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빛이 올거야

2015.04.14 20:2104.14


 

1.

ㅇㅇ건축 인력 공사

남자는 오래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3층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비좁은 탁상과 소파, 사람 서너 명이 그 사이에 서있었다. 소장이 알은 체를 하자 꾸벅 고개를 숙이고 빈자리에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검은 손 떼 묻은 수첩을 꺼내고 천천히 한 자 한 자 적어 내렸다. 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폼이 익숙해보였다. 펜이 잠시 멈추자 얇은 종이에 잉크 자국이 검게 났다. 남자는 까슬까슬한 턱을 긁고는 다시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스물일곱 번째. 띄우고 다시, 남은 금액 이십오만 사천 팔백 원. 주사액 25ml. 거기까지 썼을 때 옆에 서 있던 사람이 툭툭 남자의 어깨를 쳤다. 남자는 볼펜을 수첩 사이에 끼우고 점퍼 안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아무 말 없이 사무소를 빠져 나가는 인부들 사이에 남자가 몸을 끼워 넣었다. 조금 더운 공기에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잠시 고찰한다. 이번 약은 잘 들어야 할 텐데. 고통은 있지만 아주 확실하게 세상 하직하는 극독이라고 했다. 조금 남은 수당까지 빨리 벌어야겠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쉴 새 없이 끼쳐드는 자살 욕구로 그 자신이 미쳐버리기 전에.

 

2.

너 요즘 자살 충동 들어?”

 여자의 맞은편에 앉은 이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가 다소 불쾌한 듯 마시고 있던 음료 잔을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한적한 카페 안에는 그들뿐이었다.

그게 지금 다쳐서 온 애인한테 할 소리야?”

설마, 그럴 리가 없지. 그런데 이를 어째. 어제는 다리 부러진 정도로 그쳤지만 이제 구석구석 성한 데가 없어질 거야.”

말 함부로 하지 마.”

? 저번 주에는 나 기다리며 도로에 서있다 웬 화분에 머리 맞고 비명횡사할 뻔 했었지? 주말에는 버스에서 내리다 오토바이에 치일 뻔 했고. 그 덕에 왼쪽 발목 삐었었는데, 오늘은 오른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나타나셨네.”

!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간만에 옳은 소리 하네. 저주받은 년이랑 사귀는 바람에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기분이 어때?”

……너 왜 이렇게 신경질 적이야?”

나 오늘 왜 부른 건데?”

 한동안 눈을 마주치다 시선을 돌린다. 그 모습에 여자는 냉소적으로 코웃음 쳤으나, 테이블 밑으로 꾹 쥐어진 주먹이 초조하게 흔들렸다.

네가 자꾸 이런 식이니까 나도 힘들어.”

 그 떨떠름하면서 미지근한 목소리에 여자는 눈을 감았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3.

처음부터 이러려던 것은 아니었다. 이따금 갈등에 시달리고, 고민에 잠 못 이루면서도, 죽고 싶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조차, 없었다. 지독한 피 냄새, 선명한 감각, 내가 죽고 없는 세상, 그 어느 하나도. 남자는 불쑥 살의가 치밀어 올랐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가슴이 홧홧하게 타오르는 감각은 익숙해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떠밀려 비척거리다 돌아봤을 때 남자에게 남은 것은 권리뿐이었다. 목숨의 권리. 남자는 발코니 난간에 목을 맸다. 덜컹거리며 목이 막히는 순간이 1, 2, 남자는 발코니 난간이 통째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시큰거리는 약품 냄새에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남자는 울었다. 다시 살아나도 흘릴 눈물은 고통임을 깨달았다.

어이!”

부르는 소리에 남자가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굵게 흐르는 땀방울에 앞이 잠시 보이지 않자 엉거주춤하게 멈춰 섰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은 세 번째였다. 자동차 브레이크를 손보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몰았다. 그 경사지고 굽이치는 길들을 멀쩡히 다 돌고 고속도로를 타고서야 브레이크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확신을 한 것은 일곱 번째였다. 음성적 루트를 통해 주사액을 손에 넣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답답한 나머지 병원을 찾아갔다. 그가 팔에 주입한 것은 포도당이라 했다.

어디 몸 안 좋아?”

 쇠파이프를 땅에 내려놓은 인부 하나가 물어왔다. 남자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 선 바람에 감기에 걸린 모양인지 그의 새빨간 코가 눈에 들어왔다.

