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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POTM - The Gluttony

2007.10.05 02:1610.05

그는 나지막히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젊은 시절 연극을 했기 때문인지 감정이 자연스레 묻어 나오는 울림이 좋은 목소리였다.




“내가 그 여자를 만난 것은 삼년 전 쯤 이었소. 시내에 있는 어떤 재즈 바에서였지. 그곳은 간판도 제대로 걸리지 않은, 시야의 한 켠에 존재하는 그런 곳이었소.  
당시 나는 음악에 보다 술에 취해 있었고 때문에 꽤나 몽롱한 상태였소..... 어쨌든 나는 그런 곳에서 그녀를 만났소.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한 쪽 눈만 찡그리고 불만스런 표정으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지. 귀 밑으로 내려오는 오렌지색 곱슬머리가 고흐의 해바라기를 떠 올릴만큼 인상적인 매력넘치는 아가씨였소.
나는 마치 홀린 듯이 그녀를 감상했소.
바의 어두운 조명아래서 하얗게 보이는 목덜미와 깊이 파인 쇄골, 가늘고 길게 뻗은 팔. 내가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시선을 눈치 챘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담배연기의 커튼을 헤치고 내 쪽으로 걸어왔소.
상의는 몸에 달라붙어 굴곡이 드러나 보이는 민소매 셔츠에 하의는 허벅지까지 옆트임이 나있는 검정스커트였소. 발목도 가늘기 그지없었지만 허리는 거의 ‘욤욤공주’ 만큼이나 가늘었소.”


그는 잠시 숨을 돌리곤 자신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욤욤공주와 도둑의 ‘욤욤공주’ 말이오.” 라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세기의 명화라도 감상하는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고있는 동안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까지 와 옆자리에 앉으며 한 쪽 뺨으로 ‘싱긋’ 웃었소. 말 그대로 싱긋 말이오. 그녀는 정말 죽여주는 여자였소.... 아!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지.”




그는 쿡쿡 거리며 웃더니 사과를 했다.




“아.. 하하. 미안하오. 그 때 일을 생각하니 좀 웃겨서 말이오.
그녀는 웃는 표정 그대로 내게 ‘앉아도 될까요?’ 라고 물었소. 나는 급조된 티가 풀풀 나는 퉁명스러움으로 ‘이미 앉았잖소?” 라고 대꾸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을 뿐이었소.
그 뒤로 그녀와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소. 그녀는 재즈를 좋아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재즈보다 당신을 좋아하게 돼버렸다고 말했소. 그녀는 다시 싱긋 웃었소.
그 뒤부터는 스윙이니 비밥이니 하는 대화부터 델로니어스 몽크.. 디지 글래스피, 베니 굿맨, 찰리 파커.. 그냥 이런 저런 재즈에 관한 얘기를 했소.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는 인도 특산물같이 생긴 알록달록한 원색의 작은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깊게 빨아 들였소. 붉은 노을빛의 담뱃불이 바의 어두운 조명 아래서 붉게 타오르다 그 빛을 죽이자, 그녀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듯이 길게 연기를 내뿜고는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소. 그리고는 물었소. ’담배 좀 피워도 되겠죠?‘ 라고. 아마 그건 그녀의 버릇 같았소. 행동하고 나서 양해를 구하는 것 말이오.
허락 아닌 허락을 받은 그녀는 담배를 피우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소.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 사이로 깊숙이 자리 잡은 담배, 어두운 조명사이로 올라가는 푸른 담배연기, 명멸하는 담뱃불. 그녀가 담뱃불을 비벼 끌 때까지 나 또한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소. 담배연기를 전부 천국으로 올려보낸 그녀는 내 팔을 잡으며 기분이 좋아진 듯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소. ’우리 일어나요. 당신과 자고 싶어졌어요.‘
나는 그녀를 따라서 바를 나섰고 그녀는 택시를 잡아 탈 때까지, 아니 타고나서도 꼭 잡은 내 팔을 놓지 않았소.
그녀가 택시기사에게 행선지를 말하자 차를 곧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소. 나는 그 동안 마셔댄 술 때문에 기분 좋게 취해 있었소.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지.
그녀는 내 팔을 잡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소. 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낯선 표정이었소. 분명히 감정은 나타난 표정인데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지 알 수는 없었소. 요리 프로에서 설명하는 식으로 하자면... 슬픈 표정 두 테이블 스푼, 기대에 찬 표정을 차 스푼으로 두 번 넣고 기쁜 표정 차 스푼으로 한번.. 자조적인 표정 약간..을 넣어 멍한 표정의 틀에 넣어 예열된 오븐에 십분 정도 넣고 구우면 나올 법한 표정이었소. 그 표정을 보고있자니 나 또한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져들었소. 지금도, 아니 어쩌면 죽을 때가지 그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소.
얼마 후 처음 보지만 익숙한 곳에 도착했소. 밤의 도시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그런 동네였지. 적당히 어둡고, 쓰레기가 돌아다니고, 뭐 그런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동네였소.
그녀가 택시비를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리자 나는 그녀를 따라 내렸소. 그녀는 여전히 내 팔을 꼭 잡고 걷기 시작했소.
‘따각''따각’ 하고 그녀의 웨지힐 샌들소리가 밤길을 울리고 그 소리를 배경으로 그녀는 나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했소.
서로간의 연관성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질문들이었지.
‘공룡이 왜 멸종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계단을 한 번에 한 칸씩 올라가는지 아니면 여러 칸씩 올라가는 지. 자판기 커피를 뽑을 때 컵을 잡고 기다리는지 커피가 다 나오고 나서 컵을 잡는지. 사람 이름을 잘 기억 하는지,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는지 아무튼 이런 질문들이었소. 생각나는 대로 대답해 주던 중 그녀가 사는 오피스텔에 도착했소.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시작하자 그녀는 갑자기 키스해 왔소.
잘한다고는 할 수 없는 키스였지만 진한 감정이 듬뿍 묻어나는 그런 키스였소. 키스가 끝나자 그녀는 행복 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잘 고른 것 같네~.’ 라며 작게 중얼 거렸소. 그녀는 갖고 싶던 인형을 선물 받은 소녀의 표정으로 웃었고 그 표정을 본 나 역시 왜인지 행복해졌소.
곧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몇 발자국 걸어 문 앞에 멈춰선 그녀는 예의 그 인도특산물스런 가방에서 카드키를 꺼내 문을 열고 나에게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소. 문 안으로 들어가보니 집 안은 불이 꺼져 있었소.
철커덕 하며 등 뒤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소. 그녀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소.“




