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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V (브이)

2021.10.22 12:4610.22

  은주는 왼쪽 위를 바라봤다. 보호구 바이저 안쪽 패널의 작은 녹색 시계가 1시 40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시작 시각보다 20분 정도 여유 있게 도착했다. 건널목만 건너면 구청 강당 입구와 가까운 뒷문이었다. 신호등 옆 커다란 가로수가 뒷문을 가리고 있었다. 삼십여 년 전, 은주가 이 길로 등하교를 했을 때도 저 나무는 지금만큼 크고 오래돼 보였다. 그때처럼 신호등 불이 바뀌길 기다리며 나무를 바라봤다. 굵게 뻗은 가지가 중간에서 뭉텅 잘린 곳이 많았다. 그런 곳을 볼 때마다 팔목과 팔꿈치 사이가 잘린 것처럼 기묘한 기분이 들곤 했다. 무심하게 잘린 가지 주위의 앙상한 잔가지들이 사방으로 흔들렸다. 찬바람이 은주 목덜미를 훑고 지났다. 은주의 날숨으로 바이저 안쪽은 습기가 차올랐다. 시야가 점점 뿌예졌다. 앞을 보기가 불편하다고 느낄 무렵 삐 소리와 함께 외부 온도 자동 맞춤 기능이 실행됐다. 눈썹과 맞닿은 보호구 안쪽에서 찬 바람이 나왔다. 눈이 시원해졌다. 밝아진 시야에 여중생 둘이 들어왔다.
  “씨발 나 어제 서아한테 맞았어.”
  “왜?”
  “하은이 이 미친년이 내가 서아 욕하고 다녔다고 이 지랄을 한 거야.”
  “졸라 어이없네.”
  “학교 끝나고 오라고 해서 갔는데 발로 까이고 싸대기 맞았어. 아니라고 했는데도.”
  “….”
  “하은이한테도 때리라고 해서 그년한테도 싸대기 맞았어.”
  “와, 좆같네.”
  맞았다는 아이도 듣는 아이도 태연했다. 품행이 방정해 보이는데도 이런 대화가 오가다니, 은주는 곁눈질로 학생들을 살폈다.
  정부는 학교가 가장 안전하다고 했다. 마취총을 소지한 경찰을 두 명이나 상주시켰고, 각 교실과 화장실에 호출 벨을 빈틈없이 설치했다. 새로 개발한 CCTV 화면 분석 프로그램으로 위험 요소를 실시간 감지하고 대응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교육부는 5년 치 예산을 끌어와 학교안전시스템을 만들었다.
  은주는 ‘서아’라는 아이가 궁금했다. 특별관리 대상자라면 매월 초 전국 초중고교 샘플링 조사에 구멍이 있는 거였고, 일반 청소년이라면 일탈 행동 감지에 사각지대가 있다는 말이 됐다. 어떤 경우든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위험 요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걸로 보였다.
  대화를 더 듣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은주에게서 멀어졌다. 신호등은 어느새 초록 불로 바뀌어 있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남편이었다.
  “어디야? 오고 있어?”
  “미안. 나 오늘 못 갈 거 같아. 브이가 허락을 않네. 보고서에 문제가 있나 봐. 그거 확인해야 한다고….”
  “알았어.”
  “브이들은 다 융통성이 없어. 이렇게까지 빡빡하게 굴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그 나이에 팀장이 됐겠지. 여긴 신경 쓰지 말고 업무나 잘해.”
  “어. 그럼 이따 저녁때 봐.”
  은주의 남편은 팀장을 브이라고 불렀다. 팀장은 스물넷의 젊은 브이였다. 사회에 나와 직업을 가진 브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직업을 가진 브이들은 모두 다 뛰어난 실력으로 인정받곤 했다. 브이들은 자신이 브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네 팀장처럼 어린 나이에 그 정도 위치에 오른다면 브이가 아닐 수 없었다. 브이들은 감성적인 공감 능력만 뺀다면 완벽한 사람이었다.
  브이는 폭력을 뜻하는 바이올런스의 준말이었다. ‘브이로 시작하는 단어’하면, 승리의 빅토리를 먼저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사진을 찍을 때 검지와 중지를 세운 자세로 ‘브이’하고 웃던 일이 오래된 전설처럼 느껴졌다. 이제 브이는 승리도 친근함의 표시도 아니었다. 브이는 공포 또는 혐오의 상징이 되었다.
