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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검은 깃털, 하얀 날개

2005.07.12 22:0007.12


위를 올려다본 게 언제였던가. 바란은 짙은 안개 속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그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면 '하늘'에 가까워진다는 것 밖에 몰랐다. 사실 정확히 어디를 봐야 하늘이 있는지 아는 이도 없었다. 어차피 어디를 바라보아도 검은색에서 회색 사이의 어디쯤일 게 뻔하니까.

바란은 늙은 부랑자를 떠올렸다. 그는 바란에게 양자택일의 질문을 남겼다. 정말로 양 어깨에 돋은 이 거추장스러운 부분이 쓸모가 있을까?

카닥의 푹 꺼진 시커먼 한쪽 눈과 반대쪽 눈에서 솟아나는 꺼지지 않는 푸른 불씨를 떠올렸다. 그 푸른 빛에는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안타까울 정도로 낯익은 느낌이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바란은 여느 때처럼 동료들을 이끌고 먹이를 찾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우두머리이자 차기 족장으로 일찌감치 내정된 그는 먹이를 구하고 무리의 약하고 어린 이들을 보호하는 일을 책임졌다.

하지만 그들 무리는 거칠고 황량한 세상에서 너무나 약하고 무기력했다. 네 발 짐승들처럼 대지를 힘차게 뛰어다니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몇 명을 희생당하며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곤 했다. 작은 동물들은 그 나름대로 네 발로 잽싸게 도망가다가 앞발로 먹을 걸 움켜쥐거나 땅에 구멍을 파고 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지도 못했다. 그저 두 다리로 힘겹게 뒤뚱거리는 것밖에는.

그들은 그저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발톱도 날카롭지 못하고 주둥이가 짧아서 땅을 파는 것이 아니라 겉의 흙을 흐트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 다음엔 이빨로 나뭇가지나 길쭉한 쇠조각을 물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때론 금이 간 광석 구조물 틈에 몸을 숨긴 지렁이나 벌레를 잡아낼 때도 있었다. 운이 좋으면 나무에 조그만 열매가 매달린 걸 입으로 뜯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무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앞발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어깨에는 커다랗고 흉칙한, 그저 넓적하고 뻣뻣한 뼈가 뻣어있을 뿐이었다. 그 위에 대부분 빠지고 없는 깃털이 앙상하게 얹어져 있었다.

바란은 날 때부터 깃털이 많았다. 그가 족장의 눈에 띄여  우두머리로 키워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이들 대부분은 깃털이 없고 뼈가 흉칙하게 구부러졌거나 양쪽의 길이가 달랐다. 족장은 바란에게 말했다. "너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구나. 그건 타고난 너의 복이다." 하지만 바란은 그걸 기뻐하거나 남에게 뻐기고 다닌 적이 없었다. 남보다 크고 무거운 걸 어깨에 달고 다녀봤자 거추장스러울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바란은 동료 셋과 함께 먹이를 찾았다. 그들 모두는 수없이 콧물을 훌쩍거리고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으며 흙을 파헤쳤다. 호도는 절름발이고 삼비는 어깨와 등뼈가 비틀렸으며 쇼늠은 어깨에 돋은 뼈가 구부러져 늘 신음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지만 그래도 이들이 무리에서 가장 건장하고 힘이 센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색의 구분이 없는 잿빛 세상에서 빛의 농도에 유달리 예민했다. 농도가 짙어지면 그들은 서둘러 구한 먹이를 천에 싸서 입에 물고 뒤뚱거리며 무리가 있는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눈이 좋은 호도가 앞장서서 가고 있을 때 뒤에서 따라오던 쇼늠이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 잠깐만 멈춰봐."

호도가 뒤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건 보이지 않는데."

"아냐, 냄새야. 그러니까…… 우리랑, 비슷한 냄새."

"우리 동족이란 뜻이야? 수는 얼마나?"

