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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지망생의 첫 소설  
이천사는 눈을 떴다.
나네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마치 잠들었다가 깬 것 같이.
‘여기가 어디지 지옥인가?’
이천사는 몽롱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네와 처음 만난 학교 교문이었다. 주위로 망자와 루시드 드리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때 꿈은 잘 꿨어?”
몽롱한 의식 사이로 나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가 왜 지옥에? 다른 사람들은 왜? 모두 죽었어…?”
“여긴 지옥이 아니야. 아직 꿈 속이야.”
“아직 꿈 속? 총에 맞았었는데.”
이천사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총 맞은 흔적 같은 건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도대체 어떤 능력으로 날 살려낸 거지?”
이천사는 놀라는 기색 없이 차근차근 물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살려낼 수 있겠어. 넌 처음부터 죽지 않았어.”
나네가 마지막 말을 힘주어 말했다.
“죽지 않았다니? 그럼 도대체 어떤 능력으로?”
“아까 죽기 전에 말했잖아. 소설이라고.”  
“그게 무슨?”
“소설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나네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소설이라고?”
“그래”
“그렇게 궁금해 하던 내 능력이야.”
“소설이라고? 그럼 지금까지? 모두 꿈, 환상 같은 거였단 말이야?”
이천사가 막다의 품에서 벌떡 일어났다. 막다가 비틀거리는 이천사를 부축하며 설명했다.
“그 비슷한 거지 일방적인 환상이 아니라 환상을 건 쪽과 걸린 쪽의 사고와 생각 바람 등이 복잡하게 공유하는 쪽이지만.”
이천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격렬한 전투를 거치며 파괴되었던 도시가 상처하나 없이 말끔했다. 흰 눈이 어느새 발목이 폭폭 들어갈 정도로 쌓이고 있었다. 이천사가 혼잣말을 했다.
“하긴 천사들이 그렇게 쉽게 당할 리 없지…아니 천사들이 나타나는 것 부터 이상했어. 그리고…”
이천사가 말을 이어가다가 어지럽게 고개를 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천사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큭큭큭큭 어찌됐건 이 모든 게 환상이었단 말이야? 끝까지 빌어먹을, 하하하. 뱃속에 있는 나에게 분명히 기쁘다고 사랑한다고 해놓고는 날 죽여 버린 그 사람들처럼 또 속였어. 큭큭큭큭.”  
이천사는 두 손을 얼굴을 감싸며 한참을 웃었다. 웃음을 이천사의 감싼 두 손 사이에서 눈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흐느낌이 이어지며 두 손 사이로 물기가 흘러내렸다. 그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도 망자들도 천사들도…아무도 죽지 않았어….”
이천사가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나네를 보며 목막힌 목소리로 웃으며 이야기했다.
“다행이다.”

“계속 인질이 되어주지 않겠어?”
나네가 이천사에게 물었다.
“인질?”
그때서야 나네의 손에 총이 잡혀있는 것을 보았다.
‘나 때문에 망자들이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구나.’
주위를 둘러보던 이천사가 방금과는 다른 어른같은 얼굴로 받았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총으로 날 쏠 거야?”
나네가 뜸을 들이며 이야기했다.
“꿈에서 봤어. 넌 인간과 다를 바 없고, 네가 죽으면 이 첫 번째 재앙도 소멸된다는 거….”
이천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쏘겠다는 거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네가 어깨를 으쓱하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럴 마음은 없어.”
이천사가 잠깐 주위를 둘러보다 얘기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바로 쐈으면 좋잖아.”
나네가 아쉽다는 듯 웃음기를 머금으며 이야기했다.
“그럴 걸 널 쐈으면 난 영웅이 되었을 텐데.”
이천사가 새침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인질이 되어줄게. 아저씨가 영웅이 되는 꼴은 보기 싫으니까.”

“빵 빠앙.”
