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허물 벗는 여자

2015.06.17 09:2406.17

허물 벗는 여자



초인종을 세 번 눌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기다려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고 열쇠를 꺼내 들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거실은 한여름 더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한기가 돌았다. 저절로 거실 구석에 놓인 에어컨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설정온도가 숫자 18에 맞춰져 있었다. 이렇게 낮은 온도에 맞춰놓으니 전기요금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번 달에는 요금이 하도 많이 나와 명세서를 보여주며 전기 좀 아껴 쓸 수 없느냐고 한소리 했다. 그러자 아내는 반성하기는커녕, 더워 죽겠는데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냐며 두 눈 부릅뜨고 대들었다. 거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정말로 짐을 싸들고 나가버릴 것 같아 자신이 잘못했다 말하고 넘어갔다. 전기요금이 아무리 많이 나오더라도 아내가 집에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에어컨을 켜놓고 나가다니! 정신 나간 여자군.”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에어컨이 돌아가지 않게끔 전원을 꺼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무언가 떨어져 있었다. 아내가 벗어놓은 허물이라는 걸 알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내가 허물을 벗으면 치우는 건 사내의 몫이었다.


“자기가 벗은 걸 왜 나보고 치우라는지 모르겠어.”


아내가 허물 벗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신혼의 단꿈을 만끽하던 삼 년 전 여름이었다. 집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그냥 가기가 뭐해 아내가 좋아하는 팥빙수를 사 들고 올라갔다. 그날도 오늘처럼 초인종을 눌러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낮에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는 아내이기에, 집에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올라왔다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아내도 없는데 굳이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 그대로 발길을 돌리려다, 그래도 팥빙수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야 할 것 같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때 침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조심조심 소리를 죽이며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침대 위에 누군가 웅크리고 있어 자세히 보니 아내였다. 아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굼벵이처럼 등을 구부리고 헉헉! 신음을 냈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몹시 당황스러워, 사내는 “이봐! 왜 그래?”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고 일 분도 안 돼 아내의 등껍질이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찢어져 양옆으로 쩍 벌어졌다. 아내가 허물을 벗는 여자였다니. 사내는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다. 허물을 다 벗기까지 십오 분이 더 걸렸다. 아내는 허물을 벗은 후 기진맥진해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사내는 잠든 아내를 멍하니 보고 있다가 사무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급히 현관문을 나섰다. 건물을 빠져나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다 멍청하게 팥빙수를 들고 나왔다는 걸 알았다. 어차피 늦었으니 다시 올라갔다 와도 되는데, 허물을 벗고 곤히 잠든 아내를 깨우기 싫어, 가는 길에 마침 쓰레기통이 보여 넣어버렸다.


사내는 가방을 내려놓고, 허물을 담을 봉투를 가지러 나갔다. 새것을 쓰려니 아까워, 반쯤 채워진 쓰레기봉투를 가져왔다.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거니까 스스로 알아서 버리면 좋을 텐데, 아내는 그마저도 하기 싫어 사내한테 미루고 나 몰라라 했다. 사내도 처음에만 꺼림칙해 피했을 뿐, 지금은 퇴근하고 돌아와 허물이 보이면 별말 않고 치웠다. 자꾸 하니까 마음이 편해져 이제는 만져도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먼저 두 다리에서 떨어져 나온 허물을 구겨 넣고, 그다음 두 팔에서 떨어져 나온 허물을 넣었다.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허물은 부피가 커 여러 겹으로 접어 집어넣어야 했다. 허물은 말랑말랑해 미끈한 비닐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그건 아내가 허물을 벗은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허물은 한 시간까지는 탄력이 남아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이 부드러운데, 두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메말라 표면이 거친 종이를 만지는 느낌이었다.


