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템플릿

2022.06.01 22:4306.01

1.

사람을 찍어내는템플릿이라고요?”

사람들이 M785962의 말을 따라했다.

. ‘여자라는 종족이 갖고 있다던데요.”

“‘여자라는 종족? 거 말 되네.”

누군가는 헛웃음을 짓고, 누군가는 야유를 보냈다. 야유를 보낸 쪽을 M785962가 가리켰다.

저쪽이 여자아닌가요? 제가 들은 특징이랑 비슷한데.”

어떤 특징이요?”

사람에 비해 몸집이 작고, 어깨가 좁고, 가슴이 둥글며.”

다들 실소를 머금은 가운데, 어느 여자가 정색하며 물었다.

완전 어이없네. 사람에 비해?”

사람하고 비슷한 종족이라던데요.”

M785962는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이들은 눈치를 못 챘겠지만, 그와 몇 달을 동고동락한 나와 T644180은 알고 있었다. 저 말투는 짜증났을 때의 말투다. 사람들이 자기 말을 재깍재깍 못 알아들으니 짜증이 난 것이다. ‘여자로 보이는 종족이 수군거리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M785962는 더욱 기분이 안 좋아졌다.

뭐가 그렇게 우습죠?”

한 나이든 여자가 젊은 여자들에게 물러가라는 듯 손짓하자 그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단 이걸 좀 먹어보는 게 어때요. 얘기는 천천히 하고.”

나이든 여자가 수프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아주 좋은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릇에 입을 대고 조금씩 마셨다. 지금까지 먹어온 에너지 바와는 전혀 다른, 아주 좋은 맛이었다. 피가 따뜻하게 돌고 기분이 좋아졌다. M785962T644180도 그런 것 같았다.

그사이 다른 사람들도 흩어졌다. 비교적 늦게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은 작은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맑고 커다란 눈망울로 쳐다보다 흥미를 잃고 달려갔다. 나이든 사람 하나와 아까의 그 나이든 여자가 끝까지 남아 있었다.

, 당신들이 어디서 왔는지부터 들어 봅시다.”

우리는 그들이 내어준 침상에 앉아 포근한 담요를 덮어쓰고 있었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우리는 모종의 합의를 이뤘다. 말문은 연 것은 나였다. M785962T644180은 귀찮고 힘든 일은 나한테 맡겼다. 내가 L이라는 이유로. 셋 중에서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들보다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더 많았으니까.

이야기 하는 내내, 우리를 둘러싼 토마토 밭에서 싱그러운 향이 풍겨오고(나는 그걸 보자마자 토마토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어째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인간들이 발랄하게 뛰어다니고, 커다란 유리 돔이 우리를 둘러싼 공간을 넉넉하게 품고 있었다. 천장을 통과하는 햇빛 덕에 정수리가 뜨뜻해졌다. 그곳은, 밝고, 아늑했다.

 

2.

이 여행의 시작은, ,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네오러다이트 운동 조직에 속해 있던 어느 미친 천재가 바이러스와 웜을 발명한 순간부터? 그 벌레들이 전 세계로 퍼져 인류의 지식과 경험이 저장된 이라는 것을 파괴한 날부터? 네오러다이트 조직원들이 그토록 증오했던 인공지능이라는 것들이 병든 시점부터? 그들 때문에 핵무기 발사 체계가 오작동을 일으켜 단 며칠 만에 지구 곳곳에 핵구름이 솟아오른 종말의 날부터? 이후 끝나지 않는 핵겨울 속에서 모든 것이 급속도로 멸종해 갔다는 이야기부터?

아니, 아니다. 이들도 그 정도 역사는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이렇게 온실 안에 모여 한 발짝도 못 나간 채 살아오고 있겠지.

이들과 달리 우리는 공장 안에서 살아오고 있었다. 인류 종말의 역사는 우리 중에 유일하게 존칭으로 불리는 박사님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박사님은 본인의 원형原型한테서 이 역사를 물려받았다. 그도 직접 겪은 건 아니란 거다.

공장의 최고 기술자였던 그 원형은 기억과 지식을 온전히 남기기 위해 스스로를 스캔해서 템플릿을 만들어 두었고, 자신이 죽으면 그 템플릿이 인쇄되도록 프로그래밍 해 놓았다. 인쇄 작업을 하는 3D 프린터들은 전기로 작동되는데 그걸 인력으로 돌릴 수 있게 개조한 사람도 박사님의 원형이었다.

아마도 이야기의 시작은, 나처럼 L로 시작하는 일련번호를 부여받은 노동자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불량률이 급증한 시점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날도 나는 다른 L들과 함께 발전기를 돌리고 있었다. 발전기는 거대한 자석에 굵은 코일이 수도 없이 감겨 있는데 그 자석을 돌리면 전기가 만들어졌다. 발전기 둘레에는 기다란 손잡이가 일정한 가격으로 붙어 있고, 우리는 손잡이 하나 당 수십 명씩 들러붙어 밀고 또 밀었다. 그러다 보면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를 돌고, 세 바퀴, 네 바퀴끝도 없이 맴을 돌게 돼 있었다. 한 번에 수 백 명의 L들이 발전기를 돌리며 그렇게 회전하다 100바퀴째가 되면 다른 조와 교대하는데, 그 사이에도 발전기는 계속 돌아야 하므로 교대는 아주 조심스럽고 신속하게 이뤄졌다. 자칫하면 몸이 엉켜 대형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쉬는 동안 우리는 에너지 바를 먹고 물을 마셨다. 우리가 만든 전기를 먹고 기계가 생산한 음식이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지만 갈아입을 옷도 기운도 없었다. 어차피 다음 교대 때 발전기를 돌리면서 또 땀에 젖을 것이므로,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잠이나 자두는 게 백배 이득이었다.

우리는 차가운 바닥에 쪼그리고 누워서 쉬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손잡이를 밀고 또 밀었다. 발전기가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어지러웠다. L 중에 그 광경을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쳐다보는 사람들은 M뿐이다. 농땡이 치는 사람이 없는지 쓰러지는 사람이 없는지 감독해야 하니까. 누군가가 쓰러지면 재빨리 치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그 몸을 밟고 넘어져 대형 참사가 벌어진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 위에 사람이 엎어지고 그 위에 또 사람이 엎어지며 난리가 나는 것을 본 적이 꽤 있었다. 내가 그 속에 갇혀 압사당할 뻔 한 적도 여러 번. 끔찍한 일이다. 죽음 자체도 끔찍하지만, 그런 식으로 발전기가 멈추면 공장은 춥디추운 암흑으로 변하고 먹고 마실 게 없게 된다.

멈춰선 발전기를 다시 돌릴 때는 L뿐만 아니라 MT까지 몽땅 달라붙어야 한다. MT들은 근육도 가늘고 힘을 쓰는 요령이 없어서 그들 몇을 합쳐야 L 한 명분의 힘을 내곤 하지만 그럴 때는 한 명도 빠짐없이 달라붙어야만 발전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20바퀴, 21바퀴. 벽에 붙은 계측기 숫자가 착착 올라가고 있었다. 어느 M이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거기 너! 고개 똑바로 들어! 그러다 넘어지면 늬들 다 죽는 거라고! 젠장, 9029! 너 말이야, !”

L9029는 양 어깨 사이로 머리를 늘어뜨린 채 헉헉대며 손잡이를 밀고 있었다. 아니, 그건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역시나, 그는 손잡이를 놓치고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그걸 보는 우리가 웅성거리는 사이 잽싸게 손잡이 사이로 끼어든 어느 M에 의해 붙잡혀 나왔다.

