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지수가 마지막 대사를 마치자 촬영 감독은 통과 사인을 내렸다. 컷. 그것은 <데이 오브 라이트> 시즌4의 마지막 씬 촬영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촬영이 끝나자 지수는 현장의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장비를 갖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14시간 연속 촬영으로 다들 지치고 피곤한 상태였다. 야속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데이 오브 라이트>는 크래프트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뱀파이어 로맨스 시리즈였다. 하지만 시즌4 막판에 몇 가지 트러블이 생기면서 촬영 시간이 급박해졌다. 제작자는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감독을 재촉했다. 그래서 뜻밖의 강행군을 해야만 했다.

사람들 중에서 지수의 인사를 유일하게 받아준 사람은 한 사람, <데이 오브 라이트>의 주인공 우주 뿐이었다.

“수고했어요.”

“앗, 네. 감사합니다.”

우주는 지수가 개인적으로는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유라시아계 혼혈 미남의 월드 스타. 지금까지 찍은 영화도 수십 편에 각종 CF, 홍보에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었고, 상도 수십 개나 탔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겸손하고 온화한 성격이라 팬과 현장 양쪽에서 인기가 많았다. 제작자들은 남자 주연을 고를 때 그를 가장 먼저 후보로 고려했다.

그런 사람이 인사를 받아주자 지수는 황송할 지경이었다.

지수는 <데이 오브 라이트>에서 조연에 불과했고 우주와 마주칠 일도 별로 없었다. 우주는 항상 바빴다. 스케쥴이 24시간 차있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 지수가 촬영 기간 동안 우주를 만난 것은 몇 번 뿐이었고 그조차도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촬영이 늦어지면서 짜증이 난 우주의 매니저가 우주를 재촉했다.

“우리 빨리 공항으로 가야 해요.”

“아, 그래. 알았어.”

우주는 분장도 지우지 않고 바로 차로 향했다. 그것조차 멋있어 보였다.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는 지수를 매니저 리사가 일깨웠다. 촬영 시간 내내 따라다니느라 매우 지친 모습이었다.

“수고했어.”

“언니도요. 지금 몇 시에요?”

“새벽 네 시 반이야.”

“미안해요. 많이 졸립죠?”

“아냐. 네 잘못도 아닌데. 이제 스케쥴도 끝났겠다. 너 집에 데려다주고 자면 돼. 당분간 스케쥴도 없잖아.”

“그게 문제에요.”

그 말에 지수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다음 시즌에도 출연이 가능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소속사에선 이대로만 가면 문제 없을 거라고 장담했지만 지수는 회의적이었다. 지수 같은 조연은 제작자와 감독의 변덕으로 언제든지 하차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모든 일정이 끝나자 불안해졌다. 광고 제안이나 협찬이 들어온 것도 없고 다른 드라마에 출연하겠냐는 배역 제안도 없었다.

솔직히 지수는 자신이 <데이 오브 라이트> 오디션을 통과한 것도 신기했다. 그 전까지 지수는 50번도 넘게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약간 의기소침해진 상태였다. 오디션에 참가할 때도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합격 통보를 받은 것은 정말 의외였다.

리사는 지수를 분장실로 데려갔다. 지수가 화장대 앞에 앉자 대기하고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화장을 지우기 시작했다. 마지막 씬 촬영을 위해서 한 시간 동안 분장했는데 그것을 지우는데는 순식간이었다. 너무 허무했다. 하지만 할로윈도 아닌데 뱀파이어 분장을 하고 다니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대로변에 무인 택시가 줄지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 끝난 스태프들은 이런 퇴근에 익숙해져 있었다. 지수도 거기에 합류했다. 리사는 지수를 무인 택시에 태우면서 말했다.

“내일 열두 시에 중앙 채널에서 코스모스가 중요한 발표를 한다고 하니까 잊지 말고 꼭 봐야 해. 알았어?”

“알았어요.”

“절대 잊지 마.”

코스모스는 세계 최대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였다. 막강한 자금력과 독점 컨텐츠를 내세워서 시장을 장악했다. 코스모스에서 뭔가 발표한다고 하면 주식 시장이 요동쳤다. 지수도 언젠가 코스모스에서 제작하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을 원했다. 그것만으로도 제안받을 수 있는 배역의 수준이 달라졌다.

 

 

 

다음날 지수는 일찍 일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며 텔레비전을 켰다. 아직 발표 시작 시간 전이었지만 카메라는 텅 빈 무대를 비추고 있었다. 스크린에 코스모스의 로고가 회전했다.

중앙 채널에 지수 말고도 코스모스의 행보에 관심이 있는 수백만 명이 프로그램을 시청 중이었다. 영화 업계 관계자들이거나 투자자들이거나. 다들 촉각을 곤두세웠다.

시간이 되자 무대에 불이 밝혀지며 스피커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한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코스모스의 부사장 아이들은 업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무명 배우로 시작해서 제작자 자리에 올라 결국은 코스모스의 부사장 자리에 올랐고, 공격적인 확장 전략으로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코스모스를 업계 1위로 만들었다. 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다음 시즌 제작할 드라마를 발표하는 거라면 굳이 부사장급이 직접 발표할 리가 없었다. 지난 분기 수익? 새로운 투자 환경? 사업 확장?

아이들은 카메라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손가락을 하나 들어보였다.