아내가 처음으로 허물을 벗은 건 고등학교 삼 학년 때였다. 식구들이 모두 집을 나가고 없는 한여름 날,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낮잠을 자다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목이 말라 시원한 물을 마시려고 일어서는데,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입이 벌어지지 않으니 도와달라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매미 울음소리는 더욱더 크게 들려 귀청이 찢어지려고 했다. 가족이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있으려니 답답하고, 그 상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움이 일었다. 순간 짜릿한 전율이 전해지는가 싶더니, 등이 둘로 짝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비로소 두 다리와 두 팔이 조금씩 움직여 자세를 바꿀 수 있었다. 그때 두 다리를 모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웅크리고 있어야 편하다는 걸 알았다. 잠시 후 몸에 붙은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 나쁜 그 무언가를 빨리 떨쳐내고 싶은데, 입고 있는 옷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겨우겨우 움직여 속옷까지 전부 벗고 나서야, 온몸을 감싸고 있는 허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허물을 벗고 나면 남은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 눈을 감고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런 뒤 누가 보기 전에 허물을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버렸다. 그날 이후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이 년 뒤에 두 번째 변화가 나타났다. 그날도 느낌이 첫 번째와 같았으며, 허물을 벗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쁘고, 피부를 만지면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또 허물을 벗을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남들 앞에서 허물을 벗는 실수를 피할 수 있었다.


이제 머리에서 떨어져 나온 허물만 남았다. 허물을 벗을 때 두 눈을 뜨고 있었는지 눈동자 부분이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내는 도톰한 입술이 매력적이며, 허물에 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았다. 남은 허물을 마저 쓰레기봉투에 담으니 꽉 찼다. 사내는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 쓰레기봉투를 번쩍 들어 수거함에 던졌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안녕하세요!” 하고 말을 걸어와 돌아보니, 위층에 사는 여자가 일곱 살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지나갔다. 위아래 층에 사는 사이라서 가깝게 느껴지는지, 길을 걷다 마주치면 여자가 먼저 아는 채를 했다. 사내도 여자가 싫지 않아 무거운 걸 들고 가면 대신 들어줬다.


아내는 승강기에서 마주쳐도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는 여자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내가 여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위층에서 들리는 소음 때문이었다. 여자아이가 쿵쾅쿵쾅 뛰는 소리, 의자 바퀴 구르는 소리, 가끔 들리는 그릇 떨어지는 소리 등등이 아내의 예민한 신경을 건드렸다. 사내는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아 그렇게 심하다는 걸 못 느꼈다. 쉬는 날 집에 있어도 가만가만 걸어 다니는 소리만 들릴 뿐 쿵쾅쿵쾅 뛰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회사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그 정도 소음은 감수하고 사는 듯했다. 그마저도 싫으면 아무도 살지 않는 숲에 들어가 혼자 살든가 해야지, 그걸로 얼굴을 붉혀봐야 서로 기분만 상할 뿐이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가시나 봐요?”

“마트에 좀 다녀오려고요. 아이가 사달라는 물건이 있어서요.”


사내는 엄마 손을 붙잡고 걸어가는 여자아이를 유심히 보았다. 결혼한 지도 벌써 삼 년이나 지났는데, 아내가 아이 가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답답해 이야기를 꺼내면 아이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며, “정 원하면 이쯤에서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살든가!” 하고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사내는 아내와 헤어질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아내는 살이 좀 쪘어도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산다는 건 어리석은 인간이나 하는 짓이었다. 지금은 필요를 못 느껴 그럴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변해 아내가 먼저 아이를 갖자고 할지도 몰랐다. 순간 여자아이가 고개를 돌려 사내를 보았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엄마, 저 아저씨 좀 이상하지 않아?”

“왜? 무슨 일 있었니?”

“나를 볼 때마다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

“네가 잘못 봤겠지.”

“아냐! 조금 전에도 나를 이상한 눈으로 봤단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자.”


