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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어느날의 통화

2007.09.27 23:3909.27


수화기 너머로 그 녀석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이런 목소리로 말하는 것 중 90%는 헛소리다.

"라천아, 사랑이란 뭘까."

역시나 헛소리. 난 간단하게 대답했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아무것도 확실치 않은 것."

내 대답에 이 녀석은 약간 이상한 목소리로 나에게 핀잔을 줬다.

"뭐야 신라천, 그건? 어디서 나오는 말이야?"
 
"타로카드. 왜?"
 
"아니 너무 철학적이라 놀랬다, 인마."
 
철학적은 무슨. 개미꼬리 반 토막만큼도 쓸모없고 장황하기만 한 ‘사랑’이란 단어를 꺼내는 건 무슨 경우냐?
하지만 이 자식은 어이없게도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이번 대화의 주제로 삼아버렸다. 어휴, 어지간히 사람 골치 아프게 하는 구나.
그 녀석은 한숨을 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야야, 암튼 나 어쩌냐."
 
"뭐가."
 
이 녀석은 약간 로맨틱한 목소리 (자기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로맨틱, 남들이 들으면 목을 졸라주고 싶은 목소리였다)

"짝사랑 때문에 힘들다. (있는 단어, 없는 미사여구를 써가며 몇 분 동안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내 귀로는 이렇게 밖에 안 들렸다) 미치겠어." (이 마지막 한마디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내 대답은 간단했다. 덩달아 완벽했고.
 
"미쳐봐."
 
물론 쌍욕을 듣기에 딱 좋은 대답이었다. 
그리고 쌍욕은 바로 돌아 왔다.

"이 XX아! 왜 XX하고 XX해서 사람 속을 XX하는 건데?!"

그러든 말든 나는 하품을 한번 해주고 귀를 한번 후비며 이 녀석의 욕설을 혼잣말로 만들어 이 녀석의 복장을 뒤집어 버린 다음 다시 말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이놈에게 정성과 배려는 쓸모없는 없는 덕목임을 내 속에 각인시키고.
 
"그래서. 짝사랑 때문에 미치겠다는 거 아냐."
 
"응."
 
다시 간단하고 완벽한 나의 대답이 다시 돌아간다.

"사랑하지 마. 안 미치게 딱 좋은 방법이네."

"…야."
 
나는 피식 한번 웃으며 물었지만 약간 진지함을 갖췄다. 이것이 죽마고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 생각을 하며.
 
"그래서,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하는 건데."
 
"어떻게 해야할지 좀 물어보게. 도움을 구한다고 해야하나."

“나한테? 다른 사람은 없냐?”

“없어.”
 
순간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이 놈이 정신을 어디다가 팔아먹은 거야?
일만 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외지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나한테 물어봐? 간만에 전화 좀 걸어줬더니 이런 헛소리나 나불대고 있어?
이놈은 계속 말을 이었다.
 
"네가 이런 거는 나보다 선배지 않냐. 조언 좀 해라."
 
‘머저리. 선배는 무슨. 나한테 뭘 바라는 거냐. 바보냐 멍청이냐?’ 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이를 상실한 나는 생각하는 데로 바로 내뱉어 버리게 만들었다.
 
"머저리. 선배는 무슨. 나한테 뭘 바라는 거냐. 바보냐 멍청이냐?"
 
그랬더니 이 녀석이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남은 진지하게 말하는데 그렇게 받아들일 거냐."
 
‘누가 나에게 그딴 거 물어보래?’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거는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그딴 거 내가 알까보냐."
 
"야, 신라천. 너도 그래봤으면 알거 아냐. 이거 얼마나 가슴 아픈 거. 가슴이 찢어진다고."
 
"꿰매."
 
역시나 명쾌한 대답. 나는 속으로 흡족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전혀 흡족하지 않은 듯 욕을 퍼부었다.
 
"(나를 쓰레기만도 못한 이물질로 만들고도 남을 난폭한 폭언들의 홍수)-자식아! 누구 닮아서 그런 수준 높은 농담을 하는 거냐!?"

나도 장난은 이 정도로 하고 진지하게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래. 부르짖어 보거라, 아가야. 들어주마."
 
"…두고 보자. 그래. 지금 내 상황은-"
 
그리고 이 녀석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말했다. 듣고 보니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상당히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잘만하면 충분한 가능성이 보이는데? 내가 봐도 한눈에 보인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뭐야. 한번 해볼만하잖아. 왜 가만히 있는 건데?"
 
이 녀석은 약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기가 안나."
 
허이구. 퍽이나. 바보.
 
"그럼 좋아하지 말던가. 바보냐?"
 
"너도 그랬었잖아."
 