"돈 안 벌거야?"

 다시 끼쳐드는 독촉은 남자의 정신을 들게 했다. 남자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죽기 위해 구입한 고가의 총들은 죄다 불량품이었다. 자동차를 타고 가드레일을 받으려고 하면 시동이 꺼졌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면 근처 지나던 정의감 넘치는 행인에게 발견되었다. 그는 죽을 수가 없었다. 미칠 것 같지만, 그것이 진실이었다. 씨발. 그는 마지막 권리까지 빼앗겼다.

 

4.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헤어지자.

그 밖의 다른 문장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여자는 어두워진 골목길을 걸으며 그 문자를 확인했다.

나 그래도 너 많이 좋아했었어.

지랄.”

 여자는 씩씩하게 자취방 건물로 들어섰다. 비밀번호를 맞게 눌렀는데도 현관문이 열리지 않아, 그 앞에 주저앉았다. 우두커니 밤을 곱씹었다. 다음날 아침,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을 때, 202호 푯말이 보였다. 그녀의 자취방은 302호였다. 여자는 메마른 눈을 무의식적으로 비볐다. 어쩐지 조금 따갑다. 일어나서 옷을 털었다. 핸드폰 전원을 켜자 문자가 와 있었다. 망설이다 읽었다.

나 지호. 기억나? 옛날에 너 옆집 살았어. 미용실 위층.

여자는 벽에 기대서서 한숨처럼 웃었다. 그다음 문자를 열었다.

우연히 네 소식 들어서 연락했어. 늦은 시간에 미안. 혹시 내일 볼 수 있을까?

문자 잘못 하셨

거기까지 치던 여자의 손이 멎었다. 잠시 옆으로 기울어진 고개 너머로 흐릿한 잔상이 떠오른 모양이다. 동갑인 여자보다 항상 키가 작았던, 검고 동그란 정수리가 생각났다.

오늘 언제?

보내자마자 문자가 금방 왔다.

40분 뒤에. 괜찮아?

여자는 답장을 조금 미루고 싶어졌다. 이어서 떠오른 것은 겁먹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옆집에 맡겨져 있다 구청 직원의 손을 잡고 나서던 때였나. 아이는 엄마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그 당시의 여자는 저를 두려워하는 시선에 면역이 없었다. 부모 죽인 괴물이라는 딱지가 붙은 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처음에는 키우던 고양이가 죽었다. 그 뒤에 키우던 햄스터도, 구관조도 죽었다. 그맘때쯤 여자의 엄마가 기침을 자주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에는 담을 넘어온 야생 동물이 여자가 아끼던 인형을 산산조각내고 도망쳤다.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기간이 짧아졌다. 여자의 손에 닿으면 동물이 죽는다는 소문이 동네에 돌았다. 사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웠다.

고마워.

답신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폰이 꺼졌다. 여자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망가지고, 고통 받다가, 결국엔 죽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여자의 부모도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여자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래서 사랑을 하기로 했다. 비정상적인 행보임을 모르진 않는다.

 

5.

와장창! 커피를 시켜놓고 잠시 졸고 있었던 지호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뒤집어진 테이블 위로 야구공 하나가 굴러다녔다. 카페 유리가 이렇게 쉽게 깨지던가?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갔던 지호가 몸을 일으켰다. 사과를 건성으로 받으며 밖으로 나섰다. 며칠 전에는 머리 위로 물건이 죽어라고 떨어지더니 이번엔 뒤통수를 노리는 건가 싶었다. 시계를 보니 오고도 한참 남을 시간인데 이 여자 또 지각이었다. 그다지 싫지 않은 표정으로 건널목 앞에 서 있던 지호는 갑자기 등에 달라붙는 무언가에 놀라 도로로 뛰어 내려갔다. ! 빠아앙! 클락션 소리에 엉덩방아를 찧자 고양이가 거칠게 울며 그에게서 매달렸다. 코앞에서 내달리던 택시가 멈추는 꼴을 목격하자 생각했던 것보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택시에서 내린 것은 지호가 기다리던 여자였다.

왜 뛰어든 거야?”

 명백히 긴장한 목소리에 지호는 애매한 미소만 흘렸다. 고양이를 멀리 던져두고 여자와 함께 보도로 올라왔다.

고양이 때문에. 별 거 아냐.”

별 거 아니라고?”

 신경질적으로 여자가 되물었다.