사내는 아이의 말에 충격을 받아 왜 저런 말을 할까 깊이 고민했다. 그는 의심받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승강기에서 마주쳐도 이름조차 묻지 않았고, 문이 열린 뒤에도 일부러 여자아이가 먼저 내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내렸다. 귀엽다고 승강기에서 여자아이 머리를 만졌다가, 아이 부모로부터 거센 항의를 들었다는 회사 사람 이야기를 듣고 더욱더 조심했는데, 그러한 행동이 오히려 아이 눈에 이상하게 보였는지도 몰랐다. 차라리 남들처럼 이름도 묻고 듣기 좋은 소리도 가끔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으면 최소한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은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그나저나 아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집을 나가고 들어오는 거야 어린 애들도 하는 일이니까 걱정을 안 하는데, 날이 저물어 캄캄해질 때까지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문제였다. 며칠 전에도 말도 않고 집을 나가 자정이 한참 지나서야 들어오기에, 어디서 뭐 하고 이제야 들어오는 거냐고 따지듯 묻자, “당신은 알 필요 없으니 더 이상 묻지 마요.” 그 한마디만 하고는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조금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아내가 등을 보이고 누워 코를 골았다. 처녀 때부터 잠이 많았는데, 아내는 결혼한 후에도 베개에 머리만 댔다 하면 잠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아내가 걱정돼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뜬금없이 없는 번호라는 말만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분명 아내의 전화번호가 맞는데, 왜 없는 번호라는 말이 흘러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내는 조금 전 버리고 온 허물을 떠올렸다. 아내는 변덕이 심해 하루에도 마음이 수십 번씩 바뀌는데, 허물을 벗은 날은 유독 심해 별것도 아닌 일로 불같이 화를 내고, 위층 여자 때문에 미치는 줄 알았다며 짜증을 부렸다. 그런 아내를 보고 있으면 불안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오늘도 아내는 허물을 벗은 후 갑자기 마음이 변해 대리점에 찾아가 번호를 없애버린 게 분명했다. 그러고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개통해 달라고 할 게 빤한데, 아내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나, 금방 후회할 짓을 왜 자꾸 하나 몰랐다.


아내가 없으니 혼자 저녁을 차려 먹어야 했다. 휴대전화를 소파 위에 던져놓고 주방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침에 담가놓은 그릇이 개수대에 그대로 있었다. 그건 오늘도 아내가 직접 차려 먹지 않고, 전화를 걸어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시켜먹었다는 뜻이었다. 이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면 저녁도 밖에서 먹고 들어올 공산이 컸다. 사내는 냉장고를 열어 아침에 넣어둔 뚝배기를 꺼내 냄새를 맡았다. 상하지 않은 듯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된장찌개만 있으면 다른 반찬 없이 저녁 한 끼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아내가 김치 담그는 법도 모르고, 통에 김치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다 보니, 사내가 수시로 열어봐 바닥을 드러내기 전에 미리 가서 사왔다. 할 줄 모르면 어디 가서 배우면 되는데, 아내는 돈 주고 사 먹고 말지 귀찮은 일을 왜 하느냐며, 자기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말라고 했다. 된장찌개도 전날 퇴근하고 들어와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먹을 만한 반찬이 하나 보이지 않아 사내가 직접 끓였다. 사내는 찌개가 끓는 동안 설거지를 마치고 밥통을 열어 밥을 펐다. 오늘도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아내가 있다는 게 어디야. 혼자 사는 남자보다는 백번 낫지.”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저놈의 매미는 밤낮이 없군.”


