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The Box

2008.11.28 07:1911.28


        '쿵!'

        바나나와 우유를 마시며 허기를 달래던 참에 위층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틀전. 그러니까 지난 일요일 아침에 위층에 살던 사람이 이사를 간 걸로 아는데, 지금 누가 다시 들어온 모양이다. 궁금하기도 하고, 소리가 워낙 커서 사고라도 난 건 아닌가 싶어 살짝 문을 열어 계단을 살폈다. 인기척은 하나도 없고, 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에는 짐을 옮긴 흔적조차 보이질 않는다. 잘못 들었나 싶어 문을 닫으려다가 혹시나 해서 계단 꼭대기를 슬쩍 쳐다 보았다. 5층 현관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빼꼼히 열린 문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열려 있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내가 있는 현관 쪽에서 비스듬히 봤을 때는 각도가 살짝 틀어져 있어 열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더욱 궁금해 졌다. 도대체 무슨 소리였을까. 도대체 왜 문이 열려 있는 걸까.
        
        다시 계단을 살피고 용기를 내어 5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밖에서 싸이렌 소리만 들려도 집에서 꿈쩍 않을 만큼 소심한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가끔씩 이렇게 발동되는 호기심은 나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회색 카펫에 발을 내 딛을 때마다 오래된 나무 계단의 삐걱 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최대한 닿는 면적을 좁히려 까치발을 서서 천천히 5층 문으로 향했다. 이 집은 지어진지 꽤 오래된 5층짜리 서양식 목조건물이다. 4층까지는 한 층에 원룸이 2개씩, 5층은 한 집만 있어 총 9가구가 살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4층까지는 구조도 거의 동일해서 다른 곳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5층은 사실 처음이라 살짝 설레이기까지 했다.  
        
        열려 있는 문을 조금 잡아당기자 '끼이익'소리를 내며 열린다. 처음엔 환한 빛이 방안 가득 비추고 있어 잠시 눈이 시큰 했으나 곧 익숙해져 집 안을 살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띤 것은 커다란 창문이었다. 왼쪽 벽에 나 있는 2쌍의 창문은 벽의 중반부터 족히 3미터 높이는 되어 보이는 천장까지 트여 있었고, 현관문 맞은 편에도 똑같은 창문이 한쌍 더 있어 환한 빛의 정체를 가늠할 수 있었다. 다크 브라운의 마루 바닥과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벽과 천장이 어울려 꽤나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문의 바로 왼 편에는 마루바닥과 동일한 색상으로 꾸며진 오픈 키친이 마련되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침실인 듯한 방 문이 보였다. 이사한 것이 불과 이틀 전임에도 불과하고 바닥에 하얗게 쌓인 먼지나 천장 구석구석에 드리워진 거미줄은 마치 몇 년은 방치된 것만 같았다. 오른 편으로 나 있는 방문을 열어 보니 넓은 침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맞은 편에는 거실과 동일한 크기에 커다란 창문이 있고 그 옆에 열려 있는 문 안으로 하얀 대리석 욕조가 보였다. 방 한 가운데 떡하니 놓여있는 킹사이즈 침대 위에는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이 또한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은 듯 했다.

        '5층은 정말 크구나'

        아래 층의 원룸 2개를 붙여 놓은 것 보다 커 보이는 집이었다. 아니 침실 하나만 해도 내가 머물고 있는 원룸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정말 일요일에 이사간 게 맞나? 이틀만에 이렇게 먼지가 쌓일 수도 있는 거야?'

        방치 된 집, 혹은 버려진 집, 아니 원래부터 아무도 살지 않았던 집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혹시나 싶어 침대를 툭툭 쳐 보니 먼지가 눈처럼 날아 오른다.