. 크게 엉덩이를 찧은 거 말고는 딱히 다친 데도 없고. , 썩 괜찮은 편인데!”

다시 생각해봐.”

뭐를?”

 지호는 어느새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이제 나보다 작네.”

 여자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그리고 다시 뒤통수를 때리는 클락션 소리에 지호는 아연실색했다. 여자가 지호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누구의 농간인지 알 수 없게도, 그러자 고삐 풀린 황소처럼 내달리던 덤프트럭이 지호 쪽으로 머리를 틀었다. 흔한 전봇대 하나 없는 말간 보도를 향해서였다.

아냐, 이건이건!”

지호가 당황한 여자를 보도 안쪽으로 밀치는데 갑자기,

비켜!”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만 다섯 개를 사서 나오던 남자가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마주 달려왔다.

비키라고!”

 그 남자는 지호와 여자를 양쪽으로 밀치고 덤프트럭을 향해 질주했다. 여자는 보도로 넘어졌고 지호는 남자의 옆으로 넘어졌다. 남자는 지호를 훌쩍 뛰어넘더니 팔을 활짝 벌렸다. 삼각 김밥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쪽! 이쪽!!”

 몸을 일으키다 삼각 김밥 하나에 눈을 빗맞은 지호가 다시 몸을 웅크렸다.

지호야!”

 여자의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브레이크를 밟는 끔찍한 소음이 울렸던 모양인지 귀가 얼얼했다. 놀란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바라보았을 때에는,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런, 씨발!”

 남자는 코에 훅 끼치는 더러운 엔진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에 얼빠진 운전자의 얼굴을 쓱 보고 고개를 까딱했다. 팔을 대자로 벌린 남자의 코앞에서 덤프트럭이 멈춰 섰다. 절대 멈추지 않을 것 같던 트럭이. 실제로 남자의 코가 앞 범퍼에 닿기까지 했다. 도로에 드러누워 있었던 지호가 멀쩡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남자와 한데 묶여 치이는 것이 그 찰나 동안 떠올렸던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살았다. 여자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지호는 다가가 끌어안아주었다.

 

6.

남자는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마음 같아선 트럭 기사를 윽박지르고 싶었다. 흩어진 삼각 김밥을 줍는데 한 개가 모자랐다. 고개를 드니 선한 인상의 남자가 하나를 마저 내밀었다. 얌전히 받아들다가 남자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남자는 편의점에 들어가기 직전에 지호를 본 적이 있었다. 그가 편의점에서 습관적으로 김밥을 고르고 계산하고 나오는 동안, 지호는 두 번이나 죽을 뻔 했다. 따라다녀 볼까? 겨우 돈을 모아 샀던 주사액은 적당량 이상을 주사했는데도 불구, 역설적이게도 남자를 힘이 더 불끈 솟게 했다. 브로커에게 가서 따지자 후에 고통은 따르지만 반나절 동안 아주 확실하게 힘이 나는 영양제를 부탁하지 않았냐고 되물어왔다. 너무 화가 나서 돌아오는 길에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 옥상까지 올라갔다. 문이 잠겨 있다. 발로 찼다. 주먹으로 쳤다. 흠집 하나 없는 문을 노려보다가 그 옆의 건물로 씩씩대며 걸어 들어갔었다.

너 이러다 죽을 거야!”

그러지마, 나 멀쩡한데 왜 그래, ?”

너 죽고 싶어? 자살 하고 싶으면 딴 데 가서 하라고!”

 귀가 솔깃해졌다.

며칠 전에는 맹장염이 갑자기 오질 않나, 넋 놓고 걷다가 보드에 미끄러져 뒤통수를 깨질 않나! 차에 치여 죽을 거란 말이야! 안 들려?”

진정해. 일단, 진정하고,”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따라다니자. 남자는 수중에 남은 돈을 만져봤다. 며칠 정도는 적당히 눈 붙이고 적당히 끼니 때우며 따라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7.

어떻게 하면 됩니까?”

 지호는 난데없이 나타나 제 앞자리에 앉는 남자를 쳐다봤다.

?”

당신을 관찰했습니다.”

 남자는 눈을 기이하게 빛내고 있었다.

저는 자살이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되는 겁니까?”

?”

 지호는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어렵게 지호가 말을 꺼냈다. 가엾은 여자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왜 자살이 하고 싶다는 겁니까?”

말씀드리면, 방법을 알 수 있습니까?”

