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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지구를 표상하는 방법

 

 

이한의 입술이 가까이 다가온다. 오래된 책의 향기가 포근했다. 수는 순간에 집중하고 있었다. 곧 이런 짓도 하지 못하게 될 거야, 어떤 동물이든 다 하는 짓인데. 생각한다. 관자놀이로 혈류가 느껴지며 시야가 어두워졌다. 혀의 감각만 남아 전해지는 짜릿한 물렁함과 끈적임, 그리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단단한 살결... 볼로 이어지는 뜨거운 입술의 부드러움. 그 모두는 ‘사랑’이라는 표상이었다.

곧이어 수는 잠에서 깨듯 시간을 감지했고 이한은 “앞으로 오랫동안 못할 지도 몰라. 그러니까,” 라며 수를 안았다. 든든하고 포근한 살결의 감촉, 안도, 슬며시 다가오는 불안. 복잡한 감정이 연속되었고 수는 작은 두 손으로 이한의 얼굴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이제는 정말 가야 해. 늦으면, 알잖아” 하며 눈썹을 모으곤 가까스로 이한의 따뜻한 품에서 빠져나왔다.

지능 아카데미의 <생각 보관함>은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동물의 생각 모델을 모아 둔 공간이었다. 잠수함을 본뜬 형태로 지상에는 둥근 출입구만 나와 있었으며, 나머지 부분은 지하에 위치하여 방공호의 역할까지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웅장한 외부와는 달리 보관함의 내부는 따스하고 아늑했으며, 단 한 권의 책도 없었지만 낡은 책의 냄새가 ‘지각’ 되었다. 그 향이 고서의 눅눅하면서 풍부한 냄새를 모방한 인공 향이라는 사실을 알 만한 세대는 남아있지 않았기에, 방문자의 기억에 각인되어 지식의 신성함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이유로 생각 보관함은 무겁고 일상적이지 않은 장소였고 사람을 포함한 지능체의 출입이 드물었다. 그 말은, 사랑하기에 이만한 곳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아직 ‘생각 전이(轉移)’ 훈련을 받지 않은 인턴 연구원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이지만.

뇌가 있는 생명체의 ‘생각’은 발화하는 뉴런의 패턴에 불과했고, 패턴은 데이터로 저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정제된 생각 덩어리에 바이오 프린터로 물성을 부여하면 ‘지능체’를 만들 수 있었는데, 이는 양자역학적으로 흐르는 생각을 가장 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과정에서 패턴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생각의 내용을 잘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연구원들은 다양한 지능체를 만들고, 조합하기를 반복했다.

뿐만 아니라 특수한 훈련을 통해 타 지능체를 열람해볼 수도 있었는데, 그 중 '생각 전이'는 고급 기술이었다. 종과 관계없이, 다른 생명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만드는 것. 말처럼 쉽지 않지만 언젠가는 해야 하는 숙제 같은 것.

수는 손에서 나는 땀을 옷에 문질렀다. 결국 키스는 생각 전이 과정을 방해하는 호르몬만 분비할 뿐인데. 수는 이런 사실을 알았지만 공 박사에게 들키기 전에 이한과의 관계를 정리하면 될 일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뇌과학자이자 생명공학자인 공결 박사는 오프라인 수업을 고집하는 유일한 강사였다. 특히 ‘마인드 컨트롤 101’ 수업은 완전한 구식으로, 원생들은 매 시간 요가 매트와 헐렁한 체육복을 입고 와야 했다. 강의실까지 걸어와 이 사람, 저 사람의 냄새를 맡고 달팽이관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갈수록 미묘하게 텁텁해지는 공기의 변화를 느껴야 뇌에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수는 조금 늦더라도 붉어진 볼을 식히고 들어가고 싶었다. 텅 빈 복도에 혼자 서서 눈을 감고 벽 너머로 전해오는 공 박사의 목소리에 집중하자, 곧이어 정신이 또렷하게 차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는 방법으로 강의실 문을 열었다.

“자, 지금 귓가에 울리는, 철문이 닫히는 소리에 집중해 봅니다.”

