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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년의 행복

2007.11.10 08:4711.10

우주의 한복판에 한 도시가 있었다. 도시의 이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틈에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고아였다. 한 때는 아니었다, 그는 교양이 흘러넘치는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었다. 화분과 꽃의 향기가 가득한 집안에는 햇살이 주홍색의 빛을 뿜었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소년은 그가 언제 부모를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몰랐다. 이 도시에 흘러들어오게 된 이후에는 기억할 시간도 없었다. 더 이상 행복에 찬 소년은 없었다. 하루하루 일거리를 찾아 쏘다니는 작은 들쥐로 변한 소년은 증오와 시기심에 가득 찬 마음을 도시에 비벼대며 살아갔다.
그렇게 소년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였다. 일을 찾기 위해 거리를 무감각하게 걷던 그는 얼어 죽은 걸인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시체를 발견하고 나서 그가 처음 느낀 감정은 혐오나 두려움, 동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기대감에 들떴다. 혹시 걸인이 몸에 숨겨놓은 시계나 동전 몇 개라도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체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걸인의 누더기에서는 동전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실망에 차서 그가 막 시체에서 손을 떼려할 때였다. 그의 세심한 손이 우연히 금속성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동전일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재빨리 그것을 만져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동전이라기엔 너무나 크고 둥글었다. 그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시체의 누더기에서 꺼냈다. 그것은 거울이었다. 둥글고 윤기가 나는 구리로 만든 받침대 위에 곱게 놓여진 유리는 아직 매끄러웠다. 그것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며 소년은 희열감에 들뜬 입을 벌렸다. 얼굴이 또렷하게 비치는 것을 보니 분명히 이것은 좋은 거울일 것이다.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것을 챙긴 그는 자신의 보물들을 쌓아놓는 한적한 폐가로 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쯤 지나서 폐가에 도착한 그는 거울을 품속에서 꺼냈다. 거울은 때가 묻어서 약간 탁한 빛을 냈다. 소년은 입은 옷에서 가장 깨끗한 부분을 들어 거울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거울을 닦던 손을 멈춘 소년은 이윽고 거울이 잘 닦였는지를 보기 위해 거울을 보았다. 그러나 거울의 안에서는 소년이 원하지 않았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거울에 계속 비춰지던 그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히끄므레한 형상 셋이 마치 다른 세계에서 나오는 것처럼 미끄럽게 거울의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 괴기스런 광경에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거울에서 나온 세 형상은 점점 커져가면서 인간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네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그들이 물었다.

"누구야?"

소년은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히끄므레한 세 형상 중에서 흰 옷을 입고 굵은 금빛의 수염이 난 남자로 변한 자가 말했다.

"우린 신이다."

"혹은 깨달은 자."

하고 거의 벌거벗었으며 흉측하게 마른 몸매에 빡빡 깍은 머리를 한 남자가 덧붙였다.

"악마일 수도 있지."

검은 옷에 붉은 빛이 나는 아름다운 코트를 걸친 미남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공포심에 질려서 도망치려는 소년의 어깨를 붙잡으며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라 아이야. 너는 불행하구나."

"불행하다고?"

그들의 완력에 눌려 바닥에 억지로 앉게 된 소년이 되물었다. 그들 셋은 다시 한번 근엄한 목소리로 합창하듯이 말했다.

"그렇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소년이 화를 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뭐 잘난 것 하나 없고, 일자리도 변변찮지. 서쪽 벽에 있는 제빵점에서 일을 하는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언제나 주인은 내게 말라빠진 순무랑 당근, 딱딱하고 식은 빵을 식사로 준다구. 그곳에서는 매일매일 향기가 그윽한 빵을 만들어서 손님들에게 파는데. 정작 그걸 만드는 나는 빵껍질이나 씹고 있어야 해.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어? 그나마 오늘은 운이 좋아 공짜로 거울 하나를 얻었나 했더니만. 당신 같은 귀신들이 들린 이상한 거울이었고."