        "콜록 콜록"

        괜히 쳤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손사레를 치며 몸을 돌리는 순간 문득 무서운 생각이 스쳤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여지껏 그 수북히 쌓인 먼지 사이로 보여진 발자국은 이제 막 생긴 내 발자국 뿐이라는 것. 이틀 전에 이사 했으면 분명 여러사람의 발자국이 비췄어야 할텐데, 왜 없을까. 귀신의 집, 얼마전에 빌려 본 DVD에 나왔던 무서운 집이 떠 올랐다. 사람이 갑자기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되면 순식간에 사로 잡혀서 다른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된다고 하더니 짧은 수십초 동안 꼼짝도 못하고 그저 식은땀만 흘려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막 침대 옆에서 발을 떼는 순간 좀 전에 들었던 소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침대 맞은 편 쪽으로 작지만 꽤 무거워 보이는 상자가 떨어져 있었다. 상자 쪽으로 몸을 틀어 발을 옮겼다. 호기심으로 이미 무서운 생각은 머리를 떠나고 있는 터 였다. 5cm정도의 정사면체로 이뤄진 상자는 고급스러운 느낌의 붉은빛이 도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못 같은 것을 전혀 쓰지 않고 이음새 만으로 연결하여 정교하게 만든 것이 꽤나 솜씨있는 사람이 만든 듯 했다. 들어보니 무게도 상당했다.

        '이런게 바닥을 쳤으니 그런 소리가 날 만 하군'

        소리의 정체를 파악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상자 안이 궁금해 졌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이음새만 보일 뿐 정확히 어디로 여는지 어떻게 여는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굉장히 소중히 다뤄진 듯이 긁힌 흔적 같은 것은 찾아 볼 수도 없고, 반질반질 윤도 나니 함부로 부수기도 미안한 생각이 들어 괜히 상자만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이렇게 소중한 걸 왜 놓고 갔을까.'

        어쨌든 상자 주인이 이틀 전 이사 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던 나는 분명 잊고 간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새로 이사오면 버려질 것 같기도 하고, 찾으러 오면 줘야 겠다고 생각하여 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다. 솔직히 그 상자가 무엇인지 너무도 궁금했다. 그 상자의 모양도 범상치 않으니 틀림없이 그 안에도 진귀한 물건이 들어있을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두 시간은 지난 것 같네.. 5층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나..'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는 생각에 다시 허기가 느껴졌다. 우유와 빵을 먹으며 상자를 한참 동안 바라 보고 있었다. 주인이 있다고 믿었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것이기에 열어보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은 당연했다. 허나 역시 주인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간간히 상자를 흔들어도 보고, 슬쩍 책상 아래로 떨어뜨려 보기도 하고, 상처 나지 않는 범위에서 툭툭 쳐 보기도 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한참을 실갱이를 하다가 결국 뭐하는 짓인가 싶어 상자를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노트북 전원을 켰다. 일전에 봤던 면접 결과 메일이라도 오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와 일자리를 더 알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로 봐서 이미 현실로 돌아온 모양이다. 받은 메일함을 열어보니, 역시 새로운 메일은 눈에 띠질 않는다. 혹시나 싶어 스팸메일 쪽으로 가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우울한 기분으로 메일함을 닫으려는 찰나,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는 신호음에 동작을 멈췄다.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상자를 여는 방법'

        제목만으로도 놀라 메일을 열었다. 메일에는 상자를 여는 방법이라고 하기엔 기괴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상자를 열기 위해서는 일주일간 아래 사항을 꼭 지켜 주세요.
        매일 3회(오후1시, 5시, 9시) 물이 가득 담긴 그릇에 상자를 넣어 주세요. 단, 물에 넣기 전 10분 전부터 첨부한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10번 파일을 반복해서 들려 주셔야 합니다. 물에 담근 후에는 상자가 차가우니 몸으로 품어 사람 체온과 비슷해 지도록 해 주세요. 이 때부턴 음악은 끄셔도 됩니다. 매일매일 일주일간 이 것을 잘 지켜 주시면 상자가 열릴 것입니다. 행운을 빕니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가? 살아 있는 식물도 아니고, 게다가 애완동물도 아닌 저 무겁고 둔탁한 상자에 하루 3번씩 물주고 음악을 들려주면 알아서 열린다고?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딨단 말인가. 게다가 저 사람의 패턴을 무시한 룰은 뭐란 말인가. 나보고 취직도 하지 말고 집에서 상자나 보란 말이야, 뭐야? 게다가 행운을 빈다니, 지금 장난하는 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보낸 사람 주소를 확인했다. 장난 같기도 하고 이상해서 메일을 회신해 보았다.

