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태초에 우리의 별은 노래했다.


짙은 담배연기가 허공을 유린했다. 흔들림 없이 똑바로 올라가는 연기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닥에 쓰러진 몬스터들의 피가 역겹다. 동료들은 생존여부조차 불투명하다. 벌써 이곳을 빠져나갔던가. 아니면 함정에 걸려 죽었겠지. 던전에서 트레져헌터와 도적. 둘중 하나가 없다면 노련한 전사라도 죽기 십상이니까.

정말. 마지막으로 탐험하는 던전이라고 조금 들떴던 것 같다.
최근 쓸만한 고대의 유적은 모험자들에게 전부 클리어 된 상태다.
고대의 유적은 대개 복원력을 가지고 있어서 지켜야할 물건들은 모조리 털린 주제에 수많은 함정을 뚫고 죽을힘 다 해서 들어갔는데 이미 선객이 있어서 보물을 싸그리 털린 경우는 제법 흔하다.
누구나 보물을 찾았다는 것은 숨기고 싶어 할 것이기에 탐사가 끝난 유적들이 어떤 것인지 헌터들의 정보망에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요즘 사실 이 장사는 못해먹을 일이다.
그나마 아직 확실하게 털리지 않은 곳이 몇 군데 쯤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들어가는 사람이 없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곳이라는 증거이다.

소멸해가는 마법은 확실히 예전보다 파티의 전투능력을 저하시켰다.
예전, 그러니까 내가 처음 활동을 시작했던 시절처럼 국가에서 금지로 못 박을 만큼 강력한 던전을 몇 명의 모험가 파티로 들어가는 것은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수차례나 유적을 발굴하여 천문학적인 재산을 모았지만 다음대의 조사에서 경비로 전부 써버리고 암시장에서 비싼 마법물품을 사들이고 다음의 조사를 준비하는 것을 반복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남은 것은 금부스러기 몇 개 였다.

트레져 헌터라는 직업도 이미 거의 소멸해가고 있다. 쓸만한 인재는 레인저로 들어가거나 도적 길드에 가입하는 등.
쉽게 말하면 사양직업이랄까.
그나마 남아있는 자라면 나처럼 이미 ‘맛’을 본 자들뿐일 것이다.
보통 일생에 구경조차 쉽지 않은 것들을 직접 발굴해본, 그리고 그 마력에 빠져들어 정신을 차렸을 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들.
그렇다고 해서 발굴할 유적이 별로 없는 이런 시대에 던전 발굴이라 이름 붙이며 시체가 되어버린 마법사들의 연구소를 터는 정도일까.

이번엔 정말 운이 좋았다.
미 발굴된 유적의 정보라는 생에 한두번 있을까 말까 한 큰 건수였다.
동료를 모으고 탐험을 시작했지만 역시 모험가라는 종자도 찾아보기 힘들어서 그런 걸까. 쓸 만한 녀석은 모으지 못했다. 충분히 주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경고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함정을 작동시켜버린 머저리들.
골치 아팠다.
지친채로 어둠속에 있다면, 공포든 추억이든 무엇 하나쯤은 떠오르는 법이다.
나도 누구나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는 듯 옛날 추억이 스물스물 무의식의 저편에서 기어올라왔다