소년의 하소연을 주의 깊게 듣던 세 남자는 동시에 말했다.

"그럼, 너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들의 말에 소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를 내려다보면서 셋은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나?"

"물론."

소년이 말했다. 남자들은 기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 목소리로 말했다.

"행복해지는 법은 간단하다."

소년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흰 옷을 입은 금발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편이상 그를 '신'이라 부르는 동시에 민머리에 홀쭉 마른 남자를 '깨달은 자' 검은 옷을 입은 미남을 '악마'라 부르기로 했다. 그가 '신'이라 부르기로 한 자가 먼저 말했다.

"책을 주겠노라."

"책?"

소년이 되물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신은 검은 빛의 책을 소매 속에서 꺼내 그에게 던져주었다. 멀뚱히 그를 바라보는 소년에게 그는 말했다.

"먹으라."

소년은 당황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신은 싸늘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어라. 이것은 생명이요, 꿀이 될 것이다."

소년은 애석하게도 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년은 신 앞에서 무력한 인간일 뿐이라는 점에서는 종교인과 동일했다. 신은 천천히 두꺼운 책을 한 손으로 집어 소년의 입에 가져다 댔다. 소년은 반항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는 소년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책을 집어넣었다. 소년은 숨을 쉬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 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소년의 입 안에서 두꺼운 책이 녹아내린 것이다. 책은 달콤한 향기와 맛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소년은 신이 말해주는 이치를 알 수가 있었다.

"이제 나의 법은 네게 있다."

신이 말했다.

"그대로 따르라."

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과 깨달은 자, 악마는 사라져버렸다. 넓은 폐가 안에는 소년과 거울 뿐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마음속에는 신의 법이 있었다. 소년은 홀린 듯한 기분으로 거울을 내버려두고 그의 집이자 일터인 제빵점으로 돌아갔다. 그날 소년은 잠을 푹 잘 수가 있었다. 행복이 당장이라도 찾아올 것만 같았다.
아침이 되었다. 주인은 욕을 하며 회초리로 소년의 엉덩이를 때렸다. 소년은 허겁지겁 일어나 대충 손을 씻고 밀가루를 반죽했다. 그날 그의 늙은 주인은 더욱 엄격했다. 반죽이 조금만 잘못 되어도 소년의 손가락을 사정없이 후려갈겼고, 온 힘을 다해 일하는 소년에게 게으름을 피운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소년은 분노로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주인에게 대들고 욕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 순간, 신의 법이 소년의 마음을 붙잡았다. 소년은 마음을 바꾸어 겸손히 더욱 일에 박차를 가했다. 늙은 주인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때리는 것을 멈추고 눈을 부라릴 뿐 더 이상 소년을 때리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소년의 키는 매우 커졌다. 주인은 기력이 쇠하고 또 소년의 변심에 놀라기도 한 나머지 더 이상 그를 때리지 않았다. 부쩍 기술이 늘어난 소년은 이미 제빵점의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주인과 늘 거래하던 방앗간의 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거래의 기술 역시 익혔으며 빵을 굽는 공정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감독할 수 있었다. 소년은 주인의 신뢰를 얻은 것에 만족했으며 그에게 법을 가르쳐준 신을 찬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늙은 주인은 죽었다. 소년은 제빵점을 물려받게 되었다. 장례 준비로 눈뜰 틈도 없이 바빴던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업무가 그를 짓눌렀다. 신의 법에 따라 돈을 벌고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그는 몸이 부숴지도록 일했다. 2년이 지났다. 소년은 더 이상 청년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엿한 제빵점의 주인이었으며 신체가 건강한 당당한 시민이었다. 큰 집도 한 채 살 수 있었다. 소년은 곧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행복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녹초가 되어있었다.
그에게 혼담이 들어왔다. 방앗간의 딸이었다. 청년은 거기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는 승락했고, 한 달 뒤에 결혼했다. 그 뒤 2년 동안 청년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했다. 아내는 딸을 낳았다. 청년은 신에게 진정으로 감사했다. 행복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청년은 차츰 제빵점에서 일찍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내는 그것을 불평했다. 청년은 신의 법을 따르라고 했다. 아내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불만과 싸움이 잦아졌다. 일에서 돌아온 청년은 아내와 다른 침대에서 잤다. 청년은 서서히 불행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신의 법이 구원을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청년은 그날도 일에 지친 몸을 간신히 이끌고 집에 돌아오고 있었다. 문을 열면 귀여운 딸아이가 자신을 반겨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믿으며 문을 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집 안에서는 뜻밖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딸과 아내가 차가운 방바닥에 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식기와 가구는 망신창이가 된 채였다. 공포에 질린 청년은 아내와 딸을 침대에 눕힌 후 말을 몰아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청년의 말에 몸을 맡겼다. 모서리를 급히 돌았다. 채찍질을 했다. 청년은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의사가 청년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아내와 딸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의사는 전염병이라고 진단했다. 청년은 절망했다. 신을 원망하고 다시 원망했다. 행복이 그의 마음을 떠나며 깊은 상처를 남겨주었다.
아내와 딸의 장례식이 끝났다. 청년은 집과 제빵점을 팔아버렸다. 어떻게 해야할지 자신도 모르는 채로 거리를 걷다가 그는 소년시절에 거울을 놓고 도망친 폐가에 도착했다. 폐가는 먼지가 조금 쌓여있었다. 청년은 그곳에 앉아서 거울을 닦았다. 소년시절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리고 거울 역시 변함이 없었다. 거울 속에서 신과 깨달은 자, 악마가 나왔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때로부터 조금도 늙지 않았다.

