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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고양이] 콘월의 고양이

2008.04.01 19:2104.01

하루 늦었습니다만, 편집장님의 구두 허락을 받았으니 어찌 되겠지 하고 올려봅니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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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월의 고양이




고양이가 울고 있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잠 기운 가득한 목에 최대한 힘을 내어 소리쳐봤지만 울음 소리는 여전하다.

“닥쳐, 빅팻! 잠을 잘 수가 없잖아!”

짜증과 함께 토해낸 내 외침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이제 와서 보니 고양이 울음 소리는 한 마리가 아니다. 게다가 시선이 닿은 곳에는 낯선 천장, 그 아래로 낯선 벽. 낯선 가구들과 낯선 문.

멍하니 보고 있는 동안에 점점 의식이 돌아왔다. 그렇지. 여기는 어젯밤 늦게 도착한 외숙부의 저택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끔찍했던 어제의 기억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아니, 정확히는 그제부터의 일이다.

그제 밤, 아스날과 숙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티켓을 구하지 못한 친구들이 나와 룸메이트 스티브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TV 생중계로 경기를 보는 도중에 우리는 이미 꼭지가 돌 정도로 취해 있었고, 역전 골과 함께 아스날의 승리가 결정되자 우리는 모두 거리로 뛰쳐나갔다. 예이, 반 페르시! 예이!

나에게는 전혀 기억이 없지만, 스티브의 증언에 따르면 사고를 친 것은 나였다고 한다. 맥주에 취하고 아스날의 승리에 취할 대로 취한 내가 달려보자며 낡아빠진 캠리를 몰고 나왔다는 거다. 솔직히 말해 음주운전 시도가 그게 처음은 아니었으니 변명의 여지는 없다. 아무리 사람 많은 런던 시내라고 해도 밤 늦은 시간이었고, 조금 전에 축구 중계가 있었던 날이다. 거리에는 차도 사람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다행이지 정말.

내가 운전하는 캠리는 비틀비틀 굴러가면서 도로 변에 주차되어 있던 새끈한 밴틀리 운전석 옆을 쭈욱 긁었을 뿐만 아니라 사이드 미러 마저 부러뜨렸다고 한다. 게다가 그 밴틀리의 반대편, 즉 조수석 쪽에는 함께 클럽에서 나온 금발 미녀를 위해 밴틀리의 문을 열어주고 있던 차 주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거 진짜 웃겼어. 나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 앞으로 5년 간은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스티브는 그렇게 들려주며 웃어댔지만 난 웃을 수 없었다. 그 밴틀리의 차 주인이 워싱턴 맥핀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도저히.

맥핀은 우리 대학 조정부의 에이스이자 주장이었다. 놈은 저학년 조정부원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조정 연습용 호수에 빠뜨리는 것을 즐기는 취미가 있었다. 그에게는 한가지 철칙이 있는데, 조정부가 아닌 자를 신성한 조정 연습용 호숫물에 던지는 일이 결코 없다는 거였다. 대신 화장실로 끌고 가서 변기에 머리를 처박는 정도로 참아준다던가.

그가 보는 앞에서 새 차에 멋진 흔적을 남겨줬으니 변기 물에 머리를 처박히는 정도로 끝날 수 있을까? 맥핀과는 신장, 체중, 어깨 넓이, 허벅지와 팔 두께 등 무엇 하나로도 이길 수 없다. 아. 배 둘레는 내가 더 두꺼울 지도 모른다. 싸움에는 아무 도움이 안되겠지만.

숙취로 멍한 머리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멍청히 서 있는 나에게 스티브는 딱 한 마디를 던졌다. 도망쳐.

더할 나위 없는 그 조언에 나는 즉시 움직였다. 손에 닿는 아무 가방에나 대충 옷가지를 잡히는 대로 쑤셔 넣고 스티브가 챙겨 건네준 지갑을 움켜쥐고 뛰쳐나갔다. 지난 밤에 몰았던 증거품 1호 캠리를 타고 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짓이었으니 지하철을 이용한 도주를 시도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혹시라도 맥핀이나 혹은 그의 후배들이 잠복해있지 않나 사방을 경계하며 낡은 아파트에 도착했다. 2층을 올려다보자 마침 그녀가 창가의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길 기다려 손을 흔들자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창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상황에서 재빨리 도망치는 게 나았을 지도 모른다. 멍하니 2층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곧 그녀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었다. 험악한 얼굴. 곧 그녀의 팔이 창문에서 쑥 튀어나오고, 내 머리를 겨냥한 하드커버 서적이 날아왔다. 꼴사납게 다리가 뒤틀리면서 겨우 피해냈나 싶었더니 두 번째, 세 번째의 흉기가 날아든다. 두께 10센티의 전공 서적, 5시간이나 줄을 서서 겨우 구입해 선물했던 록 뮤직 시디 하드케이스.

11개월째 사귀고 있는 연인 멜리사는 지난 주에 내가 클럽에서 만난 여자애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젠장. 어느 녀석이 이 일을 퍼뜨린 거야? 범인은 지난 밤 함께 아스날-맨유전을 본 놈들 중 하나일 텐데!

사과를 하려 해도 멜리사는 물건 던지는 일을 멈추질 않았다. 책과 시디, DVD가 끝나자 다음은 옷가지. 이러다 함께 런던 교외에 놀러 나갔다가 차고 세일에서 발견한 소파까지 집어 던질 기세여서 나는 달아나는 수 밖에 없었다. 미안, 멜리사. 이번 일이 끝나면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할 테니까. 지난 번에도 그랬듯이 넌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해.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배가 지독하게 고팠다. 생각해보면 도망칠 곳을 찾다 이곳 콘월의 외숙부 저택을 떠올리고 탔던 기차에서 사먹은 감자 칩과 맥주가 어제 먹은 것의 전부다. 뭔가 이 집에 먹을 게 있으려나.

청바지에 아스날 서포터즈 티셔츠를 걸치고 복도로 나섰다. 발을 떼놓을 때마다 끼익 소리가 나는 바닥. 바람이 불 때마다 웅웅 소리를 내는 건물. 네오 조지안 양식으로 지어진 이 저택은 아마 100년까지는 안되어도 80년은 훨씬 넘은 늙다리 건물이다. 저택 전체에 퀴퀴한 냄새가 배어있다. 이런 저택에서 외숙부는 10년 가까이 혼자 살았던 건가.

