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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의혹

2006.02.27 14:3302.27

욕망은 사람에게 진취력을 주어 영광을 부여하기도 하나, 때로는 악마로 만들기도 한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끝없는 지식욕 때문에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은 파우스트 박사는 ‘파우스트’의 결말과는 다르게 민간에서 전승되어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메피스토에게 영혼이 갈가리 찢겨져서 지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3개월 전, 그날 이후로 나는 스스로 악마와 계약을 맺은 파우스트 같다고 착각하는 증세가 생겼다.

임관된 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정의감 넘치는 햇병아리 열혈 검사인 내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약관 20여세의 청년이 뒤에 험상궂은 인상을 가진 부하들을 대동하고 소파에 앉아있다. 이름을 ‘산’이라고 하는 그는 내가 행하는 법의 집행을 그늘에서 백업(Backup)하고 있다. 범죄의 증거를 캐내서 그에게 알려주면 일당을 이끌고 가서 목표를 쇠망치로 호두 깨듯 바수어 놓는다. 그는 빠르고 정확하게 의뢰를 처리했다. 어떤 상대든 간에 무리를 이끌고 가서 박살을 내놓았고, 나는 수월하게 법을 집행할 수 있었다. 잠시 후, 경찰 병력을 이끌고 도착한 나는 악당들의 냄새나고 못생긴 낯짝에 영장을 들이대고 수갑을 채운다.
나와 그는 비밀스러운 계약 관계이다. 그와 부하들이 도시에서 살 수 있도록 물품을 대주면, 그들은 나를 돕는다. 정의로운 성격이며, 법을 집행하는 나에게 그들은 훌륭한 조력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그들이 의심스러웠다.

그와의 첫 만남은 내가 권력의 힘에 밀려서 살인자에게 바른 법을 집행하지 못하고 실의감에 빠져 지내고 있을 때, 추적추적 이슬비가 내리는 명동 밤거리를 홀로 걷고 있는데 그가 은밀하게 다가왔다.

“장 검사님이시지요? 당신께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내게 바짝 다가온 그는 내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고,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정의를 위한 것이라도 그가 제안한 내용은 엄연한 폭력이다. 폭력은 가급적 배제하고 싶은 나와는 맞지 않았지만 지금 사회는 강력한 법을 원하고 있고, 건강한 나라기풍을 갉아먹고 있는 쥐새끼들을 쳐 죽이려면 몽둥이를 사용해야 한다고 남자는 나를 설득했다. 이 땅에 바르고 강력한 법을 세우고, 이를 잘 지키는 풍조를 조성하여 지고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나의 꿈을 이룰 발판을 마련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보다는 남자가 말한 ‘강력한 법과 힘에 의한 사회 질서 이론’에 매료되어서 그와 계약을 맺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그의 도움에 나는 정의의 실현을 할 수 있었고, 어느새 모르게 나야말로 진정 정의(正義)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어느 날, 서울 어떤 중학교에서 일어난 폭행살인사건 현장에 가보게 되었는데, 가해자는 지인의 아들로서 나와는 형, 동생 하던 사이였다. 그는 울먹이면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동생 같던 아이의 호소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걱정 말라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고 안심 시켜놓고 나오는데, 공교롭게도 피해자의 부모와 마주쳤다.

그들은 내 소매를 붙들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부디 불쌍한 자기 아들과 자신들의 심정을 헤아려달라고. 그들의 눈물을 본 나는 한 순간이나마 범법자를 두둔한 사실에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격분했다. 되돌아가서 의자에 앉아있는 녀석의 가슴을 걷어찼다.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그를 마구 짓밟았다. 가증스러운 놈. 살인자 주제에 법을 집행하는 정의인 내게 도움을 요청하느냐. 이 살인자야, 일어나 빨리 걸어라. 너는 적어도 10년 간 콩밥을 먹어야해. 주위에서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마구 짓밟았다.

