를 모은다더라, 특히 싱싱한 사람 고기를 주면 소원을 이루어 준다더라.

그 말을 했을 때 티르는 아마 토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산에 대한 전설은 생각보다 유명했다. 산에 들어가면 대부분의 경우 죽고, 죽고 싶지 않다면 거기 산다는 망량들에게 자신의 살을 바쳐야 한다는 거였다. 그 대가로 인간 이상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도 했다. 최근부터 생긴 이야기라 내용의 신뢰도는 떨어졌지만 토란은 일단 해 보기로 했다. 그 전까지의 삶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아마 산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 알았다면 그 산에 찾아가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러나 열여섯 살의 토란은, 어쨌거나 열여섯이었다. 다른 것보다 행동이 앞설 때였고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해 보지 못한 토란으로서는 그 증세가 더 심각했다. 아마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고 갔을 터였다. 산 밑에서 소리를 질러 망량들을 부르고, 놈들이 계약을 하자고 할 때도 더 고민해 보지도 않고 그러마하고 동의하고.

망량이라는 것들은 진짜 도깨비가 아니라, 일종의 주술사였다. 토란은 그런 집단을 전에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일종의 약물을 사용했다. 맛이 더럽게 없는 것들이었다.

계약 기간은 약 천 일이었다. 죽을 수도 없었다. 그건 계약 위반이었으니까. 산신과, 당시 그의 도사였던 사람이 머무는 곳에서 눈을 떴을 때 그는 산신을 망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결국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리를 스쳤다. 흐느끼고 싶었다. 침대라든가, 고통이 좀 줄어들었다든가 하는 건 그냥 착각일 거였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고문을 새로 시작할 때가 왔다고 알릴 게 분명했다. 또다시 칼을 살점을 도려낼 테고, 노린내에 정신을 잃으면 망량들은 짐승의 오줌을 뿌려 깨울 거였다.

“어때, 산은 잘 있어?”

그 말이 나왔을 때 토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산의 안부를 왜 묻는지. 그 때 처음으로 주변 상황이 환각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평범한 게 아니었다. 무언가 강한 힘에 저주 비슷한 게 섞인 그 느낌. 몸도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웬만하면 움직이게도 해 줄 텐데, 그랬다간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그건 안 되겠다.”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망량이 아닌 것도 확실했다. 토란은 숨을 죽이고 들었다. 낯선 이가 한숨을 쉬었다.

“대답해. 이름이 뭐야?”

“토란.”

말 하는 게 어색했다. 하기야, 주변 공기 탓에 제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산에서 삼 년을 살았으니까. 낯선 이가 말했다.

“산에 있다 왔지?”

“네.”

한숨 소리가 났다.

“어떻게 해도 나는 도움이 안 되는구나.”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토란은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기묘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일종의 저주가 섞인 그 느낌. 그 저주를 풀어 주길 기대하면서 데려온 걸까. 그러나 토란은 자신이 그걸 어떻게 풀어 줄 능력이 없다는 걸 알았다. 자신을 데려온 그 다른 도사가 능력이 더 뛰어남에도 저주를 풀지 못했다는 건 그도 할 수 없단 소리였다.

“그 쪽은 누구십니까?”

“도사들의 종.”

그는 못 알아들을 소리만 했다. 그가 사실은 산신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훨씬 더 많은 날이 지나서 수장에게 듣게 된 정보였다. 그리고 그 저주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수장의 본명은 머위였고, 도사들의 대표자였다. 토란은 그를 그냥 수장이라고 불렀다.

수장은 그에게 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방 밖으로 나가게 해 준 적도 없었다. 토란은 이유를 묻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억이 끊기는 일도 있었다. 분명 그냥 앉아 있었는데, 다음 순간 방 중앙에 서 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수장이 나갈 때면 대체로 달칵 하고 문 잠기는 소리가 났다. 방에 남아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책 몇 권, 침대, 안락의자. 원래 다른 장식물들이 더 있었지만 일부러 뺀 것 같았다.

가끔씩은 산신이 남아 있기도 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알아서 뭐 해?”

처음 이름을 물었을 때 령은 그렇게 대꾸했다. 토란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문득 말을 했다.

“령.”

“예?”

“이름이 령이라고. 수장은 그렇게 불러.”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물어보면 튕겨 내고, 안 물어봐도 대답하고. 평소엔 별다른 말이 없는 편이긴 했다. 토란 앞에서는 수장과 대화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토란은 왜 나가지 못하게 하는지, 그리고 왜 방에 남은 물건이 거의 없는지에 대해 령이 말해 줄 거라고 믿었다.

“너도 나가는 게 편하겠지?”

어느 날 령이 말했다. 뭔가 심각한 문제에 대해 논의라도 하고 온 듯한 표정이었다. 토란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꼭은 아닙니다.”

“왜?”

“지금까지 있었던 걸 보면 아무래도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령은 잠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헛기침을 했다. 토란이 그를 보았다.

“말하기 전에, 네 정신 상태는 얼마나 건강하냐?”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되물었을까. 토란은 혀를 약간 깨물었다. 령은 방을 이리저리 오가다가 멈췄다.

“상관없을 것 같지만 돌발 행동 안 하겠다고 약속해.”

“그러겠습니다.”

령은 얘기하는 내내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토란은 령이 멈출 때마다 최대한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는 토란이 처음에 뼈만 남은 생선 같은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 온 날부터 몽유병 환자처럼 돌아다니는 일이 잦았다고도 했다.

“어쩌면 몽유병이 맞을 수도 있어.”

그는 토란이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장식물로 놓인 가짜 칼을 들고 수장을 찌르려 한 일, 도술로 각종 기괴한 물체들을 만들어 내던 일. 령은 일종의 몽유병 증세 중에 그런 게 있긴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도, 토란도 그게 몽유병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수장이 간단한 봉인 절차를 거칠 예정이야. 그럼 너도 나와서 돌아다닐 수 있어. 어떻게 생각해?”

“하겠습니다.”

토란은 그 봉인 절차라는 게 뭐였는지 잘 기억을 하지 못했다. 그냥 수장 혼자 몇 가지 주술을 외우고는 번쩍번쩍한 것들이 많이 나타났었다는 게 그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그 날 이후로 수장은 그를 데리고 주변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여기가 도사 본부야. 할 일 없으면 공부라도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장은 토란이 그냥 가만히 공부나 하고 앉아 있게 둘 위인이 아니었다. 어린아이 모습의 령과 토란을 끌고 수장은 잘도 사방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토란은 수장이 밤이면 홀로 나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토란이 그에 대해 물었을 때 수장은 빙그레 웃었다.

