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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김 진사네 셋째 딸

2009.07.31 23:5107.31

앞에 있는 술잔을 벌컥 들이마시고 한숨을 쉬었다. 막내가 걱정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과학기술은 최첨단으로 발달해서 사람의 감정까지 가지고 노는데 결혼에 관련된 일들은 구식으로 치닫는지 모르겠다. 나, 김진사는 요즘 사회상을 한탄하면서 자주 가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주인인 정 마담과 잡담했다. 정 마담은 끈적끈적한 말투로 “진사 씨, 진사 씨느은.”라고 내 이름을 불러대곤 했다.

내일 오후에야 거래한다는 사람이 오기로 했으니 진탕마시고 그때까지만 깨면 될 것이다.

+++

“제길, 개똥같아서 못해먹겠네요. 알아서 하세요. 알아서 하시라구요.” 이철호가 말했다. 젊은 나이에도 반쯤은 대머리에다가 하도 술을 마셔대 똥배가 디룩디룩 나온 이 남자가 나는 필요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나는 말했다.

“웃기는 소리 집어치우시구요. 제가 왜 당신이랑 거래를 해야겠습니까? 그런 대접까지 받아가면서.”

“미안해! 미안하게 됐어. 내 딸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래.”

“됐습니다. 자알 알아서 하세요. 잘난 딸내미랑 같이요. 따님 눈에 뚱보 돼지로 보이는 저는 가야겠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밖으로 나갔다. 딸애의 말실수에 단단히 삐친 게 확실했다. 잘 풀려가던 일이 이렇게 되자 걱정이 앞섰다. 잠시 후 그의 비싼 외제차가  멀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빠, 어떻게 됐어?” 딸이 말했다. 아직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셋째이자 막내딸아이였다. 딸아이는 중간에 올라간 후로 내가 그와 마저 대화하는 동안 줄곧 이층에 있었다. 아마 계단 층계쯤에서 우리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었으리라.

“알고 있잖아.”나는 말했다. 괜히 가시 돋친 말로 딸을 나무라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왠지 내가 처량한 개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비는 오는데 주인은 안 오고 털은 다 젖어가며 혼자 허공에 짖는 그런 개새끼. 사람들은 골목을 지나다니면서 그런 버려진 개들에게 욕을 한다. 말은 안 해도 내 딸은 지금 나한테 욕을 할 것이다. 못난 놈의 아빠 같으니라고. 자기가 책임져준다고 해놓고는 자신한테 화풀이한다고.

하지만 내 책임만은 아니었다. 나는 할 만큼은 다 했다. 이번에는 셋째가 잘못한 점도 있다. 그렇다고 딸을 욕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인데 마지막까지 제대로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어쨌든 내가 아빠니 내 책임이다.

“아빠 우리 이제 다시 해야 되는 거야? 또 다른 사람한테?”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언니들은 금방 끝났었잖아.”

“들어가서 공부나 해.”나는 구두를 신으면서 말했다. 두 손으로 힘을 꽉 주어가며 끈을 묶었다. 이놈의 구두는 이렇게 꽉 묶지 않으면 잘 풀러져서 문제였다. 구두엔 구두쇠라 마냥 내버려두고 있었다.

“아빠 어디가는거야?”나는 딸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현관을 나섰다.

“집에 있어. 아빠 금방 올게.”

갈 곳들이 있었다. 내 화가 향해야 하는 방향은 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

“아니, 진사 씨. 그래, 어째 요새 일 처리가 그런담?”마담이 말했다. 곰방대로 담배연기를 풀풀 풍겨대고 있었다. 나이에 안 어울리는 화장과 옷차림을 하고 가게를 지키곤 한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다시 바로 잡을 거니까 걱정 마쇼. 주문했던 물건이나 건네주시오.”

“이참에 이사장은 그만 두고 다른 사람 찾아보는 건 어때?”

“어서 넘겨주기나 하쇼.”내 말에 마담은 표정을 찡그렸다. 술병들이 있는 수납장을 어떻게 만지더니 나무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물건 숨기던 공간이 나왔다. 혹시 몰라 이런 일이 생길까봐 미리 부탁해둔 물건이었다. 지금까지는 이런 물건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다.

“여깄습니다 김사장님.”마담은 한껏 과장된 제스처와 목소리로 말하면서 물건을 건넸다. 대금을 치룬 다음 나는 준비해왔던 가방에 물건을 받아 넣었다.