망할 놈, 생각하기 싫은 걸 꺼내고 그래? 나는 눈살을 나도 모르게 찌푸리며 약간 사납게 말했다.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고."
 
이놈은 다시 얼빠질 소리를 내뱉었다.
 
"네가 내일은 어떻게 될지도 모르잖아. 누가 아냐? 내일이면 금발 미인한테 혹할 수도."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오싹함도.
‘사람일은 모른다고 하잖아요. 내일은 어떻게 될지 말이지요.’
이건 내 동생이 똑같이 말했던 소리다.
그리고 제일 거북한 소리이기도 하고.
얘는 이 소리를 어디서 들었어? 요즘은 이 말이 유행어냐?
 
"지금 누구 이야기하는 거냐. 내 사랑이야기 듣고 싶냐 네놈은?"

"알겠다. 아무튼."
  
다행히 이 녀석은 화제를 다시 복귀시켰다.
그리고 잡담 좀 하다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장황한 설명과 부연설명을 들었다. 뭐, 개인적으로 이런 얘기 할 데가 별로 없어서 나한테 한다고 한다. 자취 생활 반년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없어서 만인공용의 우물 (일명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수 있는 우물)인 나에게 이런 소리를 말하는 거다.
아무튼 자신의 처지와 힘들었던 하소연을 한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오빠는 조금 많이 힘들다, 뱀."
 
"옛 별명 부르지 마,  이 자식아."

나는 이 목을 조르고 싶은 싶은 죽마고우의 상황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만인공용의 우물인 나는 우물보다 딱 하나 나은 점이 있다.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게 개소리가 되었든 쓸만한 소리가 되었든. 
 
"그러면 고백해버리라니까."
 
이놈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네 꼴 나면? 너처럼 반 폐인 되면 어떻게 하냐?"
 
내 꼴? 아아. 젠장. 그건 망하는 거나 다름없을 터이니.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망할 자식. 할 말 없네."
 
그 녀석은 킥킥거렸다가 말했다. 이 자식, 상담하자는 놈이 이렇게 나와? 하지만 이 녀석은 약간 미안함이 드는 듯 다시 말했다.
 
"솔직히 네 꼴 보고 좀 무섭기는 무섭더라. 너처럼 될까봐 말이야." 
 
뭔가 오묘하게 기분이 나쁜데? 이놈은 내 기분에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진짜 고민 때린다. 어떻게 할까."
 
다시 기시감.
‘나도 실연 당할 까봐 무서워. 겁나기도 하고.’
아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은 전에 들었던 어느 누님의 ‘그 말’하고 똑같네, 똑같아.
누님. 당신도 이런 기분이었소? 그런 고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보오.
그리고 나는 이 녀석의 고민거리를 간단하게 일축했다. 두 번째이니까.
 
"지금 사귀어 봤자 나중가면 어차피 헤어질 테고, 그렇다고 도전 안하자니 가슴 아프고, 뭐 이런 거 아니야?"
 
"아, 뭐 이렇게 되나? 암튼 그래."
 
이런 바보를 보았나, 아니, 이런 거는 초등학생도 생각하겠다.
작가지망생을 지망하는 나는 이렇게 물었다.
 
"너, 어차피 죽을 거 왜 사냐?"

"뭐?" 

상당히 독특한 질문. 이 녀석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긴장감을 갖추고 다시 말을 이었다. 영어는커녕 한국어도 마스터 못한 나는 발표할 때의 긴장감으로 임해서 입을 열었다.

"삶 끝에 죽음이 있고 노래에는 끝이 있고 드라마에는 최종회가 있다. 모든 것은 다 끝나 이 자식아. 영원성, 아 젠장 어려운 말 하게 하네. 영원성을 지니지 않은 이상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어. 그런데 끝이 무섭다고 시작도 안하는 건, 그건 뭐 병신이냐? 그리고 내일일은 아무도 모른다며? 그럼 누가 알아? 네가 말한 헤어짐도 다른 방향으로 모색될 수도."
 
이상함이 느껴지는 내 말. 하지만 조리 있게 말하는 방법을 내가 알 턱도 없으니, 그냥 이 녀석을 납득시킬 말로 모색을 해봤다. '요새 별짓을 다하네.’라고 생각하며.
 
"끝이 있다고 안 달려가는 게 아니라, 끝이 있기에 달려간다. 이 정도만 말하마. 더 이상 말했다가 내 머리 터진다."
 
이 녀석은 약간 불안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실패하면?"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하는 거고.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그건 가능성과 유용함을 동시에 내포한 (아아 장하다 이런 말도 하고) 도전이라고 밖에 참견을 못할 거다."
 
