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미러 글래스로 뒤덮인 거대한 빌딩이 무너지며 바로 옆의 타워팰리스를 덮쳤다. 사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미친 듯이 뛰었다. 타워팰리스가 두동강이 나며 건물 상부가 사휘가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건물의 그림자가 자신을 덮어버리는 것을 느끼며 사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건물이 바닥에 부딪히며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굉음이 온 도시에 퍼져나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건물은 아슬아슬 하게 사휘를 비껴나갔다. 하지만 뒤이어진 잔해의 폭풍에 사휘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사휘가 정신을 차렸을 때 폭풍은 사라져있었다. 몸에 박힌 유리조각이 느껴졌다. 유리파편에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다행히 눈이나 다른 급소에는 이상이 없었다. 멀리서 시멘트 덩어리가 구르는 들렸다. 사휘는 타워팰리스의 잔해사이로 몸을 숨겼다. 잠시 뒤 누군가가 빌딩의 잔해를 헤치고 나타났다. 머리에 돋은 긴 라디오 안테나로 그가 무심한 교단의 추적자임을 알 수 있었다. 추적자는 사휘가 숨은 곳 근처에 멈춰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빌딩을 무너뜨린 후 자신의 다음 운명을 예언 받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몇 분 뒤 추적자는 사라져버렸다. 추적자가 완전히 사라지자 사휘는 한숨을 내쉬며 잔해에 등을 기댔다. 눈을 감자 빌딩이 무너질 때의 공포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추적자가 건물을 무너뜨린 방법이었다.


사휘를 본 추적자는 바닥에 있는 돌을 집어 들어 반쯤 붕괴되어 있는 미러 글라스 빌딩에 던졌다. 약간 불안정하게 쌓여있는 빌딩의 잔해를 맞춘 돌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고 잠시 뒤 그 불안정하게 쌓여있던 빌딩의 잔해가 조금씩 흘러내렸다. 잔해가 흘러내린 곳은 빌딩의 기둥부분으로 기둥은 그 작은 잔해에 의존해 힘겹게 서있던 중이었다. 잔해가 사라지자 기둥이 무너져 내렸고 하나의 기둥이 무너져 내리자 하중을 견디지 못한 다른 기둥 또한 붕괴되기 시작했다. 기둥이 다 무너지기도 전에 건물은 쓰러졌고 그 건물이 옆 타워팰리스까지 덮쳐 연쇄붕괴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운명이 무심한 눈의 교단 사제들에게 직접 준 권능이었다. 그들의 머리띠에 붙어있는 라디오에서 신의 예언이 내려오면 그들은 그것을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산이 사리지고 바다가 메워져버렸다. 사휘는 이미 그런 그들의 능력을 알고 있었지만 당할 때마다 공포를 느꼈다. 그런 권능 앞에 신을 죽이려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도 어리석게 느껴졌다. 하지만 포기 할 수는 없었다.


낮 동안 숨어있던 사휘는 저녁이 오자 잔해를 나섰다. 도시 한가운데였지만 가로등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을 관리할 국가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10년 전 신이 발굴되고 전 세계 인구의 50퍼센트가 자살할 무렵 세계는 두개의 파로 나뉘었다. 신을 죽이자는 쪽과 옹호하자는 쪽. 국가도 민족도 형제도 없는 전쟁이 일어났다. 오직 자신들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한 전쟁이 끝나고 세상은 신의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승리자들은 자신을 무심한 눈의 교단이라 칭했다.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공공사업들이 사라지며 가로등은 불빛을 잃었고 찬란하던 거리의 빛도 사라져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전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신을 영접하기 위해 전기는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어둡지만 추적자들 때문에 손전등을 켤 수 없었다. 몇 번을 넘어질 뻔한 사휘는 아예 바닥에 엎드려 기었다. 폐허로 변한 도시의 바닥에 돋아난 잡초가 배를 스치고 지나갔다. 돌들에 배가 쓸리고 알 수 없는 날카로운 것들에 찔리며 두 시간 가량을 전진하자 피곤함이 밀려왔다. 마침 가까운 곳에 연립주택 건물이 있는 것이 보였다. 입구까지 기어간 사휘는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갔다. 안에 누가 있나 확인하기 위해 문에 귀를 댔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심하고 문을 열자 안에서 어스름한 빛이 가볍게 눈을 아프게 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휘는 재빨리 문 뒤로 몸을 숨겼다. 안을 살펴보자 촛불이 켜진 거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촛불 바로 옆에는 한 여자가 앉아서 놀란 눈으로 열린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에 안테나가 나와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사휘는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볼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사휘는 여자 앞에 놓여있던 물건들을 보고 나서 그녀가 저항하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날카로운 빛을 뿜어대는 면도칼과 바르비탈류 수면제 그리고 폴리프로폴린 로프가 놓여있었던 것이다. 신이 나타난 후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이 되어버린 행동.


