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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day

흰 얼굴. 음울한 그림자. 고민스런 주름. 슬몃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다시 눈을 내리감았다. 손끝을 모으고는 두어번 톡톡, 가볍게 두드리던 손이 주머니 안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그는 생각할 것이 많은 모양이다. 결국 나도 그 옆에 말없이 앉아 창 밖을 가만히 바라보는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여명이 깃든 바깥 풍경 속으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붓고 있었다. 전에 없던 긴 우기. 비는, 굳이 홍수가 아니라도 많은 것들을 소진시키고 가라앉게 만들었다.

"...가야겠군."

  낮은 중얼거림. 전에 없던 과묵함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여전히 무언가 곤란한 듯, 불편한 표정이었다.

"나,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한순간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빗줄기로 쏘아졌다. 담배 한가치가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새파란 연기가 흐물거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하는데, 그건 알고 있는데,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언제라도 떠나버릴 것 같은 그 차가움에 입술이 얼어붙었다. 목언저리를 타고 흐르던 단어들이 냉랭히 내려앉았다.

"다 끝난 일이야."

몇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뱉은 것은 결국 그 한마디. 차갑게 돌아서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손 끝에 힘이 들어가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지마!"

다시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떨치는 듯한 동작으로 나를 물리쳤다. 나도 모르게 힘없이 방안 뒷편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쓰러진 발끝에 빈의자가 걸려들었다. 요란한 소리가 건물안으로 울려퍼졌다. 셔츠보다도 더 사나운 표정으로 구겨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를 잡아야했다. 안돼, 가지마! 가면 안돼!

"이런데 오는 게 아니었어."

부들거리는 손끝으로 현관을 잡아트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다시 쓰러졌다. 멀리 사라지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찌푸린 얼굴 위로 눅진한 물기가 스며들었다. 등어리를 타고 흐르는 냉기에 뼛속까지 시려왔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2-day

  오늘은 내가 직접 그를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의 냉정한 태도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순간 짧은 변덕일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서 그를 포기해 버리면, 우리 사이는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안돼. 그런 일만은 있을 수 없다. 그럴 수는 없다. 머리를 단정히 손질하고 그가 가장 예쁘다던 옷을 입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그의 회사 앞으로.
한참을 기다리던 끝에 버스를 탔다. 오늘따라 택시 잡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예상대로 버스 안은 퇴근인파로 만원이었다. 가득찬 사람들의 열기로 온 몸이 끈적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결국 버스 안에서 한 사람의 발을 밟고, 한 사람의 등을 밀었다. 사람들은 무표정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내뿜는 뜨거운 에너지는 아름답지만 불쾌했다. 그 열기 속에서 나는 온 몸이 오그려 붙는 것만 같았다. 힘들었다. 하지만 더 기분이 나빴던 것은 버스에서 내리는 그 순간까지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던 남자의 눈동자. 모르는 사람. 타인의 눈빛이 내뿜는 기묘한 집착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실은 알고 있던 누구인걸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올릴 수 없다.

-스토컨가?

나는 되도록 의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눈을 의식적으로 피해버렸다. 저런치들은,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을 우습게 만들 뿐이니까. 무엇보다 나는 그보다도 급한 일들이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그가 나올 시간이 가까웠다. 다시 나를 보면, 생각이 바뀔지 모른다. 어제 내 모습은, 너무 구차했는지 몰라. 혼자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눈에 익은 모습 하나가 시야로 쏟아들어왔다. 반가움에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현-"

허공 위를 가르던 목소리는 단어 하나를 만들기 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가느다란 그림자 때문이었다. 유난스레 불어오른 배가 신경에 거슬렸다.

"여보!"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점점 미소를 띄어갔다. 말려오른 입끝에 생기가 걸려들었다. 마주잡은 두손이 활기차게 움직였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한번도 본 적없는 환한 종류의 웃음. 아아, 저것 때문이었구나. 나는 이내 납득하고, 슬퍼졌다. 조금은 분노했다. 완전히 떠나려는 걸까. 나를 잊고, 나를 버리고. 힘겹게 돌아서는 내 눈동자 위로 다시 누군가가 비춰들었다. 조금전 버스 안에서 나를 바라보던 남자였다. 슬프던 기분이 불쾌함으로 뒤바뀌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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