  처음에는 매년 조금씩 늘어나는 폭력 사건 추세선의 한 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해가 되자 점의 위치는 확실히 이상해 보였다. 증가 폭이 오차범위를 넘어섰다. 형사정책연구원은 재작년에 비해 세 배 이상 높아진 소년범죄율을 보며 통계처리가 잘못된 건 아닌지 로우데이터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데이터는 이상 없었다.
  숫자가 보도된 후 현상이 조명됐다. 중학교, 고등학교, 초등학교에 다니는 십대들. 서울, 부산, 인천, 대구 등 큰 도시뿐 아니라 철원, 상주, 문경, 태백 같은 시골에 사는 아이들까지.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이슈가 터졌다. 십대들의 폭력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형사사건으로 입건되는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도를 넘어선 잔인하고 끔찍한 일들이 쉴새 없이 일어났다.
  은주는 그 시기에 엄마가 됐다. 무력한 민소를 보는 데도 가끔 미칠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 분노가 일곤 했다.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뉴스 채널을 지웠다. 복잡한 일에는 신경을 껐다. 외출할 때는 남편 또는 사설 보안업체 직원과 동행했고, 여행은 프라이빗 무인도로 떠났다. 아는 사람들끼리만 만났고 그마저도 점차 뜸해졌다. 익숙해지자 살만했다. 가끔 유리창 밖 세상이 그리울 때도 있었으나, 저 아래 주차장에서 교복을 입은 아이에게 자전거로 맞는 사람을 볼 때면 사십 오평 공간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임이 분명해졌다.
  암담한 세상에 작은 빛이 나타난 건 민소가 만 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인도의 젊은 박사 ‘마헤쉬 칸’이 이끄는 연구팀이 십대 폭력성의 원인을 밝혀냈다. 세계는 환호를 질렀다. 폭력은 전염된다. 따분한 옛말이 비유가 아닌 과학으로 입증된 순간이었다.

  구청 강당은 사람들로 빼곡했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V 바이러스. 은주는 유인물 문구에 한숨이 나왔다. 밝은 빨간색 볼드체로 인쇄된 알파벳 브이가 눈에 거슬렸다. 한 달 전 취임한 대통령은 가장 먼저 브이 바이러스 특별법을 변경했다. 그의 말로는 지금이야말로 변해야 할 최적의 시기였다.
  “안녕하십니까. 교육정책 설명회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월부터 변경되는 정부와 교육부 운영지침을 말씀드리고, 질의응답 시간을 갖겠습니다. 먼저 영상을 보시죠.”
  조명이 어두워지고 터빈을 쓴 초콜릿색 피부의 남자가 화면에 비쳤다.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마헤쉬 칸이었다.

  브이 바이러스는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비밀스러운 바이러스입니다. 이것은 도파민 수용체 중 4형 유전자인 D4DR을 매우 길게 변형시킵니다. D4DR이 길면 도파민과의 결합력이 약해집니다. 도파민은 쾌감을 느끼게 하여 동기를 유발하는 매우 중요한 신경전달물질입니다. 도파민과의 결합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는 쾌감을 느끼는데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즉, 고통이나 신체적 느낌에 덜 민감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자연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도파민을 만들기 위해 공격적이고 모험적인 자극을 추구하게 됩니다. 브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십대들의 가장 큰 특징은 폭력을 행하는 것에 거리낌, 죄책감, 두려움 등이 없다는 겁니다. 브이 바이러스는 십대들을 무자비한 학살자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아직 브이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를 찾지 못했습니다. 치료제나 백신 개발도 멀었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격리뿐입니다. 전염을 방지하는 것보다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의미가 크죠. 그나마 희망적인 발견은 성인이 되면 돌발적인 폭력성이 낮아진다는 겁니다. 전두엽이 완전히 성숙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인과관계가 확실히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은 지금, 이 순간도 브이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결과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한 걸음씩 앞으로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울 것입니다. 그게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요. 우리는 바이러스에게 절대 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지부진한 연구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꺾이지 않은 굳은 의지와 투철한 사명감에 청중은 한껏 고무됐다. 은주는 바이저를 들어 올려 눈물을 훔쳤다. 조명이 밝아지고 발표자가 강단 앞에 섰다.
