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나에게는 좀 기이한 친구가 있다. 편의상 ‘A’라고 부를 이 친구는 편부가정에서 자란 소년으로, 주위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인지 종종 알 수 없는 일들을 벌이곤 했다.

 

처음에는 그런 행동도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 짓궂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그에게 다가갔던 아이들도, 점점 강도가 더해가는 그의 행동에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그와는 정반대로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학교생활을 하던 내가 친구가 된 것은 의외로 책 때문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쉬는 시간에 짬을 내어 점심시간에 읽을 책을 빌리러 도서실에 들려 책장을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이름은 들었지만 읽어보지 않았던 연애소설이 떡하니 서가에 꼽혀있었다. 평소 연애소설은 잘 읽지 않았지만, 그날따라 호기심이 동해 빌려 가서 읽고 있으니 A가 먼저 방과 후에 말을 걸어온 것이다.

 

재밌지?”

 

나는 뭐라 대답을 할까 말을 고르다, 짧게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함께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나는 거절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기에 그것을 수락했다.

 

함께 집으로 가는 동안,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주도권은 그에게 있었고,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다 궁금증이 생기면 그제야 입을 열고 그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마치 선생과 학생 같은 관계를 형성하며 이야기를 하던 중 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중 한 가지는 그가 대단히 많은 책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와 나를 이어주었던 책 역시, 그가 도서실 책 신청목록에 끼워 넣었던 것이었다.

 

또 그는 말을 굉장히 잘했다. 귀갓길에 줄곧 말을 하면서 더듬거나 잠시 멈추는 일 없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숨에 조리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에 여러 가지 감정을 담아 이야기했는데, 마치 성우나 배우가 바로 앞에서 연기하는 것 같아 좋았다.

 

교실에서는 꽤 거리감이 있었지만, 방과 후가 되면 우리는 항상 붙어서 책이라든지 뉴스나 인터넷에서 봤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책이라는 부분에서 심할 정도로 죽이 잘 맞았던 우리는 종종 주말에도 모여서 도서관이나 서점에 함께 가곤 했다. 평소 학교에서는 짓궂다 못해 기괴한 장난을 치는 그도, 나와 함께 있을 때는 나를 배려해서인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방학이 되어서도 이런 관계는 변하지 않아, 나와 그는 종종 학교 도서실에서 만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전에 본 적 없을 적도로 상쾌한 얼굴을 하고 도서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귀는 사람이 생겼어.”

 

평생 여자에는 관심도 없을 것처럼 이야기하던 녀석이, 갑작스럽게 애인이 생겼다고 하자, 놀라움은 이내 사그라지고, 호기심이 찾아왔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걸까?

 

예쁘냐?”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어떤 이야기에도 막힘없이 대답했던 그가, 겨우 예쁘냐?’라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예쁜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몸매가 좋은 걸까? 물어보았지만,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따지자면 빈약한 체형일 거라고 대답했다.

 

이쯤 되면 슬슬 녀석이 대체 왜 그런 사람과 사귀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이 예쁜 것도, 그렇다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라면 대체 왜 사귄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A에게 묻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랑에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이제껏 본 적 없는 무척이나 해맑은 웃음이었다. A와 함께한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었던 미소. 사랑이란 것이 사람을 이다지도 바꿔놓는다.

 

이번에는 질문을 바꿔,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먼저 고백한 걸까?

 

A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백을 받은 것은 자신이라고 했다. 책으로만 사랑을 배운 나는, 왠지 그게 퍽 특이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고백이란 건 남자가 먼저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서 만났느냐고 묻자, 잠시 도서실에 들렸다 집으로 가는 와중에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고백 받았다고 덧붙였다.

 

평소에 자주 본 사람일까? 아니, ‘첫눈에 반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쩐지 첫눈에 반한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편이 더 로맨틱하지 않은가?

 

이야기하는 내내 그는 끊이지 않는 고양감에 취해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했다. 친한 친구가 사랑에 취한 모습을 보는 것이 흔치 않고, 또 재밌긴 했지만, 배알이 꼴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기에, 녀석의 등을 큰 소리 나게 후린 다음, 혹시라도 나중에 뭔가 재밌는 일이 일어나면 말해달라고 했다.

 

그 후 A는 애인을 만나기 위해 며칠간 도서실에 오지 않거나 약속을 미루는 일이 생겼다. 나는 그러려니 하며 도서실에 들러 책을 읽었고, 방학이 끝날 때쯤이 돼서야,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학기가 시작되면 애인과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A에게 물어보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마 얼굴 보는 시간은 지금과 비슷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살짝 의아하긴 했지만, 사랑에 취한 A가 헛소리를 하는 일이야 자주 있었고, 또 학교에서 괴인으로 통하는 A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생각한 바를 성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 학기가 시작하고, 애인과 쏘다니기 바빠 얼굴 볼일이 많이 없었던 그에게 진도는 어느 정도 나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이제 키스까지 하는 사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그 반응에 퍽 놀라 또 그의 등을 한 대 치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그 후로 그가 무언가 심한 장난을 치는 일이 줄어들었다. 비단 나에게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말이다. 이제 그는 신나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서 가끔 몰래 핸드폰을 쳐다볼 뿐이었다. 심지어는 성적도 점점 올라서 선생님들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그를 기이하게 보기 시작했다.