학교 정문 쪽에서 시끄러운 클락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시드 드리머들이 갈라지며 길이 만들어졌다. 그 사이로 검은 대형 승용차가 스르륵 밀려들어왔다. 경호원이 뒷좌석 차 문을 열자 눈이 찢어진 정치인이 내렸다.
짝-짝-짝-
정치인은 박수를 치며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이천사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멈춰섰다. 좌중의 시선이 모이자 주위를 쓱쓱 둘러보고는 외쳤다.
“여러분! 모오두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정치인은 두 손을 아랫배 앞에서 모으더니 손바닥을 엇갈리며 잡았다.‘스읍’ 숨을 짧게 들여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이 충자대한 시기에….”
말을 하는 중간 중간 힘주어 말하는 부분에서 맞잡은 두 손을 탈탈 흔들었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라 마음먹으며 여기에 모여주신 여러분들은 모두 영웅입니다.”
정치인이 하늘을 둘러보며 크게 소리쳤다.  
“지금 꿈을 꾸고 계신 세계의 여러분들 들리시나요? 저 김덕광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 세계의 중대한 위기를 보고 제 몸 하나 보전하며 남아있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과 같이 세계평화를 위해 제 한 목숨 바치며….”
“영웅이고 자시고 전 그런 거 아닌데요.”
루시드 드리머 틈에서 정치인의 목소리를 끊는 외침이 들려왔다.
“큼큼.”
정치인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으려했다.
“…여러분과 같이….”
“전 유명해 지고 싶어요.”
어디선가 웃음소리와 함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정치인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과 같이 이 한 몸 바치고자….”
“거짓말!”
다시 목소리가 이어졌다. 킥킥대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치인은 한쪽으로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경호원에게 눈으로 슬쩍슬쩍 소리가 난 쪽을 가리켰다. 경호원이 머뭇거렸고 정치인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턱을 까닥거리자 경호원이 그쪽으로 바쁘게 걸어 나갔다. 정치인의 뒤로 잠시간의 소란이 일어났고 정치인은 처음과 같은 해맑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에 잠시 소란이 있었는데 서론은 거두절미하고 이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역시 인류 과학의 결정체, 인류가 낳은 최고 최강의 병기…!”
정치인은 추임새를 넣듯 강조해야 할 부분에서 주먹으로 빈 하늘을 툭툭 쳤다.
“마지막은 역시 인류 과학이 만든 최강의 병기 핵·폭·탄입니다!”
정치인의 말에 떠들며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일순 조용해졌다. 정치인이 입가에 웃음을 날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치인이 다시금 손을 모으고 연설을 했다.
“이별은 슬픈 일이나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
정치인은 슬픈 듯 고개를 저었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 모이신 분들의 뜻을 따라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정치인은 제 감동에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저기 웅성거림과 야유가 이어졌다.
“미친놈.”
“꿈에서의 죽음이 현실에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몰라?!”
“죽으려면 혼자 죽어.”
“살려고, 지키려고 온 거지 죽으려고 온 게 아냐!”
욕지거리가 나왔다. 핵폭탄이 터지면 모든 것은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인은 멋대로 자신의 뜻으로 죽음을 강제했다. 마치 미치광이 교주가 신도들에게 순교를 강요하듯.
“잡아!”
“다 죽는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정치인을 제지하려 달려 나왔다. 정치인이 양복 품에서 리모콘을 꺼내 머리위로 들었다. 달려 나오던 사람들이 급하게 멈췄다. 득의양양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정치인이 꾹, 버튼을 눌렀다. 우억. 아무런 대사도 없이 누르다니. 사람들이 놀라 자지러졌다.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치인이 리모컨을 땅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천천히 두 팔을 하늘위로 들었다. 마치 하늘에 무언가를 갈구하듯.  
“여러분! 세계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저는 예수와 같이 이 한 몸 바쳐 세계를 구해내고 싶습니다.”