밤인 데도 매미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아파트 화단에 느티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있는데, 베란다 창문을 열면 손에 닿을 듯 가까워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내는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면 귀를 틀어막으며, 듣기 싫으니 빨리 창문을 닫으라고 소리쳤다. 아내가 매미 울음소리에 극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그날 일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벌어진 건 초등학교 육 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한낮에 낮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치마를 들치고 다리를 더듬는 느낌이 들었다. 집에는 아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내는 너무나 무서워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죽은 척 가만있었다. 잠시 후 거친 손이 다리를 쓰다듬으며 위로 올라왔다. 거기를 만질 때는 수치스러워 정말로 죽고 싶었다. 거친 손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와 가슴에 닿았다. 그러자 뻣뻣하게 굳은 몸이 서서히 풀리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자신이 깨어 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있는 그때, 거친 손이 몸에서 떨어지는가 싶더니 푸드덕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아내는 눈을 뜨고 창문 밖으로 날아가는 무언가를 보았다. 궁금해 그게 뭐였냐고 묻자, 아내가 잠시 망설이더니 “매미를 닮은 괴물이었어요.”라고 말했다. 매미를 닮은 괴물이라니. 처음에는 하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으나, 돌아서서 생각해보니 아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어린 나이에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면 무섭고 혼란스러워, 상대가 괴물로 보이는 건 당연했다. 괴물이 아니라 그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사내가 그 이야기를 들은 건 결혼식을 석 달 앞둔 어느 봄날이었다. 아내가 비밀을 털어놓은 후 자신은 괴물한테 겁탈당한 더러운 여자니까, 불쾌하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미안해하지 말고 떠나라 했다. 그때만 해도 아내한테 푹 빠져 있었던 터라 사내는 두 손을 붙잡고, 너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으니 헤어지자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며 애원하듯 말했다. 그런데 그날 아내가 자신이 허물을 벗는 여자라는 말은 왜 하지 않았나 몰랐다. 이야기했더라도 믿지 않았을 테지만, 아내는 매미를 닮은 괴물한테 겁탈당했다는 이야기만 하고, 자신이 허물을 벗는 여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아내가 그날 매미를 닮은 괴물한테 겁탈당한 게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내가 허물을 벗지 않으면 그런 생각을 할 이유가 없는데, 갈수록 허물 벗는 횟수가 늘어나니까 아내의 말에 믿음이 갔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괴물과 몸이 닿았으니까 신체에 변화가 생겨 허물을 벗지, 멀쩡한 사람이 괜히 매미처럼 허물을 벗을 리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홉 시가 넘었다. 아내가 집을 나가 이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위층에 있었다. 위층에서 쿵쾅쿵쾅 걸어 다니며 신경을 건드리니까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간 게 분명했다. 사내는 지금껏 위층을 찾아가 시끄러우니까 좀 천천히 다닐 수 없느냐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들은 게 아니라서 아내 말만 믿고 가기에는 부담이 따르고, 변덕이 심한 아내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도 올라가서 조용조용 다니라고 한마디 하고 내려올까 하다가, 일단 아내 의견을 들어보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참았다. 그것 말고 또 아내가 집을 나갈 만한 이유가 뭐가 있을까 생각하는데, 아까부터 쉬지 않고 귓가에 울려 퍼지는 매미 울음소리가 신경을 건들었다. 밤 아홉 시가 넘도록 매미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밤중에도 이렇게 시끄럽게 우는데, 한낮에는 얼마나 시끄럽게 울어댈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 저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도 아내가 집을 나간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모조리 붙잡아 없애고 싶었다.


“도저히 안 되겠어!”


사내는 곧장 베란다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작년 가을 벌초하러 갔을 때 잠깐 쓰고 넣어둔 톱이 베란다 창고에 있었다. 사내는 창고 깊숙이 넣어둔 톱을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다 누군가와 마주치면 곤란하므로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다행히 화단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이놈의 느티나무만 베어버리면 매미가 날아와 울지 않을 테니, 아내도 시끄러운 매미 울음소리에 괴로워하다 집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사내는 나무가 건물 쪽으로 쓰러지지 않게끔 신경 쓰며 벴다. 날이 잘 들어 생각보다 쉽게 베였다. 철물점 주인이 적극 추천해준 톱인데, 비싸긴 해도 추천해준 톱을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를 절반쯤 벴을 때, 땀이 비 오듯 흘러 옷이 척척했다. 이제 조금만 더 베면 나무가 옆으로 쓰러질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손바닥에 침을 퉤! 뱉고 톱을 들었다. 누군가 근처를 지나다 볼지 모르니 빨리 넘어뜨리고 자리를 떠야 했다. 순간 나무가 옆으로 기우는가 싶더니 쿵! 하고 쓰러졌다. 생각보다 소리가 커 가슴이 철렁했다.