공 박사는 수의 지각을 놓치지 않았다. 원생들은 가부좌를 튼 채 강의실 바닥에 줄 지어 앉아 있었다. 명상 시간이었다. 수도 빠르게 자리를 찾아 앉았다. 몇 달 전부터 공 박사의 수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 명상 기법은 단순히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함이 아닌, 마인드 컨트롤의 초석이 되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각자의 브레인 패널 앞에 앉아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하면, 투명한 패널 위로 시각화된 의식이 나타난다. 거미줄 같은 뉴런이 모여 예측할 수 없는 의식의 파장을 만들고, 파장은 별처럼 빛나는 의식 개체로 투영된다. 수의 브레인 패널에는 아직 남아있는 도파민의 흔적이 보였다. 붉은 선의 움직임을 보며 수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굳게. 나는 오직 현재에 존재한다. 수는 생각했다. 동시에 들숨, 날숨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어지러이 일어나는 잡념의 바람을 잠재운다는 생각으로 다시 크게 호흡했다.

뎅, 뎅… 공 박사의 종소리가 들렸다. 청아하고 맑은 쇠가 부딪혀 울려오는 음의 파동이.

“오늘의 목표는 자신의 생각을 바이오 프린터로 뽑아보는 것입니다. 각자의 마음에 떠도는 표상을 공처럼 모아 봅니다.”     

생각 덩어리를 만드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과 마인드 컨트롤 테크닉이 요구되는 과정이었다. 사그라지지 않는 잡념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전전두엽의 통제가 필요했다. 수는 ‘무(無)’의 상태에 더욱 집중했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형상들과 모양 없는 추상적인 생각들을 구석으로 몰았다. 패널에 비친 빛이 점차 한 점으로 모였다. 감고 있는 눈에 떠다니던 현란한 색색의 이미지가 점차 잦아들었고 수의 정신은 검은 바탕 속으로 침잠했다. 고요의 한가운데, 깨질 듯 아슬아슬한 어둠이 몇 초간 지속되었다.

휘이잉,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바이오 프린터가 작동하는 소리였다. 곧이어 창백한 회백색 젤리가 유리함 안에 출력되었다. 얇은 막 안에는 형광 물질이 이리저리 튀어 다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 본질은 수의 의식을 찰나에 스캔하여 출력한, 인공 뇌세포로 만든 ‘지능체’였지만 육안으로 보이는 것은 귀여운 탱탱볼에 불과했다. 바이오 프린터의 작동이 멈추었고 수는 눈을 떴다. 다른 견습생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수는 유리함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탱글탱글한 자신의 지능체를 바라보았다. 저 지능체를 누군가의 뇌에 다시 업로드하면 자신의 생각을 모두 들키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완벽하군. 지능체는 어려운데 말이야.’

브레인 패널을 통해 공 박사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명상을 시작했다. 공 박사는 수의 지능체를 분석해보려 패널에 접속했다. 어떻게 저렇게 빠른 시간 안에 지능체를 만들 수 있었는지, 무엇이 수의 뇌를 특별하게 만드는지 알아야 했다.

‘닥터 공, 수업 후 회의실 1904로. 닐리 사 면담 요청.’

그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일정이 추가되어 있었다. ‘NLI(Next Level Intelligence)’ 사는 공 박사의 연구를 지원하는 글로벌 대기업 중 하나였다. 본래 인공지능 회사였던 닐리는 최근에 들어서는 인간을 넘어선 ‘초지능체’를 생산하려는 포부로 그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 기관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연구비를 쥐고 있는데, 깍듯이 모셔야지. 공 박사는 최근의 성과를 어떻게 설명할지를 떠올렸다. 이제 슬슬 수업을 마무리 해볼까.

“다음 주까지 과제가 있다. 지능체에서 자아를 없애는 ‘무아(無我)’ 테크닉을 각자 연습해 오는 건데……. 지능체를 만들어 실습해도 좋고, 시뮬레이션만 해와도 좋다.”

수 다음으로 지능체 만들기에 성공한 견습생이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목적이 뭔가요? 무아 테크닉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배웠는데 굳이 수업에서 실습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흠. 학생이 강의 계획서를 자세히 봤다면 알 테지만 한 번 더 설명해 주죠. 무아 테크닉은 ‘생각 전이’의 핵심이 되는 과정입니다. 생각에도 면역 반응이 있어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자기 생각을 방어하는 자아의 힘을 줄여야, 다른 지능체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게 수월해 지겠죠. 이해가 가나요?”

그럼, 자아가 없는 지능체만 모아 놓으면 어떻게 될까. 의도도 정체성도 없는 생각 덩어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 수는 자신에게 질문했다. 유리함에서 꺼내놓은 지능체는 빛이 사라지고 굳어 푸르죽죽한 돌이 되어 있었다. 나의 자아도 분리해서 출력하면 저렇게 생기 없고 못생긴 공이 될까.