다급하게 묻는 바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쇼늠은 연신 코를 킁킁거렸다.

"가까운데, 있어. 많지 않아. 이런 곳에 있다면 혼자겠지. 길을 잃었거나, 무리에서 추방된 녀석일 거야."

바란만이 아니라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방랑자나 추방자는 성가신 존재다. 그가 성년이고 수컷일 경우는 더욱 그랬다. 그가 스스로 무리를 이탈한 사나운 놈이라면 먹이와 암컷을 놓고 싸움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저 병에 걸렸거나 잘못을 저질러 추방당한 어린 새끼라면 여기서 더 귀찮은 존재가 되기 전에 숨통을 끊어놓는 게 현명한 처사가 될 터였다.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아?"

바란의 물음에 쇼늠은 코를 몇 번 더 벌름거린 후 대답했다.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데, 혼자 같아."

"그럼 죽은 건가?"

"아니, 시체라면 벌레들의 냄새가 날 텐데 그건 없어."

"수, 수, 수컷이야?"

힘들게 뒤따라온 삼비가 물었다. 쇼늠은 모르겠지만 아마 아닐거라고 했다. 호도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럼 그냥 무시하고 가자고."

바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지. 지금 우리 무리가 여기에 있는 한 내버려둘 순 없어. 녀석이 우리를 몰래 따라와서 먹이를 훔치거나 할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다른 무리의 정찰꾼인지도 몰라."

이야기가 길어지자 쇼늠은 아예 자리에 주저앉자 비뚤어진 날개를 땅에 눕히며 중얼거렸다.

"에잉, 우리는 언제 또 이동 안 하나……?"

그 말에 호도가 성을 내었다.

"배부른 소리 하지 마, 쇼늠. 다음 우기(雨期)까지는 꼼짝없이 여기에 묶여 있어야 할 판이니까. 동쪽도 남쪽도 '죽음의 길'로 덮여 있어서 갈 수가 없어. 일단 우기가 지나고 마실 물도 비축한 다음에나 서쪽으로 이동해야 겠지."

호도는 말을 마치고 동의를 구하듯 바란을 돌아보았다. 바란은 할 수 없다는 듯 왼발을 들어 머리를 툭툭 두드리고 어깨를 흔들어 깃털에 묻은 먼지와 작은 벌레를 털어낸 후 말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갖다 오지."

"놈이 덤벼들거든 혼자 상대하지 말고 우릴 불러."

바란은 오른쪽 어깨뼈를 흔들어 긍정을 표시하고 쇼늠이 고개를 내밀어 가리켰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안개는 더욱 짙어졌고 사방은 바닥에서 솟아난 쇳조각과 곳곳에 쌓인 돌덩어리로 울퉁불퉁했다. 조금만 걸었더니 바란에게도 낯선 이의 체취가 느껴졌다. 분명 자신과 같은 종족의 냄새였다. 다만 무리의 어느 누구와도 같지는 않았다.

정면에는 거대한 갑각류의 허물과도 같은 속이 텅 빈 금속물체가 있었고 이제 육안으로도 그 안에 있는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무리에서는 이 물체를 고대 괴물의 허물이거나 화석이라고 말했지만 억측일 뿐 어느 누구도 정확한 이름과 유래를 알지는 못했다. 돌을 던져도 흠집만 조금 날 정도로 단단했고 어떤 놈은 눈마저도 돌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다만 다리가 없어 벌레의 껍데기거나 달팽이의 집이라는 설이 유력할 뿐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고대의 벌레는 이토록 거대했단 말인가. 새삼 바란은 경외감을 느꼈다.