“이놈의 것을 베어버리니 속이 후련하군.”


이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전에 빨리 자리를 피해야 했다. 하지만 이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지금 들어가면 사람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크며, 흠뻑 젖은 걸 보면 어디서 뭘 하고 들어오는지 금방 알아차릴 것이었다. 일단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 있다가 잠잠해지면 들어가기로 하고, 주위를 살피며 아이들 놀이터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들고 있는 톱은 새것이라 버리기 아까우나, 의심받는 것보다는 나아 숲 속 깊이 던졌다.


사내는 사람들 눈길을 피해 주변을 서성거리다, 한 시간쯤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슬쩍 보니 나무만 쓰러져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비상계단을 통해 올라갈까 하다가,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어 잽싸게 승강기에 올라타 버튼을 눌렀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살짝만 밀쳐도 금방 쓰러질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아내부터 찾았다. 하지만 집 안 어디에도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밤 열한 시까지는 십 분도 채 남지 않았는데, 여태 돌아오지 않고 뭐 하나 몰랐다.


순간 저녁때 쓰레기 수거함에 버린 쓰레기봉투가 떠올랐다. 쓰레기봉투가 속이 비칠 정도로 투명해 조금만 관심을 두고 들여다보면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내는 허물을 버릴 때,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끔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서 버렸다. 사내한테도 그렇게 하라고 시켰는데, 오늘 사내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허물이 눈에 띄게끔 대충 집어넣고는 버렸다. 그 상태로는 불안해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쓰레기봉투를 다시 가져와, 아내의 허물만 꺼내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버려야 했다.

사내는 땀 냄새가 풀풀 풍기는 옷을 갈아입지 않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마음이 급하니까 승강기를 타고 내려오는 잠깐의 시간조차 무척 길게 느껴졌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쓰레기 수거함으로 들어갔다. 쓰레기봉투 더미 속에서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음식물 쓰레기는 일반쓰레기와 분리해 버려야 하는데, 아직도 섞어서 버리는 인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코를 막고 몇 개를 들추자, 자신이 버린 쓰레기봉투가 바로 나왔다. 쓰레기봉투가 많으면 비슷비슷해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충 봐도 몇 개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헐렁하니 무언가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쓰레기봉투를 수거함에서 꺼내 바닥에 놓고 무엇이 빠졌나 보았다.


“아! 이런.”


쓰레기봉투에 들어 있어야 할 아내의 허물이 보이지 않았다. 종이쪼가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게끔 일부러 단단히 묶어서 버렸는데, 아내의 허물만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쓰레기봉투를 잘못 꺼냈을까 싶어 속을 들추니, 남은 쓰레기는 모두 자신의 집에서 나온 것이었다. 홈쇼핑 회사 로고가 찍힌 포장지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는데, 포장지에 집주소와 아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내의 허물이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아내가 이 사실을 알면 당장 찾아오라고 길길이 날뛸 텐데, 누가 가져간 줄 알아서 찾아온단 말인가. 사내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누가 꺼내 갔을까 생각했다. 쓰레기봉투를 수거함에 버릴 때, 근처를 지나간 사람은 위층 여자와 일곱 살로 보이는 여자아이 둘 뿐이었다. 결국 위층 여자와 여자아이 둘 중 한 명이 꺼내 갔다는 말인데, 가능성이 떨어지는 여자아이를 빼고 나면 위층 여자만 남았다.


“정말 위층 여자가 꺼내 갔을까?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없잖아?”


