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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존재잔향存在殘響

2015.04.08 00:2804.08

 

존재잔향

存在殘響

 

M은 요즘 굉장히 고단한 상태다. 12, 늦은 퇴근길 때문이다. 다만 야근을 한다고 마냥 상사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의 상사이자 사장인 T 또한 그와 함께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일했다. 이렇게 된 이상 M은 모든 일의 원흉인 클라이언트를 저주할까 생각했지만, 워낙 천성이 둥근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럴 시간에 얼른 끝내자는 심정으로 다시 일에 몰두했다. 그런 그와 달리 부서가 달라 야근과는 상관없는 직장동료 S는 내내 소파 위에서 빈둥거리다 지친 듯 떠날 채비를 하며 M에게 말했다.

수고하라고, M. 밤 길 조심하고. 요즘 거리 시끄러운 거 알잖아.”

그녀의 말대로, 이번 달 내내 신문의 헤드라인은 거리의 연쇄 살인마의 활약상으로 장식되었다. 사실, 연속 실종 내지 유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경찰은 한 번도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살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살인 현장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매번 엄청난 양의 혈흔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혈흔이 한 장소에 오직 한 사람만이 흘렸으며, 그 양도 치사량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S는 싸늘한 눈빛으로 M을 훑으며 걱정하는 것인지 비아냥대는 것인지 모를 말을 했다.

하긴, 그렇게 위아래 검은 색 옷만 입어서는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겠다 싶지만.”

“M이라면 걱정 마. S.”

잠시 막간을 이용해 의자에서 잠들었던 T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영 피로가 풀리지 않는 듯 붉은 머리를 짚으며 몸을 추스르는 그녀는 컨디션이 굉장히 좋지 않아 보였다.

“M이라면 아마 살인마가 눈앞에 나타나도 실실 웃으면서 차라도 권할 것 같으니. 범인도 기가 막혀서 놔주지 않을까.”

그거 저 일 더시키려고 하시는 말씀이죠?”

T는 조그맣게 들켰네, 하고 담배를 물었다.

여하간 걱정되는건 M이 아니라 S, 너야. 요즘도 밤에 나돌아다니는게 취미인가?”

남이사.”

그러고는 빈정 상한 얼굴로 붉은 블루종을 휘날리며 가버리는 것이다. T는 그런 S를 신경쓰지도 않고 리모컨을 들어 사무실 한구석에 있는 낡은 브라운관 TV를 켰다. 마침 심야 뉴스가 나오던 참이었다. 허나 뉴스에는 아나운서 대신 어느 교수의 인터뷰 화면이 나오던 중이었다.

흔히들 이번 연쇄 살인 사건을 두고 현대에 재림한 잭 더 리퍼라고도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전 다르게 생각합니다. 일단, 흔적이 남지 않아요. 시신조차 남지 않습니다. 사실 살인사건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것이 피해자가 두 자릿 수가 넘어가는 동안 사체 하나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범인이 어딘가 거점을 두고 시신을 모아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특이한 것은.’

.”

M의 입에서 저절로 소리가 나왔다. 근 한 달 간 뉴스 메인 기사이기도 하고 형사인 M의 삼촌이 직접 사건을 담당하고 있기에 이미 알고 있던 사실뿐이지만 그 기괴함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T가 커피포트에 물을 넣으러가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 과연 저 말대로 이 사건은 그냥 살인 사건이라고 하기엔 이상한 점이 많지. 저 교수의 말에 이상한 점은 없어?”

시신이 없다는 점 말인가요? 저 말대로라면 사체를 한 거점에 유기했다는 건 그럴듯해 보이는 걸요.”

아냐, 우린 더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잖아 M, 너의 입 가벼운 삼촌 덕에 말이야.”

M은 찔끔한 표정이 되었다. 삼촌이 사장에게 반해서 둘이 몇 번 데이트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수사상황까지 술술 불어버렸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친족이라는 이유로 이것 저 것 들어버린 M 또한 어디다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 . 사건 현장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그럼에도 사체는 없다. 피해자를 선별할 수 있었던 것은 현장에 남아있던 혈흔, 혈흔은 좁은 사건현장을 잔뜩 적실 정도로 충분했다.”

바로 그거야, M.”