그 상대는 이 고대생물의 위장 안에 누워 있는 셈이었다. 자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오지에 혼자 있는 생물 특유의 경계심을 갖고 있었는지 둥지에서 고개를 내민 아기새처럼 목만 쭉 빼어 껍데기의 옆면에 난 커다란 구멍으로 얼굴을 내놓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보기 좋게 정면으로 눈길이 마주친 둘은 잠시 그러고 있었다. 이쪽을 염탐하거나 공격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상대는 낯선 이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바란은 두 발자국 정도 더 다가가고 나서 그가 굉장히 초췌하고 늙었음을 알아보았다. 얼굴은 주름투성이고 머리카락은 색이 바랜 지푸라기 같았다. 그가 입을 열자 드문드문 빠진 이빨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시오?"

"그러는 늙은이야 말로 누구요? 여긴 우리 무리가 살고 있는 곳이요. 족장(族長)의 이름은 사르시요."

그는 조그만 목소리로 '사르시, 사르시'하고 몇 번 되뇌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르겠어. 난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통 모르겠단 말이야."

골치 아픈 부랑자였다. 얼마나 긴 세월을 헤매고 다녔으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모를까. 아니면 무리의 많은 이들이 그렇듯 정신이상 상태일 수도 있었다. 바란은 시험삼아 물었다.

"늙은이, 이름은 뭐요?"

자신의 이름조차 모른다면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랑자임에 틀림없다.

"카……닥……."

그는 아주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자신이 아닌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듯,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심하고 힘빠진 목소리였다.

"좋아, 카닥. 여기서 얼마나 있었지?"

당장이라도 확 목을 깨물어 죽여 버릴까 라는 생각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호수나, 들짐승 무리의 위치, 그도 아니면 자신들을 잡아먹는 포식자의 위치 같은 정보 말이다.

"여기서? 난 여기 잠시 머물러 있었어. 하지만 우린 오랫동안 떠돌아 다니지. 그렇지 않은가? 자네 무리는 어떤가?"

"어떤 무리나 다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리라고 좋아서 이동하는 건 아냐. 마르지 않는 샘이나 먹을 게 풍부한 곳만 있다면 옮겨다닐 필요가 없지."

카닥은 잠시 딴청피우는 듯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난 그런 곳을 알고 있지. 예전에 우리들이 살던 곳. 지금도 우릴 기다리고 있을 곳……"

"뭐? 그런 곳이 있다고? 정말인가? 어디에 있지?"

다그치듯 묻는 바란의 말에 카닥은 그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푹 들어가고 그을린 듯 시커먼 카닥의 생기잃은 한쪽 눈, 그러나 반대쪽 눈동자의 빛깔만은 또렷했다. 연한 푸른색.

"'하늘' 위에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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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의 보금자리는 속이 텅 빈 광석 덩어리 안이었다. 네모진 덩어리는 얇은 벽을 제외하곤 돌과 자갈 투성이였다. 하지만 그곳은 포식자로부터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좋은 은신처였기에 이들은 비가 올 때까지 여기서 지내기로 했다.

돌 부딪히는 소리에 망을 보던 새끼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친숙한 네 사람의 그림자가 잿빛 안개 저편에서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간 아이들은 이상함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맨 뒤에서 오는 바란의 등에 커다란 물체가 얹어져 있던 것이다. 얼핏 생물체처럼 보이기에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사냥감을 잡았나 싶었지만, 비죽 튀어나온 가느다란 뼈 위에는 깃털이 몇 개 달려 있었다.

아이들은 놀라서 되돌아가며 소리를 질렀다. 넷이서 나가서 다섯이 돌아온 셈이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아우성을 치든 바란은 묵묵히 늙은 카닥을 업고 보금자리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가장자리, 커다란 돌이 둘러싼 구석자리에 카닥을 내려놓았다.

"족장님께 말씀드릴 거야. 저 늙은이를 멋대로 데려온 건 순전히 너 혼자 한 일이니까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놔둬. 내가 직접 말씀드리겠어."

바란은 그렇게 말하고 나뭇가지와 천으로 둘러싼 족장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앞에 앉아 있던 두 암컷 중 하나가 바란의 얼굴을 보고는 천을 살짝 걷더니 머리만 집어넣고 말했다.

