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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raison d'etre

2006.01.03 00:3001.03



그리고 그녀와의 마지막 날,
그녀는 손톱을 만지작거렸고 나는 그런 그녀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평소, 그녀가 나를 향해 말을 걸고, 나는 그 말을 무시하듯 고개를 내리깔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구도였다.

왜였을까. 이 날의 석양은 특히나 강렬했다. 하늘에 풀어헤친 진홍색 노른자위 같은 태양은, 핥으면 어쩐지 탁한 싸구려 오렌지 사탕 맛이 묻어날 것 같았다. 그만큼 석양은 달콤하고 진득한 햇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 압도적인 노을빛 속, 탁자 위 그녀는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노을에 안겨 있었다. 노을과 그녀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삶이 뭐라고 생각해?"


그녀는 몽롱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닌 게 아니라, 따스하고 나른한 햇살 속에 웅크린 그녀는 오리털 이불 속에 고개를 파묻은 소녀처럼 졸린 눈초리였다. 알 수 없다고 솔직하게 답하려 했지만, 그녀는 그 전에 내 말을 끊었다. 그녀의 말은 대답을 구하는 질문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나는 삶이 추락이라고 생각해."

"추락?"

아차, 나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일인 극에 난입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란 불청객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 추락. 날개 잃은 천사의 낙하, 결말이 정해진 연무, 인생이란 이름의 긍정적 비극"


그녀는 손톱에 손톱을 부딪쳐 달각대는 소리를 내었다. 창문으로 비쳐 들어온 햇살은 그녀를 짙은 색으로 물들여갔다.


"탄생과 죽음은 추락처럼 한 순간이야. 어딘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또 어딘가 깊숙한 곳으로 박살나는 거야. 본래 우리가 온 곳과, 다시 갈 곳이 하늘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날개달린 것을 갈망하고, 높은 곳만을 바라보잖아. 어딘가 나 있을 곳, 내가 있어야 할 장소를 찾아 온 땅을 헤매어도 황금의 동산과 젖과 꿀을 흐르는 땅이 없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 모든 것들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모든 것을 벗어젖히고 떨어졌어. 나는 그렇게 생각해."


과연 소설가가 꿈인 그녀다운 상상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죽음이란 결국 추락사란 건가...?"


자신도 모르게 빈정대듯이 말하고 말았기 때문에 나는 움찔하면서 말을 맺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 성의 없는 말에도 싱긋이 그래, 하고 웃어주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진홍색이었다. 노을빛에 물든 반신과 함께 그녀의 오른쪽 눈동자의 색깔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면으로 햇살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조금도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나를 바라보며 가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노을은 농밀하다가 못해 농염할 정도의 진한 진홍빛이었다.
그 시선에 얼굴이 화끈 달아옴을 느꼈다.


"인간은 언제나 '그 이전'을 그리워하고... 뒤돌아보지. 자꾸 고개를 돌리고 마는 건, 떨어지기 전에 더 아름다웠던 곳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거야."


그리고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읊조렸다.


  “추락. 그 엄청난 속도에 사람들은 질려버려. 그들은 떨어지고 있다는 두려움에 미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자신을 다잡고 속이려고 해. 눈을 꼭 감아버리곤 자신의 방향성은 자신이 결정한다는 듯 희망이니 미래를 꿈꾸지. 하지만 그 감은 눈을 떠 본다면 저 아래에 분명히 자신을 박살내고 말, 죽음이란 계곡의 검은 밑바닥이 보이는데... 방향성이니 정체성이니 그런 건 전부 거짓말이야. 우리는 전부 추락하고 있는 걸. 누구도 결코 피할 수 없어."

"..."


음색마저 주홍색빛깔로 물들어버린 것 같은 그녀의 몽환적인 목소리가, 주문처럼 내 귓가0에 맴돌았다. 그녀의 독백이 새빨간 잔상으로 귓가에 메아리쳤다.


"피할 수도 없고, 막아낼 수도 없고, 이겨낼 수도 없어... 죽음은 그런 거야. 그것이 바로 미래의 실체야."