"날 속였어."

신을 노려보며 청년이 말했다. 신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분을 참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행복하게 해준다고 했잖아!"

그는 아내와 딸의 죽음을 생각했다. 추억도 생각했다. 일에 지쳐서 그의 품에 안긴 아내를 밀어버린 사소한 기억이 그를 괴롭혔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울고 있는 청년에게 신은 냉정하게 말했다.

"넌 분명 행복했었다."

청년은 이를 갈았다. 신은 그를 다시 유혹했다.

"계속 나의 법을 따르라. 넌 다시 행복해질 것이다."

청년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단호하게 신의 제안을 물리쳤다. 그는 절망감에 빠져 악마에게 다가갔다.

"도와줘.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악마는 미소를 지었다.

"세상의 모든 쾌락을 경험해라. 그럼 넌 행복해질 것이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자마자 악마의 몸에서 연기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들은 이윽고 청년의 입으로 들어갔다. 청년은 강렬한 느낌에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역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년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그렇지 않았다. 악마가 안에서 그의 법도를 속삭였다. 그것에 매혹된 청년은 무작정 자신이 가진 돈자루를 움켜쥐었다. 수년간 신의 법도에 따라 일을 했었기에, 그것은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당장 도시의 번화가로 달려갔다. 성실하게 일한 그답게 수수한 옷차림을 한 채였다. 창녀들이 그를 유혹했다. 예전이라면 당장에 거부했었을 청년은 그것을 쾌히 수락했다. 어두침침한 가운데 따뜻한 빛이 흘러나오는 그 방에서 그는 지금껏 몰랐던 열락을 느꼈다. 피곤과 쾌락의 후유증에 지친 그는 가장 좋은 호텔을 빌려 그곳에서 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배게는 그의 눈에서 나온 눈물로 젖어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터는 최고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그는 호텔의 문을 열었다.
그는 의류점으로 향했다. 점원들이 권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옷을 샀다. 공허함을 날리기 위해 거리를 걷다가 문득 번쩍이는 카지노의 간판을 보았다. 잃어버린줄 알았던 정열이 그의 공허한 마음을 파고들었다. 짙은 우울함이 깔린 눈을 들어 그것을 바라본 그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의 도박은 성공했다.
청년은 그곳에서 다시 인생의 행복을 느꼈다. 그의 재산은 늘어만 갔다. 온갖 사치와 향락을 즐길 지라도 그것은 변함이 없었다. 숙련된 도박꾼은 배당이 낮을 지라도 확률이 높은 쪽의 패를 건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은 그러지 않았다. 악마적인 운이 그를 도와 불가능한 배당에서 금을 끌어모았다. 그는 유명해졌다. 고급 창부들에서 카지노의 매력에 끌린 순수한 아가씨까지 모두 매력있는 그의 품에 안기길 소망했다. 곧 그는 카지노에 오기 전까지의 자기 인생이 덧없고 황당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어느새 거울과 신,깨달은 자,악마에 대해서도 잊어버렸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청년은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의 남자가 되었다. 악마는 한번도 남자를 배신하지 않았다. 남자는 놀라운 명성과 지위를 얻었다. 어느 배팅에도 실패하지 않는 사나이. 그 명성이 남자를 규정했다. 남자는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당장 그의 발밑에 쓰러져 그를 숭배할 여인들이 있었고, 돈과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막대한 쾌락 안에서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공허함이 감돌았다.
한참을 번민하다가 그는 길에서 우연히 한 승려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피부색이 검었다. 밀었던 머리가 오랜 수행과 방랑으로 길어져 있었다. 더러웠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루빨리 카지노로 달려가 도박을 성사시켜야 한다고 악마가 속삭였다. 그 말이 맞다. 가야 한다. 남자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고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남자는 문득 승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끝없는 허무감에 지쳐있는 그와 달리 승려의 엄숙한 얼굴에는 목적의식이 확고하게 박혀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 승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안의 악마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그제서야 남자는 사라진 악마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주욱 자신 안에 있었던 것이다.