정치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멍청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치인은 감정에 복받친 듯 입을 쓱 닦아내고는 손수건을 꺼내 두 번 접고는 손수건 끝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여러분도 이 위대한 순교의 길을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정치인은 부드러운 웃음으로 마무리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사람들을 제지하던 경호원들이 정치인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정치인은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 또박또박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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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슬쩍 웃어보였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핵폭탄이 카운트를 시작했다.
경호원들이 달려와 보호하듯 정치인의 곁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미친놈들 당장 멈춰. 죄 없는 사람들 모두 죽일 셈이야.”
가까이 있던 나네가 정치인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곁에 가기도 전에 경호원들에게 내동댕이쳐졌다. 정치인의 입이 또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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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네는 벌떡 일어나 달려들다 다시 경호원에게 내동댕이쳐졌다.
정치인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저격수 자식이 실수만 안 했어도 이런 꼴은 안 당했을 텐데 말이야.”
2
나네는 들었다.
“네 녀석이냐! 당장 멈춰!”
나네의 절규는 아랑곳 않고 정치인의 입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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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의 손이 정치인을 향해 막 달려들 무렵. 금붕어처럼 뻐끔뻐끔 마지막 카운트가 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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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한 쪽에서 큰 빛이 번쩍였다. 정치인은 나네를 향해 만족스레 웃었다. 그리고 나네는 보았다. 정치인이 경호원들과 함께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그 뒤로 큰 빛은 나네를 덮치고 막다를 덮치고 이천사를 덮쳤다. 망자들을 덮치고 살아있는 자들을 덮치고 산과 들과 도시를 덮쳤다. 큰 버섯구름이 일었고 모든 것은 잿더미가 되었다.
산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한다는 핵전쟁 이후의 세상. 말마따나 잠시 전까지 꽃이 피던 세상은 아수라장 같은 폐허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폐허가 된 도시. 정치인이 누워있었다. 양복이 찢어진 채. 정치인이 슬며시 눈을 떴다.
“이놈들 옷 좀 잘 찢어놓으라니까. 여하튼 계획대로 되었어.”
정치인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는 한손으로 땅을 짚고는 일어났다. 그리고는 황망한 대지를 휘둘러보더니 자신의 빈손을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외쳤다.
“내가 살아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진정 제가 살아있단 말입니다.”
한 순간 비틀거리는 시늉을 하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는 땅바닥을 쳐가며 엉엉 울었다.
“모두 죽어버리다니. 나 혼자 나 혼자 살아나다니. 나 혼자 살아나다니. 내가 예수님처럼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다니. 나 혼자 이렇게 살아나다니. 왜 저를 살려주셨습니까!”
정치인은 서럽다는 듯 눈물을 뚝뚝 거리며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정치인은 잠시 침묵하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두 팔을 벌려 큰 소리로 외쳤다.
“기뻐해 주십시오. 세계의 여러분 저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저는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났습니다.”
“살려줘….”
정치인은 깜짝 놀랐다. 슬며시 소리 난 쪽을 바라봤다. 시체더미 밑 구석진 곳에서 작은 머리가 기어 나오려했다. 이천사였다. 정치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여전히 환희에 찬 얼굴로 생각했다.
‘빌어먹을 것 아직도 살아있었나? 망자들이 방패막이가 되었나? 알 수가 없어. 끈질긴 것들.’
정치인은 무릎을 꿇고는 하늘을 향해 두 주먹을 부르르 쥐며 다음을 생각했다.
“이건 기적이야. 이건 기적이라고. 내가 살아나다니. 가장 먼저 죽으려 했던 내가 살아나다니.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정치인은 쇼를 하면서 벌떡 일어나 축구 선수가 세레모니를 하듯 두 팔을 들고는 이리저리 기뻐 뛰며 이천사 쪽을 향했다.
‘엎어져 버리자. 엎어서 짓눌러 버리자.’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를 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정치인은 웃으며 감은 눈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천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다 쿵, 벽에 부딪쳐 뒤로 자빠졌다.