경찰들이 간신히 말려서 학교를 나오는 내 눈에 교문으로 들어오는 산과 고참 부하 셋이 보였다. 산은 이죽거리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내가 폭력을 사용한 것을 알고 있고,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가 다가와서 내 귀에 속삭인다. 이미 살해자의 집안은 물론 그 친가, 외가와 지인, 친구들의 집까지 모두 쓸어버렸다고 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십 차례 도움을 준 그였지만 몇 개의 집을 숨 한 번으로 짚으로 지은 움막 날려 보내듯이 훑은 그가 두렵게 느껴졌다. 이후로 나는 그를 불신하게 되었지만, 그는 변함없이 나를 돕고 있다.

무엇을 그리 생각하느냐는 산의 물음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산은 사과를 가져와서 깎아먹고 있었다. 한 조각을 권하기에 받아들였다. 손은 괜히 떨리고 있었다.

산에게 출신이 어디냐고,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내색은 않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차있는 의심은 그에 대한 신뢰를 바닥까지 끌어들인다. 산은 사과 과육을 씹다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당신을 돕는 조력자이지요.”

나는 종교를 믿는다. 종교에서 사랑과 자비는 최대한 베풀라고 권장하는 덕목이다. 법가를 제창한 한비자는 법을 엄격하고 공평하게 집행하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법의 덕목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비와 엄격하고 공평하게 법을 적용하라는 옛 사람의 말은 종교를 믿는 신도와 법을 지키는 검사이기도 한 나를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산이 다음 목표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그를 불신하게 되었을 때부터 실탄 한 발을 재어둔 권총을 뽑아 그의 미간에 겨누었다. 노리쇠를 철컥 당겼다.

“이 죄인아! 넌 죄를 지었다! 네게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도 희생시킨 죄가 있다! 죄인은 법만이 심판 할 수 있다. 네놈의 주먹이 심판하지 못해!!”

나는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기세인데, 산은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를 변호한다.

“나의 죄가 무엇입니까? 나는 고결한 정의감을 가진 당신이라는 법의 집행자를 통해서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그것뿐입니다.”

죄인 주제에 주제 넘는 말을 하는 것이 비위에 거슬렸다. 죄인이라면 정의를 대변하는 내 발 앞에 엎드려 설설 기면서 자비를 구하는 것이 수순 아닌가? 실로 어긋나 있었지만 나는 나 자신을 정말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닥쳐라. 살인자야. 나는 고함지르며 방아쇠를 당겼다. 손목에 통증이 느껴지면서 총이 불을 뿜었다. 무슨 일인지 내 몸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피가 번지고 있었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 무저갱으로 추락하는 파우스트를 지켜보는 메피스토의 웃음이 들리는 것에서 자신의 죽음을 실감했다. 어째서 내가 죽는 것이지. 왜 내가?

산의 옆에 서 있는 부하 하나가 미소를 짓고 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 대장은 저 녀석을 믿었지만. 녀석을 믿지 않았어. 전에도 그랬잖아. 라고 말하고 있다. 저 놈이로구나. 내 총에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지.
부하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이번만 몇 번이냐고 불만스레 내뱉는다.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망각했다. 사람에게는 하늘에 의해 주어지는 배역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구현시키는 방법은 다르기 마련이고, 그 방법이 창조든, 사랑이든, 파괴든, 전쟁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자연의 저울질이다. 산은 천천히 일어서며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어진 배역에 소홀하다가 단역에게 강제 퇴장당한 2류 개그배우에게는 무대 밑이 어울린다. 막간(幕間)에 어릿광대로 나와도 관객들은 조소하고, 조명 또한 눈을 돌리지 않아.”

산은 마지막으로 동정하는 측은한 눈길을 시체에게 보내면서 부하들을 데리고 사무실을 나갔다. 적막이 감도는 어두운 사무실 안에서 눈을 뜬 채 죽은 장 검사의 시신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나길글길
댓글 1
  • No Profile
    deceiver 06.02.27 15:52 댓글 수정 삭제
    딴지이지만,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괴테 전에 이미 파우스트를 쓴 영국 교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파우스트 결말이 찢겨 죽는 것이었고, 괴테는 그걸 각색하여 희곡으로 만든 것이라더군요. 민간전승의 파우스트는 마술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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