“제가 오늘 발표할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최근 코스모스는 영상 컨텐츠의 획기적인 발전을 일으킬 신기술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그것은 시청자 여러분에 관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기존의 제작 방법은 항상 연속성이라는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계속 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죠. 시청자가 다음 시즌을 보기 위해선 몇 개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제작사에서 시리즈 하나를 제작하는데 걸림돌이 너무 많습니다. 제작자를 섭외하고, 감독을 구하고, 스태프를 모집하고, 시나리오를 기다려야 했으며, 배우 스케쥴도 조율해야 했습니다. 주연 배우가 밀린 스케쥴을 소화하는걸 기다리다보면 6개월도 넘게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죠. 그 결과 제작 시간이 몹시 연장되거나 길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아무리 좋아했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스크린에 도표가 나타났다. 그래프는 오른쪽으로 향할수록 하강 곡선을 그렸다.

“시간이 지나면 시청자는 프로그램에 애정을 잃어버립니다. 데이터에 보면 어떤 인기 드라마든 다음 시즌으로 넘어가면 연속 시청률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충격적이었죠.”

아이들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치 시청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이.

“게다가 프로그램의 인기에 따라 무리하게 시리즈를 연장시키면서 작품 전체가 엉망이 되어 마무리되거나, 배우 스케쥴 문제로 등장 인물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작품에서 사라지는 경우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인기를 잃고 사라진 시리즈가 지금까지 수십 개는 될 겁니다.

코스모스는 이러한 문제들이 서비스에 치명적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물리적인 환경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대안을 고민했습니다.

앞으로 코스모스는 세계 최초로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개인 맞춤형 드라마입니다. 이 서비스는 시청자의 장르적 선호에 의한 작품 추천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AI가 시청자의 선호에 따라 취향을 조합하여 실시간으로 드라마를 제작, 서비스하게 될 겁니다.

코스모스의 데이터 베이스는 지난 수십 년간 수천만 개의 이야기와 그래픽 소스와 음성을 수집하고 분석했습니다.

이제 시청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원하는 만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코스모스는 시청자들께 완벽한 만족감을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이제부터는 맞춤형 드라마에 대해 코스모스의 깜짝 손님이 소개할 겁니다.”

아이들이 무대를 내려가고 한 여자가 올라왔다. 지수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바로 왕년의 유명한 배우 예은이었다. 한때 최고의 연기자였으나 최근에는 작품 출연이 없어 은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금 세대 연기자 중에 예은의 연기를 보고 자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예은은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사회를 맡은 예은입니다. 제가 코스모스의 최신 기술을 발표하게 되어 기쁩니다.”

스크린의 모습이 바뀌었다. 스크린에 무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예은이 혼자 서있었다. 카메라는 예은의 얼굴을 확대했다. 늙고 주름진, 예전의 젊음은 찾아볼 수 없을 얼굴이었다.

“지금부터 제 얼굴에 주목해주십시오.”

예은의 모습이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다. 차츰 얼굴 주름이 펴지더니 급기야는 20대로 보이게 되었다. 수십 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코스모스의 신기술은 이렇게 화면을 실시간으로 합성할 수 있게 합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예은은 무대 위를 걸었는데 얼굴은 조금의 노이즈도 없이 깨끗했다.

스크린의 배경이 바뀌었다. 이제 20대가 된 예은은 호텔 로비를 걷고 있었다. 이어서 배경은 동남아의 해변으로, 계곡 한 가운데로, 바람부는 초원으로 바뀌었다. 모든 모습이 실제처럼 자연스러웠다.

“믿기시지 않겠지만 이 배경은 실제 장소가 아닙니다. 컴퓨터 합성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무대죠. 더 이상 영화 촬영에 그린스크린은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컴퓨터가 모두 처리할 테니까요.”

예은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그 뒤에서 또 다른 예은이 지나쳐 걸어갔다.

새로 나타난 예은은 계속해서 복제되더니 옛 세대의 배우들로 바뀌었다.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에밀리 블런트, 엠버 허드, 케이트 블란쳇, 등등. 심지어 성별도 자유자재로 바뀌었다.

“시청자는 영상 속의 배우 모습을 원하는 인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법적 문제가 없다면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새로운 체험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모습을 넣을 수도 있겠죠. 또한 합성 프로그램은 감정 표현, 음성 기능도 지원합니다.”

말론 브란도가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의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귀를 의심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음성이었다. 합성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모르고 들으면 진짜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옆에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춤을 추기 시작했고 마이클 패스벤더가 무술 동작을 시연했다.

어느새 화면 속의 인물들이 사라지고 두 사람만 남았다.

그들은 어두운 방에 의자에 앉아 셜록 홈즈의 대사를 읊고 있었다. 잠시 후에 배경은 그대로인 채 대사는 절절한 사랑 고백으로 바뀌었다.

인물과 배경과 대사가 부조화를 이뤘지만 인물들의 연기는 진지했고 심오해보였다. 정말 합성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마 실제 배우들을 데려다가 썼다면 2~3번은 NG가 났을 것이다.

“인공지능이 도입된 프로그램은 손쉬운 영화 제작을 지원할 것입니다. 제작자는 AI를 조종해서 이야기를 넣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배경과 인물을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개인이 모든 영화 제작 과정을 진행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예은이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스크린에 있던 합성 인물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지금까지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은이었습니다.”

발표를 보고 지수는 충격을 받았다. 솔직히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도 배우들 사이에서 배역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은 미칠듯이 치열했다. 배역은 한정되어 있는데 사람은 너무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은퇴한 배우들하고도 경쟁해야 한다니.

늙지 않는 배우라니! 그건 좀비하고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까지 영화계의 시스템은, 배우가 한창 젊을 때는 주연을 하다가 나이가 들면 점차 조연으로 밀려나고, 빈 자리를 신인 배우가 차지하는 흐름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코스모스의 발표는 앞으로 영화 제작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이제 배우들에겐 여러 작품을 동시에 촬영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었다.