"뭐하는 거냐."

"닥쳐."

악마의 말에 싸늘하게 대답한 남자는 승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빨리 걸었다. 승려는 시장의 모퉁이를 돌아 상자가 어지러이 쓰러져 있는 빈민가를 지나쳤다.

"쫓아가지 마. 네가 느낄 수 있는 쾌락을 버릴 셈이냐?"

악마가 유혹했다. 그러나 남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전까지 머물던 공허감이 승려를 따라가면서 뜻 모를 충실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오랜 수행으로 강해진 승려의 걸음을 쫓았다. 악마는 계속 욕을 해대고 얼러대며 남자를 유혹했다. 그러나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질려버린 악마가 그의 안에서 나왔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었던 놀라운 운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에 신경을 쓸 틈은 없었다. 그는 재빨리 사라져가는 승려를 좇았다. 승려는 이윽고 한적한 집에서 염불을 외웠다. 허름한 옷을 입은 여인이 나와 두레박에 쌀을 담아주었다. 승려는 합장하고 물러나왔다. 그리고 도시 외곽에 위치한 산을 향해 걸었다. 계속 그를 몰래 따라가면서, 남자는 몇 번이고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승려의 뒤에 가서는 왜인지 부끄러워져서 주춤댈 수밖에 없었다.
계속 걸어서 승려는 한 암자에 도착했다. 작은 사찰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남자는 승려의 뒤에 멀뚱히 섰다.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던 승려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 남자에게 자신을 왜 쫓아왔냐고 물었다. 남자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어설피 합장을 흉내낼 뿐이었다. 승려는 미소지었다.
그날부터 남자는 머리를 깍고 승려의 제자가 되었다. 평화로운 산의 공기와 규칙적인 생활이 황폐해진 그의 육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었다. 고기와 해산물에 길들여진 입을 버렸다. 산나물과 적은 곡물로 생활했다. 몸이 말라가면서 동시에 깨끗해져갔다. 산사의 평화로운 공기 속에서 그는 3년간 수행했다. 심부름이 몸에 익어가는 시점이었다. 승려는 그에게 경전과 교리를 주었다. 그가 늘 보던 기초가 아니었다. 경전에 빠져 2년을 살고, 산에 취해 다시 2년을 살았다. 그의 몸은 늙어가고 있었다. 새치가 히끗히끗 난 까까머리가 휑하니 바람을 맞았다.
그 때부터 그는 절에서 내려 탁발과 구걸을 다니기 시작했다. 깨달은 자에 대한 존중으로 머리를 굽힌 주민들은 쾌히 양식을 내려주었다. 그는 평화롭다고 느꼈다. 평화. 좋은 말이다. 찾지 못했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잠깐, 발견? 그는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는 왜 승려를 찾아왔는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럼 지금 자신은 행복한가? 그는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평화 속에 있는 것이지. 행복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 행복인가? 산나물과 곡물로 연명하는 삶, 욕구를 억압하는 이 삶이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고? 그는 주춤주춤 시냇가로 다가가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주름살이 덮인 얼굴이 추했다. 그는 예전의 자신을 생각해보았다. 자신감 넘치는 몸짓에, 활발한 힘을 가졌던 도박꾼으로서의 삶. 그 때가 좋았었다. 도대체 자신은 그 한순간의 허무감을 왜 떨치지 못했었을까? 몸이 떨렸다. 그는 그 전의 삶을 생각해보았다. 훌륭한 제빵점을 가지고 살았던 청년 시절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다. 아내와 아이가 죽었지만 그에게는 제빵점이 있었다. 왜 그 훌륭한 것을 버렸던 것인지!
남자는 승복을 벗었다. 두근거리는 움직임. 핏줄의 역동성이 그의 등뼈를 흔들었다. 달렸다. 과거로, 예전의 장소로. 한참을 달렸다. 날이 어두워질 때가 되서야 그는 자신이 도시의 외곽지역에서 아무런 돈도 없이 놓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운 바람이 불었다. 그는 누더기 외투를 주워서 걸쳤다. 이빨이 떨렸다. 덜덜 떨면서 그는 잠이 들었다.