        '도대체 상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당신은 누구요?
        그리고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이 어딨소?
        게다가 내 메일 주소는 어찌 안 것이오?'

        그러나 왠지 회신 메일이 전송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그대로 들어 맞았다.

        '본 메일은 발신자 전용 주소입니다. 회신하실 수 없습니다.'

        발신전용이라니, 카드회사나 전화회사 같은 큰 회사에서나 쓰는 발신전용 메일이라니youknow.com이 도대체 무슨 회사길래. 그리고 캐서린은 또 누구란 말인가. 전에 살 던 여잔가? 그 여자가 어떻게 내 메일 주소를 알았지? 아니 전에 살 던 사람이 여자가 맞기는 한가? 갑작스럽게 추리소설에 등장인물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결말을 모르니 답답하고, 사건 중심에 놓여 있어 불안하니 어찌 해야 할 지 모르는 그런 등장인물. 그렇게 또 한 동안 멍하니 책상 위에 놓인 상자와 노트북 모니터에 켜져 있는 메일만 번갈아 쳐다 보고 있었다.

        '돈 드는 것도 아니니 한 번 해 보지 뭐.'

        마침 5시도 넘었겠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이 들어 메일에 첨부된 음악파일을 다운받아 반복 재생 시켰다. 부엌으로 가서 상자가 잠길만한 큰 그릇에 물을 담아 들고 왔다. 컴퓨터 시계를 보고 있다가 10분이 지나자 물이 담긴 그릇 속으로 상자를 넣었다.

        '나무를 물에 푹 적시면 휘는 원리를 이용한 건가. 꽤나 잘 만든 건데 그러면 좀 아까울 것 같은데..'

        생각과는 다르게 반질반질한 상자 표면으로는 물이 전혀 스며들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이음새 부분 또한 너무도 잘 맞물려 있어 물 한방울 들어갈 틈도 보이질 않았다. 보다 못해 다시 상자를 꺼내자 물방울들이 표면을 데구르르 굴러 떨어질 뿐 물은 전혀 흡수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괜찮은 건가? 더 담가놔도 똑같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는 사이 메일이 도착했다는 신호음이 다시 들렸다. 메일을 열어보니 아까 그 'Katherine'이란 사람이었다.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상자를 그대로 담아 두면 알아서 물을 흡수합니다.'

        메일 본문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마치 메일 제목으로 메신저를 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보다 이 사람은 누군데 내가 하는 걸 다 알고 있는 거지? 어디서 날 지켜보고 있는 건가? 혹시 상자 안에 무선 카메라라도 달려 있는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상자 안 쪽이 더 궁금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냥은 열 수 없는데 부숴야 하는 건가? 일단 상자를 들어 흔들어 봤다. 카메라가 들어 있다면 분명 안에 무언가 흔들리는 소리라도 들렸을 법한데 상자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시 상자를 물이 가득한 그릇에 넣고 멍하니 쳐다 보았다.

        '이 상자는 도대체 무얼까? 그리고 저 메일은 또 뭐냔 말인가? 저 여자, 혹은 남자일런지도 모르는, 저 사람은 누군거지? 어떻게 상황을 그렇게 자세히 알고 메일을 보내 오는 걸까?'