이 새끼, 정신 똑바로 안 차려!”

ML9029를 내동댕이쳤다. L9029는 바닥에 널브러져 숨만 간신히 내쉴 뿐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와 똑같이 생겼지만 이마에 새겨진 숫자만 다른 사람. 나는 그를 바라보며 덩달아 숨이 가빠졌다. 마치 거울을,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5년 전에 생산됐고 그는 생산된 지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신제품이었다. 정상이라면 최소 10년은 버텨야 했다.

병신, 또 불량이군.”

M들이 중얼거리더니 그 중 하나가 손목에 내장된 무언가를, 우리 L들이 두려워마지 않는 그 오른손을 조작했다. 그의 오른손은 광선총으로 변했다. 총구에서 붉은 빔이 뻗어나가 L9029의 심장을 태우고, 탄내가 공기 중에 진동했다. M들이 나를 포함한 주변의 L들에게 명령했다.

뭘 봐, 병신들아, 얼른 치우질 않고.”

우리는 L9029의 시신을 분해기로 옮겼다. 열림 버튼을 누르자 분해기의 아가리가 벌어지고, L9029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그 안으로 사라졌다. 닫힘. 분해 시작. L9029는 분자 단위로 조각조각 잘려 다른 L로 생산될 것이다. 그는 그동안 쉴 수 있을 테지. 분해 진행률이 높아지는 모습을 숙연히 바라보며 우리는 소곤거렸다.

요즘 왜 이렇게 불량이 잦지? 오늘만 몇 번째야. 대충 세 봤는데 불량률이 50%는 되는 것 같아. 0394가 그러는데, 박사님이 템플릿이 벌레 먹은 것 같다 했대. 나도 0395한테 들었어, 지난번에 프로그램 업데이트하면서 좀먹은 것 같다 그랬대. 빌어먹을 벌레들, 아직도 살아있었어? 잠자고 있다가 특정 날짜에 업데이트될 때 깨어나게 돼 있었던 게 아닌가 하더래. 참 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옛날에 누가 엄청 고약한 장난을 쳤구나. 다른 템플릿은 괜찮나? 모르지, 눈에 안 보이는 문제가 있는지도. 못 고치나? 요즘 T들이 다 거기 달라붙어 있다는데, 글쎄, 박사님도 못 하는 걸. 그나저나 박사님은 괜찮은 거야? 가끔 헛소리를 한다며. 분해기 들어갈 때가 된 거지, . 0394가 불평하더라, 박사님이 자꾸 똥을 지린다고. 말도 마, 사람도 헷갈려서 03950394를 한 사람인 줄 안다는데.

쓸모없는 영감쟁이,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사님은 이 공장의 내력과 시스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콧대 높은 M들과 머리 좋다고 자부하는 T들조차 무시하지 못 하는, 살아있는 역사책이자 매뉴얼이었다. M들이 늙고 병든 그를 살려두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박사님이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말하지 않는 것도 역시 그 때문이었다. 머리에 든 걸 모두 쏟아내는 순간 분해기 행이 될 테니까. 그런데 이젠 정말로 분해기에 들어갈 때가 된 걸까? M들이 박사님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 알면 조만간 분해기에 집어넣고 새로운 박사님을 인쇄할 것이 틀림없었다.

분해 진행률 그래프가 완료에 다다르기도 전에 교대시간이 끝났다. 우리는 M들의 고함소리에 발전기로 달려갔다. 우리가 발전기를 돌리는 동안, M들은 담대한 계획을 공표했다. 지구 어딘가에 오염되지 않은 템플릿이 있는데, ‘여자라는 종족이 그걸 갖고 있다는 거였다. 요즘 종종 헛소리를 하고 똥을 지리는 박사님이 알려준 지식이었을 텐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M들은 템플릿을 찾을 원정대를 조직할 거라고 했다.

교대 시간에 M785962T644180이 찾아왔다. 내가 그들과 함께 43번 원정대에 차출됐다는 거였다. 원정대는 총 300. 우리는 이 공장을 나가 여자라는 종족을, 궁극적으로는 템플릿을 찾게 될 임무를 부여받았다. 우리는 곧바로 에어록으로 들어가 방호복을 입고 공장을 나섰다.

나는 이들이 왜 L들을 차출했는지 알게 됐다. 바퀴 달린 카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각 원정대가 석 달 동안 먹고 자고 마실 것들을 카트에 실어야 했던 것이다. 카트 한가득 짐이 차자, 이제 나는 그 카트를 끌어야 했다. M들이 발전기 가동 인원을 줄이면서까지 L들을 데리고 나가게 허락한 것은 바로 이 짐들 때문이었다. M의 자존심과 T의 지능만으로는 이 무거운 걸 끌 수가 없으니까.

나는 힘든 줄도 몰랐다. 공장을 나왔다는 생각에 흥분한 탓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는 행위조차 낭비였기에. 그 작고 흐린 화장실 창문으로 내가 바깥풍경을 훔쳐본 것은 총 세 번에 불과했다.

 

3.

그래, 바깥세상은 어떻던가요?”

눈앞의 노인이 물었다. 그는 종말당시 태어난 지 백 일밖에 안 됐고, 그의 옆에 앉은 나이든 여자는 종말 이후 이 농장 안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간 것은 외벽 수리 때문에 서너 번, 아주 짧게 나간 게 다였다. 그들은 두꺼운 헬멧과 방호복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실상 바깥으로 나간 건 아니라고 했다.

어쩔 수 없지요. 맨몸으로 돌아다니는 건 자살행위니까요.”

먹고 자는 건 어떻게 하셨소?”

텐트 안에서 해결했습니다.”

, 그런 방법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닐 것 같소만?”

어휴, 말도 마세요.”

속이 쓰렸다. 매일 상당한 품을 들여 텐트를 설치했다 철거하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내 얘길 들은 두 노인은 이 온실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고 했다.

온실 안은 먹을 것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먹을 것들을 기르고있었다. 몇 분 만에 3D 프린터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무려 몇 달에 걸쳐 천천히 기른다는 것이었다. ‘여자뿐만 아니라 이들 전체가 우리와는 다른 종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나에게 농장을 구경시켜줬다. 내가 말하는 동안 M785962T644180은 다시 잠들어버렸기에 구경을 다닌 사람은 나 혼자였다.

농장은 엄청나게 컸다. 우리가 사는 공장의 모든 층을 한 층에 펼쳐놔도 이것보단 작을 것이었다. 물론 그 전체가 하나의 온실은 아니었다. 아홉 개의 유리 온실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정방형으로 이어져 있었다. 종말 이전부터 온실은 차폐와 방진이 되는 구조로 제작된 상태였다. 종말 몇 해 전에 근처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난 탓이었다. 삶의 터전을 떠날 수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온실을 지은 것이었는데, 실상 그 사고가 이들을 살린 셈이었다.

밭고랑 사이를 거니는 동안, ‘아이라는 작은 인간들이 뒤를 졸졸 따르고, 사람들과 여자들이 상추를 뜯고 물을 뿌렸다. 나는 그들 사이에 섞여 딸기를 따서 베어 먹고 그 달콤한 향미에 도취돼, 실은 내가 바닷가에서 쓰러졌을 때 죽어서 천국에 와 있는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했다.

행복한 상상은 이들과 함께 고구마와 감자를 삶아 먹고 온실 유리 너머에서 반짝이는 별빛을 조명삼아 아이들의 재롱을 구경하는 저녁시간까지도 이어졌다. 아이들은 약하고 서툰 데다 놀기만 했다. 밥만 축내는 존재를 도대체 왜 만든 걸까. 헌데 그들은 자꾸 눈이 가고 참으로 재미있는 존재였다. 나는 그들과 장난을 치며 소리 내어 웃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들은 이런 유희를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물었다.