 

회의실은 어두웠다. 블라인드 사이로 새어 들어온 빛에 여자의 흰 수트에 새겨진 NLI 로고가 반짝였다.

“선발 결과를 보려고 왔습니다만,” 흰 수트의 여자가 손깍지를 끼며 물었다.

“아직 후보자를 추리지 못한 상황입니다.”

흰 수트의 여자는 마른세수를 하며 눈을 감았다.

“박사님도 아시겠지만 달리기는 이미 시작됐어요. 그런데 우리는, 인공지능이 인공지능 찍어내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거죠. 다른 중소기업이 시중에 팔리는 인공지능 모아서 ‘초지능’이라고 마케팅하면 사람들은, 그게 초지능인 줄 알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알죠, 알지만…”

“아뇨, 모르시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개나 소나 다 초지능 팔아 대고 있다는 거예요. 초지능이 뭔지, 인간보다 뭐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지도 못하면서요. 화이트칼라나 해고하는 게 전부인 슈퍼컴퓨터만 팔아 재끼고 있다고요. 같은 인간이면, 박사님도 이제 좀, 진화하고 싶지 않으세요?”

“그, 양 이사님.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지만 저희도 그냥 뽑을 수는 없습니다.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서…”

“지루한 변명 들으러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다. 이 주 드리겠습니다. 무조건 우리가 먼저 만들어야 돼요. 이 주면, 모체(母體) 선별해서 기초 공사 끝내는 거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이죠?”

공 박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두 맞는 말이다. 인간 지능을 본뜬 인공지능은 차고 넘치는 세상이 아닌가. 눈에 보이는 해법은 결국, 인간에게 없는 인지 능력을 가진 다른 종의 지능을 한꺼번에 다 복사하는 전략이 아니던가. 지능 아카데미는 그것을 위해 세워진 기관이었다. 초지능을 탄생시키기 위한 실험을 하고, 실패하고, 또다시 시도하기 위해.

이 주. 이미 계약서상으로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났을 뿐만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없다면 후속 프로젝트 지원금은 물 건너갈 것이다. 양 이사가 말한 ‘기초 공사’를 하려면 생각 전이가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놓아야 하는데, 유망 후보 중에서 무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원생은 아직 없었다.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 그리고 생각 전이에 사용할 지능체 리스트도 업데이트 했습니다. 인간이 갖지 못한 인지 능력을 가진 동물 표본을 모두 포함시키는 쪽으로요. 그럼.”

둔탁한 발소리가 멀어졌다. 공 박사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후읍, 하아. 한정적인 인간의 뇌에 어떻게 그 많은 개체의 지능체를 넣으라는 거지.

후읍, 하아.

아니다, 과부하 위험은 줄이면 될 것이다. 인간의 뇌는 유연하다. 초지능을 가진 인간이란. 얼마나 멋질 것인가.

후읍. 하아.

 

수는 다시 생각 보관함을 찾았다. 유리함 속에서 전기 자극을 받으며 빛나는 형형색색의 지능체를 관찰하러. 동물의 지능체는 수가 만들었던 것과 다르게 뇌 전체를 복사하는 방법으로 만들어 더욱 아련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지금은 멸종된 동물들의 뇌와 함께 진열된, 종 별 개체의 기억과 감각 데이터가 어우러진 탱탱볼. 드넓은 바다 상공을 자유로이 날아 다녔던 알바트로스, 우람한 몸집에 걸맞은 뿔을 자랑했던 코끼리, 음파 언어를 가졌던 야생 돌고래, 인간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였던 보노보……. 그들 모두는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을 보았다.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며 순환하는 자연을, 그들은 인류보다 세세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한은 조류 섹션에 멈춰 서서 유독 파랗게 빛나는 지능체가 들어있는 유리함을 집어 들었다.

“수, 이것 봐. 알바트로스 꺼야. 엄청 크고 무거워. 생전에 무슨 생각을 했으면 이런 게 출력된 걸까?”

“궁금하면 체험하면 되잖아.”

“과연 같을까? 새의 뇌가 지렁이를 음미하는 것과 그 감각을 우리 뇌로 받아들이는 건, 큰 차이가 있지. 나는 지렁이를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은데.”

“완전히 같진 않아도 꽤 비슷하지 않을까?”