"족장이시여, 바란이 뵙고자 청합니다."

"들어오라."

족장의 대답을 듣고 나서 바란은 허리를 구부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족장은 얼굴의 수염 만큼이나 많은 깃털을 갖고 있었지만 깃털 대부분은 털이 작고 빛깔도 바랬으며, 바란보다 수도 적었다.

바란이 족장에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리의 사람들이 족장을 만나려고 한꺼번에 몰려들고 있던 것이다. 두 암컷에 수컷들도 나서서 말렸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족장! 바란이 외지인을 데리고 들어왔소!"

"우리 먹을 물과 음식도 부족한데 알지도 못하는 자를 끌어들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적의 첩자일지도 모릅니다!"

족장은 그들의 아우성을 말없이 듣고 있다가 바란에게 물었다.

"그대가 설명하라.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족장이시여. 그는 제게 '하늘'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날개'에 대해서도……."

족장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밖에서는 여전히 족장에게 따지러 온 사람들과 말리는 사람들이 맞부딪히며 소동을 벌이고 있었지만 족장과 바란의 사이에는 무거울 정도로 숙연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족장이시여. 그는 우리 무리가 예전엔 '하늘'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곳은 먹을 것과 안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낙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금이라도 '하늘'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

족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매우 드물게도 '하늘'을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로구나. 나 역시 전해들은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다. 우리 어깨에 돋은 뼈와 깃털은 예전에 '날개'라고 불렸다. 이 날개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하늘에 갈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옛날 이야기 같은 거야. 세상은 잿빛 안개로 막혀 있고 땅에서는 더 이상 생명이 태어나지 않고 있지."

잠시 조용해졌던 밖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바란은 족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흥분한 사람들이 카닥을 끌어내어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 바란은 얼른 달려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대들은 과거를 기억하는가?"

카닥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대들은 과거를 모른다. 그러니 미래도 알 수 없다. 그대들은 그저 죽은 후 동료들에게 뜯어먹히는 미래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가?"

그는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아까의 기세등등한 모습과는 달리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대들에게 영혼이 사라졌다는 증거다. 마치 그대들 어깨에 매달린, 등을 짓누르는 그 무겁고 쓸모없는 뼈와 깃털뭉치처럼 말이야. 하지만, 영혼은 결코 없어지지 않아. 다시 살아날 거야. 그대들이 달고 다니는 게 날개란 걸 깨달았을 때 말이지."

모두들 말을 멈추었다. 소요는 가라앉았다. 늙은이의 갈라지고 거친 목소리에는 분명 힘이 담겨 있었다. 한쪽 어깨는 잘려진 듯 짧고 썩어갔으며, 비록 한쪽 눈은 시커멓게 들어간 채 없지만, 나머지 다른쪽 어깨의 깃털과 눈동자는 젊은이의 것처럼 생기가 넘쳤다.

"나…… 날개란 게 뭐지요?"

삼비의 주저하는 목소리였다. 분노가 가시지 않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음이 역력했다. 하지만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하늘을 본 적이 없는 그대들에게 하늘을 보여줄 수 있는 도구다. 낙원의 문을 여는 열쇠이지. 바로 지금 그대들 모두 가지고 있어.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다."

무리의 모든 이가 놀라고 있었다. 대대로 아무 쓸모없다고 생각하며 숙명처럼 등에 짊어지고 있던 이 거추장스러운 육체의 한 부분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는 이야기였으니.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삼비는 조금씩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제 누구도 그를 욕하지 않았다. 모두를 대표하여 그는 카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셈이었다. 다들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나서지 못하는 궁금증을 삼비가 대신 물어보았다.

"내 등의 뼈는 길이도 다르고 이렇게 흉하게 구부러졌습니다. 깃털도 다 빠졌고…… 이, 이것도 날개가 될 수 있는 건가요?"

