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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관찰자

2005.12.23 01:5112.23

푸른 옷을 입은 여자는 누워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서 있었다. 검은옷은 총을 들고 있었다. 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검은옷이 들고 있는 그것은 뭉툭한 손 같았다. 몸에서 떨어져 나올 수 없는 촉수였다. 혀처럼 자유로 움직였다. 지금은 독을 품은 버섯 포자처럼 수축해 있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발사되어 푸른옷을 꿰뚫을 수 있었다. 눈만 깜박여도 발가락만 움직여도 폭발하듯 뛰쳐 나갔다. 검은옷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울고 있었다. 목놓아 우는 이십대 애송이의 울음이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흘러내려 뺨을 적시고 턱을 내려갔다. 핏물처럼 방울져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격한 운동을 하면 흐르는 땀처럼. 세차게 때려 붓는 비처럼.

푸른옷이 입을 열었다.

"왜 울어?"

"모르겠군." 검은옷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메말라 검은 황무지처럼.

"넌 실수를 했어."

"그래. 난 실수를 했지." 푸른옷의 웃음은 전혀 줄지 않았다.

"우린 모두 실수를 해."

"인간처럼?"

"인간처럼."

검은옷은 비석만큼이나 딱딱하게 답하며 총을 내밀었다. 미약한 진동이 공기를 울렸다. 검은옷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넌 너무 인간처럼 변했어."

"정말 진부한 이유인걸." 푸른옷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독할 정도지. 너무 지독해서 죽이고 싶을 정도지. 우리가 맡은 임무를 생각해. 라고 말해야 하나? 왜 그랬던 거야. 라고 물어야 하나? 난 그러고 싶지 않군. 그냥 널 죽이고 싶어. 아니, 죽여야만 하지. 우린 동정심을 가져서는 안되니까 말이지."

"빌어먹을 그러면 여기서 인간들이 얼간이 짓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만 있으라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보고서나 몇 줄 쓰고 다시 가서 멍하니 있으라고? 그게 우리 임무였다고 생각해? 난 내 임무에 충실했어. 최선을 다했다구."

검은옷은 푸른옷의 미간을 조준했다.

"그래서 임무를 발설한 건가. 그것이 네 최선이었군."

"자기 행성이 폐선처리장으로 쓰일 거라는 것쯤은 알아야 하잖아."

"단 한 명. 그걸 알아야만 하는 사람이 있었겠지."

푸른옷은 처음으로 웃음을 거두며 움찔했다.

"네가 데려가 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해줄 거지?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벌써 이 행성을 날려 버렸을 거야."

"싫어." 검은 옷이 총을 장전했다.

푸른옷이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꽃잎처럼 엷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아쉬움과 후회, 너무나도 인간적인 감정이 다른 우주에서 온, 푸른옷의 관찰자에게 찾아들었다. 푸른옷은 웃으며 맞이했다. 그녀는 반쯤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을 수 있었다.

"그럼 왜 울어?"

검은옷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군. 아마도 이 낯선 우주에 홀로 남겨지기 때문이겠지."

검은옷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게 아니라면." 그도 반쯤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대체 무엇일까."

푸른옷은 플라즈마로 변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검은 옷은 총을 거두었다. 그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인간은 때때로 울고 웃는다.

인간은 항상 사랑을 한다.
땅콩샌드
댓글 2
  • No Profile
    ^^ 06.01.22 03:00 댓글 수정 삭제
    독특하네요. 하지만 인간화되는 것 자체가 감동을 불러일으키거나 공감을 줄 수 없는 건 왜일까요...'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탐구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 No Profile
    땅콩샌드 06.02.03 11:22 댓글 수정 삭제
    흠 역시 경험이 없기 때문일까요. 피상적인 [사랑]이라는 개념만으로는 한계가 있군요.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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