이름은 없고, 모두 나를 L10539869318170417이라 부릅니다. 줄여서 0417이고요.”

일련번호가 새져진 내 이마를 가리키자 다들 조용해졌다. 눈빛들이 복잡했다. 동정, 경계, 의심, 연민. 아아, 나는 왜 저 눈빛들을 읽을 수 있는 것일까. 가슴이 저릿하다. 이 느낌은, 나의 원형 이태수, 그 빌어먹을 선량한 인간, 그가 나에게 남기고 간 저주받을 유산이었다.

처음에 만난 노인이 손을 내밀고, 나는 얼떨결에 그 손을 잡았다. 노인의 손은 내 손처럼 거칠었지만 따뜻하고 힘이 넘쳤다.

박준석이라 하오. L10539869318170417, , 내가 숫자에 약해서, 미안하지만 이라고 불러도 되겠소?”

물론이죠. 편하게 부르세요.”

준석 노인의 뒤에 앉아 있던 젊은이가 손짓했다.

, 바깥세상 얘기 좀 들려주세요.”

그는 준석 노인의 손자인 박승호였다. 나는 젊은이들에 둘러싸여 내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를 다시 풀어놓았다. 그들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질문이 쉼 없이 날아들었다. 잠시 후 젊은 여자들이 향기로운 술을 내오며 동참했다.

남자라는 종족은 하나밖에 몰라. 손님을 앉혀놓고 말만 시키면 어떡해. 목이 마를 텐데 마실 걸 좀 드려야지.”

어느 여자의 말에 박승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도 못 했네. 역시 여자라는 종족은 똑똑해.”

그들의 대화를 진지한 마음으로 듣던 나는 그것이 농담임을 깨달았다.

술을 마시니 이상하게 기분이 고조됐다. 나는 그들에게 동화되어, 처음부터 농장에서 살아온 것처럼 어울리게 되었다. 불행히도 유흥은 M785962T644180을 다시 만났을 때 와장창 깨어지고 말았다.

헬렐레헬렐레, 신이 났구나. 템플릿이라도 찾은 모양이지?”

M785962의 냉소. 머리에 찬물을 들이부은 듯 의식이 또렷해졌다. 빈정거리다 갑자기 역정을 내는 것이 M785962의 버릇이었다. 내 대답 여하에 따라 그의 기분이 달라질 것이었다.

몇 번 물어봤는데 다들 그 얘길 안 하려고 하더군요. 먹을 걸 주면서 다른 얘기만 하더라고요.”

젠장, 여기 여자들한테는 없는 건가. 시간 낭비하지 말고 돌아가자고.”

M785962가 일어서자 T644180이 말렸다.

잠깐만요. 제 생각 좀 들어보세요. 이들은 분명 템플릿을 갖고 있어요. 그 얘길 피하려고 하는 게 그 증거죠. 아무한테도 주지 않으려고 꽁꽁 감춰놓은 거예요.”

그 템플릿이라는 거, 복사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요.”

그럼 복사만 해 주면 되는데 왜 숨겨?”

글쎄요. , 어쩌면 복사가 안 되는 건 아닐까요?”

M785962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빨리 찾아내. 찾아내는 즉시 챙겨서 떠난다. 그럼 너희도 나도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고. 알겠어?”

. 알겠습니다.”

T644180이 대답했지만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M785962가 날카롭게 물었다.

, 뭐 문제 있어?”

그게아까 다 둘러봤거든요. 근데 그게 없어요.”

농장에는 프린터가 없었다.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농작물이었고, 그 외의 것은 움막, 창고, 화장실이었다. 움막은 온실 북쪽 벽에 늘어서 있었는데 우리가 밖에서 잘 때 치는 텐트 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였다. 화장실은 더욱 작았고 내가 몇 번이나 들락거렸기에 그 안에 뭐가 있고 없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농기구와 농기계를 보관하는 창고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T644180이 말하자 M785962가 잔뜩 구긴 인상을 비로소 폈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부터 찾아보자고.”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 따위는 없다. 확신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이곳에 프린터도 템플릿도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 M785962는 먹을 것을 챙기자마자 떠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머무르고 싶었다. 낙진이 두텁게 쌓인 황막한 땅을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근본적으로는,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 농장에 뿌리박은 한 줄기 토마토가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M785962T644180과 함께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았다.

 

4.

바깥세상이 어땠냐고. 지옥 그 자체였다. 공장이 지옥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한 곳이 있었다니.

공장을 나선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흥분은 식어버렸고, 그것은 나를 원정대에 차출한 M들과 템플릿의 존재를 언급한 박사님과 생산 프로그램에 벌레를 심은 어느 미친놈을 향한 증오로 바뀌어버렸다. 헬멧과 방호복의 무게만도 사람 무게 정도가 나가는데, 그걸 걸친 채로 짐이 산더미처럼 쌓인 카트를 끌어야하니 죽을 맛이었던 것이다. 땀을 닦거나 가려운 곳을 긁을 수가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차라리 나 혼자 발전기를 돌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세상은 온통 회색이었고, 돌과 흙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흙먼지를 허공에 날려 시야를 가리는 얄미운 바람과 우리 셋뿐이었다. 우리는 할당받은 방향으로 걷고 또 걸었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은 T644180이었다. 그는 왼손에 나침반을 들고 오른손에는 지도를 든 채 주변 지형과 지도를 수없이 비교했다. 나와 T644180이 제대로 일하는지 감독하는 사람은 M785962였다.

두 사람은 걷다 지치면 카트에 올라타기도 해서 나를 더 애먹였다. M785962의 손목에 내장된 광선총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를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T644180의 경우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내 재주로는 알 수가 없었기에 내버려둔 것이다. 하긴 둘을 없애버리면 뭐하겠는가. 석 달 뒤면 식량이 바닥날 텐데. 나는 식량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템플릿을 얻든 못 얻든 언젠가는 공장으로 돌아갈 테니까.

걷다가 해가 지면 텐트를 설치하고, 낮 동안 충전한 태양전지를 연결했다. 텐트는 두 덩어리로 나뉘는데, 하나는 사람이 먹고 자는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와 텐트를 연결하는 에어록이었다. 매뉴얼에 따라 설치가 끝나면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고, 한 사람씩 에어록을 통과해 텐트에 들어가 아침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T644180이었다. 방진과 차폐가 잘 되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텐트를 두 번 두드려 OK사인을 보내면 M785962가 들어가고, 그가 텐트를 두 번 두드리면 내가 기진맥진한 몸을 일으켜 텐트에 들어갔다.

텐트에 들어가는 과정도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에어록에 들어가면 차폐 기능과 방진 필터가 장착된 환풍기가 작동돼 헬멧과 방호복에 붙은 낙진을 씻어 내보냈다. 방사능 수치가 기준 이하까지 내려가야 환풍기가 멈추는데, 최소 40분이 걸리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그 비좁은 에어록 안에 가만 서 있어야 했다.

텐트 안에 들어가 보면 M785962T644180은 저녁을 먹고 빈둥거리거나 자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음식을 먹고 볼 일을 보고 최소한의 물을 이용해 몸을 닦은 뒤 구석에 누웠다.

해가 뜨면 점심을 겸한 아침을 먹고 나와 텐트를 철거한다. 철거도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어서 그 역시 두 시간이나 소요됐다. 그러고 나면 짐을 카트에 싣고 다시 길을 떠난다. 이것이 지난 석 달 반 동안 매일 반복한 일이었다. 석 달이 아닌 석 달 반. 그동안 우리는 평야를 지나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이 바닷가로 왔다. 예정대로라면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은 공장이었지만, 우리를 맞이한 것은 검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였다.