  “이 차트는 최근 많이 보셨을 겁니다.”
  화면에 두 개의 꺾은선 그래프가 보였다. 열 개의 세로축을 따라 파란 선은 점점 하락했고, 빨간 선은 파란 선이 낮아진 만큼 높아졌다. 마지막 열 번째 축에서 두 선은 만났다. 그리고 파란색과 빨간색은 역전됐다. 세상이 뒤바뀌었다는 표시였다.
  “브이 바이러스 감염률이 이번 달 51.9%로 만 12세부터 20세의 절반을 넘었습니다. 작년 9월부터 감염자 증가 속도가 매우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3개월 뒤에는 55%, 연말에는 약 65%의 아동청소년이 브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리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브이 바이러스가 폭력성의 원인이라는 게 밝혀진 후 정부는 전 국민 대상으로 바이러스 검사를 했다. 만 열두 살 미만 아동에게서는 브이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았다. 개인차는 있었지만 대체로 만 스무 살이 넘어서는 바이러스가 있다 해도 문제 될 만큼의 폭력성이 표출되지 않았다. 관건은 만 12세에서 20세였다. 이 나이대의 28%에게서 브이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예상보다 많은 수치였다. 정부는 지방 폐교와 미분양 아파트, 군부대, 대학 캠퍼스 등을 매입해 감염자들을 격리했다. 갑작스러운 생이별에 사람들은 분노와 혼란과 슬픔을 분출했다. 하지만 나머지 72%와 그의 가족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부는 이로써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한 것처럼 보도했다. 주가는 오르고 국가 간 교역이 정상화됐다. 결혼과 출산율 모두 높아진, 21세기 들어 유례없는 호황을 맞았다. 딱 6개월짜리의 승리였지만.

  “격리공간 부족 문제는 매년 제기되어왔습니다. 근무 인력 부족도 마찬가지죠. 이전 정부에서 해왔던 공간을 늘리는 방식은 더는 소용이 없습니다. 비감염자 아이들을 지키는 것, 이게 저희의 미션입니다. 새 정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비감염자들을 철저한 코호트 공간에서 보호할 것입니다. 개별생활을 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어떤 생물과도 일절 접촉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살균소독 된 식단과 의복, 매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것입니다. 십대들끼리의 접촉으로는 브이 바이러스가 전염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중간 매개체가 있는 거죠. 모기나 벼룩, 강아지나 고양이, 쥐나 바퀴벌레 등. 코호트 격리가 치료제나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 비감염 아이들을 보호할 확실한 방법입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논리적으로 이해는 간다만 심정적으로 지지가 되지 않았다. 자식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것과 감염된 아이들이 이웃으로 돌아온다는 것, 둘 중 어느 게 더 불만인지 모호했다. 누군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감염된 애들 가둬둘 공간이 여의치 않아 밖으로 꺼내고, 대신 비감염자 애들을 가둬두겠다는 건가요? 독방에서요? 애들이 무슨 범죄자예요? 이렇게 감금하고 감시하는 거 사생활 침해에요.”
  발표자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표현이 조금 과하시네요. 저희는 최고의 서비스로 보호하는 겁니다. 또한, 온라인으로 언제든 자유롭게 소통 가능합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독방, 감금 이런 단어는 언급을 삼가시면 좋겠습니다.”
  “위험한 짐승들을 밖으로 내보내겠다는 겁니까?”
  “모두가 따라야 하는 건가요? 그냥 애를 집에서 키우고 싶은 사람은요?”
  “감염자들을 꺼내면 안 돼요. 불안해서 못 살아요. 지금도 안면 보호구에 일회용 외투, 장갑, 신발. 완전 우주인처럼 하고 다니는데 그런 괴물들이 나오면 어떻게 살라고요? 다들 집안에만 있으라는 거에요? 아니면 철갑옷을 입고 다니라는 건가요?”
  “개인 무기 소지 허용해주는 겁니까?”
  견해가 다른 쪽도 의견을 피력했다.
  “지금 수용 공간이 없다잖아요. 계속 감염자가 나오는 상황에서 비감염자 애들만 확실히 보호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죠. 의식주는 국가에서 대주는 거죠?”