하지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소수일 것이다.

제작자는 언제나 검증된 배우를 사용하길 원한다. 신인 배우의 불확실성은 제작자들에게 매력적이지 않다. 영화는 예술이기 전에 엄연히 사업이고 수익을 내지 못하면 영화사는 파산한다.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신인들에게 부여되던 기회는 더더욱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코스모스의 목적이야 어쨌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걷어차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수는 서둘러 소속사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 수신음이 흐른 끝에 리사가 전화를 받았다.

“언니, 이게 무슨 소리에요?”

“발표 봤구나.”

“언니가 보라면서요. 그런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제가 회사로 갈까요?”

“몰라. 나도 그런 건지 몰랐지. 지금 회사 분위기도 완전히 폭탄 맞은 것 같아. 코스모스에 문의 전화 걸고 있는데 받질 않아.”

“설마 이제….”

“일단 자세한건 상황 들어오는 대로 알려줄게. 지금 좀 바빠서. 알았지? 나중에 전화해.”

지수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지수는 전화기를 들고 멍하니 있었다.

 

 

 

코스모스의 발표 이후에 사람들 사이에선 희비가 교차했다.

자신의 통찰력을 자신하는 사람들 덕분에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주가는 대폭등했다. 사람들은 돈을 싸들고 주식 시장으로 달려들었다.

코스모스의 시연회가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제 영화를 제작하는데 더 많은 인력은 필요 없다.

누구나 간단히 손쉽게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심지어 배우조차도 필요 없다.

합성된 그래픽 인간은 이미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인간이었고 반응하고, 움직였다. 목소리도 낼 수 있었다. 프로그램은 건강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고 분장을 할 필요도 없다.

더 이상 촬영 준비를 위해 배우 하나에 수십 명이 달려들 필요가 없었다. 그 시간에 여러 개의 필름을 동시에 촬영하는게 가능해졌다.

액션 장면을 찍으려고 스턴트맨에게 맡길 필요도 없었다. 배우가 촬영 주에 부상을 입거나 다칠 가능성도 사라졌다.

회사 입장에선 엄청난 재원과 경비를 절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출 비용을 절감하니 투자 이익이 극대화 될 거라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갑자기 투자가 밀려들자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은 함박 웃음을 지었다. 심지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회사들까지 투자자들로 몸살을 앓았다.

반대로 현장 관계자들 사이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정말 그렇게 영화 촬영을 하는게 쉬워진다면, 그들을 굳이 고용할 필요가 있는가? 한 사람이 모든 작업을 처리할 수 있는데?

누구라도 가장 나쁜 소식, 인원 감축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아직 어떤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태프 사이에서는 이미 해고가 진행 중이거나 일자리가 줄어들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당장 다음 분기에 잡혀 있던 일정이 취소되거나 연기되고 있었다.

제작사에서는 확인을 거부했다. 하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부에서도 이 문제를 두고 딱히 규제할 방법이 없었다. 실업률이 늘어나는걸 달갑지 않게 생각한 정부에서는 코스모스측에 자제를 요구했지만 코스모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영화인 노조가 파업을 경고했지만 의미없는 일이었다. 코스모스에선 신경도 안 쓰는 분위기였다.

파업은 훼방을 놓을 때 효과를 발휘하지만, 코스모스는 이제 사람이 없어도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 노조가 아무리 파업을 한들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코스모스는 새로운 사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발표가 끝나고 나서 예은이 나오는 새로운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어느 채널을 돌려보아도 예은이 나왔다. 예은, 예은, 예은.

놀라운 홍보 전략이었다. 코스모스는 상품을 홍보하는 척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사의 기술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고 있었다.

광고에 나오는 옛날 모습으로 복원된 예은은 시간이 흘렀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았다. 세상에. 숨겨놓은 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사실 조금만 눈여겨 봐도 과거의 예은과 현재 재조립된 예은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새로운 예은은 원본보다 더 아름다웠고 더 사랑스러웠다. 짜증스럽게 눈썹을 찡그리는 모습마저 예뻤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만 모아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원래 그랬다는 듯이 자기 머리 속의 예은과 가공의 모습을 기억으로 짜맞추기 시작했다. 다들 좋은 것만 보고 싶어하니까.

코스모스는 아예 전성기 시절 예은이 출연한 영화를 모두 모아서 전용관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금 와서 흘러간 옛 영화들을 보는 사람이 누가 있냐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영화 취향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건 틀린 예측이었다.

사람들은 예은이 나오는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예은의 놀라운 재등장이, 사람들이 과거에 품고 있는 향수를 자극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 땐 그랬지’하고 말하는걸 좋아한다. 예은의 전성기는 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중에는 지수도 있었다. 어차피 할 것도 없고 해서 지수는 정액권을 질러놓았다. 지수도 예은의 연기를 보고 자란 세대였고 예은이 다시 부각되는 것이 반가우면서 씁쓸하게 느껴졌다.

지수가 예은의 영화를 네 편째 보고 있을 때 리사에게 전화가 왔다. 지수는 재생을 멈추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무슨 일이에요?”

“음, 지금 전화 통화 가능해?”

리사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지수는 나쁜 예감이 들었다.

“나쁜 소식이에요?”

“좋은 얘기는 아니야. 방금 들어온 연락인데, 에드워드 프로듀서 알지?”

“예, 알아요.”

모를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데이 오브 라이트> 제작 총괄 담당이었다.

“그 사람이 왜요?”

“방금 연락을 받았는데, 데이 오브 라이트 다음 시즌 제작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순간 지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취소되는 거에요?”

“일단 인기작이고 해서 내부적으로 추진해보겠다고는 하는데 확답은 못 들었어. 아무래도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어.”