포트의 커피가 끓는 동안 T는 기상 후 두 대째의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당겼다. 첫 모금의 담배연기가 사무실 천장 위로 피어오른다.

시체를 다른 장소로 유기한다? 이는 시체를 이동시켰다는 것을 의미하지. 하지만 사체의 출혈은 심각한 상태였어, 그 피는 사건현장을 적실 정도였으니 어디론가 끌고 갔다던가, 혹여 들고 갔다고 하더라도 그 흔적이 남아야 정상이겠지. 하지만 혈흔은 깔끔하리만치 현장 내에 국한되어 있었어.”

하지만 캐리어라던가, 차량이라던가 하는 것도 있지 않아요?”

사건 현장은 모두 주택가 내 좁은 골목이나 다리 밑, 차가 직접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없었어, 캐리어 같은 손수레라면 그럴 듯 하지만 피해자의 체격은 제각각이지, 개중엔 캐리어에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사내도 있었어.”

그렇지만사체를 토막냈다던가.”

그렇다면 흔적을 찾았겠지, 캐리어에 쑤셔넣을 정도로 잘게 썰어낸 사체를 흔적도 없이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하물며 천조각, 손톱 조각 하나 남지 않는데서야.”

M은 등골이 서늘해져 저절로 부르르 떨었다. T는 일도 유능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때도 실감나게 하는 것이 능숙했다. ‘변사라는 직업이 남아있었다면 이 사람에게 천직이 아니었을까.

듣고보니 점점 더 섬뜩해지는데요. 그럼 사장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글쎄, 뭘까. 그걸 알면 벌써 경찰에 다녀왔게?”

T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잔을 들고 쓴 웃음을 지었다.

이미 경찰 관계자한테서 한 번 의뢰가 들어왔었어. 이미 고사했지만. 어쨌든 정상적인 살인 사건은 절대 아니야. 아까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조심하는게 좋아, M. 어쨌건 네가 그런 존재들한테 인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니까.”

 

M이 화제의 시내 거리를 걷고 있을 적엔 이미 모든 인적이 끊긴 후였다. 어느 정도냐면, 도로 위를 다니는 차 한 대 조차 없을 정도다. 그만큼 살인마의 존재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일으켰다.

“S, 지금 혹시 어딜 헤메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혼잣말이라도 중얼거려본다. 온갖 일을 겪어본 그지만, 야근으로 지쳐 날카로워진 신경이 망상을 자극한다. 이 쯤되자 살짝 T에 대한 원망도 일었다. 그 두 사람은 일반적인 회사 업무 뿐 아니라 뒷 세계의 미심쩍은 일또한 겸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S의 경우 회사에서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온전히 그런 일담당이다. 그런 사람들이기에 둘에게 들은 경고는 으스스하다.

그가 사는 아파트로 접어들 때까지는 별 일 없었다. 대로를 따라 부는 바람이 제법 매섭기에 S는 입고 있는 검은 코트 깃을 더욱 움츠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두 갈래 길이 나온다. 골목으로 통하는 길과 대로를 따라 죽 걷는 길. M의 아파트는 두 길 모두 통하지만 골목은 지름길이고, 원래대로라면 거리의 대로를 따라 한참 돌아가야 나온다. M은 제자리에 서서 망설였다. 날씨가 너무 추운 탓에 얼른 지름길을 통해 집으로 가고 싶지만 하필이면 그 곳은 사건의 주 무대인 골목길.

난감하군.’

M은 한참 생각한 끝에 주저하며 골목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무래도 사람이란 눈앞의 이익을 먼저 좇기 마련이라 설마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살인마보단 당장 닥친 추위를 더 피하고 싶은 법이다.

아니.

어쩌면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닌.

뜻하지 않은 만남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아이는 골목길 옆으로 난 막다른 길에 홀로 서있었다.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아주 외진 곳에서, M이 무심코 그 쪽으로 돌아보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작은 소녀가 있었다. 소녀가 뒤돌아 서 있음에도 M이 알아차린 것은 긴 흑발머리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달랑 하얀 서머드레스 한 벌만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광경, 순간적으로 떠오른 여러 생각 중 M이 가장 먼저 의식한 것은 아이가 매우 춥겠다는 것이었다.

꼬마야?”