  “감염자라고 해도 증상이 없는 애들이 더 많아요. 사회에 나와도 우리가 걱정하는 것보다 위험이 적을지도 몰라요. 유능하게 잘 큰 브이들도 있잖아요. 감염자 애들도 먼저 자극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나 참, 별 미친 소리 하고 자빠졌네.”
  비아냥거림이 섞인, 혼잣말치고는 큰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요? 저기요, 언제 봤다고 씨발 지랄이세요?”
  “지랄? 아, 그런 괴물 새끼 낳아 기른 년인가 보네. 괴물이 왜 괴물이겠어. 그 새끼들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얼만데. 나오긴 어딜 기어 나와? 그러지 말고 괴물 새끼랑 그 부모도 아주 싹 다 죽여 버립시다. 그 새끼들 부모가 감염시키는 걸 수도 있잖아요.”
  “뭐라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야, 네 새끼는 뭐 안 걸릴 줄 아냐?”
  격해지는 말싸움에 출입구에 있던 보안요원이 두 사람을 끌고 나갔다. 나가면서도 서로에게 고래고래 펀치를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발표자는 차분하게 다음 슬라이드를 넘겼다. 헛기침으로 장내 시선을 모아왔다.
  “걱정이 많으신 거 압니다. 이럴 때일수록 이성적으로 접근해야죠. 지금부터 구체적인 실행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눠드린 유인물을 참고해주세요.”
  발표 후 질의응답이 끊이지 않았다. 은주는 바이저 패널에 4시 40분임을 알리는 알람이 깜빡이는 걸 보고서야 일어났다.
  “민소 엄마.”
  출입문 쪽으로 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준혁의 엄마였다.
  “왔었어요?”
  “네. 좀 늦어서 뒤에 있었어요.”
  “준혁이는 좀 어때요?”
  “어제 퇴원했어요.”
  “다행이다. 한 2주 입원했나?”
  민소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은주는 처음 준혁 엄마를 알게 됐다. 같은 동 같은 라인, 두 층 아래에 살면서도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던 이웃이었다. 아이들 덕분에 왕래가 늘었고 은주는 결혼 후 처음 친구다운 지인이 생겼다. 은주네 아랫집이자 준혁네 윗집에서 브이 바이러스에 걸린 중학생이 부모를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을 땐 같이 심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며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줬다.
  민소에게 준혁이 자전거 사고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은주는 자기 일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즉시 준혁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걱정을 표했다. 준혁 엄마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은주는 한껏 긴장했던 목에 힘을 풀고 차분히 물었다. 준혁은 괜찮은지, 병문안을 하러 가고 싶은데 병원이 어딘지. 하지만 준혁 엄마는 병문안을 한사코 마다했다. 이에 은주는 다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요즘 다치는 애들이 참 많네요. 며칠 전 민소네 반 다른 애도 입원했다던데.”
  “아, 그래요? ……. 민소에게 안부 전해주고요, 나중에 한 번 봐요.”
  준혁 엄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은주는 어색해진 분위기에 말을 더 잇지 않고 짧은 묵례로 마무리를 했다. 민소는 준혁을 좋아했다. 준혁도 민소를 좋아하는 듯했다. 은주는 준혁이 민소를 아끼고 위해주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브이 바이러스를 걱정하면서도 민소를 학교에 보낼 수 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준혁 때문이었다. 인성도 바르고 공부도 잘하는 준혁이 이대로 잘 자라준다면 민소의 짝으로 괜찮을 것 같았다. 비슷한 배경과 같은 고민이 있는 부모로서 준혁네는 어느 정도 속을 터놓을 수 있는 피난처가 됐다. 2주 전까지는 분명 그런 유대감이 있었는데 오늘은 좀 달랐다. 은주는 준혁 엄마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빠르게 주차장을 지나 뒷문을 나서 오른쪽을 돌았다. 무언가 왼쪽 어깨를 강하게 치고 갔다. 몸이 앞으로 휘청 쏠렸다. 숄더백이 떨어졌다. 대여섯 명의 남자 고등학생 무리가 은주 곁을 지나쳤다. 서로 이야기하느라 은주가 나온 걸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부딪힌 아이가 은주에게 힐끗 시선을 옮겼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서는 똑바로 앞을 보고 다니라는 훈계를 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길바닥에 좀 전에 받은 유인물과 볼펜, 파우치 등이 뒹굴고 있었다. 은주는 시선을 내리깔고 쏟아진 물건을 주워 담았다. 기분이 상했다. 그래도 다친 건 아니니 다행이라는 씁쓸한 위로를 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가만 생각해보면 바이러스가 나타나기 훨씬 전, 은주가 학생이던 시절에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긴 잠복기의 바이러스가 이제야 모습을 나타낸 게 아닐까. 은주는 당시처럼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기다리지 말라니까.”