날이 밝았다. 공양밥을 얻으러 다니던 그릇을 소중히 간직한 채로 그는 걸었다. 절그럭거리는 의수를 한 걸인 하나가 자기 영역을 침범하러 온 줄 알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꺼져! 이 영감아!"

그는 침을 탁 뱉으며 쏘아붙였다. 남자는 겁이 나서 재빨리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그는 걸인이 자신을 영감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나는 노인이다. 행복을 찾지도 못하고 노인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울적함을 풀기 위해 그는 품 속을 뒤적거려 보았다. 흔한 동전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거리를 걸었다. 돈을 마구 뿌려대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니 울적해졌다. 배가 고팠다. 승복을 입고 돌아다닐 때에는 신앙심을 발휘하며 곡물을 주던 주민들은 그의 허름한 행색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날이 저물 때까지 구걸을 해서야 겨우 말라붙은 빵껍질 몇 개를 얻을 수 있었다. 남자, 아니, 노인은 웃었다. 마치 헐벗고 굶주렸던 소년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와는 달랐다. 그의 팔다리에는 이미 힘이 없었다.
더러운 거리를 헤메고 불량배들에게 쫓기면서 그는 자신이 자랐던 마을에 도착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소리가 정겨웠다. 제빵점은. 온데간데 없었다. 소홀한 관리와 주인의 부재로 이미 그곳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화재였다. 그것이 도구가 전부 사라진 제빵점을 부수었다. 이미 오래전에 회색과 검은빛의 재로 변한 그곳에서 노인은 숨죽여 울었다. 추억을 되살리다가 그는 문득 자신이 비상금을 묻어놓은 자리를 생각해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는 그 곳을 파보았다. 금화 여러개와 은화 수십개가 들어있는 주머니가 있었다. 그는 신에게 감사하며 그것을 얼굴에 대었다. 아직 뜨끈뜨끈한 눈물이 은화를 적셨다.