지수는 벽에 기대고 스르륵 내려앉았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알겠어요. 연락해줘서 고마워요.”

“아니야. 도움이 못 되서 미안해.”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 지수는 베개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다.

이게 다 코스모스 때문이야.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코스모스는 아예 기술 시연회를 발표했다. <직접 최신 서비스를 체험해보세요.>

코스모스는 도시에서 가장 큰 박람회장을 임대하고 업계 관계자들에게 초대장을 돌렸다.

지수는 소속사에서 보내준 초대장을 들고 참가했다. 박람회장에는 입구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섰다. 지수는 몇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유명한 감독이며 제작자, 배우들, 영화사 사장들이 전부 모여있었다.

심심해하던 지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출구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 표정은 하나 같이 기이했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나 같이 귀신에 홀린 표정이었다.

대체 뭘 봤길래 그러지?

곧 지수의 차례가 되었다. 진행요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박람회장 내부는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지수는 단말기 앞에 가서 섰다. 화면에 원하는 장르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지수는 일부러 로맨스 장르를 선택했다. 로맨스는 만들기 어려운 장르이고 정말 인공지능이 만든다면 인간이 만드는 것만큼 완전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분명히 중간에 엉성함을 발견하리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5분 내에 무너져내렸다.

솔직히 말해서 지수는 첫 5분 동안 넋놓고 보기만 했다. 5분만에 빼앗아갈 정도였다. 카메라 연출이며 배경 모두 수준급이었다.

지수는 정신을 차리고 허점을 찾아내기 위해 집중했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이야기의 완급 조절을 자연스럽게 진행하며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그 때문에 인공지능이 만든 거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이게 정말 인공 지능이 만든 거라고? 사람이 아니라?’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지수는 중간에 장르를 코미디로 변경했다. 그러자 프로그램은 자연스럽게 영화의 전개를 로맨스에서 코미디로 바꿨다. 심지어 인물도 중간에 교체할 수 있었다. 엄청난 유연성이었다.

지수는 왜 박람회에서 나오던 사람들이 그렇게 귀신에 홀린 표정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시연회가 끝나고 지수는 당혹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현대 사회에서 산업이 대부분 자동화되면서 이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모두 기계가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기계의 용도 설계조차도 인공 지능이 했고 과학 실험 연구도 넘어갔다.

그런 와중에 새로운 믿음이 생겨났다. 오직 예술만이 인류의 마지막 남은 보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술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아무리 인간을 초월한 로봇이라고 해도 예술만은 결코 할 수 없다. 아무리 기계적으로 조합해봤자 인간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은연 중에 가능성을 깔보았던 모양이다.

지수는 오늘 그 편견이 무너진 것을 확인했다.

머릿 속이 복잡했다. 혼란스러운 상태 그대로 정처없이 걸었다.

슬슬 다리가 아파올 때쯤 지수는 자신이 시연회장을 빙빙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수는 집에 가려고 무인 택시를 찾았다.

그 때 외진 곳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여서 지수는 목소리를 따라가보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무대 뒤에서 예은과 우주가 다투고 있었다. 우주가 예은에게 쏘아붙이고 있었다. 지수는 깜짝 놀랐다. 항상 온화한 우주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벽 뒤에 숨었다.

“당신 때문에 사람들이 곤경에 빠졌어요.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나 합니까? 사람들이 현장에서 쫓겨날 거에요.”

예은이 받아쳤다.

“그게 어때서? 언젠가 일어날 일이잖아? 그게 좀 더 빠르게 일어난 일이지.”

“지금 장난합니까?”

“장난 아닌데?”

우주는 무언가를 생각한 듯 멈칫했다.

“설마 아직도 우리가 당신을 무대에서 쫓아낸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래서 지금 이런 식으로 복수하려는 거에요?”

“복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맞아. 이건 복수야.”

“그런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습니까. 왜 인정하지 않는 거에요? 무대로 돌아오고 싶으면, 나이가 들었다는걸 인정하고, 당신 매니저한테 맞는 배역이나 찾아달라고 해요. 말도 안 되는 주연 자리나 요구하지 말고.”

“웃기지 마! 늙는다는 이유로 조연으로 밀려나서 할망구 역할이나 해야 해? 그런 심정을 알아? 네가 그걸 알기나 해? 모를걸? 넌 항상 주연이었으니까.”

예은이 소리쳤다.

“나도 한창 젊을 때는 주연이었어.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버림받았지. 새파란 어린애들한테 주연 자리를 내줘야 했다고. 이젠 괄시받고 있고. 더 이상 들어오는 배역도 없어.”

“그건 솔직히 당신 사생활이….”

“내 사생활? 그게 너만 할까? 사람들이 네 진상을 알게 되면….”

“입 조심해요.”

순간 우주는 정색을 하고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사나운 목소리였다.

예은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했다. 하지만 곧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뭐? 어쩔 건데? 때릴 거야?”

우주는 예은을 노려보다가 뒤돌아섰다.

“그만하죠. 여기서 남의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것도 없으니까.”

“겁 먹었어? 한 대 쳐봐. 만약 누가 보기라도 하면 네가 만든 이미지가 어떻게 무너질지 궁금하지 않아? 다음 날에 뉴스에 제일 먼저 나올걸?”

“도발하지 마요. 나라고 항상 참는건 아니니까.”

“엿이나 먹어!”

우주는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

예은은 뭐라고 투덜대더니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 지수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지수는 얼른 빠져나와서 무인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주와 예은은 대체 무슨 관계일까?

두 사람이 예전에 분명히 무슨 관계가 있다는건 분명한데.

