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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오늘은 죽기 좋은 날

2015.03.29 17:1903.29

다시 생각해봐도, 죽기 좋은 날은 아니었다.
높은 빌딩에 올라가려 했지만 가기도 전에 경비원들의 제지를 받기 일쑤였고, 그나마 올라갈 수 있는 곳들은 옥상 문이 잠겨있었다. 죽을 때는 허락을 맡아야 되는 것인가 보다.
한강 투신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일구 구급대원으로 복무하셨던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만둔다. 당신은 시체를 강에서 건져내는 일이 제일 고역이라 하셨다. 아버지를 잃은 뒤 이 년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도 남에게 폐 안 끼치는 삶을 강조하셨다.
그렇다고 칼로 손목을 그어버리자니 너무 아프다. 며칠 전에 본 영화에서는 여자가 손목에 칼을 그은 채 욕조에서 죽어가던데. 그녀의 손목에는 이미 그었던 흔적이 가득했다. 상상만 해도 온 몸의 털이 곤두선다. 꼭 손목이 아니더라도 몸 어느 곳에나 칼을 대는 건 정말 끔찍하다. 나는 뾰족한 것이 무서워서 연필도 뭉툭하게 깎는다.
총이라면 확실한 방법이지만, 한국은 총기 소지조차도 불법이다. 우리나라는 너무 안전하다.
넥타이나 줄로 목을 매는 방법은 몇 번 시도해 봤지만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등록금을 벌 때 노가다를 해서 그런가, 힘은 또 어찌나 좋은지 목 졸리는 시간을 못 참고 줄이 매달려있는 기둥째 부러뜨린 적이 왕왕 있었다.
수면제나 엑시트 키트를 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불면증은커녕 어디든지 머리만 대면 코를 골아댔으니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을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인터넷에서 엑시트 키트를 판매하는 곳은 이상하게 실제품 후기가 많아서 신뢰가 안 갔다. 파는 곳도 주로 해외라 구매 방법이 귀찮기도 했다.
차에 번개탄을 피우는 방법은 한동안 텔레비전에서 유행한 자살 방법이었다. 탤런트와 배우들이 인기 감소나 재정 문제를 이유로 차량 안에 번개탄을 피웠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질식사였다. 차 안에서는 꼭 소주가 같이 발견되고는 했다. 심하게 취한 상태로 자다가 질식을 당했으니 딱히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나는 차가 없다. 이쯤 되니 곱게 죽는 것도 돈이 있어야 하나, 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쉽게 죽는 법은 많았다. 한 가지 방법으로 태어나는 게 사람이지만 죽는 방법은 가지각색이었다. 그것만 연구하는 곳도 있었다. 헬륨 같은 불활성 기체를 이용하여 질식사하는 엑시트 키트 등을 손수 만드는 방법이 어렵지도 않았고 인터넷에서는 정말 갖가지 위험한 약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살 방법을 찾아보는 행위는 이제 지적 만족에 불과할 뿐이었다. 나는 옥상에 오르기로 마음을 굳혔다.
 
마음먹은 지 반나절이 지나서야 나는 적당한 옥상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아파트 옥상이었는데, 경비원도 제지를 하지 않았고 높이도 높았다.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아파트 주변까지 둘러보고 나서야 조그맣게 쾌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갑자기 말도 없이 조퇴하고 나온 회사 생각이 났다. 졸업 이후에 간신히 입사한 회사에서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보통 신입사원들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 작은 회사라 동기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일은 많았다. 부장은 말도 섞기 싫은지 이메일로 업무지시를 했다. 외로울 틈도 없이 바빴다. 그래도 월급은 매달 딱딱 정확하게 들어왔다. 야근 수당을 많이 받는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 팀에서 외근 외에 사무실 안에서 하는 일은 거의 내 차지였다. 그래서 내가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내가 섣불리 회사를 그만둘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내 학자금 대출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정말 나도 그만둘 계획은 별로 없었다. 글쎄, 매일매일 도시락 싸는 것이 좀 귀찮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이 정도면 죽기 좋은 곳이잖아. 옥상에서 일 층까지 내려오면서 마음속으로 수 없이 되뇌었던 말이었다. 마지막이군, 하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올라가려는데 세발자전거를 탄 소녀가 나를 피해 옆으로 지나갔다. 아이들이 있다고?