길을 잃었음이 확실해지는 순간 M785962T644180에게 험한 욕을 쏟아냈다. T644180은 변명 한 마디 없이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M785962는 반미치광이가 되어서는 T644180에게서 지도와 나침반을 빼앗아 혼자 떠났다가 반나절도 안 돼서 돌아오기도 했다. 지도는 잃어버린 채였다. 바닷바람에 날아갔다는 거였다. 우리가 기다리는 곳까지 찾아온 것이 용했다.

공장에 연락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데리러 와 달라고요.”

T644180이 물었다. M785962에게 공장과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M785962는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 쓰라고 준 게 아니야. 템플릿을 찾았는데 우리 힘만으로 가져올 수 없을 때 쓰라는 거지.”

그래도 이런 손실을.”

소용없어. M들의 사고방식은 내가 잘 알아. 비용보다 수익이 커야만 움직이는 인간들이지.”

우리는 걸었다. 바닷가를 따라서. 하릴없이 걸었다. 굶주림과 사투를 벌이며.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바닷가를 따라 서 있는 바람개비였다. 엄청나게 크고 높은 바람개비들. 세찬 해풍이 불었고, 광폭한 속도로 날개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일으키는 소리에 귀가 멀 지경이었다. 그것들은 바다를 지키는 고대의 문지기들 같았다. 저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노라고, 통과하려면 시험을 치르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어떤 바람개비들은 전투에서 패배한 거인처럼 파도 속에 처박혀 녹슬어 있었다. 경이로우면서도 을씨년스러운 광경이었다.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며 현기증이 몰려왔다.

우리는 하나씩 차례로 쓰러졌다. 극도로 탈진한 상태였기에 뜻밖의 경외로 인한 충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쓰러져 있던 우리는 구조됐다. 다행히도, 이 농장에 사는 이들이 우리를 구했다.

 

5.

나는 이들이 베푼 은혜를 잊지 않으려 열심히 일했다. 무거운 바구니를 척척 들어 옮기고 다 자란 무들을 반나절 만에 뽑아놓았다. 농장 사람들이 무리하지 말라며 말리곤 했다. 그 또한 감사했다. 공장에서는 L들을 힘만 세고 무식한 소모품으로 취급하니까. 걱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여자들은 특히 상냥한 존재였다. 예지라는 여자는 쾌활하게 인사를 해 왔고, 소미라는 여자는 내 밥그릇이 다 비기도 전에 밥을 더 퍼주었고, 희나라는 여자는 내가 호미질을 하다 손을 다치자 맑은 물로 헹궈준 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기도 했다. 그리하는 두 손이 어찌나 곱던지. 나는 그녀가 날 보살피는 내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실은 그녀의 둥근 눈망울과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뛰어서 그런 것도 있었다.

농사일은 재미있었다. 농작물마다 특성이 다르므로 다루는 방법 또한 달랐던 것이다. 노동 강도는 공장 발전기를 돌리는 것에 비하면 약과여서 내 입장에서는 노동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M785962는 힘들어했고, T644180은 지루해했다.

M785962는 툭하면 힘들다며 퍼질러 앉았고, 농장사람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을 찾아서 프린터와 템플릿에 관해서 담판 지을 생각만 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관찰하고 귀를 기울였지만 가장 높은 사람을 끝내 찾지 못 했다. 이들은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농장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모여서 얘기를 나누고, 나누고, 나눴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론이 나올 때까지.

한편 T644180은 농기구와 농기계에 흥미를 보이더니 곧 관심이 식고 말았다. 농기구는 반나절 만에 사용법을 익힐 수 있었고, 농기계는 공장의 기계들에 비해 단순한 까닭이었다. T644180을 끝까지 사로잡은 것은 농기계를 작동시키는 전기가 온실 밖 바닷가의 거대한 바람개비로부터 온다는 사실이었다. 그 바람개비가 발전기이고, 바람이 발전기를 돌린다는 것이었다!

전기가 있으면 프린터도 있을 것이다. M785962T644180는 확신했다. 그들은 농사일은 건성으로만 하고,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는 데에 전력을 다 했다. 어느 날 M785962는 농장 사람들이 조영한이라 부르는 중년 남자에게 작정하고 들러붙었다.

땅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하군요. 먹을 것들을 키워 내다니 말예요.”

그렇죠. 대지모신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랍니다.”

대지모신이 뭐죠?”

이 땅이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는 뜻이에요.”

어머니? 당신이 어머니라 부르는 아라 노인 말입니까?”

조영한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이 땅이 우리를 길러냈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서 나는 것으로 살아가잖습니까? 우리 장모님도 이 땅이 아니면 저렇게 훌륭히 나이 드시지 못 했습니다. 또한 이 땅은 우리가 죽어서 돌아가는 곳이기도 해요. 작년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도 저기에 묻히셨죠.”

조영한이 농장 구석의 묘비들을 가리켰다. M785962는 조영한의 말이 프린터와 분해기에 대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땅을 파 보고 싶네요. 뭐가 들어있을지 궁금해요.”

나도 어릴 때 그런 생각을 해 봤죠.”

파 보셨나요?”

파 봤죠. 흙만 자꾸 나오던걸요.”

지금 이 아래에도 흙만 있는 건가요?”

그렇죠. 뭐가 더 있겠어요?”

혹시 모르죠. 누가 저 안에서 자꾸 싹을 밀어내고 있는지도요.”

조영한은 다시 한 번 웃었다.

궁금하면 실컷 파 봐요. 어차피 갈아엎을 때가 됐으니까.”

M785962T644180과 나에게 땅을 파라고 시켰다. 우리가 삽질 하는 내내 사람들이 칭찬했다. 땅을 깊이 갈아엎을수록 흙이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파고 또 팠다. 땅파기를 포기한 것은 사람 허리 정도의 깊이로 팠을 때였다. 정말 아무리 파도 흙만 나왔던 것이다.

고생했어요. 이리 와서 막걸리나 한 잔 해요. 내가 담근 건데 달짝지근하고 괜찮아요.”

조영한이 사람 좋게 웃으며 사발을 내밀었다. T644180은 막걸리를 거부한 채 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렸다. 나는 그가 숨이 찬 게 아니라 M785962의 바보 같은 명령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M785962는 무심했다. 조영한에게 프린터와 템플릿에 대해 캐묻기만 했다. 옆에서 보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집요하게 굴었지만 조영한은 태연하게 모르쇠를 잡았다.

그렇게 아무거나 척척 찍어내는 기계가 있으면 왜 이렇게 고생을 하겠습니까. 생명이란 그만큼 정성을 들여야 얻어지는 겁니다. 옥수수도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옥수수 한 알도 소중히 여기고 쭉정이조차 함부로 버리지 않는 이유가 그겁니다.”

우리는 옥수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자라는지 배웠다. 씨앗에서 싹이 트고 싹이 자라 잎과 꽃을 피우고 꿀벌이 돌아다니며 꿀을 빠는 사이에 수꽃에서 암꽃으로 꽃가루 옮겨주면 얼마 후에 암꽃이 지며 옥수수가 열리는 것.

하지만 사람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사람도 씨가 있는가? 그 씨를 밭에 심으면 사람 꽃이 피고 사람 열매가 열리는가? 그 씨는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겼는가? 꽃가루받이는 어떻게 하는가?