무심코 뱉은 M의 부름에 소녀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하얗고 말간 얼굴에 귀여운 이목구비가 도도하게 박힌 소녀다. 그 외엔 평범했다.

이런데서 뭐하는 거니?”

M이 다가감에도 아이는 그다지 경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빤히 M을 바라볼 뿐이었다. M은 소녀의 하얀 피부가 차가운 겨울 날씨로 인한 것이라 생각해 얼른 코트를 벗어 덮어주었다. 이 정도로 추우면 덜덜 떨 만도 한데 소녀는 코트를 덮든 말든 미동도 하지 않고 M에게 계속 시선을 맞추었다.

, 집이 어디니? 데려다 줄게.”

소녀가 겁을 먹은 줄 알고 M이 최대한 다정하게 말을 걸었음에도 묵묵부답. 이래봬도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자부하는 M이기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소녀가 겁먹고 있는 눈빛은 아닌 것 같으니 다행이다. 일단 어딘가 따뜻한 곳이라도 데려다 줘야겠다고 결심하고 아이를 끌어안아 뒤돌아섰을 때.

코끝에 알싸한 비린내가 자극해 왔다. M이 먼저 떠올린 단어는 비린내’, 사전적 의미상 비린내라 하면 해산물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를 말한다. M은 본능적으로 그 의미를 부정하며 길의 막다른 안 쪽을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이 전혀 닿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불안한 느낌이 든 M은 휴대폰을 꺼내들어 라이트를 켰다. 그리고 움직이길 거부하는 팔을 억지로, 냄새가 나는 쪽을 향했다.

그 곳은 적갈색 세계. 말라붙은 헤모글로빈이 내뿜는 냄새가 골목에 깔려 있다. 정체는 피비린내’. 그 근원지는 한 눈에 보기에도 사람 하나 잡았을 듯 온통 적셔져 말라있는 핏자국들. 무의식적으로 M은 사체가 어디에도 없는 것을 깨달았다. 범행 현장.

곧 아차, 싶어 그는 소녀의 눈을 가렸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분명 길 잃은 아이가 눈앞의 광경에 겁을 먹을 정신조차 잃은 것이다. 어른인 자신조차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인데.

어서 파출소에.’

다행히 들어왔던 길로 도로 나가면 근처에 파출소가 있었다. M은 어서 거기에 보호를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광경도 신고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M은 최대한 현장을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아이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 때 무언가가 M의 손을 잡아당긴다. M은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봤고, 그제야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살짝 찡그린 얼굴로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소녀. 몇 번이고 그녀를 재촉해 나가려고 하지만, 오히려 소녀는 그의 소매를 붙잡고 고개를 흔드는 것이다. 그 순간 M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 데려갔단 말이야?’

G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울린다. M은 얼른 핸드폰에서 귀를 땠다. 이 친구는 그 산만한 덩치만큼이나 목소리도 우렁우렁하지만 본인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뭔가 물어봐도 대답도 안하고.”

끝에 가서 말끝이 흐려졌다. 사실 파출소로 가려던 발걸음을 막은 그 무언가를 설명할 수 없는 탓이다.

이 바보야, 너 지금 납치한 거라고, 알아?’

그 정도면 괜찮아, G.”

M은 얌전히 거실 바닥에 앉아 이 쪽을 보는 소녀를 보며 말했다.

7살 쯤 된 여자애야, 잘하면 아동 성폭행으로도 엮어들어가겠지.”

이 멍청이가.’

수화기 너머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 M은 조금은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그가 생각 없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것은 아니다.

삼촌에게 이미 연락했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재우고 내일 조사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보호하기로 했어. 덕분에 회사는 좀 늦게 출근해도 되니 겸사겸사.”

M이 믿는 구석이 바로 이것. 방금 전 사건 신고 겸 전화했을 때 된통 잔소리를 들었지만, 어쨌건 경찰에 신고한 셈이니 괜찮을 것이다. 억지로 우기자면 경찰 관계자 비스무리한 것이기도 하고. 어쨌든 경찰은 새벽에는 현장 수습하느라 바쁠테고 아침에 삼촌이 미아 보호 겸 증인 확보차 데리러 올 것이다.