태양은 언제나 그렇듯 저 멀리 산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니 세상이 시작 되었을 때부터 정해진 그런 법칙을 따라 지루한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내 옆에는 아버지가 서 있었다. 왜 그랬을까. 기억속의 아버지는 항상 홀로 서 있었다,
그날은 왠지 모르게 그렇게도 싫어하던 아버지와 같이 언덕에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기억속의 아버지는 너무도 지친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부자는 그렇게 석양을 그리고 흐릿한 기억속의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퇫. 바닥에 먼지섞인 짙은 가래를 뱉었다. 항상 냉정한 인간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의식은 기억을 거부하고 있었지만 한번 떠오르기 시작한 기억은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쿨룩 거리는 기침. 그리고 고개를 설레 설레 젓는 의사. 나는 의사가 아니고 아버지에게 매달려 어머니를 살려내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법사였다.
사멸해가는 고대 마력의 법칙을 잇는 자. 하늘을 가르고 드래곤을 부리며 마왕과 자웅을 겨루고, 하늘의 신조차 물리쳤다는 위대한 마법을 잇는 자였지만 실제로는 한 번도 제대로 된 마법을 보여준 일 조차 없었다.
잠든 채 기력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아버지에게 절규하고 사정하며 마법을 써서 어머니를 고쳐달라고 외쳤다.
평소 자신은 마지막 남은 전설을 잇는 자라고 호탕하게 소리치던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팔이 근질근질 했다. 만져보니 어디선가 긁힌 듯 길다랗게 살짝 부어올라 있었다. 작은 상처였지만 그 고통은 나를 회상의 바다에서 끌어올렸다. 나는 연고를 꺼내 상처에 발랐다. 제대로 된 치유는 어차피 무리. 크지도 않은 상처니 독이 없기만을 바랄뿐이다.

이런 답답한 곳에 몇 일이나 있었지만 아직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위험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겪어왔다.

동료를 잘못 모은 것은 내 잘못이긴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유적에 대한 정보를 준 녀석을 저주하고픈 마음이 불쑥 솟아오르는 건 당연지사다.
슬슬 은퇴하고 다른 일을 찾아보려는 나에게 녀석이 선물이라며 던져 준 고대서. 책에 적힌 고대어는 현재 알려진 마법문명보다도 더 전. 그러니까 환상의 나라 길칼레스가 다른 두 나라와 겨루던 시대의 문자였다.
신화나 전승에도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잊혀진 시대의 문자라니. 나는 전율했다. 그동안의 탐색에서 우연히 길칼레스의 문자를 약간이나마 익힌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띄엄띄엄 읽어내린 문자는 나를 경악케 했다.

고대신의 신체를 봉인한 유적.

이건 정말로 대박이었다. 신성이 사라지고 있는 현재의 교단에 팔아넘긴다면 그야말로 한평생의 수준이 아니라 자손 삼대 정도까지 먹고 살수도 있었다. 물론. 그만큼 위험하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트레져 헌터로서 십 수 년간 일해 온 나는 이 책에 일백 프로 대박의 기운이 넘실거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미친 듯이 번역에 열중하여 결국 일년 만에 나는 책을 전부 번역해냈다.

그리고 그 욕심의 결과가 이것이었다.

친구의 귀가 가려워서 떨어질 정도로 욕을 해댔지만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이곳의 함정은 그야말로 단순했다. 끝을 알 수 없는 미로. 그리고 간간히 나오는 몬스터들. 삼일이 넘게 헤매이고 다니며 종이에 그리던 미로는 결국 갈림길에 그어대는 표식으로 대체했지만 이곳은 끝이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전설에 나오는, 드워프와 신이 만들었다는 대미궁이 바로 이곳이 아닐까.

문득. 달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거의 항상, 어머니가 고통에 몸부림치다 잠들면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집 뒤편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달을 보고 싶었다.
언제나 바라보아도 달은 아름다웠다. 밝게 빛나는 달빛은 어머니의 고통조차 씻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창문을 열고 어머니가 달빛을 가득 받을 수 있게 했다가 아버지에게 혼난 적도 있었지.
어느 샌가 다시 아버지 생각이다.
잠깐. 그래 아버지가 딱 한번 마법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언제였을까. 맞다. 그건 아마도 어머니가 쓰러지고 난 직후였을 것이다.

“아버진 마법사잖아요! 마법으로 어머니를 고쳐달라 구요!”

나는 강하게 아버지에게 비난을 쏟아냈다.
그때 내 이마에 따뜻한 두 방울의 물이 떨어졌다.