“죽으려는 건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사휘는 자살도구들을 모두 치웠다. 여자는 그런 사휘의 행동을 바라만 볼 뿐 말리지 않았다. 도구를 모두 치운 사휘는 마지막으로 창문으로 촛불의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는지 살펴본 후 여자 옆에 앉았다. 사휘는 배낭에서 돼지고기 통조림을 꺼내서 여자에게 권한 뒤 먹기 시작했다. 여자는 방금 자살하려고 했던 사람 같지 않게 허겁지겁 그 통조림을 먹었다.


“왜 죽으려 했소?”


통조림의 마지막 조각을 삼키려던 그녀의 행동이 딱 하고 멈췄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입을 뗐다. 오랫동안 사람과 말을 한 적이 없는지 왠지 서툴러 보이는 말투였다.


“10년 전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셨어요. 나하고 오빠는 그때 같이 놀다가 들어왔는데 부모님이 안 계신 거예요. 부모님 방에 가봤더니 방이 온통 시커맸어요. 부모님은 다 타버리고 발목 네 개만 덩그러니 있더군요. 난 그걸 보고 놀라서 기절했죠. 깨어나 보니 오빠가 없었어요.”


10년 전 어떤 기독교 사학자에 의해서 신이 발굴 되었을 때 누구도 그것이 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어느 교회에나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것은 너무도 오래된 탓인지 예수의 다리부분이 이미 다 삭아있었다. 하지만 신이 발굴되고 얼마 후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자신의 한 시간 뒤 혹은 며칠 뒤에 일어날 일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채널을 틀든지 볼 수 있었고 한 텔레비전을 동시에 여러 사람이 보더라도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일을 볼 수 있었다. 이 사실에 놀란 사람들은 조사단을 꾸려 조사를 시작했고 그 결과 그 강력한 전파방해의 원인이 그 십자가상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운명이 있음이 증명되었고 세계적으로 자살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세계를 지금의 상황으로 만든 사건의 전모였다.


그런데 텔레비전에서 예언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한 부부가 텔레비전을 보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연발화로 사망한 일이 있었다. 그 부부가 사망한 이후에도 비슷한 사건이 몇 번 더 일어났지만 세간은 이미 운명론에 대한 관심으로 시끄러웠기 때문에 그저 평범한 미스테리 사건으로 치부 받고 사라져 버렸다. 여자의 부모는 그때 처음으로 희생된 부부였다.


부모가 죽고 오빠가 사라진 후 여자는 혼자 혼란한 세상을 떠돌았다.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텔레비전이 너무도 무서워서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힘든 세상을 등지기로 한 것이었다.


“아마도 부모님은 신의 예언을 듣는 도중 사망하셨을 것이오.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이라면 그게 다니까. 난 신을 죽이러 가고 있소. 당신도 같이 가겠다면 말리지 않겠소. 어차피 죽는 것은 매한가지겠지만.”


여자는 마지막 남은 고기조각을 입에 넣은 후 고개를 숙이고 그것을 우걱거렸다. 바닥에 뚝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물방울은 그녀의 눈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대답은 내일 듣겠소.”


잠에서 깬 사휘는 자신의 옆에 누군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이 어제 만난 여자임을 기억해 내고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지난 몇 년간 교단의 추적을 받으며 살아온 탓인지 눈을 떠서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낯설 뿐이었다.