        이런 저런 의문이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있는 와중에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릇에 가득했던 물이 순식간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누군가 상자 안에서 빨대로 물을 빨아 들이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너무도 신기해서 물이 거의 사라졌을 때 바로 상자를 꺼내 살폈다. 상자 표면에 살짝 물기가 남아 있는 듯 싶더니 순식간에 말라 원래상태로 돌아왔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를 본 듯 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상자를 바닥에 떨어 뜨렸다.

        '쿵'

        또 한 번 귀에 익은 무거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뭐.. 뭔가는 상자 안에 있을지도 몰라. 혹시 식물 같은 걸지도 모르지. 물먹으면 부피가 늘어나는.. 뭐 그런 거..아 씨.. 정말 궁금한데..진짜 한 번 깨 봐?.'

        주변을 둘러 봤다. 마땅한 도구가 보이질 않았다. 그때 책 꽂이 중간에 놓여있는 페이퍼 나이프가 보였다. 고전적인 걸 좋아해서 저런게 보이면 모으곤 한다. 딱히 쓸모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일종의 취미 같은 거랄까. 사 놓고 한 번도 쓴 적 없지만. 페이퍼 나이프는 모양은 단도 모양이고 무게감도 있지만, 날이 뭉툭해서 일반 단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뾰족한 날 끝으로 종이 봉투 끝을 뜯어 뭉툭하지만 잘빠진 누운 날로 봉투를 자르는 것이다. 어쨌든 날이 두께도 있고 하니 이 상자에 써먹는다고 해서 휘거나 하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칼 끝을 맞물린 이음새 쪽으로 넣어 보았다. 그래도 틈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허사였다. 틈은 커녕 오히려 칼끝이 튕겨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살짝 열이 받았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상자 표면을 찍어 보았다.

        '쿡. 쿡. 쿡. 쿡.'

        뾰족한 쇠붙이가 나무에 부딫치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나무 표면에도 칼 끝으로 파지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분명 왼손으로 상자의 바닥을 틀어쥐고 있었는데 상자가 휙 회전을 하더니 손 밖으로 빠져나가 바닦에 떨어졌다. 차라리 내 손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지도 모른다. 허나 내 손 안이었다. 힘을 주고 있는 내 손. 누군가 잡아 채 가는 듯한 어떤 힘을 느꼈단 말이다. 아니 상자가 살아 움직였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 이 것은 신기한 일이라기 보단 이상하고 한 편으로는 무섭기까지 한 일이었다. 한 동안 상자를 다시 들어올릴 생각따윈 할 수도 없었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10번의 선율이 귀에 들어왔다. 문득, 물에 담근 후에는 품에 안아 따뜻하게 하라는 글귀가 떠 올랐다. 순간 온 몸에 서늘한 기운이 들었다.

        '저걸 품에 안으라고?'
        
        침을 한번 삼키고나서야 상자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한 쪽 면에 칼 끝으로 찍힌 흔적이 선명했다. 그 모습을 보니 좀 미안한 마음도 들어 무섭다는 생각이 조금 누그러졌다. 나도 모르게 상자를 주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 상자가 미끌어졌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상자를 들고서 어떻게 품는 것이 좋을지 고민해 보았다. 품는다는 것이 좀 꺼림칙했지만, 일단은 입고 있던 추리닝 바지 안으로 상자를 밀어 넣었다. 차갑고 섬뜩한 느낌이 허벅지를 타고 전신에 퍼졌다.

        그리고 다시 메일이 도착했다.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상자가 따뜻해지면 품기를 멈추셔도 됩니다.'

        역시 본문은 비어 있다. 이젠 그러려니 싶은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내가 생각보다 적응이 빠른 가 보다.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추리닝 바지 속에 넣은 상자가 자꾸 걸리적 거려 꺼내서 티셔츠 안으로 넣었다. 그 사이 상자 표면에 선명하게 보여야 할 칼 자국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왼쪽 옆구리와 왼팔 사이에 끼워 미끌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무게 때문인지 자꾸 흘러 내려왔다. 팔로 버텨 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바로 침대로 가서 누웠다. 옆으로 드러누운 채로 있으려니 마치 상자를 껴안고 있는 모양새였다. 어린아이라면 곰인형 따위를 안고 누운 것 같아 귀엽게라도 보이련만.