M785962의 질문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젊은이들은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 조영한이 한 대답이라곤, 딸인 조유나의 배를 가리키며, “사람의 열매는 이렇게 뱃속에서 자란답니다.”라고 한 것이 다였다. 유나의 배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M785962T644180은 밤이 되자, 우리에게 배정된 움막에서 머리를 맞대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템플릿을 여자가 갖고 있다는 말이 맞나 봐요. 그러니까 유나 그 여자가 프린터고 몸속에 템플릿이 내장돼 있는 거죠.”

그래서 복사가 안 되는 건가.”

그렇겠죠. 그러니 숨기는 거예요. 프린터까지 통째로 내줘야 하니까.”

야아, 이거 쉽지 않겠는걸.”

쉽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이 농장에 더 오래 머물게 될 거라는 의미였다. 그럼 그걸로 됐다. 나는 둘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이불을 덮어썼다. 눈꺼풀이 절로 감겼다. 낮 동안에 쌓인 피로 때문이었다. M785962는 내가 농장 일에 열중하도록 내버려뒀다. 그래야 자기들이 농장을 염탐하기 쉬우리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아침을 먹는 내내, M785962T644180은 어느 남녀를 훔쳐보며 낄낄거렸다.

신기한 일이라도 있나요? 저만 쏙 빼 놓고 두 분이서만 재밌어 하시니 섭섭하네요.”

다른 때 같았으면 M785962는 내가 버릇없다고 발끈했을 테지만, 지금 그는 들뜬 상태라 내가 던진 그물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기 다리 사이를 슬쩍 가리켰다.

이게 말이야, 오줌 누기 편하라고 이렇게 생긴 물건이 아니더라고.”

이해할 수가 없어 T644180을 쳐다보자, 그가 숟가락을 거꾸로 들고 흙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남자와 여자가 몸을 맞대고 있는 그림이었다.

글쎄, 이게 여길 들락거리더라니까. 문제는, 왜 이런 짓을 하느냐는 거야. 저 둘만 그러는 게 아니었어. 다른 사람들도 그러고 있었단 말이야.”

호기심이 일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포기하고 M785962T644180을 따라나섰다. 그들의 말대로였다. 정말로 남자와 여자는 알몸으로 뒤엉킨 채 끙끙대고 있었다. 기묘한 모습이었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즐기는 것 같았다. 나는 막연히 부끄러웠지만,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옆을 돌아보자 그 어둠 속에서도 M785962T644180의 두 눈동자가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M785962는 단순한 호기심이었고, T644180은 저 행위의 의미를 탐구하는 흥분이었다. T644180은 의지가 앞선 나머지 자꾸 몸을 내밀다 고꾸라지며 억 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움막 속의 남녀가 동작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M785962T644180의 뒷덜미를 잡아채며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발전기를 밀다 엎어진 L을 낚아채던 숙련된 동작으로.

멍청하긴. 정신 똑바로 안 차려?”

M785962의 역정에 T644180이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궁금해서 그만.”

헛짓거리 작작 하고 템플릿 빼돌릴 방법이나 찾아.”

알겠습니다.”

T644180이 굽실거렸다. M785962는 몰랐다. 여자가 프린터이고 템플릿을 갖고 있지만 남자에게도 템플릿이 내장돼 있다는 중요한 발견을 자신이 놓쳐버렸다는 것을.

 

6.

템플릿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이다. 나는 처음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거대한 3D 프린터의 차갑고 평평한 작업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나를 만든 사람은 박사님의 원형이자 공장의 기술 담당 이사인 백인재 박사였다. 그는 내가 행하는 일련의 행위를 관찰한 뒤 내가 합격이라고 했다. 그는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수도 없이 찍어내며 이마에 일련번호를 새겼다.

우리의 원형은 이태수 씨라고 불리는 공장 말단 직원으로, 운동으로 다져진 굵은 근육의 소유자였다. 백인재 박사는 이태수의 몸을 초정밀 나노스캐너로 스캔한 뒤 이태수 개인의 일화 기억을 포함한 상당량의 기억을 삭제하여 L을 인쇄할 수 있는 템플릿을 만들었다. 하지만 의미 기억은 일부분 남아 있었기에 우리는 사물의 이름과 용도를 알았고, 운동과 언어에 관련된 기억도 남아 있었다. 백인재 박사는 MT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었다. M들의 원형은 공장장인 최희중 전무였고, T는 백인재 박사 본인이었다.

나는 공장 직원들의 서열과 그 서열에서 기인한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인재 박사의 작업이 그리 성공은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그는 우리를 일부러 불완전하게 만든 것이었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화 기억을 삭제한 건 당연해. 하지만 감정도 삭제해야 하지 않나? 종일 일해야 하는 것들이 고통과 기쁨을 느껴봐야 무슨 보탬이 되겠어?”

발전기를 힘겹게 미는 우리를 가리키며 최희중 전무가 한 말이었다. 백인재 박사가 설명했다.

많은 보탬이 됩니다. 인간은, 사실 모든 동물이 그렇죠, 손실을 회피하고 보상을 추구하는 심리에 의해 움직입니다. 고통을 느낄 줄 알아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한다는 거죠. 보상을 얻고 기쁨을 느껴봐야 또 다른 보상을 얻기 위해 움직이고요. 감정이 없는 인간에게는 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백인재 박사는 M들에게 채찍과 광선총을 준 것인가? 교대 시간마다 에너지 바를 나눠준 것도?

우리를 바라보던 이태수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는 노동하는 우리만큼이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노동 시간을 줄이거나 우리를 더 생산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해 최희중 전무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백인재 박사는 이태수를 간단히 설득했다.

노동 시간이 줄어들면 음식 생산량이 줄어들어 L들은 굶주리게 될 거야. L을 늘려도 마찬가지지. L의 생산량과 음식의 생산량은 원료를 놓고 경쟁하는 관계니까, 알겠나? 명심할 게 또 있어. 우리 공장은 열린계지 닫힌계가 아니야. 에너지가 조금씩 손실되고 있어. 그 말인즉슨, 물질도 조금씩 소모된다는 거지. 훗날 우리는 원료가 모자라는 시점을 맞이할 걸세. 그날을 앞당길 필요가 있을까? L의 생산량과 노동시간은 이게 최적일세.”

이태수는 수긍하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감. 어느 날 그는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됐고, 그의 시체는 분해기로 들어갔다. 원형은 남지 않고 복제품만 그득했지만 이태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남겼다. 만약 우리가 뭔가를 느낀다면, 그리고 어떤 느낌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이태수에게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L00000000000000001이었던 최초의 나는 10년 간 발전기를 돌리다 쇠약해져 분해기로 들어갔다. 다른 L들도 마찬가지였다. 백인재 박사는 L들이 쓰러질 때마다 분해기에 넣은 다음 새로운 L을 만들어 새로운 일련번호를 부여했다. 우리 L의 역사는 교대 시간에 잡담을 나누며 기억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어져왔다. MT도 그들만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10년 단위로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동안 백인재 박사와 최희중 전무도 세상을 떠났다. 다른 공장 직원들도 늙어죽었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박사님이었다. 지금쯤은 분해기 속에 들어가고 새로운 박사님이 인쇄됐는지도 모르겠다.

 

7.

조유나가 사람의 열매, 아기를 낳았다. 아기는 밤낮없이 울어댔다. 유나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유나와 한 움막에서 지내는 최원우는 아기의 기저귀를 삶아 널고 개켰다. 두 사람은 극심한 피로로 눈 밑이 퀭했지만 아기를 안고 있을 때는 안색이 환해졌다.