“아이구, 허리야.”
정치인이 짜증나는 소리를 하며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뭐야 이거.”
기다란 그림자가 자신을 덮고 있었다. 토끼 가면이 불쑥 눈앞에 들어와 있었다. 정치인은 다시 한 번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앙칼지게 내뱉었다.
“이건 내가 이긴 게임이야. 정정당당하게 이천사만 나와야지. 이천사 끝난 다음에 삼천사 나오고 사천사 나오고 이래야 되는 거 아냐? 성경에 그렇게 써 있잖아. 그리고 너는 이미 한 번 나왔던 놈 아냐. 하루에 심판 하나씩 아니었어? 한 번 나왔던 놈이 어떻게 또 여기 나타나는 거야.”
그곳에는 대천사가 서 있었다. 대천사 뒤로 삼천사와 사천사가 깃털처럼 날아들었다. 정치인이 움찔 떨었다.
“뭐야 이거 이런 건 반칙이라고 저놈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뭐야 이거.”
“뭐가 반칙인가요? 반칙은 당신 주둥아리가 반칙이에요.”
“살려주세요!”
대천사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정치인의 얼굴이 눈물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빌었다. 대천사가 용서치 않을 것임을 느낀 정치인이 생각을 고쳐먹었다. 정치인이 얼굴이 비굴함에서 일말의 희망으로 바뀌며 숨이 막히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헤헤헤 들었어 왕이 죽으면 심판이 끝난다고, 널 죽이고 구세주가 되겠어. 대천사인 네가 죽으면 모든 심판이 끝나는 거 아냐?”
“그래요. 맞습니다. 대천사가 내가 죽으면 모든 심판이 끝나요.”
대천사가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정치인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대천사의 머리를 향해 쏴댔다. 몇 발의 총알이 대천사의 가면에 박히며 가면이 땅으로 떨어졌다. 대천사의 얼굴이 휘청거리다가 허리를 곧추세워 정치인을 향했다. 정치인이 그 얼굴을 목격했다.
“으아아아아!”
정치인의 얼굴에서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정치인은 발버둥 치며 대천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했다.
“얼굴을 보았군요. 자 이제 날 죽여 보겠어요? 이제 가면이 아닌 제대로 얼굴을 노려봐요. 그래야 죽을 수 있으니까요.”
대천사가 두 팔을 벌려 가슴을 활짝 펴며 정치인에게 다가왔다. 총을 든 정치인의 손이 벌벌 떨려왔다. 대천사가 어린아이를 어르듯 얘기했다.
“진짜 죽는다니까요? 인류를 구해야죠.”
정치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도망갈 생각도 없이 그 자리에서 벌벌 떨었다.

“하하하 내가 저랬다고?”
이천사가 배꼽을 잡으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땅바닥을 기고 있는 정치인을 보며 웃었다. 나네의 손에 핵폭탄의 스위치가 쥐어져있었다. 나네는 정치인이 핵폭탄의 버튼을 누르기 직전 정치인에게 환상을 걸었던 것이다. 정치인의 얼굴이 구겨지고 뒹구는 것을 보고 이천사는 한참을 더 웃었다.

나네와 이천사가 학교 벤치에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이천사가 나네에게 물었다.
“아저씨 정도면 다른 뛰어난 능력도 많을 텐데 왜 굳이 소설? 꿈? 그런 거였어?”
“우선 능력도 안 됐고…원래 날 위한 거였어.”
“아저씨를 위해서?”
“그래, 나를 위해. 그리고….”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
나네가 이빨을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구나.”
“그 언니가 그렇게 좋아?”
“좋다가 보다…뭐랄까….”
나네가 옆에 있는 이천사를 잠깐 쳐다보다가 앞을 보며 입을 땠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멋진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고 했다. 작은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을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나네가 다시 이천사를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너무 못 쓰는 거야.”