이 기이한 우연이……

우연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남자는 거친 손으로 얼굴을 쓸더니 담백한 어투로 말을 시작했다.

저희 부모님은 꽤 부유했습니다. 외동아들로 저는 딱히 큰 시련 없이 나이를 먹었죠. 아버지는 제게 가업을 잇게 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제가 여잘 하나 만났습니다.”

남자가 처음으로 웃음 비슷한 걸 지어 보였다.

사랑에 빠졌죠.”

제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으셔도 괜찮은 겁니까?”

다시 말했지만 전 자살이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사실 오늘 저녁 밥 걱정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겠죠. 문제는 단 하나. 당신이, 그걸 해결해주리라 믿습니다.”

이 순간에도, 초단위로 사람이 죽고 있습니다. 당신의 죽음은 생각보다 그리 큰 일이 아닙니다. 억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신은 좋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설득은 됐습니다. 그 여자가, 돈을 들고 튀었습니다. 그 이전에, 그 돈은 제가 아버지 회사에서 빼돌린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업 핵심 기술을 타사에 팔아넘겼습니다. 그 여자와 외국으로 도망가려 했거든요. 아버지와의 반목이 깊을 때였습니다. 그런 저를 배신한 겁니다.”

세상에 회한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봐요, 전 당신이 누군지 전혀 모르겠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질 않습니까? 조금만 더 견뎌보세요. 그 후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직 덜 끝났습니다. 아버지는 그 소식에 옛날부터 안 좋던 심장에 무리가 와 그 길로 돌아가셨습니다. 회사는 망했습니다. 그렇다고 저희 가산을 탕진한 것은 아니라 작은 집 정도는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일을 나갔습니다. 저는 그년을 욕하면서 집에서 채팅이나 게임을 했고요.”

………사연 없는 무덤은 없습니다. 그만큼.”

 지호는 말을 더 이어나가고 싶지 않아졌다. 조금 짜증이 났던 탓이다. 생면부지의 사람과 마주하여 이런 얘기를 들을 때가 아니었다. 세상에 저가 제일 불쌍한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호는 더 가엾은 이를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전 폐인이 되어 있었고, 장례식을 치룰 돈이 없더군요. 급한 대로 회사에 취직해보려 했습니다만, 무경력에 나이만 헛든 남자를 받아줄 곳은 생각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제 앞에 앉고부터는 저를 향해 쏟아지는 인적, 물적, 자연적 재해가 일시에 멈춰버린 듯 했다. 그걸 깨닫고 지호는 묘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자살을 원한다면 직접 손목을 긋거나 하는 방법이 있었다. 아까 남자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정확히 3년째에 저는 제 삶이 구차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게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전 자살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죽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

투신을 하려고 했습니다. 옥상 문이 잠겨 있었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매번이요?”

…….”

그게 아니라면 경비원이나 행인에게 걸려 신고를 당했습니다. 옥상에 들어가도 철조망이 2m는 훌쩍 넘게 쳐져 있고.”

…….”

배를 칼로 찌르고, 동맥을 끊어도, 여지없이 저는 병원에서 깨어납니다. 약은 영양제로 둔갑해 있거나 잃어버리고, 실수로 쏟아버리고. 꼭 그렇게 됩니다. 기가 막히질 않습니까? 전 제 마지막 권리도 잃어버린 겁니다.”

아니요.”

 지호는 미간을 문지르며 되풀이해 말했다.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다.

아닙니다! 세상이 오로지 당신을 살리기 위해 돌아가는데 대체 뭐가 그리 억울합니까? 그건 행운이에요. 기적이란 말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갈 행운까지, 인생까지 다 몰아가진 것처럼! 당신이 그렇게 한 번 시도할 때마다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죽어버렸을 지 누가 압니까?”

내 말을 믿습니까?”

 맥이 탁 풀렸다. 화가 솟아올랐다. 아주 먼 여정에 지친 얼굴을 하고, 남자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가진 그 행운? 제가 언제 달라고 했습니까? 빌어먹을 세상! 죽고 싶다는 데, ?”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지호는 혀를 깨물었다. 실수였다. 그녀의 상처를 함부로 입 밖에 내선 안 되는 건데 

그녀라고 했습니까, 지금?”

 남자는 지호를 처음 봤을 때 곁에 있던 여자를 생각해냈다. 그 여자와 관련이 있나.