"그대 영혼의 아름다움은 육체와는 무관한 것이다. 설령 깃털이 하나 남김없이 다 사라지고 뼈가 깎여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고 해도 그대의 영혼은 하늘을 날 수 있다. 모든 이의 영혼엔 완전한 날개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삼비의 얼굴이 밝아졌다. 바란은 그토록 환한 표정을 지은 사람을 처음 보았다. 주위의 사람들도 입에 문 돌을 내려놓고 흙을 차던 발을 뒤로 물리고 카닥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누구도 그를 욕하고 멸시하지 않았다.

"그대들이 왜 이렇게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사는지 아는가?"

침묵. 누군가의 침삼키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카닥은 무언의 대답을 듣고 나서 스스로 그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며 말했다.

"과거를 잊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등에 날개가 달려 있다는 걸 잊었기 때문이다. 그대들 안에 영혼이 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 떠올리고 되새겨야 한다."

바란은 감탄의 함성, 깨달음섞인 한숨이 주위를 맴도는 걸 느꼈다. 이제 카닥은 그들에게 있어 족장 이상가는 위대한 존재처럼 보이고 있었다. 초라하고 몸의 반이 죽어서 썩어가는 늙은이를 낙원에서 온 사자(使者)라도 되는 양 우러러보고 있었던 것이다.

* * * * * * * * * * * * * * * * * * * *

"족장이시여, 면목이 없습니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족장에 대한 존경과 헌신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일 바란이 그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족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또한 그는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다만 그의 말은 지금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 우리는 날개를 되살리기엔 너무 늦었거나, 아니면 너무 이르다."

"족장이시여……."

"이제 내 역할은 여기서 끝났나 싶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난 무리 모든 이의 보살핌을 받고 오늘까지 목숨을 지탱했다. 이제 내가 그들을 위해 몸을 바칠 차례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무리의 일원은 생이 다하면, 그 육체를 기꺼이 구성원들을 위해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족장만은 예외였다. 족장의 신성함을 드러내어 무리의 규율을 지키기 위함이었을까, 족장이 숨을 거두면 그가 생전에 지명한 다음 족장이 혼자 힘으로 시신을 묻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는 자신이 이 무리의 족장임을 선언한다. 그럼으로써 범접할 수 없는 족장의 위엄이 유지된다.

하지만 카닥이 무리의 관심과 존경을 앗아간 지금 족장은 이름뿐인 허수아비였다. 그를 돌보던 자들도 모두 카닥의 가르침을 받으러 가고 족장을 돌봐주는 사람은 바란밖에는 남지 않았다.

"바란이여, 무리의 존경과 숭배를 받지 못하는 자는 족장의 자격이 없다는 걸 잊지 말도록. 그것이 이 자격을 잃어버린 전 족장이 새로운 족장이 될 그대에게 남기는 유일한 충고이니라."

"족장이시여."

"그리고 이건 족장이 아닌 죽어가는 한 늙은이로써 남기는 말이다. 그대가 자신을 위해 무리를 버려야 할 때가 온다면 미련을 갖지 말고 그 길을 따르도록 하라."

"족장이시여!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족장이 어찌하여 무리를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나는 그가 이곳에 왔을 때 이미 무리의 끝을 보고 있었다. 어떤 무리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사라지거나 새로 태어난다.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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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장 사르시가 죽자 무리 일원은 그가 족장인 걸 인정못하겠다며 그의 시신을 널찍한 공간으로 끌고 와 모두들 앞다투어 뜯어먹었다. 바란만이 유일하게 그의 시신 근처에도 가지 않고 조용히 그의 죽음을 애도할 뿐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무리의 다른 죽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남은 뼈를 모아서 땅에 묻을 무렵 호도가 바란에게로 다가왔다.

"바란, 우리는 모두 사르시 족장이 생전에 너를 다음 족장으로 점찍은 걸 알고 있어."