“일 해.”

토란은 낮에 움직이고 밤에는 잤다. 가끔 잠결에 령이 수장에게 뭐라 뭐라 말을 하는 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과로사할 거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혼자 있어도 괜찮습니다.”

어느 날 낮에 토란은 수장에게 말했다.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던 눈이 그를 향했다.

“응?”

“이제 좀 밀린 공부를 시작하려고요.”

물론 핑계였다. 좀 피해가 되지 않았으면 해서 대충 둘러댄. 그러나 수장은 곧바로 그에게 책을 산처럼 가져다 쌓았다. 토란은 그냥 주는 대로 읽었다. 가끔씩 주말이면 수장이 와서 몇 가지 바깥 얘기를 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토란이 두 번째로 들은 게 바로 사조에 대한 얘기였다.

“무속과 타로 사이 혼혈인 애가 하나 있는데, 양 쪽 능력을 다 물려받다 보니까 능력 조절이 잘 안 됐대. 그 부모님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 일을 그만두고 애를 돌보기 시작했다나 봐. 일종의 비정규직처럼 가끔 전투에 참여하고. 처음엔 그냥 평범하게 지냈는데, 어느 시점부터 왜소증 때문에 자라지 않아서 점차 또래들하고도 멀어지고, 그냥 집 안에만 있게 됐다고 해. 어릴 때부터 가끔씩 주변에서 일어난 이상 현상 때문에 이웃들에게도 이상한 애라고 소문은 다 나 있었고.”

“무슨 일이 났습니까?”

“최근 밤에 문제가 생겼던 것 같아. 부모님이 나가서 다시는 안 들어왔거든. 어디서 목숨을 잃은 것 같은데 확실하게는 몰라. 확실히 아는 건 얘 이웃들이 얘를 찢어 죽이려고 했다는 거야.”

“예?”

“부모 죽인 애라고. 별다른 감정적 동요도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은 그 부모 쪽 혈통을 몰랐거든. 누가 선동을 하긴 한 것 같아. 그래서 사람들이 죽이려고 가둬 놓은 차에 룬스톤 부족 수장이 보고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거짓말 한 다음에 데려왔다고 해. 수장들끼리만 아는 정보야.”

“죄송하지만, 혹시 룬스톤 수장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티르. 아는 사람인가?”

토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이름만 압니다.”

어느 날부터 수장은 가끔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낮에 찾아보려 해도 안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사흘째 되는 날 토란은 령을 찾아갔다. 령은 수장이 없어진 날부터 어느 방에 들어가 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산신님.”

령은 대꾸하지 않았다. 토란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산신님, 수장님 어디 가셨는지 아십니까?”

“산에 갔어.”

“어떤 산 말입니까?”

“네가 있던 곳.”

그 말뜻은 잠시 후에야 토란의 뒤통수를 쳤다. 대체 왜. 뭐 하러. 령이 토란을 돌아보았다. 밤을 샜는지 눈이 약간 붉게 변해 있었다.

“거기 있는 것들 쓸어버리겠다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거기를 혼자…….”

토란은 입을 다물었다. 령은 산에 대해 아는 것 같았다. 토란이 물었다.

“그 산은 대체 뭐 하는 곳입니까?”

령이 눈가를 찡그렸다. 애써 웃어 보이려 하면서.

“내가 예전에 있던 곳이야.”

수장은 얼마 후에 돌아왔다. 상처투성이에 굉장히 지쳐 보이긴 했지만 죽을 만큼 심한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몇 번을 물어 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령도 산에 대해서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산에 대해 다음으로 들은 것은 령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였다.

산신을 데려오는 절차는 대체로 산을 깎아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렇지만 산은 내버려두고 산신만 데려오는 방법도 있긴 했다. 그렇게 되면 산 주변에 결계를 치는 것 말고도 거쳐야 하는 절차가 하나 더 있었다. 일종의 저주였다. 자신의 기억을 잃게 만드는. 수장은 그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왜요?”

“우리 약점이니까.”

그 산에 간다는 이유가 그런 것 때문일까. 하기야 수장은 자기가 무언가를 청산하러 가고 있다는 얘기를 곧잘 하곤 했다. 토란이 수장에게 말했다.

“왜 알려 주시는 거예요?”

“네가 가장 우리랑 가까우니까.”

그러면서 수장은 웃었다. 그간 수십 번을 자신을 죽이려고 덤빈 사람에게 짓는 표정치고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토란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얼굴. 물론 그를 죽이려고 한 게 제정신일 때 한 짓은 아니긴 했다. 맨손으로 수장을 죽이려 하는 미친 도사가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게 토란 자신이라 해도.

수장은 어느 시점부터 토란에게 칼을 주기 시작했다. 도술 대신 칼로 싸우라고 했다. 속으로 무슨 큰 문제가 생기면 도술을 쓰겠다고 토란이 속으로 다짐하긴 했었다. 그 다짐이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수장이 필요한 건 제 능력으로 다 처리해 버린 탓이었다. 물론 령도 있었다. 당시의 령은 언제나 친절했다.

“너는 저기서 한 건 멋지게 처리를 할래, 아니면 집에서 나하고 시체 놀이를 할래?”

가끔 장난기가 심한 경우도 있었다만.

토란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할 때마다 제어 장치 역할을 해 준 것도 수장이었다. 처음엔 도술로, 그 다음엔 말로.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말에는 꽤나 사람을 멈칫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하는 말 자체에 도술이 섞여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애초에 이름만 불러서 사람을 멈추게 한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가끔은 그래서 애완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빴던 적은 없었다.

“어디 놀러나 갈까?”

그런 식으로 말은 이어졌다. 너무나도 가볍게. 그 때 토란은 수장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 알았다면 머리를 각목으로 때려서라도 막았을 거였다. 이미 토란에게 그 때의 수장은 아주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티르가 그랬던 것처럼.

“왜 이래?”

“그냥 보낼 생각 없습니다.”

“네가 그럴 생각 없다고 해서 내가 안 갈 것 같아?”