“알 수 없을 거야. 우리가 생각 전이를 연습할 때는 뇌에 흐르는 정보의 질이 같다는 가정을 하지만… 듣기로 지능체를 완전히 받아들이면 새로운 감각이 만들어진다고 하더라.”

평소와 다르게 이한은 진지했다.

“어떻게?”

“그러니까… 새의 뇌가 지구의 자기장을 감지했던 데이터를 인간의 뇌에 흐르게 하면, 원래 인간의 인지 능력과 합해져서 의외의 것을 ‘인지’할 수도 있다는 거지.”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거야?”

“그럼. 우리가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던 세상을.”

“이한아. 너는 이렇게 창의적이고 똑똑한데 왜 생각 전이를 두려워하는 거야?”

이한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적당한 대답을 찾는 듯 눈을 굴렸다.

“글쎄. 나는 자아를 없애는 연습을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려. 몰랐던 걸 알게 됐는데, 그게 끔찍한 거라면 되돌릴 수 없게 될까봐. 다시 온전한 나로 돌아오지 못할까봐.”

수는 이한의 손을 맞잡았다. 언젠가는 모두가 한번쯤 해볼 일이기에, 수는 이한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무아경을 연습한다고 해서 사라질 만큼 약하지 않아, 김이한.”

“고마운데, 과제는 여전히 하기가 싫네. 후후.”

이한은 능글맞게 수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수의 눈은 여전히 빽빽하게 들어찬 지능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수. 생각 전이를 한다면 유일하게 내 머리 속으로 들어와도 좋을 사람이라는 것을 너는 알까. 이한은 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실은 무아경에 도달해 ‘나’를 잃게 되면 너도 잃을까 두려워서 그래. 이한은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공 박사는 머리를 식힐 겸 맥주를 들고 <지능체 발달원>으로 걸어갔다. ‘동물원’으로 이름 바꾸라니까, 아직 그대로네. 취기가 오른 그는 배어나는 조소를 머금고 그의 옛 동료를 찾아갔다. 실험실도 아니고 영안실도 아닌, 동면실 안으로 들어간 초이를. 공 박사는 동면실과 복도를 분리하는 얇은 유리벽 앞에서 중얼거렸다.

“초이. 오랜만에 왔어. 너는 여전하구나.”

그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동면실 안 브레인 패널에 초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동면실 밖은 카메라 밭이었고 초이의 지능체는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었기에, 유재가 어디에 있던 볼 수 있었다. 유리함 안에 보관된 작은 뉴런 덩어리는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데이터를 공유 받으며 쉴 새 없이 발화하고 있었다.

“나한테도 인사 좀 해줄래? 나 누군지 알잖아.”

여러 표상이 패널에 비춰졌고, 그 결과로 문장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취객은 사양하지만 너니까 특별히 대답해줄게.]

초이가 생각 전이를 하다 뇌사 상태에 빠지기 직전에 스캔해둔 탱탱볼은 어느새 스스로 생각하고 떠들 줄 아는 지능체가 되어 있었다. 끊임없는 데이터 주입에 의한 결과였지만 공 박사는  초이의 정신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이라 믿었다.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와 봤어. 취객이라 미안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어서 제대로 말해.]

초이의 지능체는 진짜 초이가 그랬듯, 공 박사의 감정과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생각 전이 실험을… 다시 시작했어.”

지능체는 대답하지 않았다. 패널에는 분노와 혼란의 표상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왜 나에게 온 거야, 묻는 것처럼.

“이번엔 다를 거야. 네가 그렇게 되고 나도 연구 많이 했어. 인간의 뇌가 최선인데, 그걸 잘 활용하면서 다치지 않을 방법을…”

[결, 나한테 묻지 마. 초이의 뇌가 죽기 전에 경험했던 게 뭔지는 나도 잘 몰라.]

“그래도 여전히 넌 초이의 일부고… 그 과정을 함께했잖아.”

[요즘은 초이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정보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초이의 신체를 갖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몰라. 진짜 초이였다면 너의 냄새에 먼저 반응했을 테니까.]

“내 냄새가 무슨 상관이야.”

[있어, 지능체로는 잘 출력되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가.]

초이의 지능체는 아리송한 말을 하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만 떠나라는 뜻이었다. 연구원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신호였다. 그들은 매일 지능체의 지능이 얼마나 향상했는지를 검사하고, 새로운 데이터를 집어넣어 학습시킨 다음 지능체가 어떤 표상을 하는지, 고차원적인 문제에 대해 어떤 답을 하는지를 관찰할 것이다. 공 박사는 밭은 걸음으로 발달원을 빠져나왔다.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속이 매스꺼워진 탓이었다.