몇 분 뒤 완전히 정신을 차린 사휘는 자신의 배낭을 들고 일어났다. 여자는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사휘는 그 모습을 한참이나 내려보다가 한숨을 쉬고 돌아섰다.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요.”


사휘는 또다시 한숨을 쉬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사휘요. 당신 이름은?”
“러너요. 원래는 다른 이름이었는데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이름을 기억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붙인 이름이죠. 그나저나 우린 이제 어디로 가는 거죠? 신을 죽이려면 증거의 탑으로 가는 건가요?”


무심한 눈의 교단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증거의 탑이라고 이름붙인 거대한 송신용 안테나탑을 이 도시에 세우고 그곳에 신을 모셨다. 덕분에 전 세계의 전파를 수신할 수 있는 모든 매체에서 신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휘는 샌들을 신고 있는 러너를 보고 증거의 탑에 가기에 앞서 먼저 신발가게에 들르기로 했다.


전쟁이 끝난 후로 도로에는 차가 다니지 않았다. 인류의 25퍼센트의 인구만이 남은 상태에서 전쟁으로 파괴된 도로의 복구는 불가능했고 더군다나 그것을 담당하는 국가기구마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심한 눈의 교단은 전용이동수단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지 않았다. 결국 무심한 눈의 교단사람들을 제외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걸어 다녔다. 하지만 그들은 불평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인류의 3퍼센트도 안되는 소수였고 야생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신발가게는 세계의 거의 모든 가게가 그렇듯 아무도 없었다. 러너는 최신 유행이라며 스니커를 골랐지만 그 스타일은 이미 10년이 다 되어가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10년 전 세계가 거의 멸망할 때 유행이 멈췄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휘도 낡아버린 자신의 운동화를 벗고 튼튼해 보이는 등산화로 갈아 신었다.


“아저씨는 왜 신을 죽이러 가는 거죠? 나처럼 주위사람을 잃었나요?”


신발을 갈아 신은 후 바닥에 앉아 있는 사휘에게 러너가 대뜸 물었다.


“난 믿음을 잃어 버렸소.”


사휘는 신부였다. 하지만 신이 나타나고부터 자신의 믿음을 잃어버렸다. 그는 신을 보며 지독한 배신감에 빠져들었다. 신은 언제나 그에게 믿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의 등장으로 인해서 믿을 필요는 사라졌다. 누구나 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믿음으로 인간을 구원하던 신이 앎으로 인간세상을 파멸로 몰고 갔다. 처음에는 사휘는 그것이 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토록 전지한 것은 그가 알기로는 오직 신뿐이었다. 그는 좌절한 후 남들과 마찬가지로 자살하려 했다. 그리고 목을 매고 죽기 전에 그가 믿어왔던 신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틀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목을 매기 위해 묶은 매듭을 잘랐다. 자신의 운명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을 이미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는 신을 죽여 자신의 믿음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의 눈에만 운명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고자 했다.


한참 사휘의 설명을 듣던 중 러너가 갑자기 소리 질렀다. 사휘가 뒤를 돌아보자 신발가게 옆에 있던 빌딩이 무너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러너를 데리고 신발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무너지는 건물을 피하고 후폭풍을 피하기 위해 바닥에 엎드렸다. 먼지바람 속에서 러너는 처음 보는 거대한 파멸에 짐승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사휘는 그녀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몸을 꼭 안았다. 먼지바람은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사휘는 등에 유리조각과 날카로운 자갈이 박히는 것을 느꼈지만 꼼짝하지 않고 러너를 안았다.


모래폭풍이 가라앉자 저 멀리서 머리에 긴 안테나가 삐죽 튀어나온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휘는 정신을 잃은 러너를 안고 잔해 사이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추적자들이 러너와 사휘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러너와 사휘가 있는 곳 근처까지 온 추적자들은 신의 계시를 듣는지 귀에 꼽혀 있는 이어폰을 손으로 잡고 뭔가에 집중했다. 사휘는 러너의 침이 흐르는 입을 막고 조용히 그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러너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마도 너무 놀라서 쇼크상태에 빠진 모양이었다. 사휘는 부들거리는 러너의 몸을 잡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계속 힘을 주며 속삭였다.