……죽고 싶을 만큼 괴롭지 않을 리가 없는데. 그래도 살려고 애쓰는 가여운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여기에 남아 있으려고 용을 쓴단 말입니다! 당신의 그 말은 투정으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따라다녀도 괜찮습니까?”

뭐라고요?”

 지호는 정말로 화를 내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보다 남자의 말이 아주 조금 더 빨랐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덤프트럭, 기억 안 납니까?”

 소름이 조금 돋았다. 그 미친 것처럼 달려오던 트럭을 향해 달려갔던 남자. 넘어져 있던 지호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었다.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평온한 웃음을 매달고 있었던. 그제야 지호는 남자가 누군지 깨달았다. 그리고 직전에 멈춰 서던 트럭도 기억해 냈다. 울던 여자의 어깨도. 지호는 제가 내뱉을 대답이 이미 정해져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8.

고아원에서 10년을 숨죽이고 살았다. 행복했던 기억이 마치 전생처럼,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다른 차원의 일처럼, 몹시 아름다운 파스텔 톤으로 그려졌다. 현실은 무채색이었다. 여자는 무감동하게 자라났다. 어떤 것에도 심장이 뛰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무뎌졌다고 여자는 믿었다. 고아원에서 지낼 나이를 꽉 채웠을 때였다. 누군가의 자살 소식이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좋겠다.’ 온몸이 그걸 원하고 있었다.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하지만 여자의 마지막 본능이 여자를 붙잡았다. 그들을 구렁텅이에 몰아넣어놓고 홀로 자유로워질 순 없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해야 했다. 누군가 여자 곁에 오래도록 머물러줘야 안심하고,

같이 살자.”

……?”

뒤늦게 사례가 걸린 듯 지호가 컥컥 거렸다.

우리 집으로 들어와. 집주인한테도 말했어.”

진심이야?”

내가 헛소리하는 거 봤어?”

 여자는 어쩐지 지호와 눈을 못 마주치는 것 같았다. 일주일 째 세상이 너무도 평화로웠다. 지호를 의지할수록 그가 다칠 거라는 것은 마치 하나의 진리이고 명제였다.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는 처음으로 평온한 기분을 느꼈다. 멀쩡한 지호가 애매모호하게 웃고 있었다.

날 좋아하지 않아?”

? ? 아니! 당연히, 좋아하지.”

근데 왜. 싫어?”

? 아니.”

그럼 언제 들어올 거야?”

, 그게 일정을 좀 맞춰봐야 할 것 같아. 이사도 조금, 해야 할 테니까.”

 여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카페 의자에 몸을 푹 기대며 지호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저 여자를 좋아하는 게 맞습니까?”

바로 뒤 테이블에서 남자 목소리가 울렸다. 거의 매시간 남자는 지호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왜 그렇게 묻는 건데요?”

표정이 마냥 좋아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남자라면 일단 좋아하고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

 되묻는 지호의 표정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여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게 싫으면 안 들어와도 돼!”

아냐! 아냐, 왜 그래? 모레 어때, 모레?”

 모레는 금방 왔다. 302호 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바라보며 지호는 잠시 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였다. 내 몸이니까 중요한 것도 있지만, 그게 여자에게도 꽤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301호 문이 벌컥 열렸다.

금방 치우겠습니다.”

 중년인 하나가 앞서서 나오고, 배웅하듯 문가에 선 것은, 남자였다. 지호는 기분 나쁜 듯 인상을 썼지만 이 상황이 자신이 먼저 요구했던 것임을 떠올렸다.

짐 별로 없네?”

 여자가 현관 밖으로 나왔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 .”

남자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옆집에 오늘 이사 왔습니다.”

 여자가 조금 거북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자의 손은 지호가 잡고 흔들어줬다.

뭐하자는 겁니까?”

다 들릴 텐데요.”

 남자는 활짝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서로 볼 일이 많을 것 같은데, 이사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9.

한낮이었다. 쓰레기 수거함 앞에 주저앉은 여자가 보였다. 남자는 이제 얼굴 위에 젖은 손수건 올리기라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다. 손수건을 사러 가려다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자세히 보니 여자는 울고 있다. 단지를 올려다보며 지호가 아직 집에 있던 것을 떠올렸다. 집이니 안전하겠지? 남자는 자신이 제 죽음보다 상대의 안위를 높이 두고 있음을 아직 깨닫지 못했다.