        '이건 마치 변태 같잖아.'

        아직 차가운 상자 표면의 느낌이 왼쪽 젖꼭지를 타고 느껴지니 더욱 이상 야릇한 기분이었다.

        '아 진짜. 여자랑 한 지도 오래 됐다고..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미친 놈같이..'

        스스로도 우스워 피식피식 거리다가, 또 금새 신세한탄하며 궁시렁 대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니 이미 방안은 깜깜해 져 있었고, 밖도 어둑어둑 했다.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 모니터는 여전히 밝은 채 였다. 멀리서도 메일함에 새 메일들이 꽤 도착한 것 같은 까만 볼딕체의 제목들이 제법 눈에 들어왔다. 방안이 너무 어두워 오히려 잘 보이지 않아 몸을 움직여 컴퓨터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하니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졌다. 게다가 몸은 또 왜이리 쑤시는 건지, 한참을 두드려 맞은 사람마냥 여기저기가 저리고 아프다. 몸살 감기 초기인성 싶었다. 날도 추운데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침대에 마냥 누워서 잔 것이 문제였나 보다. 여전히 흐르고 있는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10번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겉옷이라도 두꺼운 걸 입고 있을걸.. 잠이 들 줄은 몰랐네..'

        힘들게 몸을 옮겨 겨우 책상 앞에 앉았다. 음악을 끄기도 전에 메일함에 도착한 메일 제목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스크롤하면서 내 눈은 놀라움으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상자가 따뜻해 지면 품기를 멈추세요.'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상자가 더 이상 차갑지 않으면 품기를 멈추세요.'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상자가 차갑지 않으면 품기를 중지하세요.'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너무 오래 품으면 위험합니다.'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9시 전까지는 몸에서 떼어 내셔야 합니다. 1시간 전.'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9시 전까지는 몸에서 떼어 내셔야 합니다. 30분 전.'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9시 전까지는 몸에서 떼어 내셔야 합니다. 10분 전.'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9시 전까지는 몸에서 떼어 내셔야 합니다. 5분 전.'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9시가 되었습니다. 상자를 물에 넣어주셔야 합니다.'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9시가 넘었습니다. 상자가 물을 흡수해야 합니다.'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상자가 물을 흡수하지 않은 채 품으면 위험합니다.'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이봐! 당신 생명이 위험하다고! 정신차리란 말야!'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젠장. 또 실패로군.'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하루는 넘길 줄 알았는데....멍청이 같으니라고..'

        9시 10분에 온 것을 마지막으로 메일은 거기서 끝이 났다. 컴퓨터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9시 20분이었다. 메일 내용에 너무 놀라 모니터를 쳐다 보는 것 외엔 정신을 수습할 길이 없었다. 방을 밝힐 요량으로 일어나 불을 켜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진 데다 왼쪽 옆구리가 심하게 아파서 몸을 일으키는 것도, 발을 떼는 것도 어려웠다. 간신히 컴퓨터 모니터 불빛에 의지하며 티셔츠 안 쪽을 살폈다.

        검은 정육면체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 왔다. 아니, 검은 오면첸가? 사면체? 그림자는 점점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가만, 왜 정육면체가 아닌 거지? 나머지 반은 어디 간 거지?'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것이 심장 쪽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실루엣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심장 안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놀라움으로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고, 점점 정신이 아득해 지는 기분이었다. 쇼팽의 피아노소나타 10번이 기괴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니,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10번이란게 있기는 했던가.. 모니터에 눈이 닿았다. 새로운 메일을 알리는 신호음과 함께 메시지가 나타났다. 메일 제목으로 시선을 옮기려던 찰나 바닥으로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보낸 사람: Katherine@youknow.com
        제목: 총 10번째 실패. 상자는 다시 생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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