대충 이런 식으로 도전을 해보라고 나는 계속 바람을 불었다. 그리고 조금 있어 이 녀석은 웃으면서 말했다.
 
"고맙다 어쨌든."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시끄러. 기껏 전화 걸었더니 고민 상담하자고 하냐. 아, 젠장. 전화카드 아까워."
 
"그래 미안하다, 라천아~ 그러니까 선물 사와~."
 
"…내가 왜. 네놈이 사야지."
 
그 녀석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내 속을 긁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근데 라천, 너는 요새 어때? 너 정말 주위에 괜찮은 금발 미인 없냐."
 
한숨.
그런 여자는 내 주위에는 없고, 있어도 그런 여자는 나하고 인연도 없다. 그리고… 하하.
뭐, 상관없겠지. 나는 요새 내가 써먹는 농담을 꺼냈다.
 
"난 여자보다 남자가 더 좋다. 됐냐?"
 
물론 정확히 3초 후에 후회하는 말이기도 하고.
이놈은 과장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 너, 너, 너, 서, 서, 설, 설마."
 
"…농담이다. 진심으로 듣지 말아다오."
 
뒷수습하기엔 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든 수습을 시도한다.
 
"거짓말하지 마!! 여자가 끌려 남자가 끌려!?"
 
…글렀나. 그리고 이건 무슨 웃기지도 않는 질문이냐. 아무튼 나는 다시 수습을 시도한다.
 
"젠장, 끌린다는 게 무슨 기준으로 정한 거냐? 그리고 그런 난감한 질문 꺼내지마."

나는 반은 진심으로, 반은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녀석은 다시 거침없이 반격을 시도했다. 

"야, 신라천! 이게 뭐가 난감한 질문이야! 간단하잖아! 여자가 끌린다고!"

"제기랄! 그러니까 그 끌린다는 게 무슨, 어떤 기준이냐고!"
 
"아우 진짜. 너도 남자잖아!"
 
아아, 우라질. 가뜩이나 요새 남자 애들한테 사랑한다는 소리 듣고 스캔들까지 얽히고 있는데. 이 놈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거로 시비를 거네?
아무튼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이놈의 별명과 인생의 치부를 몇 개 들추어내서 찍소리 못하게 만든 후 (짖어보라니까 정말로 멍하고 외쳤다) 말을 끝냈다.
 
"아무튼 잘 해봐라."
 
"그래 간만에 도움 좀 되었군 그래."
 
"끊는다."
 
"음."
 
장장 2시간을 통화한 후 나는 전화기를 놓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연심이란 게 차암 신기하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써먹을 데 없는 한심한 짓거리라고 생각했다.
 
'부질없는 짓이지. 비싼 밥 먹고 할 행동으로는 별로 추천을 못하겠는데.'
 
하지만 자기가 좋다고 하면 그걸로 만족이다.

나도 잠깐은 그랬으니까. 그리고-
한숨. 머저리 자식. 헛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생각의 전환을 시도했다. 짝사랑에 고민하는 내 친구에 대해.
이 일로 어떻게 되어먹든 그건 내가 상관할 수도 없을 테니까.
뭐, 그렇다고 너무 바보인 것도 아닌 녀석이니까. 자기 앞가림은 잘하겠지.
그리고 기분 좋게 샤워나 할까 생각하다 잊어버렸던 걸 기억했다.
내가 왜 이놈한테 전화 걸었지?  

"아, 맞다. 부탁할 거 있었지."
 
전화기를 집어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무반응.

“…어랍쇼?”

전화기는 방전이 되어서 죽어버렸다.

“…….”

몇 초간의 싸늘한 침묵. 그리고 침묵은 곧 절망을 동반한다.

“…눈물이 나는구나. 젠장….”

방전이 되어버린 전화기를 손에 집은 채, 망연자실한 내 모습만이 내 방안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 호접지몽, 공수래공수거란 말이 단숨에 생각나는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메일로 보내야겠다.
 
 
그리고 오늘 답 메일이 왔다.
성공했다는 메일을 받았다.
나에게 고맙다며 선물로는 코알라와 캥거루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부탁한 것은 새까맣게 까먹은 채 말이다.
나는 이 녀석이 내 기억 속에 남긴 자신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할 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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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한 글이라 조금, 뭐랄까 장난처럼 쓴 것도 있을 수도 있군요.
전문인 장르가 아니었지만 이런 소재를 갖기가 드물어서 이렇게 미력하나마 한편 올려봅니다. (근데 두들기다 보니까 원래 쓰고자 했던 장르보다 쓰기가 더 쉬워지더군요 -_-;; 원래는 대하소설을 추구했는데;)
아무튼 읽어 주셔서 고맙고,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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