그래 뭐, 모쪼록 은팔찌 찰 짓은 하지 마라. 그 땐 너 아는 척도 안할 거니까.’

무슨 말하는거냐 너.”

대충 그렇게 G와의 전화를 끊고 돌아보자 얹어놓은 냄비에 물이 막 끓고 있었다. M은 허둥지둥하며 파스타 면을 냄비에 가지런히 넣었다. 보아하니 아이가 아무것도 못 먹었을 것 같아 만들기 시작한 파스타다. 이거라면 아이들도 좋아할 법 하니.

맨 처음엔 이왕이면 자신보다는 같은 여자인 S가 조금이나마 더 잘 돌볼 것 같아 그 쪽에 연락을 해봤다. 허나 오늘도 외출 중인지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S는 고집스럽게 핸드폰을 만들지 않았다. M은 투덜거리다가 금새 S의 살풍경하다 못해 황량한 원룸과 모성애를 상상할 수 없는 그녀의 성격을 떠올리고 그냥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가기로 결심했다.

, 다 됐다.”

안타깝게도 소스는 그냥 마켓표 토마토 소스. 소시지라도 좀 썰어넣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조금 아쉽지만 이걸로 만족하기로 한다. 마침 때맞춰 찻주전자도 끓어올랐다.

요리된 파스타를 냄비 째 들고 가 식탁 위에 올려놓고 아이 몫의 작은 접시에 적절히 덜었다.

입에 맞을까 모르겠지만. 나도 집에서 가끔 해먹는 거니까.”

S가 집에 놀러 올 때도 가끔 하는 요리다. 이따금씩 해달라고 하기도 하는데, 정작 만들고나면 몇 입 먹다가 말곤 한다. 그 때마다 M은 입에 맞지 않나했지만 그 뒤로도 계속 요구하는 걸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도대체 뭘까, 그 녀석.”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소녀가 그를 빤히 쳐다보자 M은 민망해하며 자신의 접시에도 파스타를 담았다. 아이는 신기한 듯 자기의 접시를 보고 있다. 그 말갛고 투명한 얼굴 위에 떠오른 표정이 꽤나 귀여웠기에 M은 나중에 딸을 기르면 이런 아이가 좋겠다 생각하며 찻잔에 김이 오르는 차를 따라주었다.

, 감기 걸리지 않게 여기 차도 마시렴, 이제 먹을까.”

M이 먼저 먹기 시작하자 소녀도 따라서 포크질을 하기 시작했다. 식사 시간이다.

 

어느덧 새벽 세 시, 원룸인 M의 방에 놓인 침대는 그래도 어른 두 명 정도는 어찌어찌 잘 수 있을 정도의 사이즈였으나 M은 소녀에게 침대를 내주고 바닥에서 자기로 했다.

야근과 소녀의 일로 인해 쌓일 대로 쌓인 피로로 인해 M은 눕자마자 바로 곯아 떨어졌다.

겨울의 서리바람이 차창을 두들기는 가운데 어둠에 휩싸인 원룸은 잠든 M의 색색 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랬다. 소녀는 적막 속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 와중에도 소녀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소녀는 생각했다. 배가 고프다고.

조금 전에 먹었던 파스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녀는 먹을 것이 필요했다. 몇 시간 전에 먹었던 가출 청소년은 너무 양이 적었다. 멍청한 소리로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언제나처럼 목을 먼저 물어뜯었기에 피를 전부 흘려버렸다.

소녀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식사를 했다. 소녀의 겉모습만으로 사람들은 쉽게 경계를 풀었다. 개중에는 성욕을 품고 손을 대는 자도 있었다. 허나 그들이 어떤 자들이든 곧 소녀의 먹이가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바닥에서 자고 있는 자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바닥에 내려와 섰다. 정확히 M의 머리맡이었다. M은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소녀는 그런 그를 빤히 내려다 봤다. 별로 주저할 만한 일은 아니다. 애초에 그런 개념은 없다.

그만 두시지.”

뒤에서 들리는 소리.

소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거기에는 M보다는 조금 더 작은 여자가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기척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한참 찾아다녔다, 어딘가 했더니 하필 여기였나. 하여간 저 녀석은 어떻게 되먹은 건지.”