겨우 찾아낸 주방은 싸늘하고 텅 비어 있었지만 조리대 위에는 몇 개의 납작한 캔이 올려져 있었다. 참치? 덥석 쥐고 보니 캔 옆에는 하얗고 인형처럼 생긴 고양이 사진이 찍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 떼가 울고 가릉거리는 소리는 아주 가까이 들렸다. 소리를 따라 주방 구석에 나 있는 쪽문을 열었다. 저택 뒤쪽의 작은 빈 터에 그야말로 고양이 떼가 몰려 있었다. 고양이들은 몇 마리씩 몰려 땅에 놓은 먹이 그릇에 머리를 박고 울거나 목을 울리고 있었다.

“누구시죠?”

불쑥 그 말이 들려올 때까지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쪽문 옆 벽에 한 여자가 서서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콘월이라고는 해도 휴양지와는 거리가 멀고, 런던과는 몇 십 년 정도의 시간 차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골 구석에 있는 이 저택에서 만난 첫 여성. 이런 데서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가급적 젊고 아름다운 여자면 좋겠지만, 눈 앞의 여인은 작은 키에 다부져 보이는 어깨, 햇빛에 그을린 얼굴을 가진 중년 여인이었다. 더구나 한 손에는 나를 견제하기 위한 무기인 듯, 부지깽이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저, 저는 케네스 스튜어트입니다. 어…… 그러니까 이 저택에 사시던 분이 제 외숙부님 되시죠.”

중년 부인은 아직 경계를 풀지 않고 나를 위 아래로 살펴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어제 흘린 맥주가 말라붙은 티셔츠의 얼룩에 한참 머물더니 다시 얼굴을 살폈다.

“캠버튼 저택의 전 주인님과는 별로 닮지 않았군요, 스튜어트 씨.”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케니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왜 사과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중얼거리자 중년 부인은 부지깽이를 내려놓고 어깨를 폈다.

“나는 메리 허드슨이에요. 캠버튼 저택의 관리인 일도 하고 있죠. 매일 아침 고양이들 밥을 주는 일이 전부지만 말이에요.”

허드슨 부인의 시선을 따라 고양이들을 보았다. 이미 식사를 마치고 만족스럽게 세수를 하는 녀석도 있고, 싸움인지 장난인지 부둥켜 안고 구르는 녀석들도 있고, 끅끅 거리면서도 남은 음식을 싹싹 핥는 녀석도 있고…… 어림잡아 열 서너 마리는 되어 보였다.

“저, 허드슨 부인. 변호사에게 듣기로 고양이는 한 마리인 줄 알았는데요.”

“캠버튼 씨가 기르던 고양이는 물론 한 마리죠. 그 아이가 여기서 밥을 먹다 보니 얻어먹으려고 오는 녀석들이 늘어나서 결국은 이렇게 되었어요. 캠버튼 씨도 고양이 먹이 정도를 아까워해선 안 된다고 하셨죠.”

“에…… 어느 녀석이 외숙부께서 기르던 고양이죠?”

허드슨 부인이 고양이 하나를 가리켰다. 머리와 등이 오렌지색이고 턱과 가슴, 발은 하얀색이었던 듯한 꼬질꼬질한 고양이가 나름 열심히 세수를 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갑자기 행동을 멈추고 우리를 빤히 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똑바로 쏘아보는 것 같았다. 저 녀석이 그 고양이인가…… 나도 지기 싫어서 마주 노려봐주었다.





고양이들은 식사를 마치자 다들 어디론가 어슬렁어슬렁 사라져버렸다. 허드슨 부인도 저택의 식품 창고를 뒤져보면 유통기한이 남아있는 통조림이 있을 거라며 돌아갔다. 냉정하기는. 시골 부인이 끓여주는 스튜 같은 걸 상상해 본 자신이 바보 같았다.

식품 창고에서 통조림을 몇 개 따서 식사를 하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이 집에는 TV가 있을까? 낡고 오래된 흑백 TV여도 상관 없으니 제발. 내일 저녁 아스날의 경기를 봐야 하니 제발! 나는 저택을 뒤지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마저 런던에 두고 온 처지이니, 나에게는 TV나 혹은 적어도 라디오만이라도 찾아내야 할 사명이 있었다. 어차피 이 저택은 내 소유가 될 거였다. 그러나 좀 뒤지고 다닌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수는 없겠지.

촌스러운 양복에 콘월 억양이 심한 변호사가 찾아온 것은 9개월 전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외숙부인 에드워드 캠버튼이 죽었으며 유언장에 따라 그 저택과 주변 토지의 상속자로 내가 지명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상속에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저택에서 기르고 있는 고양이 엘리가 죽을 때까지 절대 저택을 매매하거나 철거, 증축 및 보수를 하지 말 것.

터무니없는 조건에 당황하는 내게 변호사는 나름의 위로를 해 주었다. 캠버튼 저택의 고양이는 7살이나 되며, 상속 조건이 해제될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라는 얘기였다. 내가 이 저택에 도착한 지금에 와서는 그 고양이- 오렌지색과 하얀 색 털을 가진 꼬질꼬질한 엘리라는 녀석은 이제 8살쯤 되었을 거였다.

그런 친척이 있다는 것조차 평소에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 가족과 왕래가 없었던 외숙부. 외숙부가 길렀다는 고양이. 그리고 고양이의 목숨에 달려 있는 나의 상속물. 당장 처분할 수도 없는 물건인데다 런던에서는 머나먼 콘월에 있는 이 저택은 그 동안 내 기억에서 밀려나 있었다. 어딘가 한 군데쯤 부러질 지도 모르는 사고를 치고, 애인에게는 바람 피운 일이 발각되고, 부모님은 재작년에 아버지의 발령을 따라 중국으로 가버려서 도망칠 곳이 없었던 지금 이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저택을 뒤지다 보니 겉보기보다 제법 넓고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지어질 무렵에는 터무니없이 웅장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시골 구석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건물로 보였겠지. 아니면 이 정도는 되어야 당시 어머니의 가문이 가지고 있던 부에 어울릴 정도였을까?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2008년이 아닌가? 이 저택에는 TV는 물론이고 라디오 조차도 없었다. 대체 외숙부는 여기서 어떻게 살았던 거지? 인터넷도 가능할 리가 없어 보였고, 물론 컴퓨터 조차도 없었다. 내일 저녁의 아스날 전을 봐야 하는데 대체 어쩌지?