  은주는 고개를 돌렸다. 요새 부쩍 퉁명스러워진 민소가 걸어왔다.
  “설명회 갔다가 시간이 맞아서.”
  민소는 학원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앞서 걸었다. 은주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며칠 전 남편이 한 말을 떠올렸다.
  ‘애들 그 나이 되면 다 그렇잖아.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그냥 사춘기야 사춘기. 정말 브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애들은 말대꾸도 안 한대. 바로 주먹 날아가는 거지. 우리 민소는 아직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 이제부터가 걱정이지. 그보다 그 컨설턴트 말이야, 혹시 모르니까 상담은 한번 받아봐. 상담비가 터무니없이 비싸긴 한데, 이번엔 진짜일지도 모르잖아.’
  작년부터 브이 바이러스 컨설팅 회사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회사는 브이 바이러스 공략법을 알려준다고 했다. 컨설턴트가 짜주는 플랜만 따르면 안전과 성공이 보장된다고 했다. 은주는 지금까지 소문을 따라 이 사람 저 사람 대여섯 명정도 만나봤다. 거르고 거른 만남이었다. 그런데도 하나같이 사기꾼일 뿐, 진짜는 없었다.
  이번 정보는 남편 회사에 납품하는 사장에게 들은 것이었다. 사장은 이번에 잘 좀 봐달라며 낡은 명함 하나를 건넸다고 한다. 1시간에 삼천만 원. 터무니없이 비싼 금액이었지만 그래서 왠지 이번에는 진짜가 아닐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우리 딸, 오늘 저녁은 뭐 먹고 싶어?”
  은주는 민소 어깨에 팔을 둘렀다. 조그마했던 생명은 어느새 은주와 비슷하게 자라있었다. 이마에 여드름도 나고 비밀도 많은 나이가 됐다. 올해 중학생이 되는 민소는 제법 소녀티가 났다. 지금까지 잘 키워냈다는 뿌듯함과 다 자라버렸다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아무거나.”
  민소는 은주의 어깨동무에서 빠져나왔다. 지금 저녁 식사 메뉴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은주는 서운함을 감추고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준혁이 어제 퇴원했대. 알고 있었어?”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던 은주의 의도와 달리 이 말은 민소의 입을 더 굳게 닫게 했다. 오늘 벌써 두 번이나 들은 말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가시 돋친 소리가 나왔다.
  “아까 준혁 엄마 만났어.”
  은주는 민소의 날 선 말투에 기분이 상했다. 민소는 빠르게 앞서 걸었다. 은주는 좌우로 흔들리는 민소의 묶은 머리를 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짧은 분노 뒤 애잔함이 몰려왔다. 이렇게 엇나갈 때마다 가슴이 쓰렸다. 이대로 민소가 비감염자 격리공간으로 가버린다면, 남남처럼 멀어진 사이가 돼버리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민소는 걸어가며 휴대폰 메신저 앱을 실행시켰다. 준혁의 마지막 메시지는 여전히 2주 전에 멈춰있었다.
  - 내일 학원 끝나고 잠깐 볼래? 할 말 있어.
  준혁은 다음 날, 학원도 학교도 나오지 않았다. 학원 선생은 자전거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민소는 놀라서 언제 사고가 났는지 물었다. 선생은 어제 저녁때쯤 아닐까, 라며 얼버무렸다. 민소는 선생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준혁의 메시지를 받은 게 밤 10시였다. 일찍 잠이 들어 답신을 못 했지만, 사고 난 애가 보낸 듯하지는 않았다. 쉬는 시간에 바로 전화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메시지도 마찬가지였다. 준혁의 집에 가봤지만 비어있었다. 2주간 그랬다. 그리고 지금까지 준혁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민소는 준혁에게 전화를 다시 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준혁이 먼저 연락하는 게 맞았다. 퇴원했으면 당연히 나에게 먼저 알렸어야지.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민소는 뒤꿈치를 보도블록에 긁듯 허공을 차며 걸었다. 어딘가 분풀이를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

  짙은 남색 정장 차림의 남자는 빳빳한 명함을 건넸다.