“괜찮아. 모든 게 끝났어. 진정해 아가씨.”


하지만 러너는 몸에 힘을 풀지 않았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러너의 손이 옆에 있던 잔해를 건드리고 말았다. 돌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추적자들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한숨을 쉬고 사휘는 러너를 진정시켰다. 러너는 쇼크상태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는지 사휘를 자신의 오빠로 착각했다.


“현승 오빠. 너무 무서워. 살려줘.”


사휘는 러너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대고 눈물을 흘리며 계속 자신의 오빠이름을 불렀다. 얼마 후 러너가 정신을 차리자 사휘는 그녀를 데리고 잔해 속을 나왔다. 러너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돌리고 앉았다. 사휘는 그녀가 불렀던 남자의 이름을 전쟁에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발화능력자였던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교단의 사제들을 학살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다른 인체발화자들처럼 텔레비전에 노출되어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죽어갔다. 남자가 죽으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세계는 결국 교단의 손에 떨어졌다. 하지만 사휘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러너 또한 부모가 죽은 후 오빠의 행방을 몰랐기 때문에 지금으로써는 그녀의 오빠가 맞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사휘가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 멀리서 굉음이 들렸다. 한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굉음이 들려오는 것으로 봐서 동시에 여러 군데에서 건물이 무너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소리들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최종적인 목표는 자신들이 될 것이었다. 아마 시체를 발견하지 못한 추적자들이 확인 차 주위를 모조리 붕괴시켜 버리려는 것 같았다.


사휘는 러너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어디로 도망가든 건물에 깔려 죽을 것이었다. 사휘는 한숨을 쉬었다. 러너도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다시 쇼크상태로 빠지고 있었다. 공포를 주체하지 못한 러너가 미친 듯이 몸을 떨자 사휘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시야에 있는 건물들이 하나 둘 무너지고 있었다. 연쇄작용은 점점 더 빠르게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윽고 한번도 보지 못한 거대한 폭풍이 그들을 삼켜버렸다. 죽은 도시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뒤덮었다.


사휘는 입 속에 있던 모래를 뱉어냈다. 그는 건물 사이의 조그만 틈 사이에 끼어서 살아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담담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바로 옆에 가는 손 하나가 바르르 떠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잡아 일으켰다. 기절해 있던 러너가 깨어났다. 사휘는 수통을 빼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러너의 얼굴에 물을 붓고 남은 물을 마셨다. 러너는 멍하게 있다가 물을 뒤집어쓰자 비 맞은 개처럼 고개를 털어댔다.


“살았군요. 저희가 살았어요.”


사휘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수통을 건넸다. 러너는 너무도 담담한 사휘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군말 없이 그가 주는 물을 받아마셨다.


“난 우리가 죽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소.”


사휘의 뜬금없는 말에 수통에 입을 댄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심한 눈의 사제들이 어떻게 저런 평지풍파를 일으킬 수 있는지 알고 있소? 그들은 운명을 조정하기 때문이지. 아니 정확히는 이미 그렇게 운명지어져 있기 때문이오. 그들은 이어폰으로 그것을 듣고 행할 뿐이지. 빌딩이 무너졌을 때 빌딩은 무엇 때문에 무너져야 하는 운명이었겠소? 그저 돌멩이 하나에 무너질 운명? 아니면 붕괴를 일으켜 신을 죽이러 가는 남자와 여자를 깔아뭉갤 운명?”


러너는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사휘는 이미 그녀의 말을 예상한 듯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연도 계속 되면 그것은 필연이라고들 하지. 내가 붕괴에서 살아남은 것이 이번 한번만이 아니오. 난 종말전쟁에 참전했었소. 불신자들의 편에서 말이오.”


그들은 신의 대리자가 아닌 신 그 자체와 싸워야 했다. 렌체스터 제 2의 법칙 같은 기존 전쟁의 상식들은 신의 대리자들에 의해 던져진 돌멩이 하나에 의해 농담이 되어버렸다. 산이 노호하고 바다가 춤을 추며 사람의 목숨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다녔다. 처음 그 현장을 경험하고 살아남았을 때 사휘는 자신의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매번 살아남았다. 사단전체가 몰살하고 자신만이 살아남은 적도 있었다. 신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을 때라면 감사 할 일이었지만 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신의 의지가 개입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전범으로 몰려 추적당할 때에도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결국 죽지 않았다. 그는 뭔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당신이 계속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신을 죽이려는 당신의 계획이 성공한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신은 죽고 싶다는 말이 되는 건가? 신이 자살을?”