저택의 2층 구석방에는 아마도 다락으로 통하는 것 같은 계단과 밀어 올리는 문이 있었다. 그 계단 중앙에는 아까 본 이 저택 상속의 제약인 고양이가 길게 누워 있었다. 이름이 엘리였지?

“헤이, 엘리? 팔자 좋아 보이네.”

고양이는 반쯤 감은 눈으로 나를 흘끔 보더니 보란 듯이 외면해버렸다. 대학 근처의 낡은 아파트에서 2년째 함께 살고 있는 룸메이트 스티브는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덕택에 고양이의 호감을 얻는 법 정도는 알고 있다. 스티브의 고양이 빅팻은 체중이 9.1킬로그램이나 나가며 몸을 움직이는 것 조차 버거워 할 정도로 살찐데다 둔한 녀석이지만, 눈 앞에 있는 외숙부의 고양이는 날렵한 몸을 가지고 성질 깨나 있어 보인다는 점 정도가 다를까. 어쨌거나 고양이는 귀 뒤나 목 아래를 긁어주면 좋아한다. 그렇지? 이건 진리다.

“이리 와 보렴. 난 네 주인님의 조카야. 친하게 지내 보자.”

내민 손은 엘리의 머리에 닿지도 못하고 번개 같은 속도로 되돌아와야 했다. 이 건방진 고양이 녀석은 내 손이 다가오자 눈을 번뜩이며 할퀴려 한 거다. 한 대 쥐어 박아 줬으면 싶었지만 발톱이 너무 날카로워 보였다. 뭐 일단은 작전상 후퇴를 하는 수 밖에. 쳇. 건방진 녀석.



저택 탐험을 끝냈지만 수확은 없었다. 개중 현대적인 물건이라고 할 만한 것은 1986년에 생산된 타이프라이터 한 대와 주방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고장 난 1991년제 식기 세척기뿐이었다. 전화는 연결 되어 있는 것 같으니 내일 아스날의 경기 결과 정도는 스티브에게 전화해서 물어볼 수 있을까? 맥핀과 멜리사의 화가 얼마나 풀렸는지도 물어보고 말이야.

지칠 대로 지쳐 외숙부가 서재로 썼던 것으로 보이는 방의 커다란 소파에 앉아 서가를 훑어보았다. 빛 바랜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다. 현대 과학의 발자취, 생물학 개론, 영혼들이 남기는 메시지, 생물과 무생물, 세계를 지탱하는 물리의 법칙, 심령의 세계…… 기초 과학과 심령학과 고양이를 좋아하는 외숙부라? 책들의 조합이 우습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굳이 서가를 더 살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서재 한쪽 벽에는 벽난로가 있었다. 벽난로 위 쪽에는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다. 아마도 몇 십 년 전의 이 지역을 그린 듯한 그림이었다. 낯이 익었다. 그러고 보니 분명 나는 이 저택에 왔던 적이 있었다. 일곱 살이었던가 그랬을 거다.

어머니는 괴팍한 성격의 오빠를 무척 거북해했고, 아버지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외숙부를 싫어하고 있었다. 결혼 이후 어머니는 외숙부를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었고, 외숙부는 복수라도 하려는지 내가 다섯 살인가 되었던 해에 늦은 결혼식을 올리면서도 여동생을 부르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부모님과 함께 방문했던 그 날, 어머니가 차 안에서 불평을 했던 일이 기억났다.

별 일이야. 결혼식 때도 부르지 않았으면서 딸을 낳았다고 보러 오라니 말이야.

그때 이 집에는 분명 갓난 아이가 있었다. 요람에 누워 제대로 말도 못 하는 갓난쟁이 주제에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너무 귀여워 손을 잡아주려 했으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밀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키가 크고 뺨이 홀쭉할 정도로 깡마른 남자가 외숙부였다. 그는 갓난 아이…… 내 사촌이 되는 그 아이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면서도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고 하던가? 그 동안 나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어서 막연히 무의식 저편으로 던져버린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갓난 아이인 사촌의 이름은 스텔라였고, 그 아이를 낳은 외숙부의 부인은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산후열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가 한 적이 있었다. 스텔라를 바라보던 외숙부의 눈에 사랑만이 아니라 슬픔도 깃들어 있다는 느낌을 어린 나이에도 받았던 것 같다. 그때 그 사촌은 겨우 한살인가 그랬을 거였다. 그리고 어린 사촌 여동생은 7살에 죽었다고 했었지…… 외숙부가 부르지 않아 우리 중 누구도 그 장례식에 참가하지 못했었지만.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화를 냈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추워. 더듬어 이불을 찾았지만 없었다. 아. 외숙부의 서재에서 소파에 앉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들었구나. 잘린 기억을 이어 붙인 그 순간에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빛이 번쩍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둥글게 움츠렸다가 소리의 정체를 알아챘다. 서재의 먼지를 조금이라도 빼내 보려고 열어 두었던 창문의 커튼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요란한 빗소리와 함께. 낡아 삐걱거리는 창문을 밀어 닫는데 성공했을 때 내 청바지는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런 젠장.”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렇게나 추운데. 창 밖뿐 아니라 서재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저택을 뒤지고 지쳐서 깜빡 잠들었던 것이 제법 오래 잤던 모양이었다. 하긴 어제는 평소답지 않게 무리해서 몸을 움직이긴 했지. 정신적으로도 꽤 긴장했었고.

더듬더듬 서재 문 쪽으로 걸어가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 책상 위에 있던 테이블 등은 어떨까? 책상을 찾아 더듬더듬 걷다가 책상 모서리에 정강이 아래를 세게 부딪치고 말아 또 다시 욕설이 터졌다. 추워서 얼어붙은 몸에 젖은 청바지 차림으로 나무에 부딪친 충격에 눈물이 찔끔 나올 뻔 했다. 게다가 테이블 등 역시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정전인가…….”