아뿔싸!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어린이 놀이터가 가깝다. 죄 없는 어린이들에게 몹쓸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혹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애가 비뚤어지면 어쩌지. 나는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스마트폰으로 지도 검색을 해서 일일구와 가까운 곳을 찾았다. 그래야 내 시체를 빨리 찾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놀이터와 가까운 곳은 되도록 피해야했다.
 
내 주변 소방서 부근에 아파트가 있는 곳을 검색하니 단 한 곳뿐이었다. 거기까지 걸어서 가려면 또 시간을 한참 까먹는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부르는 손짓을 까먹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택시를 타 본 일이 오래 전이다.
이윽고 택시가 정말로 내 앞에 서자, 진짜 타도 되나하고 잠시 고민을 하느라 주춤댄다. 지갑이 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 나는 행복 이동 희망아파트를 외치며 차에 올라탔다. 택시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흘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좋은 데 사시네.”
별로 말을 이어나가고 싶지 않아서 놀러가는 것이라고 대충 휘갑을 쳐 두었다.
 
친구들은 모였다하면 다들 자기얘기였다. 그곳에는 말하는 사람만 있었다. 여자나 직장 얘기를 하다가 술이 들어가면 정치 얘기를 하다가 더 많이 들어가면 자랑이나 한탄과 같은 자기 얘기가 나왔다. 나는 취한 정도에 상관없이 주로 듣는 역할이었다. 내가 내 힘든 얘기를 하려고 운을 떼면 애들은 지겹다는 표정을 하거나 금세 자기 얘기로 화제를 돌리곤 했다. 고기도 비슷하게 먹고 소주도 비슷하게 먹는데다 술값까지 비슷하게 나누어 내고 있었지만 나는 어째 매번 손해를 보고 집에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친구들과 만나고 돌아갈 때마다 허탈했고,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봐도 술자리에서 떠든 얘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끔 모이자는 연락을 받으면 내가 안 가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술자리에 듣는 사람은 반드시 필요한 법인가보다. 내가 손해를 보는 날짜는 더욱 늘어만 갔다. 모이는 일이 없으면 서로 연락도 잘 안 되어서 평소에 친구들에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친구들에게도 말할 기회가 적다보니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정말 나 자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일은 줄어만 갔다.
 
택시 안 라디오에서는 각계 전문가들이 줄지 않는 대한민국 자살률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중이었다. 분명히 올해도 자살이 최소 한 건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새 경기가 하도 안 좋아서요. 근데 젊은 사람들이 요새는 너무 약해졌나봐. 목숨 값을 너무 얕잡아보는 것 같아. 부모님 생각도 좀 해야지. 사장님도 힘든데, 그쵸?”
말도 안 되는 대상에 비교당하며 낙오되는 친구와 후배들을 생각하니 응당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자살은 좋은 해결책이 아니지만, 지금의 나도 해줄 말이 별로 없었다. 나 역시 최소 오 년은 더 미국 쌀과 중국 김치로 버티며 학자금대출을 갚아야 하는 처지에 무슨. 밥상을 생각하니 갑자기 서러워지는 동시에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했다. 목숨 값을 얕잡아 보는 사람들을 대변하려다, 그러나 나는 그만두었다. 대꾸를 생략하는 데도 불구하고 택시 기사는 희망아파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줄기차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슬슬 지쳐갔다.
 
사천 사백 원이오.”
나는 오천 원을 건네주며 잔돈은 괜찮다고 말해두었다. 선행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잔돈을 가지고 다니기 귀찮아서였다. 어차피 쓸 일도 없을 텐데.