나네가 친구에게 얘기하듯 환하게 웃으며 줄줄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솔직히 시 시라기보다 일기였어, 내가 쓰는 일기가 오히려 소설같고 시 같았어. 그 때부터 그녀가 소설을 쓰지 않더니 시나리오를 쓰지 않더니 시를 쓰지 않더니 내가 쓴 일기만 계속 보여 달라고 하는 거야. 그렇게 시를 쓰고 소설을 쓰게 됐어. 형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려 있던 그 때, 처음으로 나에게도 뭔가 잘하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지.”
이천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이천사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네는 괜히 머쓱해져서 실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다가 뭐 형하고 눈이 맞은 거지 뭐 큭큭. 뭐 잘됐지. 열심히 하는 거라고는 글이나 끄적거리는 거 밖에 없는 이런 하찮은 녀석보단 형이 백배 나으니까.”
이야기를 마치며 나네는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었다. 어색한 기분에 나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펴며 딴청을 부렸다. 시계를 보며 괜히 이천사에게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이제 해는 언제나 뜨려나아?”
“응. 30분 정도면 날이 밝아 올 거야.”
“벌써 그렇게?”
“그래 30분.”
“날이 밝아오면 너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침 해가 뜨면 심판이 끝난다고 했지?”
“응…날이 밝고 하루가 다시 시작되면 첫 번째 재앙도 끝나. 다음 천사가 나타나면 나도 사라지겠지. 밖으로 나가 햇살이란 걸 한 번 보고 싶었는데…아쉽네.”
“미안해.”
나네가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며 이천사에게 미안해했다.
이천사가 딴청을 부리듯 눈을 모아 눈사람을 만들며 나네에게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어디서부터 소설이었어? 어디부터 환상이었어?”
나네가 이천사를 향하며 눈을 끔뻑였다.
“궁금한 것도 많다.”
이천사가 나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언니가 나온 때부터였어?”
“그 이전이야.”
나네가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 이전이야? 하긴 천사들이 그렇게 맥없이 죽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럼 어디야? 루시드 드리머들이 나왔을 때인가?”
이천사가 눈사람을 토닥이며 혼잣말로 물었다.
“더 이전이야.”
나네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짧게 대답했다.
“더 이전이야? 그래 이 꿈이 시작할 때부터. 나도 참 바보 같다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던 이천사가 배시시 웃었다.
“아니야 더 이전이야.”
툭 나온 나네의 심드렁한 말에 이천사가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더 이전이라고? 웃기지마.”  
“진짜.”
나네가 뚱하게 말했다. 이천사는 웃음기가 가신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더 이전이면 내 의식이 떠돌던 그곳…빛도 소리도 존재도 물질도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있을 때인가?”
이천사가 애써 웃으며 물었다.
“더 이전이야.”
이천사가 눈사람을 토닥이던 손을 그치며 나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더 이전…?”
나네는 묵묵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짓궂긴…그럼, 내가 낙태 당하던….”
나네가 이천사의 씁쓸한 웃음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전이야. 더, 더 이전!”
이천사의 손이 말없이 눈사람을 쓰다듬었다. 나네가 떠듬거리며 급하게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뱃속의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거기부터야. 너희 부모님이 널 사랑한다는 얘길 뱃속에서 들었다고 했잖아. 그 때부터야.”
“난 낙태….”
이천사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나네가 버럭 소리를 쳤다.
“아니라니까!”
이천사의 고개가 푹 꺾였다.
“미안, 소리 지르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넌 원래 낙태 같은 거 당하지 않았어. 다 내 환상이었을 뿐이야. 꿈이었어.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고 했던 거야.”
이천사가 고개를 들어 나네를 보며 물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그래!”
이천사가 들고 있던 눈사람이 땅으로 떨어졌다. 한동안 말이 없던 이천사가 쌀쌀맞게 말했다.
“흥. 내가 들어본 가장 최악의 거짓말이야.”