“실력 많이 죽었어 김사장도. 요녀석의 도움까지 빌리다니 말야. 첫째랑 둘째는 물론 조카애들까지 김사장이 다 커버해주지 않았었나?”가게를 나가려던 나를 보면서 정 마담은 말했다. 그녀는 날 보며 빙긋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 내 막내딸은 아직 어려.”

“풋, 어리다고? 몸이랑 얼굴은 그런 거 같지 않던데?”

정마담은 내 셋째애가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거였다. 나는 그냥 대답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뒤로 정마담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요! 그리고 그거 가끔 작동 안 될 때도 있어!”

+++

“김사장? 볼 일 끝났을텐데. 여긴 왠일이십니까.”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나를 보며 뚱뚱한 대머리의 이철호가 말했다.

나는 주위를 뺑 둘러보았다. 사무실에는 다른 직원들이 다 퇴근한 것 같았다. 아니 퇴근이든 아니든 어쨌든 지금 없다는 게 중요했다. 이사장 혼자 검은색 가죽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때마다 끼익끼익 하는 소리가 났다.

“일? 일 없수다.”나는 말했다. 이철호 앞에 놓여있는 책상에 가져왔던 가방을 올려놨다. 눈 앞에 있는 이철호를 뻔히 쳐다봤다. “일은 없는데 일 만들고는 싶군. 이사장, 아까 했던 얘기 계속 해볼까?”

“지금 누구 앞에서 협박하는 거요? 나한테 이러다간 신상에 안 좋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자, 기회를 주겠소. 아까 낮에 했던 말 취소할 거요, 고집할 거요?”

“미친 새끼. 돌아도 단단히 돌았군.”나는 이철호의 말을 듣고 올려놓았던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오.”나는 물건을 꺼내들었다. 은색 광택이 번쩍였다. 이 물건 한 방이면 녀석은 골로 간다.

“협박하는 건가 김사장? 쏠 테면 쏴보라지."

나는 내 손에 쥔 물건을 쳐다봤다. 듣기론 마취총 같은 물건이었다. 쏘면 맞는 사람은 잠깐 정신을 잃고, 그 다음에 약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가리기 위한 검은 색 천도 준비해왔다.

“마지막 기회요.”나는 이철호의 이마를 겨냥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거 정마담한테 구한 거지?”이철호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쓰는 건지는 알고 가져왔나? 말만 듣고 구해달라고 부탁한 거잖아.”

“듣기론 다른 사람들은 잘 된다더군.”

“누가? 정마담이 그러던가?”

“그래, 정마담이 그랬지. 이거 한 방이면 이사장 당신도 한 방에 끝난다고. 방아쇠 당기면 이철호 사장은 날 보고 아버님이라고 말하면서 무릎 꿇는 거지.”

“보나마나 정마담이 구해준거면 엉터리 물건일 거야.”

“정말 그런가 확인해보면 되겠군.” 나는 그 총을 좀 더 가까이 갔다 대었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이철호는 몸으로 의자를 뒤쪽으로 밀면서 피했다.

“잠깐, 잠깐! 다시 생각해보라고. 당신이라면 그런 거에 당하고 싶겠어? 남은 인생이 걸렸는데.”

“말했잖아. 내 딸은 아직 철부지라고.”

“김사장,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라구요. 남자가 돼서 날보고 모욕한 여자에게 알아서 기어들어가라고? 그렇게 자존심 없이는 굴 수 없지.”

“원래 나하고 거래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자네가 더 관심을 보였던 것 같은데, 하루아침에 그렇게 맘을 싹 바꿔?”

“그야, 알다시피 말로만 들었을 때랑 실제로 만나봤을 때랑 다른 거 아닙니까! 김사장 말만 들었을 때는 나도 좋았지!”

총과 상황 앞에서 이철호의 목소리는 점점 애원조로 바뀌어갔다. 처음에 내가 사무실에 쳐들어왔을 때 보여주던 당당했던 태도도 죽어가고 있었다.

“뭐가 달라?”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뭐라고?”

“처음에 거래 조건이 어떻게 됐는지 기억하냐구요.” 이철호가 묻자 나는 계속 해보라는 듯 고갯짓했다.