어이구, 고맙습니다. 사장님. 좋은 하루 되세요!”
금방 사라지는 택시 뒤로 나는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행복 이동에 있는 희망아파트는 정말 기사 말대로 좋은 동네로 보인다. 내가 죽으면 집값이 떨어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그것도 귀찮아졌다.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기에는 지금 내가 너무 피곤했다. 피곤할 때는 술 생각이 간절하다. 통장 잔고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근처 지하상가로 내려가서 영국 신사가 그려져 있는 비싼 양주 한 병과 안주거리를 샀다. 사 만원이 넘는 양주 가격에 속으로 뜨악하다가, 이내 침착해졌다. 평소에 먹고 싶었던 닭강정, 조각피자, 즉석 식품을 잔뜩 사서 큰 비닐에 모두 모으자 문득 웃음이 난다. 양주든 닭이든 피자든 이렇게 쉽게 사버릴 수 있었는데. 다 먹지도 못할 양이지만 기분이 좋아진다. 갑자기 일병 때 생각이 나면서 콧속이 잠깐 시큰해진다. 벌써 십 년이나 지났는데.
따끈해진 비닐봉지를 들고 지하상가를 나왔다. 놀이터와 멀고 관리소와 가까운 아파트는 오십 미터 앞에 있었다. 부자 동네 아파트라 그런지 아파트에는 카드 출입 장치가 있었다. 나는 타이밍을 재다가 어떤 젊은 여성이 들어갈 때쯤 뒤에 바싹 붙어 들어갔다. 여자는 잡지에서 튀어나온 모습이다. 흰 블라우스 위에 갈색 니트인지 티를 입은 데다 기괴한 패턴의 흑백 카디건을 아우터로 걸치며 상의를 뽐낸 여자는, 벽돌색 짧은 바지에 허벅지까지 오는 검정 스타킹에 밝은 갈색 부츠로 하의까지 코디를 한 상태다. 근래에 옷을 저렇게 잘 입고, 또 마네킹처럼 옷이 잘 어울리는 여자를 본 적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옷을 찬찬히 뜯어 본 것이다. 주책이라 생각했지만 뇌는 이미 스캔을 마친 뒤다.
여자는 나를 무척 경계하는 눈을 했다. 하도 흉흉한 세상이라 서로가 서로를 못 믿게 된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여자들이 아저씨들을 못 믿는 판국이다. 범인 취급에 기분이 나빠졌지만 워낙 무서운 세상이라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죽지도 못하고 치한이나 살인범으로 신고당하면 초라하고 억울해서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나만 죽일 건데.
엘리베이터를 타자 여자가 먼저 최상층을 눌렀다. 누를 버튼이 없어진 나는 초조해졌다. 옥상으로 갈 뿐인데 이미 사람이라도 죽인 취급을 받을 줄이야. 거울로 흘끗 보니 여자는 스마트폰으로 쉴 새 없이 손을 놀린다. 나는 괜히 민망해서 비닐봉지를 더욱 세차게 끌어안는다.
비닐봉지에서 달큼한 닭 냄새가 나자 여자는 그제야 경계를 푸는 눈치다. 계속해서 나를 의심한다면 그녀는 나를 사람 잡고 닭을 먹는 완전한 사이코패스로 봤다는 뜻이다. 아침 일찍 수염을 깎고 스킨로션을 바르는 귀찮음이 언젠가 도움이 될 줄 알았지. 그렇지만 감히 말을 걸지는 못 한다. 문이 열리면 내가 먼저 나가야지. 나는 엘리베이터가 옥상과 가까워지자 먼저 문 쪽으로 발을 움직였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재빠르게 문을 통과해서 옥상으로 곧장 향했다.
옥상 문을 열자 구름 적고 푸른 하늘이 온 시야에 가득 찬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다. 일할 때 점심시간마다 보는 하늘과 똑같은데 어째서인지 더욱 시원해 보인다.