호도 뿐 아니라 모두들 '사르시 족장'이라고 불렀다. 함부로 이름을 입에 담는 것 자체에서 바란은 이미 족장의 위엄이 땅에 떨어졌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린 모두 선지자님을 따르고 있어."

또한 반대로 이제 카닥의 이름을 망령되이 입에 담는 자는 없었다. 모두 '선지자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바란은 씁쓸한 미소를 띄었다.

"나도 억지로 족장 행세를 하며 너희들 위에 군림하고 싶지 않아."

"그런 의미가 아냐. 방금 우리는 널 족장으로 인정하기로 의견일치를 봤어. 다만 너는 사냥과 보금자리 방어 같이 생존에 필요한 일을 맡아서 이끄는 지도자로 남고, 우리의 존경을 받는 선지자님을 그 위에 모시기로 했어. 어때, 너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지?"

바란은 고개를 저었다. 언제부터 족장이 무리에게서 인정을 받는 존재가 되었던가. 족장은 그 자체로 신성하고 위대했다.

"아냐. 난 이미 결심했어. 족장님이 돌아가셨을 때 무리를 떠나기로."

"너 제정신이야? 아직 비가 오려면 한참 남았어. 지금 땅에는 죽음의 재밖에는 없는데. 지금 네 말은 죽으러 간다는 소리로 들려."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 중에는 네가 마지막까지 사르시 족장을 따랐다는 이유로 널 미워하는 사람도 있어. 하지만 우리 대부분 너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받아들이기로 한 거야."

"마음은 고맙지만, 난 이미 결심을 굳혔어."

바란은 무심한 말을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잠자리를 찾는 척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찾고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그날 밤, 몰래 일어난 바란은 밖에 누군가 있다는 걸 알았다. 보초가 서있는 건 출입구쪽이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카닥이었다. 그는 바란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한쪽뿐인 푸른 눈동자는 짙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네."

"제가 떠날 줄 알고 있었나요?"

"마지막으로 얘기를 좀 하고 싶어서."

"전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는데요."

"아니야. 내 생각엔 이들 중에서 자네가 가장 가능성이 있는 존재야."

"무슨 의미죠?"

카닥은 무리를 가르칠 때처럼 고개를 하늘로 향하며 말했다.

"'하늘'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

"제 깃털이 가장 풍성하기 때문인가요?"

"내가 말하는 건 영혼의 자유로움일세. 자네의 영혼이 가장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아."

"……."

"난 여기 이들에게 과거를 일깨워주고 있네. 우리의 과거가 어땠는지 아나? 그건 추락과 고통의 전승이지. 아마 우리의 기억이 단절된 건 그 때문일지도 몰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괴로운 역사였기에. 하지만 말야, 추락이란 말은 그 이전에 비상이 있었다는 걸 의미하지. 하늘을 날아오르지 않으면 결코 추락할 수가 없어. 그렇기에 우리는 과거를 기억해야만 하는 걸세."

순간 카닥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얼핏 눈물이 맺힌 듯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려 바란의 시선을 피했다.

"자네라면 찾을 수 있을 거야. 자유와 미래를 말야. 그게 바로 영혼에게 달아주는 날개지."

"사실 전 지금도 망설이고 있어요. 족장이 없는 이 무리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면……. 당신은 무리의 현재에는 관심이 없어요. 당신이 이끄는 무리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을 믿도록 하게. 저들은 자네가 없어도, 내가 없더라도 살아 남을 걸세. 만약 운이 좋지 않아 모두 목숨을 잃게 된다고 해도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무리는 숱하게 많이 있다네. 나는 수많은 무리들의 명멸을 지켜보았지. 하지만 이내 목숨만은 질기게도 살아남았어. 그 이유가 뭔지 아나?"

카닥은 잠시 바란을 바라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는 처음엔 섬뜩했으나 보면 볼수록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그립고, 무서우면서 친숙하고, 기괴하면서 아름다운…….