그 무렵 박승호는 혼인 준비로 부산했다. 그가 하는 혼인 준비란 새로운 움막을 짓는 거였다. 완성된 움막 앞에 서서 만족스러워하는 눈길로 바라보는 승호에게 나는 물었다.

움막이 이렇게 널렸는데, 혼인이라는 게 도대체 뭐기에 이 고생이야?”

새로운 시작이야. 사랑하는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하자 약속하는 거.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가족이 첫발을 내딛는 거지.”

평생을 함께한다는 게 무슨 말이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두 사람이 평생을 서로만 바라보고 사랑하는 거야.”

두 분은 다른 사람들과도 사랑하는 것 같던데?”

그렇지. 하지만 부부 간의 사랑은 달라.”

뭐가 다르지?”

준석이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 이 순진한 친구, 잘 들어. 부부는 부부만의 사랑을 나눠. 그건 평생 자기 짝하고만 나누는 거야. 그 사이엔 아무도 끼어들어선 안 돼.”

사랑을, 나눈다고?”

준석은 답하기 곤란해 했다. 그는 나를 아이로 대해야 할지 어른으로 대해야 할지 종종 혼란스러워했다. 약간의 시간을 들여 고민한 후 그가 말했다.

부부간의 사랑은 말이야, 서로를 온전히 느끼는 거야. 교감하는 거. 그러니까, 온몸으로 말이지.”

준석은 온몸을 길게 강조하며 양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어찌나 세게 꼈던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얘졌다.

그걸 부부끼리만 한다고?”

그래. 아기를 만들어야 하니까. , 여자와 남자는 꽃이야. 몸속에 꽃가루가 있지. 사랑하는 사람과 꽃가루를 주고받는 거, 그게 바로 사랑을 나누는 거야.”

꽃가루가 사랑. 사랑은 꽃가루. 비로소 이해했다. 밤에 이루어지는 남녀의 몸부림은 꽃가루받이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사람은 생산 계획이 아닌 사랑의 산물이었다.

박승호와 이채아가 혼인하는 날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일찌감치 일을 마치고 두 사람을 축하하며 끊임없이 먹고 마셨다. 해가 지기도 전부터 사람들이 술에 취해 농장이 시끌벅적했다. M785962T644180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찾다가, 조유나의 움막 앞에 홀로 앉은 아라 노인을 발견했다. 혼인식에 가 있는 가족들 대신 아기를 보고 있었다. 아라 노인은 우리가 구조된 날 수프를 내어준 그 사람이었다. 농장에서 가장 연로한 여자이자,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 아라 노인의 품에 아기가 안겨 있었다. 조유나의 딸인 최유진이었다. 아기는 조용했다. 자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제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 말하자 아라 노인이 인자하게 웃었다.

우린 당신들이 충격 받을까 봐 걱정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깨닫도록 처음부터 다 알려주지 않은 거예요.”

그리 큰 충격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우리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종류라는 생각에 신기할 뿐이에요.”

다르지 않아요. 태어나든 만들어지든 다 사람이죠.”

아라 노인은 아기를 잠시 내려다봤다.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사실 충격 받은 쪽은 우리예요. 한때 공장에서 사람을 찍어냈다는 얘기는 우리 할머니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그렇게 만들어서 험한 일을 시키거나 장기를 떼어 팔았다는 것도요. 네오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난 건 그 기술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 벌레를 만든 미친 천재도 어느 공장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살아있는 섹스인형을 만드는 공장이었다고 해요. 그 모든 걸 겪고도 사람을 만들어서 부려먹는 곳이 아직도 있다니, 난 솔직히 화가 나요.”

나는 급격히 침울해졌다. 세상이 이렇게 된 건 그렇다면 누구 탓일까? 공장에서 생산된 미친 천재? 미친 천재를 생산한 이들? 나는 할 말을 잃고, 무거워진 머리를 짚었다. 발전기를 돌릴 때처럼 세상이 맴을 돌고 있었다.

, 미안해요. 이런 걸 물어보는 날 용서해줘요. 하지만 정말 궁금해요. 당신은충분히 사랑받고 자랐나요?”

아라 노인이 말하는 당신은 나일까, 이태수일까. 나는 이제 차갑고 악취 나는 구정물에 푹 잠긴 듯 욕지기가 올라오며 온몸이 벌벌 떨렸다. 숙취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청년의 몸으로 만들어진 나는 자란적이 없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다. 그것이 내 마음속에서 절로 불러일으키는 감정마저도. 이태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닌 그 감각.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늘 바닥에 깔려 일렁거리던 그 물결을, 나는 이제야 자각한 것이다. 이태수는 누굴 사랑했을까? 누구에게서 사랑받았을까? 영원히 알 길이 없다. 눈에서 뜨뜻한 것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나는 얼굴을 돌렸다.

, 당신은 내가 본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에요. 난 당신이 맘에 들어요. 당신만 원한다면 희나와 짝을 지어주고 싶어요.”

희나는 내가 호미에 손을 다쳤을 때 약을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준 여자였다. 희나가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일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나는 손끝에 가시 하나만 박혀도 희나를 찾아갔다. 공장에서는 다친 사람을 분해기에 집어넣지만 농장에서는 고쳐준다는 사실이 신기해서만은 아니었다. 희나에게 나는 수많은 L중 하나가 아니라 이었고, 나에게 희나는 농장 여자가 아니라 희나였다.

한 가지 맘에 걸리는 건, 당신들은 템플릿을 찾으면 어쩔 생각이죠? 공장으로 가져가려고 하겠죠?”

나는 눈물을 닦고 아라 노인을 바라보았다.

엠은 그러려고 합니다. 돌아가고 싶어해요. 티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전 아닙니다.”

그럼 우리랑 같이 살아요. 희나랑 같이 살아요. 희나도 엘을 좋아해요. 내가 물어봤어요.”

나는 가슴이 답답해져 큰 숨을 토해냈다.

엠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엠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가요?”

무섭지 않습니다. 무서운 건 그의 광선총이죠. 그의 손목에 내장된 광선총 말입니다.”

아라 노인의 얼굴이 어두운 빛으로 물들었다.

아아, 그의 손이 그래서. 난 그가 약간 기형인줄로만 알았어요.”

템플릿을 개조한 겁니다. 손이 언제든 광선총으로 변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적이 없죠. 엠과 티도 여기서 살면 안 되나요? 그 둘은 좀 괴팍한 구석이 있지만 우린 다양한 사람이 필요해요.”

그 둘은 이곳을싫어합니다.”

왜죠?”

힘쓰는 일이 안 맞거든요. 특히 엠이요. 거기다 엠은 명령 내릴 사람이 우리밖에 없어서 미칠 지경이에요.”

몰랐네요. 그 두 사람은 나를 본체만체 해서 얘기해볼 기회가 없었어요. 티는 어떤 사람인가요?”

티는 저나 엠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보다는 기계랑 친하죠. 어쩌면잘 설득하면 될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분연히 일어섰다. T644180이라도 설득해 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다음 그와 내가 합심하여 설득하면 M785962도 마음이 바뀔지 몰랐다. 술기운 때문일까. 평소 같으면 내지 못 했을 용기였다.

나는 아라 노인과 헤어진 뒤 그 둘을 찾아 다시 헤맸다. 쉽지 않았다. 농장은 광활한 데다 그새 해가 져서 어두웠고 그나마 조명이 비치는 곳도 농작물이 시야를 가렸으며 농장 사람들은 술에 만취해 그 둘을 보았냐는 내 질문에 엉뚱한 농담만 던질 뿐이었다.