그러면서 수장이 웃었다. 토란은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수장은 원래 어릴 때부터 도사들의 지도자 따위로 추앙받던 사람이 아니었다. 토란이 사라지고 며칠 후가 그가 들어왔다고 했다. 나이는 성인인 데다가 이미 세력권이 형성된 도사들 틈에서 견디지 못할 거라고, 다들 그랬다고 했다. 소문에 따르면 그가 대표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산 덕분이었다. 토란이 있었던 바로 그 산.

“너, 산신을 자기 걸로 만들려고 도사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

토란은 고개를 저었다. 수장이 말했다.

“그 산을 없애.”

그러나 령을 끌어낼 때 사람들은 산을 없애지 않았다. 대신 산 앞에서 사람을 죽이겠다고 했다. 하나씩, 하나씩. 난도질을 시작했을 때 령이 나왔다. 산에서 나온 그는 산신도 무엇도 아닌 그냥 사람일 뿐이었다.

령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다. 그러나 령은 소문대로 주술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끌어낸 도사들은 그를 버렸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수장은 산을 찾아갔다. 그가 산을 봉인해 버렸다고 했다. 무엇도 나오지 못하고 무엇도 들어가지 못하게.

“너는 어떻게 나왔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수장이 말했다. 그러나 토란이 알고 싶은 건 자기가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한 상식이 아니었다. 그는 땅을 발로 찼다.

“가면 죽어요.”

“죽진 않아.”

“식물인간은 되겠죠.”

토란은 사람들이 쓰는 수법에 대해 알고 있었다. 외진 곳으로 불러내서 사람을 치고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못 하게 되면 자신이 자리를 꿰차는 그 방식. 누가 그 짓을 주도하고 있을지 알 것도 같았다. 도사 무리에 있는 대부분의 도사들은 그를 괴롭히던 놈들이었다.

“…다녀올게.”

수장은 토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갔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토란은 며칠이 지난 밤 놈들의 집을 찾아갔다. 도라지는 마법진을 다룬다는 여자 친구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토란은 그가 혼자 있을 때 접근해 꽃병으로 놈의 뒷덜미를 갈겼다.

그 날 이후로 령은 그에게 잘 말을 하지 않았다. 토란은 자신에게 덤비는 놈들에게 가차 없이 주술을 사용했다. 령은 딱 한 번 그에게 미친 개 같다고 했다. 그게 다였다.

그는 평소 어떻게든 티르를 불러 세워 보려고 하곤 했다. 그새 수장이 된 티르는 토란에게 말을 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토란은 이미 스무 살이었다. 천 일간의 능지처사. 그는 자신이 그걸 어떻게 견뎌 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몸이 멀쩡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티르를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된 날 토란은 싸우고 있었다. 그 날의 싸움은 이상했다. 멀리서 수신호를 하던 것이 크게 팔을 휘저었다. 동시에 그 앞에 거대한 보라색 마법진이 생겨났다.

마법진.

누군가 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같은 순간 남아 있던 것들이 문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전한 사람마저 흡수한 마법진은 점으로 변해 사라졌다.

확실히 이제는 밤이었다. 누가 곁에 있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토란은 소매에서 새 부적을 꺼내 반으로 찢어 던졌다. 두 조각 종이는 불덩이로 변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멀찌감치 서 있는 낯선 무리가 보였다. 토란은 한 발을 내딛었다. 자박거리는 것이 밟혔다. 그는 땅바닥을 확인했다. 하얀 가루가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뒤돌아서는 순간 문틀에 간신히 붙어 있던 유리 조각이 무너졌다. 유리문 두 개가 모두 깨져 있었다.

“토란.”

토란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낯선 무리 틈에서 누군가가 그를 보고 있었다. 토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아 있는 퇴치 대상은 없는 것 같았다.

“할 수 있으면 문 새로 당장 달고, 아니면 제가 바꿔 놓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군가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토란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다들 들어가 계시지요. 건물 내부 수호가 시급합니다.”

웅성거리는 불평과 함께 사람들은 그를 지나쳐 안으로 향했다. 틀림없이 욕이었다. 토란은 무시하고 낯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대개 룬 문자 모양의 장신구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티르가 앞으로 나섰다. 어둠 속에서 티르의 머리카락은 보랏빛으로 보였다.

“할 말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서 따로 전하시지요. 전쟁이라도 하러 오신 것 같습니다.”

티르는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룬스톤 하나를 위로 던졌다. 티르는 앞으로 나왔다. 돌이 빙그르르 돌더니 뒤에 있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토란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티르, 무슨 일인데.”

티르가 눈길을 내리깔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공간은 싸늘했다. 멀리서 창칼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꼭 보낼 필요가 있었어?”

“존대로 대화하는 건 좀 그러니까.”

늑대의 울음소리가 났다. 토란은 손가락으로 허공을 그었다. 반투명한 은색 울타리가 아파트를 둘러쌌다. 바람이 몰아쳤다. 티르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토란은 주변을 곁눈질했다.

“어디, 가서 얘기할래?”

“어차피 긴 얘기 아냐. 마법진 계통이 저 쪽하고 합류했어.”

토란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티르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러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당황한다고 바뀌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유는 알아?”

“그런 거야 내가 아나. 원래 할 말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티르는 웃어 버렸다. 그 웃음소리. 토란은 울타리가 그 근처로 접근하는 작은 영물을 집어삼키는 걸 보았다. 어차피 방어 체계를 제대로 유지하려면 밤새 깨어 있어야 했다. 그 동안 티르가 곁에 있었으면 했다.

티르는 주머니에서 조약돌을 꺼냈다. 룬스톤이었다. 토란은 위로 고개를 쳐들었다. 할 말이 없는 건 그쪽이지 이쪽은 아니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단 둘이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얼마나 오랜만에 좀 제대로 얘기를 해 볼 기회가 생겼는데.

달이 보였다. 토란은 돌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 티르와 눈을 마주쳤다.

“곧 붉은 월식이 있을 거야. 보러 갈래?”

티르는 피식 웃었다. 가까이에서 보는 그 여자의 눈은 멀리서 볼 때보다 깊은 것 같다고 토란은 생각했다. 티르가 속삭임으로 말했다.

“업무 태만은 안 되는 거 알지?”

토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티르가 그의 턱을 손가락으로 받쳤다. 손가락에 검붉은 액체가 묻었다.