 

무아의 경지는 클럽에나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음악과 술에 취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흠뻑 빠져 몸을 흔드는 것이라고.

수는 계속 심호흡을 하며 전전두엽에 불을 키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럴수록 복잡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고 패널에는 지저분한 표상이 떠다녔다.

꼭 성공하고 싶은데, 생각 전이.

수에게 이번 기회는 수업을 넘어 일생의 꿈이었다. 우주 비행사에게 팽창하는 우주를 탐험하는 것이 꿈이라면, 뇌과학자에게는 생명체의 의식이 우주였다. 다른 생명이 되어본다는 것은 곧 다른 행성에 착륙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꼭, 성공해야 한다.

나에 집중하자.

나는 숨을 쉬고 있다.

나의 심장이 움직인다.

수는 심장의 펌프질을 느꼈다. 초침이 가듯 일정하게 뛰는 움직임을. 패널에 영사되는 수의 의식은 더욱 빛나고 둥글어졌다.

아냐, 이게 아니야. 더 뭉치잖아. 지능체가.

그럼, 반대로 해야 하나.

나를 생각하지 않아야 할까? 어떻게 나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있지?

패널에 이한의 얼굴이 나타났다. 수는 기억에 저장된 그의 말과 행동, 그에 수반하는 애틋함을 표상했다. 잔잔한 감정이 일렁였다. 좋아하는 이한, 사랑하는 이한,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이한…….

동그랗게 뭉쳐있던 지능체의 테두리가 서서히 옅어졌다. 발광하던 빛도 잦아들어 은은한 붉은 빛깔을 띠었다. 가장자리에서 작은 알갱이들이 떨어져 나왔다. 먼지처럼 가볍게 떠다니다 뭉치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두 개의 덩어리가 각자의 빛을 쏘았다. 지능체에서 분리된 또 다른 지능체. 수의 자아.

수는 스캔 명령을 내렸다. 바이오 스캐너는 순간을 저장해 두 개의 빛나는 탱탱볼을 뽑아냈다. 수는 처음 마주하는 자신의 ‘자아’를 바라보았다. 나를 만드는 생각들이 이렇게 붉고 빛나는 것이었구나. 수는 감격스런 마음에 유리함을 조심스럽게 들고 공 박사의 오피스로 향했다. 가는 길에 지능체가 굳지 않기를 기도하며.

 

“벌써 했을 줄은 몰랐는데.”

공 박사는 유리함 안에 든 수의 지능체 두 개를 뚫어져라 관찰하며 확신했다. 이런 뇌를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초지능의 모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 색이 붉다. 영롱하고. 이런 색은 또 처음 보네.”

수는 공 박사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어려운 과제를 수행한 뒤 얻게 되는 성취감을 양껏 느꼈다. 거봐, 할 수 있잖아.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이 윤활유가 되어 수의 의식에 스며들었다.

“그럼, 이제 생각 전이 배울 수 있어요?”

수가 들뜬 목소리로 공 박사에게 물었다. 빨리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공 박사는 이런 눈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차가운 동면실에서 감고만 있는, 초이의 맑은 두 눈. 공 박사는 다음 수업 시간에 얘기하자고 했다. 자못 진지한 그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가 느끼는 책임의 무게만큼. 그의 마음이 견뎌야 했던 후회의 크기만큼.

 

오늘은 개운하게 잘 수 있겠다. 포근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고 있자니, 수는 스르르 잠이 드는 자신을 느꼈다. 이제 잠이 드는구나.

잠이 드는 듯싶었지만 수의 마음은 까만 계단을 계속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빛나는 탱탱볼을 손에 꼭 쥐고 내려갔다. 이따금씩 탱탱볼을 벽면에 튀기기도 하면서 계속. 어두웠지만 괜찮았다. 탱탱볼은 아직 영롱하게 발광하고 있다. 살아있다.

이제 올라가야지. 생각은 방향을 바꾸었다. 그런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수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말랑하던 탱탱볼은 차가운 돌이 되고 있다. 서서히 빛이 꺼진다. 빛이 없는 어둠은 무섭다. 두려워 고개를 떨구는 것. 절망, 그것을 절망이라 부른다면 깊고 깊은 절망이었다. 어깨를 쥐어짜고 한없는 암흑으로 떨어지는, 그래서 벗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깊은 우물. 돌이 되어버린 그것을 떨어뜨린다. 깊은 어딘가로 떨어지는 공은 떨어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굴속으로 떨어졌다. 끝은 어디인가. 절망의 바닥은 존재할까. 바닥이 존재한다면 공은 바닥에 부딪혀 깨어질까. 돌처럼 딱딱해도 조각조각 부서질 수 있을까.