자살. 낯설지 않은 단어였다. 사휘는 자살을 한 신이 지옥에 가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풋 하고 웃어버렸다. 전 인류의 50퍼센트가 자살을 했으니 아마 지옥도 만원일 것이다. 자살한 신은 지옥에도 들어가지 못하리라.


“모르겠소. 신이 무슨 생각을 하던지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어쨌든 나는 신을 죽이고 다시 그를 믿기만 하면 되니까. 아마도 부활하셔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겠지. 그렇게 믿고 싶소.”


사휘와 러너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의 풍경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시의 건물은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꼭대기에는 거대한 위성안테나가 달려있었다. 신은 하늘에 있다가 저 거대한 위성안테나로 강림했다. 그리고 그가 강림한지 10년 후의 세상. 그의 강림을 보아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반나절 뒤 사휘와 러너는 저 멀리 솟아있는 거대한 전파 송신용 안테나탑을 볼 수 있었다. 탑은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탑 하부는 대리석을 쌓아서 만들어져 있었고 상부는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었다. 신이 직접 강림한 세상이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신을 보지 못한 그들에게 그 탑은 이름 그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주었다.


탑을 보며 하릴없이 걷다보니 주위에 어느새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둘은 쉴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가까이 있는 극장으로 들어갔다. 극장 앞에 붙어있는 전광판에는 10년 전 개봉한 영화의 포스터가 아직까지 붙어 있었다.


10년 전 신이 강림했을 때 전파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화는 유일하게 미래를 볼 수 없는 매체였다. 운명이 예정되어 있음에 절망하던 사람들은 극장에 와서 위안을 얻곤 했기 때문에 신이 강림한 이후에도 극장 앞은 항상 많은 이들로 붐비곤 했었다. 하지만 결국 자살이 유행하고 전쟁으로 그마저 남은 인류의 반이 사라져버린 지금은 세계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극장도 폐허로 변해버렸다.


사휘는 극장 안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며 상영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극장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물론 옛날처럼 잘 관리 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다른 폐허들처럼 바닥에 쥐똥이 가득 뿌려져 있거나 먼지가 뭉쳐 만들어진 덩어리가 굴러다니지는 않았다. 만약 누군가 관리를 해도 그 사람이 무심한 눈의 교단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필름에는 신이 강림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무심한 눈의 교단이 아니라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상영관 쪽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사휘와 러너는 극장 매점의 판매대 뒤로 몸을 숨겼다. 한 노인이 상영관 쪽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노인은 어디론가 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다가 매점 판매대 뒤쪽을 보며 말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오슈. 밥이나 같이 먹게.”


순간 사휘는 노인이 교단의 사제인 줄 알고 뛰쳐나가려 했지만 안테나가 없는 것을 보고 행동을 멈췄다. 노인은 사휘를 바라보며 재차 식사를 권했다. 그 모습에서 별 위험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휘와 러너는 일어나서 주춤거리며 노인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물론 배가 고프기도 했다.


“노인장은 누구요? 어떻게 우리가 있는 것을 알았소?”
“바닥에 발자국이 찍혀있는데 어떻게 모르겠어?”


사휘는 바닥에 있는 발자국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노인은 웃으며 그들을 극장에 붙어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식당의 한 귀퉁이에는 거대한 캔더미가 쌓여있었고 여기저기 먹다 남은 통조림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노인은 패밀리 레스토랑 부엌으로 들어가서 여러 종류의 통조림을 꺼내왔다. 그 통조림 중에는 십자가가 그려진 것도 있었는데 교단에서 최근에 만든 것이었다. 노인은 증거의 탑 주변 쓰레기 처리장에서 주워온 것이라고 했다. 유통기한이 조금 지난 통조림까지 깔끔하게 먹어치운 둘은 노인의 신상이 궁금해졌다. 사휘는 자신들을 소개하고 노인이 누군지를 물었다.


