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Episode

2007.10.31 19:3110.31

[Episode]



제인의 두려움에는 중요한 조건이 붙는다. 공간이 얼마나 넓은가. 그것을 두고 그녀는 두려움의 척도를 가늠할 수 있다.
제인은 연신 시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러시아워의 꽉 막힌 도로가 뚫릴 리는 없다. 손가락으로 핸들을 계속 두들겨보지만 그것으로 초조함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녀는 결국 짜증스레 굳어있던 얼굴을 팍 찡그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차 안의 전자시계가 8시 44분에서 45분으로 넘어가기 무섭게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네.”
- 어디야?
“......가고 있어.”
- 어딘데?
“가고 있다니까?!”

벨이 울린 그 순간부터 상대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받기 싫었지만 피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그녀는 짜증스레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성격상 좁을 수밖에 없는 차 안은 그녀의 언성이 꽉 채워지다 곧 사라졌다.

-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제인의 기분을 알았을까. 휴대폰 너머에서 우물우물 투정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제인은 괜한 상대에게 화풀이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조금도 기분을 풀 수 없었다. 벌써 몇 십 분째 굼벵이처럼 기어가게 만드는 도로의 사정은 진작부터 그녀의 인내심에 한계라는 것을 주입했기 때문이었다.

“가고 있어. 가고 있으니까 먼저 현장으로 들어가 있어.”
- 뭐야, 너. 원래라면 30분도 전에 도착했어야 하잖아.
“도로가 꽉 막힌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놈의 성질 좀 죽여 제발. 그러니까 니가 시집을 못가는,
“제길, 끊어!”

늘 듣는 레퍼토리의 핀잔이 들려오기 무섭게 그녀의 얼굴은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녀는 빽 하니 소리를 지른 뒤 휴대폰을 옆자리에 던져버렸다. 그녀는 차가 다시 출발하기까지 애꿎은 휴대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이 33의 NYPD에 근무하는 그녀는 벌써 경력 7년째의 베테랑이었다. 그 중 절반을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강력범죄에 종사했었건만 이른 아침에 연락받는 사건은 늘 그녀의 기분을 다운시켰다. 특히나 그 사건이 살인의 경우라면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어서 현재 제인의 기분이 엉망인 것은 당연했다.
한참 단잠을 자고 있던 오전. 갑작스런 연락에 제인이 잠에서 깨었을 때 들려온 목소리는 파트너 휴의 한숨짓는 소리였다.

‘나와.’

그가 한 말은 이 한마디. 비번인 날인만큼 제대로 잠 한번 늘어지게 자보자는 생각으로 침대에 누웠던 게 바로 몇 분 전인 것 같았건만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은 눈부셨다. 그리고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휴의 나직한 목소리는 다시 꿈나라로 돌아가고픈 욕망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그 정도로 휴의 남자답지 못한 나긋한 목소리는 아직 미련이 남은 잠을 깨울만한 임팩트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 겪어온 본능으로 휴의 그 한마디에 모든 걸 직감했던 제인은 낮은 욕지기를 해대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은 건지 비번에도 불려나가던 그녀는 언젠가 일에 묻혀 살 거냐며 자신을 타박하던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원치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그녀는 일에 묻혀 살고 있었다. 하지만 제인은 그런 자신이 싫지 않았다. 비번의 단잠을 방해하는 사건을 빼고는.

“늦었잖아!”
“시끄러! 빨리 온 거라고!”

제인이 사건현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휴가 소리를 질렀다. 벌써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테이프를 치고 현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 정신없는 사이를 휘적휘적 헤치고 들어온 제인은 화장기 없는 얼굴로 인상부터 찡그렸다.
휴의 원망어린 목소리에 그녀는 더하면 더했지 절대 지지 않을 언성으로 대꾸해줬다. 그 소리에 주변을 돌아다니던 경찰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지만 정작 제인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휴가 주변의 시선에 미안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을 정도다.

“난 비번이야. 오늘 정도는 좀 봐주면 안 돼?”
“인원이 부족한 걸 어쩌겠어.”
“하루쯤은 너 혼자 해도 되잖아! 꼭 엄마 없는 애새끼마냥 나를 불러들여야겠냐고! 제길, 한참 잘 자고 있었는데.”
“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까지.......”

휴가 제인에게 전화를 걸었던 시각은 8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전형적인 새벽형 인간이었던 그는 때문에 제인의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토를 달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제인의 죽일 듯이 노려보는 시선에 금세 사그라지고 말았다.

“마티!”
“네!”

제인이 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상대로 마침 뒤를 지나가던 한 제복 입은 남자를 불렀다. 같은 과에 근무하는 마티는 제인보다 5년 후배였는데 이제 갓 경찰이 된 새내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남녀 안 가리고 동기생들을 꽉 잡는 제인의 괄괄한 성격을 어려워했던 마티는 그녀의 부름에 잔뜩 긴장한 거수경례를 했다. 하지만 제인은 그런 마티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사건 하나 추가야. 여기에도 살인 사건이 하나 날 것 같아.”
“예? 아.......자, 잠깐만요! 선배님!”
“으악! 제인, 그만해!”