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처음 꾸는 생경한 꿈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마치 다른 사람의 꿈같았다. 평범한 악몽이라기엔 너무 생생하기 때문일까. 이렇게 의미 있는 날에, 하필 과제를 완성한 날에 이런 꿈을 꾸었을까. 수의 마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이 퐁당, 던져져 잔물결을 일으켰다. 이한, 이한에게 가고 싶다. 수는 강한 충동에 브레인 패널에 접속했다.

[수… 꿈을 꾸었니?]

목소리. 패널을 통해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수는 팔에 돋은 소름을 문지르며 소리에 집중했다. 목소리는 자신을 ‘초이’라고 소개했다.

[한밤중에 미안. 분리된 너의 자아를 어쩌다… 알게 돼서. 너한테 말해주고 싶었어.]

‘네?’

[자아를 완전히 분리하지 마.]

‘무슨 말이에요?’

[자아는 너를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실체야. 자의식 없이 생각은 방향을 가질 수 없어. 방향 없이는 흐를 수 없는 게 생각이고. 데이터 뭉치가 산발적으로 꺼졌다, 켜지길 반복해도 아무것도 아닌 게 돼.]

‘그, 그렇지만 생각 전이를 하려면요…’

[꿈을 기억해. 자아를 없앤다는 건 그런 거야.]

초이. 갑자기 나타나 조언을 하는 이 사람은 누굴까. 생각하면서도 수는 선명한 악몽의 기억에 두려움을 느꼈다. 밑도 끝도 없이 막막한 그 감각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아서. 다시는.

 

 

* * *

 

공 박사는 날짜를 확인했다. 초지능의 모체를 선별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완벽한 선택이란 애초에 있을 수 없었고, 최선의 선택만이 나아갈 길이었다. 수의 정신. 완벽에 가장 근접하는 지능체.

“오늘은 생각 전이 시뮬레이션을 할 겁니다. 바이오 스캐너는 사용하지 않고, 패널로 연습만 하는 거예요.”

원생들은 각자의 브레인 패널 앞에 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생각 보관함에서 골라온 지능체를 시뮬레이터에 연결하였다. 조류, 포유류, 양서류, 어류……. 다양한 생물의 지능체는 각자의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 이제,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뎅, 뎅…

명상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음파는 원생 개개인의 달팽이관으로 들어가 청각 신호로 뇌에 진입했다. 모두가 약속한 듯 가부좌를 틀고 어지러이 떠다니는 표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수는 알바트로스의 지능체를 연결했다. 그리고 숨을 고르게 쉬었다. 적막 속에서 표류하는 자아를 슬그머니 걷어 내었다. 수의 패널이 붉게 물들었다.

일순간 심장이 쿵 하고 두려움에 부딪혔다. 슬픔보다도 두려움이 온 몸을 휘감았다. 까맣고 긴, 그리고 깊은 문이 열렸다. 수의 의식은 문 안으로 계속해서 천천히 미끄러져 웅덩이에 닿았다. 생경한 지능체가 싱싱한 피처럼 수의 의식 안으로 섞여들었다. 거부감이 없는, 낯설고 저린 기억.

다음의 표상은 강풍을 가르고 날아가는 장면이다. 알바트로스 개체의 기억이 어렴풋이나마 어떤 형상으로 남아 떠다닌다. 수는 괴로움에 몸을 뒤틀며 허공에 팔을 내저었다. 시야는 뿌옇게 흐렸다. 한참 울다, 울다 지쳐 앞에 무엇이 있는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 밤이었다. 가벼워진 수의 몸은 계속해서 비틀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야가 돌아오고 바람소리가 들렸다. 위로 오르는 게 두려웠지만 계속해서 수는 몸을 흔들었다. 숨을 쉬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수의 몸이 움직였다.  그것은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며 걷는 것과 비슷했고 몸의 흔들림을 알았던 것은 깃털이 푸르르 떨렸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 차오르자 바람의 결이 느껴졌다. 강풍에 숨은 질서를 따라 몸을 기울이면 날갯짓을 크게 하지 않아도 떠올랐다. 그러다 몸이 세차게 흔들릴 때면 아래로 내려가 큰 나무 아래에서 쉬곤 했다. 첫 비행은 누구에게나 힘든 법이었다. 바다에 닿을 즈음엔 해가 사물에 색을 부여했다. 세상이 난생 처음 맞이하는 빛깔로 반짝였다. 어지럼증이 도졌다. 해석하지 못하는 색의 정보였다. 인간의 눈은 해석하지 못했던 빛의 파장에 눈이 머는 듯 통증이 몰려왔다.