젖은 청바지 덕택에 몸은 갈수록 추워졌다. 봄이 머지 않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더구나 콘월은 런던보다 남쪽인 주제에! 지난 밤 잠들었던 침실에는 분명 이불이 있지만 그 곳까지 다시 어딘가 부딪치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생각 없이 책상 위를 더듬고 있는 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작은 종이 상자? 더듬거리며 손에 잡힌 상자의 정체를 살피려 하는데 때 마침 운 좋게 번개가 다시 창 밖을 갈랐다. 번갯불에 잠시 본 것뿐이지만 상자는 분명 성냥이었다. 상자를 밀어 열고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자 굵고 긴 성냥이 몇 개 들어있는 것이 만져졌다.

“벽난로!”

빙고! 스스로의 대답에 후하게 만점을 주었다. 이건 벽난로에 불을 지피기 위한 성냥이었다. 벽난로 옆에는 미처 치우지 못했던 것인지 몇 개의 장작이 놓여 있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불을 피우면 어느 정도 밝아질 거고 몸도 데울 수 있고 청바지도 말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둠 속을 더듬어 벽난로 가까이 기어가 어릴 적 보이스카웃 캠프에서 배웠던 대로 장작을 쌓았다. 작은 가지 같은 것은 없으니 장작 밑에는 종이를 넣어야 할 것 같았다. 뭐 어차피 이 방에 종이는 널렸으니까. 책 몇 페이지 없어진다고 해서 이 저택의 상속 조건에 위배되는 건 아니겠지?

가장 벽난로에 가까운 서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책 한 권을 뽑았다. 잠깐 책에 사과 인사를 하고 아무데나 펼쳐 몇 페이지를 찢었다.

다행히도 불이 붙는 성냥과 아직까지 제대로 내 머리에 남아있는 보이스카웃 캠프에서 배운 지식 덕택에 벽난로에는 불이 피어 올랐다. 청바지를 벗어 벽난로 앞에 펼쳐두고 팬티 바람으로 앉아 불을 쬐고 있노라니 이제서야 살 것 같았다.

대체 외숙부는 무슨 생각으로 나를 상속인으로 결정한 걸까. 이런 구세대의 유물 같은 저택 따위 나에게는 아무 짝에도 소용 없는데. 아니, 저택과 인근의 토지라고 했지. 처분하면 돈이 좀 되려나? 휴양지와도 멀리 떨어진 이런 시골의 땅과 저택을 살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벽난로에 불을 붙이기 위해 가져온 책을 배게 삼아 베고 누워 생각에 잠겼다. 이 저택과 토지를 헐값에라도 처분할 수 있으면…… 적어도 작년에 스티브와 함께 열었던 인터넷 쇼핑몰에서 난 손해를 만회할 정도는 되겠지. 그리고 뭐 남는 돈이 있으면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함께 술이라도 진탕 마시지 뭐. 아니, 이제는 시동도 종종 꺼지곤 하는 낡은 캠리를 버리고 새 차를 살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맥핀이 부모로부터 선물 받았다는 밴틀리 정도는 안되겠지만.

상상이 멈췄다. 멀리서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렸다. 저택 어딘가의 어둠 속에서 고양이 엘리가 울고 있었다. 뭐가 어쨌든 저 고양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저택과 토지의 처분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허드슨 부인은 콩 수프 통조림을 데우고 있는 동안에 찾아왔다. 그녀는 무뚝뚝하게 인사를 하고 주방 구석의 선반에서 고양이 사료와 통조림을 꺼내었다. 허드슨 부인은 가져온 음식 찌꺼기에 캣푸드를 섞어 고양이들의 밥 그릇에 나누어 담고,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고양이들이 우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수프 냄비를 내려 보기에도 꽤 오래 묵은 듯 보이는 접시에 옮겨 담고 허드슨 부인을 따라 뒷마당으로 나갔다.

지난 밤 폭우로 아직 뒷마당은 젖어 있었고, 고양이 엘리는 젖은 배와 발의 털이 뭉쳐 더욱 꼬질꼬질해 보였다. 그래도 그 고양이는 뒷마당에 밥을 얻으러 온 동네 고양이들 사이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엘리는 놓여진 여러 개의 접시 중에서 신중하게 하나를 선택했고, 엘리가 먹기 시작한 후에야 다른 고양이들이 각자 흩어져 아침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케니 씨는 여기엔 며칠이나 묵으실 건가요?”

허드슨 부인이 불쑥 물었다. 딱히 배척하는 어조는 아니었지만 도망자 신세인 나로서는 조금 찔끔 하는 기분이었다. 화제를 돌리는 게 나을까?

“글쎄요…… 저, 외숙부께서는 이 저택뿐만 아니라 부근의 토지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그게 어느 정도나 되나요?”

“이 마을의 절반 정도 되지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투로 허드슨 부인이 대답했다. 그녀는 팔을 뻗어 저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쪽의 야트막한 언덕을 가리켰다.

“저 쪽 언덕에 있는 캠버튼 씨의 무덤부터 마을 어귀까지 있는 밭은 전부 캠버튼 가문의 것이에요. 저희 집이 농사를 짓고 있는 밭도 물론이고요. 고 에드워드 캠버튼 씨의 유언에 따라 그 밭은 케니 씨에게 유산 상속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저희 것이 됩니다만.”

“헤?”

그저, 그래요? 라는 의미로 낸 소리였을 뿐인데, 허드슨 부인은 무슨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26년간 캠버튼 씨의 저택에서 요리사로 일하셨어요. 그 대가라고 할까요? 그리고 상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제가 저택을 관리하고 고양이들의 먹이를 주는 일을 하는 조건으로 밭의 임대료도 면제받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임대료? 그러면 토지의 임대료도 지금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의미인가? 게다가 생각보다 토지는 제법 넓어 보였다. 우와, 어머니네 가문은 시골의 알부자 정도는 되었다는 거네. 어쨌건 유산 상속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지만…….

생각해보면 외숙부의 유언을 전하기 위해 변호사가 찾아왔을 때 유언장 사본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런던의 아파트 어딘가에 처박혀 있겠지. 그걸 꼼꼼히 읽어보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어쨌건 변호사가 와서 유언을 전했을 때, 당장 손에 넣을 수 있는 돈이 아니라는 점에서 내 흥미는 급속도로 식었었다. 게다가 변호사가 빨리 좀 돌아가주지 않나 하고 안절부절하고 있었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클럽에 가기로 한 약속이거나 축구 경기를 보려는 것이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허드슨 부인이 돌아가고 난 후에 먹는 통조림 콩 수프는 식어있었고 맛도 형편없었다. 어서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 저택을 바로 처분할 수만 있다면 맥핀에게 가서 밴틀리의 수리비를 내고 술도 한 번 거하게 낼 테니 없던 일로 해달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 아아, 그 고양이 녀석만 없다면! 사고라도 나서 죽어주지 않으려나?