집을 뛰쳐나가 언제나 서 있던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위에서 고개를 쭈그리고 훌쩍거리고 있을 때, 덩치 큰 그림자가 나를 감쌌다. 그리고. 그리고.

왜지 또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버지가 보여줬던 마법은 뭐였지?

에휴. 이런 생각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 조금이라도 쉬어서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나서야지.

잠을 못잔 것이 3일째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눈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러려니 할 것 같다.
아직 체력이 있지만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
조금 위험하지만 하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도구로 주위에 간단하게 트랩을 장착했다. 종을 달아 소리를 울리게 해놓고 바로 아까 베어버린 오크의 시체를 베고 잠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일곱 살이었다.
아버지가 슬피 울었다.
달은 너무도 밝았다.

훌쩍 거리며 언덕위의 큰 나무 밑에 누워 있는 내게 아버지가 성큼 성큼 걸어와서 나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마법사란다.”

퉁명스럽게 나는 되받아쳤다.

“알고 있다구요. 어머니 하나 살리지도 못하는 무능한 마법사.”

일곱 살의 나는 너무도 잔인하게 처를 잃은 아버지의 상처를 헤집고 있었다.

“무능해서 미안하구나.”
“할 수 있는 마법도 없잖아요!”

툭 쏘아 붙인 채 나는 돌아누웠다. 아버지는 짧게 미소지었다.

“태초에 별들이 노래했다는 건 알고 있니?”

어리다고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겁니까. 이정도면 기억하기 싫을 만도 하네.

“별이 어떻게 노래해요?”

어린 나는 그렇게 물었다. 아까까지 울고 있었으면서 참 회복도 빠르다.

“옛날에. 아니 지금도 별은 노래하고 있단다. 다만 지금은 사람들의 마음에 어둠이 있어서 별의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것 뿐이야. 옛날의 뱃사람들은 별의 노래를 들으며 바다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으로의 길을 알아냈단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선 품에서 짧은 완드를 꺼냈다.


별은 언제나 노래하나 인간의 귀는 듣지 못하네.
아름다운 시절
그때의 음색을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길 청하니
바라옵건데 별이여 우리에게 그 아름다운 울림을 들려주소서.

한번도 듣지 못했던 청아한 음성으로 아버지가 노래했다. 아니 그건 노래가 아니었다.
그리고 별이 노래했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음악이 아니었다. 소리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은 천사의 나팔이었을까? 아니면 신의 음성이었을까.
나는 멍하니 서서 소리 없는 별의 노래를 보며 아름다운 선율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잊고 있었을까.

종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튕기듯 일어섰다. 금새 익숙해진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 믿을 수 없었지만 바람이 불고 있었다. 트랩을 걷고 바람을 따라 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서 거대한 구멍이 보였다. 아까 지나칠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동료들이 뚫었던 걸까? 멍청하다는 말을 취소하며 밖으로 달렸다.
일주일만에 마시는 신선한 공기가 너무도 향긋했다.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 하늘은 별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란다. 아버지는 너무도 실력없는 마법사라 너에게 별의 노래를 들려주는 것밖에 하지 못하겠구나. 잘 보렴. 저기에 있는 별은 어머니의 별이란다. 이제 빛이 다 하고 있지. 마법은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이미 죽음이 결정된 사람을 살릴 수는 없는 법이란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아버지의 별도 너의 별도, 모두의 별들이. 어머니의 별을 위해 노래하고 있잖니.”

별은 소리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법도 없었지만 느끼고 있었다.

“잊지 마려무나.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의 말이 귓속을 맴돌았다. 별은 언제나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노래하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아버지. 나의 별도. 아버지의 별도 노래하고 있다는 걸요.

그리고 언젠가. 어머니의 별도 다시금 노래하리란 것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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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쓴 단편입니다. 우연히 발견하고선 이런 것도 썼었구나. 하는 생각에 조금 손을 봐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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