안 그래도 어수선한 현장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리던 순간이었다. 마치 먹이를 빼앗긴 사자처럼 제인은 부스스한 머리를 휘날리며 포효했고 그런 그녀에게 꼼짝 못하는 파트너 휴는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로 마티가 제인을 말리듯 둘 사이를 가로막는 등 좀처럼 보기 드문 진풍경은 꽤나 오랜 시간동안 펼쳐졌다. 뒤늦게 나타난 반장님에 의해 현장에서 셋 모두 쫓겨날 때까지 말이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위로 서류와 사진들이 쏟아져 내렸다. 오늘 오전 현장에서 작성한 조서와 찍은 사진들이었다. 아직 결정적 단서라고 할 만 한 것도 짐작하지 못할 만큼 사건은 초기였지만 그래서 더 사진들을 뚫어져라 봐야할 때였다. 당시에는 모르고 넘어간 중요한 뭔가를 찾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제인은 안 그래도 뻑뻑한 눈가에 잔뜩 힘을 주어 사진을 한 장 한 장 바라보았다. 그녀는 벌써 몇 십분 째 현장에서 발견된 시체사진을 뚫어져라 보는 중이었다.

“적당히 봐. 넌 아무렇지도 않냐?”

간밤에 벌어진 폭주족 사건을 처리하고 있던 휴가 기지개를 펴다 여직 시체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제인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기지개를 쭉 펴는 그의 한쪽 눈가에는 푸르스름한 멍이 있었는데 오전에 차마 마티가 막아주지 못해 맞은 곳이었다.
사진을 바라보던 제인이 휴의 말에 그를 흘끔 바라봤다. 그 순간 휴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제인은 그런 휴에게로 제가 보고 있던 사진들을 넘겼다.

“너도 좀 봐.”
“나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푹 잔 너와 달리 나는 밤새 시달렸다고.”
“그런 애들은 몇 대 패면 얘기한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해 준다고 했잖아.”
“아- 제발. 제인, 너와 파트너라는 이유로 시말서를 쓰는 것도 이젠 지겨워.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았지?”

금방이라도 유치장에 갇혀있는 폭주족들에게로 다가갈듯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제인의 모습에 휴가 제발이라며 그녀를 말렸다. 안 그래도 서 내에서는 폭력경찰로 유명한 그녀였다. 서 내에서 사건이 터졌다하면 어김없이 제인 베커로 단지 그녀와 파트너란 이유 때문에 아무 죄 없이 2인분의 시말서를 쓴 것만 벌써 몇 해던가. 그 슬프고도 고달팠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던 휴는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제발 가만히 있어줄 것을 종용했다.
죽은 지 만 하루가 넘어 푸르죽죽해져버린 시체사진을 바라보는 것이 보기 안 좋아서 말을 꺼냈건만 괜히 건드렸다는 후회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뭐야, 너. 난 너랑 파트너란 이유만으로 비번까지 반납하고 나왔는데.”
“아.......”
“그러니까 정확히 뭐가 문제라는 거야? 저 녀석들이 교통사고내고 뺑소니치다 잡힌 거? 아니면 협조를 안 해준다는 거? 설마 저 녀석들 묵비권 행사나 변호사 선임 따위를 믿고 설치는 건 아니지?”

보기 안 좋아도 차라리 시체사진 붙들고 인상 쓰는 게 나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휴는 비번 반납이라는 무기에 차마 다른 말은 하지도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그녀와는 동기로 어쩌다 인연이 되어 파트너가 되었는데 그 순간부터 휴는 어쩐지 자신의 인생이 슬슬 꼬이지 않았나 싶었다. 서 내에서 모범생으로 알려진 휴 스트랜이, 시말서의 시자도 몰랐던 자신이 제인 베커와 만나고 나서부터 어느새 시말서의 달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동료들이 시말서를 쓰다 막히면 휴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대필을 부탁할 정도였으니 새삼 휴는 비꼬아진 제 인생을 두고 울고 싶어졌다. 뭔가에 잔뜩 기대하고 있는 제인의 또랑또랑한 눈을 보자니 말이다.

“너를 불러내는 게 아니었는데.......”
“넌 쟤네들 때문에 바쁘다며? 그래서 나 불렀던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대신 해준다잖아. 밤새 잠도 한 숨 못 잤을 텐데 이 정도면 눈물 나는 파트너애 아니겠어?”
“.........”
“자자, 휴게실 가서 눈이라도 잠깐 붙이고 있어. 조서는 내가 꾸며줄 테니까. 음- 그러니까 저 녀석들 중에 범인은 한명인데 누군지 모른다는 거지? 양아치들이라도 의리는 있다 이거야? 다들 꾹 입 다물고 있다는 건데.......오케이, 오케이.”
“저기, 제인. 너 설마 비번 반납한 것 때문에 화가 난 건-”
“응? 아니야. 일 때문인데 어쩔 수 없지. 나 그런 것도 이해 못할 정도로 쪼잔하진 않다고.”