S는 기대던 벽에서 등을 떼고 소녀와 마주섰다. 소녀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어떻게 S가 거기 있는지 놀란 기색조차 없어보인다. S는 입고 있는 붉은 블루종의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말을 이어갔다.

어떤 녀석일까 궁금했는데, 어린애였나. 널 찾기 직전까지만 해도 꽤 기대했는데 말이야. 아니, 오해는 하지 마.”

머리카락 사이로 S의 눈이 하얗게 빛났다. 그것은 전혀 무방비의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소녀는 본능적으로 S가 식사감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눈치챘다. 사냥꾼은 사냥꾼을 사냥할 수 없다.

꼬마라고 해서 봐주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상대가 될 만한 녀석이라면 달려들려고 했는데. 넌 단지 먹기만 할 뿐이잖아.”

마지막 단어가 강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소녀는 아직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김샜다. 너도 그 녀석은 내버려두고 다른 걸 찾아봐. 굳이 말리진 않을테니까.”

소녀가 의사표시를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S는 그녀에게서 강한 부정의 의사를 느낄 수 있었다. 어쨌건 소녀는 배가 고픈 것이다.

허튼 짓 하지마.”

단호한 경고, 그리고 강한 경고가 필요하다.

그를 건드리고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지마, 네가 어떤 존재이건 내겐 상관없어.”

그리고 한차례 휘둘러지는 팔과 이어지는 섬광.

그 순간 소녀는 그 말이 전혀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앞의 공기가 베어갈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것인지 잘은 몰라도 그녀가 자신의 경고를 충분히 실행에 옮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 이쯤이면 알겠지. 그럼 잘 부탁한다.”

그리고 S는 뭔가 생각난 듯 머리를 갸우뚱 했다.

그러고보니 옛날에 너랑 비슷한 녀석이 있었는데. , 됐어. 다신 볼 일 없을테니.”

S는 뒤돌아서 문으로 다가가다가 아, 하며 질문을 던졌다.

혹시나 말인데, 그 녀석이 너한테 뭔가를 해줬었어?”

그러나 소녀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없다. 단지 원망스레 S를 바라볼 뿐이다. S 또한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대로 원룸의 문을 열었다.

저녁 식사를 줬었어.”

조그맣게 소녀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차도.”

그래, 걘 그런 녀석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

소녀는 다시 자고 있는 M을 바라봤다. 이 와중에도 둔한 것인지 피곤했던 것인지 깊게 잠들어 있다. S같은 차가운 여자가 그렇게 경고를 하고 떠날 정도로

소녀는 너무나 배가 고팠다.

지금 당장 먹을 것을 찾아야 했다.

S의 말대로, M은 먹지 않기로 했다. 아니, 먹을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식사감이 아니었다. 소녀는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발을 가져다가, 입에 물었다. 하지만 시선은 어디까지나 M을 향한 채였다. 한 입, 한 입.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를 향한 채였다.

 

아침의 T의 사무실은 주변에 아무렇게나 부려놓은 서류철과 책들의 탑에서 나온 먼지들이 조그마한 창을 통해 비추는 햇빛을 받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보통 클라이언트들과 상담하는 용도로 있는 정중앙의 응접용 자리에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TM이 마주보고 있었다. S는 한 구석에 서서 빤히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T가 입을 열었다. 안경은 벗은 채로,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숙인 M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 뒤는?”

MT에게 그간 있었던 일과 그 뒤의 조사의 결과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 날 새벽이 지나고 아침. 형사인 M의 삼촌이 소녀를 찾으러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일어난 그는, 그제서야 소녀가 온데간데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에 삼촌에게 혼나고 아이의 인상착의를 설명했죠. 실종자 명단에서 그 애를 찾은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고작 두 달 전에 사라진 아이였더군요.”

이름 모를 브랜드의 담배에 불을 붙인 T는 뿌연 연기를 뿜어올렸다.

누가 알았을까요. 살인 사건의 범인이 그렇게 작은 소녀였으리라고는. 물론 이 이야기를 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죠. 경찰은 물론이고. 사장님은 알고 계셨던 거겠죠. 그 사체 유기 방법이 먹어서 없애는 것이었다는 것을.”

추측했었지. 너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먹는 것이외에는 상황 자체가 설명이 되질 않았으니까.”