“나야 뭐 극장에서 먹고 자고 하는 사람이지. 원래는 도박사였어. 그러던 것이 신인지 뭔지가 세상에 나오고 실업자가 되어버렸지 뭔가. 세상에 도박이 사라질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어? 웃기는 일이지.”


노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워낙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 것도 있었지만 원래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러너와 사휘는 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런데 자네들 내가 왜 극장에 들어온 줄 아나? 나도 예언을 받았거든. 바로 이 극장에서 말일세.”


노인의 말에 사휘가 움찔하며 반응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허 못 믿는 눈치인걸. 하지만 사실이네. 물론 티브이만 틀면 볼 수 있는 그런 것하고는 달라. 특정 영화에서만 볼 수 있거든. 항상 같은 내용만 보여주는데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알아먹기가 힘들어. 난 이 극장에서 계속 살게 되는 내용이었다네. 어때 자네들도 한번 볼 텐가?”


러너는 보지 않겠다고 말했다. 부모처럼 죽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휘는 그것을 보고 싶었다. 신이 분명 뭔가 자신에게 말할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휘가 보겠다고 말하자 노인은 둘을 데리고 극장으로 갔다. 피곤하다는 러너를 극장 사무실에 데려다 놓은 후 둘은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노인이 영사기를 돌리는 동안 사휘는 혼자 좌석에 앉아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사휘는 거대한 극장 안에서 혼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망해버린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들에서 느끼는 고독감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과연 신이 이번에는 그에게 응답을 해줄지 궁금했다. 도대체 자신에게 이런 고독감을 느끼게 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이란 무엇일까.


이윽고 귀를 찢는 듯한 종소리가 극장 안에 울려 퍼지며 스크린이 하얗게 변했다. 이제는 이미 자취를 감춰버린 회사들의 광고가 나온 후 영화가 시작했다. 영화는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개봉한 영화였다. 그때 사휘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영화였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사휘는 노인의 말에 약간의 의심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지만 그 중에서 운명을 예언 받은 이는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중반부가 지나도록 스크린에서는 별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 사휘는 노인의 말이 거짓이라고 단정 지었다. 점점 졸음이 밀려들며 그의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완전히 감기기 바로 직전 화면에서 뭔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휘는 처음에는 그것이 실눈을 떠서 화면이 번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눈앞에서 열기가 느껴지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화면에서 떠오른 그것은 불타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었지만 아직은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불길은 점점 강해졌고 얼굴에서 느껴지는 열기도 똑같이 강해졌다. 점점 화면의 윤곽이 잡혀가며 불길에 타오르는 이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사휘가 불길에 휩싸이는 이의 얼굴을 알아봤을 때 그에 몸에서 나오는 불길이 극장 안을 뒤덮어버렸다. 사휘가 깜짝 놀라서 주위를 살펴보자 극장 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상이었고 영화에서 떠오른 영상은 다른 것으로 넘어가 있었다. 사휘는 불타고 있는 이의 얼굴을 기억하며 몸서리쳤다. 그것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불확실하던 미래가 밝아졌나요?”


사휘는 불확실이라는 말이 신경에 거슬리는 것을 느꼈다. 신의 강림과 인류의 괴멸. 어젯밤 봤던 영화에서 그 모든 것의 시작은 불확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신의 자살로 마무리 될 예정이었다. 자신들은 신의 자살을 위해 준비된 하나의 말일 뿐이었다. 지옥에 신을 위한 자리는 없다는 말은 취소해야 했다. 신을 위한 자리는 이미 예약된 상태였을 거니까.



사휘는 러너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노인이 주는 통조림들을 가방에 넣고 있는 중이었다. 사휘는 러너의 손에서 가방을 뺏어서 가방 안에 있는 통조림을 덜어냈다. 러너가 의아한 눈으로 사휘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통조림을 덜어냈다. 통조림을 다 덜어낸 그는 증거의 탑이 가깝게 있으니 많은 통조림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러너와 사휘는 극장을 나왔다. 노인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극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보이는 것으로 대충 계산에 봤을 때 증거의 탑은 하루 안에 다다를 수 있는 거리였다.