어제 고양이 녀석이 막고 있어 가보지 못했던 다락방이 떠올랐다. 어디, 지금도 거기 누워 있으려나? 그러면 발로 걷어차서라도 내쫓지 뭐. 그런 생각으로 용기 팽배해서 다락방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으나 고양이 엘리는 그 곳에 없었다.

“그것 참. 얼굴 보기도 힘든 녀석이네. 이래서는 어디서 죽어도 알기 힘들겠어.”

낡아빠진 저택의 다른 어디보다 더욱 심한 삐걱 소리를 내는 나무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가 머리 위의 나무 문을 밀어보았다.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엄청난 먼지가 쏟아질 거라는 걸. 한참 동안 기침을 쿨럭거리고 눈물까지 줄줄 쏟은 후에 보니 나는 회색인간이 되어 있었다. 이런 젠장. 갈아입을 옷도 몇 벌 안 가지고 왔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어차피 먼지를 덮어 쓴 마당이니 한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다른 손으로 나무 문을 힘껏 밀어 젖혔다. 다시 한 번 먼지의 세례가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대체 몇 년이나 청소를 안 한 걸까. 결국 숨을 참는데도 한계가 있어 또 다시 먼지를 들이마시고 폐가 입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기침을 해야 했다.

이러면서까지 다락을 봐야 하나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어쨌든 나무 문은 열렸다. 포기할 이유도 없어졌다. 나무 계단을 두 단 더 올라가 다락 안을 둘러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란한 웃음 때문에 다시 먼지가 일었고 기침을 하면서도 나는 웃었다.

콘월에서도 시골 구석, 구세대의 유물 같은 낡아빠진 저택 다락에서 이런 걸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꽤 널찍한 다락방의 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은, 멜리사를 따라 구경갔던 컬트 영화제에서 본 몇 십 년 전에 제작된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기계였다. 정체불명의 유리관이 잔뜩 꽂혀 있는 촌스럽고 투박한 기계 덩어리. 외숙부의 서가에 꽂혀 있던 빛 바랜 책들이 떠올라 계속해서 웃음이 터졌고 웃는 만큼 기침을 해야 했다. 저 기계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건 웃을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외숙부는 대체 이런 곳에서 무슨 실험을 하고 있던 거야?





통조림 저녁식사를 하며 스티브에게 걸어 본 전화는 실패였다. 아니 절반의 성공일까? 스티브는 내 전화를 받자 잠시 머뭇거리더니 딱 한 마디를 하고 내려놓았다.

“전화 잘 못 거셨는데요.”

스티브의 목소리 너머로 누군가가 고함을 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자식 어디 있냐고 묻잖아! 목소리로 추측하건대, 꽤나 덩치가 있고 힘 좀 쓰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마도 맥핀의 조정부 후배겠지. 그러니까 맥핀은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으며, 자신의 차를 긁고 사이드 미러를 부러뜨린 것이 같은 대학의 한 학년 후배인 나라는 것을 알아낸 거다. 게다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도 알아 냈고. 미안해, 스티브. 너도 오늘 아스날의 경기를 보기는 글렀구나.

마을 쪽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오늘은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TV는 없고 인터넷도 없다. 문명이 존재하는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냥 런던으로 돌아가 맥핀에게 몇 대 맞고 화장실 변기에 처박힌 후, 차 수리비는 몇 달만 기다려주면 갚도록 하겠다고 싹싹 빌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냥 마을에 내려가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리고 제발 축구 경기 좀 보게 해달라고 빌어볼까?

너무 낙담한 탓에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는데도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세 번째의 비명 소리에서야 겨우 놀라움이라는 감정이 돌아왔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여자의 비명…… 아니, 이건 고양이의 비명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소리를 쫓아 저택의 정문을 열었을 때 비명 소리는 이제 거의 흐느끼는 소리에 가까울 정도였다. 정원은 어두웠고, 나는 귀에 의존해서 겨우 소리의 진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저택 정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의 가장자리에 축 늘어진 엘리의 모습이 보였다. 엘리의 몸은 공중에 떠있는 채로 허공을 움직여 불빛 쪽으로 나섰다. 맙소사, 나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지저분한 갈색 개의 입에 엘리가 물려 있었다!

절대로 내가 하지 못할 일이다. 평소 같으면 절대로. 그런 생각에 놀라고 있는 내 이성을 두고, 몸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쌓인 맥핀에 대한 분노와 멜리사에 대한 미안함과 아스날의 경기를 보지 못한 울분과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 지 알 수 없는 스티브에 대한 걱정과 TV와 인터넷에 대한 그리움을 모두 오른 발 끝에 모아 갈색 개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이번에는 개가 끔찍한 비명을 지를 차례였다. 그제서야 이 커다란 개가 덤비면 어쩌지, 이런 데서 죽는 건가 하는 두려움이 스쳤다. 다행히도 개는 깨갱 깨갱 울부짖으며 엘리를 떨어뜨리고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개에게 조금이라도 전의가 있었다면 지금쯤 깽깽 울고 있는 건 나였을 테니까.

긴장이 풀리자 무릎에 힘이 빠졌고 몸이 휘청거렸다. 그제서야 엘리가 걱정되었다.

“엘리? ……임마, 너 괜찮아?”

저택 정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덕택에 오렌지색과 흰색 털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떨리는 손을 내밀긴 했지만 피투성이의 고양이에게 어떻게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힘없는 울음을 뱉던 엘리는 망설이고 있는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양이도 한숨을 쉬나?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그렇게 보였다. 엘리는 내 손을 뿌리치듯 흙 땅에 몸을 비비며 겨우 네 발로 일어 섰다. 그리고 분명히 의도적으로 나를 외면한 채 어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야, 임마! 엘리! 어딜 가는 거야?”