어쩐지 신나하는 것도 같은 제인의 모습이 영 불안하기만 했던 휴는 제 등을 쭉쭉 밀어붙이는 그녀에게 결국 물음을 던져야만 했다. 그런 휴를 향해 돌아온 대답이란 시원시원했지만 그럴수록 밀려드는 불안감은 자꾸만 더해졌다. 그러다 문득 그녀에게 밀리던 걸음을 멈추지도 못한 채 고개만 돌렸을 때, 휴는 저도 모르게 절망하고야 말았다.
앙심을 품은 거다. 그도 아니면 스트레스가 최고조이거나. 어디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사고칠 일 없나 하고 찾던 중에 마침 딱 알맞은 일을 찾았다는 듯 섬뜩하게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빛이 보였다. 하지만 휴는 늘 그랬듯 이번에도 제인을 이기지 못하고 내쫓기듯 복도로 나와야만 했다.
터덜터덜 휴게실을 향해 걸어가는 휴의 걸음이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제인 베커. 나이 33의 노처녀. 동기생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생각하면 도리질부터 한다.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경찰대학을 다닐 때부터 남다름을 보였다던 그녀는 자신이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들에게 지는 것을 절대 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그녀에게 피해를 본 동기생들만 서 내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제인 베커를 일컬어 도시에서도 순화되지 못한 한 마리의 야수라고 일컬었다. 그 정도로 그녀의 성격은 누구도 감당키 힘들었으며 그로 인해 제인 베커의 파트너는 곧 희생양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라도 한 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제인 베커의 유일한 단점은 개방공포증이라는 거였다. 딱히 일상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제인은 언제나 좁은 듯한 느낌이 드는 공간을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그녀가 서 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취조실로서 사라진 제인을 가장 많이 찾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휴게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휴는 밖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제인 때문에 걱정이 앞서기는 했지만 밤새 누적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 들었던 순간이었다. 깜박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건만 시간은 벌써 한 시간이 흘러있었는데 평소와 다른 소란스러움에 휴가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휴게실 문이 벌컥 열렸다.

“휴! 여기 있으면 어떡해! 한참 찾았잖아!”

문을 열고 헐레벌떡 들어온 것은 같은 서에 배속된 동료로 그의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바람이 쌀쌀한 이 겨울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땀이라니. 휴는 동료의 얼굴에서 그가 자신을 얼마나 찾았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일단 나와 봐!”

당황한 동료의 모습에 휴는 가슴 저 밑에서부터 불안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급하면서도 심각한 동료의 목소리에는 무게감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더 묻지도 못하고 동료를 따라 나왔던 휴는 복도 저 끝에서부터 사람들이 웅성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 그 곳은 제인이 가장 좋아하는 취조실이 있는 곳이었다.

“설마-.”
“아마도 그 설마일 거야. 단지 널 위로하자면 아마도라는 거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안에서 문을 잠갔어. 도통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마티가 취조실에 놓고 온 시계를 찾으러 간다며 일어서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문이 잠긴 것조차 아무도 몰랐을 거야.”

뚜벅뚜벅 복도를 걸어가는 걸음소리가 유난히 더디고 컸다. 휴는 동료의 위로 아닌 위로를 들으며 절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휴의 모습에 동료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힘내라는 뜻인 모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료의 손짓은 조금의 위로도 되지 못했다.

“문을 잠글만한 녀석이라면 제인밖에 없는 거잖아.......아마도라고 해도 뻔해.”
“너무 그렇게 절망하지 마. 아직 뚜껑은 열어보지도 않았잖아.”
“그걸 넌 지금 말이라고 해? 아- 제인한테 맡기고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휴가 중얼거리며 제 머리를 양 손으로 싸매었다. 그런 휴의 절망적인 모습에 동료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안쓰러운 시선을 보였다. 그때 쾅 하는 소음과 함께 굳게 닫혀있던 취조실의 문이 열리며 꽁꽁 감춰져 있던 내부가 드러났다.
기본적으로 방음시설이 잘 되어있던 취조실은 보통 문에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리가 설치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철저하게 종이로 유리마저 안에서 막아버렸었다. 때문에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면서 어수선하게 사람들만 모여들었던 문 앞으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역시 제인 베커. 서 내에서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명한 그 모습이 기세등등하게 드러났다. 그 순간 한쪽에서는 풀썩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휴!’라는 외침이 들려온 듯도 했다.

“뭐야, 뭐. 구경났어? 왜 다들 여기 모여 있는 건데?”

제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세수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꾀죄죄한 몰골로 속 시원한 듯한 웃음을 보이며 나타났다. 그 뒤로는 죽을상을 하고 있는 울긋불긋한 머리의 사내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딱히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는 없을지언정 제인의 표정만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패악을 부려댔을지는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았다.

“저놈들 꽤 질기네? 도통 대답할 생각을 안 하더라고. 음- 이거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아.”

어느새 쓰러졌던 휴가 다시 일어난 모양이었다.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휴를 바라보며 제인은 구사하는 언어와 달리 즐거움이 역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말투에는 음률마저 묻어날 정도로 그녀는 현재의 상황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그에 반해 활짝 열려있는 문 너머 아이들은 죽을상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너 제대로 하기는 한 거야?”

이제는 가슴을 졸이다 못해 머리마저 지끈거리고 있었다. 휴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혼자 속 시원해 하는 제인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씁쓸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 즐거웠던 제인은 말없이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그녀가 제대로 했다면 저 어린애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을 리 없었다. 마피아도 때려잡을 정도의 악력을 가진 그녀였다. 제인이 대학교에 다닐 때 남자들은 그녀를 두고 여자도 아니라는 둥의 막말을 해대기까지 했었다. 그런 제인이 저런 폭주족 양아치 따위를 잡지 못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휴의 예상이 맞았던지 씨익 웃은 뒤 제인은 예상 안의 답안을 내놓았다.