“저희가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무기도 없는데.”


사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영화를 본 후부터 그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러너는 그의 침묵에서 왠지 슬픔 같은 것을 느꼈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의 침묵이 너무도 굳건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증거의 탑까지 가는 동안 추적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교단의 총본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인 만큼 꽤나 거센 방해가 있을 것 같았지만 증거의 탑에 거의 다 와가는 시점까지 그들은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교단의 사제들이 증거의 탑에만 기거한다는 사실을 놓고 봐도 뭔가가 이상했다. 분명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었다. 이유는 증거의 탑 바로 앞에서 드러났다. 증거의 탑을 수호하는 모든 추적자들이 탑 앞에 모여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휘는 이런 광경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기억을 미친 듯이 더듬던 그는 어젯밤 처음 봤던 영상을 떠올렸다. 거대한 탑과 많은 이들, 불꽃. 그리고 그 불꽃 속에서 죽어가던 이. 그는 자신들이 점점 신이 만들어 놓은 운명의 수순을 밟아나가고 있다는 것에 좌절했다. 그가 무슨 수를 써도 그것은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침묵이 거대한 공간을 뒤덮었다. 추적자들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지시만을 따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운명의 뜻이었고 인간이 생각해낸 어떤 행동보다도 절대적이었기에 추적자들에게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사휘는 그들의 안테나를 꺾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안테나를 꺾어버려도 운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어차피 존재하는 운명에 안테나가 있던 없던 무슨 상관이겠는가?


“신을 배반하고 불신의 무리에 선 자여. 신은 그대를 벌하시기로 결정했다네.”


추적자 무리 중의 하나가 침묵을 깼다. 사휘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놀랐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결국 자신을 죽인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신을 불사르려했던 김현승의 혈육을 벌하겠다.”


또 다른 추적자가 러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진짜 전쟁영웅이었던 김현승의 동생이었다. 사휘가 그녀와 만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사휘는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추적자는 소매에서 휴대용 텔레비전을 꺼냈다. 그의 가족처럼 그녀도 인체발화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추적자가 휴대용 텔레비전의 전원을 켜는 순간 러너의 얼굴이 붉어지며 목에 있던 혈관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치 붉은 색의 가지가 자라는 것처럼 얼굴전체로 핏줄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눈도 붉게 충혈 되어갔다. 러너는 괴로운 듯 바닥을 기며 손으로는 연신 시멘트 바닥을 긁어댔다. 사휘는 러너를 안았지만 몸이 너무 뜨거워서 이내 그녀를 떨어뜨렸다. 사휘는 배낭에서 수통을 꺼내 그녀의 몸에 물을 바르기 시작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결국 그녀의 몸에 불이 붙었고 사휘는 힘없이 수통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멍하니 그녀의 몸이 불타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뒤 그녀의 몸을 태우던 불꽃이 희미해지더니 꺼져버렸다. 예언과는 다르게 거대한 화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온몸이 검게 그을린 러너는 움직이지 않았다. 추적자들은 남아있는 사휘를 처리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그때 죽은 줄 알았던 러너의 몸뚱이에서 희미하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휘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그녀의 입에 귀를 댔다.


“도...도망쳐. 빨리. 나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요.”


말을 끝낸 러너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사휘는 그녀의 몸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빨리 도망치란 말이야!”


우물거리는 사휘에게 러너가 갑자기 비명을 질러댔다. 사휘는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추적자들은 사휘가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쫒지 않았다. 신의 계시가 내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휘는 자신의 볼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미친 듯이 뛰었다. 덜덜 떨던 러너의 몸이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거대한 화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등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사휘는 앞에 있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돌과 쇠 유리가 마치 장작처럼 타올랐고 화염이 조금 닿기만 하면 무슨 물체든 내부에서부터 불길을 뿜으며 사그라졌다. 물은 마치 기름에 불이 붙은 것처럼 타올랐으며 공기마저 불이 붙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불길이 춤췄다. 공포와 비명 그리고 희생. 불은 그 공간 안에서 개념으로나마 존재하는 것까지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는 운명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했다. 불타버리던 러너를 보며 그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사휘는 하염없이 울었다.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어 한발자국도 마음대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세계가 멸망해버리는 동안 알지 못했던 운명에 대한 회의가 지금에서야 그를 찾아왔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사휘는 해가 거의 질 무렵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주위에는 온통 하얗게 변해버린 재뿐이었다. 그는 그 잿더미를 밟으며 터벅터벅 러너가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그녀의 발목만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세계가 생기기도 전에 신이 던져 놓은 의지였다. 사휘는 배낭에 있던 것을 모두 바닥에 쏟은 후 그 발목을 배낭에 넣었다.