“헉… 헉…”

수는 눈을 부여잡고 패널에서 떨어졌다. 눈이 아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실제로 눈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새가 보는 세상은 훨씬 자세하고 어지러웠다. 새가 보는 세상은 모든 게 선명한 형광이었다.

“수, 수! 괜찮아?”

이한의 굵게 주름진 이마가 보인다. 어깨에 닿은 그의 손이 뜨겁다. 공 박사가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종료시켰다.

“좀 지나면 괜찮을 거야. 처음부터 난이도가 있는 지능체를 업로드하면 힘들 수 있어.”

브레인 패널에는 반짝이며 발화하는 수의 뉴런들이 영사되었다. 박사는 수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들여다봤다. 수의 의식 활동은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기의 그것과 비슷한 패턴을 띄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생명체의 활기를 반영하며. 시뮬레이션만으로도 수의 뇌는 더 유연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손색이 없을 것이다. 생각 전이 절차를 미리 알려줘도 문제없을 것이다. 오히려 연습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초지능의 탄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순차적으로 진행하신다고요.”

양 이사는 유례없는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런 공 박사의 연락에 반색하며 부리나케 아카데미를 찾았다. 모체가 준비되었다는 그의 짧은 메시지에.

“자아 없애는 건 철저하게 확인하셨죠?”

“깔끔한 무아경에 도달할 수 있는 연구원이에요. 그렇지만 예전 케이스들이…….”

초이와 같이 동면실로 들어갈까 두렵습니다. 박사의 목까지 차오른 생각들이 뱉어지지 않았다.

“박사님. 예외는 없어야 합니다. 자아를 없애는 길만이 유일한 ‘킬 스위치’예요. 무언가 잘못되면 언제든 끌 수 있는 초지능의 킬 스위치, 아시잖아요. 자아가 남아있으면,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통제가 불가능해져요. 너무 위험합니다. 여러모로요.”

공 박사는 입을 다물었다. 초이의 얼굴이 계속해서 떠올랐지만 꾹꾹 마음에만 담아두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초지능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결국 닐리의 소유가 아닌가.

하지만 그는 어렴풋하게 돌아본다. 초지능이란 것은 애초에 통제할 수 없음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었는지. 평범한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기에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닌지를. 진화를 논하지만 실은 공포의 대상이기에, 먼저 정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를.

 

 

* * *

 

수는 어지럽게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려 애썼다. 어느새 내일로 다가온 생각 전이 실험의 절차를 복기하기 위함이었다. 종소리가 울리면, 숨을 고르게 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아를 분리하고, 천천히 다른 생의 의식이 들어오는 것을 감지하며…….

“수, 수… 나야.”

어둠이 내리 앉은 문 밖으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한의 목소리. 크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반가운 동시에 울컥, 걱정부터 솟는 음.

“이한아, 지금 너 보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알아, 알지만… 마지막이 될 지도 몰라서 보고 싶었어. 그냥 보고 싶었어. 무척이나.”

이한은 수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려다 말고 허공에서 손을 멈추었다. 보기만 해야겠다. 지금 수를 만지면 참을 수 없어질 지도 모르겠다. 생각한다. 그리고 며칠 사이 야윈 것 같은 수의 어깨를 바라본다. 뇌가 쓰는 에너지가 전체의 이십 프로에 육박하는데, 평소보다 많이 먹어야 하는데. 저 수액으로 버틸 수 있을까. 걱정한다.

수는 그런 이한의 얼굴을 읽어본다. 간격이 좁아진 눈썹 사이, 이리저리 구르는 갈색 눈동자, 자신도 모르게 깨물고 있는 아랫입술. 편편하게 적요했던 수의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무아의 경지에 도달했다가 이한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지면 어떡하지. 이한을 다시는 표상할 수 없게 되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지. 그런 나를 이한은 계속 좋아할까. 치매에 걸린 나라도 이런 눈으로 바라봐 줄까. 수는 마음의 물결이 얼굴 위로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흥분하면 안 되는데. 흥분해서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되면 나는 실격인데.