"난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이지."

늙은이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한쪽뿐인 날개로도 '하늘'에 갈 수 있단 말인가?

"농담이었어. 난 한 무리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네. 그저 과거를 일깨우고, 질문을 남긴 후 사라질 뿐이지. 난 거창한 가르침을 베풀지 않아. 난 해답을 갖고 있지 않거든. 내가 가진 건 질문 뿐이야."

입을 굳게 다문 바란을 남겨두고 카닥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혼잣말과도 같은 말을 남겼다.

"자, 그럼 자네에겐 하나의 질문이 남았을 뿐이네. 선택은 자네의 몫이지. 과거를 버렸으니 이제 무엇을 찾아야 할까?"

서서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바란은 생각했다. 무엇을 찾아야 할까. 아마도 그건 '하늘'일 것이다. 그러려면 '날개'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등에 있는 게 정말 그것일까. 바란은 해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를 곰곰히 되내이며 걷기 시작했다. 공기는 메마르고 탁했다. 바람은 잿빛 흙먼지를 굴리면서 서서히 세상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바란은 이제 더 이상 진전없는 하늘찾기를 포기하고, 있는 힘껏 몸을 공기 속으로 던졌다.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이려 했지만 그보다 온몸을 휘감는 바람 때문에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 엄청난 양의 무게가 자신을 누르고 있음을 느꼈고, 다음 순간 온몸에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 잿빛 돌더미 위에 바란의 몸은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바란은 다시 계단을 하나 하나 밟으며 꼭대기로 올라갔다. 이렇게 속이 텅 빈 돌산은 수십 개도 넘었다. 그 안엔 수많은 방과 방을 이어주는 복도와 계단이 있었다. 바란은 그중에서 가장 높은 것을 골랐다. 하늘이 머리 위에 있다면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올라가야 가까우리라는 본능적인 직감 때문이었다.

추락, 추락, 그리고 또 추락. 바란은 네 번째로 계단을 오르던 도중 입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절망과 회의가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처럼 선명하게 피어났다.

애초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이런다고 쓰는 법을 잊어버린 날개가 되살아날 리도 없다. 비록 생명을 건 절박함을 담보로 한다고 해도, 아득한 이전부터 쓰지 않은 날개는 그저 깃털이 주렁주렁 달린 쓸모없는 뼈일 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있다. 그의 등에 느껴지는 무게, 어깨로 전해지는 촉감. 쓰지 않았다면 퇴화되어 사라졌어야 할 날개가 아직 그의 양어깨에 붙박혀 있었다. 마치 언젠가 깨어나길 바라고 있는 듯이. 그 사실이 변함없는 한 그는 시도해야만 했다.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맹렬히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바란은 아득히 보이는 어딘가를 찾았다. 분명 어딘가에서는 땅이 끝나고 '하늘'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잿빛 안개로 뒤덮여 보이지 않지만, 안개 너머로 날아오른다면 분명 보일 것이다. 이 세상의 모습이, 그리고 세상 위의 새로운 세상이.

바람에 휩싸인 채로 바란은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의 몸에서 떨어져나간 깃털들이 추락을 아쉬워하듯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 새까만 깃털 사이에서 바란은 무언가를 보았다. 그건 처음에 카닥의 눈동자인가 싶었다. 파랗고 아름다운, 몹시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하나의 움직임이었다. 눈부시게 새하얀 두 장의 날개. 찬란한 빛의 궤적을 남기며 솟아오르는 날개짓. 바로 저거야. 바란은 속으로 외쳤다. 날개짓은 저렇게 하는 거였어. 바란의 말없는 외침에 깃털 하나하나가 전율에 떠는 듯이 느껴졌다.

마지막이 될 추락을 겪으며 바란은 이제 자신이 다시는 추락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의 영혼은 날개를 펼치는 법을 깨우쳤으니.


(200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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