이봐요.”

 여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왜 그런 데서 울고 있습니까?”

저리 가세요.”

 메마른 목소리였다. 지호의 앞에서는 그리도 앙칼지더니. 남자는 그대로 가버리려다가, 여자의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았다.

가요!”

저기 말입니다. 제가 요즘 자살 충동을 느낍니다.”

 여자가 남자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네에?”

 물기 젖은 얼굴에 대고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죽고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남자는 여자가 뽑아준 음료를 들고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멀찍이 떨어져 앉는 여자를 관찰했다.

심장에서 피가 흘렀어요?”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 그런 말 못 들어봤어요? 심장이 후벼 파이고 절망이 온 몸을 짓누르는 그 순간, 사람들은 심장에서 피를 흘린다고 말해요.”

당신은?”

?”

당신은 왜 울었습니까?”

 애초에 그게 궁금해서 여기까지 왔다. 여자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자살로 부고를 알리는 사람 중에, 정말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종종 있어요. 누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아무것에도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때가 사람에게 한 번쯤은 온다. 전 그 말에 공감해요.”

공감한다고?”

한 인간이 어쩌면 일생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이미 느껴버린 것 같고. 그래서 그 어떤 것에도 심장이 뛰지 않는 시간이요. 무감동한 기분이요. 느껴본 적 있거든요.”

그 말은 그쪽도 죽고 싶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래도 난 자살은 안 해요.”

 남자는 여자에게 기묘한 호기심을 느꼈다.

 

10.

가관이군요.”

속 긁을 거면!”

저 다시 갈까요?”

 지호는 지끈거리는 미간을 누르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여자는 서너 시간 뒤에야 집에 오니까 아마 괜찮을 것이다. 남자를 집 안으로 들인 것은, 집에서도 목숨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전등이 깨져 거실 바닥에 파편이 가득했다. 부엌 쪽에는 깨진 그릇만 세 개였다.

당신은 왜 그렇게 죽으려고 합니까?”

 지호가 있는 방의 전등도 깨질까 서성거리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왜 살려고 합니까?”

?”

같은 이치입니다.”

 지호가 일어서려다 카펫에 미끄러지는 것을 남자가 붙잡았다. 남자가 아니었으면 테이블 모서리에 신명나게 머리를 박았을 테고 운 좋으면 즉사했을 테다. 지호는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도로 앉았으며, 남자는 뒤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음 붙일 곳이 그렇게 없었습니까?”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기 전에,”

 남자가 몸을 틀어 지호를 쳐다봤다.

죽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가르쳐 주시는 게?”

그렇다면 도저히 제가 당신을 도울 순 없겠네요!”

왜요?”

너무, 불쌍하니까요.”

지호의 비난 서린 눈을 마주 바라보며 남자는 직감적으로 그게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알았다.

같이 사는 그 여자 말입니다.”

 건성으로 파편을 쓸어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남자가 말을 꺼냈다.

혹시 그 여자와 관련된 겁니까? 날 옆집으로 불러들인 것부터 이상했습니다.”

무슨 상상을 하시는 거예요?”

그 여자와 가까이 있으면, 죽습니까?”

 그때 갑자기 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일찍? 지호는 당황해서 남자의 팔을 붙잡고 밀었다. 얼떨결에 베란다까지 밀려난 남자-전 당신 숨겨진 애인도 아닌데 왜 숨깁니까!-에 문을 닫고 커튼까지 친 지호가 돌아봤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거기서 뭐해?”

오늘 따라 일찍 왔네.”

. 조금 피곤해서.”

 그러면서 식탁에 검은 비닐봉지를 내려놨다.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맥주 캔이었다. 여자가 물었다.

한 잔할래?”

후덥지근한 밤공기에 선풍기를 틀고 지호와 여자는 마주 앉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여자는 술이 약했다. 지호는 여자의 등 뒤로 베란다를 흘긋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몰라.”

뭐가.”

난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 정말로 나는 저주받았으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베란다 밖에서 남자는 다리를 쭉 피고 앉아 있었다. 대화 소리가 다 들려와서 그다지 심심하진 않았다. 투신을 해볼까 내다본 밖은 딱히 높지도 않고 뜰이라서 어디 부러지기나 하고 말 것 같았다.

나 사실 되게 이기적이야.”

 여자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나는 그냥 네가 필요했던 것뿐인지도 몰라. 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다치고, 죽어버리는 동안 그게 내 탓이 아니라고 증명할 사람을 찾았던 거야.”