죽지 않을 거면 비켜요.”
뒤에서 들려오는 공격적인 어투에 나는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길을 내준다. 지나가는 사람은 방금 전까지 엘리베이터에서 기 싸움을 했던, 옷 잘 입는 여자다. 아까는 닭 냄새 때문에 잘 몰랐는데 향수까지 뿌린 듯하다. 여자가 나를 치고 힘차게 난간 쪽으로 걸어간다. 젊은 여자가 무례해서 조금 기분이 나빠진다. 아니 그 전에, 나도 죽으려고 왔는데. 나 역시 난간으로 갔지만 여자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파트 입주민들이 여기서 일광욕이라도 하는지, 옥상에는 의자와 함께 잡지가 놓인 테이블이 있었다. 일단 사 온 건 먹어야지. 난간에 가깝게 의자와 테이블을 옮긴다. 시끄러운 소리에 나를 홱, 하고 돌아본 여자는 다시 난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가 주저앉았다. 저 여자가 정말 죽으려고 온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양주를 비롯해서 여러 안주들을 천천히 꺼냈다. 컵을 사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새삼 우스워졌다. 이상하게 젓가락은 여러 개가 들어있었다. 다 늘어놓고 보니 양이 많긴 했다. 그래도 시간은 많았다. 일몰까지 최소한 여섯 시간은 넘게 남았다. 문득 여자를 보니 이젠 울고 있다. 얼씨구. 죽을 거라더니 예쁘게 입고 와선 흉하게 왜 울어.
가장 먼저 젓가락이 간 음식은 닭강정이다. 매콤하면서 달콤한 소스와 으깬 땅콩, 허브 등이 순살 닭 조각 위에 끼얹어 있는 모양을 보니 그동안 그 광경을 보고도 침을 삼키기만 하고 지나간 세월이 생각난다. 이런 게 다 뭐라고, 라며 겉으로는 시니컬했지만 이내 입에서부터 퍼지는 감칠맛에 온 감각은 다음 닭강정에 집중한다. 한 조각 두 조각 먹을 때마다 발끝부터 뒷목까지 신경이 곤두서다가 이내 평안해지기를 반복한다. 겨우 시장 닭강정 주제에 신체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나는 죽으러 온 것이라고 반복해서 암송하며 마음을 다잡지만 않았어도, 내일부터 내 엥겔 계수는 대한민국의 평균을 넘어 삼십 퍼센트로 치솟았을 지도 모른다. 다리살의 야들야들함과 가슴살의 담백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입 안에서 단체 리듬체조를 하는 형국에 나는 비명 같지 않은 비명을 지른다.
맛있어.”
나도 좀 줘 봐요, 아저씨.”
나는 이번에 정말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통에 닭강정이 목에 걸릴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이미 여자는 내 옆에 앉아서 능숙한 손놀림으로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가른 뒤 닭강정을 입에 넣었다. 근데 그거.
, 진짜네. 맛있어.”
내가 산 건데. 하기사 뭐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여자 눈은 이미 개구리눈처럼 부었지만 꽤 예쁜 편에 속한다. 반반한 여자와 밥을 먹다니. 죽기로 결심하지만 않았어도 그리 나쁜 날은 아니었다고 느꼈다.
아저씨도 죽으러 왔어요?”
나는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조금 귀찮아졌다는 표정이다.
아저씨는 오늘 안 돼요. 내가 먼저 갈 거야.”
죽는 것에 순서가 어디 있냐, 하며 따져 묻는데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붙였다.
아이, 같이 죽으면 무슨 내연 관계라고 의심할 거 아녜요!”
그럼 젓가락 내려놓고 빨리 신발이나 벗어 놓든가. 열 받은 나는 양주 마개를 거칠게 열어 목으로 냅다 들이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나는 컥컥대며 아까운 양주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자살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위스키를 물처럼 마실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리는 없었다. 여자는 그걸 보더니 한참이나 웃는다.