“그럴 리가.”
“너-.”
“걱정 마. 오늘 안으로 처리해 줄 테니까. 너는 파트너 잘 만난 줄 알아. 이렇게 일처리도 대신 해주는 파트너가 어디 있냐?”
“그래. 얌전히만 처리해 준다면 말이지.”

말을 해봐야 듣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휴는 오랜 경험을 토대로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다. 체념 가득한 휴의 목소리에 애초부터 그의 기분 따위 아랑곳 않았던 제인은 고개를 끄덕끄덕 해보였다. 그런 뒤 손을 탈탈 털더니 이른 점심을 먹어야겠다며 휴의 팔을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제인에게 끌려가다시피 했던 휴의 표정은 울상이 되어 버렸다.




짙은 갈색 머리에 파란 눈. 조금 살집이 있는 통통한 외모의 귀여운 이미지였던 휴 스트랜은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란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 그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나 사춘기 때에도 큰 일 한 번 없이 평범하게 자라왔었다. 오히려 큰 문제 한 번 없었다는 것이 일이라면 일일 정도로 그의 가정은 이상적인 화목함을 유지했다. 그런데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란 휴의 햇살 내리쬐는 따뜻한 길목 같던 인생이 제인 베커를 만나면서 180도로 바뀌어버리고야 말았다. 이유는 당연했다. 휴의 인생에 제인 베커라는 존재는 너무도 감당키 힘든 이물질이었기 때문이었다.
휴의 인생이 단란하고 화목함을 주로 이루었다면 제인 베커는 학창 시절부터 알아주는 유명인이었다. 남자들도 때려눕힐 정도의 괄괄함이나 별다른 무술을 배운 것도 아니었건만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터득한 그녀만의 싸움기술들은 유단자들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녀 스스로가 말하길 본능대로 움직인다는데 그 본능이 지배하는 운동신경이란 거의 동물적인 것에 가까웠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주변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고 그만큼 제인 베커의 가족내력 역시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붉은 머리에 주근깨 가득한 얼굴의 그녀는 어머니가 스코틀랜드 인이었다. 어머니의 외모를 빼다 박은 그녀는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부모가 이혼을 하는 일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의 이야기를 휴와 처음 만난 날 얘기할 때의 그녀는 오늘 아침 식사 메뉴를 얘기하듯 너무 아무렇지 않아 했었다. 때문에 휴는 그녀가 일부러 상처를 감추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제인의 성격상 무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었다. 아니, 휴는 오히려 그런 심도 있던 생각을 한 자신을 나무랄 지경이었다.

“뭐 먹을까? 나 아침도 먹고 와서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을 것 같은데.”
“아무거나.”
“그래? 그럼 햄버거로.”
“또?”
“아무거나 라며? 그게 빠르고 편하잖아. 난 지금 배고파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어제도, 엊그제도, 그리고 그 전날에도 제인과 함께 점심을 했던 휴는 늘 똑같은 메뉴라는 것이 이젠 지겨울 정도였다. 음식이야 들어가서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그녀의 생각에 크게 반박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매일이 햄버거라는 것 충분히 질리고도 남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휴의 싫다는 기색에 강요라도 하듯 말을 뱉어놓고는 그의 팔을 잡고 무작정 끌었다. 그리고는 언제나 가선 서에서 200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맥도날드로 들어섰다. 가게 안은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서인지 꽤나 한산했다.

“어? 여긴 웬일이에요? 오늘 비번이잖아요.”

계산대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제인을 알아보고 대뜸 물음을 던졌다. 유니폼에 모자까지 쓰고 있던 여자는 이곳에서 반년 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반년 째 비번인 날을 제외하고 점심시간의 대부분을 제인과 마주하기도 했다. 그 덕에 덩달아 휴도 제인과 거의 비슷한 횟수로 보아서 그녀는 이 두 사람과 꽤나 친분이 생겼다.

“그렇게 됐어. 늘 먹던 거로.”
“더블 치즈버거 둘이요?”
“어. 거기다 햄버거 하나 더 추가.”
“예? 그렇게 많이요?”
“배고파서 죽을 거 같아.”

그녀가 자신의 쑥 들어간 배를 만지며 앓는 소리를 냈다. 먹을 거 앞에선 약해지는 제인의 습성 상 그녀는 이 아르바이트생에게 약했다. 하지만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제인은 여자였다. 아르바이트생은 그녀를 반신반의하며 바라보다 결국 주문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직업이 NYPD라는 것을 떠올리며 억지로 수긍하려 한 덕분이었다.

“일이 많이 힘드신가 봐요?”
“어. 오늘 비번인데도 일하러 나왔잖아. 이 녀석이 내 잠을 방해했다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옆을 지키고 있던 휴를 손가락질 하며 제인이 원망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런 제인의 말투가 웃겼던지 예쁘장한 아르바이트생이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러더니 자신이 직접 갖다 줄 테니 자리에 가 쉬고 있으라는 말을 했다. 식사시간에서 빗겨났기 때문인지 매장이 한산한 덕분에 할 수 있던 말이었다.

“아, 그래주면 고맙지.”