지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생각을 그만둘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집 앞에 꽂혀있는 고지서를 확인하자 사라져버렸다. 사방에서 요금을 내라고 아우성이었다. 관리비,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통화료 등등.

세계적 스타건 은퇴한 스타건, 사실 두 사람이 무슨 관계든 자신이 내일을 살아갈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들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사람이 자신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새 일을 구해야했다.

지수는 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에요. 바빠요?”

“아니, 그렇진 않아. 무슨 일이야?”

“<데이 오브 라이트> 시즌 5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려고요.”

“미안해. 지금은 아직 몰라.”

리사는 즉답했다. 지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혹시 새로 들어온 제안 없어요?”

“지금은 아무 것도 없어.”

“오디션은요?”

“그것도 마찬가지야.”

“다른 드라마 오디션 모집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음, 미안해. 지금은 그냥 아무 것도 없어. 모든 일정이 취소됐어. 영화사에선 지금 아무 것도 안 하려고 해. 알아보고 있는데 아무 것도 일정이 잡힌게 없어.”

“후우.”

“너무 걱정하지 마. 뭐라도 잡히면 연락 줄 테니까.”

“그래요.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지수는 침대에 뻗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게 다 코스모스 때문이구나.

어쩐지 무기력해지면서 다 포기하고 싶어졌다.

이대로 밥줄이 끊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한평생 연기만 보고 달려왔는데, 연기자 일을 그만두면 그럼 앞으로 뭐 먹고 살아야 하나, 다른 분야에서 받아주려고나 할까 걱정도 되었다.

뮤지컬이나 연극 같은 전통적인 분야는 영화, 드라마와 이미 궤를 달리한지 오래였다. 도제식으로 바뀌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고 이제 와서 전향한다고 해서 받아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쨌든 로봇이 연기를 할 일은 없을 테니까 연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이 일을 하면 그냥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근거로 잘못된 판단을 도출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엄마가 말릴 때 하지 말았어야 했나 싶었다. 엄마는 예전에 지수가 연기자의 길에 나서겠다고 하자 몹시 걱정스러워했다.

“원래 세상은 살기가 빡빡하단다.”

지수는 그때 자신이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엄마에게 혜안이 있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어렸던 시절은 사람들이 막 자동화된 산업에 밀려나서 혼란을 겪던 시대였다. 엄마는 기계가 예술 분야마저 따라잡을 거라고 예측하셨던 걸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제 와서 요식업이라도 들어가야 하나, 그런데 나는 요리 잘 못하는데. 고등학교 친구 얘기를 들어 보니 요즘에 창업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분위기가 험악하댔다. 폐업률이 150프로를 넘는다고, 매년 창업하는 사람들이 1년도 못 버티고 나오는 일이 허다하다고 했다.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머리가 과열되어서 아프려고 했다. 지수는 그냥 잠을 자는 쪽을 선택했다.

 

 

 

며칠 후에 코스모스의 부사장이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코스모스 부사장 아이들은 단호하게 언론 인터뷰에서 얘기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아무리 각광받는 사업이건 피할 수 없는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시간의 경과에 따른 도태입니다. 마차가 자동차에 의해 밀려나고, 자동차가 무인 자동차에 도태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오래된 것은 뒤로 물러나고 사라지는 법입니다.

이것은 순리입니다. 이제 새로운 기술이 적용되는걸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물러날 때입니다.

분명히 우리 사회가 진통을 겪겠지만 이것은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기존의 영화 제작법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습니다. 종이책을 만드는 것은 고급 예술로 취급받지만 요즘에 누가 종이책을 읽습니까?”

아이들이 계속 말했다.

“인간은 절대 로봇하고 경쟁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일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우리 프로그램을 선택할 겁니다. 기계의 허점을 발견하는 것보다 인간의 미숙함을 먼저 발견할 테니까요. 이건 기술을 맹신하는게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이 인터뷰는 영화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코스모스와 부사장을 비난하고 나섰다.

“코스모스는 사과해라!”

그런데 구호는 차츰 바뀌었다.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돌려달라!”

영화인 노조는 다급히 기자회견을 열었다. 회견의 중심에는 세계적인 스타 우주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기자 회견에 다른 유명한 배우들까지 참여했다.

여러 언론사들이 설치한 카메라 앞에서 우주가 대표로 입장을 발표했다.

“영화 산업엔 수많은 사람의 생계가 걸려있습니다. 코스모스의 행보는 용납할 수 없는 폭거입니다. 이로 인해 영화계가 붕괴할 위험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일입니까?”

우주는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모았다. 관계자들에게 참여를 요청했고 지수의 소속사에도 찾아왔다. 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인연을 내세워서 동참을 부탁했다. 세계적인 스타에게 이런 부탁을 받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코스모스의 폭거에 맞서 싸워야 해. 함께 하자.”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할 수 있다면 연기를 더 해보고 싶었다.

그 뒤부터 바쁜 나날이 시작되었다.

영화인 노조에 참여한 지수는 행인들을 대상으로 동의 서명을 받기 위해 거리에 나가거나, 가두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조 활동에 참여하면서 갑자기 지수의 인맥은 풍부해지기 시작했다. 온갖 유명한 배우며 감독, 제작자들이 다 거기 모여 있었다.

지수가 집에 들어오면 지쳐 쓰러져서 바로 잠에 드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언론은 이번 사태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었다고 볼 수 있는 예은과 인터뷰를 했다.

예은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그 사람들이 세상을 너무 만만히 본게 아닌가 생각해요. 언젠간 이런 일이 일어날줄 예상했어야죠.”

폭언 수준의 발언에 인터뷰 담당자가 깜짝 놀랐다.