얼굴을 마주보고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눠야 서로의 생각을 알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으니 위층 여자는 아내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아내가 볼 때마다 본체만체하니까 기분 나빴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매일 보는 얼굴인 데도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이 아내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내가 허물 벗는 여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남편인 사내 말고는 없으므로, 쓰레기봉투에 허물이 들어 있다는 걸 위층 여자가 알고 꺼내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요?”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경비실 노인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요.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지 않소?”

“집 안에서 물건을 하나 잃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혹시 쓰레기봉투에 들어가지 않았나 싶어 찾는 중입니다.”

“그게 사실이오?”

“사실이니까 이러고 있지, 내가 미쳤다고 이 시간에 잠 안 자고 나와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겠습니까?”


사내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자 노인이 쓰레기봉투를 힐끗 쳐다보고는 지나쳐갔다.


“영감탱이가 하필 이 시간에 나타날 게 뭐람!”


경비실 노인이 보이지 않자 쓰레기봉투를 단단히 묶어 수거함을 향해 힘껏 던졌다. 누가 가져갔든 아내의 허물을 찾는 건 이미 틀렸지 않나 싶었다. 이 시간에 남의 집을 방문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위층 여자가 꺼내 갔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는 상태에서, 허물 이야기를 꺼냈다가 미친놈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오늘도 아내는 자정을 넘길 모양이었다. 그는 승강기에 올라타 버튼을 누르고, 아내는 지금 누구와 함께 있을까 생각했다.


“혹시 그 남자와 함께 있는 게 아닐까?”


그 남자는 사내와 결혼하기 전 아내가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사내도 그 남자를 잘 알았다. 세 사람은 동아리 모임에서 만났다. 레포츠를 즐기는 동아리 모임이었는데, 그 남자가 맨 먼저 들어왔고 그다음 사내와 아내가 차례로 들어왔다. 사내도 아내를 좋아했으나, 아내가 그 남자를 더 좋아하는 걸 알고,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지켜봐야 했다. 그 남자는 부잣집 아들이라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동아리 사람들과 영월 동강으로 래프팅하러 갔다가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두 사람이 모임에 나오지 않은 것도 그런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음날 사내가 먼저 아내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집에 있었다. 만나자는 말을 꺼내자 아내가 싫다며 거절했다. 만나주지 않으면 집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하자, 아내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집 근처 술집에서 만나자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아내가 그동안 그 남자와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가장 충격적인 말은 그 남자의 아이를 가진 후 반대가 심해, 눈물을 머금고 혼자 병원에 가서 지웠다는 이야기였다. 그 뒤로 남자는 아내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날 아내가 아이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데 한 이유는, 자신은 그런 여자이니 이쯤에서 단념하고 떠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본격적으로 사귈 기회가 주어져 더 좋았다. 끈질긴 구애 끝에 결국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고, 그 남자와 관계도 그걸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결혼한 후에도 아내는 그 남자를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만났다.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떠난 사람인데,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내가 정말로 그 남자와 함께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아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남자이지 자신이 아니므로 어쩔 수 없었다.


사내는 샤워를 하고 나와 소파에 앉았다. 자정을 넘기면서 불이 켜진 집보다 꺼진 집이 더 많았다. 평소 같으면 이미 잠들었을 시간인데, 아내가 들어오지 않으니 걱정돼 잠이 오지 않았다. 나무를 베어버려 매미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무가 없으니 한낮에도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나무를 베어서 없애버린 줄 알면 아내가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매미 울음소리를 싫어했지 나무를 싫어한 건 아니니까, 멀쩡한 나무를 왜 베었느냐고 할지도 몰랐다. 아내가 뭐라고 하든 나무를 없애버린 건 잘한 듯했다. 나무가 있으면 올여름이 다 가도록 매미가 날아와 시끄럽게 울어댈 텐데, 아내가 매미 울음소리 때문에 괴로워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때 위층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이 일어 자세히 들으니 윗집 여자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였다. 하지만 소리가 작아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사내는 윗집 여자가 여자아이와 함께 가는 모습만 봤지, 다른 사람과 함께 가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매일 아침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같은 동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기 싫어도 듣게 되는데, 윗집 여자 이야기도 가끔 들렸다. 사람들이 남의 집 사정을 어떻게 그리도 잘 아는지 모르나, 윗집 여자가 이혼녀라는 소리도 들리고 미혼모라는 소리도 들리는데, 어느 게 맞든 여자아이와 단둘이 사는 건 분명했다. 사내도 젊은 여자가 여자아이와 단둘이 사니까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 또다시 위층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내는 윗집 여자가 지금 누구와 이야기 나누고 있는지 알 것이었다. 아내는 한낮에 문을 닫고 있으면 윗집에서 소곤소곤 나누는 소리까지 다 들린다 했다. 여자아이는 유치원에 가고 없을 테니, 한낮에 윗집에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여자밖에 없었다.