그는 다 떨어진 구두밑창에 그것을 숨기고 길을 나섰다. 이제 그의 두번째 삶을 되찾아야 할 시간이었다. 거들먹거리는 경찰들을 지나쳤다. 도시는 변함이 없었다. 굽신거리는 거지들, 뾰족한 지붕의 집들, 웃으며 달려가는 아이들. 노인은 의류점에 들러 싸고 말쑥한 옷을 사입었다. 거울을 보았다. 그는 예전의 풍모를 적게나마 되찾은 듯이 보였다. 떨리는 손을 들어 수염을 매만진 그는 당당히 의류점을 걸어나왔다.
그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카지노 안으로 들어섰다. 세월의 풍파에도 깍이지 않고 희미하게 남은 그의 원래 모습을 발견한 종업원이 반갑다는 인사를 건넸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딜러의 앞에 앉았다. 그는 예전의 감각을 되살리려 애썼다. 기억나지 않는 도박의 규칙이 머리 속을 윙윙 날아다녔다. 주사위가 나왔다. 그는 그것을 뒤섞어 사기가 없는 지를 확인했다. 그를 알아본 호기심 많은 손님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저 사람 알아?" "그렇지. 유명한 도박꾼이야." "그래? 얼마나 유명한데?" "전설적이지!" "정말이야?" "그래." 연인들의 대화는 노인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딜러는 긴장한 기색을 보이며 주사위를 던졌다. 2였다. 그저 숫자가 큰 것이 나오면 이기는 간단한 도박이다. 노인은 웃음지었다. 그는 많은 돈을 걸었었다. 1이나오지 않는 이상 질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손을 빠져나온 주사위는 그를 배신했다. 1이었다. 주위에서 비웃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딜러는 긴장을 풀었다.

"다시 하시겠습니까 손님?"

노인은 이를 악물고 다시 주사위를 던졌다. 악마는 냉정했다. 지금껏 주었던 운만큼의 불운을 주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그가 질 수록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가 커져갔다. 소음이 파리처럼 윙윙 울었다. 그의 돈이 모두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사람들의 비웃음. 심지어 그가 앉았던 의자까지 그를 비웃는 듯한 착각 속에서 노인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카지노를 빠져나왔다.

그는 벤치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넥타이가 자신의 목을 조른다고 느꼈다. 그것을 풀어헤치고 답답한 코트를 벗었다. 도시에서 나왔다. 행복을 찾아야 했다. 그는 방랑했다. 낡은 옷을 잘 유지하면서, 구걸을 하며 살아갔다. 늘그막에 성지순례를 떠나는 늙은이는 누구에게나 환영을 받기 마련이다. "여행자입니다. 실례합니다만……." 으로 시작하는 구걸 방법이 시골의 농부들에게서 가장 쉽게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방법임을 깨닫기 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가 있었는지 기억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노인은 자신이 정말로 늙었음을 깨달았다. 어느 한적한 교외에서 몸을 씻다가 그는 바위 틈에 다리를 찧었다. 새파랗게 멍든 다리가 곧 나을 것이라고 위안하며 그는 마음씨 좋은 농부 가족의 헛간에서 잠을 잤다. 농부의 어린 딸이 그를 간호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다리는 낫지 못했다. 그는 발을 절뚝거리게 되었다. 더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농부는 그에게 음식물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흔쾌히 허락했다. 노인은 절망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그것은 쉽지 않았다. 그가 헛간 바깥에 모습을 드러낼 참이면 심술궂은 어린 남자아이들이 그를 욕하고 조롱했다. 무뚝뚝한 농부는 묽은 죽과 딱딱한 빵을 식사로 주었다.

"다리가 나으면 떠나슈 노인장."

그의 퉁명스러운 말에 노인은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노인은 집안일을 돕고, 동물들을 조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젊은 시절에 간간히 익히곤 했던 손재주가 남아 있었다. 그는 고향의 개를 생각했다. 적갈색 털과 쫑긋한 귀, 작고 날렵한 눈. 웃는 듯 입가를 올리고 내민 혀, 날렵하고도 멋진 다리. 털의 표현에 주의하면서 그는 섬세하게 그것을 깍아나갔다. 그것에 몰입하는 것은 마치 지난 세월을 잊어버리게 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무언가 결여된 느낌이었다.