“나는 코스모스가 옳다고 봐요. 지금까지 스타의 꿈을 꾸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어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연기 학원을 다니고, 오디션을 통과하려고 애쓰죠. 하지만 실제로 꿈을 이루는 사람이 얼마나 있죠? 대다수가 배우가 되지 못하고 떠나버리죠. 그 다음에 오디션을 통과한다고 해도, 배우 한 사람을 키워내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요? 그 중에 몇 사람이나 세계적인 스타가 되죠? 그 사람들이 연기를 하는 대신에 차라리 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당신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데뷔하지 않았나요?”

“하지만 나는 연기를 잘했죠.”

예은이 웃었다.

“이건 사업이에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 과정이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밀려나는 거고요. 내 말은, 코스모스의 신기술은 사회적으로 자원 낭비를 덜하도록 과정을 최적화하는데 쓰일 거라는 거에요. 산업 혁명 이후로 인간은 늘 기계와 경쟁해야 했어요. 연기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죠.”

“하지만 현장에서 쫓겨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 분야에 갈 수 있을지 의문하고 있는데?”

“그건 정부가 나서야 할 일이죠. 사람들을 재교육하고 새 직업을 갖도록 해야죠.”

“새 직업을 갖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텐데요.”

“글쎄요. 아직도 자아 실현 같은 말을 믿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요? 그건 매스미디어가 만들어낸 사회적 과대 망상이에요. 직업이 개인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당신도 스크린으로 돌아오고 싶었다고 들었다.”

“노코멘트하겠어요. 그리고 인터뷰는 여기까지만 하죠.”

지수는 인터뷰에서 불쾌함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데뷔했고 그것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도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사다리 차기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때 알았어야 했다.

코스모스는 세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었다. 다시 말해서 문제가 생겨도 그것을 해결하는게 아주 수월했다. 코스모스는 변호인단도 많았고 돈도 아주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언론들은 슬슬 코스모스의 입장을 실어나르는 쪽으로 바뀌었고 제작사들도 발을 빼기 시작했다.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 플랫폼과 싸워봤자 밉보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여전히 무반응이었다.

지수는 어느 날부터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줄어든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변에 신인이나 무명 배우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우주하고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지수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던 것을 계속 하는 것 뿐이었다.

어느날 시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지수는 바로 침대에 쓰러져서 잠들었다. 너무 피곤했다. 한밤 중에 전화기가 웅웅거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리사의 전화였다.

지수는 잠결에 웅얼거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어서 티비 켜서 중앙 채널 좀 봐.”

“그거 왜요?”

“됐으니까 얼른 봐봐.”

지수는 즉시 텔레비전을 켜고 채널을 돌렸다.

우주가 토크쇼에 나오고 있었다.

유명 토크쇼 진행자가 웃으며 말했다. 지수도 이 프로그램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우주, 갑자기 당신이 은퇴를 하기로 해서 사람들이 많이 놀랐어요. 우선 팬들에게 사과의 말부터 하고 시작하시죠.”

“아, 그래요. 그동안 저를 사랑하신 여러분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게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은퇴를 하기로 마음 먹으셨죠?”

“코스모스 박람회를 다녀왔어요. 알죠?”

“알아요. 거기 다녀왔던 사람들이 다들 귀신에 홀린 표정이더라구요.”

우주가 멋쩍게 웃었다.

“저한테도 충격이었죠. 정말 눈이 핑핑 돌더군요.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이게 정말 가능한 건가? 예술은 사람만 가능한게 아니었죠.”

“그런데 아니었죠.”

진행자가 맞장구를 쳤다. 인터뷰 가운데 박람회 영상과 코스모스 시연회가 삽입되었다.

“맞아요. 장난 아니었어요. 처음에 그걸 보고 약간 화가 났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아, 이제 시대가 흘러갔구나.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게 영향을 미쳤다는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은퇴 후에 계획은 있으신가요?”

“글쎄요. 일단 세계 여행이라도 다녀볼까 해요. 그동안 여행이라고는 한 번도 못 했으니까요. 그 다음에는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네요.”

“지금까지 전 세계에 영화를 찍으러 다니셨잖아요?”

“하하. 그게 어디 여행인가요? 하도 빠르게 지나가서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우주, 토크쇼에 나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지금까지 토크쇼를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주가 웃으면서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 화면 하단에 자막 한 줄이 지나갔다.

<이 영상은 코스모스의 기술로 제작되었습니다>

토크쇼가 끝났을 때 지수는 잠이 완전히 깨버렸다.

“대체 이게 뭐에요?”

리사가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갑자기 일이 터졌어. 너한테 연락온건 없었어?”

“아무 것도요.”

하지만 지수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게 있었다. 최근 영화인 노조의 동향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무슨 일인가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지수는 결심했다.

“우주를 만나 봐야겠어요.”

리사는 만류했다.

“만나서 어쩌려고?”

지수는 주춤했다.

“이야기를 해봐야죠.”

최근에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리사는 기본적으로 유능한 사람이었다. 금방 전화 번호를 구해왔다.

지수는 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기대하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수는 우주가 전화를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외로 우주는 지수를 피하지 않았다. 우주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우주.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한참 침묵 후에 우주가 말했다.

“토크쇼 봤지? 그게 오늘이었나?”

“지금요.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전화를 받을 줄 몰랐어요.”

“만나서 얘기할까? 옥스퍼드 3번지로 와.”

우주는 전화를 끊었다.

지수는 무인 택시를 타고 불러준 주소로 향했다. 무인 택시는 주소지 앞에 지수를 내려놓았다. 지수는 입을 벌렸다.