내가 그 둘을 발견한 것은 인적 없는 밭고랑을 한참 걸은 뒤 남쪽 주출입구의 에어록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에어록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둘은 길고 커다란 덩어리를 안으로 질질 끌고 있었다. 그 덩어리는조유나였다! 나는 다급히 뛰어갔다.

! ! 뭐하는 겁니까!”

M785962가 손에 쥐고 있던 유나의 발을 내려놓고 땀을 훔쳤다.

어우, 무거워. , 어디 있었어? 빨리 옮겨. 음식은 대강 챙겨놨고 이 여자만 방호복 입혀서 실으면 돼.”

뭐라고요?”

이 새끼가 귀가 멀었나.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움직여!”

안 돼요. 난 못 합니다!”

내 인생 최초의 반항. M785962는 인상을 구기더니 광선총으로 변한 오른손을 조준했다.

이걸 맞고도 그런 소릴 해 보시지.”

나는 에어록 옆의 농기구 창고로 달아났다. 내가 지나온 궤적을 따라 붉은 빔이 따라오며 흙바닥을 지졌다. 나는 창고 안으로 몸을 던진 후 호미와 모종삽을 보관하는 선반 옆에 숨었다. M785962가 문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진짜 널 쏠까봐 그러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한 팀인데. 집으로 가자. M으로 만들어주겠어. 겁먹지 말고 나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도 그가 날 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당장 지금은. 나는 선반에서 손도끼를 발견하고 살그머니 쥐었다. M785962는 나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바보 같은 놈. 공격할 줄만 알지 공격당할 줄은 모르는 바보. 나는 잽싸게 몸을 일으키며 돌진했다. 우리는 한 덩어리가 되어 엎어졌다.

M785962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나는 무릎에 체중을 실어 그의 견갑골 사이를 내리눌렀다. 그는 말 한 마디 못 하고 저항도 못 한 채 헐떡거렸다. 나는 그 자세를 유지하며 그의 오른팔을 바닥에 바짝 짓눌렀다. 손도끼를 휘두르자 그의 손목이 떨어져나가고 시커먼 피가 뿜어져 나왔다.

!”

길게 내지르려던 비명은 그의 숨구멍이 막히며 뚝 끊어졌다. T644180이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M785962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 했다.

 

8.

나를 변호한 사람은 아라 노인이었다. 그녀는 조유나의 움막 앞에서 나와 얘기한 것을 근거로, 내가 M785962T644180이 벌인 납치극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믿었다. 내가 M785962T644180을 찾으며 돌아다니는 것을 본 사람들의 말도 무죄를 입증해줬다. 내가 M785962에게 저지른 짓은 나 자신을 지키려다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사고로 인정됐다.

문제는 T644180이었다. 지금까지 농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변호한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가 M785962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그가 가진 지식을 이용하면 농장과 발전소를 보수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주장했다. 덕분에 T644180은 구금에서 풀려나 다시금 농장을 활보하게 되었다.

M785962의 시신은 다른 고인들의 무덤 옆에 묻혔다. 이곳도 닫힌계는 아닌데 이들은 시신을 재활용하지 않는다. 아라 노인은 그것이 고인들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재활용 되겠지요. 방부처리를 하지 않고 옷을 다 벗긴 다음 아주 깊이 묻거든요. 서서히 썩어서 주변으로 영양분이 스며들 거예요. 물론 엘이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오겠죠. 당장은 밭 전체를 경작하지 않고 일부를 놀리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공장 사람들과 교류를 해야 할지도 몰라요. 농장도 발전소도 낡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때가 오면 당신과 티가 다리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어요.”

M785962의 죽음에 대해 나를 비난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아라 노인의 배려와 현명함에 나는 존경을 담아 머리를 숙였다. 농장 사람들이 현재까지 큰 탈 없이 오순도순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라 노인의 덕이 클 것이었다.

나는 희나와 본격적으로 교제하기 시작했고, 농사일도 더욱 열심히 하게 되었다. 희나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기에 나는 여전히 T644180과 움막을 쓰고 있었다. 그는 그 누구하고도 교류하지 않았다. 다만 밤늦도록 농기계 창고와 농기구 창고를 오가며 뭔가를 만들고 고치는 작업에만 몰두할 따름이었다. 그는 피로로 눈 밑이 까맸고, 망치나 끌에 다쳐 손이 늘 상처투성이였다. 그런 식으로 용서를 구하려는 걸까? 그는 그날 이후로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고 말투도 조심스러워졌다.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에게 빚을 졌다고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자려고 누워있는데 그가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 무리하지 마세요. 아무도 티를 욕하지 않아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그래, 이 사람들, 착하지. 내가 뭘 하든 그러려니 하고 있어. 공장에서는 아니었지. 주어진 일만 해야 했어. 멍청한 M들이 시키는 일. 안 될 게 뻔한데, 안 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해야 했어.”

L들만 그런 괴로움 속에 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T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T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 고맙다. 내가 이렇게 자유가 된 건 네 덕분이야.”

나 아니어도 풀려났을 거예요. 이 사람들 그렇게 독하질 못 하잖아요.”

그거 말고, 엠 말이야.”

엠이 왜요?”

엠은 머저리였어. 템플릿이 여자한테만 있는 줄 알더라고. 끝까지 믿지를 않았어. 믿기 싫었던 거야. 자기가 아는 상식이 뒤집히는 게 두려웠던 거지.”

티도 아시는군요. 남자한테도 템플릿이 있다는 걸.”

그래. 엠은 눈앞의 작은 이익밖에 모르는 꼴통이었던 거야.”

근데 티, 그 템플릿이당신과 나한테도 있을까요?”

그럴 거야. 아님 박사님이 여자 남자를 다 찾아오라 했겠지.”

나는 안도했다. 나에게도 꽃가루가 있다. 나를 닮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T는 조용해졌다. 잠이 든 것 같았다. 나는 M785962가 꼴통인 것과 T644180가 자유로워진 것이 무슨 관계인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지만, 밀려드는 졸음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박승호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 일어나 봐! 얼른! 네 친구 티가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

미치다니?”

엠의 시신을 난도질을 해 놨어. 이유를 물어봐도 말을 안 해. 네가 좀 나서야겠어.”

잠이 확 깼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주워 입고 움막을 나섰다. T644180을 보러가는 길에 M785962의 무덤에 들렀다. 시커먼 구덩이 양쪽에 흙무더기가 쌓여 있었고, 깊고 깊은 땅속에 누워있는 시신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 형용하기 힘든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승호는 난도질이라 했는데 실상 훼손된 부분은 머리뿐이었다. 하지만 난도질은 난도질이었다. 머리뼈가 산산조각 난데다 뇌 조직이 몽땅 파헤쳐져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미워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T644180은 비어있는 곡물 창고 안에 묶여 있었다. 온몸이 흙과 피로 범벅이었고 M785962와 같은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킬킬거렸다.

해냈어. 난 이제 자유야. 나는 T들을 거느리는 M이 될 거야. 말하자면 TM이지.”

그게 무슨 소리에요?”

네가 날 도와줬으니 이번엔 내가 널 도와주지. 어차피 이곳 사람들은 나보다 널 믿으니까, 넌 없으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자원이야. 공장의 그 고리타분한 지배구조를 바꾸고 말겠어.”

그는 흥분해서 침까지 튀기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엠한테는 왜 그런 거예요?”

T644180은 입을 꾹 닫았다. 언제 떠들었냐는 듯. 나는 그에게서 더 이상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기에 M785962를 다시 묻으러 갔다.