"할아버지, 그거 새로운 놀이야?"

농부의 어린 딸이 웃으면서 노인의 품에 안겼다. 노인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문득 자신의 작품이 내재한 문제점을 알았다. 고향의 개는 한낱 놀이였다. 그의 인생이 아니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방랑하기만 해왔다. 그에게 고향은 기억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친숙했던 형상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 명의 사람이었다. 노인은 좀더 깊숙히 생각해보았다. 아니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였다. 그제서야 그는 머리를 쳤다. 그것은 그가 어릴 적에 발견한 거울 속에서 나왔고, 그의 인생을 지배한 세 명의 초월자였다. 그는 그것을 조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기교로 그것을 조각할 수 있을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기술이 나아지기 전까지 습작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노인의 기술은 점차 발전했다. 그는 만든 습작을 소녀에게 맡겨 시장에 팔았다. 무뚝뚝한 농부는 수익을 얻게 되어 좋아했다. 그는 노인에게 잡일을 면제시켜 주었다. 노인은 그것에 감사했다. 2년을 사는 사이, 농부의 가족과 노인 사이에는 따뜻한 선의와 사랑이 감돌았다. 어린 딸은 하늘로 올라간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노인과 함께 놀았다. 노인은 평안을 맛보았다.
그해 겨울 성탄절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농부의 가족이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동안 노인은 헛간에서 초라한 빵을 뜯고 있었다. 기도가 끝났을 때 농부의 딸이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헛간으로 달려갔다. 식은 수프를 홀짝거리던 노인이 예쁘게 차려입은 소녀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소녀는 노인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이끌었다. 노인은 주눅이 들어 농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자신을 내쫓을 것이라 여겼던 무뚝뚝한 농부가 미소지으며 그를 식탁으로 이끈 것이다. 주황색 빛이 흘러나오는 집 아은 따뜻했다. 기름진 칠면조 요리와 구운 채소들, 맛있는 소스가 노인의 입 안을 맴돌았다. 즐거운 성탄절이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노인의 작품은 명성을 얻어갔다. 그러나 노인은 명성이 늘어날 수록 죽음이 점차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노인은 조각을 시작할 때부터 생각해왔던 일. 신과 악마, 깨달은 자의 조각을 하는 일을 시작했다. 농부의 가족에도 변화가 생겼다. 딸은 번듯한 은행의 젊은 간부와 결혼해 도시로 나갔다. 노인은 적적함을 느꼈다. 행복이 그를 떠난 것 같았다. 수염이 히끗해진 농부는 머슴을 두고 땅을 관리하느라 그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거울 앞에 서면 검버섯이 핀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스스로가 외롭고 늙었다고 생각했다. 쓸쓸한 침상 위에서 노인은 인생을 돌아보았다.