눈사람 위로 이천사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천사의 몸이 희미하게 지워져가고 있었다. 이천사의 눈이 감기며 여린 몸이 스르르 나네의 품속으로 기울어졌다.
하늘 위로 별똥별이 떨어졌다.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이천사는 눈동자로 들어오는 별똥별을 향해 소원을 빌었다. 흐려가는 눈앞으로 희미하지만 뚜렷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천사야. 우리 천사.”
이천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랑한다. 천사야.”
아빠와 엄마의 목소리였다. 아직 귀에 또렷한 목소리였다.
“별똥별 님 감사합니다.”
이천사는 두 손을 모아 감사했다. 나네의 마지막 환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학교 교실이었다.
이천사는 교실 중간에 앉아있었다.
‘수업 중인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뒤쪽에는 부모님들이 서 있었다.
‘그래 발표회!’
“천사야 잘해.”
뒤에서 젊은 부부 한 쌍이 이천사를 응원했다.
‘어머니, 아버지? 수업 참관을 하셨구나 아, 꿈인가? 이게 뭐지?’
“천사야 어서 발표해야지.”
선생님의 얘기에 이천사가 생각을 이을 새도 없이 급하게 일어났다.
‘응? 아 그래 내가 발표할 차례지.’
이천사가 또랑또랑하게 얘기했다.
“오늘의 주제는 사랑하는 부모님입니다.”
발표를 끝내자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발표가 끝내고 천사는 엄마아빠와 함께 집으로 걸어갔다. 양손에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교정을 나섰다.  
“오늘은 우리 천사가 좋아하는 자장면 먹으러 가자!”
아빠의 말에 이천사가 신이 나서 얘기했다.
“군만두도 같이!”
아빠가 허리를 숙여 인자한 얼굴로 이천사에게 얘기했다.
“탕수육도 쏜다!”
아빠와 엄마가 이천사의 손을 양손에 쥐고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이천사는 그대로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엄마 아빠의 손에 이끌려 하늘로 올라갔던 이천사가 땅을 밟았다. 이천사의 얼굴에 처음 짓듯 웃음이 만들어졌다. 이천사에게 앞을 보고 걷던 어머니가 이야기했다.
“그런 얼굴이 어울릴 거라 생각해요?”
천사는 놀라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의 입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의 얼굴위로 토끼 귀가 삐죽이 솟아나왔다. 엄마가 고개를 돌려 이천사를 쳐다봤다. 어머니의 얼굴이 토끼 가면을 쓴 대천사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검은 토끼가면이 이천사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으아아아앗!”
이천사는 눈을 번쩍 떴다. 해는 아직 떠오르기 전이었다. 숨을 헉헉 고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천사는 벤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고, 이천사 앞을 나네가 막고 있었다. 그 앞으로 대천사가 서 있었다. 대천사가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비켜라 인간, 환상? 나는 그런 알량한 술수에 넘어가지 않는다.”
대천사가 나네를 향해 다가왔다. 나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천사가 벌떡 소리치며 일어났다.
“비켜, 그러다 죽어!”
나네의 주먹이 부르르 떨려왔다.
“진정해…천재라 불리던 형을 죽인 존재야. 아저씨는 상대가 안 돼.”
나네가 대천사를 주시하며 이야기했다.
“그녀가 그랬어. 나도 천재라고.”
이천사가 의아해서 나네를 바라봤다. 나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희망의 천재라고, 웃음의 천재라고.”
나네가 큭큭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포기하는 건 천재가 아니야. 큭큭큭.”
이천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렇게 날 지키려는 거지….”
“넌 소중한 인질이니까.”
나네의 말에 대천사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안돼.”
이천사의 외침과 함께 나네가 대천사를 향해 뛰어들었다. 대천사의 손이 날아들었다.
‘형은 이런 것과 싸운 건가?’