M은 그녀를 쳐다 볼 뿐이다. 아직 듣고 싶은 대답을 듣지 못한 탓이다. T는 대신에 리모컨을 들어 구석의 TV를 틀었다. 마침 오전 뉴스가 시작한 참인지 아나운서가 오프닝 멘트를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소식입니다. 지난해 가을에 실종된 7세 소녀로 추정되는 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교외의 어느 버려진 창고에 감금되어 있던 이 소녀는.’

모든 존재는 소멸할 때 크던 작던, 일시적이던 영원하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로 시작하는 격언과 비슷한 말이지만. 대충 비유하자면 잔향이라고 할 수 있지.”

사장의 목소리가 TV의 뉴스 앵커의 소리와 겹쳤으나 놀랄 만치 또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사인은 아사로 추정됩니다. 경찰당국은 요 겨울 내 활동을 멈춘 연쇄 살인범과 이 사건의 범인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아주 가끔, 적은 확률로 그 존재가 짙은 잔향을 남길 때가 있어. 그게 흔히 말하는 망령이라는 존재지. 아니, 살아있지도 않은 잔향에 불과한 그것을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어쨌든 이 잔향은 존재가 소멸 직전 마지막으로 강렬하게 품고 있던 의식을 기반으로 나타나.”

M은 더 듣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런 제스쳐도 취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S는 잠자코 바라봤다. 그 날 있었던 일은 M이 다른 사실을 알아낸 뒤에야 알려주었다. 끝으로 그에게 짤막하게 사과의 말을 했을 때. M은 지친 듯 보였지만 조금이나마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해주었다.

괜찮아, 고마워.’

T는 다음 소식으로 넘어간 뉴스를 꺼버렸다.

어쨌든 너는 그 소녀의 행방을 알아냈으니 어쩌면 그녀의 원한을 풀어준 셈이지. 더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잔향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소녀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네게 무엇을 의지한 것이라 해야 할까.”

과연 그런 것일까. 한마디 작별도 나누지 못한 채 성불한 소녀의 잔향은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M의 마음은 오히려 무거워졌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더해간다. 그런 M을 보며 T는 애써 밝게 그의 중압감을 덜어주고자 했다. 밝은 날 안경을 쓴 그녀는 그래도 비교적 상냥한 편인다.

그래도 M, 그런 망령을 만나고 나서도 멀쩡히 있는 걸보니 역시 넌 뭔가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잖아, 언제고 한 번 연구를 해보고 싶어.”

연구요?”

해부라거나.”

사양하겠습니다.”

M은 농담을 받아넘기고 가방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오늘 휴가를 쓰기로 했었다. 바로 어제까지 이 문제로 동분서주하고 심신이 피로해진 탓이다.

어이 M.”

M의 등 뒤에서 마지막 위로이자 조언이 날아들었다.

더 이상 그 일은 마음에 담지마. 잔향은 그 크기가 어떻든 결국에는 사라지게 되있어. 그걸 끌어안고 살겠다는 멍청한 생각은 하지마.”

이만 가자, S. 감사합니다. 사장님,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온 M은 얼굴을 비추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이런 시간에 회사에서 퇴근하는 것은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물론 자유 퇴근권을 가지고 있는 S에겐 별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너랑 같이 가는 신선한 경험이라고.”

S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쩌면 M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일지도 몰랐다.

저기, M. 지금부터 뭘 할까? 오늘은 맘놓고 놀고 싶은데.”

글세, 우선 밥이나 먹지 않을래? 그러고보니 요즘은 밤에 나다니지는 않지?”

, 뭐 이젠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밥이라면, 나 먹고 싶은게 있는데.”

M은 의외라는 눈으로 S를 쳐다봤다. 워낙 그런데 무신경한 그녀이기에, 그녀가 무언가를 먹고 싶다고 한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빼고.

SM을 쳐다보며 말했다.

파스타를 먹고 싶네 오늘은. 뜨거운 차도 같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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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써둔 글인데 올려봅니다.

사실 눈치 채셨을 것 같습니다만 모 소설의 팬픽입니다.

다만 최대한 1차 창작스럽게 팬픽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걸 목표로 써봤습니다.


다만 등장인물과 설정 등은 따온 것이 확실하므로, 문제가 된다면 자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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