  “편하게 제이든이라고 불러주세요.”
  남편 말대로 그는 매우 바빴다. 몇 번이나 약속 일정을 변경한 후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새벽 6시라는 매우 낯선 시간에.
  “이건 선물입니다.”
  제이든은 비닐에 든 화분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저희가 개발한 유전자 조합 식물로 VMP-531입니다. 요즘 브이 바이러스 예방용 약이다, 저주파 치료기다, 나노 패치다, 등등 뭐가 많잖아요? 시중에 파는 것 중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다른 것과 달리 폭력성 완화에 확실한 효과가 입증됐습니다. 허브의 독특한 향이 뇌 기능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만든 거니까요. 식약처와 FTA 승인만 받으면 되는데 번식이 아주 까다로워 대량생산이 어렵네요. 그래서 저희 고객분들께만 드리고 있는 겁니다. 죽이지 말고 잘 키우세요.”
  길고 가는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중저음 목소리와 느긋한 말투에서 자신감이 묻어났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 시큐리티 미팅룸은 전파를 차단합니다. 전자기기 작동을 감지하니까 몰래 녹음이나 녹화하실 생각이라면 접는 게 좋습니다. 여기 비밀유지서약서 읽어보시고요, 사인하시면 상담 시작하겠습니다.”
  은주는 재빨리 사인했다. 한 시간을 알차게 써야 했다. 제이든은 비밀유지서약서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저희 VICTORY GROUP에 대해서는 좀 알아보셨습니까?”
  제이든은 A4 크기의 회사소개 책자를 건넸다.
  “인터넷에 찾아봐도 정보가 없죠?”
  은주는 회사소개서의 첫 장을 넘겼다. 상단에 필기체로 Going to the better future라는 문장이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대체 어떤 자신감이 있어 더 나은 미래를 장담하는 것일까. 하단에 적힌 CEO에 王偉(Wang Wei)라는 서명이 보였다.
  “중국 회사인가요?”
  “CEO가 중국계이긴 하지만, 다국적 기업입니다. 뒷장에 계열사 소개가 있습니다.”
  생명공학연구소, 제약사, 식품 제조사, 전자제품 제조 및 판매사, 금융사, 엔터테인먼트사 등등. 손대지 않는 분야가 없어 보였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로고도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곳이 이렇게나 큰 그룹이었다니. 의심의 잔물결이 일었다.
  “저희 빅토리 그룹은 최근 10년간 인수합병으로 사업영역을 넓혀왔습니다.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죠. 저희 모태는 여기입니다.”
  제이든이 손가락으로 집은 곳의 심볼이 낯익었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은주는 최근 기억을 더듬었다.
  “마헤쉬 칸. 그 사람이 있는 연구소입니다.”
  “아”
  은주는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어제 영상에서 스치듯 본 게 떠올랐다.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인 우로보로스 원 안에 두 개의 브이, 더블유가 있는 모양. CEO 이름이 ‘왕 웨이’라서 더블유를 쓴 건가? 궁금했지만, 굳이 할 필요는 없는 질문이라고 판단했다. 잘 모를 때는 말을 아끼는 게 이득이었다.
  “브이 바이러스 연구에서 가장 선도적인 곳이죠. 저희가 모르는 건 지구의 그 누구도 모른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제이든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은주를 지긋이 바라봤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은 어디서도 듣지 못한 이야기일 겁니다. 하지만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죠. 귀를 쫑긋 세우시고 잘 들으십시오.”

  은주는 혼란스러웠다. 방금 들은 긴 이야기가 전부 사실인가 싶었지만 검증할 방법이 없었다.
  “혹시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신가요?”