“피는 닦고 살아라.”

티르는 한 발 물러서서 바닥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멩이가 땅에 닿는 순간 작은 수레바퀴 모양이 생기더니 여자가 사라졌다. 토란은 해가 진 쪽을 바라보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 조각이 눈가루처럼 흩날렸다.

어두웠다. 토란은 티르를 생각했다. 불안, 언제나 끊임없는 불안. 그에게 약속이란 언제 잘못될지 모르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룬스톤 부족의 수장들은 이름이 두 개였다. 하나는 본명, 다른 하나는 룬의 이름. 이름으로 삼은 룬은 해당 수장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룬이었다. 토란은 티르가 실제로 창의 룬인 티르를 쓰는 걸 단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었다. 유난히 많은 영물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티르. 하늘 위로 던지던 돌들, 불꽃과 함께 쏟아지던 창.

“미쳤어?”

“뭐가.”

“미쳤냐고.”

“괜찮아, 나.”

“네 마력 써야 하는 거잖아.”

“뭐 어때.”

주변엔 아무도 없던 날이었다. 피 칠갑이 된 주제에 티르는 태연히 어깨 너머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토란은 화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몸이 이 상태인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넌 나보다 더한 짓 했다면서.”

토란은 입을 다물었다. 티르가 산에서의 사건에 대해 알 리는 없었다. 그러나 토란은 끝까지 티르에게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지 못했다.

티르는 늘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일이 많았다. 대표자로서 해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토란은 따라가려 들지 않았다. 그게, 정말로 미련까지 버릴 수 있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위태로운 사람이었다. 자기는 절벽 앞에 서 있으면서 저만치 누군가가 비틀거리는 데에는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끝까지 자기 무리만 신경 쓸 법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기 무리, 그리고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

토란은 티르의 책임 범주에 자기를 집어넣고 싶지 않으면서, 동시에 집어넣고 싶기도 했다. 티르가 자신을 신경 써 주기를 바라면서, 자기 때문에 더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으면 하는 그 결론이 나지 않는 모순.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토란은 그냥 티르를 생각하곤 했다.

가능하다면 다른 모든 건 잊어버리고 싶었다.

 티르가 너무 오랫동안 수장 일을 한 게 문제였다. 어른이 되기도 전부터 수장 일을 겸해 왔으니까 그렇게 맹목적으로 남들을 생각하는 것일 터였다. 자기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남들을 생각하느냐고 소리를 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

그 한 마디를 남기고 티르는 떠나는 것이었다. 늘.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토란을 두고.

토란이 ‘산’에 가기 전에도 그랬고 ‘산’에 다녀온 뒤로도 티르는 그랬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티르도 그 산에 다녀왔던 건지도 몰랐다. 그 산의 존재에 대해 일단 토란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강한 여자였다. 그리고 그래서 언젠가 부러져 버릴 것 같은 여자였다.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몸을 던질 것 같다는 사실이, 토란이 티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몰랐다.

며칠 뒤에 티르는 다시 찾아왔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왔어?”

“너한테 이거 전해 주래.”

토란은 받았다. 편지 봉투였다. 종이에는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토란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티르가 몸을 돌렸다.

“그럼 난 갈까?”

토란이 손목을 잡았다.

“잠깐만.”

이상해 보이리란 건 알았다. 그 전까지 이런 식으로 팔을 잡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감수하고서라도 멈춰야 했다. 그는 왼손으로 소맷부리에서 부적을 꺼내 쥐었다. 순식간에 하얀 검이 종이에서 돋아났다. 토란은 칼 손잡이를 잡았다.

“왜?”

“같이 가.”

“집까지 에스코트 해 주겠다는 거야?”

토란은 대답 없이 칼을 휘두르며 돌아섰다. 다가오던 귀신 하나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는 칼을 바닥에 꽂았다. 그와 티르 주변 땅에서 수천 개의 가시가 튀어나왔다가 들어갔다.

“토란?”

“왜?”

“있잖아.”

“응.”

티르는 주변에 나동그라진 것들을 둘러보다가 자동차를 확인했다.

“제안은 고마워. 근데 넌 면허 없잖아.”

토란도 자동차를 보았다. 안에 누가 있는지는 몰라도 접근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티르는 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토란이 손목을 놓았다.

“안에 탄 사람 누구야?”

“사조.”

“데려다 주고 오게?”

“아니, 이번엔 나랑 같이 가.”

사조. 그 두 부족 사이의 혼혈인 남자애. 어쩐 일인지 유달리 토란을 경계하는 애였고, 티르도 토란에게 정식으로 그를 소개시켜 준 적은 없었다.

“사고 내지 말고 빨리 가.”

잡을 수가 없었다. 잡았다가 떠나면 정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고, 수장으로서 티르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티르는 그를 가만히 보았다.

“토란.”

“왜.”

“늘 궁금했던 건데. 다른 도사들이 없더라도 혼자 잘 처리할 수 있잖아. 저거 다.”

무엇을 묻고 싶은 걸까. 무슨 마음이 들게 하고 싶은 걸까. 티르의 말이 맞긴 했다. 그는 거의 무의식중에 주변에 있는 잡귀신들을 없앨 수 있었고 굳이 남들이 없더라도 하룻밤 새 할 일은 끝낼 수 있었다. 토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이 편이 좋아.”

근처에서 안개 같은 것이 밀려들었다. 토란이 손을 휘저었다. 뿌연 것이 쇳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토란은 한 발을 내딛었다. 그 순간 그는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다시 한 발, 그리고 다시 한 발. 그가 지나간 자리를 그림자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토란은 달리지 않았다. 이번엔 까만 연기가 그를 아슬아슬하게 놓치고 사라졌다. 토란은 산을 보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그의 등 뒤로 밀려들던 연기가 사라졌다.

“수작질은 작작 좀 하지.”

축지법이야 기본 중의 기본. 중요한 건 한 번에 어느 정도 갈 수 있는 거리와 정확도였다. 토란은 몇 걸음 만에 산마루까지 올라가 갈대밭을 살폈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갈대인지 모를 땅을 가르고 차 한 대가 달리고 있었다. 무언가 옆에서 벼룩처럼 차에 달려드는 게 보였다. 그 때마다 차 근처 공기에 아지랑이가 일면서 달려든 것은 그대로 튕겨나갔다.