수백 평은 될 법한 크기의 저택이 있었다. 하얗게 칠한 울타리로 테두리를 둘렀고 잘 가꾼 잔디가 싱그러이 자랐다. 심지어 야외 수영장도 있었다. 언젠가 성공하면 이런 곳에서 살아야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던 곳이 실제로 눈 앞에 나타나자 지수는 세계적인 스타가 무엇을 누릴 수 있는지 생각했다.

비로소 지수는 우주에게 집으로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같은 세상에서 살았지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지수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원룸 같은 투룸과 그곳을 비교해보았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벨을 누르자 출입문이 저절로 열렸다. 스피커에서 우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저택 입구에서 현관까지 수백 미터나 떨어져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눈이 핑핑 돌아갔다. 요즘에 그 정도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주가 현관으로 마중나왔다. 오랜 만에 만난 우주는 눈에 띄게 피로해보였다.

“집으로 초대해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개인적으로 미안함을 느끼고 있어서.”

두 사람은 거실에서 마주앉았다. 테라스를 통해 커다란 채광창으로 황금빛 햇살이 들어왔다. 우주는 창을 등지고 앉으면서 얼굴에 음영이 졌다.

우주가 음료를 직접 가져다주었지만 지수는 손도 대지 않았다. 평소라면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만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노와 초조, 배신감이 온몸에서 들끓고 있었다. 자신을 끌어들인게 우주였다. 하지만 우주는 가장 먼저 배신했다. 그래서 지수는 입을 열었을 때 다소 공격적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왜 갑자기 은퇴하겠다는 거에요?”

“나도 커리어를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요?”

“너도 시연회 가봐서 알잖아. 코스모스에서 어떤걸 만들어냈는지.”

“하지만 이렇게 무책임하게 끝내면 안 돼죠. 당신은 모두를 배신한 거라고요. 당신 저한테 꿈 어쩌고 말한건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비난에 울컥한 우주가 감정이 격앙되어서 소리쳤다.

“난 예전부터 은퇴하고 싶었어. 그러지 못한건 전부 돈 때문이었어. 내가 왜 돈이 아니라면 <데이 오브 라이트> 같은 쓰레기 영화에 출연했겠어? …미안해.”

우주는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달았다. 우주는 바로 사과했지만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를 쓰레기로 표현하는 것을 보고 지수는 충격을 받았다. 믿기지 않았다.

분명히 지수는 극본에 불만이 있었고 비중이 낮은 것도 싫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수는 <데이 오브 라이트>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역할을 사랑했고 자신만큼 다른 배우도 출연하는 작품에 애정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것이 착각이라는걸 깨달았다. 우주의 빛으로 충만하던 모습이 이제는 쇠락해보였다. 우주는 연기에 열정을 잃은게 분명했다. 고생하며 산 정상에 올랐지만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니 마음이 변한 것이다. 세월의 흐름은 열정에 넘치던 연기자를 닳고 닳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주와 지수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우주는 산꼭대기에 올랐지만 아직 지수에겐 위로 올라갈 까마득한 길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낭떠러지 같은 길마저 끊기려고 했다.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존경했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미안해. 그렇게 말하려던게 아니었어.”

“아뇨. 당신의 진심이 어떤지 알겠어요. 당신은 사실 겸손한 척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깔보고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우월감을 느꼈겠죠.”

“아냐. 나는 배우 일을 좋아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거짓말하지 마요.”

“진심이야.”

우주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시 침묵했다. 지수는 기다렸다. 잠시 후에 우주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해도 어쩔 수 없지. 실망시켰다면 미안해. 하지만 나한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는 사정이요?”

“음, 가족 문제가 있어.”

우주는 아무도 없다는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지어 지수의 눈치를 살피기까지 했다. 제딴에는 외부에 흘러나가서는 안 되는 일인지 모르지만 지수가 보기엔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아주 골칫덩이 가족이야. 통제가 되질 않아. 그 때문에 나도 곤란해졌어. 사람들이 나한테 찾아오면서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해졌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지수는 시연회날 본 광경을 떠올렸고 지금 와서 부분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렇다면 우주가 말하는 가족은 사실 가상의 인물이고 사실은 본인 이야기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때 코스모스에서 사람이 찾아왔어. 나한테 협상을 하자고 하더군. 난 협상할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코스모스에서 제시하는 조건이 너무 좋았어. 정말 좋은 조건이었어. 젠장, 그렇게 보지 마. 너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나도 믿을 수 없는 금액이었으니까.”

지수는 팔짱을 꼈다.

“말해봐요.”

“코스모스에서 내 초상권을 50년간 사용하는 대가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어. 대신에 자사 영화에 최우선적으로 주연 역할에 사용한다고. 그러니 은퇴해달라고 하더군. 코스모스에 좋은 말도 좀 해주고 말이야. 너무 좋은 조건이잖아. 그러니 어쩌겠어.”

지수는 기가 막혔다. 단순 계산으로도 우주 같은 세계적 배우를 50년간 고용하려면 드는 비용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코스모스는 그 금액을 그냥 지불하겠다고 제안한 거다.

동시에 배신감이 들면서도 이해가 갔다. 지수도 그만한 금액을 제시받으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우주는 계속 얼굴을 쓸어내리기만 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돈 받고 은퇴하기로 결심한 거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테니까.”

지수가 쏘아붙였다.

“그럼 뒤에 남는 사람들은요? 그 사람들은 어떡하고요? 당신은 그 사람들을 모두 배신한 거에요.”

“그건…. 어쩔 수 없어. 나도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어떡해.”

우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주가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내 허공에서 손을 멈춰섰다.

뒤돌아서는 지수에게 우주가 소리쳤다.

