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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문어를 사온 K씨

2006.02.05 06:3702.05

이봐, 그건 뭐야? J는 물었다. 이거? 문어야. K가 멍한 눈으로 대답했다. 좋은 애완동물이 될 것 같은 예감이 지구를 가득 메우고 있어. 또 그 소리, J는 눈살을 찌푸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문어라니, 문어라니.

J는 벌써 며칠째 컴퓨터만 붙잡고 있었다. K는 J가 컴퓨터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관심부터 없었을 뿐더러, 무엇을 하는지 전자파라면 뒷골부터 잡고 쓰러지는 K가 모니터와 하루 온종일 눈싸움에 눈씨름을 한다고 해도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K는 그저 J의 다리에 피가 고이지 않도록, 그리고 목이 굳어버리지 않도록 지쳐 쓰러진 J의 다리와 목 뒷덜미를 사정없이 주물러주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문어라니, 문어라니.

K는 문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눈은 어렸을 적 만화와는 달리 지구처럼 둥근 대가리에 붙어있지 않고 여덞 개의 어지럽고 현란한 다리의 뿌리 사이에 콕 박혀 숨어있었다. 지구인의 눈과 문어의 눈이 마주쳤다. 운명의 사랑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지만 K는 녀석이 착하고 온순하며 말수도 많지 않지만 착하고 맑은 눈망울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K는 기꺼이 녀석을 집어올렸다. 예상대로 온순한 녀석은 다리 하나 꿈틀거리지 않고 조용히 나무등걸에 달라붙은 나무늘보처럼 K의 팔에 감겨왔다. K는 이종 간의 교감을 시행 중이었다.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먹물을 뿜은 바닷물처럼 새카만 하늘 속에서 문어가 도망치듯 구름이 꿈틀거렸다. 비가 내릴지도 몰라, 문어가 말했다. 어서 가자. K는 녀석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횟집 주인으로 보이는 배불뚝이 아저씨가 K를 불렀지만 K는 듣지 못한 듯 그저 녀석을 소중히 품에 안고 급히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어라니, 문어라니.

J는 이미 죽어 있었다. K는 컴퓨터를 붙잡은 어려운 자세로 의자에 앉은 채 널부러진 J의 시신을 바라보며 고요히 서있었다. 죽은 거야? 문어가 말했다. 응, 안타깝게도. K는 대답했다. 왜 저런 자세로 죽어있어? 컴퓨터 때문이야. 인간은 왜 컴퓨터를 하는 거야? 그러게. K는 J의 뻣뻣하고 싸늘한 시신의 무릎과 뒷목에 팔을 넣어 들어올렸다. J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아마도 며칠째 밥도 굶고 잠도 못자면서 컴퓨터만 했으니까 그렇겠지. 굳어버린 뒷목에서 빠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K는 J의 시체를 침대에 뉘였다. J를 반듯이 누이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못 잔 잠 다 자고, 정 하고싶다면 이따가 깨서 또 하렴. K는 방문을 닫았다. 문어는 말없이 K를 쳐다보았다. 바깥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이 분명한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어라니, 문어라니.

K는 그물을 당겼다.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흔들리는 통통배도 처음 타 본 것일 뿐더러, 그 위에서 납덩어리까지 매달아놓은 그물을 배 위로 끌어당긴다는 일은 도저히 보통 사람의 힘이나 정신으로 가능한 일인 것 같지 않았다. K는 목구멍 너머에서 치솟아오르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참을 수 없는 힘에 K는 밧줄을 놓아버리고 바다를 향해 입을 벌렸다. 너, 죽을래? K는 고통에 찌푸린 눈을 살며시 떴다. 그 곳에는, 반쯤 삭은 회요리와 초장을 잔뜩 뒤집어 쓴, 문어가 무려 여덞 개에 달하는 다리를 한껏 우아하게 놀리며 화난 대가리로 있었다. 미안 미안, K는 말했다. 오늘 처음 해보는 거라서. 문어는 그저 출렁이는 파도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K는 손을 내밀었다. 문어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여덞 개의 다리를 하나씩 천천히 그의 손에 올려놓았다. 우리 집에 가볼래? 컴퓨터가 있거든. 누군가 항상 쓰고 있기는 하지만. K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나도 컴퓨터 좋아해. 문어는 화가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흐릿한 수평선을 경계로 같은 정도의 푸른 빛을 띠고 있는 바다와 하늘이 서로를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문어라니, 문어라니.

왔어? J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너, 죽었잖아. K는 문어를 J의 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점심쯤에 되살아나기로 결심했어. J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근데 그게 뭐야? 클릭, 침침한 마우스 소리와 함께 J가 물었다. 그거 다행이네. 이거? 문어야. K는 웃으며 대답했다. 컴퓨터를 좋아한다길래. J는 이미 듣지 않고 있었다. 이봐, 그거 알아? 수평선이 사실은 육 킬로미터 정도 바깥이래. 지구가 둥글어서 멀어보인다나. J는 책을 읽는 듯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너, 수평선 본 적도 없잖아. K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문어를 바라보았다. 눈이 말라가는 것도 모른 채 문어는 J와 함께 모니터를 으깨어 씹어먹을듯 바라보았다. K는 조금 더 크게 웃으면서 창문을 열었다. K의 시야를 포위라도 하듯 곳곳에 자리한 고층의 아파트. 아니, 어쩌면 못 보는게 당연한 일이겠지. K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파트 사이로 태양이 황금빛 비명과 함께 지고 있었다.

문어라니, 문어라니.

나, 순찰 나갔다 올게. 짤그랑 하고 문이 잠시 흔들리다가 멈추었다. K는 마냥 지루한 전화기만 노려보고 있었다. 짜식, 이 동네에 뭐 순찰할 게 있다고. 애꿎은 전화기만 으깨서 씹어먹을듯 노려보던 K는 이내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뿜었다. 찬 바람이 문틈을 지나면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뱉어냈다. 투명한 창 위 짙게 서린 김 너머로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을 때, 요란하게 촌스러운 전화벨이 울렸다. 때르릉, 때르릉. 여보세요, 파출솝니다. K는 지나치게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지않도록 주의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거기 파출소지요? 길을 잃어버려서요.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조금 난감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 파출소라니깐 왜 파출소냐고 또 물어봐. K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직업적 스트레스를 애써 삭히고 있었다. 지금 파출소 앞인데 문 좀 열어주실래요? K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짤그랑, 짤그랑. K는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문어의 눈이 K와 마주쳤다. 찬 바람이 휘파람 대신 K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어라니, 문어라니.

호오, 그래서 온 문어란 말이지? J는 의미 없는 순찰이 어째서 한 시간이나 걸렸는지에 대한 변명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난로 근처를 독차지하고 앉아 문어와 열심히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초행이라 길을 잘 모르겠대. 니가 안내해드려. K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J는 이미 듣지 않고 있었다. 한 대 밖에 없는 컴퓨터의 모니터에 금방 빠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거북하게 상체를 들이밀고 마우스를 힘겹게 돌려대고 있었다. 할 수 없군, K는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뿜었다. 찬 바람이 문틈을 지나면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뱉어냈다.

문어라니, 문어라니.

이봐, 그건 뭐야? J는 물었다. 이거? 문어야. K가 멍한 눈으로 대답했다. 좋은 애완동물이 될 것 같은 예감이 지구를 가득 메우고 있어. 또 그 소리, J는 눈살을 찌푸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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