"참 많은 일이 있었지."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거울이 생각났다. 신과 악마, 그리고 초월자. 그는 그들이 말한 대로 해서 행복을 찾았는지를 자문해보았다. 신의 길을 따라 아내와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때, 분명 그는 행복했다. 바빠가는 일상이 잠시 그것을 흐릴 지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아내와 아이가 죽었지만, 그는 아직 젊었다.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몸이 아파왔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다시 생각의 늪에 빠진다. 악마의 뜻을 따랐을 때도, 행복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화려한 인생과 미녀들,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그것을 거부했었는지. 한순간의 허무함 때문에 그것을 날린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목이 칼칼하다. 노인은 의아해하다가 자신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이 그에게 손짓하듯이 다가왔다. 그는 발작하듯이 일어나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세 형상의 조각으로 걸어들어갔다. 조각은 소박한 떡갈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홀린 듯이 끌과 조각칼을 잡고 그것을 정성스럽게 다듬어나갔다. 마무리 작업이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의 정신 속에서 이런 의문이 들려왔다.
깨달은 자로서는 진정으로 행복했는가? 그렇다. 산사의 맑은 공기와 규칙적인 생활, 신성하게 들려오는 조용한 염불 소리. 그것을 생각하니 애틋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욕구, 저물어가는 이깟 욕구 때문에 자신은 그 생활을 버리고 만 것이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일생의 전부를 쏟아버리기라도 할 듯이 건조한 눈을 빨갛게 만들며 얼굴을 흘러내렸다. 이제 거의 모든 작업이 끝났다. 눈동자를 세밀하게 새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노인은 세 몸이 한 얼굴로 연결된 조각을 하고 있었다. 엄숙한 승복, 화려한 의상, 정직한 노동자의 옷을 각각 차려입은 조각들이 아름다웠다. 노인은 문득 조각상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을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살이 떨렸다. 팔의 힘이 빠지며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눈동자를 조각하기 전에 그는 농부의 가족과 어린 딸을 생각했다. 그를 따르던 귀여운 아이. 성탄절로 그녀는 분명 남편과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후회했다. 다시 한번 태어나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불현듯 그의 뇌리 속을 어떠한 생각이 스쳤다. 다시 태어난다면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었을까? 노인은 탄식을 질렀다. 절망감으로 지친 눈이 가물가물해져왔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자신이 만들고 있던 조각상을 보았다. 거의 다 완성된 조각상. 그때 노인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수염을 욱실거렸다. 조각상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연료가 떨어진 불이 마지막으로 세차게 한번 타오르듯 그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죽음의 그림자가 가쁜 숨을 내쉬며 그를 잡아채려 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눈동자에 조각칼을 댄다. 세밀한 움직임. 강한 누름. 찬란한 눈동자가 새겨지며 조각상이 완성되었다. 그의 힘이 깃든 마지막 걸작이다. 노인은 가쁜 기침을 하며 웃었다. 휘적휘적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신. 악마. 깨달은자.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듯하다. 멀리서 일꾼들을 닥달하는 농부의 소리가 들렸다. 남편과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는 농부의 딸의 환상이 보였다. 저 멀리에서 누군가 손짓한다. 아내와 딸아이가 웃고 있다. 무언가가 보인다. 빛이다. 한 점의 어둠도 없는 찬란한 빛.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지막 숨이 코에서 새어나왔다.


노인은 죽었다. 그의 평온한 눈은 천장 너머를 보는 듯 희미하게 떠 있었다. 먼저 작품을 보기 위해 들어왔던 일꾼 하나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농부는 십자를 그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농부의 딸은 시체를 덮은 관에 엎드려 흐느꼈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예술가."

목사가 엄숙한 태도로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것은 온갖 삶을 살았던 노인의 마지막 직업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조각이 발견되었다. 비평가들은 온갖 주석을 달며 그것의 가치를 높였다.
그것은 비싼 가격에 부자에게 팔렸다. 그러나 영원한 부자는 없는 법이다. 어느덧 부자는 몰락하게 되었다. 작은 집으로, 더 작은 집으로, 그렇게 하는 사이 재산은 없어지고 가솔은 뿔뿔이 흩어졌다. 조각 역시 이리 저리 시장을 떠돌다가 한 도둑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도둑과 거래하는 장물아비는 아쉽게도 예술을 식별하는 감식안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노인의 혼이 담긴 조각은 평범한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한낱 고물로 취급되었다. 도둑은 실망하여 그것을 내팽겨쳤다. 길을 지나가던 걸인 하나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혹시나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여 품에 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쓰지 못했다. 노숙을 하다가 유난히 추운 겨울밤에 죽었다.
일을 찾기 위해 거리를 무감각하게 걷던 한 소년이 그를 발견했다. 그의 품을 뒤지는 손길이 능숙하다. 이윽고 그는 조각 하나를 꺼낸다. 자신의 비밀기지인 폐가로 들어간다. 조각을 조금 닦는다.  그것에서 놀랍게도 세 명의 무언가가 나타났다. 소년은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네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그들이 물었다.
호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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