나도 좀 마셔요. 근데 컵은요?”
내가 마시려고 산 거라고. 이 여자의 무례함은 달에라도 닿을 기세였다. 여자는 별 수 없이 입을 안 대고 술을 마시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금빛 위스키가 병 주둥이를 타고 옷에 떨어지자 욕설을 내뱉으며 결국 입을 댔다. 어차피 죽는다면서 그런 걸 왜 따지는 거야. 마른 여자가 어찌나 먹성이 좋은지 어느새 닭강정도 바닥을 보인다. 정말 쉬지도 않고 안주를 먹는데 이제 와서 먹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그냥 놔두었다. 나는 닭강정 대신 피자를 손에 든다.
왜 죽냐고 안 물어봐요?”
남 인생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여자가 얼굴을 들어댄 채 눈을 반짝이며 말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옆 찔려 절하는 기분이다.
나는 그냥 가볍게 즐기고 싶었어요. 대학 때까지 고생 좀 했지만 딱 졸업하고 나니 회사에서 월급 잘 갖다 주니 걱정할 게 없었죠. 연애도 자유롭게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원하는 곳도 양껏 돌아다니고.”
정말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있군. 잘 몰랐는데, 치즈가 고소하다.
근데 갑자기 너무 진지해지는 거예요. 회사에서는 야근에 성희롱이 있고, 전에 내가 차 버린 남자들은 한 트럭인데 이젠 연애에 실패하고, 친구들은 점점 잘 되는데 내 돈은 이상하게 점점 줄어들고... 이번 달에 받은 월급으로는 겨우 저번 달 마이너스를 갚아요. 보너스라도 받지 않으면 돌려막기는 영원히... 내 삶의 붙박이가 되겠죠.”
내가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다고 하자, 여자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난 체크카드를 쓴다고.
요새는 불면증도 생긴데다가 잠을 잘 때 천장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것만 같은 답답한 강박증까지... 그래서 내가 지금 월세가 비싸더라도 복층에서 잔다니까요. 답답한 게 싫어서.”
정말 답답했는지 여자는 흑백 카디건을 벗어 탁자 위에 놓는다. 나는 닭강정으로 가려던 젓가락을 놓고 치즈 육포를 손으로 집는다.
회사를 다녀도 직급은 안 오르고 해고 위기는 점점 높아져요. 회사에서 잘리면 난 끝이에요. 아프기라도 하면 아주 재앙이죠. 꼼짝할 수가 없는데 싸늘한 집에 들어가 봤자 아무도 없어요. 한 번은 끔찍하게 외롭고 서러워서 이삼 일이나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어요. 몸살은 나았는데 너무 울어서 안구건조증이 생길 정도였다니까요. 정말 죽고 싶어.”
말을 하는 그녀의 눈은 살짝 촉촉해진다.
그래도 예쁘게 죽고 싶어서 소개팅 나갈 때처럼 꾸미고 왔어요. 머리는 별로 안 만졌지만 그래도 이쁘죠?”
눈을 바라보면서 말할 용기는 없어서 나는 조그맣게 말한다.
여자는 예쁘다는 말을 정말 듣게 되자 활짝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쳤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 이 웃음이라면 매일 봐도 질리지 않을지도 몰라. 나는 슬슬 몸에 취기가 돌아 조금 대담해진데다, 눈물 젖은 여자 눈이 섹시해보이기도 한다. 입술 주위에 묻은 으깬 땅콩을 떼 주고 싶어질 정도다. 그래, 양주병에 서로 입술도 닿았던 것 같은데. 말 한 마디가 대뇌를 거치지 않고 척수 반사처럼 튀어나온다.
나랑 오늘 밤새 있을래요?”
여자가 호방한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진지하게 대답을 기다리지만 여자는 기어코 웃음을 전부 터뜨린 다음에 짧게 덧붙였다.