“내가 널 코스모스에 소개해줄게. 같은 조건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50년간 초상권 사용이야.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이걸로 사과가 될진 모르겠지만….”

지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뒤에서 우주가 따라오면서 계속 말했다.

“거기서 돈이라도 챙겨서 나오는게 최선이야. 이제 영화 산업은 끝났어. 더 이상 스타가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코스모스가 다 해먹을 텐데.”

지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못 이기는 척 제안을 받아들이면 될 텐데. 그러면 끝날 일인데. 50년 계약금이면 지금 집을 옮길 수도 있고 지긋지긋한 고지서에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배신하는 일이었다. 배우를 그만 둔 자신의 삶은 어떠한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우주가 발을 구르며 소리 질렀다.

“그럼 대체 날더러 어떡했어야 했다는 거야!”

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인 택시가 집 앞에 와서 섰다. 지수는 우주의 집을 떠났다. 뒤에 우주가 망연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자동차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데이 오브 라이트> 시즌5는 우여곡절 끝에 제작이 결정되었다.

제작 중지까지 갔던 만큼 제작 진행에 어려움이 많았다. 코스모스와 계약한 주연 배우들이 하차하는 바람에 새로운 대타 배우들을 구해야 했고, 이에 스트레스를 받은 각본가들이 집단 탈출을 하기도 했다.

그런 파동을 겪고 나니 아무리 잘 나갔던 드라마라고 해도 사람들은 이제 시즌5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지수가 보기엔 제작자는 이번 시즌이 끝나면 은퇴해야 하는게 아닌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영화 촬영 예산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고 기존 제작 방법으로 일을 하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그래도 아직까지 영화를 찍으려는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개인 휴게실 겸 분장실 대용으로 사용하는 트레일러에서 지수는 도움을 받아가며 뱀파이어 분장을 하고 있었다. 지수는 거울을 보았다. 하얀 분칠 때문에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해보였다. 그때 옆에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코스모스 광고가 흘러나왔다. 예은과 우주가 활짝 웃으며 광고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지수는 눈썹을 까딱하고는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리사가 나타나서 대본을 갖다주었다.

“대사 다 외웠어?”

“응.”

“방금 전에 대본이 2군데 수정됐어. 꼭 외워둬. 5분 뒤에 촬영이야.”

“뭐? 그걸 지금 말해주면 어떡해?”

“나도 방금 받은 거야.”

“안돼.”

지수가 절규했다.

“이번 각본가는 대체 왜 그래? 너무 수정이 많잖아. 현장에서 쪽대본 안 나오게 한다며.”

“어쩔 수 없잖아. 예산이 많이 줄었으니까. 대사나 얼른 외워. 이따가 NG라도 나오면 어떡할래?”

리사가 다독였지만 지수는 입술을 삐죽였다. 급하게 인쇄된 대본을 넘겼다. 수정된 대본에는 심지어 손으로 줄을 그어놓은 곳도 있었다.

잠시 후에 스태프가 지수를 부르러 왔다.

“촬영 시작합니다.”

지수는 한숨을 쉬며 촬영장으로 향했다. 다른 배우들이며 스태프들이 슬슬 모이는 중이었다.

코스모스의 발표 이후로 촬영장에도 극심한 변화가 있었다.

주연이었던 우주가 은퇴 문제로 하차하고 새로운 신인 배우가 올라오면서 등장 인물의 관계와 비중이 많이 변경됐다. 덕분에 지수가 맡은 역할도 비중이 조금 늘어났다. 기존 각본가들이 집단 탈주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작중에 생긴 거대한 논리적 땜빵을 어거지로라도 떼워야 했으니까.

신입 각본가들은 최선의 창의력을 발휘해서 간신히 그 구멍을 떼우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제작자는 그 사실이 불안한 나머지 다음 시즌엔 제작자 일을 그만둬야 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촬영 현장의 변화는 배우 교체 외에도 일어났다. 상당 수의 스태프들이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고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 떠났다. 촬영 현장은 아직 일에 익숙하지 않은 새 얼굴들로 채워지면서 본의 아니게 활기를 띄고 있었다.

지수는 대사를 외우고 복장을 점검했다. 완벽했다. 자신이 넘쳤다.

현장에 새로 주인공을 맡은 신인 배우가 먼저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큰 규모의 촬영에 긴장한 듯 했다. 옆에서 매니저가 긴장을 풀려고 달래고 있었지만 큰 성과는 없어 보였다.

이럴 때는 긴장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지수는 신인 배우에게 다가가서 팔을 툭툭 쳤다. 지수를 알아본 신인 배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주연을 맡은 에딘입니다. 에딘이라고 불러주세요.”

“알아, 저번에 봤잖아. 편하게 해. 편하게. 나는 지수야. 촬영 처음이지?”

에딘은 한숨을 쉬었다.

“예, 이렇게 큰 규모는 처음이에요.”

지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예산이 많이 줄어들면서 현장은 규모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신인 배우가 보기에는 여전히 커보일 것이다.

“너무 긴장하지 마. 금방 익숙해질 거야.”

에딘은 여전히 긴장한 모습이었다. 혀로 입술을 핥는 모습이 아무래도 오늘 촬영은 시간이 조금 걸릴 듯 했다.

촬영 감독이 소리쳤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가 씬 넘버가 적힌 슬레이트를 들고 세트 위로 올라왔다.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지수는 이 순간이 좋았다. 온몸에 활력이 넘쳤다.

그때 지수는 에딘이 촬영 시작 전에 옅은 한숨을 쉬는 것을 들었고 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스태프가 슬레이트를 내리쳤다. 지수는 얼굴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축제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게 진실이야….”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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