피곤해 소파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십 분쯤 지나자 스르르 잠이 들었다. 갑자기 윗집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개새끼야! 그럴 거면 꺼져버려.” 저건 분명 윗집 여자 목소리였다. 윗집 여자가 불같이 화를 내는 소리인데, 여자한테 저런 면이 있는 줄 오늘 처음 알았다. 얼굴도 곱고 참 선한 눈을 가져 평생 성질 같은 건 내지 않을 걸로 믿었다. 몸을 뒤척이며 한밤중에 무슨 일로 여자가 저렇게 화를 낼까 생각하는 순간 “당장 내놓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어!”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은 남자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로 판단하건데, 사십 대 중반은 넘을 성싶었다.


“네놈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내놔라 마라야!”


윗집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 쩌렁쩌렁 울렸다. 잠자리에 든 사람들이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을지도 몰랐다.


“좀 조용히 못해! 사람들 다 듣잖아.”

“듣든 말든 네놈이 무슨 상관이야. 정 신경 쓰이면 당장 꺼지든가.”

“조용조용 끝내려고 했더니만,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남자가 주방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주방에 식칼을 가지러 가는 게 분명했다. 위아래 층이 똑같아 소리만 들어도 동선이 그려져,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거렸다. 곧 휴대전화를 집어 경찰서로 전화를 걸려다, 경비실 직원을 부르는 게 빠를 것 같아 비상벨을 눌렀다. 경비실 직원이 수화기를 들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4동 507호 사람인데요. 윗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서요.”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그러다 말겠지요.”

“방금 식칼을 가지러 주방 쪽으로 가는 소릴 들었거든요.”

“소리만 듣고 식칼을 가지러 갔는지 어떻게 압니까. 좀 더 있어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연락하세요.”


경비실 직원이 일방적으로 연결을 끊어버렸다. 다시 비상벨을 눌러도 받지 않았다. 사내는 경찰서로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럴 시간이 없어 신발을 신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자신이라도 올라가서 싸움을 말려야 했다.


“여보세요! 아래층 사람인데, 문 좀 열어보세요.”


사내가 현관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미 남자가 휘두른 칼에 맞아 윗집 여자가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자아이는 신음하는 여자를 붙잡고 울고 있으리라. 그때 뒤쪽 문이 열리고 백발의 노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인데, 이 시간에 시끄럽게 떠드는 거요?”

“이 집에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서요.”

“살인사건이 벌어졌다고요? 언제요?”

“조금 전에 여자가 소리를 질렀잖아요?”


아무리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라 해도 아래층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소릴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젊은 사람이 더위를 먹어나. 그 집은 살던 사람이 지난달 이사 가고,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요. 그러니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내려가요.”

“이 집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여자가 남자와 싸우는 소릴 분명히 들었다고요.”