탑은 너무도 거대했다. 지독한 모순에 걸려든 가련한 신에게는 과분한 것이었다. 신을 증거 하기 위해 만든 이 거대한 탑은 오히려 신은 조롱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사휘는 그 미련함의 산물을 걸어서 오르기 시작했다. 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끝도 보이지 않을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사휘는 이 운명을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운명은 어떻게 될까? 탑의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사휘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를 보았다.


“불신자가 이곳까지 왔군. 자네가 신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귀에는 라디오 이어폰을 꼽고 있었다. 아마도 마지막 남은 사제인 듯 했다.


“많은 이들이 신을 죽이려 했어. 자신의 운명을 속삭이는 꼴을 듣기 싫었거든.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하지만 그들은 결코 신을 죽일 수 없었어. 이건 정말이라네. 그는 어떠한 방법을 싸도 죽지 않았지. 깨거나 부수려는 시도도 있었고 심지어는  핵폭풍에 노출된 적도 있었지.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어. 계속해서 전 세계로 자신의 예언을 쏟아냈지. 그래 자네는 무엇을 들고 왔는가? 망치? 톱?”


사휘는 사제의 어깨 너머에 있는 신을 바라보았다. 발목이 잘린 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고 있었다.


“신은 스스로 자신의 발목을 잘랐소. 그 또한 운명이 두려웠던 것이지.”


사제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 신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소. 그는 어느 날 세상을 창조하기로 했지. 하지만 세상을 이루는 요소들은 너무도 불확실했소. 특정한 특징들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것은 항상 미세하게 다른 형태로 표출되었기 때문이오.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미세한 차이들은 그것들을 힘들게 했소. 그래서 신은 그 불확실성을 알고 싶어 했소. 그래서 그는 전지를 택하려 했소. 모든 원소들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다면 알면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소. 모든 움직임을 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움직임까지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오.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알아버린 자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존재할 수 있겠소? 하지만 신은 세상을 만들어야 했소. 고민 끝에 그는 전지로 만들어질 운명 이외에 또 다른 운명을 만들기로 했소. 바로 자신을 죽이는 운명인 것이지. 그 운명을 만들기 위해 신은 스스로 발목을 잘라 그곳에 의지를 불어넣어 세상으로 던졌소. 그 후 신이 전지를 택했을 때 또 다른 운명이 태어났지. 세상을 망하게 할 그 운명 말이오.”


사제가 눈을 부릅떴다. 귀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는 듯 이어폰을 손으로 잡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운명에 갇힌 신이 울고 있는 소리가 이제야 들리는 모양이로군. 신이 강림한 이유를 알겠소? 그는 자신이 던진 발목에 의해 살해되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것이지. 지긋지긋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이오.”


소리에 견디다 못한 사제가 이어폰을 벗어던졌지만 소리는 이어폰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는 신 그 자체에서 울려나오고 있었다. 더욱더 생생한 소리에 사제는 너무나도 괴로운 듯 귀를 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사휘는 배낭에서 러너의 발목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신의 잘려진 발목에 갔다댔다. 잘려진 부위에서 뼈와 살이 돋더니 붙어버렸다. 그것은 마치 한 몸이었던 듯 아무런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신의 몸에서 러너가 불타오를 때처럼 혈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신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몸을 덜덜 떨어댔다. 울려나오는 소리가 더욱 심해졌다. 결국 몸에 불이 붙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신은 죽었다. 과연 운명은 사라졌을까? 뭔가 소리가 나서 살펴보니 불타오르던 신이 바닥에 툭하고 떨어지고 십자가만이 신이 있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yzomb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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