토란은 몸을 낮추고 부엉이로 변했다. 새는 재빠른 속도로 자동차를 향해 날아갔다. 근처에서 허여멀건 것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토란은 날갯짓을 한 번 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반경 수십 미터에 있는 것들이 가루로 변했다.

앞에서 차가 급정지를 했다. 먼지바람을 피하기 위해 토란은 차 위에서 날아야 했다. 차가 완전히 서자 그는 그 뒤에 내려앉았다. 주변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차 문이 열리더니 티르가 나왔다. 부엉이는 여자가 쾅 소리와 함께 문을 닫을 때까지 태연하게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티르는 그 앞으로 다가왔다. 토란은 모습을 바꿔 얼굴을 마주하고 섰다.

“나 너 바래다주러 못 가.”

티르가 말했다. 토란은 눈을 깜박였다.

“그냥 산책이야.”

“시속 수십으로 밟았는데 그걸 따라오는 부엉이가 어디 있어?”

토란은 웃음으로 대답하고자 했다. 잘 되지 않았다. 티르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일 있어?”

“그냥 산책이라니까.”

“원래는 너희 본부 근처에 있잖아.”

“내가 없어도 잘 할 수 있어.”

갈대가 부대끼는 것은 소리로도 알 수 있었다. 텁텁하게 풀 냄새가 났다. 물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티르는 코를 찡그렸다.

“이거.”

“알아.”

“이 근처 산에 그 괴물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토란은 인상을 쓰며 차를 곁눈질했다.

“차 타.”

“너는?”

“뒤따라갈게. 타고 그냥 빨리 가.”

“너 때문에 멈추게 해 놓고 그냥 가라고?”

소리가 멎었다. 물비린내가 더 뚜렷해졌다. 토란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졸졸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눈앞에 물이 흐르는 게 보일 것처럼 선명한 소리였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개울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목이 말라 왔다. 그게 타는 듯한 갈증으로 바뀌기 시작할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토란은 알았다. 토란은 티르의 손목을 잡았다. 티르는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당장 가.”

“나도 수장이야.”

“저 안에 애도 타고 있잖아.”

“걔가 애가 아니란 건 너도 잘 알잖아.”

사조는 왜소증이라고 했다. 실제 나이는 스물. 외모 나이는 초등학생. 티르는 그에게, 가끔 사조가 싸우다 보면 이상 행동을 하는 일도 있다고 했다. 눈빛이 변한 것 같으면 사조가 뭘 하고 있든 일단 멈춰 놓으라고 하던 얘기들. 그러나 토란은 여태까지 사조가 그런 눈빛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언뜻 흰 털빛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토란은 손목을 더 세게 잡았으나 티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떠나야 하는데. 졸졸거리는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사조가 문을 열었다. 토란은 처음으로 그의 눈이 푸른빛을 띠고 있는 걸 보았다. 티르가 손가락질을 했다.

“들어가라고 했지.”

“딱 한 번만 같이 하게 해 주세요.”

“오늘은 안 돼.”

토란도 사조의 폭주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제재 없이는 심장이 터져 버릴 때까지 능력을 써 댄다고 했다. 감정이 일정 수치를 넘는 순간. 토란은 사조를 쳐다보았다. 소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조용히 들어갔다. 토란은 티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제발 가.”

“조용히 하고 싸울 준비나 해. 너도 숨을 거 아니면.”

토란은 이를 꽉 악물고는 티르의 등 뒤에서 섰다. 어깨 너머로 노란 종이 뭉치가 넘어왔다. 토란은 받았다. 부적이었다. 티르가 하는 말이 들려 왔다.

“사조한테 받아 왔는데 주는 걸 잊어버렸어.”

"이번에도 직접 주는 건 싫대?"

"너한테 낯가리잖아."

갈대 움직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들은 양측 갈대밭을 마주했다. 갑자기 티르가 그의 허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토란은 옆을 보았다. 길을 다라 무언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주 큰, 흰색 원숭이처럼 생긴 모습에 발에 달린 세 개의 갈고리.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을 한 놈은 입으로 물 흐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게 생이라고 하던가, 장산범이라고 하던가?”

“알 게 뭐야.”

짐승이 울부짖었다. 토란은 그 쪽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사방이 흔들렸다. 토란의 손 주변에 돔 모양의 커다란 막이 생겼다. 주변에서 갈대가 뽑혀 날아갔고 땅에 금이 갔다. 토란은 이맛살을 구겼다. 티르가 돌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토란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돌이 바닥으로 날아갔다. 밝은 빛과 함께 솟아난 얼음이 그들과 짐승 사이를 막아섰다. 흔들림이 사라졌다. 토란은 주먹을 쥐었다.

“웬만하면 몸을 뚫어버려.”

“너무 싱겁지 않겠어?”

티르는 손가락을 들었다.

“준비.”

얼음이 깨졌다. 그 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토란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의 눈앞에 웃는 가면이 들이밀어져 있었다. 토란은 욕을 하며 손날을 휘둘렀다. 놈이 입을 벌렸다. 토란의 손이 송곳니들 사이로 지나갔다. 거의 머리를 입에 넣은 상태에서 짐승이 뒤로 밀려나갔다. 놈은 자동차 앞에서 멈췄다. 토란은 부적을 빼들고 세게 쥐었다. 종이가 장검으로 변했다. 짐승이 달려들었다. 토란은 위를 찔렀다. 범이 제비를 넘더니 다시 착지했다. 토란은 옆구리 쪽에 칼을 들고 몸을 낮췄다.

“그 쪽 잘 살피고 있어.”

“너야말로.”

짐승이 달려들었다. 토란 역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칼을 옆으로 그었다. 범이 그를 뛰어넘어 티르 앞에 착지했다. 토란이 몸을 돌렸다. 티르가 돌을 던졌다. 기묘한 지팡이 같은 문양과 거꾸로 된 새총 같은 문양이 나타나더니 땅에서 불이 타올랐다. 짐승이 사라졌다. 티르는 팔을 휘둘렀다.

“토란!”