물론 손이 아니라 목소리라고 해서 저 건방진 고양이가 반응할 리도 없었다. 곧 엘리는 어둠에 감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쫓아가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 것도 아주 한 순간일 뿐이었다. 내가 왜? 저렇게 어두운데. 여긴 가로등이 제대로 놓여 있는 것도 아닌데. 쫓아가다가 나야말로 무슨 사고를 당할 지 모르잖아.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엘리가 어딘가에서 죽어도 상관 없다는 생각도 했다. 저건 정말 불의의 사고잖아? 게다가 나는 엘리를 구하려는 시도도 했어.





꺼림칙한 죄책감과 귀찮음, 어둠에 대한 공포, 그리고 맥핀과 멜리사와 스티브와 아스날에 대한 감정이 뒤섞여 복잡한 머리가 된 채 나는 외숙부의 서재에 도착했다. 아직은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고, 어젯밤처럼 다시 벽난로에 불이라도 피우고 따뜻한 기운을 느끼고 싶었다. 이 저택에는 쉽게 몸을 데워 줄 술 한 병 없었으니까.

남은 장작은 겨우 두 개. 날이 밝을 때 장작이 어디 있는지 좀 찾아봐 둘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벽난로에 장작을 올렸다. 그리고 벽난로 앞에 주저 앉아, 장작에 성냥 불을 옮겨 붙이기 위해 책을 집어 들었다. 벽난로 앞에 놓여있는 책은 어제 몇 장 뜯어냈던 그 것일 터였다. 아무데나 펼쳐 한 장 뜯어내고, 구겨서 장작 더미 아래 넣고 보니 뭔가 낯설었다. 구겨진 책장에 새겨진 글자는 인쇄된 것이 아니었다.

“어?”

입에서 흘러나온 멍청한 소리와 함께, 내 눈은 무릎 위에 올려진 책장으로 향했다. 아이쿠, 외숙부님. 죄송합니다. 외숙부님의 일기장 덕택에 조카는 폭우가 내리치는 어젯밤을 따뜻하게 보냈네요. 반쯤 장난스럽게 마음 속으로 사과를 하는데 손가락이 놓인 위치에 쓰여진 단어가 눈에 걸렸다. 엘리. ……고양이? 손가락을 치우자 가려졌던 단어와 문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아내가 딸을 출산했다. 아이의 이름은 아내의 이름과 내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스텔라 엘리너 캠버튼이라 붙이기로 했다.

외할머니의 이름이 엘리너. 그러면 외숙부의 아내…… 우리 가족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그녀의 이름은 스텔라라는 것이 된다. 혹시 고양이의 이름 엘리는 엘리너에서 따 온 건가.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고양이에게 붙이다니 너무한데.

어린 시절부터 프라이버시는 지켜주는 것이 옳다고 배웠다. 남의 일기장을 읽는 것은 신사적이지 못한 행동이라고도 배웠다. 그런데 알 게 뭐람. 이미 죽은 사람이고 여긴 문명 사회와는 거리가 먼 동네 같은데.
나는 일기를 몇 장 더 뜯어 벽난로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벽난로 앞에 엎드려 누워 일기장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외숙부는 매일 일기를 쓰는 성실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일기의 날짜는 며칠, 혹은 몇 달씩 건너 뛰며 그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순간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일기의 시작은 내 어머니, 즉 외숙부와 나이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이 런던에서 결혼하게 된 일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촌 집에서 머물며 공부를 하고 대학에 진학했고,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었다. 그러니 외숙부가 아이를 낳고 내 부모에게 연락을 하기 전까지, 외숙부와 어머니가 만난 마지막 날이 바로 그 날일 것이었다.

나는 지루한 부분은 건너 뛰며, 외숙부의 생을 훑어나갔다. 이웃 마을 출신의 얌전한 노처녀 아가씨와 결혼한 일. 스텔라라는 이름의 그 아내를 꽤 사랑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스텔라 엘리너 캠버튼 이라고 이름 붙여진 딸이 태어난 일. 며칠 지나지 않아 산후열로 아내가 죽은 일. 어린 스텔라가 성장해가는 기록. 어린 스텔라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일. 그리고…….





엘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 구름에 가렸다 나타났다 하는 달빛과 런던에서 가져온 가방 안에 들어있던 응원용 레이저 포인터의 붉은 점 같은 불빛 하나에 기대어 두 시간 가까이 저택 주변을 모두 뒤졌지만 보이질 않는다. 열심히 불러대고 있는데도 고양이 우는 소리 한 번 들리지 않는다. 매일 아침 캠버튼 저택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는 고양이들이라도 대신 대답해 봐! 젠장!

시골의 밤은 조용하다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벌레가 울고 풀과 나무가 바스락거리고, 바람마저도 도시보다 더 존재감 강한 소리를 낸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런던에서보다 내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이유는 뭘까.

침착하게 생각해. 만약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말이야. 그럴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만에 하나니까. 만에 하나라도 진실이라면, 외숙부는 이렇게 불렀을 지도 모른다.

“스텔라!”

머뭇거리면서도 한 번 외쳐보았다. 놀랍게도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정면의 어둠 속에서 가냘프게 우는 고양이 소리. 나는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걸었다. 방향을 알 수 없어지면 스텔라를 불렀고, 고양이가 대답했다. 두 번 정도 발이 걸려 넘어질 뻔 하며 찾아간 곳은 그리 높지 않은 울타리가 쳐진 무덤이었다. 마침 구름 밖으로 나온 달 덕택에 청동 제 울타리의 입구에 새겨진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캠버튼 가 가족 묘지.

달이 다시 숨기 전에 재빨리 묘지 안을 눈으로 훑었다. 입구 가까운 곳에 있는 새 무덤 부근에 부옇게 하얀 것이 보였다.

“스텔라? 여기 있었구나.”

다가가자 고양이가 다시 가냘프게 울었다.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 같기도 한 울음소리. 오렌지색과 흰색 털을 가진 고양이. 엘리. 스텔라 엘리너 캠버튼. 어릴 적 단 한 번 보았던 사촌 누이. 그 아이가 피로 털을 적신 채 무덤가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덜덜 떨며 고양이 옆에 앉았다. 조심조심 손을 대었지만 고양이는 피하거나 할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구름이 달을 다시 가려 어둠이 다시 주변을 덮었다. 그래도 이 고양이가, 내가 와 있음에 안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양이의 체온이 생각보다 낮아서 겁이 났다.