먼저 해 준다는데 피곤했던 제인은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듯 바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와 함께 흐흐 웃으며 창가 쪽 빈자리를 향해 걸어가는데 그런 제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휴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제인 베커를 알고부터 여자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게 되었다지만 때때로 알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오고는 했다. 휴는 절대 제가 원해서 여자에 대한 환상을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너 말이야. 좀 여성스러워 질 수 없어?”
“갑자기 뭔 소리야?”

제인보다 한걸음 늦게 그녀의 맞은편에 앉던 휴가 마치 훈계라도 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바로 빈정이 상해버린 제인이 눈썹을 슬쩍 밀어 올리며 휴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무슨 큰 행사라도 있지 않는 한 그녀에게서 화장기 있는 얼굴을 찾아보기란 힘들었다. 서 내에서는 그녀가 머리라도 제대로 말리고 오면 다행이라 할 정도였는데 그나마 오늘은 머리도 감고 오지 않았는지 자다 일어난 부스스함이 고스란히 남겨 있었다.
그런 주제에 머리는 또 길어서 그 부스스함이 배로 보였던 휴는 눈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슬쩍 시선을 피해버렸다.
도대체 몇 년째 입고 다니는지 모를 낡아빠진 청바지와 소매가 헤진 헐렁한 남방은 그녀가 무늬만 여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그녀에게서 가장 깨끗한 것은 운동화였는데 그것은 순전히 제인이 운동화 마니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로 답지 않게 운동화가 많았던 제인은 한마디로 일 년에 운동화 이외에 다른 신발은 신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와 일한 세월이 몇 년이다 보니 별의 별 일을 다 겪었던 휴는 아까 사건현장에 다녀오며 묻었는지 진흙이 조금 말라붙어 있는 하얀 신을 바라보며 한 일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언젠가 서에서 있던 큰 행사 때문에 드물게도 제인이 여성 정장을 입었던 날 죽어도 구두는 신을 수 없다며 끝까지 운동화를 고집했던 때를.
그때의 그녀는 예뻤다. 꾸미질 않아서 그렇지 본바탕이 미인이었던 제인은 여자 동료의 도움으로 화장과 머리손질까지 받았더랬다. 그리고 타이트한 까만색 투피스까지 입혀 놓으니 평소의 제인 베커가 맞나 싶을 정도의 미인이 그 자리에 떡 하니 나타났었다. 다만 까만 스타킹 아래로 구두를 신자마자 그대로 훌렁훌렁 내팽개쳐 버리고 자신이 신고 온 운동화를 신겠다고 바락바락 우기던 제인 베커는 평소의 그녀가 어디 가냐란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지만.
그리고는 결국 그녀의 고집을 아무도 꺾지 못해 NYPD의 숨은 진주가 될 뻔했건만 한 순간에 그 유명한 제인 베커로만 남고야 말았다. 치마정장에 회색 운동화는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그렇게 봐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제인의 의상테러에 격분한 반장님은 그녀의 월급을 감봉해 버리겠다며 이를 가는 통에 즐거웠어야 할 행사는 하루 종일 다운될 수밖에 없었더랬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몇 해 전 있던 우울한 일화를 떠올렸던 휴가 또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만남으로 해서 여자에 대한 환상을 포기했다면 날로 느는 것은 한숨이었다.

“더블 치즈버거 세트 나왔습니다. 주문하신 더블 치즈버거도 나왔고요, 이건 서비스예요.”
“정말? 이야- 고마워.”
“쉿. 매니저한테는 비밀이에요.”
“응, 응. 그럴게.”

자기 파트너야 한숨을 짓든 말든 아르바이트생이 쟁반에 햄버거를 가지고 오자 얼굴에 금세 함지막한 웃음이 핀 제인이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생이 서비스라고 주고 간 치즈스틱과 아이스크림을 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당장에 아이스크림부터 먹기 시작하는데 보통 여자로서는 감히 보이기 힘든 게걸스러움이었다. 휴는 매일 보아오던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새삼스러움에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안 먹냐?”
“먹어.”
“근데 뭘 봐? 기분 나쁘게.”

휴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니 제인이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흘끔 그를 바라봤다. 눈 끝이 슬쩍 올라간 것을 보니 까딱 잘못하다가는 시비라도 걸지 싶었다. 그래서 휴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제 앞으로 놓인 햄버거 포장을 열었다.
햄버거는 방금 만들어진 듯 따끈따끈한 열기가 손에서부터 전해져왔다. 그 따끈함에 마침 겨울 추위에 얼어있던 손끝이 녹는 것을 느꼈던 휴는 자신 역시 시장기가 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한 입 크게 배어먹으니 조금 전 또라며 싫어했던 기색이 무색해질 만큼의 맛을 느끼고야 말았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치즈의 부드러운 향에 아이러니하게도 음식을 입에 머금은 그 순간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소리가 꽤 컸던 모양이었다. 매장 안에는 신나는 음악이 틀어져 있었지만 음량이 그리 크지 않았기에 바로 앞에 있던 제인은 휴의 뱃속에서 나는 그 소리를 들어버리고야 말았다.
제인이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다 비우고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휴를 바라봤다. 조금은 놀란 듯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동그랗게 변한 눈 안에서 짙은 밤갈색 동공이 휴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배 많이 고팠구나.”
“.........”
“자, 이거 먹어. 특별히 주는 거야.”