  제이든은 흐트러짐 없는 미소로 은주에게 물었다. 제이든은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있다고 했다. 아니, 요즘 같은 시대에는 감염자가 되는 게 더 이득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성적이고 스트레스에 강했다. 정신적인 일이든 육체적인 일이든 일반인보다 뛰어났다. 스무 살까지만 잘 관리하면 어느 곳에서나 원하는 인재가 될 거라고 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가 통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충분한 자유와 의사결정권을 주는 것처럼 대우해야 한다는 것. 그게 어렵기에 지금 정부가 감염자를 가정으로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허황한 소리로 치부하기에는 정합성이 맞는 것이 많았다. 특이 이번 정부 슬로건과도 일맥상통했다. 변화의 기점, 새로운 답을 만듭니다.
  “감염자 된 아이와 같이 생활하는 게 위험하지는 않나요?”
  은주는 가장 궁금한 질문을 했다.
  “위험하죠. 물론 위험합니다.”
  제이든은 가방에서 엄지손톱만 한 둥근 플라스틱을 꺼냈다. 가운데 버튼이 있었다.
  “비상 호출기에요. 항상 몸에 지니고 계세요. 가까운 경찰서와 소방서, 저희 계열사 중 하나인 보안업체에도 연락이 가요. 호출기를 쓸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은주는 둥근 플라스틱 버튼을 만져봤다. 고리에 걸 수 있게 구멍이 있었다. 제이든은 오른손 약지의 반지를 보이며 말했다.
  “이것도 항상 끼고 다니는 게 좋습니다. 이렇게 툭 튀어나온 부분에 압력을 가하면 반대쪽에서 침이 나옵니다. 마취제에요. 비상시 도움이 될 겁니다.”
  반지를 오래 낀 흰 자국이 보였다.
  “디자인은 다양합니다. 추가 비용을 내시면 맞춤 재질과 디자인도 가능하죠.”
  은주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희가 학업, 생활, 식단, 정서 관리 매뉴얼뿐 아니라 분기별로 안전교육도 하고 있거든요. 간단한 호신술도 배우실 수 있습니다. 끝까지 잘 돌보실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드리고 있죠. 한 번에 비용을 내기 힘드시다면 월납도 가능합니다. 한 달에 170만 원. 토털패키지 가격으로 저렴한 편이죠. 역시 제대로 된 양육이야말로 최고의 경쟁력 아닙니까.”
  제이든은 호탕하게 웃었다.
  “정부가 비감염자 애들을 수용한다고 했잖아요. 믿을만할까요? 거기 가면 안전할까요?”
  “한번 가정을 한 번 해봅시다. 정부의 말대로 비감염자 애들을 감염 없이 잘 키웠다고 치죠. 성인이 돼서 수용시설을 나오겠죠. 그다음엔? 성인들끼리 있을 땐 적어도 맞아 죽지는 않을 겁니다. 성인이 되면 폭력성은 줄어드니까요. 그런데 감염자와 비감염자가 함께 있으면 어떤지 아세요? 비감염자 애들은 고양이 앞의 쥐예요. 찍소리 하나 못해요. 본능적으로 아는 거죠. 저 애는 내 포식자다. 그리고 순응해요. ‘나는 밥이구나.’ 하면서요. 그보다 거리에서 십대들에게 잘못 걸리면? 거리에 돌아다니는 십대들은 모두 감염자일 거잖아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죠. 뭐, 밖에 안 돌아다니고 집에서만 생활한다면 문제없이 살 수도 있겠네요. 실험실의 쥐처럼 말이에요.”
  은근히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기분이 상했다. 6시 5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상담 시간은 7시까지였다.
  “어머님, 요새 이 동네에 한 2주 정도 입원하는 애들 많지 않나요?”
  은주는 눈썹을 약간 찌푸렸다.
  “바이러스 감염자가 작년 9월부터 엄청나게 늘었죠? 왜 그럴까요.”
  제이든은 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희는 기존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은주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애매한 맥락을 멋대로 추측하는 게 두려웠다.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좀 힘들고요, 부군과 잘 상의하셔서 오늘 자정까지 결정 부탁드립니다.”
  제이든은 가방을 쥐고 일어섰다.
  “한순간의 선택이 정말 평생을 좌우합니다. 신중한 결정 하십시오.”