토란은 돌면서 칼을 휘둘렀다. 짐승의 이빨과 칼이 부딪혔다. 열기가 밀려왔다. 티르가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손을 따라 칼로 불이 옮겨 붙었다. 범이 다시 사라졌다. 티르가 돌아섰다. 토란은 곧바로 주변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돌아섰다. 티르가 양 손을 올리고 있었다. 한 손 근처에는 불씨, 다른 한 손 근처에는 얼음 결정이 떠다녔다. 짐승이 물러섰다.

“공격할 수 있겠어?”

“어떻게?”

“목을 찔러.”

“엄호만 해 준다면.”

“믿고 맡겨.”

토란은 티르 앞으로 나서며 땅을 발로 찼다. 짐승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토란은 뛰어올라 그 등에 올라탔다. 양 옆으로 하얗고 붉은 것들이 지나갔다. 짐승이 멈추더니 토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토란은 눈에 칼을 꽂았다. 짐승이 다시 울부짖었다. 토란은 칼을 빼지 않았다. 귀에서 피가 흘렀다. 범을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토란의 손이 칼에서 미끄러졌다. 그는 바닥에 떨어졌고 범은 사라졌다. 티르가 달려왔다. 손에 있던 불과 얼음은 사라진 후였다.

“토란!”

토란은 움직이지 못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머리를 박은 걸까. 아니면 티르에 대한 걱정 탓에 다른 건 전혀 생각할 수가 없는 걸까. 그러나 후자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을 리는 없었다. 그는 언제나 티르를 걱정했다. 걱정할 이유야 충분했다. 짐승은 언제나 다시 나타날 수 있었다. 눈을 그 꼴로 만들어 뒀으니 금방 오지는 않겠지만.

티르가 어깨를 잡았다. 그는 눈을 떴다. 티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착지 하나 제대로 못 해?”

토란은 눈가를 찌푸렸다. 티르는 그의 귀를 따라 흐르는 피를 보고는 주머니에서 다른 돌을 꺼내 그의 옆에 놓았다. 빛과 함께 돌이 사라지고 그의 귀에서 피가 사라졌다. 토란은 천천히 앉으며 귀를 감쌌다. 티르는 일어났다.

“돌아가.”

“산책은 아직 안 끝났어.”

“이쯤 하면 너도 쉴 때 됐어. 아니, 그보단 다른 사람들하고 싸우는 연습 좀 더 할 때가 됐다고 해야 하나?”

“고막 좀 터진 것 갖고 그래.”

“준비성 부족하단 소리잖아.”

“넌 괜찮아?”

티르는 자기 귀를 두드렸다.

“그 놈이 소리를 너한테 질렀지 나한테 지른 게 아니라서.”

티르는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다. 토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르는 그의 손을 놓으려 했다. 토란이 놓지 않았다. 티르가 그를 쳐다보았다. 토란이 말했다.

“다음에 올 일 있으면 낮에 와.”

“낮엔 너도 나도 자야 하잖아.”

“깨우면 일어날게.”

티르는 그의 눈을 좀 더 보다가 돌아서서 차로 갔다. 문을 닫기 전 쫓는 듯 흔드는 손을 보고서야 토란은 도로 부엉이로 변하여 제 부족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편지에는 그가 가장 잃고 싶지 않은 걸 잃어버리기 전에 마법진 부족으로 찾아오라고 적혀 있었다.

토란은 집으로 돌아갔다. 령이 있을 안쪽 방은 어두웠다. 토란은 안으로 들어갔다. 침침한 가운데 령이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근래 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곧 죽을 사람처럼 기력이 이상하게 약했다.

“요양은 잘 하고 있습니까?”

토란이 물었다. 령은 얼굴을 찡그렸다. 토란은 전등 스위치를 쳤다. 불이 켜졌다.

“할 말 있으십니까?”

령은 대꾸하지 않았다. 쳐다보기만 하는 그 눈. 토란은 속에서 짜증이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 날 이후로 왜 이러시는 겁니까?”

령은 끝까지 대꾸하지 않았다. 토란은 그를 쳐다보다가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현관문이 닫혔다. 그는 문에 몸을 기댔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반드시 인정받아야 할 상대는 령이었다. 그 전에 있던 도사가 마지막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남긴 게 그 산신이기도 했고.

그 전 수장은 토란더러 령에게 잘 해 주라고 했었다.

토란은 부적으로 다시 칼을 만들었다. 나오는데 건물 벽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토란은 벽에 잠깐 손을 댔다. 결계는 아직 남아 있었다.

밖에서 무언가가 소리를 질렀다. 토란은 나갔다. 괴상하게 생긴 날짐승이 사람 목소리로 새된 비명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토란이 칼을 들었다. 날짐승이 그에게 날아왔다. 토란은 칼을 휘둘렀다. 날개가 떨어졌다. 짐승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는 외마디 괴성과 함께 사라졌다. 다행이었다. 몸뚱이만 남은 채 집 앞에 나동그라진 생물체는 그다지 좋은 볼거리가 아니니까.

한기가 돌았다. 토란은 몸을 낮췄다. 무언가가 뒷목을 잡아챘다. 토란은 칼을 뒤로 꽂았다. 얼굴 위로 까만 천처럼 머리카락이 늘어졌다. 그는 칼을 뽑으려 했다. 무언가에 걸린 채였다. 새된 웃음소리가 났다. 토란은 칼자루를 세게 잡았다. 칼날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칼을 그대로 올렸다. 무언가가 뜯겨나갔다. 토란은 머리 위까지 칼을 올렸다. 머리카락밖에 보이지 않는 대가리가 바닥에 떨어져 공처럼 굴렀다. 토란은 얼굴을 문질렀다.

“더럽게.”

그는 여전히 빛나는 칼을 내리찍었다. 칼이 땅에 박혔다. 그는 몸을 낮추고는 모습을 바꿨다. 푸른 비늘이 있고 사자를 닮은, 머리 가운데에 뿔이 있는. 해태였다.

짐승은 포효했고 사방이 곧바로 고요해졌다. 그는 다시 한바탕 울었다. 빛이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몸을 떨던 나무들이 멈췄다. 근처에서 기어 나오는 얼굴 없는 것들이 몇 있었다. 그는 달려들어 물어뜯은 뒤 몸뚱이를 멀찍이 던졌다. 맛은 확실히 없었다.

“토란.”

토란은 멈췄다. 나지막한 아이의 목소리였다. 그는 뒤로 돌았다. 사조가 서 있었다. 토란은 그를 보다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꽂혀 있던 칼이 사라졌다.

