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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인디언 유령

2006.01.22 19:4501.22

인디언 유령

음울한 하늘은 푸른 무채색이었다. 호수의 주변 풀밭에 흩어진 창백한 손들이 낯익었다. 난 내가 왜 여기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고 소리 내지 않았다. 오로지 나 혼자 보고 있을 뿐이다.
갑자기 수풀이 흔들렸다. 새하얀 옷을 입고 길고 굴곡진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였다. 이상하게도 난 그녀를 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날 보고 절망과 슬픔으로 처참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뒤돌아 저 멀리 도망쳤다.
그제야 난 내 발이 얼음 속에 있는 것처럼 시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미끈한 감촉도. 아래를 내려다보자 깊은 호수를 가득 채운 시체가 보였다. 썩지도 않고 원형 그대로 양손을 잃은 채 거기에 영원히 자리하고 있다.

“헉!”

내가 일어났을 때 바깥에선 낯선 목소리들이 들리고 있었다. 어학연수란 핑계로 한국에서 도망쳐 나온 지 첫날이었다. 홈스테이에서의 첫날밤의 꿈이었다. 긴장했었는지 아직도 새벽 세시였다.
스카이 트레인 스테이션에 멈춰 섰을 때 난 내 눈을 의심했다.

'Deer Lake'

스카이 트레인을 타고 떠날 때 키 큰 나무들이 드리우는 그림자 사이로 흐르는 물을 보았다. 불안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난 손을 뻗어 주머니 속의 다운타운의 지도를 확인했다.
익숙하지 않은 침대였지만, 기진맥진한 내게는 돌바닥이라도 상관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난 그녀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꿈속의 그 여자가 들어왔을 때 공포는 없었다. 그녀가 내게 하는 말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달라고 부탁했다. 검고 작은 무언가를 건네주자 만족한 듯 사라졌다. 잠에 취한 상태였으므로 곧바로 침대로 뛰어들었다.
나중에 제정신을 차리고 그 일을 떠올렸을 때 무서워서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러나 난 그녀가 나를 해칠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그녀는 몇 백 년인지 알 수 없는 세월동안 그 자리에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남은 그녀는 자연과도 같은 상태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녀를 깨운 것이다. 난 귀신을 항시 보는 능력은 없었지만, 때때로 귀신을 보기도 했다. 그녀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 꿈은 잘 맞아떨어지는 편이었다. 난 그 후로도 꿈을 꾸었다.
백인들을 죽인 건 극도의 증오로 가득 찬 누군가였다. 그녀는 내게 그렇게 설명하는 듯 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껏 이 곳에 남아있는 이유는 그녀가 백인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동족들을 죽이는 총을 당기는 그 손을 그녀는 미워했던 것이다.
그녀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그녀는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젖을 물고 있었던 어린아이가 총의 성능시험에 이용되었다는 것도, 그녀의 부족이 점차 파멸되어가는 모습도 그녀는 잊은 것처럼 거기에 가만히 있었지만, 모조리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픈 기억들을.
난 매일 밤 꿈을 꾸고, 낮에도 내 곁에 있는 그녀를 알았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고개를 들면 책장 옆으로 반쯤 얼굴을 내밀고 날 보고 있었다. 난 부족한 영어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관광용품으로 팔아먹는 것에 비해, 그들에 관한 진지한 기록과 연구는 참혹할 정도로 없었다. 박물관에는 그들이 남긴 개구리, 늑대, 까마귀 모양의 여러 가지 조형물들이 있을 뿐이었고, 사슴 호수에는 하얀 연꽃과 오리들과 눈부신 햇살이 있을 뿐이었다.
난 이 일을 우리나라에 돌아가면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반년 동안 난 항상 그녀와 함께였다. 비행기를 탔을 땐 귀신에게도 국경이 있을 거라 애써 내게 주입했을 정도였다. 내겐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건 모두 나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어젯밤 방구석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아니, 내 가슴속에 들어와 버린 그녀의 존재를 알았다. 그래서 난 그녀를 위해 기록을 남기는 것이 내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가 속해있던 부족이 어느 것인지, 그녀가 시체를 밀어 넣은 곳이 어딘지 난 전혀 모른다. 그저 그녀가 그 기이하고 무섭고 고요하고 차가운 공간에서 영원히 머무르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확신할 뿐이다.
댓글 2
  • No Profile
    미로냥 06.01.22 23:05 댓글 수정 삭제
    분위기도 문장도 무척 멋집니다! 좋은 글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청람 06.01.22 23:13 댓글 수정 삭제
    허걱, 정말 예상치 못한 반응입니다;; 감사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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