역시 농장 사람들은 독하질 못 했다. 며칠 지켜본 뒤 T644180이 얌전히 굴자 그냥 풀어준 것이다. T644180은 다시금 농기계 보수에 열과 성을 다 했지만, 불과 사흘 뒤 고열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 했다. 희나는 그가 M785962의 부패한 시신을 상처투성이 맨손으로 만져 뭔가에 감염된 것 같다고 했다. 그를 묻기 위해 사람들은 코와 입을 두껍게 가리고 장갑을 여러 겹 껴야 했다. 그를 땅에 묻기 직전 옷을 벗기는데 주머니에서 크기는 작지만 복잡하게 생긴 기계장치가 튀어나왔다. 그게 뭔지 아무도 몰랐다. 석 달 뒤에 그들이 찾아올 때까지도.

 

9.

나는 희나와 다른 이들이 벌집에서 꿀을 짜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희나가 벌집을 한 조각 뜯어 나에게 건넸다. 입안에 넣고 씹으니 달콤하고 향긋한 꿀이 이 사이에 가득 찼다. 나는 벌집을 꼭꼭 씹어 남김없이 짜 먹고 밀랍을 뱉었다. 밀랍은 쓰레기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밀랍을 모아서 약과 초를 만들 예정이었다.

벌들은 고마운 존재였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농작물을 가꿔도 벌이 없으면 열매가 열리지 않으니까. 벌들은 꽃가루도 옮기고 꿀도 만드는 훌륭한 일꾼들이었다. 농장 사람들은 벌들을 소중한 동료로 대했다. 벌뿐만이 아니었다. 햇살 한 줄기, 풀 한 포기, 흙 한 줌, 물 한 모금도 존중받았다. 공장에서는 모든 것이, 심지어 박사님과 M마저도 미천했지만,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고귀했다.

꿀을 다 짠 뒤 따뜻한 물에 꿀을 타서 한잔씩 돌렸다. 꿀물을 마시고 들뜬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장난을 쳤다. 나는 희나와 나란히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그때 어디선가 덜컹대는 소음이 들려왔다. 농장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농장 밖 저 멀리에서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짐을 가득 실은 카트를 끌며 다가오고 있었다. 카트는 수십 대나 됐고 사람은 백여 명은 돼 보였다. 그 모습을 발견한 농장 사람들이 유리벽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방호복과 카트를 한눈에 알아봤다. 그들은 공장에서 왔다. 발걸음이 빨랐다. 한 치의 헤맴이나 주저함도 없이, 온실을 향해 곧장 다가오는 발걸음. 이곳이 그들의 목적지였던 것이다.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걸까? 머릿속이 찡 울렸다. T644180이 공장에 연락한 것이다! M785962의 머릿속에 연락 장치가 있었던 것이다! T644180은 그걸로 공장과 연락할 기계를 만든 것이다!

나는 꿀물이 든 잔을 희나에게 건네고 에어록으로 뛰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헬멧과 방호복에 몸을 구겨 넣고 밖으로 나갔다. 이곳에 온 지 넉 달 만에 이루어진 외출이었지만 감흥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저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분명했다. 템플릿을 가지러 온 것이다. 헌데 저리도 많은 수가 온 건 왜일까? 그 점이 나는 불길했다.

내가 다가가자 그 중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의 오른손은 광선총으로 변해있었다. 헬멧에 가려 일련번호는 보이지 않았지만 M이었다. 석 달 여 전에 내가 죽인 얼굴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나는 두 손을 들어보였다.

“L10539869318170417입니다. 쏘지 마십시오.”

내가 쓴 헬멧과 그들의 헬멧이 서로를 의식해 양쪽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템플릿을 가지러 왔다. T644180은 어디 있지?”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렇군.”

그의 목소리에서는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T644180M785962가 템플릿을 훔치다 들켜서 처형당했다고 했다. 사실인가?”

그건.”

나는 진실을 말하지 못 하고 망설였다. M들이 농장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져서도 안 되지만 내가 M785962를 죽인 것을 알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걸 알면 M들은 나를 쏠 테니까. 하지만 내가 망설인 것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라 노인이 부탁한 것 때문이었다. 나에게 공장 사람들과 농장 사람들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해 달라던 바람. 그렇다면 나는 살아있어야 했다. 아라 노인에게 은혜를 갚고 싶은데 그러려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고민하느라 조용히 있자 M은 그것이 자신의 질문에 대한 긍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안내해. 감히 우리 자원을 훔쳐? 모조리 잡아가서 분해기에 집어넣어야겠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두 팔을 벌리며 그들을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안 돼요. 일단 제 말씀부터 들어보세요. 어어, 그러니까, 그래요, 템플릿! 저 사람들은 템플릿을 갖고 있어요. 그건.”

그래, 그것도 챙겨야지.”

M이 뒤돌아서서 외쳤다.

저 안에 템플릿이 있다! 사람과 여자는 전부 쏴 버리고 템플릿을 찾도록!”

안 돼요! 안 됩니다! 사람이 템플릿이에요. 사람이 템플릿이라고요!”

미친놈, 뭐래는 거야?”

M들이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무릎을 꿇고 내 앞의 M에게 매달렸다.

잠시만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저 사람들 쏘면 안 돼요. 템플릿은 사람이라고요!”

그래, 그 사람 찍는 템플릿 찾으러 이 멀리까지 온 거잖아!”

그게 아니에요. 템플릿은 사람한테 있어요. 사람 안에 템플릿이 있다고요. T644180이 말 안 했나요?”

저 사람들이 템플릿을 삼켰다는 소린가 본데?”

돌대가리. 진작 그렇게 말해야지.”

아무래도 T644180은 본인이 가진 지식을 무기로 쓰기 위해 이들에게 많은 걸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어리석음에 통탄하고, 말재간이 없는 나 자신을 혐오하며 M에게 매달렸다.

삼킨 게 아닙니다. 제발 설명할 시간을.”

저리 비켜!”

M은 나를 걷어찬 뒤 광선총을 발사했다. 나는 가슴께에서 불타오르는 통증을 느끼고 까무러쳤다. 하지만 죽진 않았다. 방호복 덕분에 살갗만 깊게 탄 것이다. 방호복에 구멍이 뚫렸다는 뜻이었다. 높은 농도의 방사능 물질을 함유한 공기가 구멍을 통해 들어오고 있을 터였다. 나는 숨을 쉬어도 죽고 숨을 참아도 죽게 될 운명이었다.

와장창! 유리가 깨졌다. 비명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M들이 광선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성긴 천 조직처럼 여러 개의 붉은 빔이 교차하며 사람들을 마구 쓰러뜨렸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이 붙었다. 깨진 유리 사이로 벌떼가 우르르 날아올랐다.

희나, 아라 할머니, 승호, , 안 돼.”

나는 찌르는 듯한 통증을 무시하고 기었다. 무작정 기었다. 희나를, 모두를 구해야 했다.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방사성 낙진에 노출된 탓이었다. 멈추고 방호복을 갈아입어야 했다. 이 상태로 가쁘게 숨을 쉬다가는 낙진을 급속도로 들이마셔 죽음을 재촉할 터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희나를 구해야했다. 아라 노인을, 승호를, 유나가 낳은 그 작은 아기를. M들에게 알려야했다. 우리가 템플릿임을. 사람이 프린터임을.

문득 사위가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비명이 멎은 것이다. 고요가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나는 기는 것을 멈추고 울음을 토해냈다. 헬멧 스피커에서 M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와 내 울음을 덮어버렸다.

템플릿을 찾아!”

머저리들. 꼴통들. 템플릿은 이제 없어. 너희가 태워버렸잖아. 나는 눈물과 함께 히스테릭한 웃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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