 여자는 울고 있었다. 베란다를 쳐다보며 지호가 미간을 좁혔다. 여자를 달래야 했다.

너 많이 취했다. 들어가자, ? 그만 울고.”

내 잘못 아니야. 그치? 그냥 그 사람들이, 운이 나빴던 거지? 난 아무 잘못이 없다고. 대답해봐, ?”

내 생각엔 당신 그거 어리광이야.”

베란다 문이 열리고 남자가 조심성 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여자의 고개가 테이블로 떨어졌다. 잠든 것을 확인하고 지호가 벌떡 일어섰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어서 나가요!”

내가 왜? 난 이제 저 여자만 있으면 되는데?”

……뭐라고요?”

옆에 있으면 죽을 걸 뻔히 알고도 옆에 붙어 있어? 그것도 뭐? 여자 죄책감 생길까봐 그렇게 몸을 사렸던 거고? 봐라! 나 이렇게 멀쩡하다! 그러니 넌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행복해져라! 만화 영화 주인공하세요?”

당신! 따라 나와!”

! 난 죽고 싶으니 저 여자가 날 사랑하면 되겠네. 아니면 지 자신이나 사랑하며 살든가!”

입 안 닥쳐?”

 지호가 남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대로 남자는 현관쪽으로 밀려 뒷걸음질쳤다. 

자살 안 하는 게 고결한 일인 것 같아? 그런 인생을 살 바엔!”

 집이 지끈거릴 정도로 현관문이 세게 닫혔다. 거짓말같이 감겨있던 여자의 눈이 떠졌다. 여전히 술에 취해있지만 이지를 잃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아까 전부터 발에 밟히던 것이 있었다. 테이블 밑으로 고개를 숙이자 반짝이는 무슨 조각이 있었다. 고개를 들자 전등 하나가 안 보였다. 콘센트 부분은 멀쩡히 꽂혀있는데, 중간 부분만 날아간 모양새였다. ‘여자 죄책감 생길까봐 그렇게 몸을 사렸던 거고?’ 꿈이었으면 좋겠다. 몸을 옹송그리고 눈을 감았다. ‘자살 안 하는 게 고결한 일인 것 같아?’ 알고 있다.

 

11.

한여름의 늦은 밤, 남자는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다. 여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죽고 싶다면서요.”

…….”

근데 왜 멀쩡히 살아서 남 들쑤시고 다니는데요? 당신도 사실은 무서운 거잖아?”

 여자의 팔을 잡아끌어 현관문을 닫았다. 순간 겁에 질린 표정에 남자가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내가 몇 번 동맥도 끊어보고 했는데, 물론 그 고통은 익숙해지는 게 아니었지. 하지만 너같이 나약해빠진 여자랑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어? 난 씨발,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고. 알아?

, 뭐라고요?”

네 옆에 있으면 죽을 수 있나?”

놔요!”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아끼는’?”

 여자의 공포로 얼어붙은 얼굴을 보며 남자가 말을 잇는다.

그렇다면 난 죽고 싶어 미칠 지경이니까, 일단 나부터 죽여.”

나갈래요!”

 여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날 사랑해, 어서.”

갈 거야, !”

싫어? 그럼 남한테 피해주지 말고 너나 사랑하며 살아.”

싫어!”

아니면 죽어! 죽어버리든지 하라고! 남이 위로 안 해주면 절대 못 살아가는 종자들! 그렇게 힘들면 끊어버리면 되는 목숨!”

현관문이 닫혔다. 남자는 벼락같이 깨닫는다. 텅 비어 있다. 습관처럼 이어지는 죽은 침묵. 오래된 낡은 고통의 기억. 숨 쉬기가 힘들어 한숨이 얕게 뱉어졌다. 사실은, 남자도,

 

죽고 싶지 않았다.

저도 위로받고 싶었다.

그래도 난 자살은 안 해요.’ 그때의 기묘한 온기를. 비난 받아 마땅한 것은 자신임을 깨달으며 남자는 눈을 감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빛이다. 여자가 빛이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마주한 빛이었다.

 

12.

시원한 바람이 이마께를 간질였다. 남자는 어느새 높아진 하늘을 바라보다 걸음을 다시 옮겼다. 낯익은 동네였다. 그저 습관처럼 지나치다 검은 연기를 목격했다.