제인에게서 간식이 아닌 식사를 양보 받는 다는 것은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 수 있을 터였다.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지키는 그녀는 한 끼를 굶을 때마다 점점 사람이길 포기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제인의 식사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으며 제인의 식사를 넘보는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녀로부터 서비스로 나온 치즈 스틱 하나가 휴에게로 건네지는 것이다. 내심 당황한 휴가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얼른 받으라는 듯 그녀의 손이 더 가까이 향했다.
그런 제인의 재촉에 얼결에 손에 치즈스틱 하나를 들어야 했던 휴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또 한 번 뱃속에서부터 꼬르륵하고 요동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을 굶은 것도 아니건만 배가 고프긴 고팠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배가 고팠으면 뭐라도 먹고 있지 그랬어.”
“아니, 나는-.”
“됐어. 먹기나 해. 쯧-. 이 짓도 먹고 살려고 하는 건데 너도 참 불쌍하다.”

졸지에 제인에게서 동정표를 받아낸 휴는 벙찐 표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속에서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으나 몸은 이미 치즈스틱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 입 깨물어 무섭게 퍼지는 뜨끈한 치즈의 맛에 행복해지고 말았더랬다.
한편, 그런 휴의 모습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제인은 쯧쯧하고 작게 혀를 찼다. 밤을 꼬박 새느라 초췌해진 휴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 없어보였기 때문이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건만 어째 그 먹고 살기가 버거운 휴의 모습에 동정표를 금치 못하는 그녀였다.
오늘 휴는 처음으로 제인에게서 불쌍하다는 시선을 받아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이 점심을 모두 먹고 온 뒤였다. 제인은 정말 배가 고팠었는지 아르바이트생이 우려한 것과는 달리 햄버거는 물론 서비스까지 한 입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워댔다. 그런 그녀의 식욕에 휴는 질린다는 시선을 지우지 못했더랬다.

“아- 잘 먹었다.”
“.........”

서로 들어오면서 제인은 볼록해진 제 배가 만족스럽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모습에 휴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소리들을 꾸역꾸역 넘겨댈 뿐이었다. 만약 생각한대로 말들을 쏟아내었다간 그나마 멀쩡한 한쪽 눈마저 퍼런 멍이 생길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봤던 그 시체, 뺑소니인 건가? 상태를 보아하니 간밤에 당한 것 같던데.”

다시 일을 시작할 모양인지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던 제인이 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막 점심시간 인듯 서 내는 배달시켜 먹는 이들 몇몇을 빼고는 사람이 없었다. 그 한산함에 마음마저 느슨해지려던 차, 휴는 일 얘기를 꺼내는 제인으로 인해 쏟아지던 졸음을 쫓아내야만 했다.

“목격자가 있으면 좋겠는데 좀 더 지켜봐야지.”
“피해자 소지품은?”
“핸드백은 있는데 지갑이 없어. 어쩌면 뺑소니가 아니라 단순강도일지도 몰라. 신원이야 감식반에서 알아올 테고.”
“흠- 그래? 왠지 이 사건, 질질 끌 거 같아.”

책상 위에 올려 진 피해자 사진을 바라보고 있던 제인이 그것을 한쪽으로 던지듯 놓아 버렸다. 그런 제인을 바라보던 휴는 별 말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늦은 밤, 그것도 인적 드문 길가에서 차 사고를 당한데다 피해자는 사망, 그리고 목격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더욱이 상황이 상황인 만큼 목격자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그나마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할만한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고 서른은 넘은 여성이라는 것과 입은 옷을 보았을 때 부유층이라는 것만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 머리 아파. 휴, 너도 이 사진들 좀 잘 봐봐. 단서는 현장에 있다잖아.”
“너는?”
“나? 나야 아까 취조하던 애기들한테 가야지.”
“......적당히 해라, 너. 경찰이 애들 팼다는 기사 나게 하지 말고.”

시일이 오래 걸릴 듯한 사건을 상대하자니 금세 또 머리가 아파왔는지 제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휴의 질책어린 말에 짧게 웃음을 한 번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 제인의 뒷모습이 불안불안했던 휴는, 그러나 한 번 더 뭐라고 하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일이나 하자.’

말 해봐야 들어먹을 상대가 아니었다. 그걸 지금껏 그녀와 함께 하면서 몸소 체험하지 않았던가. 말을 해봐야 제 입만 아플 뿐이라는 걸 이젠 넌더리가 나도록 알고 있었던 휴는 결국 그녀가 자신에게로 밀어놓고 간 사진들을 한 장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한편 제인은 아이들이 있는 취조실 문 바로 앞에까지 와 있었다. 지금까지의 정황에 따르면 차 사고를 내고 달아나다가 붙잡혔다는데 문제는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 중 누가 진범인지를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딴에는 의리를 지킨다고 입을 다무는 것 같았는데 그래봐야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입을 다문다고 모든 일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 시작할까?”