백발의 노인은 더 이상 상대하기 싫은지 문을 쾅 닫았다. 그새 싸움이 끝났는지 조용했다. 위층 여자한테 아무 일 없길 바라며,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나올 때 빠끔히 열어놓은 문 사이로 안개가 새어나왔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니 집 안에 뿌연 안개가 가득했다. 안개를 헤치고 들어가다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그 이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머리가 띵하니 아팠다. 소파에서 잠을 자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침실로 가는 도중에 문틀 모서리에 부딪힌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옆에서 누가 자고 있는 것 같아 돌아보니, 등져 누운 아내가 굼벵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정이 넘도록 들어오지 않은 아내가 생각나, 일어나 보라고 한마디 하려다 그만뒀다. 귀가 아프게 들은 이야길 다시 들으면 뭐할 것이며, 묻는 말에 곧이곧대로 대답할 여자도 아니었다. 그래도 아내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어, “세상에 완벽한 사람 누가 있어. 그러니 싫어도 만족하며 살아야지.” 하고 혼잣말을 하고는 일어나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설 때까지 아내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 위층에 사는 여자가 “안녕하세요!” 하고 반갑게 맞았다. 검게 그을린 피부가 탄력이 넘쳤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여자아이는 어깨가 벌겋게 달아올라 허물이 벗겨졌다.


“휴가 다녀왔나 봐요?”


사내는 올해도 휴가 계획이 없었다. 그래서 휴가를 다녀온 여자가 특별해 보였다.


“딸아이랑 동해안에 있는 해수욕장에 다녀왔어요. 사람이 어찌나 많이 왔는지 발 디딜 틈이 없더군요. 그런데 혹시 간밤에 싸우는 소리 못 들었나요?”

“싸우는 소리요? 아니요, 못 들었는데요. 저는 한번 잠들면 옆에서 누가 죽어 나가도 모르거든요.”


위층에 사는 여자가 들었다면 싸우는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는 건데, 사내는 간밤에 싸우는 소릴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렇군요. 아무튼 싸우는 소리가 밤새 들려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


승강기 문이 열리자 여자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내렸다. 사내가 대신 들어다 주겠다고 하자 여자가 가벼우니까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건물을 빠져나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숲에서 들리는 매미 울음소리가 우렁찼다.


“저놈의 매미들이 오늘도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어대는군.”


사내는 차에 올라타 에어컨을 틀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끝>

댓글 2
  • No Profile
    화룡 15.06.30 07:53 댓글

    미스테리한 분위기, 허물 벗는 아내와 매미 소리 등이 의미심장한데, 마지막이 모호해 잘 이해가 안 되네요. 좀 더 곱씹어 봐야겠습니다.

  • No Profile
    글쓴이 장피엘 15.06.30 08:18 댓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660 단편 휘어진 거리 사틱 2015.06.07 0
659 단편 방해꾼들 打作 2015.06.07 0
658 단편 초능력이 나타났다 엄길윤 2015.06.10 0
657 단편 나는 입이 있기에, 소리지를 수밖에2 Zan 2015.06.15 0
단편 허물 벗는 여자2 장피엘 2015.06.17 0
655 단편 노인과 청년 목이긴기린그림 2015.06.17 0
654 단편 그의 세번째 손 화룡 2015.06.18 0
653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이자토디를 꼬셔 보다. 니그라토 2015.06.20 0
652 단편 경국지색 - 달기2 니그라토 2015.06.27 0
651 단편 극복 打作 2015.06.30 0
650 단편 기억의 잔상 tokggi 2015.06.30 0
649 단편 범죄 진화론 그믐여울 2015.07.11 0
648 단편 사랑에 이유가 필요할까? 미샤 2015.07.12 0
647 단편 사슴뿔 나비바람 2015.07.14 0
646 단편 그에게는 아직 팔 한 자루가 남아있다. 토니오몬티 2015.07.14 0
645 단편 호랑이 장가가는 날 장피엘 2015.07.16 0
644 단편 멍청이 이야기 iCaNiT.A.Cho 2015.07.26 0
643 단편 돼지 멱따기 니그라토 2015.07.29 0
642 단편 망량 그믐여울 2015.08.01 0
641 단편 검은 빵3 엠제이 2015.08.01 0
Prev 1 ...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 11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