 
싫어요. 일단 아저씨는 내 타입하고는 삼백 광년은 떨어져 있어.”
민망함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정말 삼백 광년 정도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다시 양주 병나발을 분다.
그래도 귀엽네. 얼굴만 조금 더 잘생겼으면 연애 많이 해봤을 텐데.”
어린애한테 놀림을 받고 있자니 이젠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도 나는 교양 있게 그만하라는 손짓만 할 뿐이다.
, 정말.”
또 뭔 소리를 하려고. 나는 무신경한 표정을 지었으나 슬쩍 여자 얼굴을 본다.
우울해서 많이 울었는데 아저씨 덕택에 많이 웃었어. 정말 감사해요. 닭강정도 맛있고. 양주도 맛있어.”
사실 나는 양주에서 나는 캐러멜 향이 진해서 계속 신경이 쓰이던 참이다. 비싼 술인데 향으로 냄새를 감추려하다니. 나는 냉정해지려 온 힘을 다하는 중이다.
오늘은 날이 너무 좋아. 하늘도 예쁘고 아저씨 같은 사람도 보고. 오늘은 죽을 날이 아닌가 봐요. 개운한 마음 가지고 가서 진짜 열심히 살게요. 아저씨도 적당히 마시고 집에 가요. 괜히 뛰어내리지 말구.”
열심히 살든 말든. 나는 코웃음을 쳤다. 카디건을 다시 입은 여자는 옥상 문을 열고 계단으로 가면서 인사를 한 번 더 했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여자가 사라지고 정적이 꽤 흐른 후에야 정신이 들었다. 어째 이번에도 손해를 본 느낌이었다. 오늘은 돈을 나눠 낸 것도 아니라서 피해가 막심했다. 왜 내 말은 아무도 안 들어주는 거지. 괴상하게도 오늘은 날이 좋더니만. 세상은 말하는 사람만 가득했다. 나는 다시 닭강정을 입에 넣었다. 차갑다. 아까 그 여자 아우터가 특이했는데. 입술 색깔이 너무 매력적이야. 우유를 가져왔으면 양주랑 정말 잘 어울렸을 텐데. 닭강정은 식어도 맛있네.
아저씨, 여기서 자면 어떡해요.”
졸려서요.”
사고회로를 생략해버린 말이 성대를 지나고 나서야 부끄럽다.
내가 남의 동네 옥상에서 자버렸구나. 손등으로 입 주위를 닦고 고개를 드는데 앞에 있던 사람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다.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왜 아파트 옥상에 올라와 있는지, 하다가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이미 대뇌가 반쯤 알코올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판국에 남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아니 그런데 얘가 치즈 육포를 씹고 있다. 쪼잔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일단 말을 아낀다.
여기서 왜 자고 있어요?”
정말 그러고 보니, 옥상에 올라온 이유가 있다. 나는 무거운 말을 가볍게 해댔다.
저도 죽으러 왔는데요. 공부하는 게 싫어서요.”
이 쬐끄만 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러나 아직은 이성이 있었다. 여염집 자식이라도 귀한 분일 텐데 곧장 윽박지르자니 마음 한 쪽이 불편하다.
아빠, 엄마는 형만 이뻐해요. 형은 공부를 잘하니까요. 근데 전 공부하기 싫어요. 부모님 다 짜증나고... 일단 집을 나왔는데 그냥 콱 죽어버릴까 봐요.”
나는 잠자코 듣고 있다.
여친은 같이 열공해서 좋은 대학 함께 손잡고 가자고 하긴 해요. 근데 전 안 될 것 같아요. 아니 근데 대학가면 다들 헤어진다는데, 제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구요.”
소년은 얼마 남지도 않은 치즈 육포를 다 먹어치웠다.
담탱도 짱나요. 진로 상담한답시고 학교를 적어오라는데 저는 대학도 갈 생각이 별로 없거든요. 재수는 죽어도 하기 싫고. 기술을 배우기도 너무 늦었나.”