산같은 위압감에 나네는 달려가던 기세를 잃으며 자신의 무기력함을 실감했다. 순간, 땅 속에서 수십 명의 망자들의 손이 나오며 대천사의 발목을 잡았다. 순간 대천사의 휘청이며 대천사의 날카로운 손이 나네를 비껴갔다. 나네는 그 틈을 비집고 달려 대천사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나네의 주먹이 대천사의 얼굴에 꽂히며 대천사의 가면 한쪽이 박살났다. 가면이 부서져 나가며 대천사의 얼굴이 일부 드러났다. 뒤이어 공격하려던 나네의 주먹이 대천사의 얼굴 앞에서 멈췄다. 그 얼굴을 본 나네의 눈이 총에 맞은 듯 충격에 휩싸였다. 대천사의 발이 휘청거리다 자세를 바로 잡았다. 대천사가 나네를 공격하려 팔을 높이 들었지만 나네는 무언가에 홀린 듯 뒤로 돌아섰다.
이천사를 향해 힘겹게 말하는 나네의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형이 죽음을 택·했·는·지 이제야 알았어.”
대천사가 줄줄이 망자들을 단 채 나네의 옆구리로 손을 날렸다. 나네가 힘없이 뒹굴었다.
“당신은 이천사 다음이에요. 형 곁으로 보내드리지요.”
대천사가 이천사를 주시하며 나네에게 이야기했다. 멍하게 풀린 나네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대천사가 팔다리를 붙잡고 있던 망자들을 떨어트리며 가면을 고쳐 썼다. 그리고 이천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천사가 눈이 표나게 떨리고 있었다.
“하나님 대신에 내가 널 심판하겠다.”
대천사가 손을 들었다. 커다란 손이 이천사를 향해 떨어지려는 순간 수없는 망자가 대천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천사는 순식간에 망자들의 무덤마냥 거대하게 묻혀갔다. 일순, 망자의 무덤 속에서 꽃이 활짝 피어올랐다. 망자들이 순식간에 꼬치가 되어 나가 떨어졌다. 붉은 피를 머금은 꽃이 대천사의 주변으로 환하게 피어올랐다. 아랑곳 않고 망자들이 줄지어 달려들었다. 이천사 앞에서 망자들이 주검이 되어 쌓여갔다. 피가 내가 되어 흘렀다.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이천사의 비명에 일대가 순간 정적에 쌓였다.
“내가 죽으면 되잖아. 내가 죽으면 되잖아!”
눈물을 그렁그렁 흘리는 이천사의 총에 권총이 들려 있었다. 권총은 이천사의 관자놀이를 겨냥하고 있었다.
“미안.”  
이천사의 손아귀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소리가 이어졌다. 사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이천사가 쏜 총구로 붉은 나팔꽃이 팔락, 마술처럼 솟아나왔다. 대천사가 배를 잡으며 우스워했다.
“큭큭큭큭 그렇게 쉽게 죽여줄 것이라 생각했나?”
대천사가 붉은 꽃줄기로 이천사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천사를 학교 교문 밖으로 던졌다. 그렇게 이천사는 꿈에서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쿵. 이천사가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타당탕탕- 옆으로 총알이 콩볶듯이 날아와 박혔다. 이천사는 오들오들 떨며 몸을 웅크렸다. 주위는 매캐한 연기가 안개처럼 뿌옇게 퍼져 있었다.
“발포를 멈춰라. 이천사다. 이천사다.”
확성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총 소리가 멈췄다. 매운 기침을 하는 이천사의 눈에 조심스레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군데군데 포탄자국과 함께 먼저 교문을 나선 망자들의 시신이 아무렇게 뒹굴고 있었다.
주위는 수 겹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발포를 멈추고 조속히 생포하라!”
하늘에서는 전투기가 낮게 날아들었다. 귀를 찢는 날카로운 전투기의 비행 소리에 이천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특공대가 일사분란하게 이천사를 포위해 들었다. 밝은 아침 햇살이 이천사의 겁먹은 얼굴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천사는 흔들리는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낮게 외쳤다.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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