불났대!”

어머, 어디서? 어쩌다가?”

그거야 나도 모르지! 신고는 했나 몰라!”

크게 났어, 불이?”

 익숙한 길목이었다. 남자는 손목에 걸린 낡은 시계를 한 번 쳐다봤다. 지금 가지 않으면 오늘 수당은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붙박이처럼 땅에 그렇게 서 있기를 수초. 갑자기 귀에 꽂히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사람 아직 저기 있어요! 저 안에 있다고요! 이건, 이건 나 때문이야!”

 남자는 인파를 뚫고 가까이 갔다. 생각보다 불길이 세서 매캐한 공기가 폐로 쑥 들어왔다. 놔요! 여자 하나가 불쑥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본 것은 뒤통수뿐이었다. 아주 낯선 뒷모습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다. 아연한 표정인 경비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누굽니까?”

저 건물 세입자인데.”

 여기에서 남자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물었다.

몇 호 세입자입니까?”

 경비원의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왜 연락이 안 돼는 거야! 이봐요, 아주머니, 그 사람 못 봤어요? ?”

돌아보니 지호였다. 남자와 지호의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 못 봤어요? 얼굴 알잖아요! 여기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는데!”

 남자가 경비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경비원이 지호를 알아보고 새하얗게 질려서 대답했다.

“302세입자였습니다.”

뭐요?”

 지호가 불안에 휩쓸린 얼굴로 되물었다.

안에 사람 있다고 들어갔어요. 말릴 새도 없이.”

잠깐 편의점에 들렀던 건데.”

 얼이 빠진 지호의 손에 과자 몇 개랑 맥주 캔이 들려 있었다. 어디를 가기로 했었던 모양이다. 남자가 불길이 더 거세지는 건물을 한 번 보고 말했다.

제가 한 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미쳤어요?”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지. 더더군다나, 난.

내가 들어가겠어요!”

둘이서 동반 자살하는 것만큼 꼴불견이 또 있겠습니까?”

 다녀올게. 남자는 오랜만에 가벼운 기분이 되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뜨거운 공기가 얼굴을 문질렀다. 올라갈수록 불살이 뜨겁고 눈앞은 흐렸으며, 가슴은 답답했다. 그러다 문 앞에 웅크린 인영이 보였다. 문을 열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여자는 불길 속에서 울고 있었다.

이봐.”

…….”

지호는 밖에 있었어.”

 여자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찬찬히 고개가 다시 스러졌다.

나는 여전히 죽지 못했어.”

한 인간이 어쩌면 일생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이미 느껴버린 것 같고. 그래서 그 어떤 것에도 심장이 뛰지 않는 시간이요. 무감동한 기분이요. 느껴본 적 있거든요. 그래도 자살은 안 해요.

그만 뒀거든.”

 왜냐하면, 거짓말같이 다시 빛이 와요. 다시 가슴이 뛰게 돼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요.

나도 빛을 찾았어.”

 외투를 벗어 여자를 감쌌다. 그 언젠가 샀던 손수건을 여자의 코에 갖다 대 쥐고 있게 했다. 그때 위층에서 끼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장롱 하나가 파편을 튀기며 계단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남자가 여자를 감싸고 눈을 감았다. . 남자는 불에 타오르는 잡동사니에 갇혀 있는 그들을 발견했다. 어둠 속이었다.

살 수 있어. 네 운까지 모조리 내가 가졌으니까. 그러니까,”

거짓말같이 다시 빛이 와요.

네가 나를 사랑했다면 좋았겠지만. 아니어도 좋아. 계속 옆에 있을게. 지호를 지킬게.”

여자가 잦은 기침을 뱉었다. 억눌리는 공기에 남자가 헐떡거리며 말을 계속 했다. 여자가 고개를 가로젓는데도 불구하고 시야가 돌아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말을 했다.

지금 너무 힘이 들어서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아도, 그래도 조금만, 조금만 조금만 더. 부디. 기다려줘. 그러면 빛이 와.”

억겁의 불길이 다 제게 쏟아지는 듯하다. 별이 눈부시고 폐는 쪼그라드는 것 같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참아줘. 견뎌줘. 제발.”

이렇게 힘들다면 그만 놓고 싶은 게 당연했다. 편안해 질 수 있다면 그만 끝내는 게 맞을 수도 있다. 그래도,

조금만.”

 빛이 올 거야.




119skdu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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