“티르가 없어졌어요.”

대꾸가 나오지 않았다. 토란은 상당히 일그러져 있는 사조의 얼굴을 보았다.

그 저주스러운 깨달음의 순간.

정확히 어디로 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토란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 한 장소가 문제였다. 그는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서둘러 나가려는데 령이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비켜 주시겠습니까?”

“어디 가?”

“티르 찾으러 갑니다.”

“산, 찾아가는 거지.”

“아뇨.”

토란은 거짓말을 했다. 령이 눈썹을 올렸다.

“또 갈 데가 어디 있어?”

“티르 찾으러 가요.”

“너 그 산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잊었어?”

“기억합니다.”

“아니, 넌 기억 못 해.”

령은 그의 눈앞에 대고 소매를 휘둘렀다. 토란은 하나의 영상을 보았다. 수장이 령에게 책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령은 팔짱을 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장이 책을 침대로 던졌다.

“산에 있는 건 망량이야.”

“기껏해야 도깨비들이잖아요?”

“너도 알잖아. 여기 있었던 책들이 예전에 다 네 책이었다는 거 알아. 나도 여기서 내용을 찾았고.”

“인간으로 지낼 적엔 제사 의식엔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러나 토란은 령이 수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목소리에서 다 티가 났다. 수장은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서 들여다보았다.

“일부 망량들은 인간을 사주해서 특이한 제사 의식을 치러. 인간의 살점을 하나하나 떼어 내서 불에 태우는 거지. 하루에 한 점씩만 있어도 돼. 중요한 건 같은 인간의 살이어야 한다는 거야. 살을 태우면 태울수록 망량들의 재주는 다양해져. 다른 존재에게 특이한 마력을 선물로 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도로 책을 들고 령을 보았다.

“십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남자애라고 했어. 가장 최근에 있었던 실종 사건이 언제 있었는지 알아?”

“대략 삼 년 전이요. 천 일 조금 안 됐나.”

“그럼 그 남자애가 지금 우리가 처리해야 할 아이라고 볼 수 있겠네?”

령은 대꾸하기 싫은 것 같았다. 수장은 스스로 답을 했다.

“살점이 떼인 게 삼 년은 되니까, 일반인이었으면 과다 출혈로 죽었겠지만 망량들이 계속 기력과 마력을 전해 줬다면 살아 있는 것도 가능해. 애초에 그 애가 마력 일부를 넘겨받기로 계약을 했다면 천 일간 버틴 것도 이해가 돼. 나야 그런 건 안 하겠지만 절실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령은 방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장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게 마력이 삼 년간 쌓이면 현재와 같은 파괴력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사람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 각종 변신을 하는 것도 되겠지. 문제는 두 가지야. 그 애 때문에 마력이 추가된 망량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그 남자애가 자기 능력을 제어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는 점.”

“모른다고요?”

“아마 자기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를 거야. 이해는 해 주자고. 삼 년을 보냈으면 미치지 않은 게 용해.”

“그럼?”

“내버려 두면 아마 죽을 거야. 기력이 다 떨어지면 상처 출혈도 더 심해질 테니까. 그리고 지금도 그 지역에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찾아가 보려고 해.”

“반대하겠습니다.”

“나 수장이야.”

령은 인상을 쓰며 햇빛을 손가락질했다.

“지금 밝습니다. 쓸 수 있는 도술도 거의 없어요.”

“웃긴 일이지, 꼭 영들이 나타날 시간이 되어야지 기력도 더 빨리 충전이 된다는 게. 도사라는 것 자체가 영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긴 한 것 같아. 우리가 더 공격적인 기술을 쓸수록 저 쪽 힘도 강해지는 걸로 봐서는. 어느 쪽이 먼저일까? 영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영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걸까?”

대답이 여전히 없는 령을 향해 수장이 한숨을 쉬었다. 의외로 밝은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더 가 봐야 해. 애가 정말 죽을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내가 안 가면 네가 갈 거 아냐?”

장면이 바뀌었다. 령은 문간에 서 있었다. 수장이 무슨 주문을 외고 있었다. 령은 기다렸다. 수장은 잠시 후에 십 년은 늙어 보이는 얼굴로 물러섰다.

“상태는 어때요?”

“몸 상태? 생선 살 발라낸 것 같아.”

수장은 근처 의자에 주저앉았다. 령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수장은 쉰 목소리로 설명했다.

“치료가 끝나려면 최종 절차가 하나 필요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좀 더 강한 사람하고 신체를 연동시켜 둬서 죽지 않게 해야 하는데 그 대상이 없어.”

“지금까진 어떻게 살았는데요?”

“망량들이 살을 뜯어먹으면서 자기들하고 얘하고 일종의 연결 관계를 형성한 거지. 이젠 망량이 없으니까 그걸 대체할 사람이 있어야 해. 나도 얘를 살려 둘 만한 능력은 없어.”

“제가 할게요.”

령이 말했다. 수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괜찮겠어?”

“뭐가요.”

“너도 잘못될지도 몰라.”

“이래 봬도 그 산 산신이었어요.”

수장은 그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검지를 휘둘렀다.

“대신 하나는 기억해. 일단 치료가 끝나면 얘하고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왜요?”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을 살려 두는 건 불안정한 기술이야. 애가 잘못되지 않으면 네가 잘못돼. 뭔가가 일을 그르칠지도 몰라.”

령은 씩 웃었다.

“기억할게요.”

영상이 사라졌다. 한층 피곤해 보이는 령이 이마를 짚고 문에 기대 서 있었다. 토란은 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다녀와서 더 말씀 나누겠습니다.”

“그 쪽에서 네 기술을 어떻게 뒤틀어 놓을 수 있는지 몰라? 무슨 상황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죽지는 않을 겁니다.”

토란은 비슷한 대화를 전에 한 번 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때는 령의 위치에 제가 있었고 저의 위치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만. 그는 령의 뒤에 있는 문고리를 잡았다.

“티르는, 제가 꼭 찾아야 해요.”

그는 나갔다. 령은 따라 나오지 않았다.

산 앞에 도착했을 때 토란은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그는 주변을 살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사조가 서 있었다. 토란이 인상을 썼다.

“왜 따라왔어?”

“티르 찾으러 왔어요.”

“와서 뭐 하게.”