그는 자신의 뒷머리칼을 들어 올려 흉터를 보여 주었다. 머리칼을 내리고 그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깨어나 보니 뒷머리에 깨질듯 한 통증이 왔소. 뭐.. 실제로 깨져 있었지만. 손은 등 뒤로  단단하게 묶인 상태였소.
‘일어났나요?’ 하는 말에 목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몸을 돌려 바라보니 그녀가 통유리로 된 창문의 틀에 올라 앉아 있었소. 그녀는 내가 쓰러진 사이 갈아입었는지 얇은 슬립차림에 한 손에는 글라스를 든 채로 고개만 돌려 내 쪽을 내려 보고 있었소.
그녀는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이 이야기를 시작했소. 그녀의 나지막하고 창백한 목소리는 조용한 공간을 울렸소.”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녀와 그가 했던 대화를 혼자서 연기하기 시작했다.




“ ‘혹시.. 아세요? 어쩌다보면 갑자기 한 순간 배의 한 곳이 구멍이 난 듯 배가 고파져요. 내 속에 있는 것들이 위나.. 내장 같은 것들....아니, 몸 자체가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에요. 남는 건 배고픔과 공허함뿐이죠. 지금이 그런 상태에요. 아니 아까 그 바에서부터 계속 그랬어요.’
그녀는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소. 그리고 다시 말을 했소.
‘혹시 나를 원망하나요?’  나는 대답했소. ‘아니오. 그런데 당신과 자는 일은 이제 포기해야하는 거요? 난 묶인 채로도 괜찮은데 말이오?’ 멋지게 웃으며 말하고 싶었지만 뒷머리의 고통 때문에 찡그린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밖에 지을 수 없었소.
그녀는 ‘풋-’ 하고 웃었소. 내 말에 웃은 건지, 바보 같은 표정 때문에 웃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웃고나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소. 달빛에 손 그림자는 점점 늘어져 뱀이 기어오듯 리놀륨 바닥을 타고 내 얼굴 까지 왔소. 그녀는 그림자로 내 얼굴을 쓰다듬듯 가느다란 손가락과 손을 움직였소. 마치 그림자놀이를 하듯이.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던 그녀는 창문틀에서 내려 내게 다가와 몸을 숙이고는 내 귓가에 속삭였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네요. 아쉽게도..’
보드카 냄새가 물씬 풍기고 ‘우득’ 하는 소리가 몸 안쪽에서부터 들렸소. 귀로부터 정신이 증발해 버릴 것 같은 통증이 밀려 왔소. 술 같은 것은 단번에 깨버렸고 너무 큰 고통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소. 목줄기를 타고 피가 흘러내리고 움켜쥔 손에는 식은땀이 고였소.
고통은 여전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보았소. 그녀는 작은 입술을 조물거리다가 꿀꺽하고 내 귀로 생각되는 것을 삼켰소. 그리곤 다시 싱긋 웃으며 진득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말투로 속삭였소.
‘...당신은 아주 맛있을 것 같은데.’
통증을 느끼는 중에도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소.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지. 장담하건데 당신도 그렇게 느낄 거요.
차임벨 소리가 들려오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현관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여 찢겨진 내 귓바퀴를 천천히 핥았소. 귀에서는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소.”




그는 멋쩍은 듯 웃고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갑작스레 감정이 풍부했던 지금까지와 정반대로 책을 읽듯이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는 인터폰을 들고 잠시 무슨 이야기를 하고서 현관문을 열었소. 그러자 사람 두 명이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와 그녀의 팔을 잡았소.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한 사람에게 잡혀 밖으로 나가고 다른 한명은 잠시 헤매다가 거실 불을 켜고 내게 다가와 묶인 손을 풀어주며 물었소. 괜찮냐고....
이번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요.”



* 스스로는 환상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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