잠깐, 내가 죽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내일도 없는데 전혀 친절할 필요가 없잖아. 나는 오늘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소년은 이제 닭강정과 다른 안주들까지 모두 먹어치운다.
안주 더 없어요? 이 아저씨 취향 나랑 잘 맞네.”
!”
나는 일갈을 시작으로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낸다. 중간에 목이 마르면 술을 마셨던 것도 같다. 그러나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모른다. 모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정확하게 기억했다면 상당히 부끄러워서 죽을 지도. 통장 잔고처럼 희미하게 기억나는 것은 젊은 학생에 대한 윽박지름이 절반, 그리고 내 한탄이 절반이다.
 
그 술, 맛있어요?”
아니 그런데 이 자식은 처음부터 내 말을 듣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다시 소리를 지르려는데 학생이 척, 하고 펼친 잡지를 내 코앞에 들이댄다. 옥상에 왔을 때부터 테이블 위에 있던 잡지다.
그곳에는 방금까지 신나게 마셔댔던 양주와 똑같은 상품이 우아하게 놓여 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는 술병과 잡지 속에 있는 술병을 몇 번이나 확인한다. 이게 잡지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술인가. 학생에게 빼앗다시피 잡지를 가져온 나는 광고를 끝까지 읽기로 한다. 상품을 소개하는 페이지 하단에는 “KEEP WALKING”이라는 문구와 함께 영국 신사가 힘차게 걷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으, 술 냄새. 아직 해도 채 안 떨어졌는데 왜 이렇게 많이 먹었어요.”
결국 학생은 술 냄새를 견디다 못해 의자에서 일어나 한 걸음 물러났다. 나보다 절반쯤 어린 학생에게 말을 들었지만 걱정해주는 것처럼 들려서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냥 홧김에 올라왔다가 맛있는 거 먹고 가네요. 다음에도 울적하면 또 놀러 올게요. 술 적당히 마시구 빨리 집에 들어가세요.”
남학생이 대충 인사를 한 뒤 계단으로 내려갔다. 나는 다시 혼자였다. 호박색 양주는 반의 반도 남지 않았고 얼마 남지도 않은 안주는 죄다 식은 상태였다. 정말 오늘은 나가는 것만 있고 들어오는 게 없었다. 나는 난간으로 발끝을 옮겼다. 그런데 또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한 번 더 속아보기로 한다.

다시 생각해봐도, 죽기 좋은 날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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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737 단편 고양이의 보은 별까마귀 2013.12.27 0
2736 단편 히키코모리 방콕기 니그라토 2011.05.06 0
2735 단편 [탄생] 가치의 탄생 징고 2012.03.28 0
2734 단편 블루 제트 (Blue Jet) 숨쉬는 돌 2013.04.25 0
2733 단편 성검의 궤적2 빈테르만 2013.06.15 0
2732 단편 [공고] 2022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명단 mirror 2022.01.20 4
2731 단편 사막으로6 땅콩샌드 2005.12.21 0
2730 단편 여자는 필요없다3 니그라토 2012.12.03 0
2729 단편 [번역]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 마이크 레스닉1 이형진 2011.02.16 0
2728 장편 SOLLV 에피소드 다섯 여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19 0
2727 단편 도둑의 심장 진영 2013.02.05 0
2726 단편 아스텔라 길 빛옥 2013.03.15 0
2725 단편 영원의 빛 (3)1 inkdrinker 2006.05.21 0
2724 단편 변신로봇 V 2013.01.12 0
단편 오늘은 죽기 좋은 날 세유 2015.03.29 1
2722 단편 나비 아이들2 rubycrow 2005.02.23 0
2721 단편 화려한 신부2 시레인 2005.11.10 0
2720 단편 검은 양초1 satia 2006.06.08 0
2719 단편 심야자판기 moodern 2004.08.27 0
2718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10(完) 이니 군 2012.03.2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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