사조는 묵묵부답이었다. 토란은 산으로 다가갔다. 앞에 이끼가 낀 큰 돌이 있었다. 오래된 제단처럼 보였다. 토란은 길이 보이는 곳까지 고개를 기울여 살펴보았다. 돌이 많고 오래된 밤 가시가 많았다. 나무가 우거져 해가 떠 있는데도 밤처럼 깜깜한, 그런 산이었다. 올라가는 길에 새끼줄이 쳐져 있었다. 금줄이었다. 토란이 손날을 세워 금줄 밑을 찔렀다. 공중에 아지랑이처럼 파동이 일어니 손이 닿은 곳이 하얗게 변했다. 토란이 뒤를 보았다. 사조가 다가왔다.

“갈 거면 빨리 가고 올 거면 빨리 와.”

사조가 다가왔다. 토란은 손을 더 찔러 넣었다. 투명한 장막이 찢어지면서 상처처럼 흰 자국이 생겼다. 사조와 함께 산길로 접어들자 자국은 저절로 아물었다.

좀 더 올라가자 말라붙은 계곡이 나타났다. 사조가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타로 카드 같은데 그려진 게 하나도 없었다. 사조가 카드를 던졌다. 바람이 미친 듯이 불기 시작했다. 카드가 길어지면서 다리로 변했다. 토란이 앞서 가고 사조가 그 뒤를 따랐다.

주변에선 가끔씩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검은 것이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깨진 거울이나 녹슨 종이 아무렇게나 땅에 처박혀 있었고 반쯤 무너진 담장과 무너진 돌탑도 눈에 띄었다.

“티르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토란은 알면서도 물었다. 사조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기 전해 구해 줬어요. 저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티르가 원래 그래.”

토란이 중얼거렸다. 사조는 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쳐들고 계속 말했다.

“그래서 저도 누나가 위험해지면 구해 주고 싶었어요. 갚고 싶었거든요.”

사조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토란은 한 때 느꼈던 그 불안감을 다시금 체감했다. 벌레들이 밀려오는 것만 같은 그 으슬으슬함. 사조가 말했다.

“어떻게든.”

 토란은 자신이 산 정상처럼 보이는 터에 올라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조가 한 바퀴 몸을 돌렸다. 뒤에서 여자가 하나 나왔다. 토란은 여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여자가 말했다.

“도라지, 기억해요?”

그렇구나. 그런 거로구나. 무언가가 머리를 세게 때리는 기분이었다. 제가 그 문제의 날에 도라지라는 남자의 머리를 깨지게 만들었듯이. 그 날 이후로 그는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고 토란은 그의 소식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여자가 손을 펼쳤다. 손바닥 앞에 작은 마법진이 생겨났다. 여자와 사조의 눈길이 만났다. 여자가 턱짓을 했다. 뿌연 안개가 한 줌 지나가더니 티르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조는 서둘러서 그리로 향했다. 토란은 사조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눈빛, 눈길, 움직임.

여자가 토란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이 산의 망량들하고 친하신 걸로 알아요.”

결국에는, 어떻게든, 나아질 수 없는 것이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뭐가. 어쩌다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이런 상황까지 치닫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냥 업이라고 봐야 하는지도 몰랐다. 토란은 사조를 보았다. 사조는 눈길을 피했다. 그는 어느 새 티르를 들쳐 업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돌아가면 그는 티르에게 자신이 구하러 왔었다고 얘기할 거였다. 그가 토란 본인에 대해 이야기할지 어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공주를 구한 왕자라도 되고 싶었던 걸까. 실제 나이가 어떻게 되었든 사조는 그런 면에서 영영 아이일 것이었다.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여자가 말했다. 마법진이 커졌다. 토란은 티르를 보았다. 눈을 감고 있었다. 갑자기 사조가 말했다.

“누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 제가 아니에요.”

“아니겠지.”

“진짜로.”

“알아.”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그 본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튀어 나간 거려니 했다. 토란은 자신의 피와 살을 찢어 내주는 방식으로, 사조는 티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차 없이 ‘경쟁자처럼 보이는’ 다른 희생물을 내던지는 방식으로.

알 것 같았다. 마법진 무리의 여자가 그를 혐오하는 건 당연했고 천 일이 채 되기 전에 도망쳐 버린 그를 망량들은 당연히 끌고 돌아오고 싶어할 것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티르에게 그 문제의 편지를 주었어야 했다. 티르에게 그걸 전달하는 데 사조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을까. 가끔씩 싸울 때 미치광이처럼 변해 버린다는 사조. 그의 푸른 눈. 그가 어쩌면 토란을 질투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티르를 완전히 차지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싫었을 수 있겠거니 했다. 절대로 티르와 함께 싸울 수 없는 애였으니까.

그렇다고 사조가 일부러 티르를 위험해지게 만들었을까는 의문이었다. 차라리 티르게 직접 왔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티르는 산에 대해 알고 있었을 테고 편지에 관해 무엇이 그 여자의 머릿속을 스쳤을지는 토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티르는 산으로 오고 도라지의 연인도 산으로 오고.

마법진이 돌기 시작했다. 토란이 사조에게 말했다.

“돌아가.”

사조는 머뭇거렸다. 토란은 소매에서 부적을 하나 꺼냈다.

“여기까지 왔으면서 뭐 하는 거야? 티르 죽는 꼴 보고 싶어?”

사조는 마법진을 한 번 보았다가 이내 사라졌다. 토란은 여자가 들고 있는 빛나는 원을 쳐다봤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허공에 빛나는 것을 띄워 두는 일이 없었다. 그는 제가 보고 있는 연기 속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섞여 있으려니 했다. 여러 해 전에 도라지 본인이 이상한 약초를 통해 그를 환각 속으로 집어넣었듯이.

“망량들에게 넘겨줄까 하는데, 어때요?”

여자가 말했다. 그렇게 순순히 넘어갈 계획은 아니었다. 그는 부적을 쥐면서 주문을 외었다. 마법진이 점점 더 커지더니 폭발했다. 토란은 눈을 감았다. 아주 밝았다.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희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한참을 걸었다.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토란이 주저앉았다. 여자의 환각과 자신의 대응 방식이 이상하게 섞여서 오류가 난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빙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마침내 그가 흐느끼는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 모든 시간의 끝이 결국 여기로구나.

    


witchdragon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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