옆에 앉아 스텔라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달래면서도, 내 마음 구석에는 아직 의심이 남아있었다. 외숙부의 일기에 쓰여있던 이야기가 정말일까? 그런 것이 정말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외숙부 에드워드 캠버튼이 그의 일기에 기록한 것은 충격적이고, 또 한 편으로는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죽은 일곱 살짜리 어린 딸의 영혼을 다락방에 있던 그 이상한 장치를 이용하여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고양이의 몸에 담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날 수 있는 걸까?

“저기 말이지. 창피해서 친구들에게는 말 할 수 없었지만,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어. 유령 같은 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영혼이 다른 몸에 들어가는 일 같은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거 아닐까?”

고양이가 콧방귀를 뀌었다. 아파서 낸 끙 소리라고 여기려 노력했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그건 내 말을 비웃는 듯한 소리였다.

“아니. 증거가 있다면 믿을 수 밖에 없겠지. 하지만 넌 고양이라 말을 못하고, 외숙부는 돌아가셨으니까 여쭈어볼 수도 없잖아.”

이번에는 고양이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건가?

“그게, 너는 고양이고, 에…… 그리고 어리니까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자신을 지키는 게 중요해. 만약 내가 진심으로 네가 사람의 영혼을 가졌고, 그게 내 사촌 누이라고 믿고 있는데 사실은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난 크게 상처를 받을 거야.”

  “나는?”

깜짝이야. 고양이가 사람의 말을 한 줄만 알았다. 그냥 고양이 울음 소리였을 뿐인데.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어, 그러니까 너는…… 네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고양이의 몸이 된 거고, 고양이로 살아가게 되면서 여러 가지로 무척 힘들고 상처받았을 거라고 생각하긴 해. 개한테도 물렸고 말이야. 그렇지만 그게 네 입장과 내 입장은 다르고…… 이게 모두 괴짜 외숙부의 장난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이 씨! 젠장. 내가 고양이를 상대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스스로도 뭘 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왕래조차 없었던, 존재 자체가 별 가치 없었던 외숙부가 죽었건 말건, 내가 쓰다듬고 있던 고양이가 사실은 사촌누이의 영혼을 가졌건 말건, 그냥 버리고 가면 되는 거다. 내일 아침에는 시체가 되어 있겠지. 그리고 그냥 난 저 저택과 토지 따위 팔아버리고 잊으면 되는 거다. 그러면 다 끝나는 거야. 스스로의 모습이 바보처럼 보일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진실이면 어쩌지 걱정하면서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나는 고양이에게서 손을 떼었다. 천천히 일어났다. 한 발을 떼어 옮겼을 때 다시 달이 구름 틈새로 빛을 뿌렸다. 고양이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저 눈, 기억에 있다. 캠버튼 저택을 처음 찾아온 어린 소년이었던 나를 빤히 보던 요람 속의 갓난아이.

“아우 젠장! 하느님!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외치면서 나는 티셔츠를 벗었다. 등에 저스틴 호이트의 사인을 받은 아스날 서포터즈 셔츠다. 셔츠가 아까워서인지, 고양이와 스텔라와 외숙부가 불쌍해서인지, 늪에 빠진 기분이 드는 내 처지가 너무 괴로워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물이 흘렀다.

티셔츠로 고양이를 조심조심 감싸고 말했다.

“일단 저택으로 가자. 경찰에 전화해서 부탁하면 동물병원이 있는 시내까지 데려다 줄 거야. 그게 안되면 큰 도로까지 나가보자. 히치하이크를 하면 어떻게든 큰 시내까지 갈 수 있겠지. 괴로워도 조금만 버텨 봐. 내가 꼭 살려줄 테니까.”

고양이가 응답하듯 가늘게 울었다. 어쩌면 외숙부도 어린 딸 스텔라에게 그렇게 말했을 지도 모른다. 나무에서 떨어진 스텔라는 갈비뼈에 장기를 찔려 20분간 괴로워하다 죽었다고 했다. 외숙부는 죽음의 예감에 벌벌 떠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말했을 거다. 괴로워도 조금만 버텨 봐. 내가 꼭 살려줄 테니까.

티셔츠로 감싼 고양이를 안고 일어나자 고양이는 다시 한 번 울더니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고쳐 안으려고 한 팔을 빼자마자 고양이가 티셔츠 틈으로 쑥 빠져나갔다. 내 품에서 뛰어내리긴 했지만, 앞발에 힘이 없는지 버티질 못했고 턱을 땅에 찧고 말았다. 녀석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비석 옆으로 돌아가 몸을 숨겼다.

“왜 그래? 병원에 가야 치료를 하지. 이리 오라니까.”

다가가니 고양이는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몇 발짝 도망가더니 주저 앉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사람들이 하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병원에 가기 싫은 거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억지로 데려가지 않을 테니 이 셔츠라도 덮고 있어.”

고양이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아스날 서포터즈 티셔츠로 고양이를 덮어주고 옆에 누웠다. 맨몸인 상체에 묘지의 풀이 닿자 춥고 따가웠다. 손을 뻗어 고양이의 머리를 쓸어주자 고양이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달이 몇 번이나 구름 밖으로 나왔다 숨기를 반복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고양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추워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눈을 떠보자 옆에는 납작하게 떨어진 티셔츠 밖에 없었다. 저스틴 호이트의 사인이 쓰여있는 부분에 피 얼룩이 배어있는 것을 보니 어젯밤의 일이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너무 추우니 피로 뻣뻣해진 티셔츠라도 입지 않을 수가 없다.

“스텔라! 어디 있어?”

한 번 불러보긴 했지만 고양이는 주변 어디에도 없었다. 고양이가 어제 기대어 있던 새 무덤은 역시 외숙부 에드워드 캠버튼의 것이었다. 나는 잠시 외숙부의 무덤에 고개를 숙여 명복을 빌고,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외숙부. 정말 미안해요.

추위로 뻣뻣해진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캠버튼 저택으로 돌아가니 고양이들 울음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허드슨 부인이 챙겨주는 아침 식사 시간인가…….
저택을 돌아 주방 뒷문과 연결된 뒷마당으로 나가자 문가에 기대 서 있던 허드슨 부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거에요, 케니 씨? 옷이 온통 피투성이네요.”

“아…… 안녕하세요, 허드슨 부인. 이건 제 피가 아니에요.”

“그러면 어디서 싸움이라도 하신 건가요?”