제인이 취조실 문을 열며 활기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 순간 취조실 안에서 퍼질러져 있던 다섯 명의 소년들이 벌떡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그 부산스러운 모습에 제인의 얼굴에 피식하는 웃음이 걸렸다.
소년들은 17,8세의 아이들이었다. 하나같이 집을 나온 가출청소년으로 이들 중 두 명은 부모와 연락이 되었다는데도 밤새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단다. 아이들이 이리 말썽을 부리니 멋대로 하라고 포기한 모양이었다. 새삼 밤새 유치장에서 씻지도 못하고 있느라 꾀죄죄해진 아이들의 모습에 제인은 슬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부모도 포기했다는 아이들의 모습이란 이 직업을 선택한 뒤로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늘 안타까움이 생기는 문제였다.

“피해자 측에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너희를 용서해 준단다. 찻값만 변상한다면 말이지.”
“쳇.”
“어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또 맞고 싶지 않으면 공손하게 굴어야지. 응?”
“아! 아야! 아파요!”

작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제 앞으로 쪼로록 앉은 아이들 중 한명이 불만스런 얼굴로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제인이 씨익 웃으며 아이의 볼을 주욱 잡고 늘어졌다. 어찌나 손이 매운지 제인의 손길에 얼굴이 이리저리 흔들리던 아이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고야 말았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친구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 한쪽에서 제인은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뻐근함을 풀어주었다.

“잠을 잘못 잤나?”

목을 한 번 꺾을 때마다 뚝, 뚜둑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앞에 앉은 소년들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답잖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던 제인이 이번엔 깍지 낀 손을 쭉 위로 뻗었다. 그 순간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뚜두둑 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제인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입이 떡 벌어져 있었다.

“경찰 아줌마, 운동해요?”

소년들 중 하나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위로 기지개를 쭉 폈던 제인이 눈썹 끝을 슬쩍 밀어 올리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녀석들이 보기에 자신이 아줌마가 맞기는 한데 빈정이 상해버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인지라 그녀는 불편한 마음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한다, 왜?”
“무슨 운동이요?”
“그건 알아서 뭐하게?”
“아니요.......”
“싱거운 놈. 얼른 불기나 해. 경찰서가 탁아소도 아니고 사고 친 한 놈만 있으면 되지 언제까지 줄줄이 사탕으로 엮여있을래? 자, 어젯밤 피의자 문짝 들이받고 도망간 놈이 누구냐?”

제인이 책상 위로 양 팔을 오렸다. 팔꿈치를 책상에 기댄 그녀는 손으로 턱을 받치며 물어왔다. 그 순간 소년들이 움찔하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던 그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어댔다.
지금까지 NYPD에서 일해 왔던 감으로 이런 어린 녀석들은 대충 훑어보면 누가 범인인지 때려 맞추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휴도 애를 먹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들 뭐가 그리 무서운지 다섯 놈 모두가 잔뜩 겁먹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다섯 놈이 다 한 번씩 들이받은 것 같기도 한데 사고접수는 단 한 건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마음 좀 고쳐먹으라고 다섯 놈들 모두에게 죄를 씌우고 싶건만 딸랑 한 건인 사고에 피의자를 모두 올릴 수는 없는 거였다. 아무리 형식적인 것이라 해도 향후 수십년간 보관될 기록으로 남는 조서였으니 말이다.

“아, 빨랑 불어! 니들 보기에는 경찰이 한가해 보이냐? 응?”

결국 속전속결이라 생각한 제인이 책상을 탕탕 두들기며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전 내 시달린 것이 있었던지 취조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배째라는 듯 껄렁했던 녀석들이 금세 몸을 사린다. 안 그래도 잔뜩 겁먹은 눈치였는데 그녀가 정말 무섭긴 무서운 모양인지 형형색색의 머리색을 하고 있던 소년들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제인은 자신보다 훨씬 큰 건장한 소년 다섯을 눈앞에 두고도 조금도 기죽거나 겁먹지 않았다. 도리어 녀석들이 덩치를 믿고 대들었다간 몇 대 쥐어박을 기세였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기세등등한 상황이 얼마나 흘렀을까. 순간 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이터 불이 켜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소년들이 고개를 흘끔 들어보니 제인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는 중이었다. 그녀는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인 뒤 허공에 하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오늘 비번인데다 아침 일찍부터 불려 나왔거든? 나 오늘 기분이 영 아니다. 나도 여기서 더 사고 쳤다가는 파트너랑 이별해야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 여기서 간단하게 끝내고 빠이빠이 하자.”
“저......”
“그래, 불게? 너냐?”
“아니요. 저, 담배 한 대만-”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밤새 유치장에서 시달리고 또 아침부터 제인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문을 당했던지 눈앞에 보이는 담배를 참지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상황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수갑이 채워진 손을 스리슬쩍 뻗어보이던 소년은 당장에 매서운 손이 머리통으로 날아오는 무거운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이내 조그마한 취조실 안에서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담배를 갈구하던 손은 제 머리통을 정신없이 문지르고 있었다. 그런 소년을 고깝다는 듯 바라보던 제인은 들인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새 책한 위에 몇 번 피워 물지도 않은 담배를 비벼 꺼 버렸다. 잔뜩 찌푸려진 그녀의 얼굴은 사납기까지 해 보였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전부 일어서!”
“잘못했어요! 야, 잘못했다고 해, 얼른!”
“잘못했어요, 아줌마......”
“이것들이! 얼른 안 일어서?!”
“말 할게요! 말 하면 되잖아요!”