 

요즘 좀 변한 것 같다.

 

도서실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다가 그에게 툭 던지자, 그가 얼굴을 붉혔다. 그 사랑이란 것이 녀석을 점점 바꿔 가고 있는 것이었다.

 

방학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A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해 나가고 있었다. 나만 알고 있던 마이너 밴드가 메이저로 올라간 느낌이라 살짝 섭섭한 느낌도 있지만, 그래도 그에게 좋은 일임은 변함없었다.

 

A는 혹시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나에게도 애인을 소개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이렇게 바꿀 정도로 지대한 사랑을 줄 수 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기에 그 날이 빨리 오기를 빌었다.

 

그리고 그 날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찾아왔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또 점심시간 동안 책을 읽으러 도서실로 올라가 있자, 이내 A가 옆에 사람을 끼고 도서실로 들어온 것이다.

 

A는 처음 나에게 애인이 생겼다고 말했을 때 짓고 있던 미소를 지으며 함께 온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그가 학기 중이나 방학 중이나 만나는 시간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했던 말이 무슨 소린지 이해했다.

 

오히려 방학이었을 때보다 더 자주 얼굴을 볼 것이다. 같은 학교 사람이라면 온 종일 보기 싫어도 한 번씩은 마주치게 되어있으니, 보고 싶은 사람들끼리 만나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운 곳이 학교라는 공간이니까.

 

A의 애인은 나를 보자, 살짝 얼굴이 굳었다. 나 역시 살짝 얼굴이 굳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A는 애인과 함께 내 앞에 앉아서, 자랑스럽게 그의 애인을 소개했다. 그가 말했던 대로, 예쁘지도, 그렇다고 몸매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함께 어디를 갔느니, 뭘 했느니, 어떤 걸 먹었는지까지, 방학 동안 그가 애인과 함께했던 모든 것들을, 마치 나에게 말해주기 위해 어디다가 적어놓고 달달 외운 듯이 막힘없이 술술 내뱉었다. 나는 별다른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 쳐주고, 웃어야 할 때 웃어주었다.

 

꽤나 배알이 꼴릴 거라곤 생각했지만, 막상 실제로 닥치니 배알이 꼴리는 게 아니라 속에서 뭔가가 심각하게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기묘한 감각을 억지로 참으며 애인과 놀이공원에 간 이야기를 들을 때쯤이 되어서야 점심 종이 쳤다. 교실로 돌아가려던 그를 나는 마치 무언가 깜빡 놓고 간 것이라도 있느냥 불러 새워 그에게 방과 후에 혼자서 도서실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그러겠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청소 당번인 그를 두고 먼저 도서실로 갔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사람을 이리도 바꿔놓은 그 사랑이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 속에만 파묻혀 있던 나에게는, 그의 사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난제와 같았다.

 

사랑이란 그렇게 비이성적인 것일까? 아마 나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궁금했다. A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그게 알고 싶었다.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들어왔다. 무엇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하는 와중에, 그가 먼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좀 전에 도서실에 들었던 그 이야기들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신나는 어투라기보다는, 무언가 고백하는 어투였다.

 

함께 하교했다. 함께 놀이공원에 갔다. 함께 식사 했다. 손을 잡고 함께 공원을 걸었다.

 

애인과 함께,

 

키스했다.

 

전에도 말했지?”

 

내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그가 잽싸게 입을 열어 말문을 막았다.

 

사랑에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그는 계속해서 나에게 말했다.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사랑이란 것을 그 아이가 자신에게 주고 있다고, 무뚝뚝한 아버지도, 그저 친한 친구인 나도 주지 못했던 사랑을.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가 다른 사람의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그는 단순한 친구였고, 그가 원하는 것은 내가 채워 줄 수 없었으니까.

 

그는 나에게 인사를 하고 도서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그가 했던 말을 되새김질하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것은,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이다. 아마 내가 A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사랑은 이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어떤 관계라도, 나름의 정당한 이유를 갖춘 것이다. 사랑 그 자체가 사랑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A에게는 그런 사랑이 필요했을 뿐이다. 차가운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했던, 나와의 우정으로는 채울 수 없었던 진실 된 사랑.

 

아마 A는 자신을 사랑해준다는 확신이 들었다면, 노처녀 교사가 사귀자고 해도 사귀었을 것이 분명하다. 십수 년을 방치되어 사랑을 잃은 그에게, 사랑이란 것은 나이도, 외모도, 성별도 관계없는, 받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마냥 족한 그런 것일 터이다.

 

더 이상 고민해봐야 부질없을 것 같았다.

 

그저 모든 것을 이해한 듯 체념한 채 도서실 밖으로 나갔다. 천천히 운동장을 지나 교문을 나설 때, 나는 생각했다.

 

남학교 학생끼리 사랑에 빠지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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