“나도 김사장님 맘에 들어서 먼저 연락한 거였습니다. 거래할 때 손에 든 그 망할 놈의 물건 안 쓰는 정직한 사람으로 유명했으니까!” 이철호의 말이 맞긴 했다. 감정조작은 불법이었다.  

“그랬지. 하지만 이사장 당신이 좀 힘들게 만들더군. 물론 내 셋째애가 많이 어리고 철이 없어서 처음부터 힘들 거라 생각은 했었어. 게다가.”

“게다가?”

“게다가 셋째애만 성공 시키면 난 이제 이런 일에서 해방이야. 끝이라고. 이젠 이 거래도 지쳤어.”
“지쳤다구요? 그래서 거래를 안 하고 불법으로 딸을 시집보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내 손에 든 그 물건을 흔들면서 고개를 까딱였다.

“김진사 사장, 당신은 처음에 셋째 딸이 착하고, 예쁘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서 일부러 지참금을 낮게 불러도 괜찮다고 계약한 거잖아요. 김진사 당신은 날 속인 겁니다.”

“원래 자기 딸은 다 착하고 예쁘게 보이지 않나?”

내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이철호는 대답했다. “참 착하고 예쁘더군요. 보자마자 대뜸 나보고 대머리 돼지라질 않나, 생긴 건 또 어떻습니까. 풍만하고 곰보 많은 얼굴이 미인이더군요.”

“자, 정말 마지막 기회야. 거래를 할 텐가, 말 텐가?”

“거래를 한다고 하면 나는 맨 정신으로 푼돈만 받고 문제 많은 당신 김진사네 셋째 딸과 결혼하는 거고, 안한다고 하면 그 <사랑유발총>을 맞고서 헤롱헤롱거릴 때 당신 사위가 돼서 나중에 정신 차리고 그 푼돈이나마 못받은 걸 후회하는 거군요.”

“그래. 자기 처지도 잘 알면서 말이 길군.”

“내 대답은 이겁니다.”이철호는 말을 마치고 나서 갑자기 자기 앞에 있던 테이블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내가 넘어지는 테이블을 피하는 동안 이철호는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뒤쫓으려고 했으나 구두끈이 풀리는 바람에 넘어졌다. 바닥에 구르면서 <사랑유발총>의 방아쇠가 눌리고 말았다. 나는 내 총에 맞았다. 나는 쓰러지면서 눈을 감았다. 바닥에 누운 나는 생각했다. 이제 잠시 후 나는 정신을 잃을 것이고, 그 다음 눈을 떠서 처음 보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비록 며칠 안가는 효력이지만 과학기술자들이 만들어낸 물건 따위에 인간의 감정이 오락가락해지다니! 누굴 보게 될까, 이철호? 그렇다면 내가 저 이철호를 사랑하게 된단 말인가? 그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의아했다. 내가 들은 바로는 나는 벌써 정신을 잃었어야 됐는데, 멀쩡했다.

“어떻게 된 거요?”내가 잠깐 비틀거릴 뿐 정상적으로 일어서자 이철호는 놀라서 말했다. 아마 도망치다가 발포되는 소리를 듣고 되돌아온 것 같았다.

“설마 나를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일은 없을 거요.”

이철호는 뭔가를 알아차린 듯 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불량품이군요?”

“그래, 불량품이군.”나는 손에 쥔 <사랑유발총>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이철호의 얼굴을 쳐다봤다. 배불뚝이에 뻐꺼지 대머리. 잠시 동안이나마 저 이철호를 보고 사랑하게 될까봐 걱정했던 내가 한심스러웠다.  

“괜찮소.”나는 다시 도망치려던 이철호를 보며 다시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내 딸애랑 결혼하라고 강요하지 않겠네.”

“생각을 갑자기 바꾸셨소? 의아스럽군요.”

이철호에게 나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나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딸애보고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자를 물어오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지 언니들처럼 죄다 아빠한테 결혼 거래를 맡기지 말고 말이다. 티브이 보면 그런 얘기들 가끔 나오지 않던가? 요즘이 아무리 아버지가 책임지고 지참금까지 손에 쥐어다가 시집보내는 나날이라도 본인들이 사랑하는 마음에 결혼하는 몇몇 사람들도 있다고. 지참금 같은 돈이나 <사랑유발총> 같은 기술 따위가 아닌 진짜 사랑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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