반도 태우지 못하고 비벼 꺼버린 담배가 아까웠다. 그로인해 더 끓어올랐던 속을 제대로 한 번 풀어보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데 그런 그녀의 귓가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한 번 지옥 같던 아침의 얼차려를 받고 싶지는 않았던지 한명이 다급하게 소리를 내지른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의 따가운 눈총과 달리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것 같던 제인의 두 눈에서 힘이 서서히 풀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던 소년은 구원을 받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 이 치사한 자식! 너 혼자만 살겠다고!”
“조용히 못해?!”

한 소년을 둘러싸고 네 명의 비난이 시작되려던 차였다. 일갈로 그들을 단박에 제압한 제인이 자신의 정면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다섯 명 중, 정 중앙에 있던 소년은 붉은 머리에 한쪽 눈썹에는 피어싱을 하고 있었다. 턱 밑과 코에도 피어싱이 되어 있었는데 이들 중 가장 험악하게 생긴 인상과 달리 마음은 제일 약했다.

“말해봐. 누가 사고 쳤냐? 너?”
“아니요, 그, 그게....
“눈치 보지 말고 빨랑 말해라.”
“그게 그러니까.......”

다급한 마음에 입을 열기는 했지만 소년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고개를 슬쩍 틀며 한명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소년은 조금 전 제인에게 겁도 없이 담배를 달라했던 상대였다.
그 순간 지목당한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 다섯 무리들 중 유일하게 16으로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 방금 순식간에 변한 표정을 보니 어리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분명 나머지 네 명은 나이 상으로 형일 테지만 이 소년에게 그런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일 터다.

“오호- 너라 이 말이지? 안 돼지, 안 돼. 어린놈이 힘으로 형들을 괴롭히면 쓰나. 그런 녀석은 이 누나가 엉덩이에 불나도록 떼찌 해 줘야지.”
“누나는 무슨. 아줌마 주제에.”
“우후후후후후.”

생긴 것으로 볼 때면 가장 순진하게 보이던 녀석이었다. 나이도 가장 어려서 휴나 제인 모두 이 녀석은 아닐거라고 생각한 소년이었다. 그런데 제인을 향해 겁도 없이 빈정거리는 녀석의 모습은 그런 생각들을 뒤집어 엎기에 충분했다.
순간 새파랗게 어린 녀석에게 비꼼을 당했던 제인이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좁디좁은 취조실 안의 온도가 싸늘하게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깡으로 버티고 있던 소년과 달리 다른 넷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역시 나이에서 나오는 연륜이란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소년들의 머리를 꽉 매우는 순간이었다.
그때 제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빨리 일어났는지 의자가 뒤로 벌렁 넘어지고야 말았다. 쿠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진 의자가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그 소란에 소년들은 또 한 번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인은 취조실 문을 열고 목을 길게 빼내었다.

“이봐! 휴! 범인 찾았어! 네 명 내보낼 테니까 니가 알아서 해!”
“뭐? 왜 네 명이야? 한 명은?”

책상에 앉아 다른 일을 하고 있던 휴는 갑작스레 들려온 파트너의 목소리에 의아함을 표했다. 그때 취조실에서 아이들 네 명이 떠밀리다시피 나왔다. 어찌나 우왁스럽게 밀렸던지 그들은 취조실을 나오며 도미노처럼 쓰러지고야 말았다. 그 소란스러움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휴가 취조실 앞으로 다가왔지만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있던 제인은 파트너를 향해 의미심장한 웃음만을 씩 하고 지어줄 뿐이었다.

“누가 범인이야? 이제부턴 내가 할 테니까 넌,”

쾅! 하는 소리가 서 내를 메운 것은 순식간이었다. 제인을 향해 말을 하던 휴가 당황스런 표정을 하고 있었고 떠밀린 네 명의 아이들은 그의 발 밑에 남겨져 있었다.

“경찰 아저씨! 저 아줌마 좀 말려주세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제인에게 붙들려 들어가기만 해도 경찰? 이러면서 코웃음 치던 녀석들이 휴의 발치에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휴는 여전히 당황한 표정으로 굳게 닫힌 취조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자신의 발밑에서 금방이라도 울듯이 매달리는 소년들을 발견하고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휴 였다.

“너! 제인! 이 문 못 열어?!”

휴가 취조실 문을 쾅쾅 두드려댔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휴의 소란에 무슨 일인가 싶었던 동료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돌렸을 뿐이다. 이런 일이야 늘상 있다는 듯 저마다 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두 번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 사이로 여전히 문을 쿵쿵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휴와 그의 발밑에서 울상인 소년들이 있었다.

“제인~! 이번에도 또 사고 치면 너랑은 정말 절교야!!”

휴의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음성이 서 내를 꽈 채워왔다. 그의 음성이 취조실 안이라고 들리지 않을 리 없었건만 굳건히 닫힌 문은 묵묵부답이었다. 순간 휴는 안에서부터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지 않나 하는 환상에 잡혀버리고 말았다. 그의 얼굴은 곧 절망적으로 변해버렸다.
시말서. 그것은 언젠가부터 휴의 전문담당이 되어 버린 지 오래. 이젠 서 내에서도 시말서의 달인이라 불리는 휴의 능력은 오늘도 어김없이 발휘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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