“어제 스텔…… 아니 고양이 엘리 말이에요. 외숙부가 기르던 고양이. 그 녀석이 다쳤었어요.”

“어머나.”

허드슨 부인은 나에게는 책망하는 투로 말하고 있더니, 고양이 이야기를 꺼내자 바로 걱정스러운 듯한 어조로 바뀌었다. 잠깐 화가 불끈 솟았지만 트집을 잡고 싸울 수도 없지. 게다가 허드슨 부인은 묘한 표정으로 마당 한 쪽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가 저 모양이었군요.”

“네?”

부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자 그 곳에는 엘리, 스텔라 어느 쪽이든 좋은 그 오렌지색 고양이가 있었다. 이 녀석은 벌써 배부르게 밥을 먹고 흙 땅에 길게 누워 있는 참이었다. 식사를 마친 몇몇 고양이가 엘리의 상처를 핥아주고 있었다. 이미 녀석의 몸에 피 흔적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기가 막혀서 한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겨우 목에서 소리를 뽑아낼 수 있었다.

“어제 저 고양이는 저보다 더 큰 갈색 개에게 물렸었어요!”

뭐가 억울한 건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되게 억울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런데도 허드슨 부인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리트 씨네 개가 또 도망을 쳤던 모양이군요. 개는 고양이와 싸우기 마련이죠.”

“하지만 그 개에게 물려서 저 고양이는 거의 다 죽어갔어요!”

허드슨 부인은 혀를 차며 나를 보았다.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 개라고들 하잖아요.”





허드슨 부인이 돌아가고 난 후 나는 스티브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설마 아침 일찍부터 맥핀의 후배들이 아파트에 와 있지는 않겠지? 전화벨이 울리고, 울리고,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이만 끊을까 생각하는 차에 통화 연결 음이 들렸다.

“스티브?”

- 야, 무사하냐? 다행이다.

잠에서 덜 깬 목소리의 스티브였다. 목소리가 태평한 걸 보니 큰 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조금 잠에서 깬 듯한 스티브가 속사포처럼 그간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어제 밤에 찾아온 조정부 후배들은, 전직 경찰이었고 현직 주정뱅이 노름꾼인 이웃 영감님의 카랑카랑한 고함과 거짓 협박에 눌려 도망치고 말았다고 했다. 맥핀은 조정부 후배 하나가 학교 측에 그의 부당한 폭력에 대해 신고해 경고를 받았단다. 게다가 다음 조정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아 후배들을 엉뚱한 일에 동원할 수 없게 되었다나. 경고를 받았다고 해도 맥핀은 다음 경기에서 또 우수한 성적을 낼 거고, 학교에 명예를 가져다 주는 그에게 처벌은 내려지지 않을 거다. 멜리사는 아직 화가 나 있지만 맥핀과 조정부 후배들이 쫓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걱정이 너무 커져서 이제 어느 정도 용서해줄 마음이 생긴 것 같단다.

스티브는 어제 있었던 아스날의 경기는 후반전 밖에 보지 못했지만 형편없고 시시한 경기였다는 분노를 한참이나 쏟아놓았다. 나는 평소 곱게 볼 수가 없었던 선수가 출전했었는지를 물었고, 보지는 못했지만 어제 경기의 패인은 분명 그 선수가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나와는 미워하는 선수가 다른 스티브는, 다른 선수를 지목하고 원인은 그 선수에게 있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같은 아파트에서 함께 축구를 보고 입씨름을 할 때는 스티브의 의견이 그저 짜증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런 곳에서 들으니 매우 짜증났다. 야 이 멍청한 자식. 넌 눈을 어디에 달고 다니길래 그 선수가 멀쩡한 놈으로 보이냐? 그 놈은 동네 축구 수준이라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손 끝에 무언가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털. 오렌지색과 흰색 털을 가진 꼬질꼬질한 고양이. 엘리, 스텔라, 어느 쪽이든. 걷는 게 조금 불편해 보이는 걸 보니 확실히 어제 다치긴 했던 것 같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멀쩡해 보이지만. 손 끝에 머리를 문지르고 있는 녀석을 쓰다듬어 주며 스티브와의 통화를 끝냈다.

밤과 낮에는 보이는 것이 다르다고 하던가. 지금 와서 보니 고양이 엘리의 눈은 그냥 녹색을 띈 고양이 눈일 뿐이었다. 외숙부의 일기에 쓰여있던 실험은 성공했던 걸까, 실패했던 걸까. 사람의 영혼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그냥 전부 거짓말일 뿐일까?

“스텔라.”

대답하듯 고양이가 길게 울었다.

“엘리.”

이번에는 고양이가 잠시 망설이다 울었다.

“둘 다 네 이름이란 말이지?”

고양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턱을 쓰다듬어달라는 의미였다. 고양이를 계속해서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난 이제 런던으로 다시 돌아갈 거야. 네가 여기서 계속 지내는 동안 이 저택에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 되도록 오래 건강하게 살도록 해. 네 아버지는 그렇게라도 널 살려두고 싶어했으니까 말이야.”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감정과 창피해서 펄쩍펄쩍 뛰고 싶은 감정이 마음 구석에서 손에 손을 맞잡고 뱅글뱅글 돌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말을 이었다.

“또 놀러 올게. 우리는 예전에 통 보지 못했으니까, 앞으로는 자주 보고 지내도록 하자.”

고양이는 사람이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충분히 쓰다듬을 받았다는 듯 뒤돌아서 걸어나갔다.

나는 주방으로 걸어가 창 밖을 내다 보았다. 동쪽 언덕 위로 캠버튼 가족 묘지가 흐릿하게 보였다. 외숙부와 고양이의 일 모두가 진실일 때를 대비해서 나는 다시 사과했다.

미안해요, 외숙부. 외숙부는 훗날 스텔라를 맡게 될 사람을 위해 당신의 영혼 이동 기계를 다루는 법을 꼼꼼하게 일기장에 적어두셨죠. 하지만 이제 그 방법은 누구도 몰라요. 내가 폭우가 내리던 날 어둠 속에서 그 부분을 찢어 벽난로에 불을 붙이는 데 써버렸으니까. 나에게 무엇을 기대 했는지 모르겠지만…… 스텔라는 앞으로 더 생을 연장하는 일 없이 저렇게 살게 될 거에요.

충분히 사과했다고 생각하자, 나는 런던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찾으러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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