두 마음이 충돌하여 번민을 만들어 불길처럼 삽시간에 수의 마음에 번졌다. 수는 부풀어오르는 눈물샘에 속절없이 소금물을 흘려보냈다. 그 눈물은 무력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화에, 슬픔이 버무려진 모양이었다. 이한은 동그란 눈물을 흘리는 수를 감싸 안았다. 격정을 식히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이정도 스킨십은 문제없겠지.

“안 좋은 마음들이 잘 흘러가게 내버려 둬. 마음껏 울어도 돼.”

이한은 수의 향기와 울음소리, 체온, 차분히 가라앉는 떨림의 형태를 장기 기억에 보관하려 애를 썼다. 얇은 실험복 위로 드러난 그녀의 등을 따스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또 다독이며.

“잘할 수 있어. 너는 강한 사람이야, 수. 그것만 기억해.”

 

* * *

다음날, 수는 비장한 마음으로 실험실에 들어갔다. 찬 공기가 피부에 닿아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확신… 확신이 필요한데, 자기 확신이란 것은 매번 필요할 때 없다니까.

“준비 됐지?” 공 박사가 수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는 다시 한번 패널 데이터를 확인한다. 지능체는 하나하나, 천천히 업로드할 것이다. 인간이 가지지 못한 인지 능력을 가진 모든 종의 지능체를. 수의 뇌가 버거워하는 신호가 감지되면,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프로그램을 종료한다. 그는 종료 명령을 상기한다. 등에 식은땀이 맺힌다.

수는 관처럼 생긴 원통 안으로 들어갔다. 통 안엔 노란 빛이 감돌았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뎅, 뎅… 생각 전이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나는 숨을 들이쉰다. 내쉰다.

표류하는 의식을 두 손에 모아 쥔다. 천천히 나를 분리한다. 내가 아닌 타인을 표상한다.

나는 세계의 점이다.

점이 되어 소멸한다.

이윽고 낯선 감각이 흘러든다. 형용할 수 없는 속도로 들이치는 감각에 발작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들숨과 날숨에 맞추어 빛이 번졌다. 천지가 발광한다. 사물은 익숙한 것들이 아니라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색으로 형체만을 유지했다가 순식간에 흑백이 되고 모든 것에서 냄새가 난다. 잔향은 흔적처럼 빛이 번지듯 퍼져 벌침에 맞은 듯 뇌를 마비시킨다.

검은 웅덩이 속으로 떨어져, 계속 떨어져 부서질 듯 아슬아슬한 상태가 얼마간 지속되었다. 이러다가 완전히 떨어지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이렇게 계속 받아들이다간 퓨즈가 끊기겠어. 아우성은 꼬리를 물고 전두엽에 닿았다.

고요. 고요하게 새파란 새벽빛이 보인다.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강풍 속을 나아가던 알바트로스처럼, 웅크려있던 자아가 일어나 날개를 폈다.

자각(自覺). ‘나’는 살아 있다.

그러자 익숙한 감각이 되살아나 휘몰아치는 의식의 흐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꼬인 혈류를 풀어내듯 서로 다른 내 안의 생각이, 기억이, 의식이 일방통행하며 뉴런을 발화시킨다. 나는 받아들인다, 방대한 자연의 오감과 인간인 내가 가지지 못했던 지각을.

가둘 수 없는 생각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개체 없는 모든 생의 기억. 개별 기억은 떨어진 것이었지만 하나다. 생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연결되어 있다. 끊이지 않는 실타래처럼 휘감기는 낯설고 친숙한 광경. 각자가 담은 시각의 파편이 연결되어 전체가 된다. 저마다의 감각으로 지구를 담아, 모이고 뭉쳐져 내게 흘러들어온 것은 모든 것이 연결된 자연 그 자체다. 나는 나의 자아로 그것을 모두 음미한다.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데이터 덩어리는, 내게 흘러 의미가 되어간다.

섬광처럼, 낯선 그 감각이 차분히 번진다.

숨 쉬듯 분명하고 짜릿하게 흐르는 그것은 생의 균형이다. 수백만 개의 의식이 생과 사를 반복하며 맞추었던. 모든 지능체의 홈 그라운드 지구의, 숨 쉬며 소멸하는 대자연의 균형감.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뚜렷하고 섬세하게 존재한다.

나는 고요한 자아를 표상한다.

지구를. 먼지 같은 나의 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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