그녀는 눈을 뜨고, 손톱을 매만지는 일을 재개했다. 그녀가 손톱을 부딪치는 소리가 나를 긴장하게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치 해골이 덜그럭거리는 소리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졸리고 몽환적인 기색에서 벗어나 어느 새 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것은 견딜 수 있어, 참아낼 수는 있어. 끝에서 고개를 돌리고, 뒤돌아보고... 다시 눈을 감아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눈을 감아도 참을 수 없는 건 이 추락감이야. 수."


그녀는 고개를 무릎 속에 깊숙이 파묻었다. 절정에 달한 것 같은 농도로 집 안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 노을 안에, 그녀는 그 안에 깊숙이 숨었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나는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에 감응하듯이 그 어떤 날을 떠올렸다.
가장 메마른 땅 위를 걷고, 가장 차가운 땅 위를 걷던 날이
나 있을 곳, 나 있을 자리를 찾아 이 거리 저 땅을 헤매던 날이

그 때 느꼈던 감정을 아마도

...추락감이라고 부르는 듯싶다.


"이 가혹한 질주에서 나는 일말의 온기도 찾을 수 없어. 바람은 매섭고, 태양도 나를 붙들어놓지 못해. 어느 곳, 어느 장소에 있든지 나는 떨어지고 있어... 추워. 추워. 지독하게 추워. 아 수우, 너도 느끼고 있어? 이 추위를 느껴?"

"..."


그녀의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수, 수우, 수우우으읏... 수는 지금 어디에 있어...?"

"네 앞에" 목소리가 쉬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또 한 번 움찔했다.


"나는 네 앞에 있어."

"...거짓말!"


울부짖었다기에는 너무도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녀가 흐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잖아. 계속 말해줘, 목소리를 들려줘 수. 여긴 온통 주홍빛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아, 그래서.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려 했다. 그녀의 진홍빛 눈동자 안에 내 눈도, 분명히 농도 짙은 붉은 색을 띄고 있을 것을...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을과 그녀를 구분할 수 있는 검은 빛, 그 그림자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그녀는...

어디에...

  ...



그리고 곧 진홍빛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히 그녀의 눈물이었다.

나는 똑바로 걸어가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수우, 추워. 우리는 지독히도 빠르게 떨어지고 있어. 안아줘 수. 더는 춥지 않도록."


그 말에 동의하듯이 나는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를 껴안자 그녀의 세찬 떨림이 느껴졌다.
그게 아니면,
정말 그녀가 떨리는 것일지. 내가 떨리는 것일지.
석양이 기울고 있다.



짙은 그림자 길게 늘어뜨린
농염한 빨간색. 서로에게 기대었다가, 떨어졌다가, 합쳐졌다가, 꿈틀거리다가, 시들어버리고
떨어질 듯 떨어질 듯 움찔거리던 그림자가 다시 둘이, 셋이 되는 듯싶더니 끝내 거대한 한 덩어리가 되어버리고
그리고 식어버린 태양처럼 농도 짙은 냄새와 진득진득한 것으로 변해버린 시간의 끝에
함께 나눈 입맞춤도 이미 떨어져버린 노을처럼 탁한 싸구려 오렌지 사탕 맛.






"...인간은 왜 추락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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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1.03 10:10 댓글 수정 삭제
    저는 남자라서 그런지 상징성 강한 글에 몰입을 잘 못하지만, 이런 짧은 그림같은 글도 멋있기는 하네요. 세상과 자아를 구분했을 때,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은 추락과 진홍빛인가요? 전자는 자아가 세계에 채워 놓은 거고, 후자는 세계가 자아를 물들인 거고. 그리고 대사가... 대사가 너무... 진지한 말투라서, 실생활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때리고 싶을지도 모르겠는데요.
  • No Profile
    가명 06.01.05 18:22 댓글 수정 삭제
    꽤나 작위적이죠. 고민하면서 썼습니다.^^;; 닭살이 우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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