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교사는 말을 이었다.
  “…그 영화는 내가 보기엔 썩 좋은 영화는 아니다. 80년 5월 광주,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 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너희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을 거다. 너희들 중에, 그런 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오른 쪽 무릎이 쑤셔오는 걸 느끼며 말을 이었다.
  “군인들도 시위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이고, 명령 때문에 마지못해 진압했을 뿐이다. 당시가 워낙에 살벌한 시대였던 데다가 군중심리에 휩쓸려서 그게 도가 지나쳤지만. 하지만 그 영화에선, 그저 선과 악의 대결이란 식으로 단순화시켜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동정심만 유발할 뿐인 이미지들만 두드러질 뿐….”

  또 자기 이야기에 도취되어 버렸구나. 퍼뜩 그 사실을 깨달은 교사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교실을 메운, 똑같이 짧게 깎은 머리에 똑같은 교복을 걸친 40여 명의 학생들. 반 정도는 진지하게-혹은 재미있게- 듣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지루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닭장이다, 이 교실은. 옛날보다 시설은 물론 좋아졌지만, 그 안에 갇혀서 지식이라고 불리는 시뮬라크르를 기계적으로 집어삼키기만 하는 그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교사는 문득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덜컹대는 닭장차와 뿌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모래 낀 차창 너머로 보이던 형형하고, 겁에 질리고, 또렷하고, 흔들리던 눈빛들.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4분단 앞쪽에 앉은 녀석이 손을 든다. 교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면서도 약간 주저하는 태도로 입을 뗐다.
  “혹시… 그 때 선생님도 거기에 계셨습니까?”
  80여 쌍의 눈들이 일제히 자신을 향한다. 방금까지 그 눈 속에 가득하던 지루함과 피로는 간데없고, 흥미가 가득하다. 교사는 피식 웃었다.
  “그래.”
  “선생님,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저도요! 선생님은 어느 쪽이셨습니까?”

  서로 재빨리 주고받는 눈빛, 키들대는 웃음소리. 악의 없는 소란스러움. 그런 아이들에게 교사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어느 쪽도 아니었어, 난 잡혀갈까봐 무서워서 얌전히 집안에만 있었다.”
  “에이, 더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 이야기 해주시면 이번 모의고사에서 300점 넘길께요!”
  “선생님 이야긴 안 지루해요!”
  “너희들,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소리하는 거지?”
  “아니에요-!”

  그는 교탁 옆을 가볍게 두어 차례 두들겼다.
  “다른 반은 아직 수업 중이니 조용히들 하고. 이제 수능이 얼마 안 남았다, 다들 피곤하고 힘든 것 안다. 하지만 자율학습 시간까지 깨먹어 가면서 길게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은 건, 너희가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 건지를 다들 한번 정도는 생각해 봤으면 싶어서다. 오늘 종례는 생략할테니, 야자 하는 사람들은 남고 학원이나 독서실 가는 사람들은 빨리 가라. 수업 마친다.”
  학생들을 대표해 목례하는 학생회장을 뒤로 하고, 교사는 교실 문을 나섰다. 다리가, 마음이, 영혼이 절룩거린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비치기 시작했다.


  교사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옆에 누워있던 윤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샤워기 소리를 들으며 교사는 윤지의 매끄럽고 곧은 등을 상상했다. 은은히 낮춰둔 스탠드 불빛 아래로 보이는, 여자 아이 특유의 등에서 허리, 엉덩이에서 허벅지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곡선. 얇은 이불은 싱싱한 육체를 가리기는커녕, 여고생 특유의 풋풋한 관능성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끔 한다. 교사는 윤지의 탱탱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떠올리면서 그 몸이 하는 일을 잠시 몽상했다.

  “일어났어요?”
  딸깍, 문이 열리며 타월로 몸을 가린 윤지가 걸어 나왔다. 싱그러운 살냄새와 비누냄새가 풍겨왔다. 교사는 이불자락으로 아랫도리를 가린 채 어색하게 몸을 일으키며 어, 하고 짧게 대답했다. 하루 이틀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얼굴에 피가 몰리는 걸 느끼면서 교사는 바닥으로 내려와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서 팬티 한장만 걸친 채 나오자, 윤지는 이미 옷을 입고서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상체에 딱 달라붙는 긴팔 면티에 스키니진 바지 차림. 교복은 작게 개켜져 가방에 들어 있을 것이다. 거울에 비친 윤지의 얼굴에 파운데이션과 마스카라, 립스틱이 덧칠되어 가며 아직 남아있는 앳된 티를 서서히 지워가는 것을 바라보며 교사는 침대 모퉁이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가짜, 가짜, 가짜들만 차고 넘친다. 진본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실종되고 조잡한 모사들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사람들은 그에 도취되어 휘청거린다.

  “…안 돼요?”
  “으, 응?”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자 어느새 나갈 채비를 마친 윤지가 옆에 앉아 있었다. 윤지는 뾰루퉁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했다.
  “그게… 친구들이랑 옷 몇벌 샀더니 돈이 다 떨어져서, 이번 달 용돈은 조금만 더 주면 안 돼요 아빠?”
  “글쎄다, 저번에 준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는 교사의 표정을 본 윤지가 바싹 다가와 몸을 붙이며 그의 허벅지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교사의 허벅지를 살살 쓰다듬으며 그녀는 약간 코맹맹이 소리로 칭얼대듯 말했다.
  “아빠아…. 이게 유행이란 말야, 아빠는 딸이 친구들 틈에서 따 당하면 좋아요?”

  교사는 다시 피가 끓어오름을 느끼며 윤지의 반짝이는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 순진해 보이는 반짝거림 너머로, 음험한 탐욕으로 새카맣게 불타오르는 그녀의 영혼이 보이는 듯 했다.
  더러운 계집애, 어린 게 돈 맛은 알아서 아버지뻘 되는 상대에게 거리낌 없이 몸을 내맡기는 짓거리라니. 교사는 그 순간, 진심으로 그녀를 경멸했다. 그렇게 해서 돈 받으면 좋아? 창녀 같으니. 땀 흘려 일해서 돈 버는 건 구질구질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내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일을 했는지 알기나 해? 아니, 몰라도 돼. 관심 갖지 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좋아, 여기 있다.”
  교사는 벽으로 걸어가, 거기 걸려있던 양복 상의에서 지갑을 꺼내 10만원 짜리 수표 두어 장을 꺼내서는 윤지의 앞가슴 사이에 찔러 넣었다. 먹고 떨어져라, 더러운 년.

  “아빠 멋져, 최고!”
  윤지는 반색을 하며 수표를 꺼내 쥐고는, 교사의 볼에 입을 맞추고서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핸드백을 집어 들고 뛰듯이 방을 나섰다. 그래, 가라 어서. 바빌론의 탕녀야. 네가 속한 그 음부로 돌아가라.

  교사는 텅 빈 여관 방 안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다음 일을 생각했다. 이제 집으로 들어가면 9시 경. 아내가 저녁을 차려 놓고는 밥상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들은 학원에서 막 돌아와 씻고 있는 중일 것이다. 둘째는 숙제를 해 놓고는 자기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을 테고. 현관엘 들어서면 아내가 걱정스런, 그러나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을 테고 애들은 나와서 인사를 할 것이다. 큰 놈은 가방과 상의를 받아서 걸어놓고, 둘째는 장기판을 들고 와 한판 두자고 조를 것이다….
  그치지 않는 비가 쏟아진다.(*)
            
  
k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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