  은주는 제이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테이블 위 화분을 들고 그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한겨울의 아침 7시는 아직 컴컴한 어둠 속이었다. 은주는 주차장에서 제이든의 차가 떠나는 걸 본 후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준혁 엄마에게 전화해볼까 싶었지만, 의미 없는 일일 것 같았다. 병원이 어딘지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비밀을 고백할까 싶었다. 뒷좌석에서 VMP-531의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제이든의 말과 달리 향을 맡자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듯했다. 뇌 기능 활성화가 이런저런 생각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거라면 제이든 말이 딱 맞았다. 은주는 지금 마음이 싱숭생숭한 게 무엇 때문인지 가늠해봤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방향의 걱정인지, ‘언제 시작해야 하는가’라는 시기의 고민인지. 
  휴대폰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이번엔 어때? 진짜야?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느껴졌다. 민소는 올해, 만 열두 살이 됐다. 또래의 브이 바이러스 감염자는 절반을 넘었다. 제이든의 말이 사실이라면 브이 바이러스 감염자 증가율은 어쩌면 정부 예측보다 빠를 것이다. 그리고 우위를 선점하려면 지금이 적기라고 했다. 은주는 남편에게 이따 저녁때 집에서 이야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7시 30분이었다. 패널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오늘의 뉴스가 자동차 전면 창에 펼쳐졌다. ‘신 교육안 찬성표 점점 많아져’ 은주는 기사 제목을 터치했다. 차는 정해진 길을 따라 부드럽게 움직였다.

*

  민소는 아직도 화장실에 있었다. 10분 안에 출발하지 않으면 지각이었다. 위아래 옷을 다섯 번이나 갈아입었고,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머리는 두 번이나 감았다. 결국, 시간이 모자라 화장은 가볍게 할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에 오래 있으면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나와 밥 먹으라는 잔소리가 들렸을 텐데 오늘은 조용했다. 민소는 소파 쪽을 힐끔 쳐다봤다. 은주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민소는 어젯밤 잠을 설쳤다. 준혁을 보면 어떤 말을 먼저 할까 고민이었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반가움이 먼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보자마자 배시시 웃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됐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준혁이 미안하다 백번 천번 사과할 때까지 토라진 마음을 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될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은 자유였다.
  8시 40분. 현관 거울에서 옷매무시를 살폈다. 얼마 전 산 립글로스가 마음에 들었다. 움직임에 따라 붉은 입술에 반짝반짝 윤이 났다. 기분이 좋았다.
  “엄마, 나 학교 갔다 올게.”
  은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민소는 싱그러운 과일처럼 웃고 있었다. 은주는 벽에 걸린 안면 보호구를 꼼꼼하게 씌워줬다.
  “그래, 조심히 잘 다녀와.”
  민소는 은주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가라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은 복잡한 일임이 분명했다. 민소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 밖으로 나갔다. 보호구 너머 둥근 아침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두 층 내려왔을 때, 예상보다 빨리 준혁과 마주쳤다. 민소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파르르 떨리는 볼과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가락이 낯설었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작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민소의 보호구 바이저가 뿌옇게 흐려졌다. 준혁은 보호구를 쓰지 않고 한 손에 들고 있었다.
  “답답해.”
  준혁은 민소를 힐끗 보며 말했다. 민소는 그게 혼잣말인지 자기에게 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아예 다른 맥락의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땡,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췄다. 준혁이 내리자 민소는 겨우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쉴 수 있었다. 민소는 손에 난 땀을 옷에 문질렀다. 준혁은 달라졌다. 민소는 알 수 있었다.
  아파트 공동 현관을 나섰다. 겨울답지 않은 밝은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준혁은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고 손에 들린 보호구를 봤다. 천천히 보호구를 쓰고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 바이저는 내리지 않았다. 상쾌한 아침 바람이 준혁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은주는 베란다 창문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준혁이 먼저 보였고, 그 뒤로 민소가 따라 나왔다. 준혁은 홀로 걷고 있었다. 민소가 준혁 곁으로 달려와 팔을 붙잡았다. 준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민소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 후 모습은 가로수와 건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은주는 잘근잘근 씹고 있던 손톱을 입에서 뗐다. 휴대폰의 최근 통화 목록을 열었다. 뚜르르 신호음이 갔다. 세 번 반에 중저음의 느긋한 목소리가 은주를 불렀다.
  “결정하셨습니까.”
  은주는 마른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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